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15 2026 주일설교

주현 후 마지막 주/ 변화주일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Witnessed with Our Own Eyes

베드로후서 1:16~21

16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지어 낸 근사한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위엄 있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17 장엄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가 그로 인해 무척 기쁘다.”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셨습니다. 18 우리는 그 음성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거룩한 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을 때 들은 그 음성은 분명히 하늘로부터 울려 온 것이었습니다. 19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예언자들이 전한 말씀을 보다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 말씀을 가까이 하고 따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그들이 전해 준 말씀은 어두움을 환히 밝혀 주는 빛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빛은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동이 트고, 아침 샛별이 환히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줄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분명히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떠한 예언의 말씀도 예언자가 마음대로 해석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며, 21사람의 뜻대로 말하고 싶은 것을 적어 놓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 놓았습니다. (쉬운성경)

16 For we were not making up clever stories when we told you about the powerful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We saw his majestic splendor with our own eyes 17 when he received honor and glory from God the Father. The voice from the majestic glory of God said to him, “This is my dearly loved Son, who brings me great joy.”[f] 18 We ourselves heard that voice from heaven when we were with him on the holy mountain. 19 Because of that experience, we have even greater confidence in the message proclaimed by the prophets. You must pay close attention to what they wrote, for their words are like a lamp shining in a dark place—until the Day dawns, and Christ the Morning Star shines[g] in your hearts. 20 Above all, you must realize that no prophecy in Scripture ever came from the prophet’s own understanding,[h] 21 or from human initiative. No, those prophets were moved by the Holy Spirit, and they spoke from God.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날은 정보가 넘쳐나지만 오히려 혼란스럽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정보는 많아졌는데 진실을 찾는 것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내가 선호하는 영상들을 보여주고 내가 걸어온 길. 내 의견과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만 머물게 합니다. 더 많이 알고 볼수록 불안해 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의 확신이 더 크신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고 시야를 좁아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쓰던 그 때에도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흔들었고 성도들의 마음에는 깊은 의심이 들어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목격된 진리라고 선언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목격된 진리입니다. (16-19)

성도들에게 지도는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말씀은 수천년에 걸쳐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나침반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기록자로 사람을 삼으셨지만 인간의 뜻을 배제한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도록 성령을 통해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후서1장 16-21절은 그 말씀의 확실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를 기록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직접 올라갔던 변화산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증언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셨는데, 그곳에서 주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영광스런 예수를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여기 있으니 정말로 좋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초막 세 채를 지어서 하나는 주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마 17:1-4) 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지만 그 얼굴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광채를 보았고 하늘로부터 직접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변화산 이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지만 산에서 내려온 이후에 예수께서 기도하실때 육신이 피곤해서 잠들어 있었고, 대제사장의 뜰에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패속에서도 말씀이 성취된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방향은 분명해졌지만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로 결단할때에도 밤이 새도록 잡은 것이 없었지만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렸을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던 것도 말씀의 경험입니다.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오실때에도 말씀을 믿고 물 위를 걸었지만 바람을 보고 두려워 물속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경험을 토대로 유언처럼 남긴 편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1장 13절 14절을 보시면, ” 1:13 내가 이 육신의 천막에 살고 있는 동안만큼은,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워 늘 새롭게 해주는 것이 나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1:14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보여 주신 대로, 내가 이 육신의 천막을 벗고 세상을 떠나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무엇을 가장 강조하고 싶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희망의 신학’을 전개한 독일의 개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은 말합니다. “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세워진 역사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생생히 회상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활기차게 희망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회상하게 된다. 이 회상과 희망의 현재적인 능력을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라고 부른다.” 과거의 경험이 어떻게 미래의 확신이 될수 있습니까? 교회는 완성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기록된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 위에 다시 일어서는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이 익명의 목격자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며 시작합니다.(눅1:2)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고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 16절로 19절을 보시겠습니다. “16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지어 낸 근사한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위엄 있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17 장엄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가 그로 인해 무척 기쁘다.”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셨습니다. 18 우리는 그 음성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거룩한 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을 때 들은 그 음성은 분명히 하늘로부터 울려 온 것이었습니다. 19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예언자들이 전한 말씀을 보다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 말씀을 가까이 하고 따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그들이 전해 준 말씀은 어두움을 환히 밝혀 주는 빛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빛은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동이 트고, 아침 샛별이 환히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줄 것입니다.” 어둠은 아직 완성되지 않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입니다. 샛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의미합니다. 완성될 마지막 날입니다. 등불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말씀입니다. 즉 성도는 등불을 들고 세상을 밝히며 샛별이 환히 떠오를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의 권위를 믿고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2.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20-21)

성령께서는 말씀을 의지할때 실패속에서도 깨닫게 하십니다. 문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을 알아도 베드로처럼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신뢰한다면 이것은 실패가 아니라 영적 훈련입니다. 은혜는 받는데 용서할 힘은 사라지고 사랑은 배웠는데 사랑할 힘은 없습니다. 부르심의 사명 앞에서 거룩한 부담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섬김의 자리에서 나의 정성과 시간을 내어드리는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롬7:19) 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무너진다고 생각했는데, 십자가로 나아가지 않고 여전히 내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도, 주님을 위해 나의 시간을 내어 드리는 일도 내 힘이 아니라 영적인 공급을 다시 받아야 합니다.

이번주 수요일부터 우리는 사순절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사순절은 세상속에서 살아가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서 주님을 깊이 바라보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의 자리는 단순히 개인의 영성을 위한 기도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다시 붙들어 주는 시간입니다. 더 좋은 사람으로 살기 위한 결단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믿음의 성도가 되는 시간입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에서 우리의 약함을 발견합니다. 그 속에서 실패하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실패와 아픔의 자리도 신앙의 여정의 과정입니다.

각자의 기도의 자리에서 사순절 시기에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변화산에 머물자는 베드로의 제안을 거절하시고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십자가의 길로 가셔야 했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지만 또한 그 길은 부활로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상처와 고통, 비난과 오해를 온 몸으로 견뎌야 했던 자리를 지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셔야 했던 자리였습니다.

사순절 40일간의 시간은 우리가 사랑하고 믿는 예수께서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신 그 길을 동참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깊은 어둠의 시간속에서 우리의 내면 깊이 감춰둔 죄가 드러나고,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재발견하는 시간이 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힘은 언제나 무너지기 쉽고, 누군가 뾰족한 말로 건드리면 터지는 물풍선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경건은 우리의 연약함을 붙들어 줍니다. 경건의 훈련을 통해 나의 죄를 마주하고 연약함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경건은 우리의 마음이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으로 찬양과 감사의 자리에 살게 합니다.  

인생에 간증이 많은 사람을 보면,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손이 인도하심을 깨닫기 때문에 그 사람들 곁에 있으면 함께 있는 사람도 기쁨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땅속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경제적인 불안함이 있습니다. 믿음의 정체성의 혼란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낯선 땅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두려움 속에 있을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이 자리에 보내시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청년의 때에 뜨겁게 하나님을 만나고 공동체 안에서 쌓여가던 신앙이 결혼을 하고 현실과 부딪힙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함께여서 더 단단해질 것 같지만 같이 무너질 때도 많습니다. 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기도할 시간도 봉사할 여력도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직장을 다니며 내가 살아온 삶의 패턴을 내려놓고 경건함을 유지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관계 속에서의 반복되는 상처, 영혼의 갈증이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20 그러므로 분명히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떠한 예언의 말씀도 예언자가 마음대로 해석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며,  “사람의 뜻대로 말하고 싶은 것을 적어 놓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 놓았습니다.”(벧후1:20-21)

우리는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미 주어진 진리는 충분하고 완전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죄책감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다릅니다. 복음은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여 우리를 살리고 회복하게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남겨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완성될 뿐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함께 걸어가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이제 우리가 들고 있던 믿음의 거울의 방향을 나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나를 비추어야 합니다. 사순절의 40일은 완벽한 성도로 살아가자는 권면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십자가를 다시 만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교회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비추며 함께 걸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은 주님을 닮아가는 길입니다. 절대 넘어지지 않는 삶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길입니다. 옆에 앉아있는 지체들, 오랜 세월 함께 걸어준 신앙의 선배들, 우리의 걸음을 함께 따라오는 다음 세대들과 함께 걷게 하십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하나됨을 배우는 시간이 바로 함께 예배하는 자리입니다.

은혜는 우리 안에 어둠이 머물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십자가의 은혜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께서 날이 밝기도 전에 한적한 곳으로 홀로 나아가 기도하신 그 자리, 그 은혜가 지금 우리가 찾아가야 할 자리입니다.  아이를 키우며 진짜 부모의 마음을 알아갈 때 성령이 인내를 가르쳐줍니다. 우울하고 외로워 길을 잃고 헤매일 때 성령이 소망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의 길을 따라갈 때 우리의 어두웠던 밤을 비추는 등불을 만나게 됩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말씀의 등불을 켜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기쁨으로 믿음의 경주를 함께 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02 08 2026 주일설교

주현후 다섯번째 주일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마태복음 5:13~16

5:13 ○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쓸모없이 버려져, 사람들에게 다만 짓밟히게 될 뿐입니다. 5:14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산 위의 마을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마련입니다. 5:15 또 등잔에 불을 밝힌 후 됫박으로 그 등잔을 덮어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방안을 환하게 밝히려면, 등잔을 등잔대 위에 얹어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5:16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빛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환히 비추십시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시오.” (쉬운말 성경)

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what good is salt if it has lost its flavor? Can you make it salty again? It will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foot as worthless. 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like a city on a hilltop that cannot be hidden. 15 No one lights a lamp and then puts it under a basket. Instead, a lamp is placed on a stand, where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16 In the same way, let your good deeds shine out for all to see, so that everyone will praise your heavenly Father. (NLT)

오늘 본문은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잘 알고 많이 들어 왔습니다. 예수님은 ‘소금처럼 살라’는 차원의 말씀이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라고 존재적 선언을 하십니다. 소금은 다이몬드처럼 화려하지 않는 작은 결정체지만 음식에 스며들면서 맛을 내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소금의 짠맛은 변하지 않습니다. 물과 기름이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서로 섞일 수 없듯이, 음식의 부패를 막는 소금은 세상 속에서 변질되지 않는 변함없는 가치를 상징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존재적 선언은 우리의 삶이 빛나거나 눈에 띄지 않아도 때로는 삶에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와도 성도의 거룩함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는 흉내내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맛을 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는 묵직한 책임으로 들려와야 합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것은 근본적인 형태의 달라짐을 의미합니다. 이 정도면 됐지가 아니라 땅의 속한 삶이 아니라 낡은 세계를 깨뜨리고 새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헬라어 μετανοέω (메타노에오)는 ‘다시’를 뜻하는 μετά (메타)와 ‘생각하다’를 뜻하는 νοέω (노에오)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핵심은 마음과 삶을 바꾸는 근본적인 변화에 있습니다.” 매주 드리는 예배는 단지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새롭게 깨닫는 시간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은 산 위에서 하신 설교입니다.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신 이유를 보여줍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라본 대상이 제자들과 군중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 전역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고, 질병과 통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이후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신 것에 매료되어 쫓아왔습니다. 복음 전파의 사역 안에는 영혼구원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아우르는 전인적 사역들임을 볼수 있습니다. 무리들은 제자들과 함께 팔복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를 직접 치유하는 곳은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를 직접 치유하는 곳은 아닙니다. 대신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치유의 정신을 따라, 물질적 어려움으로 치료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선교적 일들을 후원하고, 선교적 소명을 지닌 사람들이 되도록 말씀으로 가르치고 길러내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는 기적을 구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로운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전하시며, 너희가 나를 따른다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다면 하늘의 상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팔복을 선언하신 후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김상철 감독의 잊혀진 가방이란 영화에는 여러 선교사들의 잊혀진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는데, 한 사람씩 조명하는 다큐형식의 영화입니다. 첫번째 인물인 헬렌 로즈비어 선교사는 26세에 의대를 졸업하고 1945년 웩 선교회를 통하여 콩고로 배정되어 갔습니다. 선교활동을 하는 동안 콩고에 내전이 발생했고, 그럼에도 그 땅에 머물러 선교사역을 했는데, 오히려 그 선택은 고통스런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헬렌은 포로로 잡혀간 친구들을 잃었고, 자신 또한 반군들에게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는 깊은 상처를 겪어야 했습니다. 감사할 수 없었던 절망의 순간에 헬렌은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떠나신 것 같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헬렌 난 너를 믿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잃어버린 사명이 다시 회복이 되더랍니다. 죽음의 공포속에서 하나님께서 ‘헬렌 너 내게 감사할수 있겠니?’ 라는 음성이 들려 왔답니다. 헬렌은 석방되어 영국으로 귀국했지만 또 다시 1966년 콩고로 돌아갔고, 이후 콩고 의료선교에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도 영광과 은혜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면 인간은 상처의 틀로 세상과 내 삶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 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매일 말씀과 기도로 점검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회복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마음 안에는 선과 악이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안에 계시기에 내가 주인되려는 삶속에 끊임없는 갈등을 하는 것입니다. 그 충돌 속에서도 자신을 내어드리는 삶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소금처럼 자신을 내어주고 녹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시대 당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방법은 당시 로마황제를 섬기는 힘의 권력이 아니라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생명의 빛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변하지 않는 언약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소금처럼 녹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설교를 산 위에서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음을 전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천국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갈릴리를 두루다니시며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쫓아와 모인 무리들에게 진정한 복에 대해서 가르친 것입니다.

모든 문화와 세상의 모든 가치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과 무리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구원 계획을 드러내시며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구원 계획에 대해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증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먼저 회개한 우리는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둔 세상을 비추기 위해 교회를 세상 한 가운데 세워 주셨습니다. 이 빛은 성도들의 마음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사라질 수 없는 빛입니다. 성령의 탄식은 우리를 애통하게 하시며,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마음을 지니고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하게 합니다. 성도는 매일 기도와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서게 됩니다. 소금은 본질적으로 변할 수 없는 내면의 변화라고 한다면 빛은 좀더 도전적입니다. 빛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산 위의 마을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마을이라는 단어 헬라어 ‘폴리스,πόλις’는 도시를 뜻합니다. 작은 동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속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기존의 문명과 가치를 허물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의 도시를 재건하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의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사명감으로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성벽이 재건되자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도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산 위에 세워진 구별된 도시를 보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속하지 않았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케임브리지 한인교회는 수많은 대학가들이 즐비해 있는 도시 한복판에 세워져 있습니다. 다양한 학문을 배우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오고, 배움을 마친 후에는 자신의 영역에 진출하기 위해서 꿈을 꾸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배움의 과정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도전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 위에 선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진리의 빛으로 살아가기

오늘날 시대정신은 진리의 빛을 철저히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의 힘과 편안함, 경제적 풍요를 최고 가치로 삼고 살아갑니다. 삶의 안정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절대적 진리 조차 상대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말씀의 씨앗을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씨앗은 비록 작지만 그 나라는 자라나서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산 위에 도시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에서 진리를 따르는 힘을 기르고 세상으로 나아가 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문화 속에서, 훼손되는 생명 윤리, 물질만능주의적 경제관, 왜곡된 성윤리와 세속화된 결혼 가치관에 맞서, 우리는 절대적 진리의 기준으로 분별하며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는 삶을 게을리 하면, 우리는 세상에 동화되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셨는데 세상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 주님을 생각하면 일평생 십자가에 붙들려 살게 됩니다. 신자는 어둠에 익숙해 질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땅 가운데 완성 될 그날까지 믿음 위에 굳게 서시길 축복합니다. 약속하신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용기를 지니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비추는 거룩한 삶

세상이 점점 어그러질수록 도덕과 윤리의 기준은 쉽게 무너지고 낮아집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사람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도 우리 안에 죄를 깨닫게 하시고, 양심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며 가르치십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착한 행실을 통해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교회는 윤리, 도덕 자체를 목적 삼지 않습니다. 더 근원적인 것을 말씀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값비싼 윤리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붙들려 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 앞에 비추라’는 구절은 사람을 의식하고 마주보며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보다 더 앞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걷는 것을 의미입니다. 그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바라보며 걷는 그 빛을 바라보게 될 것이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증인들이 앞서서 그 빛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혼란과 분열속에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두신 것은 부패를 막고 생명을 지키는 사명을 안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는다면,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와 기준이라는 틀에 자신의 걸음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동화되어지고, 신앙의 변질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 주님을 바라보며 용기내어 걸어갈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발자국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길을 비추는 빛이며(시편 119:105) 성도는 그 빛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자신을 내려 놓고 주님 앞에 겸손히 순종할 때 드러나게 됩니다(고린도후서 2:15) 어떤 상황속에서도 앞서 가신 주님 따라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

02 01 2026 주일설교

예배로 살아가게 하는 힘 (POWER) 시리즈

5주 합당한 예배

Week 5: Reasonable Worship

로마서 12:1-2

12:1 And so, dear brothers and sisters,[a] I plead with you to give your bodies to God because of all he has done for you. Let them be a living and holy sacrifice—the kind he will find acceptable. This is truly the way to worship him.[b] 12:2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우리는 임직예배를 드립니다. 임직은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의 목적을 다시금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올해 세워진 22명의 신천 집사님들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응답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직분을 받는 것은 기쁘고 감사한 일이지만 동시에 거룩한 부르심이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 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12:1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받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영적 예배입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옛 자아와 본성을 거스르는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나 중심적인 생각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 보다 세상의 문화에 더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게 합니다. 그러나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이전의 나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 내 삶 전체, 즉 몸을 올려드리겠다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육신으로 행하는 모든 선택과 행동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드릴때 제물이 살아 있으면 제물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죽여서 바치는 것이 제물입니다. 그 제물이 죽임을 당하며 태워질 때에 향이 되어 하나님께 올라갔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에 있어서 중요한 재료인 향이 천국의 예배에서는 성도의 기도로 변한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가 보좌 옆 금향로에 담기는 것입니다. 직분을 받고 섬기는 삶은 이제 내 삶이 누군가에게 보여지는가, 보이지 않는가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 올려지는 새로운 삶입니다. 순종하며 살겠다는 결단은 잘못된 마음의 동기를 날마다 점검하고 회개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8 그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아들자,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일제히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렸는데, 그들 모두는 각자 거문고와 향이 가득 담긴 금향로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요한계시록 8: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8: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지난 주일 살펴 본 것처럼, 사도요한이 본 천국의 예배는 24 장로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쓰고 있던 면류관을 모두 벗고 보좌 가까이에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자기 영광과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는 하늘의 예배입니다. 계시록 5장에서도 사도요한은 또 하나의 천국예배를 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던 봉인된 책을 받아 들자, 24 장로들이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그들 모두는 각자 거문고와 향이 가득 담긴 금향로를 들고 있었는데, 이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자기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죽임 당하셨으나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데이비드 브라이머(David Brymer)가 작곡한 ‘주는 존귀하신 분’의  찬양을 보면, 그는 “주는 존귀하신 분, 만물 주께 나와 주께 돌아가니 영광 받으소서 주야로 기도의 향 올라가네 나는 주를 높이라” 고백하며 구약의 제사와 성도들의 삶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마음과 삶이 누구를 향해 있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를 새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깨웁니다. 율법이 죄를 보게 하듯이 주님의 은혜가 이전의 옛 습관과 옛 자아를 마주할 때마다 거룩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것은 회개가 있기 때문이고, 은혜가 우리를 삶의 변화로 인도하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는 비록 작은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응원하시기에 큰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이 잘된다고 해서 내 믿음이 좋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매순간 허락하실 믿음을 구하며, 또한 허락하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바울은 주안에서 형제 된 우리에게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세개의 문장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 선택 받는 형제들인 성도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본질적인 변화를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며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영적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합당한 영적 예배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고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내 삶 전체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예배(Worship)라는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배는 가치(Worth)와 신분을 나타내는 접미어(Ship)가 결합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란, 하나님의 신분과 위엄에 합당한 가치를 올려 드리는 행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를 영적 예배”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가 바로 라트레이안(λατρείαν)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의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섬김, 봉사, 종이 주인을 위해 드리는 헌신적인 섬김을 의미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Servic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영적 예배가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당시 사도들의 복음 전파 사역을 통해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복음 전파 사역 외에 구제와 섬김의 사역을 전담할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 사역에 집중하기 위해서 구제 사역을 전담할 일곱 집사들을 세웠는데, 이것이 집사 직분의 시작입니다. 집사라는 단어 Deacon는 헬라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에서 유래한 말로 “남들을 섬기는 사람”을 뜻합니다. 사도들의 집사 선택 기준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는 섬김의 사역이 단순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이 필요한 사역임을 보여 줍니다.

섬김의 시작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전적 통치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자리에서 섬김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계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더 깊어 질수록 자비를 실행하고 싶은 욕구도 점점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 신앙의 뿌리에는 용서받는 죄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새삶을 부여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섬김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 서지 않는 섬김은 내 열심과 내 만족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직분을 받았지만 삶은 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을 때가 있고, 매주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만 예배의 감격은 사라지고 여전히 마음속 불평이 사라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멈추면 안됩니다. 우리는 예배의 관객이 아니라 삶의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 앞에 반응하고 말씀으로 살아내며 우리 앞에 놓인 하나님의 일들을 기쁨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뿐 아니라 예배 후에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이 작은 교회가 되길 원하며 기도하지만 현실은 더디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바꾸려하기 보다 먼저 기도하는 한 사람으로 말씀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그 삶을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삶 전체로 영광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내 상황과 내 방식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물질의 성공이라면, 섬김의 목적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것이 우리가 한주 동안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속한 일터의 현장에서도 제사장으로 부르심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사랑이 내 안의 사랑 안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집에 앉아 있을 때든지, 길을 갈 때이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부지런히 말씀이 삶이 되도록 가르치고 살아내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책임입니다.

예수께서 먼저 보이신 섬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의 삶의 목적이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며 실수의 가능성을 줄이는 길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하고 온전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옳게 분별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을 때, 우리는 어느새 냉소적으로 변하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내 마음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감당하는 일마저 하나님을 위한 섬김이 아니라 내 의로움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된다면, 공동체 안에서 주시는 참된 유익을 온전히 누리기 어렵습니다. 교회만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목적때문입니다. 이 목적이 흐려질 때, 교회는 힘을 잃습니다. 교회는 주께서 걸어가신 길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섬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됩니다.

우리의 삶은 섬김을 통해 영적 능력과 권세를 갖추는 것입니다.

섬김을 단지 도와주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더 온전하게 섬기기 위해 영적으로 성장하며 준비하고 훈련해야 합니다.산제물이 되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속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심을 증명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옳게 분별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섬김의 마음을 더해 주십니다. 바울은 이것을 믿음의 열매로 보았습니다. 예배의 본질과 정신이 하나님께 엎드리고 순종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분별하라는 권면은 우리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선택속에서도 계속 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이 끝나자 주의 천사들이 와서 예수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시험을 마친 예수를 주의 천사들이 섬긴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현재 세상은 마귀가 공중권세를 잡고 왕노릇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시간 안에서만 활동할 뿐입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완전하신 승리는 성도들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방법과 세상의 힘으로의 승리가 아니라 주를 믿기에 세상의 방법과 무기를 내려놓고 빈손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현실을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삶을 증명해 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높여 주셨듯 주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부르셨습니다. 믿음의 길에서 드린 헌신의 발걸음, 기도의 무릎, 예배의 자리, 사랑의 흔적이 쌓일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내 옆의 지체와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존귀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살아가기 위해서는 믿음의 능력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처음 직분을 받았을 때의 그 떨림과 결단이 세월과 현실속에 묻히고 무뎌지지 않도록 살아있는 예배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결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하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누리고 흘려 보내는 인생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기쁨은 멈추지 않고 흘러갑니다. 그 기쁨을 가진 사람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행복한 간증이 차고 넘치고 지치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의 손길을 내밀어 생명력 있는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오늘 로마서 12장 1-2절의 말씀은 새로운 직분을 받는 이들에게도 이미 직분을 받고 감당해온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허락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붙들어 주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 은혜를 다시 잡고 예배자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나를 위해 아무런 소망도 없는 나를 위해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하시네 이 낮은 날 위해 이제 나는 옛 사람 아니요 사망에서 건지신 주의 자녀이니 그 한없는 주의 사랑 안에 기쁨으로 걸어가겠네 (찬양 사랑한다 말하시네)

01 25 2026 주일설교

예배로 살아가게 하는 힘 (POWER) 시리즈

4주: ‘올려드림’ 보좌의 예배

Week 4: “Exaltation” — Worship at the Throne

요한계시록 4:1-2, 10-11

1Then as I looked, I saw a door standing open in heaven, and the same voice I had heard before spoke to me like a trumpet blast. The voice said, “Come up here, and I will show you what must happen after this.” 2 And instantly I was in the Spirit,[a] and I saw a throne in heaven and someone sitting on it. 

10 the twenty-four elders fall down and worship the one sitting on the throne (the one who lives forever and ever). And they lay their crowns before the throne and say, 11 “You are worthy, O Lord our God, to receive glory and honor and power. For you created all things, and they exist because you created what you pleased.”(New Living Translation)

요한계시록은 1세기 소아시아 교회, 로마 황제의 폭정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했던 성도들을 향해 기록되었습니다. 이 책은 인생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최후 승리를 보여줍니다. 당시 성도들은 세상의 권력 앞에서 생명을 걸고 믿음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도 요한은 성령에 사로잡혀 하늘로 인도되었고 하늘의 예배를 관찰하고 본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4:1 그 후에 내가 보니, 내 앞에 하늘로 통하는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전에 내가 들었던 그 음성, 곧 나팔 소리처럼 우렁찬 그 음성이 내게 말했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너라. 내가 네게 장차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을 보여 주겠다.” 4:2 그러자 나는 순식간에 성령에 사로잡혀 하늘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내 앞에는 하늘나라의 보좌가 있었고, 그 보좌에 어떤 분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사도요한이 본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보좌는 통치를 상징합니다. 요한은 세상을 실제로 통치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세상의 눈에 보이는 권력은 로마 황제였지만, 참된 통치자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믿음을 지닌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방향과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무게속에서 순종할 힘이 약해 질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힘을 얻기 위해 예배의 자리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배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의 고단함과 눈물까지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지만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보좌를 바라볼때 우리는 말씀에 순종할 힘을 얻게 됩니다.

예배는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보좌로 옮기는 것입니다.

성도가 드리는 예배는 단 한번의 은혜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를 의지하는 성도는 매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지속적인 은혜 가운데 살아갑니다. 우리의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발 아래,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새로운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합니다. 인정받는 나, 잘 살고 있는 나, 이 정도면 신앙도, 내 인생도 괜찮아 보이는 나를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진솔한 나를 드러내기 보다는 괜찮아 보이는 나로 포장하며 서 있으려 합니다. 기도를 드릴때에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힘을 구하기 보다 하나님께서 내 말을 듣기를 원합니다. 성경에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문자 그대로 목이 뻣뻣해서 하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개가 움직이지 않으니 늘 자신만 바라보며 자신의 힘만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그 자체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살아갈 힘을 주실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청년부 수련회에서 다윗처럼 기뻐 뛰며 찬양하는 청년들의 모습이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우리는 눈물로 기도하며 마음 속에 숨겨두었던 나를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내려놓았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십자가에서 우리를 고아에서 자녀로, 거절에서 응답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꾸어 주신 은혜를 확인하며 하나님께서 초대하시고 열어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나게 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은혜의 자리를 사순절 새벽기도로 이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기도의 자리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2월 18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어 토요일에는 현장 새벽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이제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걸음으로 살아 갈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새벽기도의 자리가 반복되는 습관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삶을 내어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제직들, 교회의 모든 리더들이 먼저 이 길을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맡겨진 이들을 위해 먼저 기도로 엎드릴 때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리더의 사명을 감당할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A.W.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는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Rut, Rot, or Revival)』라는 책에서 오늘날 신앙의 상태를 ‘잠들어 있다’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많이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생각을 알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을 많이 읽어도, 경외심을 가지고 읽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문 제목 그래로 풀어보면, 신앙은 같은 길, 익숙한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문제없이 걸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바로 신앙의 덫이며 독과 같습니다. 토저는 종교가 부패해 가는 점진적 삼단계를 기계적 상태, 습관적 상태, 부패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우리 삶에는 잠들어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와 어려움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매달릴 수 있다면, 그것은 습관적 신앙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은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요한은 성령에 사로잡혀 하늘의 인도되었고 하나님의 보좌를 목격했습니다. 그 보좌에는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앉아 계셨고 그 앞에는 네 생물들과24장로들이 엎드려 자신들의 면류관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장차 오실 분이시여!” (계 4:8)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없이 살아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외국에서 살아가며 본향 땅을 그리워할 때마다, 하늘 소망을 바라보며 순례자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예배하는 복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집이지만 우리는 주 안에서 하늘 예배를 분명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때 독수리가 날개치는 것과 같이 올라갈 새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릴 때 살아납니다.

4:10 24장로들은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께 경배를 드리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벗어 그 보좌 앞에 내려놓으며 외치고 있었습니다. 4:11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주께서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진실로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온 세상 만물이 생겨났고,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4장로들은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제자들을 구약과 신약의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로 이해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쓰고 있던 면류관을 모두 벗고 보좌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자신들이 피조물임을 인식하고, 온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늘의 예배는 자기중심적 교만을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며 서로를 세우고 존중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예배의 능력은 하나님 외에는 붙들것이 없음을 고백할때에 나타납니다. 성도가 죽도록 충성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미 죽음에서 건짐 받은 인생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든 심판에서 면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진리를 믿기 때문에 성도의 삶의 결말은 죽임 당하신 어린양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영광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본훼퍼 목사는 ‘나를 따르라’라는 책에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이렇게 언급합니다. “가난한 자중에 가장 가난하고 시험당한자 중에 가장 시험당하며 굶주린 자 중에 가장 굶주린 자이다. 그들에게는 주님밖에 없다. 그렇다. 그분과 함께라서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분과 함께이기에 모든 것을 가진다.”아무것도 붙들 것이 없는 절망이라도, 주님이 계시면 모든 것을 가진자인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과 삶의 어려움 앞에서 스스로 이길 힘이 없어서 주님 밖에 없다고 고백한다면 절망이 아니라 은혜인 것입니다.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서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승리 안에 거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승리하신 자리로 우리도 그분과 나란히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다 이긴 후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 곁에 나란히 앉은 것같이, 그도 나와 함께 내 보좌 곁에 나란히 앉게 해 주겠다.” (계 3:21)

우리는 입으로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현실 앞에서는 나를 먼저 구하고 싶어 “주님, 제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아니라 이미 역사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현실의 무게가 하나님 뜻보다 커 보일 때도 있지만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흔들리는 현실 앞에서도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결핍과 두려움을 넘어 이미 승리하신 기쁨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죽음의 위협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로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는 오랜 도피 생활과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고, 이후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잘려 나간 것처럼 보이는 절망의 상태에서도,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보시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가지가 나서 결실 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이사야 11:1-2)

이새는 다윗왕의 아버지로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도 다윗은 지극히 작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마음 중심을 보시고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잘려진 것처럼 보이는 문제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전심으로 예배하는 순종을 통해 여전히 우리를 가운데 역사하고 계십니다. 사도 요한은 캄캄한 절망 속에서 하늘로 통하는 열린 문으로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생각의 관점이 죽임 당하신 어린양에게 촛점이 맞춰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예수님 자신께 대하는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네가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고 자랑하지만, 성도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 속에서도 자기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도록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를 위해 섬기는 성도를 통해 높임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삶은 마치 새로운 싹이 돋아나듯,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자라나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움켜쥐고 있던 나의 세상을 내려놓고,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께 맡길 때, 이미 승리하신 능력으로 매일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순종하심으로 하늘의 뜻을 이루셨고, 우리에게도 그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길은 매일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땅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자로서 하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구할수록,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삶은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내하며 견디는 가운데,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죄와 처절하게 싸워본 사람은,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감사하며, 약속을 믿고 끝까지 따르게 됩니다.

성경을 펼치면, 구절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달라지고,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갈증이 생깁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뿐 아니라, 일상의 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통치 안에서 삶의 쓴뿌리가 뽑히고 새로운 씨앗이 심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지켜보고 계시다는 믿음이 우리의 삶을 움직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완전하지 않아도, 우리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최후 승리를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까? 여전히 내 삶의 중심에 내가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찰스 스펄전이 말했듯, “하나님을 정말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생활의 침묵 속에서든, 폭풍 속에서든 그분을 예배하는 기쁨을 압니다.” 예배는 단지 교회에서 드리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순간, 숨 쉬는 모든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오늘 내 삶의 자리에서, 매 순간을 하나님께 드릴 때, 비로소 우리는 삶과 신앙이 하나로 이어지는 참된 예배의 길을 걷게 됩니다.

01 18 2026 주일설교

예배로 살아가게 하는 힘 (POWER) 시리즈

3주: ‘온전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나는 능력

Week 3: Wholeness — Power Revived Through Relationship with God

빌립보서 4:4-7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한 번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4:5 여러분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십시오. 주께서 가까이에 계십니다.
4:6 어떤 일이든,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을 당할지라도, 오직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뢰도록 하십시오.
4:7 그렇게 하면, 모든 인간적인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쉬운말 성경)

4 Always be full of joy in the Lord. I say it again—rejoice! 5 Let everyone see that you are considerate in all you do. Remember, the Lord is coming soon. 6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7 Then you will experience God’s peace, which exceeds anything we can understand. His peace will guard your hearts and minds as you live in Christ Jesus.( New Living Translation)

“존 캐버너(John Kavanaugh, 1941-2012)가 인도 콜카타 ‘죽어가는 자들의 집’에 3개월간 봉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봉사를 하며 마더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에게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테레사가 물었습니다. “뭐라고 기도해 드릴까요?” “예, 확실한 답을 얻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때 마더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확실한 답이야말로 우리가 붙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놓아야 합니다. 확실한 답이 내게는 있어 본 적이 없습니다. 늘 내게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뢰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하나님을 끝없이 신뢰하도록 기도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끝없이 신뢰하라’는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적용됩니다. 성과 중심의 사회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는 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확신의 목적과 방향입니다. 그 확신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 자신이 될 때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이 내가 원하는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주를 향한 우리의 믿음은 은혜 안에서 날마다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다 이룬 사람들이 아니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께로 계속 나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캐버너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그분 앞에 설때, 비로소 사랑이라는 선물을 거저 주시는 이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라고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깊어지고 온전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면,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영적 감각이 생겨나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내 안의 연약함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를 온전하게 회복시키시며 변화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삶을 살아갈 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셨고 그 뜻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도 나를 향한 계획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인생의 곤고함과 궁핍함 속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으로 부터 얻게 되는 열매이며 상황과 상관없이 누리게 되는 참된 기쁨입니다. 빌립보서 4장 2절을 보면, 바울의 동역자들 가운데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인이 언급됩니다. 이 두사람은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힘써서 수고했던 동역자들입니다. 그러나 사역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생각으로 갈등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생각 앞에서도 주님의 마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바울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항상이라는 단어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감정이나 환경적인 어려움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별설교를 하시면서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요 15:11)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별설교를 하시고 예수님은 곧 제자들을 육신으로는 떠나실 것입니다. 기쁨이 줄어 들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너희를 육신으로는 떠나도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고 충만하게 할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겪어야 할 것은 고난과 핍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라, 너희가 내 안에 믿음으로 거하고 있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말씀을 따른다면 주 안에서 기쁨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권면은 우리 안에 감정을 배제하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의 중심에서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어떤 자격과 조건이 아닙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신뢰하기에 조건없이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탁월한 심리학자가 아닙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의 마음 중심을 아시고 삶을 움직이는 연료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사고와 결정을 지배한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당시 빌립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로마 시민권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바울에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은 자랑이자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바울은 남을 먼저 생각하고 너그러움을 베풀라고 말합니다.

기쁨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세상의 것들을 많이 소유해서 누리는 기쁨이 아니라 내것을 나누고 너그러움을 베푸는 가운데 얻는 기쁨입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관계를 보면 신앙 공동체가 주는 힘을 볼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동참해 준 공동체였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여러분은 나의 기쁨” 이라고 편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여러분을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사랑의 격려를 받을 때, 불안과 두려운 상황에서도 기쁨과 위로를 경험합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함께 걸어가는 이들이 있을 때 그 기쁨과 격려는 단순한 개인적 위로를 넘어 공동체안으로 흘러 서로를 지탱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연약하여, 남의 결점은 쉽게 눈에 띄고 자신이 받은 상처는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마음에 가득 채워질 때, 넘치는 은혜가 죄로 물든 마음을 씻어내고, 무거운 율법의 짐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가벼워집니다. 이 사랑을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른이들을 사랑하며 너그러운 배려를 나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게 될것이다”(요:13:35)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지 못하기에 사랑할 힘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이미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될 때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도 다시 사랑할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사명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우리 교회가 잠시 들렀다 가는 듯 느껴지더라도 그 짧은 시간 안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말씀을 배우고 삶을 나누며 각자의 삶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비록 삶에서 잠시 머무는 시간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삶의 좋은 것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불평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반응하며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마음과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을 처음 만났던 때가 있습니다.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알 수 없는 현실 속에 서 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셨습니다. 내 안에 없었던 사랑이 들어왔고 은혜가 찾아왔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찾아온 선물입니다. 우리중에 누구도 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겸손히 사랑하며 너그러움을 베풀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이를 통해 우리의 삶 속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교회에게 너그러움을 베풀라고 한것은 주께서 이미 우리곁에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엥귀스(ἐγγύς)라는 단어는 시간에 대해서는 ‘임박한’이란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주께서 오심이 임박했으니 너그러움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로마서에서도 사용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고 올바르게 살아가십시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욱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롬 13:11)  이 구절은 방탕한 삶을 살던 성자 어거스틴이 회개하게 된 말씀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 말씀앞에서 스스로를 죄인이라 고백했습니다. 어거스틴이 변화된 데에는 어머니 모니카의 끊임없는 기도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깨닫지 못할 때에도, 모니카는 아들을 위해 오랜 세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어거스틴의 삶 가까이 계셨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깨달았을 때, 어거스틴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을 깨닫는 순간 방탕했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바울은 어떤 일이든, 무슨일을 당할지라도 오직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뢰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에게 이 편지를 쓰며 고민하며 신중하게 써 내려 갔을것입니다. 바울이 내 놓은 대책이 기도, 간구, 감사입니다.

기도는 기쁨의 첫 단계입니다. 기도는 삶의 걱정과 근심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만남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마음의 염려와 상함을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문제가 생겼을 때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면 내가 나약한 것은 아닌지 자책도 하게 되고, 현실 앞에 무너질 때면 불안이 찾아오기도 하고, 삶이 엉키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쌓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간구는 연약함 때문에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드리는 간절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연약함 그대로,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곁에 함께하고 계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세번째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바울은 사역의 현장에 많은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평탄했던 일 보다 위협하고 핍박받는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바울은 무슨 일이라도 그 속에서 감사를 찾았습니다. 바울에게는 문제와 고민거리 조차 감사로 고백하는 제목들이 되었습니다. 감사의 기도는 환경을 바라보는 해석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모든 상황속에서 감사하라고 적극적인 기도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인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

성도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어렵게 하는 생각들, 잠 못들게 하는 두려움과 불안이 마음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평강으로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여전히 우리의 문제로 인해 무거운 마음으로 서있다면 하나님께 모두 맡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때 인간적인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늘 함께 동행하여 주십니다. “너의 가는 길에 주의 평강 있으리 평강의 왕 함께 가시니/ 너의 걸음 걸음 주 인도하시리 주의 강한 손 널 이끄시리/ 주님 나라 위하여 길 떠나는 나의 형제여/ 주께서 가라시니 너는 가라 주의 이름으로/ 거칠은 광야 위에 꽃은 피어나고/ 세상은 네 안에서 주님의 영광 보리라 강하고 담대하라/ 세상 이기신 주 늘 함께 너와 동행하시며 네게 새 힘 늘 주시리”

이 찬양이 광야같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은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걸어가는 길이 외롭고 힘들어도 주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 나라 위하여 길 떠나는 나의 형제여” 라는 찬양의 가사 속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의 손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 모두를 향한 길입니다. 청년부 수련회는 주일 예배와 함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정해진 스케쥴 대로 단체 생활을 하다보면 조금 더 피곤할 수도 있고, 서로 불편해지는 순간들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은혜를 기대하며 왔지만 나에게 주시는 은혜가 부족하다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수련회는 삶의 자리를 떠나 특별한 장소에서 함께 기도하며 세상속에서 주를 향한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시간입니다. ‘주저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란 주제는 인생의 광야에서, 우리가 주저하는 영역에서 믿음의 용기를 지니고 걸어가 보라는 도전의 시간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잘하는 것을 드러내라고 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그릇이 커질수록 과시하게 만들지만 복음은 우리를 더 겸손해지게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잘못하면 실패했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을 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혹여라도 믿음의 길을 가는 걸음에서 누군가 상처받지는 않았는지, 주님 나라 위하여 길 떠나는 나의 형제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번 주님 앞에 마음을 내려놓고 기도하게 됩니다. 정해진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시간이 되고 주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삶의 자리를 살피시고 진정한 기쁨의 근원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수련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청년들도, 기도로 함께 할 모든 교우들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한주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진정한 기쁨의 토대는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있습니다. 복음의 생명력은 어떤 상황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할때 복음의 능력은 세상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교회는 나의 평안을 위해서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나아가도록 제자 삼은 공동체입니다. 기쁨으로 제자를 만드는 곳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나는 힘을 지니고 주저하지 말고 세상속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