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3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13주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말씀

Raised Again by God’s Word

이사야 51:1-6

1 “의로운 길을 가려는 사람, 나 여호와를 따르려는 사람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떨어져 나온 바위를 파낸 채석장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2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를 바라보아라. 내가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오직 그 사람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복을 베풀어 수많은 자녀를 주었다. 3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한다. 그 폐허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푼다. 그 광야를 에덴 동산처럼 만들고, 그 황무지를 나 여호와의 동산처럼 만든다. 거기에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할 것이며, 감사와 노랫소리가 가득할 것이다. 4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어라. 이스라엘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내게서 가르침이 나오며, 내 정의가 온 백성의 빛이 될 것이다. 5 내가 곧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겠고, 곧 너희를 구원하겠다. 내가 능력으로 모든 민족을 심판하겠다. 섬에 사는 민족들이 다 나를 기다리며, 내 능력으로 그들을 구하기를 바라고 있다. 6 너희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아래로 땅을 둘러보아라. 하늘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이 헌 옷처럼 닳아 없어질 것이며, 거기 사는 사람들은 파리처럼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내 구원은 영원하며, 내 의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쉬운성경)

1 “Listen to me, all who hope for deliverance—
    all who seek the Lord!
Consider the rock from which you were cut,
    the quarry from which you were mined.
2 Yes, think about Abraham, your ancestor,
    and Sarah, who gave birth to your nation.
Abraham was only one man when I called him.
    But when I blessed him, he became a great nation.”

3 The Lord will comfort Israel[a] again
    and have pity on her ruins.
Her desert will blossom like Eden,
    her barren wilderness like the garden of the Lord.
Joy and gladness will be found there.
    Songs of thanksgiving will fill the air.

4 “Listen to me, my people.
    Hear me, Israel,
for my law will be proclaimed,
    and my justice will become a light to the nations.
5 My mercy and justice are coming soon.
    My salvation is on the way.
    My strong arm will bring justice to the nations.
All distant lands will look to me
    and wait in hope for my powerful arm.
6 Look up to the skies above,
    and gaze down on the earth below.
For the skies will disappear like smoke,
    and the earth will wear out like a piece of clothing.
The people of the earth will die like flies,
    but my salvation lasts forever.
    My righteous rule will never end!(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지난 몇 주간 하나님 앞에서 씨름했던 야곱과 로뎀나무 아래 주저 앉아 죽기를 간구했던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 자리에 두지 않으시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일으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사야 51장 본문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 예루살렘의 성전은 무너지고, 국가가 망해서 소망을 잃어버린 백성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폐허의 한복판에 선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전한 선지자입니다. 1절 2절을 보시겠습니다.

1 “의로운 길을 가려는 사람, 나 여호와를 따르려는 사람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떨어져 나온 바위를 파낸 채석장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2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를 바라보아라. 내가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오직 그 사람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복을 베풀어 수많은 자녀를 주었다. 본문은 막연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라 폐허의 한복판에 서 있는 백성들에게 오직 한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으로 부터 수많은 믿음의 자녀를 베풀어 준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시작하신 약속, 변하지 않는 언약을 기억하라고 이사야를 통해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상황은 변해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음을 신뢰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메세지는 하나님이 어떻게 시작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입니다.

하나님은 어느날 이방 땅에 살던 아브라함을 찾아가셔서 그를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말씀하셨다. “저 하늘을 쳐다보라. 하늘에 저렇게 총총히 반짝이는 별들을 네가 다 셀 수 있겠느냐? 네 후손이 저 무수한 별들만큼이나 많아질 것이다.”(쉬운 성경, 창 15:5)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었노니” (개역개정, 창 15:18)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다른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었노니’ 라고 이미 주신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나탓티”(נָתַתִּי), “주었다”는 완료형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약속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보이지 않는 땅을 향해 가게 하셨고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약속을 신뢰하며 보여 주실 땅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향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으로 성취됩니다.

다윗도 많은 세월 쫓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의 백성들처럼, 두렵고 불안한 광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자신을 쫓던 원수보다, 자신을 따라오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더 크다는 고백입니다. 다윗은 항상 여호와의 집을 갈망했습니다. 광야에서 쫓기던 시절에도 하나님을 갈망하던 그를 하나님은 왕의 자리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현실보다 언제나 큽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편안하고 안정된 결과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 너머에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고 기도해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보이는 현실보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분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백 년 전, 복음을 들고 조선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 눈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어떠했겠습니까? 소망이 보이지 않는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어둠 가운데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이 땅에 부르셨습니다. 단지 흩어진 나그네로만 두지 않으시고, 가정과 일터와 이웃 가운데 복음을 드러내는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과 일터, 우리의 자녀들 앞에 마주하고 서있는 자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선교지입니다. 다음세대를 세우는 것은 단지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어른들이 예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말씀 앞에 순종하며, 기도로 하나님을 찾고, 삶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우리의 살아내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다음 주에 진행되는 성경학교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의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세대로 세워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시작하셨는지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교회와 가정이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두 번째 메세지는 “지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는 말씀입니다.

3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한다. 그 폐허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푼다. 그 광야를 에덴 동산처럼 만들고, 그 황무지를 나 여호와의 동산처럼 만든다. 거기에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할 것이며, 감사와 노랫소리가 가득할 것이다. 4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어라. 이스라엘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내게서 가르침이 나오며, 내 정의가 온 백성의 빛이 될 것이다. 5 내가 곧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겠고, 곧 너희를 구원하겠다. 내가 능력으로 모든 민족을 심판하겠다. 섬에 사는 민족들이 다 나를 기다리며, 내 능력으로 그들을 구하기를 바라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의로움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는 49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온 열방에 이르게 될 것을 선포합니다. 이 약속은 만민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아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증인은 복음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살아내며 하나님의 임재를 영혼 깊이 느끼며 내가 만난 주님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폐허 같고 광야 같은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곳에 함께 계시며 말씀하시니 의로운 길을 가는 너희는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고, 하나님의 동산처럼 만들 것이며, 기쁨과 즐거움, 감사의 노래로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마침내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빛을 영접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고 그를 믿는 자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세우시고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보내셨습니다. 한때 주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정체성은 핍박하는 자에서 복음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미주 대륙에는 약 6억 4천 400만 명이 살아가고, 그 안에 989개의 서로 다른 종족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종족도 있고, 그리스도인이 단 한 명도 없는 종족도 있습니다. (IMB 글로벌 리서치, 2023년 12월 31일 기준) 이것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곳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곳에 세우시고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며 복음의 증인이 되어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6 너희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아래로 땅을 둘러보아라. 하늘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이 헌 옷처럼 닳아 없어질 것이며, 거기 사는 사람들은 파리처럼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내 구원은 영원하며, 내 의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하늘도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도 헌 옷처럼 닳아 없어집니다. 세상의 즐거움도 잠시이고 우리가 애써서 붙들려고 했던 것들도 언젠가는 우리 손에서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구원은 영원하며, 내 의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믿음은 나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도 영원하신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우리는 오늘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까? 가정과 자녀, 건강과 미래, 물질과 신분의 문제 앞에서 우리의 계획이 멈추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린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었지만 그 심판의 자리에서도 자기의 백성을 다시 회복하시며 믿음의 사람들로 빚어 가셨습니다. 성도는 영혼의 깊은 밤을 지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때, 이해되지 않는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자라갑니다. 내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믿고 견고해 보이던 것들이 눈 앞에서 사라질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달라스 도시 선교를 출발하던 날, 저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서로가 하나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팀원들이 공항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탑승구로 향했을 때, 이미 보딩이 끝나 있었습니다. 비행기는 만석이었고, 더는 탈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당황했지만 팀원들은 차분하게 다음 항공편을 확인했고 남은 좌석이 하나뿐이고 다음날 비행기에 좌석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팀원들은 남은 한 좌석을 저에게 양보해 주었습니다. 남겨진 팀원들을 두고 먼저 가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저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보딩이 끝나갈 무렵, 한 명씩 팀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불확실했던 그 시간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우리의 열심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먼저 구하며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습니다. 공항에서 경험한 그 신실하심은, 선교 기간 내내 전도와 예배의 자리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고백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계획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모든 일은 그분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자리에서 우리를 다루시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 돌이킴 조차 자격 없는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그 은혜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가 더 높아지고 커져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내가 안전하다고 여기고 있는 삶의 계획과 성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해진 자리는 어디입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길을 가려는 사람, 나 여호와를 따르려는 사람아, 내 말을 들어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는지 기억하고 그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그 시간, 영혼의 한밤중 같은 자리에서 우리가 신뢰하던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아도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합니다. 이미 시작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십시오. 주저 앉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하며, 그분의 일은 결코 쇠하지 않습니다.

08 16 2026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 설교 50)

산상설교 (12) 견고한 크리스천의 삶

A Solid Christian Life

마태복음 7:24-29

김태환 목사

24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25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쳐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집은 바위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26 내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쳤을 때, 그 집은 쉽게 무너졌는데, 그 무너진 정도가 심하였다.” 28 예수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29 그것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권위를 지닌 분처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쉬운성경)

24 “Therefore whoever hears these sayings of Mine, and does them, I will liken him 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on the rock: 25 and the rain descended, the floods came, and the winds blew and beat on that house; and it did not fall, for it was founded on the rock.26 “But everyone who hears these sayings of Mine, and does not do them, will be like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on the sand: 27 and the rain descended, the floods came, and the winds blew and beat on that house; and it fell. And great was its fall.” 28 And so it was, when Jesus had ended these sayings, that the people were astonished at His teaching, 29 for He taught them as one having authority, and not as the scribes.(New King James Version)

여러분, 이 슬라이드를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입니다. 높이 443.2m, 102층 건물입니다. 그런데, 이 건물을 1년 45일만에 완공을 했다고 하는데, 믿어지시나요? 이 건물을 지었을 때는, 미국이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을 겪고 있던 때였습니다. 물가가 치솟고, 실업자가 늘어나고, 사람들이 실의(失意)에 빠져 있을 때, 그 당시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건축해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보여 준 상징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뉴욕을 미국의 3대 도시라고 하지 않습니까?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는 그렇지 않은데, 유독 뉴욕 맨해튼에만 고층 빌딩들이 몰려 있는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그 이유는, 맨해튼은 지표면 가까이 단단한 암석층이 있어서, 고층 건물을 짓는 데 천혜(天惠)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맨해튼의 건물들은 세월이 지나도 기울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도 이렇게 견고하게 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합니까? 어느 것 하나 안정된 것이 없습니다. 건강도, 직장도, 경제적인 문제도,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자녀들의 장래도 확실하게 보장된 것이 없어 늘 불안합니다.

이런 때에,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24절) 예수님의 말씀은 “비록 너희가 흔들리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너희의 인생을 반석 위에 세울 수 있는 길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니고, 많은 돈을 들여야 들어갈 수 있는 길도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그 길이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면 됩니다. 이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쉬운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福音)’이라고, ‘복된 소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코우에이(ἀκούει)’이고, 히브리어로는 ‘쉐마(שמע)’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듣는다’는 말을 ‘hear’ 혹은 ‘listen’이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코우에이’라는 말 속에는 단순히 듣는다는 뜻을 넘어 그 말씀대로 실천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쉐마’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이렇게 되풀이해서 말씀하셨을까요? 그 당시 사람들이,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말씀을 지키지 않는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두 분의 학자가 있습니다. 손봉호 교수님과 이만열 교수님이십니다. 두 분이 모두 89세로 동갑이십니다. 그분들이 우리 곁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이, 그 어느 때보다 귀하게 다가오는 시점입니다. 손봉호 교수님께서 얼마 전 미국 강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현재 한국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는 고작 19%에 불과합니다. 천주교나 불교보다도 눈에 띄게 낮은 수준입니다. 교회가 이토록 신뢰를 잃어버린 가장 큰 원인은 ‘그리스도인들의 언행불일치’ 때문입니다. 말과 삶이 따로 노는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이제 우리의 신앙이 귀로 듣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삶으로 증명되는 진짜 윤리 운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 말씀이,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말씀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많은 교회들이 성경을 배우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배운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비단 오늘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것이 심각한 문제였고, 구약 시대에도 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에스겔 33:31-32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내게 와서, 나의 말을 듣고 있으나, 그들은 들은 것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입으로는 헌신을 표현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부정한 이익들을 탐하고 있다……그들이 나의 말을 들으나, 그것들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에스겔은 유다가 멸망했을 때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입니다. 포로생활 중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다의 멸망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은 데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받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지키지 않는 것이 우리의 고난과 불행과, 심지어 우리 인생의 파멸과도 관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제일 큰 원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역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마태복음 7:21) 예수님은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은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말만 하고 지키지 않는다(마태복음 23:3)”고 비판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은 언행일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미국의 전설적인 부흥사 디엘 무디(D. L. Moody, 1837-1899)는 실천적인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무디는, 성경 지식에 머물지 않고, 그 지식이 실제 삶을 통해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무디는 자기 성경 책에 알파벳 기호를 표시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옆에 ‘T’자와 ‘P’자를 적어 표시해 두었습니다. ‘T’자는 Tried라는 말의 약어인데, “내가 이 말씀을 붙잡고 치열하게 살아 보았다”라는 뜻이고, ‘P’자는 Proved라는 말의 약어인데,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에서 진짜로 증명되었다”라는 고백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번 주에 한 가지 말씀을 정해서 ‘T’자를 쓰고, 응답을 경험하면 그 옆에 ‘P’자를 쓰는 것입니다. 즉시 응답이 없을 수도 있고,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진실하게 살아간다면, 무디에게 응답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응답하실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라는,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가 있습니다.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와 함께 현대 복음주의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로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가 ‘견고한 크리스천(Growing in Christ, 1994)’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한 구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과 삶을 전적으로 오직 그 말씀 위에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외향적이고 활기 넘치는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를 영혼 깊숙이 느끼고, 그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며, 그 말씀이 자신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고, 그 말씀에 따라 날마다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고쳐 나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견고한 크리스천은, 겉모습만 화려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영적인 뿌리를 깊이 내린 사람입니다. 머릿속에 성경 지식만 가득 채우는 율법학자 같은 신앙이 아니라, 내가 배운 성경 말씀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율법학자들에게서 보았던 권위는, 율법의 조항과 전통, 형식적인 규칙을 엄격히 지키도록 강요하는 데서 오는 권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권위는 율법의 문구에 얽매이지 않는 권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위는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데서 오는 ‘언행일치(言行一致)’의 권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권위였습니다. 사람들은 여태껏 이런 권위 있는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놀라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엑세플레-쏜토(ἐξεπλήσσοντο)’라는 말인데요. 영어로 ‘astonished’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단순히 놀라움을 넘어, 믿을 수 없는 일이나 엄청난 충격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랐을 때 쓰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거절할 수 없는 권위있는 말씀으로 들려서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비가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에게도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붑니다. 중요한 것은, 폭풍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세운 집의 기초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폭풍을 만나도 반석 위에 견고하게 세워진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말씀만 공부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작은 것부터 말씀을 실천하는 습관을 만들어 나가십시오. 아리스토텔레스(384-322 B.C.)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행하는 행동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탁월함이란 일회성 행동이 아니라 일종의 습관이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은 탁월함은 앎(knowing)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알면 행동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탁월함은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반복적인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한번의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반복적인 습관이 그 사람의 인격을 형성한다고 본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크리스천의 탁월함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크리스천의 탁월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날씨가 좋고 평안할 때는 내 인생의 기초가 반석인지 모래인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겨울이 오고, 매서운 환난의 폭풍우가 몰아칠 때 비로소 우리가 세운 집의 진짜 기초가 드러납니다. 단순히 말씀을 배우는 지식에 머물지 마십시오. 오늘 당장, 작은 말씀 하나라도 실천하는 ‘거룩한 습관’을 시작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견고한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0809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11주

다시 걷게 하시는 은혜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Grace That Makes Us Walk Again (Why Are You Here?)

열왕기상 19:9~18

9 시내 산에 도착한 엘리야는 한 동굴 속에 들어가 밤을 지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야,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10 엘리야가 대답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저는 언제나 제 힘을 다해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제단을 부수고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죽였습니다. 살아 남은 예언자는 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저까지 죽이려 합니다.” 11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산 위에서 내 앞에 서 있어라. 내가 네 앞으로 지나가겠다.” 그러더니 매우 센 바람이 불어와 여호와 앞에서 산을 가르고 큰 바위를 쪼갰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불고 난 뒤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지진 속에도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12 지진이 일어난 뒤에 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이 난 뒤에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동굴 입구에 섰습니다. 그 때에 어떤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엘리야야!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14 엘리야가 대답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저는 언제나 제 힘을 다해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제단을 부수고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죽였습니다. 살아 남은 예언자는 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저까지 죽이려 합니다.” 15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왔던 광야 길로 돌아가 다마스커스로 가거라. 그 성에 들어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으로 세워라. 16 그런 다음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므홀라 사람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는 너의 뒤를 이을 예언자가 될 것이다. 17 하사엘의 칼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은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은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18 또한 내가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는데, 그들은 한 번도 바알에게 절한 적이 없고 바알의 우상에게 입을 맞춘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쉬운성경)

9 There he came to a cave, where he spent the night. But the Lord said to him, “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 10 Elijah replied, “I have zealously served the Lord God Almighty. But the people of Israel have broken their covenant with you, torn down your altars, and killed every one of your prophets. I am the only one left, and now they are trying to kill me, too.” 11 “Go out and stand before me on the mountain,” the Lord told him. And as Elijah stood there, the Lord passed by, and a mighty windstorm hit the mountain. It was such a terrible blast that the rocks were torn loose, but the Lord was not in the wind. After the wind there was an earthquake, but the Lord was not in the earthquake. 12 And after the earthquake there was a fire, but the Lord was not in the fire. And after the fire there was the sound of a gentle whisper. 13 When Elijah heard it, he wrapped his face in his cloak and went out and stood at the entrance of the cave. And a voice said, “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 14 He replied again, “I have zealously served the Lord God Almighty. But the people of Israel have broken their covenant with you, torn down your altars, and killed every one of your prophets. I am the only one left, and now they are trying to kill me, too.” 15 Then the Lord told him, “Go back the same way you came, and travel to the wilderness of Damascus. When you arrive there, anoint Hazael to be king of Aram. 16 Then anoint Jehu grandson of Nimshi to be king of Israel, and anoint Elisha son of Shaphat from the town of Abel-meholah to replace you as my prophet. 17 Anyone who escapes from Hazael will be killed by Jehu, and those who escape Jehu will be killed by Elisha! 18 Yet I will preserve 7,000 others in Israel who have never bowed down to Baal or kissed him!”(New Living Translation)

지난 주 우리는 얍복강가에서 홀로 씨름하던 야곱을 만났습니다. 그는 밤새 하나님을 붙잡았고, 엉덩관절이 어긋나는 아픔 속에서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는 그 당시 영적인 거장이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던 바알 선지자들 450명과 홀로 대결합니다. 450대 1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바알신을 부르짖던 선지자들 앞에서 불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을 보며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보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땅은 3년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바짝 말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자 하늘이 캄캄해지고,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큰 비가 내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강한 능력을 경험하고도 무너진 엘리야를 다시 순종의 걸음을 걷게 하시는 은혜를 보게 합니다.

1.무너진 자를 먹이시는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는 승리를 경험한 후 이세벨이 보낸 사신의 말로 인해, 두려워 하여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이스르엘에서 브엘세바까지 도피한 엘리야는 광야 길로 다시 하루를 더 걸어 들어가 한 로뎀나무 아래 몸을 눕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을까요? 갈멜산에서의 선지자가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거룩한 길을 애쓰며 걷는 성도의 삶에도 수많은 유혹과 씨름해야 할 문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뎀나무 밑에 있던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회복시켜 주셨던 하나님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죽기를 청하는 그 두려움에서 누가 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엘리야를 책망하시지 않으시며 주의 천사를 통해 어루만져 주시고,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뜨겁게 달군 돌에 구워 낸 빵과 물로 엘리야의 육신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엘리야의 육신은 하나님의 이러한 자상한 보살핌으로 인하여 음식을 먹고 사십을 밤낮을 걸으며, 하나님의 산 호렙에까지 이를 수 있는 힘을 비축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이러한 영적침체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보다 두려움을 주는 이세벨의 말이 마음 안에 더 크게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가장 뜨겁게 은혜 받고도, 눈물의 승리를 거두고도, 이유 없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번아웃의 자리가 찾아옵니다. 도망가고 싶고, 돌아가고 싶은 자리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 열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마음이 허해지는 그런 때입니다. 마치  3년 6개월 비가 오지 않았던 땅처럼 마음이 굳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고 회복시키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성도는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거룩한 삶을 배워 나가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된 바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평생 이방인 선교사로 복음을 전하며 살수 있던 힘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두려움을 덜어 내시는 분입니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항상 희망과 생기가 넘치는 시절만 있지는 않습니다. 영적인 어려움에 빠져서 낙심하여 지낼 때도 있습니다.

얼마전 찬양을 들으며 무심코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을 읽어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한참을 읽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성도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남긴 마지막 신앙의 고백, 하나님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교우의 눈물의 간증, 돌아가고 싶지만 여전히 상처안에서 숨어있는 고통, 자신의 삶 속에서 씨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살고 싶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누군가의 짧은 고백도 있었습니다. 간절한 고백들이 로뎀나무 아래로 찾아온 엘리야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신음하던 엘리야를 먼저 먹이시고 회복시키신후 사명을 주셨다면,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동일합니다. 

2.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은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고 기쁨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부르심까지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소명은 분명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알게 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한때는 기쁨으로 감당했던 그 일이, 지금은 버거운 짐처럼 느껴지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명은 우리를 영적 침체 속에 그냥 머물러 있게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서 우리를 먹이시고 다시 걷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에서 엘리야를 먹이신 후에 호렙산 굴 앞에서 다시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그의 몸은 회복 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엘리야야,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엘리야였지만 엘리야는 “저밖에 없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혼자라고 느낀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고립감과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생활하며 우리는 홀로 있는 것 같은 마음이 들때가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혼자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 감정 안에 갇히면 두려움은 더 커지고 시야는 좁아져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질과 감정이 우리의 믿음을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삶의 기반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한없이 연약해지고 하나님의 마음과 점점 멀어져 갑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여호와께서 그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고,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 지진 가운데도,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개역개정은 이 소리를 세미한 소리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로 콜 데마마 다카 (קוֹל דְּמָמָה דַקָּה )입니다. 고요하고 미세한 침묵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이 침묵 뒤에 다시 네가 왔던 광야 길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도 삶의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인 순간들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자책하고, 내 안의 상처로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그 상처의 이유를 하나님께 돌리며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오래 묵혀둔 그 상처가, 잘 살아내고 싶어 발버둥 쳤던 그 시간들이 예배의 자리, 은혜의 자리에 서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새 명령을 주셨습니다. 광야 길로 돌아가 다마스커스로 가서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그리고 엘리사를 그의 후계자 선지자로 세우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달라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하사엘과 예후에게 가서 그들을 왕으로 세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7 하사엘의 칼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은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은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하사엘의 군대는 이스라엘을 침공했고 예후는 아합의 왕가를 심판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의 군대는 피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에게 주어진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재능은 자격이 아니라 은혜로 맡겨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엘리야는 두려움이 사라진 후가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다시 걸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자를 먹이시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걷게 하십니다.

히즈윌의 날개 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매일 성전 뜰만 밟고 서성이다 / 늘 그만큼만 주님을 의지하다/ 내 것인 줄 알았던 내 삶이 /  이리저리 흔들리고 무너질 때/ 주님, 나는 주님 없이는 /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 주님, 나는 주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 주님과 함께 날아오를 때/ 높은 산은 점점 더 낮아지고/ 삶의 골짜기마다 흘러넘치는 / 주님의 은혜/ 이제껏 살게 하신 주님의 은혜가 / 이후의 삶도 지켜주시리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날개로 /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날개로 날아오르리

주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우리가 그 은혜로 오늘도 사명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명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네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엘리야가 있어야 할 자리는 떨어져 나간 로뎀나무 아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고, 칠천 명의 남은 자 가운데, 엘리야는 다시 자기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이처럼 은혜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낙심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있던 주어진 사명을 인식하게 합니다.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은 절망이 막을 수 없습니다. 폭풍이 다 지나간 다음이 아니라, 폭풍이 여전히 그대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순종의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멈춰 섰던 그 자리가 다시 걷는 자리가 되는 것은, 우리를 붙드시고 끝까지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시며, 두려워 멈추었던 자리, 혼자라 생각하여 포기하려고 했던 자리에서 우리를 먹이시고 재우시고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두려움과 염려 앞에, 이미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서 도망쳤던 내 삶의 로뎀나무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먹이고 재우시며 다시 일어나 가라고 하시는 그 자리는 어디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로뎀나무 아래에서 주시는 위로는 우리를 다시 일어나 걷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말씀을 살아내는 힘은 내 삶의 바람과 지진과 불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걸음을 내딛는 데서 시작됩니다. “저밖에 없습니다” 라고 주저 앉아 있는 마음을 주님이 먹이시고 재우십니다. 그리고 “일어나 걸어라.” 말씀하시며 찾아오십니다. 혼자 걷는 것 같아도 함께 걷고 있는 길입니다. 로뎀나무의 위로에만 멈추어 있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의 길을 향해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위로하시며 다시 사명을 허락하시고 생명을 살리십니다. 무너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은혜 붙들고 순종의 자리에서 걷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0802 2026

성령강림절 제 10주

우리 안에 새겨 두신 은혜의 흔적

The Scar He Chose to Leave

창세기 32:22~32

22그날 밤 야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명의 아들을 데리고 얍복 강 나루를 건넜다. 23그는 자기의 가족 모두를 강 건너로 보낸 다음 자기의 재산도 모두 강 건너로 보냈다. 24그리하여 야곱이 혼자 남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날이 밝을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25그 사람은 자기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관절을 쳤다. 그 때문에 야곱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엉덩관절이 어긋나게 되었다. 26그런 다음 그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였다. “날이 새려고 하니 날 놓아다오.” 그러나 야곱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게 복을 빌어 주지 않으시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27그 사람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28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였다. “이제부터는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 이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고 사람들과도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 29  야곱이 말하였다. “부디 어르신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네가 내 이름을 묻느냐?” 그런 다음 그는 거기에서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30그래서 야곱은 그 곳을 브니엘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었구나. 그런데도 아직 살아 있다니!” 31  야곱이 브니엘을 지나갈 때 해가 솟아올랐다. 그는 엉덩관절을 다쳐서 절뚝거리며 걸었다. 32이런 까닭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엉덩관절에 붙어 있는 힘줄을 먹지 않는다. 야곱이 그 힘줄 가까이에 있는 엉덩관절을 다쳤기 때문이다. (쉬운성경)


22 During the night Jacob got up and took his two wives, his two servant wives, and his eleven sons and crossed the Jabbok River with them. 23 After taking them to the other side, he sent over all his possessions. 24 This left Jacob all alone in the camp, and a man came and wrestled with him until the dawn began to break. 25 When the man saw that he would not win the match, he touched Jacob’s hip and wrenched it out of its socket. 26 Then the man said, “Let me go, for the dawn is breaking!” But Jacob said, “I will not let you go unless you bless me.” 27 “What is your name?” the man asked. He replied, “Jacob.” 28 “Your name will no longer be Jacob,” the man told him. “From now on you will be called Israel, because you have fought with God and with men and have won.” 29 “Please tell me your name,” Jacob said. “Why do you want to know my name?” the man replied. Then he blessed Jacob there. 30 Jacob named the place Peniel (which means “face of God”), for he said, “I have seen God face to face, yet my life has been spared.” 31 The sun was rising as Jacob left Peniel, and he was limping because of the injury to his hip. 32 (Even today the people of Israel don’t eat the tendon near the hip socket because of what happened that night when the man strained the tendon of Jacob’s hip.(NLT)

우리는 태어나 많은 것을 손에 쥐는 연습을 하며 삽니다. 어린아이는 장난감을 손에 쥐고 빼앗기지 않으려 힘을 줍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내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것을 움켜 쥔 채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속의 야곱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강 건너로 보내고 홀로 남은 밤에 무언가를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홀로 남은 밤 우리는 무엇과 씨름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을 강 건너편으로 보낸 홀로 남은 밤에 역사하십니다. 그날 밤 야곱은 두 아내, 두 여종, 열한명의 아들들과 지난 세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재산들을 강 건너편에 보내 놓고 홀로 남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20년간 라반의 집에서 얻어낸 것이었고 자신을 지탱해 온 전부였습니다.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은 야곱을 불안과 두려움에 짓눌리게 했을 것입니다. 20년 전, 늙으신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도망쳤던 그 날의 빚이, 이제 400명의 군사가 되어 자신 앞에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열매로부터 도망칠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인간의 연약함만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인생의 그 절박한 순간 혼자 있는 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날 밤 야곱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면, 먼저 야곱이라는 사람이 평생 무엇과 씨름하며 살아왔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났고 장자의 축복을 얻기 위해 씨름했습니다. 20년간 장인 라반과 씨름하며 재산을 쌓기 위해 씨름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얍복강 나루에 홀로 남은 그 밤, 야곱의 씨름의 대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경은 씨름하던 상대를 ‘그 사람’ 이라고 부릅니다. 25 그 사람은 자기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관절을 쳤다. 그 때문에 야곱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엉덩관절이 어긋나게 되었다. 씨름을 마친 후 야곱은 새 이름을 받게 됩니다. NLT성경은, you have fought with God으로 번역합니다. 그날 밤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고 밤새 씨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길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 날밤 야곱은 하나님과의 씨름 속에서 20년 동안 자기 힘으로 버텨 온 자신 안에 옛사람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 주셨습니다.

    야곱은 밤새 붙들고 놓지 않다가 야레크(יָרֵךְ, yarek)  라고 하는 엉덩이 관절을 다쳐서 평생 절뚝거리게 됩니다. 야레크 (יָרֵךְ, yarek) 라는 단어는 종종 후손·생산력의 자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입니다. 야곱의 직계 자손들이 66명이니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창 46:27), 허리에서 나온 자라고 번역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히브리어 단어도 야레크(יָרֵךְ, yarek) 입니다. 하나님이 정확히 이 지점을 치셨다는 것은 야곱의 힘을 상징하는 근원을 꺾으시고 새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야곱이 이긴자라는 새이름을 얻게 되지만 절뚝거리는 삶으로 마무리 됩니다.

    우리는 자기 신념의 틀 안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약속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의 문제 앞에서는 자꾸 넘어지고 내 힘으로 버티려 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 하나님은 야곱이 의지하던 힘을 꺾으셨습니다. 고집과 이기심, 하나됨을 막아버리는 우리 안에 평생 붙잡고 있던 그 손을 펴는 것입니다. 비록 절뚝거리며 걷지만 새이름으로 첫걸음을 떼는 것입니다. 이김을 주신 주님 바라보며 적당히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다 드리며 주가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2. 힘이 꺾여진 자리에서 받은 은혜

    사람의 삶에는 수많은 광야가 찾아옵니다. 광야는 내 힘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그 곳에서 생각이 뒤집히고 마음 안에 하나님의 새 법이 새겨집니다.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힘을 꺾으신 자리에서 새 이름을 허락하셨습니다. 찬양 “나” 는 송명희 시인의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그녀에게 남들과 다른 삶의 고난을 주셨지만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이라 고백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그녀에게 공평하심은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앞에 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동일한 은혜였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성취와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라 요구하지만 이 찬양의 고백은 세상이 채울 수 없는 은혜를 깨달은 자의 고백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힘이 꺾인 자리에서 새 이름을 받았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힘이 꺾일 때 비로소 참된 이름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에게든지 그 십자가 앞으로 나아올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그 피 값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달라집니다. 우리의 아픔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픔이 있는 그 자리에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이 먼저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닿는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리한 상황과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판단 기준이 되어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주 씨름하고 넘어지는 상황은 무엇입니까? 그릇된 마음이 만들어 놓은 그 틀을 깨고 들어 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십시오,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채워 나가는 삶이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입니다.

    시내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도 똑같았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지 40일이 되도록 내려오지 않자, 백성은 보이지 않는 약속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아론에게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 기록합니다. 완고함이란 멍에를 메기 싫어 목을 뻣뻣이 세우고 버티는 황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서 목을 곧추세우고 버티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죄의 본질입니다.

    시대마다 사람들은 무엇을 자신의 마음의 자리에 앉힐 것인가를 바꾸어 왔습니다. 율법을 앉히고, 이성을 앉히고, 오늘날은 감성과 느낌을 진리의 자리에 앉힙니다. 감정과 기분이 태도가 되고 경험이 되고 삶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내 감정과 기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옛 자아의 습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십시오. 우리의 연약한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올때 하나님의 얼굴과 나의 연약한 그 모습이 만나는 그 자리에서 참된 은혜가 회복됩니다.

    누구에게나 피할수 없는 현실은 찾아옵니다. 멀리에서 보면 부러운 누군가의 삶도 가까이에서 보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눈물의 기도의 자리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버틸 수 없는 삶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 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매일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나의 인생을 내 힘으로 끝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지체들을 만나기 전에,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예배에 오기 전에 우리는 먼저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삶의 예배를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믿음생활의 균형은 하나님 앞에 서는 삶이 가장 먼저임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언젠가 절뚝이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우리는 지으신 모습 그대로 서게 될 것입니다.

    주의 사랑 안에 거할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도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온전한 성전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참 자아를 회복하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언덕을 오르셨고, 교회의 모퉁잇 돌이 되셨습니다.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될때 우리 안에 새겨진 십자가의 흔적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릴 새롭게 하신 증거입니다. 마귀는 참소하며 우리를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도록 속삭입니다. 세상속에서 형성되는 수많은 평가와 정죄는 거짓자아를 만들어 내지만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구원의 은혜는 세상의 부요함에 있지 않고, 세상을 이기신 주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데서 얻게 됩니다

    오래전 저는 사고로 의식을 잃었던 적이 있습니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어 다섯 시간을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의식을 찾고 눈을 떴을 때 저는 제 인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오른손 마디마디가 차갑게 굳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불편한 손을 볼 때 저는 야곱의 절뚝거림을 생각합니다. 제 몸에 남겨진 그 흔적은, 여전히 단단하고 뻣뻣한 제 삶 속에서 하나님이 저를 살려주셨다는 감사의 고백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매일 주가 주신 살과 피를 매일의 양식 삼아 먹어야 살아납니다. 지금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잃고 싶지 않아 밤새 씨름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내 힘으로 내려놓을 수 없음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올려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밤 이후 야곱은 다리를 절뚝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절뚝이던 야곱은 에서에게로 가서 일곱 번 땅에 엎드렸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씨름의 중심에 두지 않았기에 몸을 낮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절뚝거리며 오는 동생을 보며 에서는 두팔로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함께 울었습니다. 형제 사이에 있었던 죄책감과 정죄심, 억울함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 안에서 서로가 온전히 이어졌습니다. 그 절뚝거림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밤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30그래서 야곱은 그 곳을 브니엘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었구나. 그런데도 아직 살아 있다니!” 31  야곱이 브니엘을 지나갈 때 해가 솟아올랐다. 그는 엉덩관절을 다쳐서 절뚝거리며 걸었다. 32이런 까닭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엉덩관절에 붙어 있는 힘줄을 먹지 않는다. 야곱이 그 힘줄 가까이에 있는 엉덩관절을 다쳤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삶에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힘을 꺾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걸음이 증명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으로 값을 다 치르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아름답고 위대한 삶으로 빚어 가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미 다 부서지고 무너진 존재입니다. 성도는 이제 기도의 무릎으로 절뚝이며 나아갈 뿐입니다.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움켜진 손을 펴고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새 아침을 맞이하시길 축복합니다.

    0726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9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When Words Run Out, the Spirit Prays

    로마서 8:26~30

    26.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9.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셨고,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쉬운성경)

    26 And the Holy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For example, we don’t know what God wants us to pray for. But the Holy Spirit prays for us with groanings that cannot be expressed in words. 27 And the Father who knows all hearts knows what the Spirit is saying, for the Spirit pleads for us believers[l] in harmony with God’s own will. 28 And we know that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m]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29 For God knew his people in advance, and he chose them to become like his Son,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 30 And having chosen them, he called them to come to him. And having called them, he gave them right standing with himself. And having given them right standing, he gave them his glory.(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되면 삶의 고민과 흔들림이 멈추고 믿음이 더욱 분명하고 선명해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현실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에게도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오고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시간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1) 라고 탄식합니다. 우리 안에는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죄의 세력이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팽팽하게 맞서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내면의 정직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거룩한 싸움의 한복판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선포합니다.

    1.우리의 연약함을 중보하시는 성령님

    26.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이 무엇일까요?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내 힘으로 할수 없는 한계에 부딪힐 때 우리에게는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그 사실을 깊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기쁨은 내가 구한 대로 응답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를 누리는 데 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있어도 그분의 선하심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와 같지 않을수가 있습니다. 기도한 대로 되지 않는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바울 안에 선한 일 행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를 이끌었습니다. 고린도 후서의 고백에 보면, 그의 사역속에서 복음의 영광은 완전한 그릇이 아니라,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나 자신의 연약함 속에 담겨 있지만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하려고 애써도 결국 우리가 감추고 싶었던 연약함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만 같은 상황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조차,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자리 그 앞에 서는 것이 기도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그 어떤 언어와 표현으로도 담아낼 수 없어 그저 눈물만 흐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간절히 갈망한다면, 오히려 연약함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분이 아니라 깊숙히 들어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무슨 말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물로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그 시간에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돕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단지 곁에 머무는 차원의 위로만이 아니라 짐을 함께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약함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소망의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시가 있습니다.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라는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슬픔이나 절망이 전혀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지은 작사자 엘리자 히윗(Eliza E. Hewitt, 1851-1920) 여사는 1887년 학교에서 불량학생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폭력으로 척추 부상을 입고 오랜 병상 생활을 하던 중, 몸이 완쾌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영혼에 깊숙이 스며드는 햇살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고 기도하며 이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오늘 내 영혼에 햇빛이 비치네. 이 세상 하늘에서 빛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밝은 빛이라네. 예수님이 나의 빛이기 때문이라네. 오늘 내 영혼에 한 음악이 흐른다네. 나의 왕되신 분께 찬양을 드린다네. 내게 귀 기울이시는 예수님이 들으신다네. 입으로 노래할 수 없는 영혼의 찬송들을.

    몸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성령 안에서 찬양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노래할 수 없는 영혼의 찬송들을 예수님이 들으신다는 고백은 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성령이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것, 이미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그 절망의 자리에 멈추어 서는 것이 아니라 영광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 영광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기복적인 성공의 간증이 아니라 성령의 탄식을 말합니다. 서로의 시간표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결코 헛된 시간이 없습니다.

    2.부르심의 증거

    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는 우리의 탄식의 기도, 우리가 겪는 세상의 수많은 고난도 포함 됩니다. 오늘의 세상을 보십시오. 이상 기후와 재난 속에 신음하고,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 권력과 정치의 자리에는 다툼과 폭력이 흐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세상이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깨어짐은 먼 곳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선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갑자기 찾아오는 아픔과 설명할 수 없는 고난 앞에 설 때가 있고, 세상속의 불의한 일 앞에 가슴 아픈 탄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괜찮아 다 잘될거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모든 것이 잘될 것을 바라며 그 말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증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신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통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해치기 위해서 모의하고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 선으로 바꾸사 요셉의 생애 가운데 협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선을 이룬 것이지, 요셉이 선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겪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의 일생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가 하는 일이 잘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선을 이루는 사람은 고난 가운데 그 보다 더 큰 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인내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요셉이 자신의 손으로 형들이 주었던 고통을 되 갚을 수 있는 위치에서 했던 말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입니다.

    내 시간과 재능은 지금 누구를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까? 내 삶은 무엇을 위해 준비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교회에서의 나, 가정과 일터에서의 나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삶의 모든 순간이 예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내 삶에 더해지는 무게와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우리와 늘 동행하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29.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셨고,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부르심에는 인간의 그 어떤 자격과 조건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선택받은 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것도 자랑할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자격이 포함된다면 구원의 완전성이 상실됩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힘입어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 분의 사랑 앞에 서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삶으로 세워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그렇게 빚어 가십니다. 우리 눈에는 불안과 불확실한 시간이 더디고 답답하게 느껴져 피하고만 싶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 속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시는 더 크신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완성하시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 자리는 두려움의 자리가 아니라 기쁨의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아가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만날 때가 있고,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는 나 혼자만의 아픈 시간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절절한 마음으로 붙들고 있는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이든, 아픔의 시간이든, 혹은 평탄하고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시간이든 하나님의 손에서 버려지는 시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을 사용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아직 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바울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의 최종적 구원은 반드시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과 관계 맺는 삶을 통해 그 사랑을 실제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가르침을 배울 책임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미 성령께서 탄식속에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엘리자 히윗의 고백처럼 몸의 고통은 그대로인데 내 영혼에는 찬양이 흐르는 그 은혜의 감격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부르심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으로, 특권이 아니라 선교적 삶으로, 의심이 아니라 확신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 변화의 과정이 성령의 역사이고 이 회복의 과정이 거룩한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