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27 2026 주일 설교

성령강림절 제 18주

무엇이 우리를 낮아지게 합니까?

What Makes Us Humble?

빌립보서 2:1-13

1 Is there any encouragement from belonging to Christ? Any comfort from his love? Any fellowship together in the Spirit? Are your hearts tender and compassionate 2 Then make me truly happy by agreeing wholeheartedly with each other, loving one another, and working together with one mind and purpose. 3 Don’t be selfish; don’t try to impress others. Be humble, thinking of others as better than yourselves. 4 Don’t look out only for your own interests, but take an interest in others, too. 5 You must have the same attitude that Christ Jesus had. 6 Though he was God, he did not think of equality with God as something to cling to. 7 Instead, he gave up his divine privileges; he took the humble position of a slave and was born as a human being. When he appeared in human form, 8 he humbled himself in obedience to God and died a criminal’s death on a cross. 9 Therefore, God elevated him to the place of highest honor and gave him the name above all other names, 10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ow,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11 and every tongue declare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12 Dear friends, you always followed my instructions when I was with you. And now that I am away, it is even more important. Work hard to show the results of your salvation, obeying God with deep reverence and fear. 13 For God is working in you, giving you the desire and the power to do what pleases him. [Php 2:1-13, NLT]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 이라는 고백을 늘 품고 살았습니다. 내 생각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고, 내 감정보다 말씀에 순종하며, 내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 드러나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고백이 점점 막연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나를 죽이려고 애쓰는 것만으로 정말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참 많은 것을 합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예배하고, 헌신하고, 봉사합니다. 이런 믿음의 훈련과 형식은 참 중요합니다. 형식은 믿음의 본질을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식이 있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까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솔직하게 들어가 보면 예배의 자리에서는 은혜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지만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가장 가까운 사람 앞에서, 일상의 자리에서 내가 주님을 드러내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이기적인 마음이나 교만한 마음으로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쉬운성경이 “교만한 마음”으로 옮긴 이 말을 개역개정은 “허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로 케노독시아(κενοδοξία)인데, ‘텅 빈 영광’을 뜻합니다. 채우고 또 채워도 남는 것이 없는 영광입니다. 이 텅 빈 영광은 세상의 자리에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장 경건해 보이는 자리에서도 드러납니다. “나는 하나님만 바라보면 된다”는 말은 신실하게 들리지만, 그 말이 또 다른 모습의 고집스런 마음이 됩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기도를 오래 할수록 마음이 단단해져서, 믿음의 잣대로 사람을 쉽게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기도의 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 기도는 자기를 높이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7권에서 회심 이전의 자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교만으로 부어올라 당신에게서 멀어졌고, 너무 부풀어 오른 얼굴이 제 눈을 덮어 버렸습니다.” 내가 삶의 중심에 서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야가 가려집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가려진 자리에는 내가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던 기도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도로 바뀌고 내 말이 맞다는 것을, 내 방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분주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 안의 욕심과 교만이 오히려 나를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교만이 성공할 때만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깊어지는데, 정작 다른 사람을 대하는 내 마음은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연수가 쌓일수록, 우리는 더 자주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의 의지만으로 내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까? 교만한 마음이 스스로 교만을 이길 수 있습니까? 미움이 가득한 마음이 미움을 이길 수 있습니까? 교만한 마음이 스스로 교만을 이길 수 없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낮아질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우리의 결심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것에서 시작합니다. 쉬운성경은 1절을 이렇게 옮겼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로받고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서로 교제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권면(παράκλησις)이 있고, 사랑의 위로가 있고, 성령의 교제(κοινωνία)가 있고, 긍휼과 자비가 있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내 마음이 메마른 날에도 그 은혜는 실재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이미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2그렇다면 서로 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한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  3무슨 일을 할 때, 이기적이거나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존중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순종하기 시작하면, 말씀을 아는 것과 말씀대로 사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설수록 오히려 내 안에 있는 교만과 자기중심성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게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타페이노프로쉬네(ταπεινοφροσύνη)입니다. ‘낮다’는 뜻의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 와 ‘마음과 생각’을 가리키는 프렌(φρήν)의 합성어입니다. 기독교의 겸손은 내 삶의 중심을 예수님께 내어 드리고,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존중하라고 말합니다.

이 낮아짐은 바울 시대 헬라-로마 사회에서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비천함, 노예의 품성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명예와 지위,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낮아짐을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시면서도, 그 높으심을 자기를 위해 움켜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종의 모습을 입으시고, 스스로 낮은 자가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가 져야 할 죄를 대신 지신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과한 성도는 허영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바울은 4절에서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교만으로 부풀어 오른 눈을 내려놓고, 그 사람이 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필요를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하다가 갈등을 겪었던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가장 가까운 사이, 관계, 공동체 안에서 시험받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흉내내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은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시고 십자가까지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공동체의 하나됨을 가로막는 내 안의 자기중심성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빛 아래에서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삶은 나 자신을 더 몰아 붙이는 삶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으며 오늘의 한 걸음을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 길에서 억울함을 만나고 곤고한 날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막 10:45) 우리의 섬김이 지칠 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섬김의 시작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 섬김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것은 인정받기 위해서도, 내 믿음의 크기를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이제 그 사랑의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12절 보시겠습니다. 12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항상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 여러분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곁에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늘 힘쓰기 바랍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던 성도들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 내는 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구원을 얻기 위해 애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구원이 우리의 생각과 관계와 선택 속에서 실제로 드러나도록 두려움과 떨림으로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두려움과 떨림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경외의 태도입니다. 또한 빌립보 교우들은 바울이 곁에 있을 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곁에 없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사람이 보고 있을 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자녀를 양육할 때, 부모로서의 내 권위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지 않았습니까? 배우자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아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릴 때, 그 안에 내 자존심을 지키려는 마음은 없었습니까? 밖에서는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려고 애쓰면서도, 정작 가까운 사람 앞에서는 내 뜻을 내려놓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옳고 그름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의 길을 따라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을 신뢰하며 순종의 걸음 지속하시기 바랍니다. 순종의 길은 나를 증명하는 길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며 걷는 길입니다. 주님 가신 길을 따라 걷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구절이 눈에 들어 옵니다. 1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원하게 하시고 행할 힘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힘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그 힘을 의지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이 낮아짐의 길은 어떻게 끝났습니까? 9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10하늘과 땅 위, 땅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심을 선포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이 옳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세상이 가장 수치스럽다고 여긴 종의 길, 십자가의 길을 하나님께서 높이셨습니다.

주가 지신 십자가는 가장 수치스런 죽음을 생명의 자리로 바꾸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낮아지게 합니까? 굳은 결심도, 더 오래 참는 인내도 아닙니다. 우리를 낮아지게 하는 것은, 나를 위해 십자가의 자리까지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의 낮아지심 앞에서 우리는 주님을 더욱 신뢰할 힘을 얻게 됩니다. 지금도 주를 신뢰하는 자들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행함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고백한 이 말씀이 오늘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09 20 2026 주일 설교

성령강림절 제 17주

내 마음의 애굽

Egypt in my heart

출애굽기 16: 2-3,11-15

2그 때에 모든 이스라엘 무리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3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죽이시는 것이 차라리 더 좋을 뻔했소. 이집트에서는 고기 삶는 솥도 곁에 있었고, 빵도 배부르게 먹었소. 그런데 당신들은 우리를 이 광야로 이끌어 내서 우리를 굶어 죽게 하고 있소.” … …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2 “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전하여라. ‘저녁이 되면, 너희는 고기를 먹게 되리라. 그리고 매일 아침 너희는 배부를 만큼 빵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3그 날 저녁에 메추라기가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천막들을 덮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이번에는 이슬이 천막 주위를 덮었습니다. 14이슬이 걷히자, 서리와 같은 얇은 조각이 땅 위에 있었습니다. 15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므로, 서로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오. (쉬운성경)

2 There, too, the whole community of Israel complained about Moses and Aaron.3 “If only the LORD had killed us back in Egypt,” they moaned. “There we sat around pots filled with meat and ate all the bread we wanted. But now you have brought us into this wilderness to starve us all to death.”…11 Then the LORD said to Moses,12 “I have heard the Israelites’ complaints. Now tell them, ‘In the evening you will have meat to eat, and in the morning you will have all the bread you want. Then you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your God.'”13 That evening vast numbers of quail flew in and covered the camp. And the next morning the area around the camp was wet with dew.14 When the dew evaporated, a flaky substance as fine as frost blanketed the ground.15 The Israelites were puzzled when they saw it. “What is it?” they asked each other. They had no idea what it was.And Moses told them, “It is the food the LORD has given you to eat. [Exodus 16:2-3,11-15, NLT]

사이언스 타임즈에 수록된 글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기억을 저장한 그대로 보관하지 않고 현재의 상황과 감정 속에서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질 때, 과거의 어려움은 희미해지고 오히려 “그때가 그래도 좋았지”라고 기억하기도 합니다. 본문속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합니다. 출애굽기 16장 1절은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한 날짜를 적어 둡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둘째 달 십오일.”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사건이 아직 먼 과거가 아니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도, 어린양의 피로 죽음을 면한 유월절도, 홍해를 건넌 사건도 아직 생생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한 달이 지나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사건보다 지금의 배고픔을 더 크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길 앞에 있으니 두렵고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한 달이 지나자 백성은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 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죽이시는 것이 차라리 더 좋을 뻔했소. 이집트에서는 고기 삶는 솥도 곁에 있었고, 빵도 배부르게 먹었소.”

첫째, 광야는 우리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사실 애굽이 어떤 곳이었습니까? 강제 노동과 채찍질, 갓 태어난 남자아이를 나일강에 던지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로 살던 그때를 “고기 삶는 솥 곁”으로 기억합니다. 현재의 고통이 과거의 고통을 희미하게 만든 기억의 재구성입니다. 인간은 단 몇 분 만에도 삶의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원망을 쏟아낼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광야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배고픔과 두려움이 찾아오면 내가 실제로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문제는 배고픔 자체가 아닙니다. 배고픔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잊어버리고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 그것이 원망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놀라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8 모세가 또 말했습니다. “매일 저녁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고기를 양식으로 주실 것이오. 그리고 매일 아침 여러분이 배부를 만큼 빵을 주실 것이오. 여호와께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를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이오. 우리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아론과 나를 원망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원망한 것이오.” 원망의 궁극적인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원망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룬(לוּן, lun)입니다. 이 단어는 반복적으로 불평하거나 불만을 제기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그 원망의 방향입니다. 백성은 겉으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말했지만, 모세는 그들의 원망이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원망을 들으셨으니, 여호와를 만나러 나아오시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예배하게 하라.” 열 가지 재앙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사건만이 아니라, 누가 참된 하나님이시며 누가 자기 백성의 주인이신지를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예배와 찬양은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함께 나올 수 없듯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에서 형제를 저주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을 어디로 가져가느냐입니다. 사람에게 쏟아내는 원망은 바람처럼 번져 서로를 병들게 하지만, 하나님께 가져간 탄식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연결합니다. 주안에서 탄식이 깊은 기도가 되고, 우리의 마음을 회복하는 진심의 예배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신뢰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믿음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만나를 주시며 가르치십니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내려진 만나는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광야에서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비를 내리듯 양식을 내려 줄 터이니, 백성들이 날마다 나가서 그 날에 필요한 양식을 거두도록 하여라. 내가 이 일로 백성들이 내가 가르친 대로 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시험하여 볼 것이다. 5매주 육 일째 되는 날에는 다른 날에 거두는 양보다 두 배 더 많게 거두어라. 다음 날 거둘 분량을 저장해 두어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믿음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 주시며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내일 것을 미리 쌓아두지 말라는 것, 오늘 필요한 만큼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침까지 남겨두어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광야에서의 시간은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하루하루 몸으로 확인시키시는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지금 내 상황의 문제나 부족함 때문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내 힘으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편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주인이 아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도, 내 삶의 주인도, 교회의 주인도 내가 아닙니다.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만, 자녀의 삶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맡겨진 자리에서 사랑으로 돌보지만 그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교회 옆에 넓은 주차장을 소유하고 있는 분이 있었습니다. 주일에는 주차장을 사용하지 않으니 교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무료로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1년 52주 가운데 딱 한 주일은 주차장을 사용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교인들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왜 1년에 한 주는 빌려주지 않으십니까?”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야 누가 주인인지 알지요.”

15절을 보십시오. 15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므로, 서로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오.”

우리도 같은 질문 앞에 섭니다. “하나님 왜 이 길을 가야 합니까? 언제까지 저를 이렇게 내버려 두실 것입니까?” 만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공급을 눈앞에서 경험하게 하는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그날 필요한 양식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생활의 긴장 속에서 말씀을 신뢰하며 인생의 길을 걷습니다. 하나님은 내일의 곳간을 미리 열어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대신 오늘의 만나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모세와 아론은 백성에게 말합니다. “저녁이 되면, 여러분은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그날 밤 그들을 먹이신 하나님은 그들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만나를 먹은 사람들도 결국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이 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떡은 이것이니, 사람이 이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만나는 이스라엘의 육체를 하루하루 살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 가운데 죽어 있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더 잘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죄인이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정받기 위해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 삶에 지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주님의 눈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아래 설 때, 주님은 각자의 마음에 주시는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대개, 우리가 이미 알면서도 애써 외면해 온 자리를 다시 짚으십니다.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처음부터 그들의 계산과 이해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광야에서도, 우리 마음의 애굽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지나고 돌아보면 내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사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시작하자 만나가 그쳤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부족할 때에도 풍족할 때에도 누가 나의 주인이며 공급자인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이 더 안전하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인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님께 맡기기보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의 애굽일 수 있습니다. 황무지에도 꽃을 피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광야에도 믿음의 꽃을 피우십니다. 내일을 다 알지 못해도,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지 않아도, 힘겹고 외로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내 마음의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도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