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6 2026 주일설교

부활절 제 4주

목자의 품으로

Home in the Shepherd’s Arms

베드로전서 2:19~25

19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지라도 공의로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딘다면,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20 그러나 악한 일을 저지른 탓에 그 죄로 매를 맞고 참는다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다만 옳은 일을 행하다가 핍박을 받고 참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21 ○ 바로 이런 일을 위해,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몸소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여러분들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22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죄를 지으신 적이 없고, 한 번도 그 입에 거짓말이라곤 담으신 적도 없는 분이십니다. 23 사람들은 그분에게 온갖 모욕을 가했지만, 그분은 아무런 앙갚음도 하지 않으셨고, 사람들은 그분을 학대하고 핍박했지만, 그분은 아무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분께서는 모든 일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전부 맡기셨습니다. 24 또 그분께서는 몸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분께서 매를 맞고 상함으로써 여러분이 낫게 되었습니다. 25 전에는 여러분이 길 잃은 양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쉬운말 성경)

19 For God is pleased when, conscious of his will, you patiently endure unjust treatment. 20 Of course, you get no credit for being patient if you are beaten for doing wrong. But if you suffer for doing good and endure it patiently, God is pleased with you. 21 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22 He never sinned, nor ever deceived anyone. 23 He did not retaliate when he was insulted, nor threaten revenge when he suffered. He left his case in the hands of God, who always judges fairly. 24 He personally carried our sins in his body on the cross so that we can be dead to sin and live for what is right. By his wounds you are healed. 25 Once you were like sheep who wandered away. But now you have turned to your Shepherd, the Guardian of your souls.(New Living Translation)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는 억울함과 쉽게 풀리지 않는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부당한 일로 인해 겪었다면 그 상처는 더 깊게 남겨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2장은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지라도 공의로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감정의 자리가 아닌 부르심의 자리로 이끌고 갑니다. 성경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본훼퍼는 옥중서신 ‘저항과 복종’에서 “영혼을 걸고 고난을 받는 것에 비하면, 육신의 생명을 걸고 고난을 받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영혼의 건짐을 받는 성도라면, 우리는 고난에 집중하기 보다 고난을 실제적으로 체득함으로 타인의 고통에 더 집중해야 할 것이며, 까다로운 사람이 되기 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고난을 통과함으로 마음의 크기를 더 넓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자리는 감정의 자리가 아닌 부르심의 자리가 됩니다.

1. 억울함은 우리를 목자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먼저 본문의 앞 절 18절을 보겠습니다. 18 ○ 종들이여, 모든 일에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선량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 뿐만 아니라, 까다롭고 못된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십시오. 당시 종들 가운데에는 일부러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으면서도, 그 고통을 묵묵히 견디며 동료들 앞에서 강인함을 과시하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말합니다. 잘못을 행하고 매를 맞으면서 참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받는 고난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결과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말하는 고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의로운 고난입니다. 죄를 짓는 고난과 선을 행하다 받는 억울한 고난은 본질이 다릅니다.

본문의 19절과 20절에 두번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원어는 ‘χάρις'(카리스) ‘은혜’ 라는 단어입니다. 킹제임스(KJV)성경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acceptable)으로, NIV 성경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commendable)으로 번역했습니다. 억울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드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삶을 아름답게 빚어 가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21절에서 그 근거를 말합니다.

21 ○ 바로 이런 일을 위해,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몸소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여러분들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억울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은 단순한 인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것은 낯선 길에서 먼저 걸어가신 그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대로 따라 걷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면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왜 몸소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살길을 내시고 갈길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생각하며 그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몸소 고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부당한 모욕과 수치를 분명하게 당하셨고, 찔림과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22절과 23절을 보십시오. ’22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죄를 지으신 적이 없고, 한 번도 그 입에 거짓말이라곤 담으신 적도 없는 분이십니다. 23 사람들은 그분에게 온갖 모욕을 가했지만, 그분은 아무런 앙갚음도 하지 않으셨고, 사람들은 그분을 학대하고 핍박했지만, 그분은 아무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분께서는 모든 일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전부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벗어날 능력이 있으셨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인간은 고난이 올때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고난의 상황을 바꾸려고 합니다.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은 멀게 느껴집니다. 그때 억울함만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환경과 사람이 먼저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전부 맡기셨습니다.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은 다릅니다. 고난과 억울함 속에서 우리는 목자로부터 멀어지려 하지만 목자는 우리를 끝까지 찾아 오십니다.

2. 목자는 길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오십니다.

양은 본래 방어 능력이 없는 동물입니다. 뿔도 없고, 발톱도 없고, 날카로운 이빨도 없습니다. 양의 유일한 안전은 목자 곁에 있는 것입니다. 무리에서 벗어난 순간, 그 양은 이리떼의 가장 우선적인 표적이 됩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리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교회가 답답하고, 사람들이 싫어집니다. 고난이 우리를 목자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면 헌신은 짐이 되고, 섬김은 의무가 되며, 감사는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죄 없는 자신의 아들을 불의한 세상 한복판으로 보내셨습니다. 가장 억울한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을 회복하셨습니다. 세상이 내놓은 답은 우리를 더 강한 자리로 이끌지만, 하나님이 내놓으신 답은 십자가였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힘과 성과로 복음을 대체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당한 세상속으로 친히 들어오신 주님은 인간의 삶에 가장 확실한 기쁜소식입니다.  ‘목자’(ποιμένα,포이메나)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낼 때(시 23:1)쓰였고, 신약성경에서는 구원받은 자들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마 25:32;요 10:14;히 13:20)

본문 속의 흩어진 나그네들은 훨씬 혹독한 자리에서도 목자의 품을 붙들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당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기쁜 소식 즉 εὐαγγέλιον, (유앙겔리온)을 선포했습니다. 로마제국 곳곳에서 구원자로 불리우며, 복음이라는 단어는 황제의 출생과 즉위식에 관련되어 사용했습니다. 로마는 황제의 힘으로 평화를 유지했고, 신의 아들로 숭배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 가장 낮은 자리에서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복음을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식민지 통치 아래 고난 받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인이시고, 세상의 주인이시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당시 유다 변방에서 태어난 나사렛 예수를 구원자요, 기쁜 소식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목숨을 건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나그네들은 억울함과 부당함속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인내했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믿음의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거룩한 씨앗이 되었고, 그 복음은 지금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통해 전해집니다. 세상은 힘으로 증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성도는 한없이 쏟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머물때 십자가 정신의 선교적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4 “또 그분께서는 몸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분께서 매를 맞고 상함으로써 여러분이 낫게 되었습니다.”

상처는 우리의 마음의 문을 닫고 예민해 지게하며, 현실의 불안은 우리를 냉소적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무리에서 벗어났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아침식사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길 잃은 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답답한 삶에, 분주하여 감동을 잃어버린 삶에, 다 알면서도 바뀌지 않는 그 자리에, 여전히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는 그 자리에 주님은 끝까지 찾아 오십니다.

우리가 목자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내 힘이 회복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를 먼저 찾아오신 목자의 은혜 때문입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영원히 보호해 주십니다.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될때, 영적으로 우리는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일에 동참하도록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너무도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속적으로 위태롭게 하는 것들이 세상에는 존재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주어진 삶을 사랑합니다.

베드로전서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그 편지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전해집니다.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다시 흩어질 것입니다. 주일의 은혜가 월요일 아침의 시간까지 이어지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삶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상황 가운데 놓여 있기도 합니다. 그 세상의 자리가 때로는 차갑고, 억울하고, 부당하고 홀로 있는 것만 같은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25 전에는 여러분이 길 잃은 양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죽음을 넘어 우리를 소망으로 이끄십니다.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 이들은 행복과 불행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진리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며, 세상과는 다른 눈으로 모든 사건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바로 그 자리까지, 목자께서 먼저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믿음대로 사는 것,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이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변화된 존재입니다. 나를 붙들고 계신 목자의 품 안에서 살아가도록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 자리가 차갑고, 억울하고, 홀로인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오늘 이 말씀을 붙드십시오. “전에는 여러분이 길 잃은 양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04 19 2026 주일설교

부활절 제 3주

칼을 내려놓고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라

Lay Down the Sword, Come to Grace

베드로전서 1:22-25

1:22 ○ 오늘날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변함없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1:23 여러분이 거듭 태어난 것은, 이 세상의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언제까지나 영원토록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습니다. 1:24 기록되기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의 모든 영광은 들에 핀 풀의 꽃과 같도다. 풀은 이내 시들고 꽃은 쉬이 떨어지지만, 1:25 주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에게 전파된 기쁜 소식입니다.(쉬운말 성경)

22 You were cleansed from your sins when you obeyed the truth, so now you must show sincere love to each other as brothers and sisters. Love each other deeply with all your heart.  23 For you have been born again, but not to a life that will quickly end. Your new life will last forever because it comes from the eternal, living word of God. 24 As the Scriptures say, “People are like grass their beauty is like a flower in the field. The grass withers and the flower fades. 25     But the word of the Lord remains forever.” And that word is the Good News that was preached to you.(New Living Translation)

1940년,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거리에서 끌려가던 그 시절, 하를렘의 작은 시계점을 운영하던 텐 붐 가족은 집 안 벽장 뒤에 비밀 방을 만들어 유대인들을 숨겼습니다. 약 800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결국 밀고자의 배신으로 가족 전체가 체포되었고, 코리와 언니 벳시는 라벤스브룩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굶주림과 질병과 폭력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벳시가 코리에게 말했습니다. “이곳을 예배당으로 만들자” 그들은 나치의 감시를 피해 숨겨 가지고 온 성경으로 기도 모임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벳시는 “어떤 어둠도 예수님의 빛을 꺼뜨릴 수 없다.” 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버티게 한 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벳시는 끝내 수용소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동생 코리는 언니의 마지막 말을 가슴에 품고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아무리 깊은 구덩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더 깊으니,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그 사랑을 전해야 해”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도 바로 그 자리에서 쓰인 편지입니다. 로마 황제의 박해 아래 두려워 하던 성도들에게 보내는 베드로 생애 끝에서 보내는 편지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의 모든 영광은 들에 핀 풀의 꽃과 같도다. 풀은 이내 시들고 꽃은 쉬이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도다.” 칼을 든 베드로, 병사들 앞에서 두려움으로 무너졌던 베드로가 주를 경험한 깊은 고백입니다. 기록된 말씀의 은혜가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에 능력과 위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1.베드로는 칼을 들었고 주님은 잔을 드셨습니다.

깊은 밤 횃불을 든 무리가 몰려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칼을 뽑았습니다. 베드로가 정확히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손에 들린 것이 칼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고별설교에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한 베드로는 칼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잔을 드셨습니다. 그 잔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주님이 지셔야 할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이 그 잔을 드신 것은 죄로 끊어졌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은 잔을 드시며 ‘너희들이 내 잔을 마실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걸으신 그 길에 동참하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베드로가 든 칼이 있습니다. 나의 원칙과 가치라는 이름으로 드는 칼입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나를 보호하는 칼, 자신을 지키려 하는 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칼의 뿌리에는 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내 마음, 내 힘과 내 기준으로 나를 증명하여 지키려고 하는 칼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며 나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깊은 고통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더 깊은 사랑 안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잔을 마실 수 있는 힘이 된 것입니다.

이제 거듭난 베드로가 쓴 편지를 보겠습니다. “1:22 오늘날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변함없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뜨겁게’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크테노스(ἐκτενῶς)로, ‘전력을 다하여, 지속적으로’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밖으로”를 뜻하는 ‘ek’와 ‘뻗다’를 뜻하는 ‘teino’의 결합된 단어입니다. 문자적으로 연결해 보면 ‘줄기차게 전력을 다하여 뻗어 나가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이 지금도 줄기차게 확장되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나그네된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상처받아도, 기대가 무너져도, 전력을 다해 계속 뻗어 나가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원천이 십자가이기에, 그 사랑은 공동체를 넘어 세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날 밤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단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날 아침 주님이 그 앞에 계셨지만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물밖으로 끌어 올릴수 조차 없을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 요한이 “주님이시다” 라고 말하자마자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 내립니다. 주님께 달려간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지키지 못한 고백과 주님에 대한 마음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날 아침 베드로는 주님이시다 라는 요한의 외침에 주님을 더 가까이 보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아침식사를 마치신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한 번, 두 번, 세 번을 물으십니다. 그 질문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의 물음이었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 앞에서 베드로는 무너진 자리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 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기도해야 할 때 잠들어 있었고, 침묵하게 할 때 말했고, 고난의 잔을 마실때에는 칼을 들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베드로 같은 마음으로 서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 다른 것을 붙잡고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두려워 더 움켜 쥡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한 번, 두 번, 세 번 그 이상 부인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대부분이 쉽게 타오르고 쉽게 식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쓴 1장 19절을 보십시오. “19 오직 한 점의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롭고 고귀한 피로 된 것입니다.”

‘보배롭고’라는 표현의 헬라어 티미오스(τίμιος)는, 사람이 그 가치를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의미합니다. 주님이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가 우리의 죄사함을 이루셨습니다. 죄사함의 능력이 얼마나 값진 것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고난의 잔을 드셨기에 우리의 잔이 은혜로  채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손에 쥔 칼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그 잔을 드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기준 앞에서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성도의 삶은 나를 증명해 내고, 내 힘을 드러내는 싸움이 아닙니다. 은혜에 붙들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게 있는 칼이 없으면 내가 약해질까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내가 가진 칼을 갈고 닦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우리의 결심과 열심으로 오지 않습니다.

거듭난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편지합니다. “23 여러분이 거듭 태어난 것은, 이 세상의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언제까지나 영원토록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다른 것이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 썩지 않는 씨,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우리 안에 심겨졌습니다.

2. 세상 속에 심겨진 썩지 않는 씨

썩어질 씨는 무엇입니까?  금과 은이 넘쳐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목마름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여전히 공허한 그 자리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무엇가 붙잡으려고 끊임없이 달려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를 채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결국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그 빈 그물이 있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입니다. 그 빈 공간은 더 열심히 한다고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썩지 않는 씨가 되시는 주님이 들어오시는 자리입니다.

썩지 않는 씨가 심기는 것은 단순한 위로나 감동이 아니라 존재가 변화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밤새 빈 그물을 끌어올리며 낙심하던 그 자리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신 자리에 그물을 던졌을 때,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채워졌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자리에 우리의 삶을 드릴때, 우리 안에 변화가 시작됩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부르실 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랑을 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이 부르심은 영원토록 함께하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주신 은혜의 초대입니다.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지만 주가 이끄시는 은혜가 우리를 사명의 자리로 살게합니다. 사명자로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약속을 모든 상황속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주를 위해 기꺼이 삶을 드릴 자들을 지금도 찾으십니다. 말씀이 되신 주님께서 무덤을 깨고 나오셨습니다. 그 부활의 생명이 말씀을 통해 들어와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썩지 않는 씨로 심겨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1세기, 성도들은 로마 황제의 박해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집도 없었고, 직업도 빼앗겼고, 가족도 흩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소망되시는 주님의 말씀을  동일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24 기록되기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의 모든 영광은 들에 핀 풀의 꽃과 같도다. 풀은 이내 시들고 꽃은 쉬이 떨어지지만 25 주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도다.”

여기서 베드로가 인용한 말씀은 이사야 40장입니다. 수천 년 전 바벨론 포로기, 절망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 더 큰 힘에 의해 이끌리는 것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그 은혜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거룩한 나그네 된  백성들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 말씀이 울려 옵니다. 우리는 이 땅을 밟고 살아가지만 여전히 우리 손에는 자신을 지키려고 드는 칼이 있습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마음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 상처 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날카로운 칼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꺼내 들었던 그 날카로운 칼을 거두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우리를 다시 불러주십니다.

은혜의 삶은 하나님이 세상 안에 세우신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 질서의 중심에는 언제나 우릴 살리시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 부르심은 완전한 회복입니다. 그 은혜의 손이 지금도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이상 내가 붙잡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우리를 향해 먼저 다가오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식탁의 자리를 준비하시고 수치와 상처가 있는 자리, 돌아서고 싶은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주님께 우리의 시간과 마음을 드리길 원합니다. 결코 헛되지 않고 아깝지 않을 영광의 날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마음을 주를 위해 부어 드리길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부모와 자녀보다 나를 더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부활의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갈망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우리는 다시 세워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시 내 힘과 내 경험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그 질문 앞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정죄가 아니라 회복으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서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은혜 안으로 옮겨진 사람, 십자가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썩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심겨졌습니다. 어떤 어둠도 예수님의 빛을 꺼뜨릴 수 없었던 그 고백은 썩지 않는 씨,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심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살아있는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끝없는 사랑 안에서 오늘을 살아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4 12 2026 주일설교

부활절 제 2주

우리 삶의 자리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The Lord Has Come into the Place of Our Lives

요한복음 20:24-31

24 ○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디두모’라는 별명을 가진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다. 25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도마가 말했다.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서 못 자국을 보고, 구멍이 난 곳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도무지 그 말을 믿지 못하겠소!” 26 여드레 후에, 제자들이 다시 모여 있었다. 이번에는 도마도 그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역시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갑자기 들어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다. “너희 모두에게 평강이 있기를!” 27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자, 이리 와서 네 손가락을 여기 넣어 보고,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28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29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구나. 그러나 나를 보지 않고도 나를 믿는 사람은 더욱 복이 있다.” 30 ○ 이 책에 기록된 것 외에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기적적인 표징들을 많이 행하셨다. 31 그러나 여기에 이것들을 기록해 두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고, 또 예수를 믿음으로써 예수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다.(쉬운말 성경)

24 One of the twelve disciples, Thomas (nicknamed the Twin),[c] was not with the others when Jesus came. 25 They told him, “We have seen the Lord!” But he replied, “I won’t believe it unless I see the nail wounds in his hands, put my fingers into them, and place my hand into the wound in his side.” 26 Eight days later the disciples were together again, and this time Thomas was with them. The doors were locked; but suddenly, as before, Jesus was standing among them. “Peace be with you,” he said. 27 Then he said to Thomas, “Put your finger here, and look at my hands. Put your hand into the wound in my side. Don’t be faithless any longer. Believe!” 28 “My Lord and my God!” Thomas exclaimed. 29 Then Jesus told him, “You believe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believe without seeing me.” 30 The disciples saw Jesus do many other miraculous signs in addition to the ones recorded in this book. 31 But these are written so that you may continue to believe[d] that Jesus is the Messiah, the Son of God, and that by believing in him you will have life by the power of his name.(New Living Translation)

영국의 시인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 1859–1907)은 그의 시에서 하나님을 사냥개로 표현했습니다. 먹잇감을 끝까지 추적하듯, 하나님을 떠나 사는 자신을 그토록 집요하게 추적해서 찾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자녀들과 맺은 언약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추적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의심하는 제자 한 사람을 끝까지 찾아가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열두 제자 가운데 도마만이 부활의 주님이 찾아 오셨을때 그 자리에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도마가 어떤 이유로 그 자리에 없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유독 도마만 그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여드레 후, 부활하신 주님 앞에 선 도마는 외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 속에 부활의 감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 사도신경으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면 죽을 몸도 살릴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 11)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부활신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지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부활이 완성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없는 자와 믿음있는 자를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부활의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으니 주께서 재림하실때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는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무덤 속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절망의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말씀과 믿음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C.S 루이스는 사랑하는 아내 조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는가?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쾅! 하고 닫히는 문,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리고 침묵. 차라리 돌아서는 게 낫다.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일까?” 하나님을 잘 알았던 그가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 보내며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르짖음은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놓지 않으려 했던 절박함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났던 열한 명의 제자들이 일주일이 지나 다시 주일이 되어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굳게 잠근 채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도마만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뵌 열한명의 제자들이 여전히 숨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신앙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닫히고, 예배의 자리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많은 것을 알고 은혜도 경험했지만 그 익숙함 속에서 마음이 더 굳어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드레 후 다시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 자리에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미 도마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못 자국을 직접 보고 손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의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도마의 마음을 아시고,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며 “자, 이리 와서 네 손가락을 여기 넣어 보고,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말씀하십니다. 도마를 책망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믿음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숨기려 하는데,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의 상처를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그 상처를 보이심으로써 도마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때 도마의 입에서 터져 나온 고백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고백을 위해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다니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왕의 조서에 30일 동안 기도하지 말라는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그는 집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문 앞에서 평소와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상황을 바꾸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기도의 자리였습니다. 이후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집니다. “이에 돌을 가져다가 굴 입구를 막고 왕이 자기의 도장과 귀족들의 도장으로 봉인하였으니, 이는 다니엘에 관한 일을 변경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더라”(단 6:17) 왕의 인장이 찍힌 것으로 사자굴 입구를 막고 봉인했습니다. 이제 왕 자신조차도 그 결정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종결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들의 밥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봉인된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고, 다니엘을 살리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부활의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덤의 돌문이 굳게 봉인되고 로마 군인들이 지켰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돌문을 여시고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직접 볼수 없는 승천 이후를 살아가지만 이 진리를 믿는 자들은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의 여정 속에서 때때로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삶의 현실이, 마치 내 안에 깊이 박힌 못 자국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상처는 삶을 무겁게 짓누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심과 상처 속에 있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부활의 능력은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처를 딛고 일어나,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날 복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십자가 아래 끝까지 남아 있던 예수께서 사랑하던 제자였습니다. 그 요한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아내느니라. 이는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장 18절)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더 강한 의지가 아닙니다. 온전한 사랑입니다.

요한은 또한 이 편지를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밝힙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또한 그 이름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때까지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행1:4) 그 약속을 믿고 자리를 지키며 기다릴 때, 제자들은 성령세례를 받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때로는 고민이 깊어질 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며 슬픔이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가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믿어질때 믿음을 통해 부활의 벅차는 감격과 크신 능력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됩니다. 성도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부활의 믿음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목격했던 도마도 그랬습니다. 그는 변화된 믿음으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단지 인간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주를 위하여 겪었던 모든 상처와 눈물을 씻겨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모습은 초라할때가 있고 연약해서 상처가 남기도 하지만 다시 살리실 것을 믿기에 부활의 감격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을 지니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우리의 자리를 돌아봅시다. 부활의 기쁨이 희미해졌다면, 주님 앞에 솔직히 나아가십시오. 부활의 신앙을 아는 것이 사는 것이 되게 해 달라고, 삶이 바뀌는 믿음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신 다음 곧바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제 우리는 부활절 이후 8주 동안, 부활절 이후 예수의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일상의 시간 속에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고백하십시오.

비록 지금 깊은 절망과 아픔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자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생명의 자리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우리는 의심했던 도마와 같이 연약한 자들이지만, 주님은 그 자리까지 찾아오셔서 “평안하라” 말씀하시며, 자신의 상처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의심을 걷어 내시고 부활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낙심 가운데 있는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마침내 장차 임할 부활의 영광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번주 금요 찬양에 함께 부른 ‘주 예수 내 산 소망’ 찬양의 가사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말씀을 마칩니다.

“닿을 수 없고 오를 수 없네 사망의 권세에 놓인 우리 어둠을 뚫고 주님의 사랑 내 영혼을 비추시네 주의 십자가 날 구원 하사 왕의 자녀 삼으셨네 죽음을 이기신 유다의 사자 우리의 주 부활하셨네

“할렐루야 주의 이름 찬양해 할렐루야 내게 자유 주셨네 죄의 저주 끊으신 구원의 주 그 이름 언약의 말씀 이뤄진 아침 주님의 호흡 시작됐네 죽음을 이기신 유다의 사자 우리의 주 부활하셨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을 이기신 유다의 사자,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 우리 삶의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이번 한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부활의 감격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04 05 2026 주일설교

(부활주일설교)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기

Dying And Rising with Christ

빌립보서 3:10-11

김태환 목사

10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11 그분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도 마지막 날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쉬운성경)

10 I want to know Christ—yes, to know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participation in his sufferings,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 11 and so, somehow, to attain to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NIV)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41년 전,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당시 이름은 제물포) 항구에 입국했습니다. 그날은 4월 5일 부활절이었습니다. 아펜젤러는 미국 북감리교 소속 선교사로, 언더우드는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해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우연히도 올해 부활절이 4월 5일이어서 감회가 더욱 새롭습니다.

부활절은 우리에게 특별한 주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주신 것을 축하하고,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기로 결단하는 주일입니다. 바울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하는 것이 이 세상에만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9) 왜 그렇습니까?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삶을 소망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믿음 생활에 필수적(必須的)입니다. C.S. Lewis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가 거짓이라면 기독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참이라면, 그것은 무한히 중요한 것이다. 기독교는 결코 적당히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 -C.S. Lewis, God in the Dock 기독교를 좋은 종교라고 말하거나, 삶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나, 마음에 위로를 주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런 정도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면, 이것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만큼 중대한 사건입니다. 맞습니까? 반대로, 기독교가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우리 삶에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이스가 기독교는 적당히 믿을 수 있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 믿음의 주춧돌(cornerstone)과 같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기초가 없는 모래 위에 세운 집 같아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쉽게 무너집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단단하지 않습니다. 사는 방식이 단순하고, 현세적(this worldly)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은, 단단한 주춧돌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삶을 대하는 태도가 견고합니다. 어려움을 당해도 잘 이겨냅니다. 쉽게 무너지지 않고,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당장에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관심을 두고 삽니다.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삽니다(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고린도후서 5:7) 아펜젤러가 한국에 왔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7살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그보다 한 살 적은 26살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한국 땅에 첫 발을 딛고 이런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습니다. 이날 죽음의 굴레를 끊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묶고 있는 모든 사슬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그들은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왔습니다. 그들이 세상적인 성공이나 명예나 이익을 따라 살았다면, 조선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따라 산 사람들이었기에, 조선을 위해 자신을 드리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오늘 제 설교를 통해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부활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부활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참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전능한 능력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일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3:10-11, 현대어 성경)

바울은 그의 인생의 주된 목적을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기노스코(γινώσκω)’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같이,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요한복음 10: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사용하신 말이 ‘기노스코’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우리가 관계의 깊이를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깊이 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깊이 알고자 하는 열망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조선 후기는 성리학(性理學)이 심화된 때였습니다. 이 때, 정약용이라는 뛰어난 학자가 나왔습니다. 정약용의 바로 위 형이 정약종이고, 제일 큰 형이 정약전입니다. 모두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입니다. 정약종은 엄격한 유학자였는데, 천주 교인이된 이벽(李蘗)과 밤샘 토론에서 잡득(雜得)을 얻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천주는 참으로 계신 분이로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왔다면, 그분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그리고 자기 부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부인, 어젯밤 나는 참된 도(道)를 보았습니다. 천주께서 만물을 지으셨고, 우리의 영혼도 그분께서 돌보십니다. 이 도는 사람을 바르게 하고 가정을 평안하게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 도 안에서 참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제 천주를 섬기겠습니다. 이것이 내가 찾던 도이며, 내 삶을 바르게 하는 길입니다.” 정약종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장남 정철상과 함께 순교합니다. ‘주교요지(主敎要旨, 1795년경)’라는 한글 교리서를 남겼습니다. 부인 류소사,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합니다. 아들 정하상은 왕에게 올린 ‘상재상서(上宰相書, 1839)’와 교황청에 사제 파견을 요청한 ‘조선교우서(朝鮮敎友書, 1824년)’로 유명합니다. 당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정하상의 편지 번역본을 읽고 “동방에 주님의 기적이 일어났다”라고 하면서 크게 감동했다고 합니다.

정약종은 이벽과의 밤샘 토론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그의 삶은 하루 아침에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변화되었고, 자녀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천주교의 역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머리로는 알지만 행동이 없고, 실천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문제입니다. 정약종의 고백처럼,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온 것을 알았다면, 그의 피조물인 우리는 마땅히 그분을 섬기고 따르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두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Amplified Bible에 보면, 부활의 능력이라는 말이 ‘신자들 안에서 넘쳐나고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which overflows and is active in believers)’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이 말씀을 하면서 박해로 예루살렘을 떠나 지중해 연안에 흩어져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을 고난 속에서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힘은 그들 속에서 역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나도 그 능력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수요예배를 ‘삼일예배’라고 불렀습니다. 주일마다 한 번씩 예배드리는 것으로는 모자라 주일이 지난 후 삼 일째 되는 수요일 저녁에 다시 모인 것입니다. 삼일예배는 사도신경의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는 구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어렸을 때 삼일예배를 경험한 저는, 삼일예배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주중에도 기억하며 살겠다는 신앙적인 열망을 담은 아름다운 전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지신 십자가의 정신을 내 삶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고 함께 아파해주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알고 함께 울어주고, 다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함께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2장에,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 온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어느 집 안에 계셨습니다. 이미 사람들이 집 안까지 빽빽하게 모였기 때문에 병든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 네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그 집의 지붕을 뜯고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침상 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긍휼이 여기는 마음과, 예수님께 데리고 가면 친구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예수님께 대한 ‘적극적인 행동하는 믿음(active faith)’을 보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겪고,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함께 울어주고,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내 주는 일, 이것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나누는 일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그리스도를 알고자 했던 이유는, 그 자신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3:11, 현대어성경)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 이것을 위해서 자기는 어떤 희생과 대가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말하면서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 신앙이 반드시 고난을 통해 주어진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그는 고난을 단순한 고통으로 보지 않고 부활에 참여하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이해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발견한 부활 신앙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는 이 비밀을 로마서 6:8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If we died with Christ)”이라고, 과거형 동사를 썼습니다. 미래형을 써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면”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우선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비밀을 ‘밀알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요한복음 12:24) 땅에 심은 씨앗은죽지만, 그 자리에서 새 생명의 싹이 돋고, 줄기가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그를 믿는 수많은 생명들을 얻었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누가복음 9:23)”고 말씀하셨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주시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실천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부활의 새 생명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No’라고 말하고, 예수님의 삶을 닮고, 그의 고난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Yes’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바울은 부활 신앙의 비밀을 알았기에 “우리 사도들은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린도후서 4:10)”고 했습니다. 또 그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고(고린도전서 15:31),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했습니다(갈라디아서 2:20).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에게 부활의 삶이 열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사람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부활 신앙은 실제적(實際的)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유익(有益)이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가진 사람은 현재의 고난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고 해석합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4:8).” “우리는 고난을 받아도 소망 중에 즐거워합니다.” (로마서 12:12) 예수님의 고난을 나누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다시 일으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고난의 시간을 즐거움으로 이겨냅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현재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931년 10월 18일, 혼수 상태에서 잠시 깨어난 에디슨은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저기 보이는 그곳은 참 아름답습니다(It is very beautiful over there),”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증하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5:1-5). 바로 이것이 왜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 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사모해야 하는지, 그 이유입니다.

부활 신앙은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할 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삶으로 들어오라!” 이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03 29 2026 주일 설교

종려 주일

주인이 바뀐 사람들

Those Whose Lord Has Changed

마태복음 21:1-11

1 예수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올리브 산 부근의 ‘벳바게’라는 동네에 이르렀을 때였다. 예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2 “저 동네로 들어가면, 나귀 한 마리가 그 새끼와 같이 매여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서 내게로 끌고 오너라. 3  혹시 누가 왜 끌고 가는지 묻거든,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여라. 그러면, 아무 말 않고 나귀들을 곧 내어 줄 것이다.” 4 이 일은 옛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다. 5 곧 ‘시온의 딸들에게 일러라. 보라, 너희의 왕이 너희에게 오신다.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는데,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6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두 제자가 그 동네로 들어가서, 7 어미 나귀와 새끼나귀를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께서 올라타시자, 8 무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폈고,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바닥에 깔기도 했다. 9 군중들은 예수를 앞뒤에서 에워싸고 행진하면서 크게 환성을 올렸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10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읍 안으로 들어가시자 온 도시가 들끓었고, 사람들마다 “이분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사람들은 “그분은 예수님이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언자랍니다.” 하고 대답했다. (쉬운말 성경)

1 As Jesus and the disciples approached Jerusalem, they came to the town of Bethphage on the Mount of Olives. Jesus sent two of them on ahead. 2 “Go into the village over there,” he said. “As soon as you enter it, you will see a donkey tied there, with its colt beside it. Untie them and bring them to me. 3 If anyone asks what you are doing, just say, ‘The Lord needs them,’ and he will immediately let you take them.” 4 This took place to fulfill the prophecy that said, 5 “Tell the people of Jerusalem,
    ‘Look, your King is coming to you. He is humble, riding on a donkey riding on a donkey’s colt.’” 6 The two disciples did as Jesus commanded. 7 They brought the donkey and the colt to him and threw their garments over the colt, and he sat on it.  8 Most of the crowd spread their garments on the road ahead of him, and others cut branches from the trees and spread them on the road. 9 Jesus was in the center of the procession, and the people all around him were shouting, “Praise God for the Son of David! Blessings on the on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Praise God in highest heaven!”10 The entire city of Jerusalem was in an uproar as he entered. “Who is this?” they asked. 11 And the crowds replied, “It’s Jesus, the prophet from Nazareth in Galilee.”(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그 군중은 5일 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변하게 했을까요? 그들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들이 원한 왕이 아니셨습니다. 군중들이 원했던 것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아였을 뿐입니다. 자신들의 방식대로 기적을 일으키고 자신들이 원하는 영웅이 되어줄 왕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원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동안 가난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셨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병들고 소외된 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그 길의 시작점에 함께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온 세상에 메시아 되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시는 그 순간에 왜 보잘 것 없는 어린 나귀였을까요?

주님께서 하신 모든 사역의 뿌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린 나귀를 찾아 오신 것도 구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마태는 말합니다. “21:4 이 일은 옛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다. 21:5 곧 ‘시온의 딸들에게 일러라. 보라, 너희의 왕이 너희에게 오신다.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는데,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예수님은 두 제자를 벳바게라는 동네의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21:2 “저 동네로 들어가면, 나귀 한 마리가 그 새끼와 같이 매여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서 내게로 끌고 오너라. 21:3 혹시 누가 왜 끌고 가는지 묻거든,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여라. 그러면, 아무 말 않고 나귀들을 곧 내어 줄 것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아무도 타 본적 없는 어린나귀를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 둘은 너희들 앞에 보이는 마을로 들어가라. 마을에 들어서면, 아직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 이리로 끌고 오너라.”(마가복음 11:2), “눈앞에 보이는 저 마을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길가에 매여 있을 테니, 너희는 고삐를 풀어서 그 어린 나귀를 이리로 끌고 오너라.(누가복음 19:30)

어린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귀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바른 관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귀는 예수를 태우는 특별한 영광을 누립니다. 이 작고 보잘것 없는 나귀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약할 때 강함이 되십니다. 세상은 크고 강한 것을 찾지만, 하나님은 작고 약한 것을 택하시고 사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묻는 사람이 있거든 ‘주께서 쓰시겠다’하면 아무말 없이 내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것을 2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주’ 퀴리오스(κύριος)는 온세상을 통치하시는 주인을 뜻합니다. 호 퀴리오스(ὁ κύριος) 는 내 인생의 유일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입성길에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올라갑니다.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는 메시아를 태우는 성별된 도구가 된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몽당연필에 불과합니다. 그 분이 쓰시고, 그분이 생각하시고, 그 분이 결정하십니다. 나는 그 분의 손안에 있는 작은 몽당연필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순간 우리는 특별한 계획과 목적을 지니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삶의 방향이 정해집니다. 이전에는 성공의 조건으로 하나님을 필요로 했는데, 뜻을 깨닫고 나니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에 우리의 삶이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에 관심을 갖습니다.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켰는지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는지 궁금해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던져줍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가? 주께서 내 인생을 쓰시겠다고 할 때 내 삶의 전부를 드릴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삶의 주인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평생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인생에는 두 주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를 겉사람과 속사람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하도다.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 그것은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할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라. (롬7:25) 이 탄식은 우리의 현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람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롬 8:1)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삶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전부이며,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이 싸움 가운데서 우리를 끝까지 이끄십니다.

주님은 묶여 있던 나귀를 풀어 오라고 하셨습니다. 매여 있는 것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묶여 있을땐 준비하는 시간이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다림의 시간일수 있었다면, 풀어서 데리고 온 것은 새로운 목적으로의 초대입니다. 주님을 태우는 그 자리는 즉 본래 있어야 자리로 돌아 온 것이라 해석해 볼수 있겠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옛사람이었습니다. 죄에 묶이고, 율법에 묶이고, 두려움과 상처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에게 새삶을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일하시는 성령께서는 어떤 상황에도 우리를 회복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배를 드리고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루에도 수도 없는 내면을 가꾸는 싸움에서 주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위하여 공부도 열심히 하고, 직장생활도 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 안에서 예수의 생명 또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후 4:10) 내가 깎일 때, 내가 쓰여질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둘째, 주께서 쓰시는 자리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고난주간은 주가 걸어가신 뒷모습을 보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소망을 바라보며 참고 견디며 걸었습니다.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이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환대를 받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삶이 예수님의 사명이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의 길을 걷는 뒷모습을 보이신 것은 고통이 없는 영광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내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를 따르는 사명자들이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앞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제자들이 본 것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시는 그의 뒷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놀란 이유는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예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앞서가시는 비장한 자세 때문입니다.

우공이산 (愚公移山)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늙은이가 산을 옮긴다’는 뜻입니다. 우공(愚公)이라는 노인이 두개의 큰 산 사이에 살고 있었답니다. 산이 길을 막고 있자 자손들과 함께 산을 파서 옮기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늙은이가 무슨 수로 그 큰 산을 옮기겠소?” 그때 우공이 답합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계속할 것이오. 산은 더 커지지 않지만 우리는 계속 늘어날 것이오.”

일본의 니시오카 가문은 세계 최고의 목조 건축물을 1400년간 동안 지켜왔다고 합니다. 천년이 넘도록 지탱할수 있던 비결은 노송(老松)을 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무의 생명력을 오랫동안 견뎌온 년수로 측정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만을 쫓는 사람들의 눈에는 십자가의 삶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우리 힘으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먼저 그 길을 걸어가셨기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신뢰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린 나귀는 예루살렘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는 십자가가 어디로 향하는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고난만 보이고, 어둠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미련한 방법으로 빌라보의 법정에서 판정패 당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게된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 역사 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가는 길이 사람의 환호성으로 갈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만일 이 길에서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 힘만 믿는다면, 그 길을 따르는 것이 고행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키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을때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를 떠났던 제자들이 성령 받는 후 주님의 본심을 깨닫습니다.  주가 이루신 복음은 언제나 우리를 있어야 할 자리로 옮겨 놓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혼란스럽고, 불안이 우리의 삶을 짓누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으십시요. 부활의 생명이 깊은 땅속에서 싹트고 있습니다. 어둠을 이기신 주님의 곁을  지키십시요. 십자가의 고통을 지날때에도, 죽음의 자리로 걸어 가시는 예수께서 무력해 보일지라도, 끝까지 주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수와 같이 믿음의 성도들을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끌어 올리실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 받는 이들의 희망이 되셨고, 사명의 길을 걷는 이들의 앞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고난 주간 끊임없이 찾아오는 각자의 십자가를 회피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에서 주님은 불과 같은 죽음의 고통을 견디시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고난주간 우리가 져야 할 사명의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져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