0510 2026 주일설교

부활절 제 6주(어버이 주일, 졸업예배 주일)

두려운 나그네에게

To the Fearful Stranger

베드로전서 3장 13-22절

13여러분이 열심히 선한 일을 하려 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려 하겠습니까? 14혹 옳은 일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더라도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겁먹지 마십시오.” 15오직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하게 모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가진 희망에 관하여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계십시오. 16그러나 답변을 할 때에는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천하는 선한 행실을 헐뜯던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십시오. 17만일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악한 짓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의 죄 때문에 단 한 번이자 마지막으로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께 인도하시려고 죄를 지은 적이 없는 분이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몸은 죽임을 당했으나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19또한 성령으로, 갇혀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20그 영들은 오래 전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리셨으나 순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에 들어감으로써 물을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21그 물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와 같습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드리는 서약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22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쉬운 성경)

13 Now, who will want to harm you if you are eager to do good? 14 But even if you suffer for doing what is right, God will reward you for it. So don’t worry or be afraid of their threats. 15 Instead, you must worship Christ as Lord of your life. And if someone asks about your hope as a believer, always be ready to explain it. 16 But do this in a gentle and respectful way. Keep your conscience clear. Then if people speak against you, they will be ashamed when they see what a good life you live because you belong to Christ. 17 Remember, it is better to suffer for doing good, if that is what God wants, than to suffer for doing wrong! 18 Christ suffered[d] for our sins once for all time. He never sinned, but he died for sinners to bring you safely home to God. He suffered physical death, but he was raised to life in the Spirit. 19 So he went and preached to the spirits in prison 20 those who disobeyed God long ago when God waited patiently while Noah was building his boat. Only eight people were saved from drowning in that terrible flood. 21 And that water is a picture of baptism, which now saves you, not by removing dirt from your body, but as a response to God from a clean conscience. It is effective because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22 Now Christ has gone to heaven. He is seated in the place of honor next to God, and all the angels and authorities and powers accept his authority.(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어버이 주일과 졸업예배를 함께 드립니다. 여러분은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공부하며 나그네로 살아가며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을 품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내가 세운 계획이 틀어지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막힌 길 앞에 서야 했던 날이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돌아가고 싶은 날도 있었고 흔들리는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두 단어가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첫 번째는 나그네입니다. 낯선 땅에 살고 있어서 나그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삶의 주인이 아님을 실감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나그네임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낯선 길에서 흔들릴 때,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허락하셨고 우리의 삶의 방향과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인생을 세워가게 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바로 나그네들이었습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한다고 편지의 서두에 기록합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낯선 땅에서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두 가지를 말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주로 거룩히 모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인용한 이사야 말씀을 보면, “전능하신 만군의 주, 오직 그분만이 네가 거룩하다고 여겨야 할 유일한 분이시고, 네가 두려워할 유일한 분이시며, 또한 네가 무서워할 유일한 분이시다 “(사8:13)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거룩히 모시는 것, 그것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길입니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세상의 어떤 두려움보다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사건속에 이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은 400년간 애굽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출애굽의 그 순간에도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길을 막고 있었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맹렬히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완전한 막다른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바다를 여셨습니다. 가장 절박한 순간,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구원을 그들로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경쟁사회 속에서 쫓아오는 압박들로 인해 두렵고 조급해 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막다른 그 자리, 두려움이 깊어지는 순간에 바다에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갈라진 바닷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증거였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흔적이 남습니다. 바다가 갈라진 자리에 길이 생겼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건짐 받은 삶에도 그 증거가 나타납니다.

죄와 죽음에서 건짐 받은 성도는 세상 속에서 선한 일을 향해 살아갑니다. 베드로는 선을 행할수록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을 복으로 여기라고 합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합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9-10)

세상을 살면서 낙심할 만한 상황을 만날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지니고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선을 행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과 선한 일은 분리 될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새롭게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말씀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도록 오래전에 이미 예정해 두셨습니다.(엡 2:10)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한 일을 행하는 삶, 그것이 구원받은 자가 마땅히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주신 구원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순종을 받으시고 그 은혜를 깊이 누리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구원 안에서 맺어지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베드로는 두려워 하지 않을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거룩하게 모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주로 인정하여 구별된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내 삶의 주인이 되면 세상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살아가면 더이상 세상의 죽음의 권세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세상은 엄격한 법과 질서로 유지하지만, 세상의 힘은 사람의 영혼까지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과 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삶” 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은 마음의 공허를 채우려 수학 연구에 더욱 몰두했지만 외적 사물에 관한 학문을 고뇌할 때 영적인 위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그 경험을 양피지에 적어 평생 안주머니에 꿰매고 다녔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철학자나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고, 생명의 근원인 주님을 버렸었도다. 원컨대, 나 영원히 주를 떠나지 않으리.” 그를 무릎 꿇게 한것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경외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소망의 이유를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학문 너머의 그 뿌리를 봅니다.  우리가 배우는 지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방향을 얻을 때, 지식은 지혜가 됩니다. 그 지혜가 소망의 이유를 말할 수 있게 합니다. 베드로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15오직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하게 모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가진 희망에 관하여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계십시오. 16그러나 답변을 할 때에는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천하는 선한 행실을 헐뜯던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십시오.

이번주 한 청년의 부모님을 뵈었습니다. 자녀를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마음이 마치 아이를 강물에 띄워 보내는 것 같았는데 역청으로 갈대상자를 보호하듯 교회의 공동체에서 잘 견딜수 있었다는 마음을 전해주셨습니다. 낯선 땅에서 살아갈 자녀를 생각하며 홀로 기도하셨을 그 시간, 학비를 내야할 때마다 마주해야 했던 현실의 무게를 기도의 자리에서 감당하셨을 것입니다. 멀리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운 분들이 계십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홀로 견뎌야 했던 분들, 그 그리움을 가슴 안에 묻고 살아가는 분들, 하나님은 그 자리도 아십니다. 자녀를 외국에 보내놓고 손이 닿지 않는 자리를 기도로 채울 수 밖에 없었던 부모님들의 눈물의 기도가 우리 교회를 향하고 있습니다. 맡겨진 한 영혼을 더 소중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신실하게 붙드는 것이 우리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이제 보스턴을 떠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교우들은 낯선 땅으로 향하게 될텐데, 그 걸음이 새로운 부르심의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정든 곳을 떠나는 아쉬움의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 받은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강의실, 실험실, 가정, 직장 그 자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삶이 되도록 살아가십시오. 어떤이들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첫 날을 기억할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자리에서 기도로 버텨냈던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고, 혼자 성경을 펼치고 홀로 기도해야 했던 그 자리에서부터 예배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작은 기도의 방에서 우리는 온 열방과 민족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주안에서의 헤어짐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뻐하며 기대하는 파송의 시간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가장 가까운 가정에서, 작은 일상에서 시작됩니다. 기도의 자리는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나의 자녀들이 사방이 막힌 것 같은 길 앞에 서는 날이 온다면 그때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의 자리를 지켜내십시오. 믿음은 혼자 끌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기도를 보고 자란 자녀는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자랍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삶의 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일주일 한 번의 예배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훈련이 쌓여 단단한 믿음의 뿌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혼자 감당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의 뜻을 함께 받아들이고, 함께 사랑하며, 함께 이루어 가도록 공동체를 허락하셨습니다

세상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우리는 작고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그 자리에 서 계셨던 분이 계십니다. 주님도 두려우셨을 텐데, 피하고 싶으셨을 텐데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십자가의 사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이 지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세상의 지식을 지닌 자들에게 어리석어 보여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비록 눈앞의 상황이 우리를 두렵게 하더라도 묵묵히 선을 행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보다 훨씬 더 크신 분임을 알게 됩니다. 사명은 위에서 누르는 짐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자리입니다. 일상의 자리가 늘 평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씀합니다. 우리의 고난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있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 서면 내 아픔으로 타인의 부족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솔직히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사랑의 길을 걷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여전히 그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섬길수록, 자꾸만 내가 먼저 서려 합니다. 불편한 자리는 피하고, 편한 자리를 택하려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도 삶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 그 간격은 우리의 힘으로 좁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피하지 마시고 주님을 가장 깊이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의 죄로 인해 죽으신 주님을 한 번 더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두려워하는 나그네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짐을 없애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짐을 지고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두려운 나그네의 삶 위에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은혜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새롭게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혼자 감당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도록 공동체를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아직 그리스도를 삶의 주로 모시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믿음의 초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그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이웃을 아끼고 돌보는 성도로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나그네 길이 낯설어도 두렵지 않도록 앞서 가시며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0503 2026 주일 설교

부활절 제 5주

하늘을 보면 주님이 보입니다.

Heaven Opened, Christ Revealed

사도행전 7장 55-60절, 베드로전서 2장 9-10절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59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55 But Stephen, full of the Holy Spirit, gazed steadily into heaven and saw the glory of God, and he saw Jesus standing in 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 56 And he told them, “Look, I see the heavens opened and the Son of Man standing in 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 57 Then they put their hands over their ears and began shouting. They rushed at him 58 and dragged him out of the city and began to stone him. His accusers took off their coats and laid them at the feet of a young man named Saul. 59 As they stoned him, Stephen prayed, “Lord Jesus, receive my spirit.” 60 He fell to his knees, shouting, “Lord, don’t charge them with this sin!” And with that, he died.(New Living Translation)

9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며 왕의 제사장입니다. 또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홀로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심을 선포하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10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전에는 은혜를 몰랐지만, 지금은 은혜를 받고 누리고 있습니다. (쉬운 성경)

9 But you are not like that, for you are a chosen people. You are royal priests, a holy nation, God’s very own possession. As a result, you can show others the goodness of God, for he called you out of the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10 “Once you had no identity as a people now you are God’s people. Once you received no mercy now you have received God’s mercy.”(New Living Translation)

칼빈은 사도행전을 ‘거룩한 역사’라 불렀습니다. 박해와 고통 속에서도 교회가 세워져 가는 그 과정을, 칼빈은 거룩한 역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기 교회를 친히 돌보시는 역사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 교회로 부터 유대지역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인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역사가 왜 성령을 통해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되었습니다. 인류는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며 하나님께 도전했고, 그 교만의 결정체인 바벨탑은 결국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결과 언어가 혼잡해 졌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도 서로에게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벨탑을 쌓기 위한 목적으로 모인 연합은 겉으로는 함께해도 속마음까지 하나 되지는 못합니다. 이해관계가 바뀌면 흩어지고, 내 뜻이 꺾이면 돌아섭니다. 죄의 본성은 언제나 자신이 중심이 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의 연합은 다릅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내가 중심이 되려는 욕구를 내려놓습니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완고함, 용서하지 못하는 완악함을 성령께서 소멸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죽음의 권세로 부터 건져내시고, 믿음이 우릴 뒤돌아서지 않게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던 일들이 새롭게 행해지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서로 다른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흩어진 사람들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두 가지 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서 계신 주님을 보았던 것과 하늘을 본 사람이 용서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의 역사에 비하면 짧은 여정이지만 성령이 임하면 삶 가운데 죽음의 힘을 이기는 뜨거운 열정이 임합니다.

세상에는 억울함을 외치는 사람도 있고,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고, 말없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위해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기도는 죽음을 이긴 고백입니다. 순교의 장면 가운데 돌에 맞아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 스데반 집사님의 입술의 고백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였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핍박과 박해, 죽음이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사람에게 하늘을 여시고 죽음을 이기는 고백을 주셨습니다.

1.하나님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대와 설렘이 있습니다. 말씀을 알아가고 싶고 섬기는 것이 기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열심이 익숙함이 되고 하나님을 찾기보다 내 습관의 열심으로 의무를 다하게 됩니다. 열심과 섬김의 자리에서 익숙함이 무뎌짐이 되고 의무가 되고 무감각이 찾아 옵니다. 실망과 상처가 자리하면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딘가에 있습니까? 56절을 보십시오.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스데반 앞에서 주님이 서 계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는 갈등이 있고 재정의 압박이 있고 예상치 못한 사고와 질병이 있습니다.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던 그 산에서, 모세의 광야 40년의 시간 속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어 있던 그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한번도 그들을 버려둔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뿐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자신이 어떻게 세상에 왔는지 모릅니다. 그저 밥상이 차려지면 먹고, 잠들면 이불을 덮어 주는 손길을 당연히 여깁니다. 그 손길이 사랑인지 어떤 헌신인지 모르고 자랍니다. 그런데 어른이 된 후에 삶의 무게를 알아가는 날 그 사랑과 헌신을 깨닫게 됩니다. 아이를 낳는 순간 친정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아이를 낳는 기대와 설렘으로 기뻐하다가 그 고통 앞에서 비로소 어머니의 고통을 몸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은 가장이 되어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다가 말없이 걸어가시던 무뚝뚝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이해하게 됩니다. 부모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스데반의 눈도 그렇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해하던 메시야의 이해보다 한 걸음 앞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이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가 구약의 인물을 빗대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을때 유대교인들은 신성 모독적 발언으로 이해했습니다. 이후 이성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에 의해 그 즉시 처형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그 순간에도 자신에게 향하는 돌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바로 알았기에 죽음도 그를 이길수 없었습니다. 성령이 그의 눈을 열어 서 계신 주님을 보게 했던 것입니다.

2. 하늘을 본 사람은 땅에 묶이지 않고 세상으로 파송되어 살아갑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율법을 알았고 성경을 알았던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의 구조가 흔들리고 위협받자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습니다. 듣지 않겠다는 의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길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방향은 분명한데 그 길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나기도 하고, 숨겨져 있던 암초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이후 안정되어 가던 예루살렘 지역 교회에 엄청난 박해의 광풍을 몰고 오게  됩니다. 성도들은 박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흩어졌지만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 된 것입니다. 흩어진 자리였지만 보냄 받은 자리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 열심이 교회를 핍박하는 데 쓰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울을 바꾼 것은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설득도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그 열정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선교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예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때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고 가장 깊은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1806년 미국 부흥의 시기에 뉴잉글랜드 리치필드(Litchfield)지역 윌리엄스 대학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다섯 명의 청년이 강가에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비를 피해 건초더미 속으로 몸을 숨겼고, 건초더미속에서 기도를 하는데 성령께서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가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고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그 기도회가 수많은 청년들이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한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른 것을 봅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기도는 원망이 아니라 용서였습니다.

그 용서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했던 기도와 동일한 기도였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34) 스데반은 자신이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용서도 사랑도 결심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받은 은혜를 기억할 때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논리로 설득되지 않습니다. 설명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용서하고 사랑할 때 복음이 전해지게 됩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죄를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용서의 기도를 올려 드릴 때 교회의 본질이 살아납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에는 은혜보다 상처가 더 깊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하는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면서도 혼자 안고 있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 있다면 하나님이 기억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상처는 오래되면 마음을 차갑게 만듭니다. 귀를 닫게 하고,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홀로 감당하지 않고 함께 나누어 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한 몸으로 부르셨습니다. 용서의 기도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면 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은 은혜 받은 자의 기도를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59절과 60절입니다. 59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우리의 기도는 나의 한계를 마주하는 그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스데반은 그 한계의 자리에서 자신의 죽음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 왕의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을 드렸습니다.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제사장의 직무였습니다. 스데반은 돌이 날아오는 그 자리에서도 예수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었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받아 들였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선 것입니다. 하늘을 본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였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제가 처음 외국 땅에 왔을 때, 의지할 곳도 없고 낯설고 힘든 상황 속에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6개월 된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아빠인 저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의 답을 제 안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때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을 붙들게 하셨습니다. 붙들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서 그 낯설고 외로웠던 그 시간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낯선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전히 낯선 사람들을 내 마음에서 빼내지 말고 그대로 두시고 기도하십시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흩어진 나그네 디아스포라로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경쟁하기 위해 보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이 자리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이 선교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자녀들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 자리가 우리의 선교지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신 이유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그 사람을 위한 기도의 자리에 서십시오. 내 마음에서 품기 어렵다면 주님께 맡기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땅을 떠나는 순간에도 그는 고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의 죽음을 ‘잔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교회됨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공동체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매년 5월이 되면 함께 했던 지체들이 새로운 곳으로 떠납니다. 이민 교회에서 떠나보냄은 익숙해질만도 한데 매번 아쉽고 마음이 쓰입니다. 어떤 헤어짐이든 빈자리는 늘 마음에 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셨고, 서로의 삶을 중보하는 삶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떠남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함께 울었고 함께 배우며 웃었습니다. 그 시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그 자리를 함께 했다는 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제 새롭게 떠나는 그 현장에서도 계속 하늘을 보는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떠나보내는것도 아쉬운것이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모든 만남과 헤어짐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변함없이 우리의 자리에서 하늘을 보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셨다면, 주어진 어떤 상황에도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는 순간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을 본 사람은 상황의 어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씨앗은 땅에 묻혀야 열매 맺습니다. 하나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 힘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끝까지 의탁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땅을 보면 땅의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보면 주님이 보입니다. 하늘을 보면 주님이 보이고, 주님을 보면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면 용서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삶을 나누고, 서로의 짐을 함께 지며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심으십시오. 죽음이 생명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늘을 보십시오. 주님이 보입니다.

0426 2026 주일설교

부활절 제 4주

목자의 품으로

Home in the Shepherd’s Arms

베드로전서 2:19~25

19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지라도 공의로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딘다면,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20 그러나 악한 일을 저지른 탓에 그 죄로 매를 맞고 참는다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다만 옳은 일을 행하다가 핍박을 받고 참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21 ○ 바로 이런 일을 위해,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몸소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여러분들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22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죄를 지으신 적이 없고, 한 번도 그 입에 거짓말이라곤 담으신 적도 없는 분이십니다. 23 사람들은 그분에게 온갖 모욕을 가했지만, 그분은 아무런 앙갚음도 하지 않으셨고, 사람들은 그분을 학대하고 핍박했지만, 그분은 아무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분께서는 모든 일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전부 맡기셨습니다. 24 또 그분께서는 몸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분께서 매를 맞고 상함으로써 여러분이 낫게 되었습니다. 25 전에는 여러분이 길 잃은 양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쉬운말 성경)

19 For God is pleased when, conscious of his will, you patiently endure unjust treatment. 20 Of course, you get no credit for being patient if you are beaten for doing wrong. But if you suffer for doing good and endure it patiently, God is pleased with you. 21 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22 He never sinned, nor ever deceived anyone. 23 He did not retaliate when he was insulted, nor threaten revenge when he suffered. He left his case in the hands of God, who always judges fairly. 24 He personally carried our sins in his body on the cross so that we can be dead to sin and live for what is right. By his wounds you are healed. 25 Once you were like sheep who wandered away. But now you have turned to your Shepherd, the Guardian of your souls.(New Living Translation)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는 억울함과 쉽게 풀리지 않는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부당한 일로 인해 겪었다면 그 상처는 더 깊게 남겨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2장은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지라도 공의로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감정의 자리가 아닌 부르심의 자리로 이끌고 갑니다. 성경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본훼퍼는 옥중서신 ‘저항과 복종’에서 “영혼을 걸고 고난을 받는 것에 비하면, 육신의 생명을 걸고 고난을 받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영혼의 건짐을 받는 성도라면, 우리는 고난에 집중하기 보다 고난을 실제적으로 체득함으로 타인의 고통에 더 집중해야 할 것이며, 까다로운 사람이 되기 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고난을 통과함으로 마음의 크기를 더 넓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자리는 감정의 자리가 아닌 부르심의 자리가 됩니다.

1. 억울함은 우리를 목자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먼저 본문의 앞 절 18절을 보겠습니다. 18 ○ 종들이여, 모든 일에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선량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 뿐만 아니라, 까다롭고 못된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십시오. 당시 종들 가운데에는 일부러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으면서도, 그 고통을 묵묵히 견디며 동료들 앞에서 강인함을 과시하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말합니다. 잘못을 행하고 매를 맞으면서 참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받는 고난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결과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말하는 고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의로운 고난입니다. 죄를 짓는 고난과 선을 행하다 받는 억울한 고난은 본질이 다릅니다.

본문의 19절과 20절에 두번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원어는 ‘χάρις'(카리스) ‘은혜’ 라는 단어입니다. 킹제임스(KJV)성경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acceptable)으로, NIV 성경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commendable)으로 번역했습니다. 억울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드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삶을 아름답게 빚어 가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21절에서 그 근거를 말합니다.

21 ○ 바로 이런 일을 위해,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몸소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여러분들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억울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은 단순한 인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것은 낯선 길에서 먼저 걸어가신 그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대로 따라 걷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면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왜 몸소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살길을 내시고 갈길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생각하며 그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몸소 고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부당한 모욕과 수치를 분명하게 당하셨고, 찔림과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22절과 23절을 보십시오. ’22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죄를 지으신 적이 없고, 한 번도 그 입에 거짓말이라곤 담으신 적도 없는 분이십니다. 23 사람들은 그분에게 온갖 모욕을 가했지만, 그분은 아무런 앙갚음도 하지 않으셨고, 사람들은 그분을 학대하고 핍박했지만, 그분은 아무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분께서는 모든 일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전부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벗어날 능력이 있으셨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인간은 고난이 올때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고난의 상황을 바꾸려고 합니다.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은 멀게 느껴집니다. 그때 억울함만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환경과 사람이 먼저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전부 맡기셨습니다.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은 다릅니다. 고난과 억울함 속에서 우리는 목자로부터 멀어지려 하지만 목자는 우리를 끝까지 찾아 오십니다.

2. 목자는 길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오십니다.

양은 본래 방어 능력이 없는 동물입니다. 뿔도 없고, 발톱도 없고, 날카로운 이빨도 없습니다. 양의 유일한 안전은 목자 곁에 있는 것입니다. 무리에서 벗어난 순간, 그 양은 이리떼의 가장 우선적인 표적이 됩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리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교회가 답답하고, 사람들이 싫어집니다. 고난이 우리를 목자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면 헌신은 짐이 되고, 섬김은 의무가 되며, 감사는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죄 없는 자신의 아들을 불의한 세상 한복판으로 보내셨습니다. 가장 억울한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을 회복하셨습니다. 세상이 내놓은 답은 우리를 더 강한 자리로 이끌지만, 하나님이 내놓으신 답은 십자가였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힘과 성과로 복음을 대체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당한 세상속으로 친히 들어오신 주님은 인간의 삶에 가장 확실한 기쁜소식입니다.  ‘목자’(ποιμένα,포이메나)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낼 때(시 23:1)쓰였고, 신약성경에서는 구원받은 자들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마 25:32;요 10:14;히 13:20)

본문 속의 흩어진 나그네들은 훨씬 혹독한 자리에서도 목자의 품을 붙들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당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기쁜 소식 즉 εὐαγγέλιον, (유앙겔리온)을 선포했습니다. 로마제국 곳곳에서 구원자로 불리우며, 복음이라는 단어는 황제의 출생과 즉위식에 관련되어 사용했습니다. 로마는 황제의 힘으로 평화를 유지했고, 신의 아들로 숭배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 가장 낮은 자리에서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복음을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식민지 통치 아래 고난 받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인이시고, 세상의 주인이시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당시 유다 변방에서 태어난 나사렛 예수를 구원자요, 기쁜 소식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목숨을 건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나그네들은 억울함과 부당함속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인내했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믿음의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거룩한 씨앗이 되었고, 그 복음은 지금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통해 전해집니다. 세상은 힘으로 증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성도는 한없이 쏟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머물때 십자가 정신의 선교적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4 “또 그분께서는 몸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분께서 매를 맞고 상함으로써 여러분이 낫게 되었습니다.”

상처는 우리의 마음의 문을 닫고 예민해 지게하며, 현실의 불안은 우리를 냉소적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무리에서 벗어났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아침식사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길 잃은 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답답한 삶에, 분주하여 감동을 잃어버린 삶에, 다 알면서도 바뀌지 않는 그 자리에, 여전히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는 그 자리에 주님은 끝까지 찾아 오십니다.

우리가 목자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내 힘이 회복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를 먼저 찾아오신 목자의 은혜 때문입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영원히 보호해 주십니다.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될때, 영적으로 우리는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일에 동참하도록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너무도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속적으로 위태롭게 하는 것들이 세상에는 존재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주어진 삶을 사랑합니다.

베드로전서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그 편지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전해집니다.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다시 흩어질 것입니다. 주일의 은혜가 월요일 아침의 시간까지 이어지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삶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상황 가운데 놓여 있기도 합니다. 그 세상의 자리가 때로는 차갑고, 억울하고, 부당하고 홀로 있는 것만 같은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25 전에는 여러분이 길 잃은 양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죽음을 넘어 우리를 소망으로 이끄십니다.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 이들은 행복과 불행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진리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며, 세상과는 다른 눈으로 모든 사건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바로 그 자리까지, 목자께서 먼저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믿음대로 사는 것,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이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변화된 존재입니다. 나를 붙들고 계신 목자의 품 안에서 살아가도록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 자리가 차갑고, 억울하고, 홀로인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오늘 이 말씀을 붙드십시오. “전에는 여러분이 길 잃은 양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04 19 2026 주일설교

부활절 제 3주

칼을 내려놓고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라

Lay Down the Sword, Come to Grace

베드로전서 1:22-25

1:22 ○ 오늘날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변함없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1:23 여러분이 거듭 태어난 것은, 이 세상의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언제까지나 영원토록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습니다. 1:24 기록되기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의 모든 영광은 들에 핀 풀의 꽃과 같도다. 풀은 이내 시들고 꽃은 쉬이 떨어지지만, 1:25 주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에게 전파된 기쁜 소식입니다.(쉬운말 성경)

22 You were cleansed from your sins when you obeyed the truth, so now you must show sincere love to each other as brothers and sisters. Love each other deeply with all your heart.  23 For you have been born again, but not to a life that will quickly end. Your new life will last forever because it comes from the eternal, living word of God. 24 As the Scriptures say, “People are like grass their beauty is like a flower in the field. The grass withers and the flower fades. 25     But the word of the Lord remains forever.” And that word is the Good News that was preached to you.(New Living Translation)

1940년,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거리에서 끌려가던 그 시절, 하를렘의 작은 시계점을 운영하던 텐 붐 가족은 집 안 벽장 뒤에 비밀 방을 만들어 유대인들을 숨겼습니다. 약 800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결국 밀고자의 배신으로 가족 전체가 체포되었고, 코리와 언니 벳시는 라벤스브룩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굶주림과 질병과 폭력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벳시가 코리에게 말했습니다. “이곳을 예배당으로 만들자” 그들은 나치의 감시를 피해 숨겨 가지고 온 성경으로 기도 모임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벳시는 “어떤 어둠도 예수님의 빛을 꺼뜨릴 수 없다.” 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버티게 한 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벳시는 끝내 수용소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동생 코리는 언니의 마지막 말을 가슴에 품고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아무리 깊은 구덩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더 깊으니,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그 사랑을 전해야 해”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도 바로 그 자리에서 쓰인 편지입니다. 로마 황제의 박해 아래 두려워 하던 성도들에게 보내는 베드로 생애 끝에서 보내는 편지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의 모든 영광은 들에 핀 풀의 꽃과 같도다. 풀은 이내 시들고 꽃은 쉬이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도다.” 칼을 든 베드로, 병사들 앞에서 두려움으로 무너졌던 베드로가 주를 경험한 깊은 고백입니다. 기록된 말씀의 은혜가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에 능력과 위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1.베드로는 칼을 들었고 주님은 잔을 드셨습니다.

깊은 밤 횃불을 든 무리가 몰려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칼을 뽑았습니다. 베드로가 정확히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손에 들린 것이 칼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고별설교에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한 베드로는 칼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잔을 드셨습니다. 그 잔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주님이 지셔야 할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이 그 잔을 드신 것은 죄로 끊어졌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은 잔을 드시며 ‘너희들이 내 잔을 마실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걸으신 그 길에 동참하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베드로가 든 칼이 있습니다. 나의 원칙과 가치라는 이름으로 드는 칼입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나를 보호하는 칼, 자신을 지키려 하는 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칼의 뿌리에는 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내 마음, 내 힘과 내 기준으로 나를 증명하여 지키려고 하는 칼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며 나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깊은 고통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더 깊은 사랑 안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잔을 마실 수 있는 힘이 된 것입니다.

이제 거듭난 베드로가 쓴 편지를 보겠습니다. “1:22 오늘날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변함없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뜨겁게’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크테노스(ἐκτενῶς)로, ‘전력을 다하여, 지속적으로’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밖으로”를 뜻하는 ‘ek’와 ‘뻗다’를 뜻하는 ‘teino’의 결합된 단어입니다. 문자적으로 연결해 보면 ‘줄기차게 전력을 다하여 뻗어 나가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이 지금도 줄기차게 확장되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나그네된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상처받아도, 기대가 무너져도, 전력을 다해 계속 뻗어 나가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원천이 십자가이기에, 그 사랑은 공동체를 넘어 세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날 밤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단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날 아침 주님이 그 앞에 계셨지만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물밖으로 끌어 올릴수 조차 없을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 요한이 “주님이시다” 라고 말하자마자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 내립니다. 주님께 달려간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지키지 못한 고백과 주님에 대한 마음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날 아침 베드로는 주님이시다 라는 요한의 외침에 주님을 더 가까이 보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아침식사를 마치신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한 번, 두 번, 세 번을 물으십니다. 그 질문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의 물음이었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 앞에서 베드로는 무너진 자리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 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기도해야 할 때 잠들어 있었고, 침묵하게 할 때 말했고, 고난의 잔을 마실때에는 칼을 들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베드로 같은 마음으로 서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 다른 것을 붙잡고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두려워 더 움켜 쥡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한 번, 두 번, 세 번 그 이상 부인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대부분이 쉽게 타오르고 쉽게 식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쓴 1장 19절을 보십시오. “19 오직 한 점의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롭고 고귀한 피로 된 것입니다.”

‘보배롭고’라는 표현의 헬라어 티미오스(τίμιος)는, 사람이 그 가치를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의미합니다. 주님이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가 우리의 죄사함을 이루셨습니다. 죄사함의 능력이 얼마나 값진 것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고난의 잔을 드셨기에 우리의 잔이 은혜로  채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손에 쥔 칼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그 잔을 드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기준 앞에서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성도의 삶은 나를 증명해 내고, 내 힘을 드러내는 싸움이 아닙니다. 은혜에 붙들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게 있는 칼이 없으면 내가 약해질까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내가 가진 칼을 갈고 닦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우리의 결심과 열심으로 오지 않습니다.

거듭난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편지합니다. “23 여러분이 거듭 태어난 것은, 이 세상의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언제까지나 영원토록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다른 것이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 썩지 않는 씨,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우리 안에 심겨졌습니다.

2. 세상 속에 심겨진 썩지 않는 씨

썩어질 씨는 무엇입니까?  금과 은이 넘쳐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목마름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여전히 공허한 그 자리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무엇가 붙잡으려고 끊임없이 달려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를 채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결국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그 빈 그물이 있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입니다. 그 빈 공간은 더 열심히 한다고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썩지 않는 씨가 되시는 주님이 들어오시는 자리입니다.

썩지 않는 씨가 심기는 것은 단순한 위로나 감동이 아니라 존재가 변화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밤새 빈 그물을 끌어올리며 낙심하던 그 자리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신 자리에 그물을 던졌을 때,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채워졌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자리에 우리의 삶을 드릴때, 우리 안에 변화가 시작됩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부르실 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랑을 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이 부르심은 영원토록 함께하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주신 은혜의 초대입니다.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지만 주가 이끄시는 은혜가 우리를 사명의 자리로 살게합니다. 사명자로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약속을 모든 상황속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주를 위해 기꺼이 삶을 드릴 자들을 지금도 찾으십니다. 말씀이 되신 주님께서 무덤을 깨고 나오셨습니다. 그 부활의 생명이 말씀을 통해 들어와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썩지 않는 씨로 심겨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1세기, 성도들은 로마 황제의 박해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집도 없었고, 직업도 빼앗겼고, 가족도 흩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소망되시는 주님의 말씀을  동일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24 기록되기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의 모든 영광은 들에 핀 풀의 꽃과 같도다. 풀은 이내 시들고 꽃은 쉬이 떨어지지만 25 주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도다.”

여기서 베드로가 인용한 말씀은 이사야 40장입니다. 수천 년 전 바벨론 포로기, 절망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 더 큰 힘에 의해 이끌리는 것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그 은혜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거룩한 나그네 된  백성들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 말씀이 울려 옵니다. 우리는 이 땅을 밟고 살아가지만 여전히 우리 손에는 자신을 지키려고 드는 칼이 있습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마음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 상처 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날카로운 칼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꺼내 들었던 그 날카로운 칼을 거두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우리를 다시 불러주십니다.

은혜의 삶은 하나님이 세상 안에 세우신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 질서의 중심에는 언제나 우릴 살리시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 부르심은 완전한 회복입니다. 그 은혜의 손이 지금도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이상 내가 붙잡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우리를 향해 먼저 다가오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식탁의 자리를 준비하시고 수치와 상처가 있는 자리, 돌아서고 싶은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주님께 우리의 시간과 마음을 드리길 원합니다. 결코 헛되지 않고 아깝지 않을 영광의 날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마음을 주를 위해 부어 드리길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부모와 자녀보다 나를 더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부활의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갈망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우리는 다시 세워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시 내 힘과 내 경험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그 질문 앞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정죄가 아니라 회복으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서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은혜 안으로 옮겨진 사람, 십자가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썩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심겨졌습니다. 어떤 어둠도 예수님의 빛을 꺼뜨릴 수 없었던 그 고백은 썩지 않는 씨,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심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살아있는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끝없는 사랑 안에서 오늘을 살아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4 12 2026 주일설교

부활절 제 2주

우리 삶의 자리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The Lord Has Come into the Place of Our Lives

요한복음 20:24-31

24 ○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디두모’라는 별명을 가진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다. 25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도마가 말했다.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서 못 자국을 보고, 구멍이 난 곳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도무지 그 말을 믿지 못하겠소!” 26 여드레 후에, 제자들이 다시 모여 있었다. 이번에는 도마도 그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역시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갑자기 들어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다. “너희 모두에게 평강이 있기를!” 27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자, 이리 와서 네 손가락을 여기 넣어 보고,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28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29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구나. 그러나 나를 보지 않고도 나를 믿는 사람은 더욱 복이 있다.” 30 ○ 이 책에 기록된 것 외에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기적적인 표징들을 많이 행하셨다. 31 그러나 여기에 이것들을 기록해 두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고, 또 예수를 믿음으로써 예수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다.(쉬운말 성경)

24 One of the twelve disciples, Thomas (nicknamed the Twin),[c] was not with the others when Jesus came. 25 They told him, “We have seen the Lord!” But he replied, “I won’t believe it unless I see the nail wounds in his hands, put my fingers into them, and place my hand into the wound in his side.” 26 Eight days later the disciples were together again, and this time Thomas was with them. The doors were locked; but suddenly, as before, Jesus was standing among them. “Peace be with you,” he said. 27 Then he said to Thomas, “Put your finger here, and look at my hands. Put your hand into the wound in my side. Don’t be faithless any longer. Believe!” 28 “My Lord and my God!” Thomas exclaimed. 29 Then Jesus told him, “You believe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believe without seeing me.” 30 The disciples saw Jesus do many other miraculous signs in addition to the ones recorded in this book. 31 But these are written so that you may continue to believe[d] that Jesus is the Messiah, the Son of God, and that by believing in him you will have life by the power of his name.(New Living Translation)

영국의 시인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 1859–1907)은 그의 시에서 하나님을 사냥개로 표현했습니다. 먹잇감을 끝까지 추적하듯, 하나님을 떠나 사는 자신을 그토록 집요하게 추적해서 찾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자녀들과 맺은 언약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추적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의심하는 제자 한 사람을 끝까지 찾아가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열두 제자 가운데 도마만이 부활의 주님이 찾아 오셨을때 그 자리에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도마가 어떤 이유로 그 자리에 없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유독 도마만 그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여드레 후, 부활하신 주님 앞에 선 도마는 외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 속에 부활의 감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 사도신경으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면 죽을 몸도 살릴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 11)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부활신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지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부활이 완성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없는 자와 믿음있는 자를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부활의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으니 주께서 재림하실때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는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무덤 속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절망의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말씀과 믿음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C.S 루이스는 사랑하는 아내 조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는가?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쾅! 하고 닫히는 문,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리고 침묵. 차라리 돌아서는 게 낫다.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일까?” 하나님을 잘 알았던 그가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 보내며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르짖음은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놓지 않으려 했던 절박함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났던 열한 명의 제자들이 일주일이 지나 다시 주일이 되어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굳게 잠근 채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도마만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뵌 열한명의 제자들이 여전히 숨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신앙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닫히고, 예배의 자리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많은 것을 알고 은혜도 경험했지만 그 익숙함 속에서 마음이 더 굳어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드레 후 다시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 자리에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미 도마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못 자국을 직접 보고 손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의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도마의 마음을 아시고,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며 “자, 이리 와서 네 손가락을 여기 넣어 보고,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말씀하십니다. 도마를 책망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믿음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숨기려 하는데,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의 상처를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그 상처를 보이심으로써 도마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때 도마의 입에서 터져 나온 고백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고백을 위해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다니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왕의 조서에 30일 동안 기도하지 말라는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그는 집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문 앞에서 평소와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상황을 바꾸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기도의 자리였습니다. 이후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집니다. “이에 돌을 가져다가 굴 입구를 막고 왕이 자기의 도장과 귀족들의 도장으로 봉인하였으니, 이는 다니엘에 관한 일을 변경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더라”(단 6:17) 왕의 인장이 찍힌 것으로 사자굴 입구를 막고 봉인했습니다. 이제 왕 자신조차도 그 결정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종결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들의 밥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봉인된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고, 다니엘을 살리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부활의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덤의 돌문이 굳게 봉인되고 로마 군인들이 지켰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돌문을 여시고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직접 볼수 없는 승천 이후를 살아가지만 이 진리를 믿는 자들은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의 여정 속에서 때때로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삶의 현실이, 마치 내 안에 깊이 박힌 못 자국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상처는 삶을 무겁게 짓누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심과 상처 속에 있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부활의 능력은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처를 딛고 일어나,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날 복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십자가 아래 끝까지 남아 있던 예수께서 사랑하던 제자였습니다. 그 요한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아내느니라. 이는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장 18절)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더 강한 의지가 아닙니다. 온전한 사랑입니다.

요한은 또한 이 편지를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밝힙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또한 그 이름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때까지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행1:4) 그 약속을 믿고 자리를 지키며 기다릴 때, 제자들은 성령세례를 받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때로는 고민이 깊어질 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며 슬픔이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가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믿어질때 믿음을 통해 부활의 벅차는 감격과 크신 능력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됩니다. 성도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부활의 믿음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목격했던 도마도 그랬습니다. 그는 변화된 믿음으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단지 인간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주를 위하여 겪었던 모든 상처와 눈물을 씻겨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모습은 초라할때가 있고 연약해서 상처가 남기도 하지만 다시 살리실 것을 믿기에 부활의 감격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을 지니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우리의 자리를 돌아봅시다. 부활의 기쁨이 희미해졌다면, 주님 앞에 솔직히 나아가십시오. 부활의 신앙을 아는 것이 사는 것이 되게 해 달라고, 삶이 바뀌는 믿음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신 다음 곧바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제 우리는 부활절 이후 8주 동안, 부활절 이후 예수의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일상의 시간 속에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고백하십시오.

비록 지금 깊은 절망과 아픔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자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생명의 자리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우리는 의심했던 도마와 같이 연약한 자들이지만, 주님은 그 자리까지 찾아오셔서 “평안하라” 말씀하시며, 자신의 상처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의심을 걷어 내시고 부활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낙심 가운데 있는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마침내 장차 임할 부활의 영광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번주 금요 찬양에 함께 부른 ‘주 예수 내 산 소망’ 찬양의 가사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말씀을 마칩니다.

“닿을 수 없고 오를 수 없네 사망의 권세에 놓인 우리 어둠을 뚫고 주님의 사랑 내 영혼을 비추시네 주의 십자가 날 구원 하사 왕의 자녀 삼으셨네 죽음을 이기신 유다의 사자 우리의 주 부활하셨네

“할렐루야 주의 이름 찬양해 할렐루야 내게 자유 주셨네 죄의 저주 끊으신 구원의 주 그 이름 언약의 말씀 이뤄진 아침 주님의 호흡 시작됐네 죽음을 이기신 유다의 사자 우리의 주 부활하셨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을 이기신 유다의 사자,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 우리 삶의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이번 한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부활의 감격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