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5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6주

내가 쌓은 두로의 성벽

My Tyre, My Wall

스가랴 9:9-12

9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10 “내가 에브라임에서 전차들을 없애겠고 예루살렘에서 말들을 없애겠다. 전쟁에서 쓰이는 활들은 부러질 것이다. 그 왕이 나라들에게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의 나라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11내 백성아, 내가 너희와 언약을 맺었으며 희생 제물의 피로 그 언약을 봉인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가운데 포로 된 사람을 물 없는 웅덩이에서 풀어 주겠다. 12희망을 가진 너희 포로들아, 너희의 요새로 돌아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이른다. 너희를 옛날보다 두 배로 회복시켜 주겠다. (쉬운 성경)

9 Rejoice, O people of Zion! Shout in triumph, O people of Jerusalem! Look, your king is coming to you.  He is righteous and victorious, yet he is humble, riding on a donkey riding on a donkey’s colt.
10 I will remove the battle chariots from Israel and the warhorses from Jerusalem. I will destroy all the weapons used in battle, and your king will bring peace to the nations. His realm will stretch from sea to sea and from the Euphrates River to the ends of the earth.
11 Because of the covenant I made with you, sealed with blood, I will free your prisoners from death in a waterless dungeon.
12 Come back to the place of safety, all you prisoners who still have hope! I promise this very day that I will repay two blessings for each of your troubles.(New Living Translation)

지난 두주 동안 예레미야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던 백성들에게 다가올 징계를 전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스가랴서는 예언의 배경이 다릅니다. 바벨론에서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징계를  받고 돌아온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스가랴서는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면서 이전에 화려했던 성전의 영광이 과연 회복될까? 그 옛날의 영광이, 정말 다시 우리에게 임할까?” 낙심을 마주한 백성들에게 전했던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오직 하나, 자기 백성과의 관계 회복에 있습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난 백성에게 징계를 내리신 것도, 포로 생활에 지쳐버린 백성에게 “내가 너희를 버려두지 않았다, 결코 잊지 않았다” 말씀하신 것도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זְכַרְיָה, 즈카르야)라는 이름 자체가 설교입니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하나님께서 잊으신 것 같은 깨어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스가랴서를 읽을 때마다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려 보기 바랍니다. 때때로 나의 생각과 욕심이 하나님 보다 앞서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서 선수들은 수없는 패배를 거칩니다. 더 강한 상대에게 실패를 반복하면서 경험과 실력을 쌓게 됩니다. 그런데 가장 위대한 실패를 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강해지기 위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 패배자의 자리에 내려가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실패하지 않으려고, 넘어지거나 뒤쳐지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왕은 반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 가장 패배한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세상은 골고다를 실패의 현장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가 결코 스스로 쌓을 수 없는 견고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오늘 본문은 시온 백성들에게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기뻐하고 즐거이 외치라고 시작합니다.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피난처가 되신 그분이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9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겸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עָנִי(아니)는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고난받는 자’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당시에 왕은 군용 말을 탔는데 예수께서는 전투 능력을 상징하는 군마(軍馬)가 아니라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시온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왕이 갑옷을 입고 강한 말을 타고 오실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의로우신 왕이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를 두려워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미 무너뜨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그분의 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입을 수 없는 값비싼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의를 “호심경”이라 부릅니다(엡 6:14). 호심경은 심장을 지키는 갑옷과 같습니다. 의의 갑옷은 전쟁터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화살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사단이 자주 사용하는 교만과 결핍이라는 화살로 부터 지켜 주는 것이 의의 호심경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수많은 화살이 성도의 심장을 향해 날아올 때, 의로우신 주님은 성도들이 즐거이 외칠 승리의 이유가 되어 주십니다.

세상은 그 왕을 배척했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배척의 뿌리는 영적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눈을 뜨지 못했고 자신의 죄를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열심과 의로움으로 우리를 형식에 가두거나 영적 교만으로 유혹하지만 의로우신 예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십니다.

둘째, 스스로 강해지려던 요새는 무너집니다.

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 4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 (스가랴 9:3-4)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기대하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즐거움과 기쁨도 영적 교만이 될수 있습니다. 교만은 세상의 즐거움이나 부요함을 통해서도 우리를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며 즐거워하고, 내가 쌓아올린 것들로 의롭게 여기는 것도 영적 교만입니다. 뿐만 아니라 상처로 인해 결핍에 갇혀 사람의 위로만 구하는 것도 사단이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소유로, 하나는 결핍으로 향하지만 결국은 같은 곳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설 수 있다는 자기기만도, 하나님이 계셔도 소용없다는 체념도 의로우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 교만을 보여주는 도시가 바로 두로입니다. 두로는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서 요새를 세웠습니다. 적들로 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 약 800미터 떨어진 섬에 성벽의 높이가 약 45m나 되는 견고한 성읍을 건설하였고 역사속에서 누구도 이 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치 철옹성 같은 요새였습니다. 게다가 온 바다의 상업을 도맡아 하던 나라이므로 해상에서 그들을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은을 티끌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아 올렸다고 표현합니다. 두로는 누구보다 현명했고 부유했고 강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두로에 대한 예언이 크게 현실성이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두로 왕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씀합니다. “2 사람아, 두로 왕에게 전하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마음에 교만한 생각을 품으며 ‘나는 신이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신의 보좌에 앉아 있다’라고 말한다. 네가 네 자신을 신처럼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겔 28:2) 두로의 진짜 문제는 강함이 아니었습니다. 강함을 쌓으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버린 것이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신의 악단’ 영화를 교우들과 함께 보았습니다. 당의 명령에 충성하는 군인들의 신념이 마치 두로가 쌓아 올린 높고 강했던 성벽 같아 보였습니다. 북한 보위부는 외화 지원금을 얻기 위해 지시를 내리고 승리 악단원들과 함께 부흥회를 준비하게 합니다. 이 단원들은 숨어서 주님을 믿는 악단이었습니다. 승리 악단원들은 찬양이 금지된 땅에서 진짜 찬양을 부르지만 보위부 군인들은 당의 명령에 따라 예배를 연극처럼 드립니다. 그들의 심장은 수령님을 향한 충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연기하듯 읊조리던 찬양과 읽어 내려가던 성경의 말씀이 보위부 군인들 내면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수령을 향하던 충성이 주님을 향한 예배가 됩니다. 신의 악단 한 인물의 고백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머리와 생각은 당을 따르는데, 마음과 영혼은 예수를 따르네요. 곧 처형 당할 목숨이니, 오늘 고백하는 거라우.” 예배의 회복은 이처럼 무릎 꿇는 대상을 바꾸어 줍니다.

라틴어 가운데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단어입니다. 성도에게 메멘토 모리는 단순히 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잊는 순간, 우리는 두로 왕을 닮아갑니다. 입술로는 찬양하고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나의 재물과 성공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과 겸손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겸손해지려는 바로 그 순간에도 교만은 속삭입니다. 찬양하는 자리에서도, 기도하는 자리에서도, 심지어 섬기는 자리에서도 “네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 네가 이만큼 했으면 하나님께서 네 편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라는 유혹입니다. 결국 교만은 인생과 영혼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독입니다. 실제로 역사속에서 두로는 동방을 정벌하던 알렉산더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7개월의 항전 끝에 마침내 함락되고 불에 탄 재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권력도, 재물도 언젠가는 다 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인생은 다릅니다. 시작이 좋은 인생은 많아도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인생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은 더 강해지고 더 높이 쌓으라고 요구하지만 성도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이 아무리 정교해도 하나님의 뜻보다 지혜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약함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때, 평화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10 “내가 에브라임에서 전차들을 없애겠고 예루살렘에서 말들을 없애겠다. 전쟁에서 쓰이는 활들은 부러질 것이다. 그 왕이 나라들에게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의 나라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요새로 돌아올 때 참된 쉼을 얻습니다

11 내 백성아, 내가 너희와 언약을 맺었으며 희생 제물의 피로 그 언약을 봉인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가운데 포로 된 사람을 물 없는 웅덩이에서 풀어 주겠다.

믿음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실패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서 행하신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진짜 삶의 왕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심으로 죄와 사망의 자리를 생명과 화목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성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두려워 말고 내가 찢긴 살과 흘린 피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피의 언약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주님의 새 언약입니다. 이것은 오래전 선지자들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맺고 결단했지만 그 언약을 잊을 때도 있었고,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12 희망을 가진 너희 포로들아, 너희의 요새로 돌아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이른다. 너희를 옛날보다 두 배로 회복시켜 주겠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주님께서 멍에를 먼저 지셨고, 멍에를 지고 하는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내 멍에가 무겁지 않고, 쉽고 가볍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이 이미 멍에를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왕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전쟁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끊어 버리셨습니다. 칼과 창이 아니라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 인간의 죄와 부정한 것들을 씻겨 내셨습니다. 불신앙으로 인한 절망과 미움, 시기 가운데 갇혀 살던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오신 예수를 인해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풍성한 삶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따라 하루하루 순종의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 예배의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으로 자유를 누리며 기쁨을 회복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내 삶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더 간절히 원할때가 많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의 자리에 나를 앉혀 놓았습니다. 지금도 예배할 수 없는 곳에서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들의 삶이 우리와 다른 삶일까요? 우리는 자유 안에서 일상에 묻혀 식어진 마음을 발견하며 우리에게 있는 그 간절함이 내 삶의 문제에만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두로가 스스로 쌓아올린 요새도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뒤에 감추어진 결핍과 상처와 불안, 내 힘으로 애쓰는 감정들, 내 인생을 내 힘으로 붙들려고 하는 교만은 내 안에 높게 쌓아 올린 벽입니다. 우리는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서 나만 아는 두로의 성벽을 쌓았지만, 그분은 무너짐의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이 벽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질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예배의 회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겸손의 왕은 우리를 회복시키러 오셨습니다. 형식이 아니라 기쁨으로, 은혜로 나아오는 예배자로 우리를 세우십니다. 우리를 은혜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찬양하기 원합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실망한 이 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찬송가 272)

0628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5주

하나님의 본심

The Heart of God

예레미야 28:5-9

지난 주 우리는 예레미야 20장에서 뼛속에서 타오르는 말씀의 불을 함께 보았습니다. ‘여호와를 잊어 버리겠다.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 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씀을 들고 백성에게 나아갔지만 돌아온 것은 조롱과 멸시였습니다. 침묵하려 해도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더욱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어느 쪽도 자신의 힘으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가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심어 두신 말씀의 불이 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예레미야를 붙드시고, 어떤  환경에도 굴복하지 않도록 그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두 선지자의 대립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냐와 예레미야입니다. 성경은 시드기야가 유다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한지 사년째 되는 해 다섯째 달에 일어난 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두 선지자의 예언의 대립이 첨예한 관심사였고,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두 선지자의 시작은 똑같았습니다. 하나냐 선지자는 예언을 시작하기 전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시작했고,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만군의 여호와,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라고 예언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언의 내용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나냐는 2년 뒤에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의 왕이 유다백성에게 한 멍에를 꺾어 버린다고 예언을 해서 평안을 빌어 주었고, 예레미야는 모든 나라의 목에 쇠 멍에를 씌울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고 그의 종이 되게 할 것이다. 라고 심판을 전했습니다. 예언의 내용만 놓고 보면, 하나냐는 듣기 좋은 말을 했고, 예레미야는 들어야 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듣기 좋은 편으로 몰렸습니다.

구약신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 1901-1971)는 하나냐의 예언을 도덕적 타락의 문제라기보다 시온신학을 절대화한 것으로 봅니다. 당시 하나냐는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지 않을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던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구약시대 성전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었고, 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했습니다. 하나냐가 선지자의 자리에서 쉽게 드러날 거짓을 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확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하나냐 자신의 예언이 거짓이라면, 굳이 2년이라는 시간을 명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2년 뒤면 자신의 예언이 거짓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도 구체적이고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같은 현실과 같은 고통속에서 두 갈래 길에 서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해 더 깊이 나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떠나 멀어지는 길입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때 우리는 내안의 나를 지키려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 보호를 위한 기도만 드리게 됩니다. 살아냄의 자리에서 오는 절박함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 가운데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것은 나의 확신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성취됨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휘장을 찢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시간을 열어 주셨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우리는 예수께서 흘리신 보혈로 새성전과 새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레미야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노래하면서 자신들에게 평안을 주는 말씀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삶이 평안하기를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내게 좋은 것만을 적용할때에 말씀이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절대적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삶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과 다를지라도 고통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의 길을 따라 걷는 자리에서 은혜를 잃어버리고 판단자의 자리에서 서는 순간 인간은 위선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개인의 신앙도 그렇고 신학도 그렇습니다. 내 안의 확신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다보면 정작 살아가야 믿음의 방향을 잃어버릴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도 특별하게 일하시는 완전하심을 믿으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모습을 영적 교만으로 책망하셨습니다. 영적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형식은 남아 있지만 생명력을 잃게 합니다. 사사시대도 그랬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각 사람은 자기 확신과 신념 속에서 살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서 있는가입니다.

예언의 목적

요나는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니느웨를 향해 선포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욘 3:4) 이것은 요나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거짓 선지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은 언제나 회개를 향한 부르심을 그 안에 품고 있습니다. 니느웨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예언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예언의 목적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요나의 마음 안에 있었습니다. 그의 발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을 때, 요나는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자신의 기대를 벗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동안에도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대신 자신을 중심에 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심판 자체가 아니라 회개와 회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심을 품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6 예언자 예레미야가 말하였다. “아멘! 여호와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소. 당신이 예언한 말을 여호와께서 이루어 주시면 정말 좋겠소.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안에 있던 모든 물건들을 바빌론에서 이 곳으로 가져오시고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도 다시 이 곳으로 데려오시면 좋겠소.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예언이 틀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본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 지라도 참된 선지자는 고통 받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심판 보다 더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아멘,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소’ 라고 했던 말 안에는 하나님의 본심이 담겨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에는 심판을 넘어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본심이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열했던 원인은 은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영적 우월감과 지식, 방언과 예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풍성함이 오히려 교회를 분열하게 했습니다. 아볼로, 게바, 바울파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 파로 나누어 지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사라진 자리에 비교와 자기자랑과 교만이 들어섭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그 무너진 교회 한가운데 서서 선언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것은 단순한 권면이 아닙니다. 흩어진 교회를 다시 세우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고통을 은혜로 회복시켜 주시고, 악함을 보혈로 씻겨 주시는 능력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참된 길로 나아가게 되고, 교회답게 섬기며 일하게 합니다.

믿음의 길을 내 힘으로만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처가 깊어질수록 내뜻과 다른 이들 앞에서 마음에 불편함이 찾아옵니다. 자기목숨을 버리는 것이 우리의 용기와 본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를 버려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주님이 십자가에서 지셨습니다. 십자가 아래 있는 성도는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고 주안에서 자랑할 뿐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값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지면 나의 낮아짐도 나의 부요함도 내 공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풍진 세상에서 눈물 나는 그 자리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하나님을 앞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믿음 생활은 없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냐처럼 되어 가는가? 하나냐가 예언했던 좋은 말만을 더 듣고 싶어지는가? 삶의 방향을 세상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목자 되신 주님을 따라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비유하셨습니다. 이리떼가 올때 삯군 목자는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우리는 쉽게 비겁하다. 거짓되다라고 정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나의 자녀에게 이리떼들이 헤치려 온다면, 너는 그 자리에서 네 목숨을 바쳐야 한다.라고 말할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 자녀가 이리떼를 피해 맡긴 역할을 못했다고 해서 ‘너는 악하고 거짓되구나. 너는 삯군이다’라고 정죄할 부모가 있겠습니까? 이리떼로 부터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갚을 수 없는 은혜는 어떤 합리적인 설명으로 온전히 설명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플 때, 내가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을 부모라면 압니다. 자녀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끝까지 중보자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양들을 살려내기 위해 모든 위협과 위험을 온 몸으로 막아 내셨습니다. 그 사랑과 믿음의 자리에서 죽음은 더 이상 최종 권세가 아니었고, 오히려 생명이 드러나는 자리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안에 숨겨진 괜찮은 척, 강한 척, 믿는 척했던 모습을 벗겨내고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서야 합니다. 참된 변화에 대한 갈망은 단순히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인간적인 소망이 아닙니다. 때로는 멍에를 지는 것이 고통스럽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대와 다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1900년대 초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 즐겨 불렀던 희망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같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이후 한국 교회에서 새로운 가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우리 할 일이 무엇이냐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형제여 서로 사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자 사랑의 주님 계명 지켜 힘써서 사랑하자. ‘나의 희망’을 묻던 노래가 ‘우리의 사명’을 묻는 찬양으로 바뀐 것입니다.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절망 속에서도 사명을 발견하게 했습니다. 너의 꿈이 무엇이냐 묻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성도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묻고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맡겨 주신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속에서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심판의 경고 앞에서는 겸손히 회개하고, 약속의 말씀 앞에서는 흔들림 없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시선을 돌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믿음의 경주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06 21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4주

말씀이 나를 태울 때

When the Word Burns

예레미야 20:7-13

7 여호와여, 주께서 저를 속이셨고, 저는 속았습니다. 주께서 저보다 강하시므로 저를 이기셨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노리개가 되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비웃습니다. 8저는 말할 때마다 폭력과 멸망을 외쳤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했지만 그 때문에 저는 모욕만 당했습니다. 백성은 하루 종일 저를 비웃습니다. 9때로는 ‘여호와를 잊어 버리겠다.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여호와의 말씀이 내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그 말씀이 내 뼛속 깊은 곳까지 태우는 듯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제 안에 담느라고 지쳤습니다.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10수많은 사람들이 저에 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방에 두려움뿐입니다. “예레미야를 고발하자! 예레미야를 고발하자!” 제 친구들도 모두 제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립니다. “어쩌면 우리가 예레미야를 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를 쳐서 우리 원수를 갚자”고 말합니다. 11하지만 여호와는 힘센 용사처럼 저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저를 치려고 뒤쫓는 사람은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들은 크게 실망하고 부끄러움을 당하여 모든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12만군의 여호와여, 주님은 의로운 사람을 시험하여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깊은 곳을 살피십니다. 제 사정을 여호와께 말씀드렸으니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주셔서 그 모습을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13여호와께 노래하여라!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여호와께서 가난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신다. 악한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주신다. (쉬운 성경)

7 O Lord, you misled me, and I allowed myself to be misled.
You are stronger than I am, and you overpowered me.
Now I am mocked every day; everyone laughs at me.
8 When I speak, the words burst out. “Violence and destruction!” I shout.
So these messages from the Lord have made me a household joke.
9 But if I say I’ll never mention the Lord or speak in his name, his word burns in my heart like a fire.  It’s like a fire in my bones! I am worn out trying to hold it in!  I can’t do it!
10 I have heard the many rumors about me. They call me “The Man Who Lives in Terror.” They threaten, “If you say anything, we will report it.” Even my old friends are watching me, waiting for a fatal slip. “He will trap himself,” they say, “and then we will get our revenge on him.” 11 But the Lord stands beside me like a great warrior. Before him my persecutors will stumble. They cannot defeat me. They will fail and be thoroughly humiliated. Their dishonor will never be forgotten.
12 O Lord of Heaven’s Armies, you test those who are righteous, and you examine the deepest thoughts and secrets. Let me see your vengeance against them, for I have committed my cause to you.
13 Sing to the Lord! Praise the Lord! For though I was poor and needy, he rescued me from my oppressors.(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꿀송이에 비유합니다. 시편에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편 119:103) 정통 유대인들은 자녀가 처음 토라를 배우는 날, 꿀을 발라 아이의 입술에 대어준다고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도록, 말씀이 기쁨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 속에서 예레미야가 경험한 말씀은 꿀처럼 달콤한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태우는 불이었습니다. 말씀은 그의 삶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흔들어 깨운 현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 선 한 인간의 탄식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했던 예레미야 내면의 깊은 고통과 탄식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그의 삶을 붙들고 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1. 말씀은 우리를 흔들어 깨웁니다.

말씀을 내 취향에 맞게 골라 듣기 편한 말씀만 찾는 사람에게는 말씀이 결코 불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말씀은 항상 곁에 있지만, 내 마음이 열려 있지 않으면 그저 익숙한 위로로만 머물 뿐입니다. 듣기 좋은 말씀은 가까이 두고 부담되는 말씀은 멀어집니다. 그렇게 마음의 위로에만 멈추어 길들여진 말씀은 우리를 흔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말씀을 피해 서 있습니까? 예레미야의 삶에 말씀은 눈물이고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전하다가 현실적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수록 고독은 더 깊어졌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멸시와 무시, 반박과 조롱, 핍박과 수치 등 온갖 인격적 모욕과 신체적인 고난뿐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7 여호와여, 주께서 저를 속이셨고, 저는 속았습니다. 주께서 저보다 강하시므로 저를 이기셨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노리개가 되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비웃습니다.  8저는 말할 때마다 폭력과 멸망을 외쳤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했지만 그 때문에 저는 모욕만 당했습니다. 백성은 하루 종일 저를 비웃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속였다고, 자신은 하나님께 속았다고 탄식합니다. ‘속이다’라는 단어 핏티파니פִּתִּיתַנִי 의 원형 파타(פָּתָה)는 ‘속이다, 유혹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입니다. 당신이 나를 유혹해서 속임을 당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표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선지자의 표현으로는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이 길로 들어섰는데 결과가 이것입니까? 라고 하나님을 향한 강한 항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했는데 처한 상황은 캄캄한 어둠뿐이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마음으로 뼈 아픈 탄식을 쏟아 놓습니다. 이제 여호와를 잊어버리겠다.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합니다. 부르심의 자리를 떠나고 싶은데 여호와의 말씀이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고백했을 때, 이제 그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를 놓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드는 존재로 살아가게 합니다. 말씀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움직이고 불꽃처럼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강퍅한 마음의 유다 백성들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었고, 예레미야 안에 있던 고통과 흔들림도 부르심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말씀 안에 불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 계시며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불은 우리가 연약함을 마주하는 그 자리,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그 자리에서도 꺼지지 않습니다.

9때로는 ‘여호와를 잊어 버리겠다.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여호와의 말씀이 내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그 말씀이 내 뼛속 깊은 곳까지 태우는 듯합니다.

에쉬 보에렛은 (אֵשׁ בֹּעֶרֶת) 활활 타오르는 불입니다. 말씀을 전하다가 겪었던 고통의 의미도 있겠지만 선지자의 마음안에 비록 지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심판받는 장면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 고통도 있었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현실과 사명 사이에서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고, 내려 놓으려 해도 내려놓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민족의 아픔과 내면의 고통을 잘 표현한 구절입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 4:19) 그는 내면의 고통과 고뇌속에서 아파하고 몸부림쳤습니다. 백성들을 향해 닫혀버린 마음의 벽을 세차게 쿵쾅거리고 두드리는 전쟁의 소리, 나팔소리가 들려 온 것입니다.

바울도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고전 9:16)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화'(οὐαί, 우아이)는 하나님의 형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고백의 무게 중심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에 있습니다. 사명의 길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삶 자체가 바울에게는 이미 죽음이라는 고백입니다.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 1494 ~ 1536)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존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받고, 라틴어 성경만 있던 시대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다 쉽게 성경을 읽을수 있도록 독일로 가서 비밀리에 영어로 성경을 번역 했습니다. 당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은 큰 죄가 되는 시대였기에, 그는 1536년 10월 6일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틴데일 안에 타오르는 불은 성직자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내 뱉은 말을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살려 주신다면, 머지않아 나는 쟁기를 모는 농부 소년이 당신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게 만들 것입니다.” 그는 화형당하기 직전에 “주님,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라는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후 틴데일의 유업을 잇기 위해 많은 이들이 영어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되었는데, 훗날 틴데일의 번역이 킹제임스(KJV)영어성경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말씀에 붙들린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꽃처럼 사용하시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은 무너진 자리에서도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10 수많은 사람들이 저에 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방에 두려움뿐입니다. “예레미야를 고발하자! 예레미야를 고발하자!” 제 친구들도 모두 제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립니다. “어쩌면 우리가 예레미야를 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를 쳐서 우리 원수를 갚자”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 친구들까지도 그를 고발하려는 시선으로 있었기에 말씀을 전하며 강한 침묵을 강요받았습니다. 사방에서 두려움만이 감도는 현실을 경험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레미야가 악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수록 깊은 어둠과 두려움을 직면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누구도 그의 편에 서지 않았고 친구들 마저 자신의 넘어짐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참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사람의 심판대가 아닌 하나님의 법정으로 나아갔습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고독한 싸움을 싸우고 있던 그 선지자의 자리는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에 계신 자리였습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널려 있습니다. 내면의 욕망과 편견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만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유혹하는 일들이 즐비합니다. 이런 것들은 오랜 시간 내 믿음으로 세운 것들을 순식간에 흔들어 놓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싫어지고 하나님마저 원망스러웠을것입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자리에서 인간의 언어로는 여기가 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11하지만 여호와는 힘센 용사처럼 저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저를 치려고 뒤쫓는 사람은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들은 크게 실망하고 부끄러움을 당하여 모든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의 힘이 다한 그 자리에서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힘쎈 용사처럼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열심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때에도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불과 같은 은혜는 사람을 살리고 움직이게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깊은 곳까지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의 고통은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힘들고 외로운 시간만큼 하나님은 힘센 용사처럼 더 가까이 계시며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과 성실함으로 관계하는 이들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님은 의로운 사람을 시험하여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깊은 곳을 살피십니다. 제 사정을 여호와께 말씀드렸으니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주셔서 그 모습을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13여호와께 노래하여라!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여호와께서 가난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신다. 악한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주신다.

살아가다 보면 말씀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다가도, 어느 날은 그 말씀이 부담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돌이켜야 하는 날보다 말씀 뒤에 숨고 싶은 날이 더 많습니다. 혼자 버티다가 포기하게 되는 날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던 날들도 있습니다. 말씀은 나를 살리고 있는데, 말씀대로 살아낼 힘이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서 있던 자리도 그랬습니다. 믿음은 아름다운 날에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말씀이 불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 같을 때, 그때도 말씀 앞에 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웠던 그 자리,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그 자리를 예수님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로 부터 버림 받은것 같았지만 그  자리가 구원이 완성된 자리였습니다. 예레미야의 탄식이 찬양으로 끝나는 것은 상황이 해결되어서가 아닙니다. 여전히 그의 현실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탄식이 찬양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강한 용사처럼 그 곁에 있었고 현실의 고통이 마지막이 아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고통의 자리 내가 무너지고 낮아진 그 자리로 흘러들어와 가장 깊은 곳부터 가장 낮은 그 마음을 다시 채웁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붙들고 갑니다. 유다 백성은 비록 바벨론에 끌려갔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포로 된 땅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뤄가시는 방법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내 힘으로 버티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놓지 않으신다는 믿음으로 포기하지 마시고 도망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말씀이 꿀처럼 달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꺼지지 않는 불을 두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인생을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의 질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의 결론이 되어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탄식이 찬양이 되었듯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의 증거가 되었듯, 말씀이 나를 태울 때 내 생각으로 이해되지 않은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마음 안에 깊은 탄식이 찬양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6 14 2026 주일설교

성령감림절 제 3주

당신은 하나님의 보물입니다

You Are His Treasure

출애굽기 19:1-8

1이집트를 떠난 지 꼭 석 달 만에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2이스라엘 백성은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시내 산 맞은편 광야에 천막을 쳤습니다. 3모세는 하나님을 만나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여호와께서 산에서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야곱 자손들에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여라. 4’너희 모두는 내가 이집트 백성에게 한 일을 다 보았다. 그리고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들을 실어 나르듯 내가 너희를 어떻게 나에게 데리고 왔는가도 보았다. 5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 중에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땅의 백성이 다 내게 속하였지만, 6너희는 내게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여라.” 7그리하여 모세는 산 아래로 내려가서 백성의 장로들을 모아 놓고,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모든 말씀을 다 전했습니다. 8그러자 모든 백성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말을 여호와께 알려 드렸습니다. (쉬운 성경)

 1 Exactly two months after the Israelites left Egypt,[a] they arrived in the wilderness of Sinai. 2 After breaking camp at Rephidim, they came to the wilderness of Sinai and set up camp there at the base of Mount Sinai.3 Then Moses climbed the mountain to appear before God. The Lord called to him from the mountain and said, “Give these instructions to the family of Jacob; announce it to the descendants of Israel: 4 ‘You have seen what I did to the Egyptians. You know how I carried you on eagles’ wings and brought you to myself. 5 Now if you will obey me and keep my covenant, you will be my own special treasure from among all the peoples on earth; for all the earth belongs to me. 6 And you will be my kingdom of priests, my holy nation.’ This is the message you must give to the people of Israel.”7 So Moses returned from the mountain and called together the elders of the people and told them everything the Lord had commanded him. 8 And all the people responded together, “We will do everything the Lord has commanded.” So Moses brought the people’s answer back to the Lord.(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의 권위는 우리의 생각과 경험보다 언제나 높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매주일 예배시 입례송을 부르며 제단 앞으로 나아갑니다. 제단의 계단을 올라갑니다. 물리적인 계단이라면 인간의 힘으로 오를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다릅니다. 믿음의 계단을 오르는 것은 성경의 권위 앞에 얼마나 자신을 굴복시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결함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 -1791)는 설교를 준비하며 ‘하늘로 가는 길’에 대해 성경에서 발견된 것들을 설교에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성경의 평행 구절들을 찾고, 대조하며 그 의미를 분별했다고 기록합니다. 온 마음을 기울려 진지하게 성경을 묵상하고, 그래도 분명치 않을때는 하나님의 일에 경험이 있는 사람의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말하고 있는 저작들을 찾아 보며 하늘로 가는 길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말입니다. “제가 알고 싶은 한가지는 하늘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내려 오셔서 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빌리 그래함 (Billy  Graham: 1918-2018) 목사님을 아실 것입니다. 그의 설교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The Bible says.” 라는 말씀입니다. 1949년 친구 찰스 템플턴의 회의론에 자극받아 한동안 의심에 빠졌던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확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말씀임을 확증하는 데 굳건한 결심을 했고 이후 성경의 권위를 믿었고, 그의 설교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성경이 말합니다.’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7그리하여 모세는 산 아래로 내려가서 백성의 장로들을 모아 놓고,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모든 말씀을 다 전했습니다. 8그러자 모든 백성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말을 여호와께 알려 드렸습니다. 모든 백성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모든 백성들이 한 목소리로 말씀대로 하겠다고 응답합니다. 이것은 공동체가 함께 결단한 믿음의 언어입니다. 단순한 감정적 동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그분의 언약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무엇이 이 백성을 한 목소리로 응답하게 만들었습니까? 1절 보시겠습니다.

1이집트를 떠난 지 꼭 석 달 만에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2이스라엘 백성은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시내 산 맞은편 광야에 천막을 쳤습니다. 3모세는 하나님을 만나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여호와께서 산에서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야곱 자손들에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여라.

1.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집트를 떠난 지 꼭 석 달이 되던 날,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광야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과거 자신을 부르셨던 호렙산으로 홀로 올라갔습니다. 이 호렙산은 시내산(Mount Sinai)으로도 불리우며, 건조한 암벽 지형으로 해발 약 2,285m~2,291m의 산입니다. 모세는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부르셨던 그 산을 다시 올랐을까요? 모세는 자신의 의지로 산을 오른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하여 산을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등산에 비유합니다.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정상에 서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경건생활은 세상이 말하는 등산과는 방향이 다릅니다. 세상은 스스로 올라가라고 말하지만,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시는 데서 시작됩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그는 한때 애굽의 왕자로서 자신의 힘으로 민족을 구원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며 철저히 낮아졌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열정에 대한 확신마저 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에게 먼저 내려왔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응답할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신앙생활은 평생 부르신 소명을 따라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 8절 이후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들도 준비시키라고 말씀합니다. 메시지 성경으로 보시면, “준비하여라. 내가 짙은 구름속에서 내게 나타나겠다. 이후 하나님은 너는 백성에게 가서 거룩한 하나님을 뵐수 있도록 앞으로 이틀 동안 그들을 준비시켜라.” 모세가 호렙산에서 내려와 백성들에게 말하고 나니 백성들은 당시 성결법 대로 저마다 물로써 몸을 씻고, 입고 있던 옷도 깨끗이 빨았습니다. 몸과 마음의 성결함을 준비하며 점검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성결한 상태로 유지하며 삼일 동안을 기다립니다.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는 로마의 ‘빌라도의 계단(Scala Sancta)’을 무릎으로 오르며 내면의 죄와 씨름하며 고행을 했습니다. 자신의 노력과 선행으로 죄 사함을 받으려고 고해성사를 하며 몇시간을 기도했지만 또 다시 올라오는 죄를 이길수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의 중심에 오직 성경이 최고 권위를 갖는다는 것과 더불어 은혜와 믿음이 홍수처럼 부어질때 모든 신자들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고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외친 것입니다. 스스로 올라가려 했던 루터의 믿음이 무너진 그 자리에 하나님이 친히 내려오셨습니다. 삶의 변화시킨 믿음은 루터의 오름으로 부터 시작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오심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보물로 선택받은 사람은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월드컵을 앞두고 각 나라는 최고의 선수들을 선발하기 위해 경쟁을 치릅니다. 모든 선수들이 수많은 경쟁 속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을 했지만 더 필요한 선수들을 선택하여 국가를 대표하는 세계 무대에 서게 됩니다. 세상은 능력을 평가해서 선택하지만, 하나님의 선택방법은 다릅니다.

신명기 7장 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7: 7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여러분을 선택하신 까닭은 여러분의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오. 오히려 여러분은 모든 나라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나라에 불과하오. 8그런데도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신 것은 여러분의 조상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함이며,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도, 미국땅 보스턴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도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업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값없이 받은 은혜입니다. 그렇다고 은혜가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업어 오신 것은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4 너희 모두는 내가 이집트 백성에게 한 일을 다 보았다. 그리고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들을 실어 나르듯 내가 너희를 어떻게 나에게 데리고 왔는가도 보았다. 5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 중에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말씀대로 지키라는 것은 행위에 대한 초점이 아니라 관계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은 특별한 보석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당신의 가장 소중한 보석으로 삼으시고 사랑해 주시기에 우리의 믿음이 무너진 자리에서도 그분의 뜻을 따라 살게 됩니다. 이 언약은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약속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언약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왜 선택하셨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는가에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자신 안의 쓴 뿌리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상처가 나를 완악하게 만들고 두려움이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기의 민낯이 더 선명해집니다.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말씀도 읽는데 누군가의 말 한마디, 작은 문제 하나에도 너무 쉽게 돌아섭니다. 내 안의 연약함이 드러납니다. 예배의 은혜가 삶까지 이어지기까지 우리는 너무도 많은 일들과 생각들 안에서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흔들리는 그 자리에서도 우리를 신뢰해 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 안에 쓴뿌리가 뽑혀지고 새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쓴 뿌리의 자리로 찾아오십니다. 뜨겁게 쏟아냈던 열정과 쓴 뿌리와 씨름하며 버텨야 했던 많은 순간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나무 하나를 던져 넣으시자 쓴 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의 쓴 뿌리를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십자가를 세워 주셨습니다. 다시 일어설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시내산 언약의 조건절은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어려움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 땅에서 선택의 자유도 없이 노예로 살던 그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듯이 건져 내셨으니, 이제는 강요와 복종으로 이끌던 이집트의 방식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말씀을 행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계약은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집니다. 서로에게 이익이 없으면 그 관계가 끝까지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성도는 손수 품에 품으신 가장 친밀한 소유입니다. 전시용 보석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손에 쥐고 계신 보석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거룩한 산을 올라갈 힘이 됩니다. 자기 중심적 생각과 죄의 본성과 싸워나가며 올라가며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처음과 마지막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우리 안에서 완성하실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도 침투할수 없는 거룩한 자녀로 삼아주셨기에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엎드리는 것입니다.

평생 이 언약 안에서 살아가지만, 믿음이 부족하여 넘어지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언약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조차,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물로 여겨 주시기에 이제는 작은 일 하나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됩니다. 성도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깨어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보석은 장식장 안에 갇혀 있을 때가 아니라 자기 자리에 있을 때 빛이 납니다. 우리에게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육아에 지쳐 내 세상을 잃어버린 것 같은 그 자리, 홀로 믿음을 지키며 아무도 없다고 느껴지는 그 자리, 하나님의 말씀 하나 붙들고 버텨 내는 그 자리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물로 두신 자리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삶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시는 일입니다. 값없이 받은 은혜 앞에서 움켜 쥐어도 나의 것이 아니니 잃을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으로 순종하며 응답하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보물이라 불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모든 민족과 열방이 이 고백을 드리도록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의 삶을 드리며 출애굽기 19장의 백성들처럼, 오늘 이 자리의 우리도 한 목소리로 고백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

0607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2주 

호세아 6:1-6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What Shall I Do with You?

1“어서 주께로 다시 돌아가자. 그 분은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우리를 싸매 주시고 그 분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2이틀 만에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를 주의 곁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 3우리가 주님을 알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 애쓰자. 주님은 동터오는 새벽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단비처럼 땅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처럼 그렇게 오시리라.”  4“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에 대한 너의 충정은 아침나절의 안개만 같구나. 너희의 충정이 아침 일찍 사라지는 이슬만 같구나. 5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시켜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를 해처럼 샅샅이 비추었다. 6왜냐하면 내가 반기는 것은 사랑이지 희생제물이 아니며 예물을 불에 태워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라기 때문이다. (쉬운 성경)

1 “Come, let us return to the Lord. He has torn us to pieces  now he will heal us. He has injured us  now he will bandage our wounds. 2 In just a short time he will restore us,  so that we may live in his presence. 3 Oh, that we might know the Lord!  Let us press on to know him. He will respond to us as surely as the arrival of dawn or the coming of rains in early spring.” 4 “O Israel and Judah, what should I do with you?” asks the Lord. “For your love vanishes like the morning mist   and disappears like dew in the sunlight. 5 I sent my prophets to cut you to pieces   to slaughter you with my words,  with judgments as inescapable as light. 6 I want you to show love,  not offer sacrifices. I want you to know me more than I want burnt offerings.(NEW LIVING TRANSLATION)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 코아부 수련회를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호세아 10장 말씀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부들이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했습니다. 수련회를 준비하는 섬김이들은 과연 잘 진행될 것인지 염려도 했을것이고, 빽빽한 일정을 비우고 예배의 자리로 찾아오는 것 자체가 이미 영적 싸움의 시간을 뚫고 왔을 것입니다. 희망과 믿음의 세대를 이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준비한 모든 순서를 통해 보았습니다.

16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마크 트웨인(Mark Twain:1835-1920)의 ‘왕자와 거지’란 소설이 있습니다. 거지의 아들과 왕궁에서 태어난 아들이 어느날 친해지고 두 소년은 재미삼아서 옷을 바꿔입게 됩니다. 이후 두 아이는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어린시절 학대받던 톰은 신분이 변화된 왕자로 살게 되고, 에드워드 왕자는 거지로 취급되면서 거지소굴을 돌아다니며 엄청난 고생을 합니다. 소설의 결말에서 진짜 왕이 맞는지 테스트를 하여 가까스로 왕의 자리로 복귀하는 내용으로 흥미를 유발하는 이야기입니다.

신분의 변화는 삶에 분명한 차이를 가져다 줍니다. 겉 모습이 아닌 본질적인 변화의 사건은 우리의 삶속에서 놀라운 변화를 갖고 오게 됩니다. 성경은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왕이신 분이 스스로 수치의 옷을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옷을 바꿔 입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바꾸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호세아서는 스스로 수치의 옷을 입고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가리킵니다. 도저히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끝까지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존귀한 자녀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의 품에 있던 북이스라엘을 향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정치적으로 불안했고, 영적으로는 암흑에 가까운 시대였습니다. 호세아의 외침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에 온 마음을 쏟으십시오(1, 2)

1“어서 주께로 다시 돌아가자. 그 분은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우리를 싸매 주시고 그 분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2이틀 만에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를 주의 곁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

어서 주께 돌아가자, 주님을 힘써 알자는 이 고백은 매주일 우리가 부르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 믿음의 노래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랑의 고백이며, 세상을 살며 상처와 실패로 인해 공허한 우리의 빈 마음에 끊임없이 메아리 쳐야할 희망의 노래입니다. 호세아서를 묵상하면 죄에 대한 심판과 회복이 동일한 손에서 나오기에 긴장감이 조성되지만, 찢으신 분이 싸매시고, 상처를 내신 분이 그 손으로 아물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죄에 대한 심판의 끝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입니다. 원망과 서운함, 상처로 닫혀진 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빗껴간 삶의 목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우리의 얼굴을 향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얼굴을 드러내시고, 또 다시 용서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약속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틀 만에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를 주님 곁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라고 약속합니다. 우리는 이 약속이 이미 이뤄진 시대를 살아갑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삶의 방향입니다. 이 약속 안에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님께 돌아가면,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주의 곁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껏 알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고 스스로를 ‘제때 나지 못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늦게 부르심을 받은 자, 자격 없는 자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환난을 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핍박 속에서도, 자신이 전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자신은 깨어질 질그릇과 같지만 그 안에 예수께서 계시니, 사방이 막힌 것 같아도 괴롭지 않고 당혹스러운 일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몸에 예수의 죽으심의 흔적을 지닐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 가운데 살아 있는 자신의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형식이 아니라 믿음의 본질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제사보다 낫습니다(3, 6)

3우리가 주님을 알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 애쓰자. 주님은 동터오는 새벽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단비처럼 땅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처럼 그렇게 오시리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대답하시다 6왜냐하면 내가 반기는 것은 사랑이지 희생제물이 아니며 예물을 불에 태워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교회는 형식만 남아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 주목하고 지난 날의 영광에만 머무는 교회는 역사 속에서 교회 건물이 결국 박물관이 되거나 술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초라해 보여도 은혜가 부어진 교회에는 부흥과 영광이 임재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재한 교회는 겉으로 초라해 보여도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그 어떤 상처난 마음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의 상처를 깨끗하고 온전하게 씻겨 주실 분은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고, 무감각해진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힘써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자녀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쉬울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는 자기 아들을 죽게 한 대가를 치르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히브리어로 다아트 엘로힘(דַּעַת אֱלֹהִים)입니다. 그 동사 어근은 야다(יָדַע)인데, 창세기 4장에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라고 쓸 때 바로 이 단어를 씁니다. 부부가 몸과 영혼을 나누는 친밀한 앎입니다. 깊은 친분을 맺는 그 친밀함에는 틈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 제품 매뉴얼을 읽는 수준의 차원이 아니라 몸을 맞대고 사는 부부처럼 그렇게 나를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가 맡기신 일을 감당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집니다. 맡겨진 일을 내가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거닐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그 자세와 마음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토저 목사(Aiden Wilson Tozer, 1897 ~ 1963) 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보통 사람들의 시대이다.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평범한 수준으로 끌어 내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를 다시 깨닫는 것이다. 성실한 말씀 전파와 기도를 회복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라” 경건하고 거룩한 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멈추지 마십시오. 믿음의 경주에서 벗어날때 우리의 삶은 좋지 않은 것들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따라가야 할 방향은 대세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충정은 아침안개 같지만,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십니다(4–5)

4“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에 대한 너의 충정은 아침나절의 안개만 같구나. 너희의 충정이 아침 일찍 사라지는 이슬만 같구나. 5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시켜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를 해처럼 샅샅이 비추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아, 부르시며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두번이나 물으십니다. 이 물음은 심판의 선언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헤세드 사랑은 동이 뜨는 새벽빛과 땅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처럼 일상속에서 변함없이 확실하게 주시는 선물이지만 우리는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에브라임처럼 주어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닌데 평생 내 것인 양 살아갑니다. 우리의 충심은 아침 안개 같고 금방 사라지는 이슬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흔들립니다.

새벽에 일어나 예배를 준비할때면 생각나는 추억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아버지께서는 방학이면 새벽에 저를 깨우셨습니다.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간, 새벽시장으로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세상이 고요한 그 시간에 이미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방학때 늦잠도 자고 싶고, 풀어 지고 싶은데 아버지는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한번은 용돈을 바로 주시지 않고 포도 열박스를 사주시면서 너가 한번 팔아 보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린 마음에 불편했고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잘 사주겠지 하고 찾아갔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포도 박스를 사준 것은 약국에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이었어요. 많이 가져서 헌신하고 베풀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마음이 부요한 사람이 사랑을 나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사랑의 방법이셨습니다. 세상을 알고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하시는 훈련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에브라임에게 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예언자들을 시켜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를 해처럼 샅샅이 비추었다.’ 빛이 샅샅이 비춘다는 것은 숨길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 그들을 찢고 상하게 하셨습니까? 드러내는 것이 아프고, 찢고 터뜨리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낫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חֶסֶד) 앞에서 서면 우리의 죄가 죄 그대로 보이고,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깨우심에 긴장감이 있지만 결국엔 그 사랑이 우리를 살리는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찢겨진 자리가 치유의 자리가 된 곳이 예수께서 우릴 위해 달리신 십자가입니다. 고통의 자리로 내려오신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우릴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져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릴 회복시키십니다. 사명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높이 계신 하나님께로 끌어 올리는 힘이 있습니다. 포기 하지 않고 내가 너를 살리겠다는 하나님의 심장소리를 듣는 순간, 죽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그 어떤 계획도 하나님 보다 앞설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언가를 형식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때, 우리는 비로소 보게 됩니다. 식어진 마음 안에서도 여전히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깨달을 때, 온 마음과 삶을 다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 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지극히 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목적은 풍요와 소유이지만 다시 태어난 성도들의 삶의 목적은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그 명령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있습니다. 세상의 풍요는 우리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라는 물음 앞에 서기 바랍니다. 자신이 찢기신 채 싸매주시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그 주님만이 우리의 목적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