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3 2026 주일 설교

부활절 제 5주

하늘을 보면 주님이 보입니다.

Heaven Opened, Christ Revealed

사도행전 7장 55-60절, 베드로전서 2장 9-10절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59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55 But Stephen, full of the Holy Spirit, gazed steadily into heaven and saw the glory of God, and he saw Jesus standing in 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 56 And he told them, “Look, I see the heavens opened and the Son of Man standing in 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 57 Then they put their hands over their ears and began shouting. They rushed at him 58 and dragged him out of the city and began to stone him. His accusers took off their coats and laid them at the feet of a young man named Saul. 59 As they stoned him, Stephen prayed, “Lord Jesus, receive my spirit.” 60 He fell to his knees, shouting, “Lord, don’t charge them with this sin!” And with that, he died.(New Living Translation)

9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며 왕의 제사장입니다. 또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홀로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심을 선포하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10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전에는 은혜를 몰랐지만, 지금은 은혜를 받고 누리고 있습니다. (쉬운 성경)

9 But you are not like that, for you are a chosen people. You are royal priests, a holy nation, God’s very own possession. As a result, you can show others the goodness of God, for he called you out of the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10 “Once you had no identity as a people now you are God’s people. Once you received no mercy now you have received God’s mercy.”(New Living Translation)

칼빈은 사도행전을 ‘거룩한 역사’라 불렀습니다. 사도들이 박해와 고통 속에서도 교회가 세워져 가는 그 과정을, 칼빈은 거룩한 역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기 교회를 친히 돌보시는 역사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 교회로 부터 유대지역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인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역사가 왜 성령을 통해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되었습니다. 인류는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며 하나님께 도전했고, 그 교만의 결정체인 바벨탑은 결국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결과 언어가 혼잡해 졌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도 서로에게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서로 다른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흩어진 사람들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두 가지 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서 계신 주님을 보았던 것과 하늘을 본 사람이 용서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의 역사에 비하면 짧은 여정이지만 성령이 임하면 삶 가운데 죽음의 힘을 이기는 뜨거운 열정이 임합니다.

세상에는 억울함을 외치는 사람도 있고,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고, 말없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위해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는 죽음을 이기는 고백입니다. 순교의 장면 가운데 돌에 맞아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 스데반 집사님의 입술의 고백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핍박과 박해, 죽음이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사람에게 하늘을 여십니다.

1.하나님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대와 설렘이 있습니다. 말씀을 알아가고 싶고 섬기는 것이 기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열심이 익숙함이 되고 하나님을 찾기보다 내 습관의 열심으로 의무를 다하게 됩니다. 열심과 섬김의 자리에서 익숙함이 무뎌짐이 되고 의무가 되고 무감각이 찾아 옵니다. 실망과 상처가 자리하면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딘가에 있습니까? 56절을 보십시오.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스데반 앞에서 주님이 서 계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는 갈등이 있고 재정의 압박이 있고 예상치 못한 사고와 질병이 있습니다.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던 그 산에서, 모세의 광야 40년의 시간 속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어 있던 그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한번도 그들을 버려둔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뿐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자신이 어떻게 세상에 왔는지 모릅니다. 그저 밥상이 차려지면 먹고, 잠들면 이불을 덮어 주는 손길을 당연히 여깁니다. 그 손길이 사랑인지 어떤 헌신인지 모르고 자랍니다. 그런데 어른이 된 후에 삶의 무게를 알아가는 날 그 사랑과 헌신을 깨닫게 됩니다. 아이를 낳는 순간 친정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아이를 낳는 기대와 설렘으로 기뻐하다가 그 고통 앞에서 비로소 어머니의 고통을 몸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은 가장이 되어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다가 말없이 걸어가시던 무뚝뚝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이해하게 됩니다. 부모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스데반의 눈도 그렇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해하던 메시야의 이해보다 한 걸음 앞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이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가 구약의 인물을 빗대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을때 유대교인들은 신성 모독적 발언으로 이해했습니다. 이후 이성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에 의해 그 즉시 처형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그 순간에도 자신에게 향하는 돌을 보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그의 눈을 열어 서 계신 주님을 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2. 하늘을 본 사람은 땅에 묶이지 않고 세상으로 파송되어 살아갑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율법을 알았고 성경을 알았던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의 구조가 흔들리고 위협받자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습니다. 듣지 않겠다는 의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길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방향은 분명한데 그 길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나기도 하고, 숨겨져 있던 암초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이후 안정되어 가던 예루살렘 지역 교회에 엄청난 박해의 광풍을 몰고 오게  됩니다. 성도들은 박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흩어졌지만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 된 것입니다. 흩어진 자리였지만 보냄 받은 자리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 열심이 교회를 핍박하는 데 쓰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울을 바꾼 것은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설득도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그 열정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선교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예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때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고 가장 깊은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1806년 미국 부흥의 시기에 뉴잉글랜드 리치필드(Litchfield)지역 윌리엄스 대학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다섯 명의 청년이 강가에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비를 피해 건초더미 속으로 몸을 숨겼고, 건초더미속에서 기도를 하는데 성령께서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가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고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그 기도회가 수많은 청년들이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한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른 것을 봅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기도는 원망이 아니라 용서였습니다.

그 용서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했던 기도와 동일한 기도였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34) 스데반은 자신이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용서도 사랑도 결심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받은 은혜를 기억할 때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논리로 설득되지 않습니다. 설명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용서하고 사랑할 때 복음이 전해지게 됩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죄를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용서의 기도를 올려 드릴 때 교회의 본질이 살아납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에는 은혜보다 상처가 더 깊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하는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면서도 혼자 안고 있기엔 너무 무거운 그 짐이 있다면 그 자리를 하나님이 기억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상처는 오래되면 마음을 차갑게 만듭니다. 귀를 닫게 하고,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홀로 감당하지 않고 함께 나누어 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한 몸으로 부르셨습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하늘을 바라볼 때 순교의 자리에서도 용서의 기도를 드립니다.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면 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은 은혜 받은 자의 기도를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59절과 60절입니다. 59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우리의 기도는 나의 한계를 마주하는 그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스데반은 그 한계의 자리에서 자신의 죽음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 왕의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을 드렸습니다.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제사장의 직무였습니다. 스데반은 돌이 날아오는 그 자리에서도 예수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었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받아 들였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선 것입니다. 하늘을 본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였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제가 처음 외국 땅에 왔을 때, 의지할 곳도 없고 낯설고 힘든 상황 속에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6개월 된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아빠인 저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의 답을 제 안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때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을 붙들게 하셨습니다. 붙들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서 그 낯설고 외로웠던 그 시간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낯선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전히 낯선 사람들을 내 마음에서 빼내지 말고 그대로 두시고 기도하십시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흩어진 나그네 디아스포라로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경쟁하기 위해 보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이 자리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이 선교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자녀들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 자리가 우리의 선교지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신 이유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그 사람을 위한 기도의 자리에 서십시오. 내 마음에서 품기 어렵다면 주님께 맡기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땅을 떠나는 순간에도 그는 고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의 죽음을 ‘잔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교회됨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공동체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매년 5월이 되면 함께 했던 지체들이 새로운 곳으로 떠납니다. 이민 교회에서 떠나보냄은 익숙해질만도 한데 매번 아쉽고 마음이 쓰입니다. 어떤 헤어짐이든 빈자리는 늘 마음에 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셨고, 서로의 삶을 중보하는 삶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떠남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함께 울었고 함께 배우며 웃었습니다. 그 시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그 자리를 함께 했다는 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제 새롭게 떠나는 그 현장에서도 계속 하늘을 보는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떠나보내는것도 아쉬운것이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모든 만남과 헤어짐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변함없이 우리의 자리에서 하늘을 보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셨다면, 주어진 어떤 상황에도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는 순간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을 본 사람은 상황의 어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씨앗은 땅에 묻혀야 열매 맺습니다. 하나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 힘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끝까지 의탁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땅을 보면 땅의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보면 주님이 보입니다. 하늘을 보면 주님이 보이고, 주님을 보면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면 용서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삶을 나누고, 서로의 짐을 함께 지며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심으십시오. 죽음이 생명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늘을 보십시오. 주님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