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9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11주

다시 걷게 하시는 은혜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Grace That Makes Us Walk Again (Why Are You Here?)

열왕기상 19:9~18

9 시내 산에 도착한 엘리야는 한 동굴 속에 들어가 밤을 지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야,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10 엘리야가 대답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저는 언제나 제 힘을 다해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제단을 부수고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죽였습니다. 살아 남은 예언자는 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저까지 죽이려 합니다.” 11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산 위에서 내 앞에 서 있어라. 내가 네 앞으로 지나가겠다.” 그러더니 매우 센 바람이 불어와 여호와 앞에서 산을 가르고 큰 바위를 쪼갰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불고 난 뒤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지진 속에도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12 지진이 일어난 뒤에 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이 난 뒤에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동굴 입구에 섰습니다. 그 때에 어떤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엘리야야!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14 엘리야가 대답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저는 언제나 제 힘을 다해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제단을 부수고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죽였습니다. 살아 남은 예언자는 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저까지 죽이려 합니다.” 15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왔던 광야 길로 돌아가 다마스커스로 가거라. 그 성에 들어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으로 세워라. 16 그런 다음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므홀라 사람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는 너의 뒤를 이을 예언자가 될 것이다. 17 하사엘의 칼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은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은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18 또한 내가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는데, 그들은 한 번도 바알에게 절한 적이 없고 바알의 우상에게 입을 맞춘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쉬운성경)

There he came to a cave, where he spent the night. But the Lord said to him, “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 10 Elijah replied, “I have zealously served the Lord God Almighty. But the people of Israel have broken their covenant with you, torn down your altars, and killed every one of your prophets. I am the only one left, and now they are trying to kill me, too.” 11 “Go out and stand before me on the mountain,” the Lord told him. And as Elijah stood there, the Lord passed by, and a mighty windstorm hit the mountain. It was such a terrible blast that the rocks were torn loose, but the Lord was not in the wind. After the wind there was an earthquake, but the Lord was not in the earthquake. 12 And after the earthquake there was a fire, but the Lord was not in the fire. And after the fire there was the sound of a gentle whisper. 13 When Elijah heard it, he wrapped his face in his cloak and went out and stood at the entrance of the cave. And a voice said, “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 14 He replied again, “I have zealously served the Lord God Almighty. But the people of Israel have broken their covenant with you, torn down your altars, and killed every one of your prophets. I am the only one left, and now they are trying to kill me, too.” 15 Then the Lord told him, “Go back the same way you came, and travel to the wilderness of Damascus. When you arrive there, anoint Hazael to be king of Aram. 16 Then anoint Jehu grandson of Nimshi to be king of Israel, and anoint Elisha son of Shaphat from the town of Abel-meholah to replace you as my prophet. 17 Anyone who escapes from Hazael will be killed by Jehu, and those who escape Jehu will be killed by Elisha! 18 Yet I will preserve 7,000 others in Israel who have never bowed down to Baal or kissed him!”(New Living Translation)

지난 주 우리는 얍복강가에서 홀로 씨름하던 야곱을 만났습니다. 그는 밤새 하나님을 붙잡았고, 엉덩관절이 어긋나는 아픔 속에서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는 그 당시 영적인 거장이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던 바알 선지자들 450명과 홀로 대결합니다. 450대 1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바알신을 부르짖던 선지자들 앞에서 불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을 보며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보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땅은 3년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바짝 말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자 하늘이 캄캄해지고,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큰 비가 내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강한 능력을 경험하고도 무너진 엘리야를 다시 순종의 걸음을 걷게 하시는 은혜를 보게 합니다.

1.무너진 자를 먹이시는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는 승리를 경험한 후 이세벨이 보낸 사신의 말로 인해, 두려워 하여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이스르엘에서 브엘세바까지 도피한 엘리야는 광야 길로 다시 하루를 더 걸어 들어가 한 로뎀나무 아래 몸을 눕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을까요? 갈멜산에서의 선지자가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거룩한 길을 애쓰며 걷는 성도의 삶에도 수많은 유혹과 씨름해야 할 문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뎀나무 밑에 있던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회복시켜 주셨던 하나님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죽기를 청하는 그 두려움에서 누가 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엘리야를 책망하시지 않으시며 주의 천사를 통해 어루만져 주시고,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뜨겁게 달군 돌에 구워 낸 빵과 물로 엘리야의 육신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엘리야의 육신은 하나님의 이러한 자상한 보살핌으로 인하여 음식을 먹고 사십을 밤낮을 걸으며, 하나님의 산 호렙에까지 이를 수 있는 힘을 비축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이러한 영적침체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보다 두려움을 주는 이세벨의 말이 마음 안에 더 크게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가장 뜨겁게 은혜 받고도, 눈물의 승리를 거두고도, 이유 없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번아웃의 자리가 찾아옵니다. 도망가고 싶고, 돌아가고 싶은 자리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 열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마음이 허해지는 그런 때입니다. 마치  3년 6개월 비가 오지 않았던 땅처럼 마음이 굳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고 회복시키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성도는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거룩한 삶을 배워 나가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된 바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평생 이방인 선교사로 복음을 전하며 살수 있던 힘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두려움을 덜어 내시는 분입니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항상 희망과 생기가 넘치는 시절만 있지는 않습니다. 영적인 어려움에 빠져서 낙심하여 지낼 때도 있습니다.

얼마전 찬양을 들으며 무심코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을 읽어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한참을 읽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성도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남긴 마지막 신앙의 고백, 하나님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교우의 눈물의 간증, 돌아가고 싶지만 여전히 상처안에서 숨어있는 고통, 자신의 삶 속에서 씨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살고 싶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누군가의 짧은 고백도 있었습니다. 간절한 고백들이 로뎀나무 아래로 찾아온 엘리야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신음하던 엘리야를 먼저 먹이시고 회복시키신후 사명을 주셨다면,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동일합니다. 

2.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은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고 기쁨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부르심까지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소명은 분명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알게 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한때는 기쁨으로 감당했던 그 일이, 지금은 버거운 짐처럼 느껴지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명은 우리를 영적 침체 속에 그냥 머물러 있게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서 우리를 먹이시고 다시 걷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에서 엘리야를 먹이신 후에 호렙산 굴 앞에서 다시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그의 몸은 회복 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엘리야야,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엘리야였지만 엘리야는 “저밖에 없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혼자라고 느낀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고립감과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생활하며 우리는 홀로 있는 것 같은 마음이 들때가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혼자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 감정 안에 갇히면 두려움은 더 커지고 시야는 좁아져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질과 감정이 우리의 믿음을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삶의 기반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한없이 연약해지고 하나님의 마음과 점점 멀어져 갑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여호와께서 그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고,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 지진 가운데도,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개역개정은 이 소리를 세미한 소리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로 콜 데마마 다카 (קוֹל דְּמָמָה דַקָּה )입니다. 고요하고 미세한 침묵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이 침묵 뒤에 다시 네가 왔던 광야 길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도 삶의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인 순간들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자책하고, 내 안의 상처로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그 상처의 이유를 하나님께 돌리며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오래 묵혀둔 그 상처가, 잘 살아내고 싶어 발버둥 쳤던 그 시간들이 예배의 자리, 은혜의 자리에 서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새 명령을 주셨습니다. 광야 길로 돌아가 다마스커스로 가서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그리고 엘리사를 그의 후계자 선지자로 세우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달라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하사엘과 예후에게 가서 그들을 왕으로 세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7 하사엘의 칼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은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은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하사엘의 군대는 이스라엘을 침공했고 예후는 아합의 왕가를 심판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의 군대는 피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에게 주어진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재능은 자격이 아니라 은혜로 맡겨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엘리야는 두려움이 사라진 후가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다시 걸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자를 먹이시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걷게 하십니다.

히즈윌의 날개 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매일 성전 뜰만 밟고 서성이다 / 늘 그만큼만 주님을 의지하다/ 내 것인 줄 알았던 내 삶이 /  이리저리 흔들리고 무너질 때/ 주님, 나는 주님 없이는 /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 주님, 나는 주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 주님과 함께 날아오를 때/ 높은 산은 점점 더 낮아지고/ 삶의 골짜기마다 흘러넘치는 / 주님의 은혜/ 이제껏 살게 하신 주님의 은혜가 / 이후의 삶도 지켜주시리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날개로 /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날개로 날아오르리

주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우리가 그 은혜로 오늘도 사명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명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네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엘리야가 있어야 할 자리는 떨어져 나간 로뎀나무 아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고, 칠천 명의 남은 자 가운데, 엘리야는 다시 자기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이처럼 은혜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낙심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있던 주어진 사명을 인식하게 합니다.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은 절망이 막을 수 없습니다. 폭풍이 다 지나간 다음이 아니라, 폭풍이 여전히 그대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순종의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멈춰 섰던 그 자리가 다시 걷는 자리가 되는 것은, 우리를 붙드시고 끝까지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시며, 두려워 멈추었던 자리, 혼자라 생각하여 포기하려고 했던 자리에서 우리를 먹이시고 재우시고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두려움과 염려 앞에, 이미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서 도망쳤던 내 삶의 로뎀나무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먹이고 재우시며 다시 일어나 가라고 하시는 그 자리는 어디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로뎀나무 아래에서 주시는 위로는 우리를 다시 일어나 걷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말씀을 살아내는 힘은 내 삶의 바람과 지진과 불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걸음을 내딛는 데서 시작됩니다. “저밖에 없습니다” 라고 주저 앉아 있는 마음을 주님이 먹이시고 재우십니다. 그리고 “일어나 걸어라.” 말씀하시며 찾아오십니다. 혼자 걷는 것 같아도 함께 걷고 있는 길입니다. 로뎀나무의 위로에만 멈추어 있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의 길을 향해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위로하시며 다시 사명을 허락하시고 생명을 살리십니다. 무너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은혜 붙들고 순종의 자리에서 걷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0802 2026

성령강림절 제 10주

우리 안에 새겨 두신 은혜의 흔적

The Scar He Chose to Leave

창세기 32:22~32

22그날 밤 야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명의 아들을 데리고 얍복 강 나루를 건넜다. 23그는 자기의 가족 모두를 강 건너로 보낸 다음 자기의 재산도 모두 강 건너로 보냈다. 24그리하여 야곱이 혼자 남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날이 밝을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25그 사람은 자기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관절을 쳤다. 그 때문에 야곱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엉덩관절이 어긋나게 되었다. 26그런 다음 그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였다. “날이 새려고 하니 날 놓아다오.” 그러나 야곱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게 복을 빌어 주지 않으시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27그 사람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28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였다. “이제부터는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 이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고 사람들과도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 29  야곱이 말하였다. “부디 어르신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네가 내 이름을 묻느냐?” 그런 다음 그는 거기에서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30그래서 야곱은 그 곳을 브니엘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었구나. 그런데도 아직 살아 있다니!” 31  야곱이 브니엘을 지나갈 때 해가 솟아올랐다. 그는 엉덩관절을 다쳐서 절뚝거리며 걸었다. 32이런 까닭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엉덩관절에 붙어 있는 힘줄을 먹지 않는다. 야곱이 그 힘줄 가까이에 있는 엉덩관절을 다쳤기 때문이다. (쉬운성경)


22 During the night Jacob got up and took his two wives, his two servant wives, and his eleven sons and crossed the Jabbok River with them. 23 After taking them to the other side, he sent over all his possessions. 24 This left Jacob all alone in the camp, and a man came and wrestled with him until the dawn began to break. 25 When the man saw that he would not win the match, he touched Jacob’s hip and wrenched it out of its socket. 26 Then the man said, “Let me go, for the dawn is breaking!” But Jacob said, “I will not let you go unless you bless me.” 27 “What is your name?” the man asked. He replied, “Jacob.” 28 “Your name will no longer be Jacob,” the man told him. “From now on you will be called Israel, because you have fought with God and with men and have won.” 29 “Please tell me your name,” Jacob said. “Why do you want to know my name?” the man replied. Then he blessed Jacob there. 30 Jacob named the place Peniel (which means “face of God”), for he said, “I have seen God face to face, yet my life has been spared.” 31 The sun was rising as Jacob left Peniel, and he was limping because of the injury to his hip. 32 (Even today the people of Israel don’t eat the tendon near the hip socket because of what happened that night when the man strained the tendon of Jacob’s hip.(NLT)

우리는 태어나 많은 것을 손에 쥐는 연습을 하며 삽니다. 어린아이는 장난감을 손에 쥐고 빼앗기지 않으려 힘을 줍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내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것을 움켜 쥔 채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속의 야곱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강 건너로 보내고 홀로 남은 밤에 무언가를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홀로 남은 밤 우리는 무엇과 씨름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을 강 건너편으로 보낸 홀로 남은 밤에 역사하십니다. 그날 밤 야곱은 두 아내, 두 여종, 열한명의 아들들과 지난 세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재산들을 강 건너편에 보내 놓고 홀로 남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20년간 라반의 집에서 얻어낸 것이었고 자신을 지탱해 온 전부였습니다.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은 야곱을 불안과 두려움에 짓눌리게 했을 것입니다. 20년 전, 늙으신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도망쳤던 그 날의 빚이, 이제 400명의 군사가 되어 자신 앞에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열매로부터 도망칠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인간의 연약함만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인생의 그 절박한 순간 혼자 있는 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날 밤 야곱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면, 먼저 야곱이라는 사람이 평생 무엇과 씨름하며 살아왔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났고 장자의 축복을 얻기 위해 씨름했습니다. 20년간 장인 라반과 씨름하며 재산을 쌓기 위해 씨름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얍복강 나루에 홀로 남은 그 밤, 야곱의 씨름의 대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경은 씨름하던 상대를 ‘그 사람’ 이라고 부릅니다. 25 그 사람은 자기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관절을 쳤다. 그 때문에 야곱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엉덩관절이 어긋나게 되었다. 씨름을 마친 후 야곱은 새 이름을 받게 됩니다. NLT성경은, you have fought with God으로 번역합니다. 그날 밤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고 밤새 씨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길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 날밤 야곱은 하나님과의 씨름 속에서 20년 동안 자기 힘으로 버텨 온 자신 안에 옛사람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 주셨습니다.

    야곱은 밤새 붙들고 놓지 않다가 야레크(יָרֵךְ, yarek)  라고 하는 엉덩이 관절을 다쳐서 평생 절뚝거리게 됩니다. 야레크 (יָרֵךְ, yarek) 라는 단어는 종종 후손·생산력의 자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입니다. 야곱의 직계 자손들이 66명이니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창 46:27), 허리에서 나온 자라고 번역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히브리어 단어도 야레크(יָרֵךְ, yarek) 입니다. 하나님이 정확히 이 지점을 치셨다는 것은 야곱의 힘을 상징하는 근원을 꺾으시고 새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야곱이 이긴자라는 새이름을 얻게 되지만 절뚝거리는 삶으로 마무리 됩니다.

    우리는 자기 신념의 틀 안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약속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의 문제 앞에서는 자꾸 넘어지고 내 힘으로 버티려 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 하나님은 야곱이 의지하던 힘을 꺾으셨습니다. 고집과 이기심, 하나됨을 막아버리는 우리 안에 평생 붙잡고 있던 그 손을 펴는 것입니다. 비록 절뚝거리며 걷지만 새이름으로 첫걸음을 떼는 것입니다. 이김을 주신 주님 바라보며 적당히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다 드리며 주가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2. 힘이 꺾여진 자리에서 받은 은혜

    사람의 삶에는 수많은 광야가 찾아옵니다. 광야는 내 힘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그 곳에서 생각이 뒤집히고 마음 안에 하나님의 새 법이 새겨집니다.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힘을 꺾으신 자리에서 새 이름을 허락하셨습니다. 찬양 “나” 는 송명희 시인의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그녀에게 남들과 다른 삶의 고난을 주셨지만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이라 고백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그녀에게 공평하심은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앞에 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동일한 은혜였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성취와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라 요구하지만 이 찬양의 고백은 세상이 채울 수 없는 은혜를 깨달은 자의 고백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힘이 꺾인 자리에서 새 이름을 받았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힘이 꺾일 때 비로소 참된 이름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에게든지 그 십자가 앞으로 나아올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그 피 값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달라집니다. 우리의 아픔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픔이 있는 그 자리에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이 먼저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닿는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리한 상황과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판단 기준이 되어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주 씨름하고 넘어지는 상황은 무엇입니까? 그릇된 마음이 만들어 놓은 그 틀을 깨고 들어 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십시오,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채워 나가는 삶이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입니다.

    시내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도 똑같았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지 40일이 되도록 내려오지 않자, 백성은 보이지 않는 약속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아론에게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 기록합니다. 완고함이란 멍에를 메기 싫어 목을 뻣뻣이 세우고 버티는 황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서 목을 곧추세우고 버티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죄의 본질입니다.

    시대마다 사람들은 무엇을 자신의 마음의 자리에 앉힐 것인가를 바꾸어 왔습니다. 율법을 앉히고, 이성을 앉히고, 오늘날은 감성과 느낌을 진리의 자리에 앉힙니다. 감정과 기분이 태도가 되고 경험이 되고 삶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내 감정과 기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옛 자아의 습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십시오. 우리의 연약한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올때 하나님의 얼굴과 나의 연약한 그 모습이 만나는 그 자리에서 참된 은혜가 회복됩니다.

    누구에게나 피할수 없는 현실은 찾아옵니다. 멀리에서 보면 부러운 누군가의 삶도 가까이에서 보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눈물의 기도의 자리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버틸 수 없는 삶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 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매일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나의 인생을 내 힘으로 끝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지체들을 만나기 전에,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예배에 오기 전에 우리는 먼저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삶의 예배를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믿음생활의 균형은 하나님 앞에 서는 삶이 가장 먼저임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언젠가 절뚝이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우리는 지으신 모습 그대로 서게 될 것입니다.

    주의 사랑 안에 거할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도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온전한 성전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참 자아를 회복하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언덕을 오르셨고, 교회의 모퉁잇 돌이 되셨습니다.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될때 우리 안에 새겨진 십자가의 흔적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릴 새롭게 하신 증거입니다. 마귀는 참소하며 우리를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도록 속삭입니다. 세상속에서 형성되는 수많은 평가와 정죄는 거짓자아를 만들어 내지만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구원의 은혜는 세상의 부요함에 있지 않고, 세상을 이기신 주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데서 얻게 됩니다

    오래전 저는 사고로 의식을 잃었던 적이 있습니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어 다섯 시간을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의식을 찾고 눈을 떴을 때 저는 제 인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오른손 마디마디가 차갑게 굳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불편한 손을 볼 때 저는 야곱의 절뚝거림을 생각합니다. 제 몸에 남겨진 그 흔적은, 여전히 단단하고 뻣뻣한 제 삶 속에서 하나님이 저를 살려주셨다는 감사의 고백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매일 주가 주신 살과 피를 매일의 양식 삼아 먹어야 살아납니다. 지금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잃고 싶지 않아 밤새 씨름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내 힘으로 내려놓을 수 없음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올려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밤 이후 야곱은 다리를 절뚝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절뚝이던 야곱은 에서에게로 가서 일곱 번 땅에 엎드렸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씨름의 중심에 두지 않았기에 몸을 낮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절뚝거리며 오는 동생을 보며 에서는 두팔로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함께 울었습니다. 형제 사이에 있었던 죄책감과 정죄심, 억울함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 안에서 서로가 온전히 이어졌습니다. 그 절뚝거림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밤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30그래서 야곱은 그 곳을 브니엘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었구나. 그런데도 아직 살아 있다니!” 31  야곱이 브니엘을 지나갈 때 해가 솟아올랐다. 그는 엉덩관절을 다쳐서 절뚝거리며 걸었다. 32이런 까닭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엉덩관절에 붙어 있는 힘줄을 먹지 않는다. 야곱이 그 힘줄 가까이에 있는 엉덩관절을 다쳤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삶에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힘을 꺾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걸음이 증명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으로 값을 다 치르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아름답고 위대한 삶으로 빚어 가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미 다 부서지고 무너진 존재입니다. 성도는 이제 기도의 무릎으로 절뚝이며 나아갈 뿐입니다.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움켜진 손을 펴고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새 아침을 맞이하시길 축복합니다.

    0726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9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When Words Run Out, the Spirit Prays

    로마서 8:26~30

    26.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9.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셨고,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쉬운성경)

    26 And the Holy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For example, we don’t know what God wants us to pray for. But the Holy Spirit prays for us with groanings that cannot be expressed in words. 27 And the Father who knows all hearts knows what the Spirit is saying, for the Spirit pleads for us believers[l] in harmony with God’s own will. 28 And we know that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m]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29 For God knew his people in advance, and he chose them to become like his Son,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 30 And having chosen them, he called them to come to him. And having called them, he gave them right standing with himself. And having given them right standing, he gave them his glory.(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되면 삶의 고민과 흔들림이 멈추고 믿음이 더욱 분명하고 선명해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현실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에게도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오고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시간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1) 라고 탄식합니다. 우리 안에는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죄의 세력이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팽팽하게 맞서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내면의 정직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거룩한 싸움의 한복판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선포합니다.

    1.우리의 연약함을 중보하시는 성령님

    26.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이 무엇일까요?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내 힘으로 할수 없는 한계에 부딪힐 때 우리에게는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그 사실을 깊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기쁨은 내가 구한 대로 응답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를 누리는 데 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있어도 그분의 선하심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와 같지 않을수가 있습니다. 기도한 대로 되지 않는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바울 안에 선한 일 행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를 이끌었습니다. 고린도 후서의 고백에 보면, 그의 사역속에서 복음의 영광은 완전한 그릇이 아니라,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나 자신의 연약함 속에 담겨 있지만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하려고 애써도 결국 우리가 감추고 싶었던 연약함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만 같은 상황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조차,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자리 그 앞에 서는 것이 기도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그 어떤 언어와 표현으로도 담아낼 수 없어 그저 눈물만 흐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간절히 갈망한다면, 오히려 연약함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분이 아니라 깊숙히 들어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무슨 말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물로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그 시간에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돕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단지 곁에 머무는 차원의 위로만이 아니라 짐을 함께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약함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소망의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시가 있습니다.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라는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슬픔이나 절망이 전혀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지은 작사자 엘리자 히윗(Eliza E. Hewitt, 1851-1920) 여사는 1887년 학교에서 불량학생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폭력으로 척추 부상을 입고 오랜 병상 생활을 하던 중, 몸이 완쾌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영혼에 깊숙이 스며드는 햇살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고 기도하며 이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오늘 내 영혼에 햇빛이 비치네. 이 세상 하늘에서 빛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밝은 빛이라네. 예수님이 나의 빛이기 때문이라네. 오늘 내 영혼에 한 음악이 흐른다네. 나의 왕되신 분께 찬양을 드린다네. 내게 귀 기울이시는 예수님이 들으신다네. 입으로 노래할 수 없는 영혼의 찬송들을.

    몸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성령 안에서 찬양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노래할 수 없는 영혼의 찬송들을 예수님이 들으신다는 고백은 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성령이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것, 이미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그 절망의 자리에 멈추어 서는 것이 아니라 영광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 영광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기복적인 성공의 간증이 아니라 성령의 탄식을 말합니다. 서로의 시간표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결코 헛된 시간이 없습니다.

    2.부르심의 증거

    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는 우리의 탄식의 기도, 우리가 겪는 세상의 수많은 고난도 포함 됩니다. 오늘의 세상을 보십시오. 이상 기후와 재난 속에 신음하고,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 권력과 정치의 자리에는 다툼과 폭력이 흐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세상이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깨어짐은 먼 곳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선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갑자기 찾아오는 아픔과 설명할 수 없는 고난 앞에 설 때가 있고, 세상속의 불의한 일 앞에 가슴 아픈 탄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괜찮아 다 잘될거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모든 것이 잘될 것을 바라며 그 말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증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신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통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해치기 위해서 모의하고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 선으로 바꾸사 요셉의 생애 가운데 협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선을 이룬 것이지, 요셉이 선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겪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의 일생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가 하는 일이 잘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선을 이루는 사람은 고난 가운데 그 보다 더 큰 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인내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요셉이 자신의 손으로 형들이 주었던 고통을 되 갚을 수 있는 위치에서 했던 말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입니다.

    내 시간과 재능은 지금 누구를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까? 내 삶은 무엇을 위해 준비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교회에서의 나, 가정과 일터에서의 나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삶의 모든 순간이 예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내 삶에 더해지는 무게와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우리와 늘 동행하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29.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셨고,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부르심에는 인간의 그 어떤 자격과 조건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선택받은 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것도 자랑할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자격이 포함된다면 구원의 완전성이 상실됩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힘입어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 분의 사랑 앞에 서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삶으로 세워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그렇게 빚어 가십니다. 우리 눈에는 불안과 불확실한 시간이 더디고 답답하게 느껴져 피하고만 싶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 속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시는 더 크신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완성하시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 자리는 두려움의 자리가 아니라 기쁨의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아가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만날 때가 있고,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는 나 혼자만의 아픈 시간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절절한 마음으로 붙들고 있는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이든, 아픔의 시간이든, 혹은 평탄하고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시간이든 하나님의 손에서 버려지는 시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을 사용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아직 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바울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의 최종적 구원은 반드시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과 관계 맺는 삶을 통해 그 사랑을 실제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가르침을 배울 책임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미 성령께서 탄식속에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엘리자 히윗의 고백처럼 몸의 고통은 그대로인데 내 영혼에는 찬양이 흐르는 그 은혜의 감격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부르심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으로, 특권이 아니라 선교적 삶으로, 의심이 아니라 확신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 변화의 과정이 성령의 역사이고 이 회복의 과정이 거룩한 삶입니다.

    0719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8주

    함께 자라게 두어라

    Let Them Grow Together

    마태복음 13:24~30, 36~43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또 다른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심은 사람에 빗댈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원수가 와서 밀 사이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26밀이 자라서 낟알이 익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27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했다. ‘주인님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그런데 어디서 이런 가라지가 나왔을까요?’ 28주인이 대답했다. ‘원수가 그랬구나.’ 종들이 주인에게 물었다. ‘저희가 가서 가라지를 다 뽑아 버릴까요?’ 29주인이 대답했다. ‘아니다너희가 가라지를 뽑을 때에 밀도 함께 뽑힐라. 30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놔 두어라추수할 때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 묶어서 불에 태우고밀은 거두어 곳간에 쌓으라고 하겠다.'”

    오늘 본문은 가라지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며 씨 뿌리는 비유 이후 가리지를 심는 존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어떤 밭인지를 돌아보았습니다. 무감각한 길가, 뿌리 없는 자갈밭, 염려와 재물로 뒤덮인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입니다. 밭에 난 가라지는 무엇일까요? 마음의 밭에 심겨지는 가라지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믿도록 심는 씨입니다. 남보다 내가 먼저여야 한다는 욕심입니다. 끊임없이 악에 의해 만들어 지는 우상들입니다. 문제는 이 우상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조차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에 작은 이상이 느껴지면 약을 챙겨 먹고 병원에 다녀옵니다. 내 몸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정작 내 삶의 자리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심각하게 들여다 보지 않습니다. 믿음도 훈련하지 않으면 점점 무뎌집니다. 그 이유가 원수가 가라지를 심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연약해지면 삶의 작은 흔들림 하나에도 쉽게 무너지고 힘겨워집니다.

    본문속에 주인의 종들은 눈 앞에 있는 가라지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주인에게 두가지 질문을 합니다. “어디서 이 가라지가 나왔을까요?” “저희가 가서 가라지를 다 뽑아 버릴까요?” 주인은 두 질문에 답하는데 “아니다.”입니다. 왜 주인은 선과 악이 분명한데 추수때까지 참고 기다리고 하신 것일까요? 의인과 악인이 한 세상, 한 사회, 한 공동체 안에 섞여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37절 38절 보시겠습니다. 37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이다. 38그리고 밭은 세상이다.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모든 아들들이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다.

    무엇이 하늘나라의 아들과 악한 자의 아들을 가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아들들이 세상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1. 조급함의 유혹 (가서 뽑아버릴까요?)  

    종들의 질문 안에 조급함이 있습니다. “어디서 이 가라지가 나왔을까?” 라는 첫번째  질문은 원인을 찾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질문은 “가서 뽑아버릴까요?” 자신들이 해결하겠다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에 주인은 왜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가라지는 낟알이 맺히기 전까지 밀과 구별되지 않아서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 할 수 없었고,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다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원수는 가리지를 심고 갈뿐이지 주의 자녀들을 헤칠 힘이 없습니다. 어둠을 흩어서 뿌림으로 빛의 자녀들이 혼란에 빠지도록 할 뿐입니다.

    우리는 악의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려고 하다가 조급함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조급함으로 인해 오히려 악에 주목하다가 하나님이 선하시지 않거나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고 여기게 되는 혼란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 질문은 성경에서도 욥이 이미 물었던 질문이고, 우리도 여전히 완전한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들은 악의 문제에 열중해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주인이 한 대답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라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시적인 방법과 힘으로 악을 이길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검을 잡으면 필연적으로 검으로 망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30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놔 두어라. 추수할 때,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 묶어서 불에 태우고, 밀은 거두어 곳간에 쌓으라고 하겠다.

    성경은 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엔 하나님의 공의가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그 순간에는 너무도 크게 느껴졌던 일들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니라 깨닫는 때가 있습니다. 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놔 두라는 것은 심고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끝까지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놔두라 아페테(ἄφετε)는 원래 “허락하다, 그대로 두다”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자리를 내어드리는 의지적인 허용입니다. 믿음은 내게 힘이 있음에도 하나님의 뜻에 나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악은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 나가며, 내 상처에 붙들리고 타인과 비교하며 낙심하고, 미움과 정죄가 뿌리내릴 때 선하신 하나님을 더욱 더 바라보며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강요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으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걸음은 고통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이루어 낸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의롭다 인정받은 자들을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겠다고. 그날에 의인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라고.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포기하지 않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점검할 것은 하나입니다. 내가 정말로 예수를 믿고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할 때, 바로 그 순간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심고 자라게 하시는 분을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내 손으로 판단하고 심판하려는 조급함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날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고통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라지로 인해 부드러운 마음이 굳어지고, 축복의 입술이 막히고, 조각난 마음으로 인해 믿음의 걸음이 멈춰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도구화 되고 하나님의 자리를 수많은 현대 문명들이 대체해 버리는 시대속에서 관계속에 담긴 진실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깨닫고, 선함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상품과 도구로 삼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라고 하신 감탄은 우리를 다시 깨우는 말씀입니다. 악함이 선함을 이길수 없고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방향을 잡고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선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빠르게 답을 얻는 시대에 기다림을 어려워하는 우리가 조급함을 이기는 길이 무엇입니까? 온전한 신뢰를 이루는 것입니다. 내 손에 있다고 생각하면 조급해 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심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을 뿐입니다. 말씀을 자라게 하여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구원의 신비이며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은 예일대학교 신학생들에게 4세기 사막 교부들의 영성을 가르쳤습니다. 그 강의를 엮은 책 ‘마음의 길’에서 그는 사막 교부 마카리우스에 관한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누가 교부 마카리우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장황한 말을 늘어놓을 필요가 전혀 없다. 손을 내밀고 주여 주께서 아시오니 주의 뜻대로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아뢰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도 갈등이 더 거세지거든 주여 도와주소서 라고 아뢰라.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분이 훤히 아시고 자비를 베푸신다.”

    온전한 신뢰는 조급함의 유혹속에서도 하나님의 때가 이를때까지 흐트러지지 않는 끈질김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붙잡고 있던 문제의 자리에서 벗어나 기도의 자리에서 설때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2. 영적 나태함 (항상 깨어 있어라)

    가라지는 하루아침에 자라지 않습니다. 원수가 가라지 씨를 심는 때는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입니다. 육신의 잠이 아닙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몇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결국에 잠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를 두드리기 때문입니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항상 깨어 있어라!’”(막 13:37)

    영적으로 잠들면 우리는 내 마음에 자꾸 집중하게 됩니다. 내 감정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동역자들을 삶에서 밀어내게 됩니다. 삶이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여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작은 타협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그 틈을 통해 죄의 영향력이 자라게 됩니다. 무뎌진 마음, 미루어 둔 마음, 적당히 타협하는 삶, 외면하는 마음, 굳어진 마음, 가시돋힌 말은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주인이 여행을 떠난 사이 종들은 주인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갑자기 돌아오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미루어 두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삶에만 함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골로새서 4:2) 성경에서 깨어 있으라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엎어진 자리가 아니라 온전하게 채워 주시는 그 자리에서 말씀의 은혜를 누리기 바랍니다. 예배는 주를 믿는 자들의 뛰는 심장과 같고, 기도는 성도들의 호흡과 같습니다. 심장이 뛰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고, 호흡하지 않으면 심장은 멈춰버리게 됩니다. 성령의 기름을 채우기 바랍니다.

    만약 인생의 마지막 시간이 주어져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 한통을 남겨야 한다면 그 글에 남긴 내용은 일상의 언어들과 다를 것입니다. 마지막을 아는 사람의 시간은 그렇게 달라집니다. 우리의 오늘은 단순히 내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힘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앎에 그치고 삶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미루어 두고 외면하고 있는 그 틈이 바로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자리입니다.

    가라지가 다 뽑혀 불에 태워지듯, 세상의 마지막 날도 그러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심판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시고 새호흡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전하는 일에 온 마음을 쏟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가는 길에는 여전히 가라지가 밀 사이에 자라고 있어서 눈물이 있고, 고통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쉬운 길을 택하고 싶어합니다. 믿음도 적당히, 헌신도 적당히, 이만하면 된다고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구원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그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걸어온 인생의 길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금도 그 손길로 세상의 어둔 그늘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보내진 자리에서 그 나라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악의 공격을 받으시던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원수가 심어 놓은 죄를 뽑아내는 대신, 그 죄 값을 스스로 짊어지기 위해 십자가로 걸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회복은 값싸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라는 고난의 과정을 통과해서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기쁨은 세상의 어떤 일에도 갇히지 않고 제한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고 특별한 백성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의 권위 아래 머물러야 합니다. 어둔 밤에 원수가 뿌려 놓은 씨들이 자라서 선한 일을 하는 시간속에서도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 나라의 것들로 가득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가라지가 무성한 밭 한가운데 서 있을 때에도, 그 밭을 붙들고 계신 분이 하늘과 땅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07 12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7주

    묵은 땅을 기경하라

    Break Up Your Fallow Ground

    마태복음 13:1~9, 18~23

    1 그 날,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습니다. 2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가 앉으셨고, 사람들은 호숫가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가4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다. 그러자 새들이 날아와 씨를 모두 먹어 버렸다. 5 어떤 씨는 흙이 별로 없고, 돌이 많은 곳에 떨어졌다. 곧 싹이 났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6 해가 뜨자 시들어 버렸고, 뿌리가 없어서 곧 말라 버렸다. 7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졌다. 가시덤불이 자라서 그 씨를 자라지 못하게 하였다. 8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또 어떤 것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8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마음 속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 버린다. 이런 사람은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이다. 20 돌무더기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쁘게 얼른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21 그러나 뿌리가 없어 오래가지 못한다. 말씀 때문에 어려움이 생기고 박해를 당하면, 곧 넘어진다. 22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가로막아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쉬운성경)

    1 Later that same day Jesus left the house and sat beside the lake. 2 A large crowd soon gathered around him, so he got into a boat. Then he sat there and taught as the people stood on the shore. 3 He told many stories in the form of parables, such as this one “Listen! A farmer went out to plant some seeds. 4 As he scattered them across his field, some seeds fell on a footpath, and the birds came and ate them. 5 Other seeds fell on shallow soil with underlying rock. The seeds sprouted quickly because the soil was shallow. 6 But the plants soon wilted under the hot sun, and since they didn’t have deep roots, they died. 7 Other seeds fell among thorns that grew up and choked out the tender plants. 8 Still other seeds fell on fertile soil, and they produced a crop that was thirty, sixty, and even a hundred times as much as had been planted! 9 Anyone with ears to hear should listen and understand.”

    …18 “Now listen to the explanation of the parable about the farmer planting seeds: 19 The seed that fell on the footpath represents those who hear the message about the Kingdom and don’t understand it. Then the evil one comes and snatches away the seed that was planted in their hearts. 20 The seed on the rocky soil represents those who hear the message and immediately receive it with joy. 21 But since they don’t have deep roots, they don’t last long. They fall away as soon as they have problems or are persecuted for believing God’s word. 22 The seed that fell among the thorns represents those who hear God’s word, but all too quickly the message is crowded out by the worries of this life and the lure of wealth, so no fruit is produced. 23 The seed that fell on good soil represents those who truly hear and understand God’s word and produce a harvest of thirty, sixty, or even a hundred times as much as had been planted!”(New Living Translation)

    마틴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 , 1899~ 1981)는 그의 책 “영적 침체”에서 그리스도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상태, 세상을 마냥 즐기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만족스럽지도 않은 상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상태를 “괴로운 상태”라 말합니다. 그는 이런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의 밭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치셨는데 그 첫번째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가장 먼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음의 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더 넓게는 이 비유가 예수님의 말씀 사역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전하실때 제자들은  왜 이 비유를 말씀 하시는지 질문 했습니다. 주님의 대답11절과 12절입니다. 10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 여쭈었다. “어찌하여 선생님께서는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11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나라에 관한 비밀을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12그 특권을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넉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같은 말씀 앞에서 어떤 사람의 마음은 열리고, 어떤 사람의 마음은 닫힙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8십자가에 관한 소식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물리치리라.”(고전 1:18-19) 세상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 깨닫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냥 십자가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감춰져 있는 것입니다.  

    미국 성공회 사제 로버트 파라 카폰(Robert F. Capon:1925-2013)은『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원제: Kingdom, Grace, Judgment) 에서 세상에는 두 가지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즉각적인 힘입니다. 사람들은 이 힘에 본능적으로 이끌립니다. 그러나 또 다른 힘이 있는데 씨 뿌리는 비유가 전하고 있는 힘입니다. 약해 보이고 숨겨져 있지만, 끝내 이기는 힘입니다. 씨가 땅에 묻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세상은 이 방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어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말씀을 뿌리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알로 심겨 지셨고,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내어 맡기셨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자리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손을 붙드시고 그를 온 세계의 가장 뛰어난 이름으로 올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한결같지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외부의 침입으로 수시로 바뀝니다. 어떤 날엔 길가 밭이었다가, 어떤 날엔 자갈 밭이고, 어떤 날엔 가시덤불을 만납니다. 한번 경작했다고 해서 늘 좋은 땅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여호와를 찾을 때니‘(호10장 12절)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으십니까? 예수를 믿고 주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매일 누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마음의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의 것들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담긴 말씀의 씨를 먹어 버리는 새들이 온다는 것입니다. 복수형입니다. 씨를 뿌리는데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다그러자 새들이 날아와 씨를 모두 먹어 버렸다.” 말씀을 빼앗아 가는 새들은 악한 자를 상징합니다.  19절 보시기 바랍니다.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악한 자가 와서 마음 속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 버린다이런 사람은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이다.” 악한 자가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은 마음이 깨닫지 못한 채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마음의 밭을 부지런히 경작해야 합니다. 예배는 바로 그 자리, 우리의 굳은 마음과 묵은 땅을 하나님께서 갈아엎으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기쁨이 회복되고, 용서할 힘도 생깁니다. 그러나 이 갈아엎음은 나의 결심과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경작하려 할수록 오히려 환경 앞에 무너집니다. 마음 밭을 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감각한 길가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악한 자가 와서 마음 속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 버린다이런 사람은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이다. 헬라어로 길가는 파라 텐 호돈(παρὰ τὴν ὁδόν) 입니다. 수없이 밟고 지나간 길옆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길가 밭과 같은 마음은 말씀이 심겨질 틈이 없습니다. 말씀이 자라기도 전에 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는 있지만 내 삶의 깊은 곳을 뚫고 오지 못합니다. 말씀이 뿌리내릴 틈조차 없는 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조차 강제로 열어 보이시지 않지만, 우리의 온 마음과 삶을 내어드릴 때 말씀이 지닌 생명력이 길가 밭과 같은 마음도 말씀에 붙들린 삶이 되어지도록 바뀌는 것입니다.

    뿌리 없는 자갈 밭20 돌무더기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기쁘게 얼른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21 그러나 뿌리가 없어 오래가지 못한다말씀 때문에 어려움이 생기고 박해를 당하면곧 넘어진다. 자갈 밭의 마음은 두려움 앞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줄 뿌리가 깊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쑥 불쑥 찾아오는 어려움과 불안 앞에서 믿음이 쉽게 흔들립니다. 자갈 밭 신앙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쁘게 얼른 받아들이지만, 뿌리 내릴 깊이가 없어 문제가 생기면 바로 흔들리고 넘어지는 신앙입니다. 단순히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삶을 붙들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누구보다 먼저 고백했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돌 같은 마음을 뚫고 들어와 그의 마음을 만지시고 사랑으로 회복시키시는 주님 앞에서 그는 새로워졌습니다. 오순절 성령께서 그의 마음 밭을 새롭게 하셨을 때, 베드로는 생명까지도 내어 드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실패와 불안 속에서도 찾아오셔서 가장 쉽게 흔들리던 그 자리가 가장 깊이 뿌리 내리는 자리로 바꿔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삶을 둘러싼 가시덤불 22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가로막아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한 가정의학과 의사가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원인 모를 두통과 이유 없는 통증으로 병원을 수시로 찾아오던 환자가 어느 순간부터 오지 않아 알고 보니 오랜 시간 해결되지 않았던 염려가 사라지고 나니까 오랫동안 괴롭히던 몸의 아픔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풀리지 않은 마음의 짐이 자신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내 삶을 둘러싼 가시덤불은 처음에는 보이지 않지만 점점 커지며 영향을 줍니다. 삶이 안정되어 부족함이 없다고 여겨질수록 마음 깊은 곳에 자라고 있는 가시덤불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나님 보다 물질을, 내 삶의 평안을, 성공을 더 생각하고 미래를 더 염려하여 의지한다면 내 삶에 가시덤불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재물이 죄가 아니라, 재물이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염려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 염려가 우리 마음을 차지하여 하나님의 것을 누리지 못하게 가로막는다면 그것이 바로 가시입니다. 물질 뿐 아니라 완벽주의, 인정받고 싶은 마음, 안정에 대한 집착도 말씀을 막는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가장 많이 생각하고 마음 두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삶을 둘러싼 가시를 발견하고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말씀보다 더 크게 자라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 안의 가시를 드러내십니다. 기도할 때 내 안에 자라고 있는 염려와 불안을 주님께 내어 놓게 하십니다.

    좋은 땅 23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다이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어떤 사람은 백 배어떤 사람은 육십 배어떤 사람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삭개오의 삶을 보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남의 것을 토색하며 살았지만 주님을 만난 후에는 이제껏 토색했던 것을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회복은 삶에 맺힌 열매였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지금도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 안에서 일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으로 풀어가는 인생에 답이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내 방식과 뜻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마음은 지금 어떤 밭입니까? 이 낯선 땅에서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버거운 우리에게 마음 밭을 기경하는 것은 내 의지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내 힘으로 하려 할수록 더 지칠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을 기경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두 눈을 예수께로부터 떼지 맙시다. 그분은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요 완성자 이십니다예수께서는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고 십자가의 부끄러움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12:2)

    우리의 무감각한 길가, 뿌리 없는 자갈밭, 상처와 염려로 찔린 가시덤불, 이 굳은 땅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신 값을 치르셨습니다. 삶의 현실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눈물짓게 할지라도, 그 눈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빚어가시는 자리가 됩니다. 이제 믿음의 땅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어드릴 때 하나님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