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05 2026 주일설교

(부활주일설교)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기

Dying And Rising with Christ

빌립보서 3:10-11

김태환 목사

10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11 그분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도 마지막 날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쉬운성경)

10 I want to know Christ—yes, to know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participation in his sufferings,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 11 and so, somehow, to attain to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NIV)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41년 전,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당시 이름은 제물포) 항구에 입국했습니다. 그날은 4월 5일 부활절이었습니다. 아펜젤러는 미국 북감리교 소속 선교사로, 언더우드는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해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우연히도 올해 부활절이 4월 5일이어서 감회가 더욱 새롭습니다.

부활절은 우리에게 특별한 주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주신 것을 축하하고,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기로 결단하는 주일입니다. 바울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하는 것이 이 세상에만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9) 왜 그렇습니까?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삶을 소망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믿음 생활에 필수적(必須的)입니다. C.S. Lewis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가 거짓이라면 기독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참이라면, 그것은 무한히 중요한 것이다. 기독교는 결코 적당히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 -C.S. Lewis, God in the Dock 기독교를 좋은 종교라고 말하거나, 삶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나, 마음에 위로를 주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런 정도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면, 이것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만큼 중대한 사건입니다. 맞습니까? 반대로, 기독교가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우리 삶에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이스가 기독교는 적당히 믿을 수 있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 믿음의 주춧돌(cornerstone)과 같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기초가 없는 모래 위에 세운 집 같아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쉽게 무너집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단단하지 않습니다. 사는 방식이 단순하고, 현세적(this worldly)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은, 단단한 주춧돌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삶을 대하는 태도가 견고합니다. 어려움을 당해도 잘 이겨냅니다. 쉽게 무너지지 않고,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당장에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관심을 두고 삽니다.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삽니다(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고린도후서 5:7) 아펜젤러가 한국에 왔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7살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그보다 한 살 적은 26살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한국 땅에 첫 발을 딛고 이런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습니다. 이날 죽음의 굴레를 끊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묶고 있는 모든 사슬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그들은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왔습니다. 그들이 세상적인 성공이나 명예나 이익을 따라 살았다면, 조선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따라 산 사람들이었기에, 조선을 위해 자신을 드리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오늘 제 설교를 통해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부활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부활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참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전능한 능력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일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3:10-11, 현대어 성경)

바울은 그의 인생의 주된 목적을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기노스코(γινώσκω)’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같이,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요한복음 10: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사용하신 말이 ‘기노스코’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우리가 관계의 깊이를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깊이 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깊이 알고자 하는 열망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조선 후기는 성리학(性理學)이 심화된 때였습니다. 이 때, 정약용이라는 뛰어난 학자가 나왔습니다. 정약용의 바로 위 형이 정약종이고, 제일 큰 형이 정약전입니다. 모두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입니다. 정약종은 엄격한 유학자였는데, 천주 교인이된 이벽(李蘗)과 밤샘 토론에서 잡득(雜得)을 얻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천주는 참으로 계신 분이로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왔다면, 그분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그리고 자기 부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부인, 어젯밤 나는 참된 도(道)를 보았습니다. 천주께서 만물을 지으셨고, 우리의 영혼도 그분께서 돌보십니다. 이 도는 사람을 바르게 하고 가정을 평안하게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 도 안에서 참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제 천주를 섬기겠습니다. 이것이 내가 찾던 도이며, 내 삶을 바르게 하는 길입니다.” 정약종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장남 정철상과 함께 순교합니다. ‘주교요지(主敎要旨, 1795년경)’라는 한글 교리서를 남겼습니다. 부인 류소사,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합니다. 아들 정하상은 왕에게 올린 ‘상재상서(上宰相書, 1839)’와 교황청에 사제 파견을 요청한 ‘조선교우서(朝鮮敎友書, 1824년)’로 유명합니다. 당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정하상의 편지 번역본을 읽고 “동방에 주님의 기적이 일어났다”라고 하면서 크게 감동했다고 합니다.

정약종은 이벽과의 밤샘 토론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그의 삶은 하루 아침에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변화되었고, 자녀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천주교의 역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머리로는 알지만 행동이 없고, 실천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문제입니다. 정약종의 고백처럼,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온 것을 알았다면, 그의 피조물인 우리는 마땅히 그분을 섬기고 따르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두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Amplified Bible에 보면, 부활의 능력이라는 말이 ‘신자들 안에서 넘쳐나고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which overflows and is active in believers)’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이 말씀을 하면서 박해로 예루살렘을 떠나 지중해 연안에 흩어져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을 고난 속에서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힘은 그들 속에서 역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나도 그 능력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수요예배를 ‘삼일예배’라고 불렀습니다. 주일마다 한 번씩 예배드리는 것으로는 모자라 주일이 지난 후 삼 일째 되는 수요일 저녁에 다시 모인 것입니다. 삼일예배는 사도신경의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는 구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어렸을 때 삼일예배를 경험한 저는, 삼일예배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주중에도 기억하며 살겠다는 신앙적인 열망을 담은 아름다운 전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지신 십자가의 정신을 내 삶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고 함께 아파해주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알고 함께 울어주고, 다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함께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2장에,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 온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어느 집 안에 계셨습니다. 이미 사람들이 집 안까지 빽빽하게 모였기 때문에 병든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 네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그 집의 지붕을 뜯고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침상 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긍휼이 여기는 마음과, 예수님께 데리고 가면 친구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예수님께 대한 ‘적극적인 행동하는 믿음(active faith)’을 보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겪고,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함께 울어주고,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내 주는 일, 이것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나누는 일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그리스도를 알고자 했던 이유는, 그 자신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3:11, 현대어성경)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 이것을 위해서 자기는 어떤 희생과 대가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말하면서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 신앙이 반드시 고난을 통해 주어진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그는 고난을 단순한 고통으로 보지 않고 부활에 참여하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이해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발견한 부활 신앙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는 이 비밀을 로마서 6:8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If we died with Christ)”이라고, 과거형 동사를 썼습니다. 미래형을 써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면”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우선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비밀을 ‘밀알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요한복음 12:24) 땅에 심은 씨앗은죽지만, 그 자리에서 새 생명의 싹이 돋고, 줄기가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그를 믿는 수많은 생명들을 얻었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누가복음 9:23)”고 말씀하셨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주시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실천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부활의 새 생명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No’라고 말하고, 예수님의 삶을 닮고, 그의 고난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Yes’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바울은 부활 신앙의 비밀을 알았기에 “우리 사도들은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린도후서 4:10)”고 했습니다. 또 그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고(고린도전서 15:31),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했습니다(갈라디아서 2:20).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에게 부활의 삶이 열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사람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부활 신앙은 실제적(實際的)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유익(有益)이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가진 사람은 현재의 고난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고 해석합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4:8).” “우리는 고난을 받아도 소망 중에 즐거워합니다.” (로마서 12:12) 예수님의 고난을 나누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다시 일으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고난의 시간을 즐거움으로 이겨냅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현재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931년 10월 18일, 혼수 상태에서 잠시 깨어난 에디슨은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저기 보이는 그곳은 참 아름답습니다(It is very beautiful over there),”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증하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5:1-5). 바로 이것이 왜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 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사모해야 하는지, 그 이유입니다.

부활 신앙은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할 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삶으로 들어오라!” 이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03 29 2026 주일 설교

종려 주일

주인이 바뀐 사람들

Those Whose Lord Has Changed

마태복음 21:1-11

1 예수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올리브 산 부근의 ‘벳바게’라는 동네에 이르렀을 때였다. 예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2 “저 동네로 들어가면, 나귀 한 마리가 그 새끼와 같이 매여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서 내게로 끌고 오너라. 3  혹시 누가 왜 끌고 가는지 묻거든,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여라. 그러면, 아무 말 않고 나귀들을 곧 내어 줄 것이다.” 4 이 일은 옛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다. 5 곧 ‘시온의 딸들에게 일러라. 보라, 너희의 왕이 너희에게 오신다.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는데,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6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두 제자가 그 동네로 들어가서, 7 어미 나귀와 새끼나귀를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께서 올라타시자, 8 무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폈고,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바닥에 깔기도 했다. 9 군중들은 예수를 앞뒤에서 에워싸고 행진하면서 크게 환성을 올렸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10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읍 안으로 들어가시자 온 도시가 들끓었고, 사람들마다 “이분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사람들은 “그분은 예수님이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언자랍니다.” 하고 대답했다. (쉬운말 성경)

1 As Jesus and the disciples approached Jerusalem, they came to the town of Bethphage on the Mount of Olives. Jesus sent two of them on ahead. 2 “Go into the village over there,” he said. “As soon as you enter it, you will see a donkey tied there, with its colt beside it. Untie them and bring them to me. 3 If anyone asks what you are doing, just say, ‘The Lord needs them,’ and he will immediately let you take them.” 4 This took place to fulfill the prophecy that said, 5 “Tell the people of Jerusalem,
    ‘Look, your King is coming to you. He is humble, riding on a donkey riding on a donkey’s colt.’” 6 The two disciples did as Jesus commanded. 7 They brought the donkey and the colt to him and threw their garments over the colt, and he sat on it.  8 Most of the crowd spread their garments on the road ahead of him, and others cut branches from the trees and spread them on the road. 9 Jesus was in the center of the procession, and the people all around him were shouting, “Praise God for the Son of David! Blessings on the on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Praise God in highest heaven!”10 The entire city of Jerusalem was in an uproar as he entered. “Who is this?” they asked. 11 And the crowds replied, “It’s Jesus, the prophet from Nazareth in Galilee.”(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그 군중은 5일 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변하게 했을까요? 그들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들이 원한 왕이 아니셨습니다. 군중들이 원했던 것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아였을 뿐입니다. 자신들의 방식대로 기적을 일으키고 자신들이 원하는 영웅이 되어줄 왕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원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동안 가난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셨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병들고 소외된 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그 길의 시작점에 함께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온 세상에 메시아 되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시는 그 순간에 왜 보잘 것 없는 어린 나귀였을까요?

주님께서 하신 모든 사역의 뿌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린 나귀를 찾아 오신 것도 구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마태는 말합니다. “21:4 이 일은 옛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다. 21:5 곧 ‘시온의 딸들에게 일러라. 보라, 너희의 왕이 너희에게 오신다.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는데,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예수님은 두 제자를 벳바게라는 동네의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21:2 “저 동네로 들어가면, 나귀 한 마리가 그 새끼와 같이 매여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서 내게로 끌고 오너라. 21:3 혹시 누가 왜 끌고 가는지 묻거든,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여라. 그러면, 아무 말 않고 나귀들을 곧 내어 줄 것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아무도 타 본적 없는 어린나귀를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 둘은 너희들 앞에 보이는 마을로 들어가라. 마을에 들어서면, 아직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 이리로 끌고 오너라.”(마가복음 11:2), “눈앞에 보이는 저 마을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길가에 매여 있을 테니, 너희는 고삐를 풀어서 그 어린 나귀를 이리로 끌고 오너라.(누가복음 19:30)

어린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귀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바른 관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귀는 예수를 태우는 특별한 영광을 누립니다. 이 작고 보잘것 없는 나귀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약할 때 강함이 되십니다. 세상은 크고 강한 것을 찾지만, 하나님은 작고 약한 것을 택하시고 사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묻는 사람이 있거든 ‘주께서 쓰시겠다’하면 아무말 없이 내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것을 2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주’ 퀴리오스(κύριος)는 온세상을 통치하시는 주인을 뜻합니다. 호 퀴리오스(ὁ κύριος) 는 내 인생의 유일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입성길에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올라갑니다.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는 메시아를 태우는 성별된 도구가 된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몽당연필에 불과합니다. 그 분이 쓰시고, 그분이 생각하시고, 그 분이 결정하십니다. 나는 그 분의 손안에 있는 작은 몽당연필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순간 우리는 특별한 계획과 목적을 지니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삶의 방향이 정해집니다. 이전에는 성공의 조건으로 하나님을 필요로 했는데, 뜻을 깨닫고 나니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에 우리의 삶이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에 관심을 갖습니다.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켰는지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는지 궁금해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던져줍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가? 주께서 내 인생을 쓰시겠다고 할 때 내 삶의 전부를 드릴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삶의 주인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평생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인생에는 두 주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를 겉사람과 속사람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하도다.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 그것은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할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라. (롬7:25) 이 탄식은 우리의 현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람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롬 8:1)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삶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전부이며,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이 싸움 가운데서 우리를 끝까지 이끄십니다.

주님은 묶여 있던 나귀를 풀어 오라고 하셨습니다. 매여 있는 것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묶여 있을땐 준비하는 시간이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다림의 시간일수 있었다면, 풀어서 데리고 온 것은 새로운 목적으로의 초대입니다. 주님을 태우는 그 자리는 즉 본래 있어야 자리로 돌아 온 것이라 해석해 볼수 있겠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옛사람이었습니다. 죄에 묶이고, 율법에 묶이고, 두려움과 상처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에게 새삶을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일하시는 성령께서는 어떤 상황에도 우리를 회복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배를 드리고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루에도 수도 없는 내면을 가꾸는 싸움에서 주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위하여 공부도 열심히 하고, 직장생활도 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 안에서 예수의 생명 또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후 4:10) 내가 깎일 때, 내가 쓰여질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둘째, 주께서 쓰시는 자리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고난주간은 주가 걸어가신 뒷모습을 보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소망을 바라보며 참고 견디며 걸었습니다.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이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환대를 받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삶이 예수님의 사명이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의 길을 걷는 뒷모습을 보이신 것은 고통이 없는 영광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내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를 따르는 사명자들이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앞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제자들이 본 것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시는 그의 뒷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놀란 이유는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예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앞서가시는 비장한 자세 때문입니다.

우공이산 (愚公移山)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늙은이가 산을 옮긴다’는 뜻입니다. 우공(愚公)이라는 노인이 두개의 큰 산 사이에 살고 있었답니다. 산이 길을 막고 있자 자손들과 함께 산을 파서 옮기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늙은이가 무슨 수로 그 큰 산을 옮기겠소?” 그때 우공이 답합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계속할 것이오. 산은 더 커지지 않지만 우리는 계속 늘어날 것이오.”

일본의 니시오카 가문은 세계 최고의 목조 건축물을 1400년간 동안 지켜왔다고 합니다. 천년이 넘도록 지탱할수 있던 비결은 노송(老松)을 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무의 생명력을 오랫동안 견뎌온 년수로 측정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만을 쫓는 사람들의 눈에는 십자가의 삶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우리 힘으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먼저 그 길을 걸어가셨기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신뢰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린 나귀는 예루살렘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는 십자가가 어디로 향하는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고난만 보이고, 어둠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미련한 방법으로 빌라보의 법정에서 판정패 당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게된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 역사 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가는 길이 사람의 환호성으로 갈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만일 이 길에서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 힘만 믿는다면, 그 길을 따르는 것이 고행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키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을때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를 떠났던 제자들이 성령 받는 후 주님의 본심을 깨닫습니다.  주가 이루신 복음은 언제나 우리를 있어야 할 자리로 옮겨 놓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혼란스럽고, 불안이 우리의 삶을 짓누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으십시요. 부활의 생명이 깊은 땅속에서 싹트고 있습니다. 어둠을 이기신 주님의 곁을  지키십시요. 십자가의 고통을 지날때에도, 죽음의 자리로 걸어 가시는 예수께서 무력해 보일지라도, 끝까지 주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수와 같이 믿음의 성도들을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끌어 올리실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 받는 이들의 희망이 되셨고, 사명의 길을 걷는 이들의 앞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고난 주간 끊임없이 찾아오는 각자의 십자가를 회피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에서 주님은 불과 같은 죽음의 고통을 견디시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고난주간 우리가 져야 할 사명의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져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03 22 2026 주일설교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God Did Not Stop

삼상 16:1-7, 12-13

1 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사울 때문에 언제까지 슬퍼할 작정이냐? 나는 이미 그를 버렸다. 사울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다. 이제 너는 기름을 뿔에 가득 채워 베들레헴으로 내려가서 이새라는 사람을 만나라. 내가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왕이 될 사람을 뽑아 놓았다.” 2 사무엘이 말했다.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울이 그 사실을 알면 당장 저를 죽일 것입니다.” 주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주께 희생제물을 바치러 왔다.’라고 말하여라. 3 제사를 드릴 때,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초청하여라. 네가 그 다음에 할 일은 그때 가서 가르쳐 주겠다. 너는 내가 일러준 그 사람에게 나를 대신하여 기름을 붓게 될 것이다.” 4 ○ 사무엘은 주의 말씀대로 따랐다.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이르자, 성읍의 장로들이 두려워하면서 그를 맞았다.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5 사무엘이 대답했다. “그래요, 좋은 일이오. 주께 희생제물을 바치러 이곳에 왔습니다. 여러분은 어서 몸을 깨끗이 씻고, 나와 함께 제사를 드리도록 합시다.” 또한 사무엘은 이새와 그의 아들들에게도 몸을 깨끗하게 한 후에 제사에 참석하라고 초대했다. 6 이새의 아들들이 오자,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주께서 기름을 부으시려고 선택하신 자로구나!’ 7 그러나 주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용모와 키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라. 그는 내가 정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외모를 보지만, 나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12 이새가 사람을 급히 보내어 막내아들을 데려왔다. 그는 눈에 총기가 있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이다! 그가 바로 내가 택한 사람이니,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13 사무엘이 기름이 담긴 뿔을 가져다가 그의 형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날부터 주의 영이 다윗을 사로잡았다. 그런 뒤, 사무엘은 그곳을 떠나 라마로 돌아갔다. (쉬운말 성경)

1 Now the Lord said to Samuel, “You have mourned long enough for Saul. I have rejected him as king of Israel, so fill your flask with olive oil and go to Bethlehem. Find a man named Jesse who lives there, for I have selected one of his sons to be my king.”

2 But Samuel asked, “How can I do that? If Saul hears about it, he will kill me.”

“Take a heifer with you,” the Lord replied, “and say that you have come to make a sacrifice to the Lord. 3 Invite Jesse to the sacrifice, and I will show you which of his sons to anoint for me.”

4 So Samuel did as the Lord instructed. When he arrived at Bethlehem, the elders of the town came trembling to meet him. “What’s wrong?” they asked. “Do you come in peace?”

5 “Yes,” Samuel replied. “I have come to sacrifice to the Lord. Purify yourselves and come with me to the sacrifice.” Then Samuel performed the purification rite for Jesse and his sons and invited them to the sacrifice, too.

6 When they arrived, Samuel took one look at Eliab and thought, “Surely this is the Lord’s anointed!”

7 But the Lord said to Samuel, “Don’t judge by his appearance or height, for I have rejected him. The Lord doesn’t see things the way you see them. People judge by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12 So Jesse sent for him. He was dark and handsome, with beautiful eyes.

And the Lord said, “This is the one; anoint him.” 13 So as David stood there among his brothers, Samuel took the flask of olive oil he had brought and anointed David with the oil. And the Spirit of the Lord came powerfully upon David from that day on. Then Samuel returned to Ramah.(New Living Translation)

최근 상영 중인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어린 단종이 왕에서 쫓겨난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유배지에서 살아가는 인간 ‘이홍위’. 더 이상 왕이 아닌 한 죄인을 지켜야 하면서도 감시해야 하는 마을 촌장 엄흥도. 영화는 이 두 사람의 시선을 통해, 비극적인 역사 앞에 선 한 인간의 고뇌를 깊이 있게 그러낸 작품입니다. 단종은 고립된 유배지에서 자신의 존재를 마주하게 되고, 용기를 내지만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역사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그 무력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왕을 잃은 자리에 서 있는 선지자 사무엘이 있습니다. 세상의 역사는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사무엘상 16장은 다윗이라는 한 사람이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되는 장면이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기름부으셨고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의 자리에서 이미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선지자 사무엘의 깊은 애통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버리셨다는 사실 앞에서 사무엘은 깊은 애통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무엘이 슬픔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은 마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끝나버린 것처럼 슬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슬퍼하는 사무엘을 일으키시고 두려워하는 사무엘에게 믿음의 길을 예비해주셨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일으키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사울 때문에 언제까지 슬퍼할 작정이냐? 나는 이미 그를 버렸다. 사울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다. 이제 너는 기름을 뿔에 가득 채워 베들레헴으로 내려가서 이새라는 사람을 만나라. 내가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왕이 될 사람을 뽑아 놓았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사무엘이 슬퍼하는 동안에도 이미 다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본문은 단순히 사무엘의 슬픔만이 아니라 지나친 자기 확신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주께서 기름을 부으실 자라고 확신했습니다. 엘리압은 사울왕 처럼 키도 크고 외모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하시며 나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나의 슬픔, 나의 확신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눈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방향을 잃어버린 확신이 순종이 아닌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실패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세우셨습니다. 사울이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만약 십자가에서 끝났다면 우리에게 소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던 그 자리에서 부활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감정이나 확신이 하나님의 뜻을 가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사무엘의 지나친 슬픔과 자기 확신으로 분별력이 흐려졌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속에 살아 간 로렌스 형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사는 삶보다 더 달콤하고 기쁜 삶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천하고 체험하는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동기에서 그것을 연습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이 연습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동기는 오직 하나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원하시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주의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슬픔 자체를 책망한 것이 아니라, 슬픔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너가 언제까지 슬퍼할 작정이냐’라는 구절에서 슬픔 ‘너가 언제까지 슬퍼할 작정이냐‘라는 구절에서 슬픔 ‘아발’은 죽은 자에 대한 애도를 표현할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야곱이 사랑했던 요셉이 짐승들의 밥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여러날 동안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슬퍼할때 쓰인 단어입니다.(창 37:34) 사무엘은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의 운명이 끝난 것처럼 애통하고 있었을때, 하나님은 그를 슬픔에 머물러 있게 두지 않으셨습니다. “기름을 뿔에 채우고 가라.”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두려움 앞에 선 우리에게 믿음의 걸음을 열어 주십니다.

이민 땅에서 살아가는 삶에는 저마다의 무게가 있습니다. 자녀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말씀의 평안보다 불안이 먼저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삶의 무게가 하나님의 음성보다 더 크게 들리는 순간, 우리는 누구나 흔들립니다.

사무엘은 어린 시절 “주님, 말씀하십시오. 제가 듣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울이 그 사실을 알면 당장 저를 죽일 것입니다.”(2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두려워 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사울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너는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주께 희생제물을 바치러 왔다.’라고 말하여라. 제사를 드릴 때,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초청하여라. 네가 그 다음에 할 일은 그때 가서 가르쳐 주겠다. 너는 내가 일러준 그 사람에게 나를 대신하여 기름을 붓게 될 것이다.”(3절) 하나님은 전부를 보여 주시지 않았지만 두려움 가운데에서도 믿음의 한 걸음을 내딛게 하셨습니다.

이민 사회 안에서 오랫동안 비즈니스를 해오신 분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처음 외국에 나왔을 때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일을 시작하고 영어가 서툴고 문화가 다른 곳에서 한달 한달의 렌트비를 내기 위해 일했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살아낸 시간의 이야기였습니다. 주일에 예배에 오는 시간만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한주를 치열하게 살았노라고, 알고 보고 온 길이 아니라 매일의 하루를 살아낸 시간이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주어진 하루를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이 믿음의 걸음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이긴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영적으로 승리를 경험한 후 그는 이세벨의 한마디에 두려움에 빠져 더 이상 살 수가 없으니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은 쓰러진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먹이시고 재우시고 다시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가 아닌 불안과 절망의 자리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든든한 힘이 될 때까지 말씀을 붙잡고 한걸음 한걸음을 떼어 가도록 인도하십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힘은 우리의 경험도 아니고 우리의 노력도 아닙니다. “다음에 할 일은 그때 가서 가르쳐 주겠다.”(3절) 이 말씀은 두려움 앞에 선 우리에게 믿음의 걸음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사람을 세우십니다.

16:7 그러나 주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용모와 키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라. 그는 내가 정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외모를 보지만, 나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소년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새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맏아들 엘리압은 사울을 이어 왕이 될 만한 모습을 갖춘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는 내가 정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소년 다윗을 데려왔을 때, “바로 이 사람이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선택받은 것은 그가 뛰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앞에 선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골리앗 앞에서의 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과 사울 왕까지도 주저하고 있을 때, 소년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갔습니다. 그가 일상에서 양을 지키며 던졌던 그 물맷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하셨습니다. (삼상 17:45)

같은 환경이라도 누구는 선택받고 누구는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차이는 환경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삶의 중심과 방향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악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끝까지 이루어 가셨습니다. 합리적인 이성도 성령의 뜨거운 경험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목적이 사라질 때 우리는 곁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인간적인 정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머물지 않으면 교만해지기 쉽고, 경건의 자리를 날마다 세우지 않으면 거룩함으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는 것은 모든 길을 다 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바로 세워져 매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새의 막내 아들을 보시고 ‘바로 이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라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공동체도 우리의 가정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서로를 세워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넘어지고 실수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슬픔의 자리에서 우리를 일으키시고 두려움의 자리에서 길을 보여주시고 흩어졌던 시선을 주님께로 돌려 우리를 세우십니다. 사무엘이 애통할 때 이미 길을 예비하고 계셨고 두려워 할 때 나아가야 할 한 걸음을 보여주셨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미 보고 계시고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믿음의 여정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인도하심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03 15 2026 주일설교

사순절 네번째 주일

눈을 뜬 사람들

Those Whose Eyes Were Opened

요한복음 9:1-7

1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만나셨다. 2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왜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그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것은,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4 해가 있는 낮 동안,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서, 거기에 진흙을 갠 다음, 그 맹인의 눈에 바르시고 말씀하셨다. 7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시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이다.) 그 맹인이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눈을 씻자, 즉시 눈이 밝아졌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쉬운말 성경)

1 As Jesus was walking along, he saw a man who had been blind from birth. 2 “Rabbi,” his disciples asked him, “why was this man born blind? Was it because of his own sins or his parents’ sins?”3 “It was not because of his sins or his parents’ sins,” Jesus answered. “This happened so the power of God could be seen in him. 4 We must quickly carry out the tasks assigned us by the one who sent us.[a] The night is coming, and then no one can work. 5 But while I am here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6 Then he spit on the ground, made mud with the saliva, and spread the mud over the blind man’s eyes. 7 He told him, “Go wash yourself in the pool of Siloam” (Siloam means “sent”). So the man went and washed and came back seeing!(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설교를 준비하며 눈을 뜬 후의 사람이 아니라, 눈을 뜨기 전 그가 지녔을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 그에게 세상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캄캄한 어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사람은 왜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답은 제자들이 예상한 것과 달랐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그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것은,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왜? 라는 질문에 답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인과 이유를 묻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지금을 바라보기 보다 나에게 왜 이런일이 생겼는지를 고민합니다.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묻습니다. 이 길이 맞을까? 내 눈이 정말 떠지는 걸까? 그 삶의 무게를 안고 우리의 매일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복음의 능력은 ‘어떻게’라는 세상의 수많은 방법과 ‘왜’라는 내가 이제껏 정해 놓은 확신을 내려놓고, 지금 누가 이 일을 하고 계시는가에 집중할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지금 누가 그의 눈을 열고 계시는지 보도록 하시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시선을 새롭게 바꾸어 주셨습니다.

첫째 현실의 고통을 다르게 읽는 시선

맹인은 자신의 삶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시선이 보지 못하는 어둠보다 더 무겁게 그의 삶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눈을 뜨고 세상을 보기 전에 들어야 할 것을 듣게 하신 것입니다. 평생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며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실로암으로 갑니다.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했을까요? 보여서 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붙들고 간 것입니다.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뜨고 본 세상은 분명 새로운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고통속에서 전혀 다른 것을 보셨습니다.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목적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같은 시대, 같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다릅니다. 눈이 열리기 전에는 아픈 사람 옆에서 “왜 저렇게 됐을까”를 묻습니다. 힘든 형제 옆에서 “본인이 좀 더 잘했어야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적이 이끄는 사람은 같은 자리에서도 누가 이 일을 행하고 계신지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과거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옛생활은 끝이나고 언제나 회복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는 사람들은 판단하지 않고 함께 기도합니다. 지금 우리는 내게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유대교의 열심이던 종교인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삶의 목적이 종교적 열심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감옥에서 쓴 편지의 고백을 보면, 죽음과 삶이 놓인 상황 속에서도 주어진 삶을 예수를 위해 온전히 살아야 하는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에게 죽음과 삶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자리였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은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는 힘인 것입니다. 이 복음은 결코 가볍거나 얕지 않습니다.

1914년, 미국의 찬송 시인 루퍼스 맥대니얼(Rufus H. McDaniel)은 아들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로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어둠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온 고백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시입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다가 밝은 빛 홀연히 비쳐 저 멀리 하늘문 환하게 보임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이 고백이 어둠속에서 참빛을 찾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눈을 뜨고 시선이 바뀐 사람들 안에는 고통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복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같은 시대, 같은 곳에서 살아가지만, 우리의 시선은 과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미래로 향하며, 현재의 삶을 살아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삶을 위해 분주하게 달려갈 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도 주님을 위한 일에 생명을 다합니다. 여전히 과거에 짓눌려 아파하는 사람과 도와야 할 사람을 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일하실 것을 봅니다. 제자들은 누구의 죄인지를 물었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는 것을 보여주신 것처럼, 예수님의 사람은 어떠한 자리도 보내신 이를 드러내는 영광의 자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

창조기사를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잃은 사람을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렇게 빚으셨을까? 하는 상실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명령입니다.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행하신 이 행동은, 태어날 때부터 결핍을 가진 사람에게도 새롭게 보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걷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길에서 주님의 말씀 하나 붙들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한걸음 한걸음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맹인에게 하신 일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의 부모까지 불러다가 눈을 뜬 사람이 당신들의 아들이 맞냐고 낱낱히 캐묻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서도 예수의 말씀을 불편하게 듣고, 오히려 자신들에게 맹인이라고 하는 것이냐고 반문합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확신 때문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당신들이 맹인이라면, 죄가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당신들이 지금 본다고 주장하니, 당신들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소.” (9:41)

성 어거스틴은 자신의 옛 자아와 씨름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늦었습니다. 너무나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은 내 안에 계셨는데 나는 밖에 있었습니다. 당신은 빛나고 계셨는데 나는 눈이 멀어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오셨지만 자기 안에 갇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편견과 생각을 넘어섭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자기의 의까지 무너뜨리시려고 십자가의 길을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자아가 있습니다. 나의 종교적 확신, 내 기준이 앞설 때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날 것임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나의 의로움을 완전히 내려놓을때 주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해 주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우리 힘으로 걷는 길이라면 누구도 이 길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신데 자신을 비워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께 마음을 닫고 눈을 뜨지 않는 이들에게, 주님은 끝까지 은혜의 문을 열어두시고 나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일은 믿으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눈을 뜨게 하신 것은 한 사람의 사건이 아닙니다. 세상의 미움을 사랑으로 이기신 것이고, 어둠이 하나님의 의로 뒤집어진 사건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도 그렇습니다. 잘 믿고 제대로 살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이 흔들릴 때도 있고 외로운 여정이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수록 손해 보는 것 같고 가정에서도 나 혼자만 씨름하며 무릎 꿇고 있다고 느껴지는 홀로 서는 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그 자리, 세상에서 버림받고 낮은 마음으로 서 있는 자리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믿음 안에서 눈을 뜬다는 것은 더 많이 알고 보는 것의 차원이 아닙니다. 나의 옆 사람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홀로 선 자리가 있습니다. 세상의 아픔 가운데에서 살아가다가 다시 이곳으로 찾아왔을 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사랑으로 안아주는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찾아오신 그 사랑으로 함께하는 실로암이 우리 교회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시오

이제 우리의 삶에도 말씀으로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확실하지 않아도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토요일 새벽기도에서 청년 임원들이 특송을 준비했습니다.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불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 폭풍 가운데 무너질 때도 주님 내 곁에 함께 하시네,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나도 그들을 용납하는 것, 나를 위해 달리신 십자가 사랑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  

우리는 매일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도 아무일 없는 하루를 꿈꿉니다. 주의 자녀로 살아가지만 불 가운데로 걸어가는것, 폭풍 가운데 살아가는것, 그들을 용납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두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주의 자녀로 살아가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날때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이 실로암에서 눈을 씻고 돌아 왔을 때 그가 본 것은 자신을 심문하는 바리새인, 부모도 이웃들도 외면하였던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이 외면하던 그를 예수님이 찾아가십니다.

4절 보시면, 4 “해가 있는 낮 동안,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새 삶에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성공과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제한된 시간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보내신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홀로 있는것 같은 자리에서도 우리 곁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로 기도해 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마음을 함께 해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맹인은 말씀을 붙들고 실로암으로 갔습니다. 우리도 말씀안에서 한 걸음 한걸음을 걸어가야 합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은 자’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실로암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자리에서 말씀으로 눈을 뜨고 세상으로 보냄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주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걷는 이들은, 정리된 답을 찾는 여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린 순종의 여정에 서게 됩니다. 이 고백 위에 서서, 보냄받은 성도의 삶을 담대히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308 2026 주일설교

사순절 세번째 주일

오늘의 예배

Today’s Worship

시편 95편

95:1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같이 주님께 기쁨의 노래를 불러 드리자. 소리 높여 우리 구원의 반석이신 주님을 찬양하자. 2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분께 나아가자. 그분을 기리는 즐거운 찬송을 부르자. 3 주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4 깊디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디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이다. 5 주께서 바다를 지으셨으니 바다도 주님의 것이요, 마른 땅도 주님이 손수 빚으신 것이다. 6 그러므로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함께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 7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이요 그분께서 돌보시는 양 떼라. 오늘날 너희는 주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 8 ○ “므리바에서 너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맛사에서 너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희는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고 완고한 마음을 품지 말아라. 9 그때에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들을 똑똑히 보고서도, 나를 거듭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다. 10 그러므로 나는 40년 동안이나 그 백성들에게 분노하며 말하기를 ‘저들은 마음이 삐뚤어진 백성이요, 내 길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이로다.’ 하였고, 11 또 나는 화가 나서 맹세하기를 ‘저들은 내가 편히 쉬라고 저들에게 허락한 그 땅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쉬운말 성경)

1 Come, let us sing to the Lord!
    Let us shout joyfully to the Rock of our salvation.
2 Let us come to him with thanksgiving.
    Let us sing psalms of praise to him.
3 For the Lord is a great God,
    a great King above all gods.
4 He holds in his hands the depths of the earth
    and the mightiest mountains.
5 The sea belongs to him, for he made it.
    His hands formed the dry land, too.

6 Come, let us worship and bow down.
    Let us kneel before the Lord our maker,
7     for he is our God.
We are the people he watches over,
    the flock under his care.If only you would listen to his voice today!
8 The Lord says, “Don’t harden your hearts as Israel did at Meribah,
    as they did at Massah in the wilderness.
9 For there your ancestors tested and tried my patience,
    even though they saw everything I did.
10 For forty years I was angry with them, and I said,
‘They are a people whose hearts turn away from me.
    They refuse to do what I tell them.’
11 So in my anger I took an oath:
    ‘They will never enter my place of rest.’”(New Living Translation)

산을 오르는 사람은 정상을 향합니다. 입구에서 첫 발을 내딛을 때와 정상까지 올랐을때의 감격은 전혀 다릅니다. 같은 산이지만 도달해 본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올랐습니다. 믿음의 길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들 이삭과 함께 올라갑니다. 그리고 정상에서 순종의 손을 들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양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성소로 올라가며 시편 95편을 함께 노래했을 것으로 봅니다. 1절에서 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는 마음으로 성소 안으로 올라갑니다. 그 첫단어가 ‘오라’입니다.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같이 주님께 기쁨의 노래를 불러 드리자” 6절도 보시면,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함께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라’는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3절로 5절은 주를 처음 만난 기쁨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3 주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4 깊디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디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이다. 5 주께서 바다를 지으셨으니 바다도 주님의 것이요, 마른 땅도 주님이 손수 빚으신 것이다.’ 넓은 바다도 우리가 딛고 살아가는 땅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빚으셨기에 성도는 믿음으로 하루하루 땅을 밟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작은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합니다. 오늘날 미세한 반도체 칩 하나에 세상 모든 정보가 담기고, 작은 화면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들여다 보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잃어버린 시대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믿음을 통해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됩니다. 그리고 그 동행 안에서 우리를 향해 품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여정입니다.

7절에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라는 선언과 함께 시편의 분위기가 갑자기 전환됩니다. 그리고 8절부터는 광야에서의 사건, 곧 므리바와 맛사에서 조상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했던 일을 상기시켜 줍니다. 므리바(מְרִיבָה)는 ‘다툼’, 맛사(מַסָּה)는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물이 없자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다투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만나를 먹었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앞서 가는 것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출 17:7)를 물었습니다. 므리바와 맛사에서의 사건은 하나님을 불신하며 불평했던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38년을 광야에서 연단받고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약속의 땅을 보지 못했습니다. 시편 95편을 묵상하며 우리가 기억해야 교훈을 나누겠습니다.

첫째, ”오늘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완고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의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할 때 시편 95편을 인용합니다. “7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는다면, 8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시험받던 기간에 반역했던 것처럼,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히3:7-8)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4장에서도 히브리서 기자는 다윗을 통해 ‘오늘의 예배’가 무엇인지 다시금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시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그 말에 순종하고 너희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히 4:7). 우리의 ‘오늘’이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단어 ‘하이욤’은 지금 주의 음성을 듣고 현재를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어제의 말씀으로 오늘을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예배’는 매일 주시는 새로운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매일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십자가에 이끌림으로 우리의 강팍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불평과 불신의 언어가 시작됩니다. 예배는 주의 음성을 ‘오늘’ 듣고, ‘지금’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주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광야 1세대는 하나님을 불신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기억하고 마음을 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완고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자리를 채우십니다. 7절을 보시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이요 그분께서 돌보시는 양 떼라. 오늘날 너희는 주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

둘째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입니다.

‘기르시다’의 히브리어 마르이트(מַרְעִית)를 영어성경은 pasture로 번역했습니다. 풀밭, 목초지입니다. 목초지에서 풀을 먹고 살아가는 양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양식이 되시는 것입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들이 먹을 풀밭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에게 “나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기 위해 왔다”라고 말씀셨습니다. 양은 주의 말씀을 들을때 영혼이 살찌웁니다. 주의 자녀들의 영혼을 살찌우는 것은 세상의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업에 성공한 사람도, 실패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태어난 아이를 안고 헌아예배를 드리는 부부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이들도 주의 말씀을 듣고 영혼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조용히 병이 자라납니다. 반면에 주가 인도하는 양들은 깊은 골짜기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은 하나님의 훈련이었습니다. 광야에 풀이 없으니, 하나님은 매일 아침 어김없이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광야가 없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알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광야의 시간에 있는 이들에게 그 은혜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광야는 어제 저장해 놓은 은혜로 살수 없는 땅입니다. 욕심을 낼때 그 만나에 악취가 나고 벌레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만나로 사는 것이 아닌 오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내 삶의 안정을 위해 살아갑니다. 집을 장만하고, 자녀를 위해 많은 것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선명하던 목자의 음성이, 삶이 안정될수록 왜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것일까요? 하루의 양식이 넉넉해질수록 왜 기도의 절박함은 사라져 가는 것일까요? 아는 것은 많아지고 경험도 깊어지는데 하나님께 무릎 꿇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그러나 양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옛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고, 마음이 굳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현실의 문제를 넘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는 시간이 지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진 사람의 손을 잡아 주고,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함께 걸어 주며, 아직 길을 잡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의 책임입니다.

셋째 문제는 밖에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8-10)

기적을 보았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마음이 굳어진 것은 기적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기적이 아니라 참된 순종입니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 그것이 우리가 지금 드려야 할 ‘오늘의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을 주셨다면 우리에겐 오늘을 살아내야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내려 놓아야 합니까? 기도의 중심에 있었던 나만을 위한 날카로운 검, 겸손한 척 포장된 교만, 손과 발은 움직이지만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린 종교적 형식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왜 예수여야만 했는지,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다시 진지하게 그 음성 앞에 서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예배 드리러 올라가는 공동체에게 굳이 광야의 실패를 상기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배하는 자들도 동일한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기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여전히 완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귀로 듣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거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오늘 너희에게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의 설교 가운데 「거의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이라는 설교문이 있습니다. 웨슬리는 Almost Christian을 겉으로는 신앙의 모든 모양을 갖추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중심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배하고 기도하지만, 그 은혜가 삶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려드려야 할 예배는 내 삶의 ‘거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거의 다 온 것 같지만, 거의 다 드리는 것 같지만, 거의 다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 같지만 내 전부를 드리지 못하는 그 자리에서 오늘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어제의 양식으로 살 수 없었고, 오늘 주시는 믿음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려는 유혹 앞에 서 있었습니다. 끝까지 구하십시오, 찾으십시오, 두드리십시오.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입니다.

배척받고 조롱받으신 예수께서 그 길을 먼저 걸으셨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드럽게 마음을 열고, 그 길 위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나의 몸은 주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점점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씀보다,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말에 더 끌립니다.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보다 내 상처를 공감해 주는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 편리한 도구가 많아질수록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헌신은 점점 가벼워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13 도리어 여러분은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매일의 그날그날 동안에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마음이 완고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히3:13)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고 얻게 되는 그 어떤 것도 구원을 보증해 주지 않습니다. 신실한 성도는 서로가 깨워주고 복음이 치료제가 될수 있도록 서로를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부부도 서로의 정서적 외로움만을 채워주는 관계라면 세상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부부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도록 서로를 깨우고 ‘오늘의 복음’으로 서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이 시간 지금 이곳은 거룩한 공간입니다. 시편 기자가 전하는 ‘주의 음성을 들으라’는 권면 앞에 더 진지하게 마음에 새기며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닫혀있던 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종의 자리가 어디인지,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나 홀로 씨름하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던 것이 무엇입니까?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가 함께 올라가며 주 앞에 엎드렸습니다. 엎드려 고개를 숙일때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요, 주님께서 우리를 풀밭이 되시고 풍성한 목초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라’로 시작된 시편 95편은 ‘들어가지 못하리라’로 끝이 납니다. 광야 세대에게 닫혔던 그 문이 우리에게는 ‘오늘’로 열려 있습니다. 그 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열어 주셨습니다. 깊고 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고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바다를 지으신 분, 마른 땅을 손수 빚으신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의 풀밭이 되시고 풍성한 목초가 되어 끝까지 돌보아 주십니다.  이 ‘오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