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22 2026 주일설교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God Did Not Stop

삼상 16:1-7, 12-13

1 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사울 때문에 언제까지 슬퍼할 작정이냐? 나는 이미 그를 버렸다. 사울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다. 이제 너는 기름을 뿔에 가득 채워 베들레헴으로 내려가서 이새라는 사람을 만나라. 내가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왕이 될 사람을 뽑아 놓았다.” 2 사무엘이 말했다.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울이 그 사실을 알면 당장 저를 죽일 것입니다.” 주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주께 희생제물을 바치러 왔다.’라고 말하여라. 3 제사를 드릴 때,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초청하여라. 네가 그 다음에 할 일은 그때 가서 가르쳐 주겠다. 너는 내가 일러준 그 사람에게 나를 대신하여 기름을 붓게 될 것이다.” 4 ○ 사무엘은 주의 말씀대로 따랐다.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이르자, 성읍의 장로들이 두려워하면서 그를 맞았다.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5 사무엘이 대답했다. “그래요, 좋은 일이오. 주께 희생제물을 바치러 이곳에 왔습니다. 여러분은 어서 몸을 깨끗이 씻고, 나와 함께 제사를 드리도록 합시다.” 또한 사무엘은 이새와 그의 아들들에게도 몸을 깨끗하게 한 후에 제사에 참석하라고 초대했다. 6 이새의 아들들이 오자,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주께서 기름을 부으시려고 선택하신 자로구나!’ 7 그러나 주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용모와 키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라. 그는 내가 정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외모를 보지만, 나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12 이새가 사람을 급히 보내어 막내아들을 데려왔다. 그는 눈에 총기가 있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이다! 그가 바로 내가 택한 사람이니,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13 사무엘이 기름이 담긴 뿔을 가져다가 그의 형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날부터 주의 영이 다윗을 사로잡았다. 그런 뒤, 사무엘은 그곳을 떠나 라마로 돌아갔다. (쉬운말 성경)

1 Now the Lord said to Samuel, “You have mourned long enough for Saul. I have rejected him as king of Israel, so fill your flask with olive oil and go to Bethlehem. Find a man named Jesse who lives there, for I have selected one of his sons to be my king.”

2 But Samuel asked, “How can I do that? If Saul hears about it, he will kill me.”

“Take a heifer with you,” the Lord replied, “and say that you have come to make a sacrifice to the Lord. 3 Invite Jesse to the sacrifice, and I will show you which of his sons to anoint for me.”

4 So Samuel did as the Lord instructed. When he arrived at Bethlehem, the elders of the town came trembling to meet him. “What’s wrong?” they asked. “Do you come in peace?”

5 “Yes,” Samuel replied. “I have come to sacrifice to the Lord. Purify yourselves and come with me to the sacrifice.” Then Samuel performed the purification rite for Jesse and his sons and invited them to the sacrifice, too.

6 When they arrived, Samuel took one look at Eliab and thought, “Surely this is the Lord’s anointed!”

7 But the Lord said to Samuel, “Don’t judge by his appearance or height, for I have rejected him. The Lord doesn’t see things the way you see them. People judge by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12 So Jesse sent for him. He was dark and handsome, with beautiful eyes.

And the Lord said, “This is the one; anoint him.” 13 So as David stood there among his brothers, Samuel took the flask of olive oil he had brought and anointed David with the oil. And the Spirit of the Lord came powerfully upon David from that day on. Then Samuel returned to Ramah.(New Living Translation)

최근 상영 중인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어린 단종이 왕에서 쫓겨난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유배지에서 살아가는 인간 ‘이홍위’. 더 이상 왕이 아닌 한 죄인을 지켜야 하면서도 감시해야 하는 마을 촌장 엄흥도. 영화는 이 두 사람의 시선을 통해, 비극적인 역사 앞에 선 한 인간의 고뇌를 깊이 있게 그러낸 작품입니다. 단종은 고립된 유배지에서 자신의 존재를 마주하게 되고, 용기를 내지만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역사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그 무력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왕을 잃은 자리에 서 있는 선지자 사무엘이 있습니다. 세상의 역사는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사무엘상 16장은 다윗이라는 한 사람이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되는 장면이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기름부으셨고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의 자리에서 이미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선지자 사무엘의 깊은 애통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버리셨다는 사실 앞에서 사무엘은 깊은 애통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무엘이 슬픔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은 마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끝나버린 것처럼 슬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슬퍼하는 사무엘을 일으키시고 두려워하는 사무엘에게 믿음의 길을 예비해주셨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일으키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사울 때문에 언제까지 슬퍼할 작정이냐? 나는 이미 그를 버렸다. 사울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다. 이제 너는 기름을 뿔에 가득 채워 베들레헴으로 내려가서 이새라는 사람을 만나라. 내가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왕이 될 사람을 뽑아 놓았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사무엘이 슬퍼하는 동안에도 이미 다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본문은 단순히 사무엘의 슬픔만이 아니라 지나친 자기 확신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주께서 기름을 부으실 자라고 확신했습니다. 엘리압은 사울왕 처럼 키도 크고 외모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하시며 나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나의 슬픔, 나의 확신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눈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방향을 잃어버린 확신이 순종이 아닌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실패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세우셨습니다. 사울이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만약 십자가에서 끝났다면 우리에게 소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던 그 자리에서 부활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감정이나 확신이 하나님의 뜻을 가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사무엘의 지나친 슬픔과 자기 확신으로 분별력이 흐려졌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속에 살아 간 로렌스 형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사는 삶보다 더 달콤하고 기쁜 삶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천하고 체험하는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동기에서 그것을 연습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이 연습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동기는 오직 하나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원하시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주의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슬픔 자체를 책망한 것이 아니라, 슬픔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너가 언제까지 슬퍼할 작정이냐’라는 구절에서 슬픔 ‘너가 언제까지 슬퍼할 작정이냐‘라는 구절에서 슬픔 ‘아발’은 죽은 자에 대한 애도를 표현할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야곱이 사랑했던 요셉이 짐승들의 밥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여러날 동안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슬퍼할때 쓰인 단어입니다.(창 37:34) 사무엘은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의 운명이 끝난 것처럼 애통하고 있었을때, 하나님은 그를 슬픔에 머물러 있게 두지 않으셨습니다. “기름을 뿔에 채우고 가라.”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두려움 앞에 선 우리에게 믿음의 걸음을 열어 주십니다.

이민 땅에서 살아가는 삶에는 저마다의 무게가 있습니다. 자녀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말씀의 평안보다 불안이 먼저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삶의 무게가 하나님의 음성보다 더 크게 들리는 순간, 우리는 누구나 흔들립니다.

사무엘은 어린 시절 “주님, 말씀하십시오. 제가 듣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울이 그 사실을 알면 당장 저를 죽일 것입니다.”(2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두려워 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사울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너는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주께 희생제물을 바치러 왔다.’라고 말하여라. 제사를 드릴 때,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초청하여라. 네가 그 다음에 할 일은 그때 가서 가르쳐 주겠다. 너는 내가 일러준 그 사람에게 나를 대신하여 기름을 붓게 될 것이다.”(3절) 하나님은 전부를 보여 주시지 않았지만 두려움 가운데에서도 믿음의 한 걸음을 내딛게 하셨습니다.

이민 사회 안에서 오랫동안 비즈니스를 해오신 분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처음 외국에 나왔을 때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일을 시작하고 영어가 서툴고 문화가 다른 곳에서 한달 한달의 렌트비를 내기 위해 일했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살아낸 시간의 이야기였습니다. 주일에 예배에 오는 시간만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한주를 치열하게 살았노라고, 알고 보고 온 길이 아니라 매일의 하루를 살아낸 시간이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주어진 하루를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이 믿음의 걸음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이긴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영적으로 승리를 경험한 후 그는 이세벨의 한마디에 두려움에 빠져 더 이상 살 수가 없으니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은 쓰러진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먹이시고 재우시고 다시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가 아닌 불안과 절망의 자리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든든한 힘이 될 때까지 말씀을 붙잡고 한걸음 한걸음을 떼어 가도록 인도하십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힘은 우리의 경험도 아니고 우리의 노력도 아닙니다. “다음에 할 일은 그때 가서 가르쳐 주겠다.”(3절) 이 말씀은 두려움 앞에 선 우리에게 믿음의 걸음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사람을 세우십니다.

16:7 그러나 주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용모와 키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라. 그는 내가 정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외모를 보지만, 나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소년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새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맏아들 엘리압은 사울을 이어 왕이 될 만한 모습을 갖춘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는 내가 정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소년 다윗을 데려왔을 때, “바로 이 사람이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선택받은 것은 그가 뛰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앞에 선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골리앗 앞에서의 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과 사울 왕까지도 주저하고 있을 때, 소년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갔습니다. 그가 일상에서 양을 지키며 던졌던 그 물맷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하셨습니다. (삼상 17:45)

같은 환경이라도 누구는 선택받고 누구는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차이는 환경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삶의 중심과 방향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악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끝까지 이루어 가셨습니다. 합리적인 이성도 성령의 뜨거운 경험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목적이 사라질 때 우리는 곁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인간적인 정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머물지 않으면 교만해지기 쉽고, 경건의 자리를 날마다 세우지 않으면 거룩함으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는 것은 모든 길을 다 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바로 세워져 매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새의 막내 아들을 보시고 ‘바로 이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라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공동체도 우리의 가정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서로를 세워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넘어지고 실수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슬픔의 자리에서 우리를 일으키시고 두려움의 자리에서 길을 보여주시고 흩어졌던 시선을 주님께로 돌려 우리를 세우십니다. 사무엘이 애통할 때 이미 길을 예비하고 계셨고 두려워 할 때 나아가야 할 한 걸음을 보여주셨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미 보고 계시고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믿음의 여정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인도하심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03 15 2026 주일설교

사순절 네번째 주일

눈을 뜬 사람들

Those Whose Eyes Were Opened

요한복음 9:1-7

1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만나셨다. 2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왜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그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것은,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4 해가 있는 낮 동안,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서, 거기에 진흙을 갠 다음, 그 맹인의 눈에 바르시고 말씀하셨다. 7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시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이다.) 그 맹인이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눈을 씻자, 즉시 눈이 밝아졌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쉬운말 성경)

1 As Jesus was walking along, he saw a man who had been blind from birth. 2 “Rabbi,” his disciples asked him, “why was this man born blind? Was it because of his own sins or his parents’ sins?”3 “It was not because of his sins or his parents’ sins,” Jesus answered. “This happened so the power of God could be seen in him. 4 We must quickly carry out the tasks assigned us by the one who sent us.[a] The night is coming, and then no one can work. 5 But while I am here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6 Then he spit on the ground, made mud with the saliva, and spread the mud over the blind man’s eyes. 7 He told him, “Go wash yourself in the pool of Siloam” (Siloam means “sent”). So the man went and washed and came back seeing!(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설교를 준비하며 눈을 뜬 후의 사람이 아니라, 눈을 뜨기 전 그가 지녔을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 그에게 세상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캄캄한 어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사람은 왜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답은 제자들이 예상한 것과 달랐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그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것은,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왜? 라는 질문에 답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인과 이유를 묻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지금을 바라보기 보다 나에게 왜 이런일이 생겼는지를 고민합니다.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묻습니다. 이 길이 맞을까? 내 눈이 정말 떠지는 걸까? 그 삶의 무게를 안고 우리의 매일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복음의 능력은 ‘어떻게’라는 세상의 수많은 방법과 ‘왜’라는 내가 이제껏 정해 놓은 확신을 내려놓고, 지금 누가 이 일을 하고 계시는가에 집중할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지금 누가 그의 눈을 열고 계시는지 보도록 하시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시선을 새롭게 바꾸어 주셨습니다.

첫째 현실의 고통을 다르게 읽는 시선

맹인은 자신의 삶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시선이 보지 못하는 어둠보다 더 무겁게 그의 삶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눈을 뜨고 세상을 보기 전에 들어야 할 것을 듣게 하신 것입니다. 평생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며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실로암으로 갑니다.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했을까요? 보여서 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붙들고 간 것입니다.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뜨고 본 세상은 분명 새로운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고통속에서 전혀 다른 것을 보셨습니다.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목적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같은 시대, 같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다릅니다. 눈이 열리기 전에는 아픈 사람 옆에서 “왜 저렇게 됐을까”를 묻습니다. 힘든 형제 옆에서 “본인이 좀 더 잘했어야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적이 이끄는 사람은 같은 자리에서도 누가 이 일을 행하고 계신지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과거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옛생활은 끝이나고 언제나 회복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는 사람들은 판단하지 않고 함께 기도합니다. 지금 우리는 내게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유대교의 열심이던 종교인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삶의 목적이 종교적 열심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감옥에서 쓴 편지의 고백을 보면, 죽음과 삶이 놓인 상황 속에서도 주어진 삶을 예수를 위해 온전히 살아야 하는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에게 죽음과 삶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자리였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은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는 힘인 것입니다. 이 복음은 결코 가볍거나 얕지 않습니다.

1914년, 미국의 찬송 시인 루퍼스 맥대니얼(Rufus H. McDaniel)은 아들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로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어둠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온 고백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시입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다가 밝은 빛 홀연히 비쳐 저 멀리 하늘문 환하게 보임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이 고백이 어둠속에서 참빛을 찾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눈을 뜨고 시선이 바뀐 사람들 안에는 고통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복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같은 시대, 같은 곳에서 살아가지만, 우리의 시선은 과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미래로 향하며, 현재의 삶을 살아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삶을 위해 분주하게 달려갈 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도 주님을 위한 일에 생명을 다합니다. 여전히 과거에 짓눌려 아파하는 사람과 도와야 할 사람을 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일하실 것을 봅니다. 제자들은 누구의 죄인지를 물었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는 것을 보여주신 것처럼, 예수님의 사람은 어떠한 자리도 보내신 이를 드러내는 영광의 자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

창조기사를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잃은 사람을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렇게 빚으셨을까? 하는 상실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명령입니다.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행하신 이 행동은, 태어날 때부터 결핍을 가진 사람에게도 새롭게 보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걷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길에서 주님의 말씀 하나 붙들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한걸음 한걸음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맹인에게 하신 일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의 부모까지 불러다가 눈을 뜬 사람이 당신들의 아들이 맞냐고 낱낱히 캐묻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서도 예수의 말씀을 불편하게 듣고, 오히려 자신들에게 맹인이라고 하는 것이냐고 반문합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확신 때문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당신들이 맹인이라면, 죄가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당신들이 지금 본다고 주장하니, 당신들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소.” (9:41)

성 어거스틴은 자신의 옛 자아와 씨름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늦었습니다. 너무나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은 내 안에 계셨는데 나는 밖에 있었습니다. 당신은 빛나고 계셨는데 나는 눈이 멀어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오셨지만 자기 안에 갇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편견과 생각을 넘어섭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자기의 의까지 무너뜨리시려고 십자가의 길을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자아가 있습니다. 나의 종교적 확신, 내 기준이 앞설 때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날 것임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나의 의로움을 완전히 내려놓을때 주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해 주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우리 힘으로 걷는 길이라면 누구도 이 길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신데 자신을 비워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께 마음을 닫고 눈을 뜨지 않는 이들에게, 주님은 끝까지 은혜의 문을 열어두시고 나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일은 믿으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눈을 뜨게 하신 것은 한 사람의 사건이 아닙니다. 세상의 미움을 사랑으로 이기신 것이고, 어둠이 하나님의 의로 뒤집어진 사건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도 그렇습니다. 잘 믿고 제대로 살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이 흔들릴 때도 있고 외로운 여정이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수록 손해 보는 것 같고 가정에서도 나 혼자만 씨름하며 무릎 꿇고 있다고 느껴지는 홀로 서는 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그 자리, 세상에서 버림받고 낮은 마음으로 서 있는 자리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믿음 안에서 눈을 뜬다는 것은 더 많이 알고 보는 것의 차원이 아닙니다. 나의 옆 사람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홀로 선 자리가 있습니다. 세상의 아픔 가운데에서 살아가다가 다시 이곳으로 찾아왔을 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사랑으로 안아주는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찾아오신 그 사랑으로 함께하는 실로암이 우리 교회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시오

이제 우리의 삶에도 말씀으로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확실하지 않아도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토요일 새벽기도에서 청년 임원들이 특송을 준비했습니다.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불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 폭풍 가운데 무너질 때도 주님 내 곁에 함께 하시네,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나도 그들을 용납하는 것, 나를 위해 달리신 십자가 사랑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  

우리는 매일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도 아무일 없는 하루를 꿈꿉니다. 주의 자녀로 살아가지만 불 가운데로 걸어가는것, 폭풍 가운데 살아가는것, 그들을 용납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두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주의 자녀로 살아가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날때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이 실로암에서 눈을 씻고 돌아 왔을 때 그가 본 것은 자신을 심문하는 바리새인, 부모도 이웃들도 외면하였던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이 외면하던 그를 예수님이 찾아가십니다.

4절 보시면, 4 “해가 있는 낮 동안,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새 삶에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성공과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제한된 시간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보내신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홀로 있는것 같은 자리에서도 우리 곁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로 기도해 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마음을 함께 해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맹인은 말씀을 붙들고 실로암으로 갔습니다. 우리도 말씀안에서 한 걸음 한걸음을 걸어가야 합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은 자’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실로암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자리에서 말씀으로 눈을 뜨고 세상으로 보냄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주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걷는 이들은, 정리된 답을 찾는 여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린 순종의 여정에 서게 됩니다. 이 고백 위에 서서, 보냄받은 성도의 삶을 담대히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308 2026 주일설교

사순절 세번째 주일

오늘의 예배

Today’s Worship

시편 95편

95:1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같이 주님께 기쁨의 노래를 불러 드리자. 소리 높여 우리 구원의 반석이신 주님을 찬양하자. 2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분께 나아가자. 그분을 기리는 즐거운 찬송을 부르자. 3 주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4 깊디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디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이다. 5 주께서 바다를 지으셨으니 바다도 주님의 것이요, 마른 땅도 주님이 손수 빚으신 것이다. 6 그러므로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함께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 7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이요 그분께서 돌보시는 양 떼라. 오늘날 너희는 주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 8 ○ “므리바에서 너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맛사에서 너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희는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고 완고한 마음을 품지 말아라. 9 그때에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들을 똑똑히 보고서도, 나를 거듭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다. 10 그러므로 나는 40년 동안이나 그 백성들에게 분노하며 말하기를 ‘저들은 마음이 삐뚤어진 백성이요, 내 길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이로다.’ 하였고, 11 또 나는 화가 나서 맹세하기를 ‘저들은 내가 편히 쉬라고 저들에게 허락한 그 땅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쉬운말 성경)

1 Come, let us sing to the Lord!
    Let us shout joyfully to the Rock of our salvation.
2 Let us come to him with thanksgiving.
    Let us sing psalms of praise to him.
3 For the Lord is a great God,
    a great King above all gods.
4 He holds in his hands the depths of the earth
    and the mightiest mountains.
5 The sea belongs to him, for he made it.
    His hands formed the dry land, too.

6 Come, let us worship and bow down.
    Let us kneel before the Lord our maker,
7     for he is our God.
We are the people he watches over,
    the flock under his care.If only you would listen to his voice today!
8 The Lord says, “Don’t harden your hearts as Israel did at Meribah,
    as they did at Massah in the wilderness.
9 For there your ancestors tested and tried my patience,
    even though they saw everything I did.
10 For forty years I was angry with them, and I said,
‘They are a people whose hearts turn away from me.
    They refuse to do what I tell them.’
11 So in my anger I took an oath:
    ‘They will never enter my place of rest.’”(New Living Translation)

산을 오르는 사람은 정상을 향합니다. 입구에서 첫 발을 내딛을 때와 정상까지 올랐을때의 감격은 전혀 다릅니다. 같은 산이지만 도달해 본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올랐습니다. 믿음의 길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들 이삭과 함께 올라갑니다. 그리고 정상에서 순종의 손을 들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양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성소로 올라가며 시편 95편을 함께 노래했을 것으로 봅니다. 1절에서 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는 마음으로 성소 안으로 올라갑니다. 그 첫단어가 ‘오라’입니다.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같이 주님께 기쁨의 노래를 불러 드리자” 6절도 보시면,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함께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라’는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3절로 5절은 주를 처음 만난 기쁨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3 주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4 깊디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디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이다. 5 주께서 바다를 지으셨으니 바다도 주님의 것이요, 마른 땅도 주님이 손수 빚으신 것이다.’ 넓은 바다도 우리가 딛고 살아가는 땅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빚으셨기에 성도는 믿음으로 하루하루 땅을 밟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작은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합니다. 오늘날 미세한 반도체 칩 하나에 세상 모든 정보가 담기고, 작은 화면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들여다 보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잃어버린 시대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믿음을 통해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됩니다. 그리고 그 동행 안에서 우리를 향해 품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여정입니다.

7절에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라는 선언과 함께 시편의 분위기가 갑자기 전환됩니다. 그리고 8절부터는 광야에서의 사건, 곧 므리바와 맛사에서 조상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했던 일을 상기시켜 줍니다. 므리바(מְרִיבָה)는 ‘다툼’, 맛사(מַסָּה)는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물이 없자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다투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만나를 먹었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앞서 가는 것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출 17:7)를 물었습니다. 므리바와 맛사에서의 사건은 하나님을 불신하며 불평했던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38년을 광야에서 연단받고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약속의 땅을 보지 못했습니다. 시편 95편을 묵상하며 우리가 기억해야 교훈을 나누겠습니다.

첫째, ”오늘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완고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의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할 때 시편 95편을 인용합니다. “7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는다면, 8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시험받던 기간에 반역했던 것처럼,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히3:7-8)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4장에서도 히브리서 기자는 다윗을 통해 ‘오늘의 예배’가 무엇인지 다시금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시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그 말에 순종하고 너희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히 4:7). 우리의 ‘오늘’이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단어 ‘하이욤’은 지금 주의 음성을 듣고 현재를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어제의 말씀으로 오늘을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예배’는 매일 주시는 새로운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매일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십자가에 이끌림으로 우리의 강팍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불평과 불신의 언어가 시작됩니다. 예배는 주의 음성을 ‘오늘’ 듣고, ‘지금’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주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광야 1세대는 하나님을 불신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기억하고 마음을 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완고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자리를 채우십니다. 7절을 보시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이요 그분께서 돌보시는 양 떼라. 오늘날 너희는 주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

둘째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입니다.

‘기르시다’의 히브리어 마르이트(מַרְעִית)를 영어성경은 pasture로 번역했습니다. 풀밭, 목초지입니다. 목초지에서 풀을 먹고 살아가는 양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양식이 되시는 것입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들이 먹을 풀밭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에게 “나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기 위해 왔다”라고 말씀셨습니다. 양은 주의 말씀을 들을때 영혼이 살찌웁니다. 주의 자녀들의 영혼을 살찌우는 것은 세상의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업에 성공한 사람도, 실패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태어난 아이를 안고 헌아예배를 드리는 부부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이들도 주의 말씀을 듣고 영혼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조용히 병이 자라납니다. 반면에 주가 인도하는 양들은 깊은 골짜기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은 하나님의 훈련이었습니다. 광야에 풀이 없으니, 하나님은 매일 아침 어김없이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광야가 없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알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광야의 시간에 있는 이들에게 그 은혜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광야는 어제 저장해 놓은 은혜로 살수 없는 땅입니다. 욕심을 낼때 그 만나에 악취가 나고 벌레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만나로 사는 것이 아닌 오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내 삶의 안정을 위해 살아갑니다. 집을 장만하고, 자녀를 위해 많은 것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선명하던 목자의 음성이, 삶이 안정될수록 왜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것일까요? 하루의 양식이 넉넉해질수록 왜 기도의 절박함은 사라져 가는 것일까요? 아는 것은 많아지고 경험도 깊어지는데 하나님께 무릎 꿇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그러나 양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옛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고, 마음이 굳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현실의 문제를 넘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는 시간이 지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진 사람의 손을 잡아 주고,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함께 걸어 주며, 아직 길을 잡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의 책임입니다.

셋째 문제는 밖에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8-10)

기적을 보았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마음이 굳어진 것은 기적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기적이 아니라 참된 순종입니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 그것이 우리가 지금 드려야 할 ‘오늘의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을 주셨다면 우리에겐 오늘을 살아내야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내려 놓아야 합니까? 기도의 중심에 있었던 나만을 위한 날카로운 검, 겸손한 척 포장된 교만, 손과 발은 움직이지만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린 종교적 형식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왜 예수여야만 했는지,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다시 진지하게 그 음성 앞에 서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예배 드리러 올라가는 공동체에게 굳이 광야의 실패를 상기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배하는 자들도 동일한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기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여전히 완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귀로 듣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거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오늘 너희에게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의 설교 가운데 「거의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이라는 설교문이 있습니다. 웨슬리는 Almost Christian을 겉으로는 신앙의 모든 모양을 갖추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중심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배하고 기도하지만, 그 은혜가 삶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려드려야 할 예배는 내 삶의 ‘거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거의 다 온 것 같지만, 거의 다 드리는 것 같지만, 거의 다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 같지만 내 전부를 드리지 못하는 그 자리에서 오늘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어제의 양식으로 살 수 없었고, 오늘 주시는 믿음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려는 유혹 앞에 서 있었습니다. 끝까지 구하십시오, 찾으십시오, 두드리십시오.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입니다.

배척받고 조롱받으신 예수께서 그 길을 먼저 걸으셨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드럽게 마음을 열고, 그 길 위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나의 몸은 주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점점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씀보다,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말에 더 끌립니다.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보다 내 상처를 공감해 주는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 편리한 도구가 많아질수록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헌신은 점점 가벼워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13 도리어 여러분은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매일의 그날그날 동안에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마음이 완고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히3:13)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고 얻게 되는 그 어떤 것도 구원을 보증해 주지 않습니다. 신실한 성도는 서로가 깨워주고 복음이 치료제가 될수 있도록 서로를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부부도 서로의 정서적 외로움만을 채워주는 관계라면 세상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부부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도록 서로를 깨우고 ‘오늘의 복음’으로 서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이 시간 지금 이곳은 거룩한 공간입니다. 시편 기자가 전하는 ‘주의 음성을 들으라’는 권면 앞에 더 진지하게 마음에 새기며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닫혀있던 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종의 자리가 어디인지,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나 홀로 씨름하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던 것이 무엇입니까?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가 함께 올라가며 주 앞에 엎드렸습니다. 엎드려 고개를 숙일때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요, 주님께서 우리를 풀밭이 되시고 풍성한 목초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라’로 시작된 시편 95편은 ‘들어가지 못하리라’로 끝이 납니다. 광야 세대에게 닫혔던 그 문이 우리에게는 ‘오늘’로 열려 있습니다. 그 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열어 주셨습니다. 깊고 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고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바다를 지으신 분, 마른 땅을 손수 빚으신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의 풀밭이 되시고 풍성한 목초가 되어 끝까지 돌보아 주십니다.  이 ‘오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3 01 2026 주일설교

사순절 두번째 주일

고개를 들어 바라보라

Look Up and Live

요한복음 3:8-15

3:8 바람은 제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법이오. 당신은 바람소리를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불어온 것인지, 다음에는 그 바람이 어디로 갈 것인지 알 수 없소.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도 이와 같소.” 3:9 니고데모가 다시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3: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오? 3:11 내가 진정으로 당신에게 말하겠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 말하고, 또 우리가 본 것에 대해 증언하오. 하지만 당신들은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소. 3:12 내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말해도 당신들이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면 당신들이 어찌 믿을 수 있겠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외에는 아무도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소. 3:14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높이 쳐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높이 들려져야 하오. 3:15 그것은, 인자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오.(쉬운말 성경)

8 The wind blows wherever it wants. Just as you can hear the wind but can’t tell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is going, so you can’t explain how people are born of the Spirit.” 9 “How are these things possible?” Nicodemus asked. 10 Jesus replied, “You are a respected Jewish teacher, and yet you don’t understand these things? 11 I assure you, we tell you what we know and have seen, and yet you won’t believe our testimony. 12 But if you don’t believe me when I tell you about earthly things, how can you possibly believe if I tell you about heavenly things? 13 No one has ever gone to heaven and returned. But the Son of Man[e] has come down from heaven. 14 And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15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New Living Translation)

지난주 창세기 3장을 통해 뱀에게 유혹당한 아담과 하와를 보았습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그 탐스러운 열매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만은 ‘먹지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이후 단단한 사람도 냉정한 사람도 순하고 착한 사람도 죄의 기원 앞에서 누구도 벗어날 사람이 없기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삶의 중심에 두고 걷자고 권면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는 유대사회에서 유력한 지도자였고, 율법교육도 철저하게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간 것은 그의 영적인 어둠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표적을 보고(3:2)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았기에 그 말씀을 더 알고 싶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찾아 온 밤이 우리의 인생에도 있을 것입니다. 생각했던 답이 흔들리고 낯설게 느껴지는 밤, 하나님의 뜻이 느껴지지 않는 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인생의 밤에 찾아오시며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초대하십니다. 신앙의 연수가 쌓이고 성경적 지식이 쌓일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식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깨어 살아가라는 도전을 주십니다. 내게 익숙한 예배의 자리, 말씀, 기도의 자리가 더 이상 새롭지 않다고 느껴질 때에도 성령의 바람은 멈추지 않습니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독자적으로 붑니다. 스스로 시간을 결정하기 때문에 언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알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이 이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야고보 사도는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라고 표현하고(야 1:18), 바울은 창조하다의 뜻을 담아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단어로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이 무엇일까요?

1.거듭남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 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 “내가 진정으로 당신에게 말하겠소.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 아노덴(ἄνωθεν)이라는 단어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다시’라는 뜻입니다.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율법을 교육받은 니고데모는 구원을 위해 무엇을 쌓아올려야 한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다시”라는 것은 다시는 삶의 중심이 이전처럼 살수 없도록 바뀐것입니다. 아노덴의 두번째 의미는 ‘위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는 말씀처럼 위로 부터 다시 주어지는 영적인 삶을 의미입니다.

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깊은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0.1%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끝까지 스스로 빠져나오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결국 나올 수 없었습니다. 내 삶이 지금 척박하고 절박하든, 평온하고 아무 문제가 없든 성경은 인간이 영적으로 죽어 있어서(엡 2:1),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손을 내밀어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이것이 곧 거듭남입니다.

또 거듭남은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형질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그 순간 아무것도 스스로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심겨졌기에 세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점점 알아가듯이, 거듭난 사람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단 하나,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고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인자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오. 진실로 그렇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소. 그것은,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오.”(요 3:15-16) 예수님을 믿는 누구든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라는 말이 가끔 마음에 걸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더 열심히 하고 노력한 사람이 인정 받고 성과를 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기준으로 신앙의 자리에 서면 불편함이 생길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더 오래 믿었고, 더 많이 헌신했고, 더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그 자리에 서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가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믿음은 내가 쌓아 올린 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헌신과 내 공로를 내려놓고 그분을 붙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는 우리의 자격과 공로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은혜를 경험하고 이해하면 대부분의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믿음은 내 공로로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내 삶의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안에 감추어져 있던 나의 의로움과 교만을 내려놓고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삶속에서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연약해지는 그 자리에 십자가를 세워주셨습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 스스로 삶의 문턱을 경험하고 실수를 배우고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 때가 옵니다. 그때 부모는 아이의 부족함을 대신 채워줄 수 없고 문턱을 대신 넘어줄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말없이 안아주고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살아가지만 결국 품에 안고 기도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를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그 자리, 실수하여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더 깊이 만나주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능통한 니고데모에게 그가 알고 있었던 민수기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3:14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높이 쳐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높이 들려져야 하오. 3:15 그것은, 인자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오.”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장대에 매단 것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죽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광야의 뱀에게 물린 것은 심판의 자리 한가운데에 있는 백성들을 위해 구원의 길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릴수만 있다면 예수께서 기꺼이 십자가에 달릴것이니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이뤄 놓으신 방법을 믿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내려놓지 못한 것들을 만납니다. 그 불편한 자리가 우리를 멈추게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을 닮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이 생명의 원리가 계속 작동이 됩니다. 그래서 더 깊이 은혜를 발견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들려지다’ 휩소데나이 (ὑψωθῆναι)는 단순히 위로 올려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 그것이 곧 높임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설교 하시면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조차 이것이 어떤 죽음을 가리키는지 물었을 만큼, 십자가는 이해하기 어려운 자리였습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오? 3:11 내가 진정으로 당신에게 말하겠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 말하고, 또 우리가 본 것에 대해 증언하오. 하지만 당신들은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소. 3:12 내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말해도 당신들이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면 당신들이 어찌 믿을 수 있겠소?

쌓아온 지식으로는 이 일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이 일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영적인 어둠 속에서 어디로 가는지 조차 알지 못하던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기에 십자가의 능력에 이끌림 받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쌓아 올려서 하나님의 뜻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생의 광야 길에서 불평과 낙심의 자리, 스스로 해결할수 없는 자리에 놓일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실패하면 안되고 약해지지 말라고 흔들리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광야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가 버티고 감당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 삶의 민낯을 만나는 자리, 연약함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시작됩니다. 환경 앞에 고개 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분명 로마의 처형 도구였지만 하나님은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오래 믿었는지, 잘 살아 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고개를 들었는지를 보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인자를 믿는 순간, 이미 시작되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일을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바람을 만들지 못하지만 그 바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가장 낮은 자리가 영광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시작된 생명을 품고 걷는 사람들입니다. 고개를 들고 십자가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다시 살아납니다.

0215 2026 주일설교

사순절 첫번째 주일

Standing Before God

창세기 3:1-7

3:1 뱀은 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어떠한 들짐승보다 가장 교활하고 약삭빨랐다. 뱀이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며?” 3:2 여자가 뱀에게 말했다. “아니야,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먹어도 돼. 3:3 하지만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먹으면 안 돼. 하나님께서 그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어. 그랬다가는 죽게 될 거라고 하셨어.” 3:4 뱀이 여자에게 말했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을걸. 3:5 너희가 그걸 먹으면, 그 날로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거야. 그래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거야. 하나님은 그걸 아시고, 너희더러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거야.” 3:6 ○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쳐다보니 정말 먹음직스러웠고, 보기에도 탐스러웠다. 과연 사람을 지혜롭게 해주는 열매처럼 보였다. 여자는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먹고는, 자기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 열매를 먹었다. 3:7 그러자 두 사람 모두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치마처럼 몸에 둘렀다. (쉬운말 성경)

1 The serpent was the shrewdest of all the wild animals the Lord God had made. One day he asked the woman, “Did God really say you must not eat the fruit from any of the trees in the garden?” 2 “Of course we may eat fruit from the trees in the garden,” the woman replied. 3 “It’s only the fruit from the tree in the middle of the garden that we are not allowed to eat. God said, ‘You must not eat it or even touch it; if you do, you will die.’” 4 “You won’t die!” the serpent replied to the woman. 5 “God knows that your eyes will be opened as soon as you eat it, and you will be like God, knowing both good and evil.”6 The woman was convinced. She saw that the tree was beautiful and its fruit looked delicious, and she wanted the wisdom it would give her. So she took some of the fruit and ate it. Then she gave some to her husband, who was with her, and he ate it, too. 7 At that moment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suddenly felt shame at their nakedness. So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to cover themselves.(New Living Trans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