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6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9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When Words Run Out, the Spirit Prays

로마서 8:26~30

26.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9.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셨고,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쉬운성경)

26 And the Holy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For example, we don’t know what God wants us to pray for. But the Holy Spirit prays for us with groanings that cannot be expressed in words. 27 And the Father who knows all hearts knows what the Spirit is saying, for the Spirit pleads for us believers[l] in harmony with God’s own will. 28 And we know that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m]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29 For God knew his people in advance, and he chose them to become like his Son,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 30 And having chosen them, he called them to come to him. And having called them, he gave them right standing with himself. And having given them right standing, he gave them his glory.(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되면 삶의 고민과 흔들림이 멈추고 믿음이 더욱 분명하고 선명해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현실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에게도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오고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시간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1) 라고 탄식합니다. 우리 안에는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죄의 세력이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팽팽하게 맞서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내면의 정직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거룩한 싸움의 한복판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선포합니다.

1.우리의 연약함을 중보하시는 성령님

26.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이 무엇일까요?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내 힘으로 할수 없는 한계에 부딪힐 때 우리에게는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그 사실을 깊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기쁨은 내가 구한 대로 응답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를 누리는 데 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있어도 그분의 선하심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와 같지 않을수가 있습니다. 기도한 대로 되지 않는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바울 안에 선한 일 행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를 이끌었습니다. 고린도 후서의 고백에 보면, 그의 사역속에서 복음의 영광은 완전한 그릇이 아니라,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나 자신의 연약함 속에 담겨 있지만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하려고 애써도 결국 우리가 감추고 싶었던 연약함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만 같은 상황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조차,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자리 그 앞에 서는 것이 기도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그 어떤 언어와 표현으로도 담아낼 수 없어 그저 눈물만 흐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간절히 갈망한다면, 오히려 연약함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분이 아니라 깊숙히 들어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무슨 말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물로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그 시간에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돕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단지 곁에 머무는 차원의 위로만이 아니라 짐을 함께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약함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소망의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시가 있습니다.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라는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슬픔이나 절망이 전혀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지은 작사자 엘리자 히윗(Eliza E. Hewitt, 1851-1920) 여사는 1887년 학교에서 불량학생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폭력으로 척추 부상을 입고 오랜 병상 생활을 하던 중, 몸이 완쾌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영혼에 깊숙이 스며드는 햇살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고 기도하며 이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오늘 내 영혼에 햇빛이 비치네. 이 세상 하늘에서 빛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밝은 빛이라네. 예수님이 나의 빛이기 때문이라네. 오늘 내 영혼에 한 음악이 흐른다네. 나의 왕되신 분께 찬양을 드린다네. 내게 귀 기울이시는 예수님이 들으신다네. 입으로 노래할 수 없는 영혼의 찬송들을.

몸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성령 안에서 찬양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노래할 수 없는 영혼의 찬송들을 예수님이 들으신다는 고백은 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성령이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것, 이미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그 절망의 자리에 멈추어 서는 것이 아니라 영광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 영광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기복적인 성공의 간증이 아니라 성령의 탄식을 말합니다. 서로의 시간표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결코 헛된 시간이 없습니다.

2.부르심의 증거

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는 우리의 탄식의 기도, 우리가 겪는 세상의 수많은 고난도 포함 됩니다. 오늘의 세상을 보십시오. 이상 기후와 재난 속에 신음하고,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 권력과 정치의 자리에는 다툼과 폭력이 흐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세상이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깨어짐은 먼 곳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선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갑자기 찾아오는 아픔과 설명할 수 없는 고난 앞에 설 때가 있고, 세상속의 불의한 일 앞에 가슴 아픈 탄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괜찮아 다 잘될거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모든 것이 잘될 것을 바라며 그 말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증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신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통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해치기 위해서 모의하고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 선으로 바꾸사 요셉의 생애 가운데 협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선을 이룬 것이지, 요셉이 선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겪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의 일생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가 하는 일이 잘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선을 이루는 사람은 고난 가운데 그 보다 더 큰 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인내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요셉이 자신의 손으로 형들이 주었던 고통을 되 갚을 수 있는 위치에서 했던 말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입니다.

내 시간과 재능은 지금 누구를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까? 내 삶은 무엇을 위해 준비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교회에서의 나, 가정과 일터에서의 나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삶의 모든 순간이 예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내 삶에 더해지는 무게와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우리와 늘 동행하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29.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셨고,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부르심에는 인간의 그 어떤 자격과 조건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선택받은 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것도 자랑할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자격이 포함된다면 구원의 완전성이 상실됩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힘입어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 분의 사랑 앞에 서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삶으로 세워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그렇게 빚어 가십니다. 우리 눈에는 불안과 불확실한 시간이 더디고 답답하게 느껴져 피하고만 싶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 속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시는 더 크신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완성하시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 자리는 두려움의 자리가 아니라 기쁨의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아가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만날 때가 있고,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는 나 혼자만의 아픈 시간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절절한 마음으로 붙들고 있는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이든, 아픔의 시간이든, 혹은 평탄하고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시간이든 하나님의 손에서 버려지는 시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을 사용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아직 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바울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의 최종적 구원은 반드시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과 관계 맺는 삶을 통해 그 사랑을 실제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가르침을 배울 책임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미 성령께서 탄식속에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엘리자 히윗의 고백처럼 몸의 고통은 그대로인데 내 영혼에는 찬양이 흐르는 그 은혜의 감격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부르심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으로, 특권이 아니라 선교적 삶으로, 의심이 아니라 확신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 변화의 과정이 성령의 역사이고 이 회복의 과정이 거룩한 삶입니다.

0719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8주

함께 자라게 두어라

Let Them Grow Together

마태복음 13:24~30, 36~43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또 다른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심은 사람에 빗댈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원수가 와서 밀 사이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26밀이 자라서 낟알이 익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27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했다. ‘주인님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그런데 어디서 이런 가라지가 나왔을까요?’ 28주인이 대답했다. ‘원수가 그랬구나.’ 종들이 주인에게 물었다. ‘저희가 가서 가라지를 다 뽑아 버릴까요?’ 29주인이 대답했다. ‘아니다너희가 가라지를 뽑을 때에 밀도 함께 뽑힐라. 30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놔 두어라추수할 때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 묶어서 불에 태우고밀은 거두어 곳간에 쌓으라고 하겠다.'”

오늘 본문은 가라지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며 씨 뿌리는 비유 이후 가리지를 심는 존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어떤 밭인지를 돌아보았습니다. 무감각한 길가, 뿌리 없는 자갈밭, 염려와 재물로 뒤덮인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입니다. 밭에 난 가라지는 무엇일까요? 마음의 밭에 심겨지는 가라지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믿도록 심는 씨입니다. 남보다 내가 먼저여야 한다는 욕심입니다. 끊임없이 악에 의해 만들어 지는 우상들입니다. 문제는 이 우상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조차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에 작은 이상이 느껴지면 약을 챙겨 먹고 병원에 다녀옵니다. 내 몸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정작 내 삶의 자리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심각하게 들여다 보지 않습니다. 믿음도 훈련하지 않으면 점점 무뎌집니다. 그 이유가 원수가 가라지를 심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연약해지면 삶의 작은 흔들림 하나에도 쉽게 무너지고 힘겨워집니다.

본문속에 주인의 종들은 눈 앞에 있는 가라지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주인에게 두가지 질문을 합니다. “어디서 이 가라지가 나왔을까요?” “저희가 가서 가라지를 다 뽑아 버릴까요?” 주인은 두 질문에 답하는데 “아니다.”입니다. 왜 주인은 선과 악이 분명한데 추수때까지 참고 기다리고 하신 것일까요? 의인과 악인이 한 세상, 한 사회, 한 공동체 안에 섞여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37절 38절 보시겠습니다. 37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이다. 38그리고 밭은 세상이다.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모든 아들들이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다.

무엇이 하늘나라의 아들과 악한 자의 아들을 가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아들들이 세상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1. 조급함의 유혹 (가서 뽑아버릴까요?)  

종들의 질문 안에 조급함이 있습니다. “어디서 이 가라지가 나왔을까?” 라는 첫번째  질문은 원인을 찾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질문은 “가서 뽑아버릴까요?” 자신들이 해결하겠다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에 주인은 왜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가라지는 낟알이 맺히기 전까지 밀과 구별되지 않아서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 할 수 없었고,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다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원수는 가리지를 심고 갈뿐이지 주의 자녀들을 헤칠 힘이 없습니다. 어둠을 흩어서 뿌림으로 빛의 자녀들이 혼란에 빠지도록 할 뿐입니다.

우리는 악의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려고 하다가 조급함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조급함으로 인해 오히려 악에 주목하다가 하나님이 선하시지 않거나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고 여기게 되는 혼란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 질문은 성경에서도 욥이 이미 물었던 질문이고, 우리도 여전히 완전한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들은 악의 문제에 열중해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주인이 한 대답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라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시적인 방법과 힘으로 악을 이길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검을 잡으면 필연적으로 검으로 망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30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놔 두어라. 추수할 때,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 묶어서 불에 태우고, 밀은 거두어 곳간에 쌓으라고 하겠다.

성경은 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엔 하나님의 공의가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그 순간에는 너무도 크게 느껴졌던 일들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니라 깨닫는 때가 있습니다. 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놔 두라는 것은 심고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끝까지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놔두라 아페테(ἄφετε)는 원래 “허락하다, 그대로 두다”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자리를 내어드리는 의지적인 허용입니다. 믿음은 내게 힘이 있음에도 하나님의 뜻에 나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악은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 나가며, 내 상처에 붙들리고 타인과 비교하며 낙심하고, 미움과 정죄가 뿌리내릴 때 선하신 하나님을 더욱 더 바라보며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강요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으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걸음은 고통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이루어 낸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의롭다 인정받은 자들을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겠다고. 그날에 의인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라고.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포기하지 않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점검할 것은 하나입니다. 내가 정말로 예수를 믿고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할 때, 바로 그 순간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심고 자라게 하시는 분을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내 손으로 판단하고 심판하려는 조급함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날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고통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라지로 인해 부드러운 마음이 굳어지고, 축복의 입술이 막히고, 조각난 마음으로 인해 믿음의 걸음이 멈춰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도구화 되고 하나님의 자리를 수많은 현대 문명들이 대체해 버리는 시대속에서 관계속에 담긴 진실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깨닫고, 선함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상품과 도구로 삼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라고 하신 감탄은 우리를 다시 깨우는 말씀입니다. 악함이 선함을 이길수 없고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방향을 잡고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선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빠르게 답을 얻는 시대에 기다림을 어려워하는 우리가 조급함을 이기는 길이 무엇입니까? 온전한 신뢰를 이루는 것입니다. 내 손에 있다고 생각하면 조급해 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심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을 뿐입니다. 말씀을 자라게 하여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구원의 신비이며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은 예일대학교 신학생들에게 4세기 사막 교부들의 영성을 가르쳤습니다. 그 강의를 엮은 책 ‘마음의 길’에서 그는 사막 교부 마카리우스에 관한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누가 교부 마카리우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장황한 말을 늘어놓을 필요가 전혀 없다. 손을 내밀고 주여 주께서 아시오니 주의 뜻대로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아뢰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도 갈등이 더 거세지거든 주여 도와주소서 라고 아뢰라.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분이 훤히 아시고 자비를 베푸신다.”

온전한 신뢰는 조급함의 유혹속에서도 하나님의 때가 이를때까지 흐트러지지 않는 끈질김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붙잡고 있던 문제의 자리에서 벗어나 기도의 자리에서 설때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2. 영적 나태함 (항상 깨어 있어라)

가라지는 하루아침에 자라지 않습니다. 원수가 가라지 씨를 심는 때는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입니다. 육신의 잠이 아닙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몇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결국에 잠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를 두드리기 때문입니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항상 깨어 있어라!’”(막 13:37)

영적으로 잠들면 우리는 내 마음에 자꾸 집중하게 됩니다. 내 감정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동역자들을 삶에서 밀어내게 됩니다. 삶이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여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작은 타협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그 틈을 통해 죄의 영향력이 자라게 됩니다. 무뎌진 마음, 미루어 둔 마음, 적당히 타협하는 삶, 외면하는 마음, 굳어진 마음, 가시돋힌 말은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주인이 여행을 떠난 사이 종들은 주인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갑자기 돌아오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미루어 두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삶에만 함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골로새서 4:2) 성경에서 깨어 있으라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엎어진 자리가 아니라 온전하게 채워 주시는 그 자리에서 말씀의 은혜를 누리기 바랍니다. 예배는 주를 믿는 자들의 뛰는 심장과 같고, 기도는 성도들의 호흡과 같습니다. 심장이 뛰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고, 호흡하지 않으면 심장은 멈춰버리게 됩니다. 성령의 기름을 채우기 바랍니다.

만약 인생의 마지막 시간이 주어져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 한통을 남겨야 한다면 그 글에 남긴 내용은 일상의 언어들과 다를 것입니다. 마지막을 아는 사람의 시간은 그렇게 달라집니다. 우리의 오늘은 단순히 내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힘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앎에 그치고 삶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미루어 두고 외면하고 있는 그 틈이 바로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자리입니다.

가라지가 다 뽑혀 불에 태워지듯, 세상의 마지막 날도 그러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심판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시고 새호흡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전하는 일에 온 마음을 쏟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가는 길에는 여전히 가라지가 밀 사이에 자라고 있어서 눈물이 있고, 고통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쉬운 길을 택하고 싶어합니다. 믿음도 적당히, 헌신도 적당히, 이만하면 된다고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구원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그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걸어온 인생의 길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금도 그 손길로 세상의 어둔 그늘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보내진 자리에서 그 나라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악의 공격을 받으시던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원수가 심어 놓은 죄를 뽑아내는 대신, 그 죄 값을 스스로 짊어지기 위해 십자가로 걸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회복은 값싸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라는 고난의 과정을 통과해서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기쁨은 세상의 어떤 일에도 갇히지 않고 제한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고 특별한 백성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의 권위 아래 머물러야 합니다. 어둔 밤에 원수가 뿌려 놓은 씨들이 자라서 선한 일을 하는 시간속에서도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 나라의 것들로 가득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가라지가 무성한 밭 한가운데 서 있을 때에도, 그 밭을 붙들고 계신 분이 하늘과 땅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07 12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7주

묵은 땅을 기경하라

Break Up Your Fallow Ground

마태복음 13:1~9, 18~23

1 그 날,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습니다. 2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가 앉으셨고, 사람들은 호숫가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가4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다. 그러자 새들이 날아와 씨를 모두 먹어 버렸다. 5 어떤 씨는 흙이 별로 없고, 돌이 많은 곳에 떨어졌다. 곧 싹이 났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6 해가 뜨자 시들어 버렸고, 뿌리가 없어서 곧 말라 버렸다. 7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졌다. 가시덤불이 자라서 그 씨를 자라지 못하게 하였다. 8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또 어떤 것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8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마음 속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 버린다. 이런 사람은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이다. 20 돌무더기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쁘게 얼른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21 그러나 뿌리가 없어 오래가지 못한다. 말씀 때문에 어려움이 생기고 박해를 당하면, 곧 넘어진다. 22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가로막아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쉬운성경)

1 Later that same day Jesus left the house and sat beside the lake. 2 A large crowd soon gathered around him, so he got into a boat. Then he sat there and taught as the people stood on the shore. 3 He told many stories in the form of parables, such as this one “Listen! A farmer went out to plant some seeds. 4 As he scattered them across his field, some seeds fell on a footpath, and the birds came and ate them. 5 Other seeds fell on shallow soil with underlying rock. The seeds sprouted quickly because the soil was shallow. 6 But the plants soon wilted under the hot sun, and since they didn’t have deep roots, they died. 7 Other seeds fell among thorns that grew up and choked out the tender plants. 8 Still other seeds fell on fertile soil, and they produced a crop that was thirty, sixty, and even a hundred times as much as had been planted! 9 Anyone with ears to hear should listen and understand.”

…18 “Now listen to the explanation of the parable about the farmer planting seeds: 19 The seed that fell on the footpath represents those who hear the message about the Kingdom and don’t understand it. Then the evil one comes and snatches away the seed that was planted in their hearts. 20 The seed on the rocky soil represents those who hear the message and immediately receive it with joy. 21 But since they don’t have deep roots, they don’t last long. They fall away as soon as they have problems or are persecuted for believing God’s word. 22 The seed that fell among the thorns represents those who hear God’s word, but all too quickly the message is crowded out by the worries of this life and the lure of wealth, so no fruit is produced. 23 The seed that fell on good soil represents those who truly hear and understand God’s word and produce a harvest of thirty, sixty, or even a hundred times as much as had been planted!”(New Living Translation)

마틴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 , 1899~ 1981)는 그의 책 “영적 침체”에서 그리스도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상태, 세상을 마냥 즐기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만족스럽지도 않은 상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상태를 “괴로운 상태”라 말합니다. 그는 이런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의 밭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치셨는데 그 첫번째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가장 먼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음의 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더 넓게는 이 비유가 예수님의 말씀 사역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전하실때 제자들은  왜 이 비유를 말씀 하시는지 질문 했습니다. 주님의 대답11절과 12절입니다. 10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 여쭈었다. “어찌하여 선생님께서는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11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나라에 관한 비밀을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12그 특권을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넉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같은 말씀 앞에서 어떤 사람의 마음은 열리고, 어떤 사람의 마음은 닫힙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8십자가에 관한 소식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물리치리라.”(고전 1:18-19) 세상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 깨닫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냥 십자가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감춰져 있는 것입니다.  

미국 성공회 사제 로버트 파라 카폰(Robert F. Capon:1925-2013)은『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원제: Kingdom, Grace, Judgment) 에서 세상에는 두 가지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즉각적인 힘입니다. 사람들은 이 힘에 본능적으로 이끌립니다. 그러나 또 다른 힘이 있는데 씨 뿌리는 비유가 전하고 있는 힘입니다. 약해 보이고 숨겨져 있지만, 끝내 이기는 힘입니다. 씨가 땅에 묻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세상은 이 방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어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말씀을 뿌리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알로 심겨 지셨고,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내어 맡기셨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자리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손을 붙드시고 그를 온 세계의 가장 뛰어난 이름으로 올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한결같지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외부의 침입으로 수시로 바뀝니다. 어떤 날엔 길가 밭이었다가, 어떤 날엔 자갈 밭이고, 어떤 날엔 가시덤불을 만납니다. 한번 경작했다고 해서 늘 좋은 땅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여호와를 찾을 때니‘(호10장 12절)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으십니까? 예수를 믿고 주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매일 누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마음의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의 것들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담긴 말씀의 씨를 먹어 버리는 새들이 온다는 것입니다. 복수형입니다. 씨를 뿌리는데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다그러자 새들이 날아와 씨를 모두 먹어 버렸다.” 말씀을 빼앗아 가는 새들은 악한 자를 상징합니다.  19절 보시기 바랍니다.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악한 자가 와서 마음 속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 버린다이런 사람은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이다.” 악한 자가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은 마음이 깨닫지 못한 채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마음의 밭을 부지런히 경작해야 합니다. 예배는 바로 그 자리, 우리의 굳은 마음과 묵은 땅을 하나님께서 갈아엎으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기쁨이 회복되고, 용서할 힘도 생깁니다. 그러나 이 갈아엎음은 나의 결심과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경작하려 할수록 오히려 환경 앞에 무너집니다. 마음 밭을 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감각한 길가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악한 자가 와서 마음 속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 버린다이런 사람은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이다. 헬라어로 길가는 파라 텐 호돈(παρὰ τὴν ὁδόν) 입니다. 수없이 밟고 지나간 길옆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길가 밭과 같은 마음은 말씀이 심겨질 틈이 없습니다. 말씀이 자라기도 전에 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는 있지만 내 삶의 깊은 곳을 뚫고 오지 못합니다. 말씀이 뿌리내릴 틈조차 없는 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조차 강제로 열어 보이시지 않지만, 우리의 온 마음과 삶을 내어드릴 때 말씀이 지닌 생명력이 길가 밭과 같은 마음도 말씀에 붙들린 삶이 되어지도록 바뀌는 것입니다.

뿌리 없는 자갈 밭20 돌무더기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기쁘게 얼른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21 그러나 뿌리가 없어 오래가지 못한다말씀 때문에 어려움이 생기고 박해를 당하면곧 넘어진다. 자갈 밭의 마음은 두려움 앞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줄 뿌리가 깊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쑥 불쑥 찾아오는 어려움과 불안 앞에서 믿음이 쉽게 흔들립니다. 자갈 밭 신앙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쁘게 얼른 받아들이지만, 뿌리 내릴 깊이가 없어 문제가 생기면 바로 흔들리고 넘어지는 신앙입니다. 단순히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삶을 붙들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누구보다 먼저 고백했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돌 같은 마음을 뚫고 들어와 그의 마음을 만지시고 사랑으로 회복시키시는 주님 앞에서 그는 새로워졌습니다. 오순절 성령께서 그의 마음 밭을 새롭게 하셨을 때, 베드로는 생명까지도 내어 드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실패와 불안 속에서도 찾아오셔서 가장 쉽게 흔들리던 그 자리가 가장 깊이 뿌리 내리는 자리로 바꿔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삶을 둘러싼 가시덤불 22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가로막아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한 가정의학과 의사가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원인 모를 두통과 이유 없는 통증으로 병원을 수시로 찾아오던 환자가 어느 순간부터 오지 않아 알고 보니 오랜 시간 해결되지 않았던 염려가 사라지고 나니까 오랫동안 괴롭히던 몸의 아픔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풀리지 않은 마음의 짐이 자신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내 삶을 둘러싼 가시덤불은 처음에는 보이지 않지만 점점 커지며 영향을 줍니다. 삶이 안정되어 부족함이 없다고 여겨질수록 마음 깊은 곳에 자라고 있는 가시덤불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나님 보다 물질을, 내 삶의 평안을, 성공을 더 생각하고 미래를 더 염려하여 의지한다면 내 삶에 가시덤불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재물이 죄가 아니라, 재물이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염려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 염려가 우리 마음을 차지하여 하나님의 것을 누리지 못하게 가로막는다면 그것이 바로 가시입니다. 물질 뿐 아니라 완벽주의, 인정받고 싶은 마음, 안정에 대한 집착도 말씀을 막는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가장 많이 생각하고 마음 두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삶을 둘러싼 가시를 발견하고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말씀보다 더 크게 자라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 안의 가시를 드러내십니다. 기도할 때 내 안에 자라고 있는 염려와 불안을 주님께 내어 놓게 하십니다.

좋은 땅 23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다이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어떤 사람은 백 배어떤 사람은 육십 배어떤 사람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삭개오의 삶을 보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남의 것을 토색하며 살았지만 주님을 만난 후에는 이제껏 토색했던 것을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회복은 삶에 맺힌 열매였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지금도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 안에서 일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으로 풀어가는 인생에 답이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내 방식과 뜻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마음은 지금 어떤 밭입니까? 이 낯선 땅에서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버거운 우리에게 마음 밭을 기경하는 것은 내 의지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내 힘으로 하려 할수록 더 지칠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을 기경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두 눈을 예수께로부터 떼지 맙시다. 그분은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요 완성자 이십니다예수께서는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고 십자가의 부끄러움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12:2)

우리의 무감각한 길가, 뿌리 없는 자갈밭, 상처와 염려로 찔린 가시덤불, 이 굳은 땅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신 값을 치르셨습니다. 삶의 현실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눈물짓게 할지라도, 그 눈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빚어가시는 자리가 됩니다. 이제 믿음의 땅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어드릴 때 하나님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0705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6주

내가 쌓은 두로의 성벽

My Tyre, My Wall

스가랴 9:9-12

9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10 “내가 에브라임에서 전차들을 없애겠고 예루살렘에서 말들을 없애겠다. 전쟁에서 쓰이는 활들은 부러질 것이다. 그 왕이 나라들에게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의 나라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11내 백성아, 내가 너희와 언약을 맺었으며 희생 제물의 피로 그 언약을 봉인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가운데 포로 된 사람을 물 없는 웅덩이에서 풀어 주겠다. 12희망을 가진 너희 포로들아, 너희의 요새로 돌아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이른다. 너희를 옛날보다 두 배로 회복시켜 주겠다. (쉬운 성경)

9 Rejoice, O people of Zion! Shout in triumph, O people of Jerusalem! Look, your king is coming to you.  He is righteous and victorious, yet he is humble, riding on a donkey riding on a donkey’s colt.
10 I will remove the battle chariots from Israel and the warhorses from Jerusalem. I will destroy all the weapons used in battle, and your king will bring peace to the nations. His realm will stretch from sea to sea and from the Euphrates River to the ends of the earth.
11 Because of the covenant I made with you, sealed with blood, I will free your prisoners from death in a waterless dungeon.
12 Come back to the place of safety, all you prisoners who still have hope! I promise this very day that I will repay two blessings for each of your troubles.(New Living Translation)

지난 두주 동안 예레미야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던 백성들에게 다가올 징계를 전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스가랴서는 예언의 배경이 다릅니다. 바벨론에서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징계를  받고 돌아온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스가랴서는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면서 이전에 화려했던 성전의 영광이 과연 회복될까? 그 옛날의 영광이, 정말 다시 우리에게 임할까?” 낙심을 마주한 백성들에게 전했던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오직 하나, 자기 백성과의 관계 회복에 있습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난 백성에게 징계를 내리신 것도, 포로 생활에 지쳐버린 백성에게 “내가 너희를 버려두지 않았다, 결코 잊지 않았다” 말씀하신 것도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זְכַרְיָה, 즈카르야)라는 이름 자체가 설교입니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하나님께서 잊으신 것 같은 깨어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스가랴서를 읽을 때마다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려 보기 바랍니다. 때때로 나의 생각과 욕심이 하나님 보다 앞서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서 선수들은 수없는 패배를 거칩니다. 더 강한 상대에게 실패를 반복하면서 경험과 실력을 쌓게 됩니다. 그런데 가장 위대한 실패를 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강해지기 위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 패배자의 자리에 내려가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실패하지 않으려고, 넘어지거나 뒤쳐지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왕은 반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 가장 패배한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세상은 골고다를 실패의 현장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가 결코 스스로 쌓을 수 없는 견고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오늘 본문은 시온 백성들에게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기뻐하고 즐거이 외치라고 시작합니다.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피난처가 되신 그분이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9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겸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עָנִי(아니)는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고난받는 자’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당시에 왕은 군용 말을 탔는데 예수께서는 전투 능력을 상징하는 군마(軍馬)가 아니라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시온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왕이 갑옷을 입고 강한 말을 타고 오실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의로우신 왕이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를 두려워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미 무너뜨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그분의 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입을 수 없는 값비싼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의를 “호심경”이라 부릅니다(엡 6:14). 호심경은 심장을 지키는 갑옷과 같습니다. 의의 갑옷은 전쟁터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화살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사단이 자주 사용하는 교만과 결핍이라는 화살로 부터 지켜 주는 것이 의의 호심경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수많은 화살이 성도의 심장을 향해 날아올 때, 의로우신 주님은 성도들이 즐거이 외칠 승리의 이유가 되어 주십니다.

세상은 그 왕을 배척했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배척의 뿌리는 영적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눈을 뜨지 못했고 자신의 죄를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열심과 의로움으로 우리를 형식에 가두거나 영적 교만으로 유혹하지만 의로우신 예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십니다.

둘째, 스스로 강해지려던 요새는 무너집니다.

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 4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 (스가랴 9:3-4)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기대하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즐거움과 기쁨도 영적 교만이 될수 있습니다. 교만은 세상의 즐거움이나 부요함을 통해서도 우리를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며 즐거워하고, 내가 쌓아올린 것들로 의롭게 여기는 것도 영적 교만입니다. 뿐만 아니라 상처로 인해 결핍에 갇혀 사람의 위로만 구하는 것도 사단이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소유로, 하나는 결핍으로 향하지만 결국은 같은 곳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설 수 있다는 자기기만도, 하나님이 계셔도 소용없다는 체념도 의로우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 교만을 보여주는 도시가 바로 두로입니다. 두로는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서 요새를 세웠습니다. 적들로 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 약 800미터 떨어진 섬에 성벽의 높이가 약 45m나 되는 견고한 성읍을 건설하였고 역사속에서 누구도 이 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치 철옹성 같은 요새였습니다. 게다가 온 바다의 상업을 도맡아 하던 나라이므로 해상에서 그들을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은을 티끌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아 올렸다고 표현합니다. 두로는 누구보다 현명했고 부유했고 강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두로에 대한 예언이 크게 현실성이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두로 왕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씀합니다. “2 사람아, 두로 왕에게 전하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마음에 교만한 생각을 품으며 ‘나는 신이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신의 보좌에 앉아 있다’라고 말한다. 네가 네 자신을 신처럼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겔 28:2) 두로의 진짜 문제는 강함이 아니었습니다. 강함을 쌓으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버린 것이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신의 악단’ 영화를 교우들과 함께 보았습니다. 당의 명령에 충성하는 군인들의 신념이 마치 두로가 쌓아 올린 높고 강했던 성벽 같아 보였습니다. 북한 보위부는 외화 지원금을 얻기 위해 지시를 내리고 승리 악단원들과 함께 부흥회를 준비하게 합니다. 이 단원들은 숨어서 주님을 믿는 악단이었습니다. 승리 악단원들은 찬양이 금지된 땅에서 진짜 찬양을 부르지만 보위부 군인들은 당의 명령에 따라 예배를 연극처럼 드립니다. 그들의 심장은 수령님을 향한 충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연기하듯 읊조리던 찬양과 읽어 내려가던 성경의 말씀이 보위부 군인들 내면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수령을 향하던 충성이 주님을 향한 예배가 됩니다. 신의 악단 한 인물의 고백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머리와 생각은 당을 따르는데, 마음과 영혼은 예수를 따르네요. 곧 처형 당할 목숨이니, 오늘 고백하는 거라우.” 예배의 회복은 이처럼 무릎 꿇는 대상을 바꾸어 줍니다.

라틴어 가운데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단어입니다. 성도에게 메멘토 모리는 단순히 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잊는 순간, 우리는 두로 왕을 닮아갑니다. 입술로는 찬양하고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나의 재물과 성공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과 겸손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겸손해지려는 바로 그 순간에도 교만은 속삭입니다. 찬양하는 자리에서도, 기도하는 자리에서도, 심지어 섬기는 자리에서도 “네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 네가 이만큼 했으면 하나님께서 네 편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라는 유혹입니다. 결국 교만은 인생과 영혼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독입니다. 실제로 역사속에서 두로는 동방을 정벌하던 알렉산더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7개월의 항전 끝에 마침내 함락되고 불에 탄 재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권력도, 재물도 언젠가는 다 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인생은 다릅니다. 시작이 좋은 인생은 많아도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인생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은 더 강해지고 더 높이 쌓으라고 요구하지만 성도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이 아무리 정교해도 하나님의 뜻보다 지혜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약함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때, 평화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10 “내가 에브라임에서 전차들을 없애겠고 예루살렘에서 말들을 없애겠다. 전쟁에서 쓰이는 활들은 부러질 것이다. 그 왕이 나라들에게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의 나라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요새로 돌아올 때 참된 쉼을 얻습니다

11 내 백성아, 내가 너희와 언약을 맺었으며 희생 제물의 피로 그 언약을 봉인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가운데 포로 된 사람을 물 없는 웅덩이에서 풀어 주겠다.

믿음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실패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서 행하신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진짜 삶의 왕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심으로 죄와 사망의 자리를 생명과 화목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성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두려워 말고 내가 찢긴 살과 흘린 피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피의 언약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주님의 새 언약입니다. 이것은 오래전 선지자들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맺고 결단했지만 그 언약을 잊을 때도 있었고,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12 희망을 가진 너희 포로들아, 너희의 요새로 돌아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이른다. 너희를 옛날보다 두 배로 회복시켜 주겠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주님께서 멍에를 먼저 지셨고, 멍에를 지고 하는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내 멍에가 무겁지 않고, 쉽고 가볍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이 이미 멍에를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왕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전쟁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끊어 버리셨습니다. 칼과 창이 아니라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 인간의 죄와 부정한 것들을 씻겨 내셨습니다. 불신앙으로 인한 절망과 미움, 시기 가운데 갇혀 살던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오신 예수를 인해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풍성한 삶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따라 하루하루 순종의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 예배의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으로 자유를 누리며 기쁨을 회복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내 삶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더 간절히 원할때가 많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의 자리에 나를 앉혀 놓았습니다. 지금도 예배할 수 없는 곳에서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들의 삶이 우리와 다른 삶일까요? 우리는 자유 안에서 일상에 묻혀 식어진 마음을 발견하며 우리에게 있는 그 간절함이 내 삶의 문제에만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두로가 스스로 쌓아올린 요새도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뒤에 감추어진 결핍과 상처와 불안, 내 힘으로 애쓰는 감정들, 내 인생을 내 힘으로 붙들려고 하는 교만은 내 안에 높게 쌓아 올린 벽입니다. 우리는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서 나만 아는 두로의 성벽을 쌓았지만, 그분은 무너짐의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이 벽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질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예배의 회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겸손의 왕은 우리를 회복시키러 오셨습니다. 형식이 아니라 기쁨으로, 은혜로 나아오는 예배자로 우리를 세우십니다. 우리를 은혜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찬양하기 원합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실망한 이 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찬송가 272)

0628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5주

하나님의 본심

The Heart of God

예레미야 28:5-9

지난 주 우리는 예레미야 20장에서 뼛속에서 타오르는 말씀의 불을 함께 보았습니다. ‘여호와를 잊어 버리겠다.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 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씀을 들고 백성에게 나아갔지만 돌아온 것은 조롱과 멸시였습니다. 침묵하려 해도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더욱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어느 쪽도 자신의 힘으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가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심어 두신 말씀의 불이 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예레미야를 붙드시고, 어떤  환경에도 굴복하지 않도록 그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두 선지자의 대립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냐와 예레미야입니다. 성경은 시드기야가 유다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한지 사년째 되는 해 다섯째 달에 일어난 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두 선지자의 예언의 대립이 첨예한 관심사였고,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두 선지자의 시작은 똑같았습니다. 하나냐 선지자는 예언을 시작하기 전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시작했고,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만군의 여호와,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라고 예언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언의 내용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나냐는 2년 뒤에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의 왕이 유다백성에게 한 멍에를 꺾어 버린다고 예언을 해서 평안을 빌어 주었고, 예레미야는 모든 나라의 목에 쇠 멍에를 씌울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고 그의 종이 되게 할 것이다. 라고 심판을 전했습니다. 예언의 내용만 놓고 보면, 하나냐는 듣기 좋은 말을 했고, 예레미야는 들어야 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듣기 좋은 편으로 몰렸습니다.

구약신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 1901-1971)는 하나냐의 예언을 도덕적 타락의 문제라기보다 시온신학을 절대화한 것으로 봅니다. 당시 하나냐는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지 않을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던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구약시대 성전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었고, 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했습니다. 하나냐가 선지자의 자리에서 쉽게 드러날 거짓을 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확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하나냐 자신의 예언이 거짓이라면, 굳이 2년이라는 시간을 명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2년 뒤면 자신의 예언이 거짓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도 구체적이고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같은 현실과 같은 고통속에서 두 갈래 길에 서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해 더 깊이 나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떠나 멀어지는 길입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때 우리는 내안의 나를 지키려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 보호를 위한 기도만 드리게 됩니다. 살아냄의 자리에서 오는 절박함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 가운데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것은 나의 확신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성취됨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휘장을 찢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시간을 열어 주셨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우리는 예수께서 흘리신 보혈로 새성전과 새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레미야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노래하면서 자신들에게 평안을 주는 말씀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삶이 평안하기를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내게 좋은 것만을 적용할때에 말씀이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절대적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삶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과 다를지라도 고통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의 길을 따라 걷는 자리에서 은혜를 잃어버리고 판단자의 자리에서 서는 순간 인간은 위선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개인의 신앙도 그렇고 신학도 그렇습니다. 내 안의 확신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다보면 정작 살아가야 믿음의 방향을 잃어버릴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도 특별하게 일하시는 완전하심을 믿으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모습을 영적 교만으로 책망하셨습니다. 영적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형식은 남아 있지만 생명력을 잃게 합니다. 사사시대도 그랬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각 사람은 자기 확신과 신념 속에서 살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서 있는가입니다.

예언의 목적

요나는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니느웨를 향해 선포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욘 3:4) 이것은 요나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거짓 선지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은 언제나 회개를 향한 부르심을 그 안에 품고 있습니다. 니느웨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예언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예언의 목적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요나의 마음 안에 있었습니다. 그의 발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을 때, 요나는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자신의 기대를 벗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동안에도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대신 자신을 중심에 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심판 자체가 아니라 회개와 회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심을 품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6 예언자 예레미야가 말하였다. “아멘! 여호와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소. 당신이 예언한 말을 여호와께서 이루어 주시면 정말 좋겠소.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안에 있던 모든 물건들을 바빌론에서 이 곳으로 가져오시고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도 다시 이 곳으로 데려오시면 좋겠소.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예언이 틀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본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 지라도 참된 선지자는 고통 받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심판 보다 더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아멘,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소’ 라고 했던 말 안에는 하나님의 본심이 담겨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에는 심판을 넘어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본심이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열했던 원인은 은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영적 우월감과 지식, 방언과 예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풍성함이 오히려 교회를 분열하게 했습니다. 아볼로, 게바, 바울파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 파로 나누어 지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사라진 자리에 비교와 자기자랑과 교만이 들어섭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그 무너진 교회 한가운데 서서 선언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것은 단순한 권면이 아닙니다. 흩어진 교회를 다시 세우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고통을 은혜로 회복시켜 주시고, 악함을 보혈로 씻겨 주시는 능력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참된 길로 나아가게 되고, 교회답게 섬기며 일하게 합니다.

믿음의 길을 내 힘으로만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처가 깊어질수록 내뜻과 다른 이들 앞에서 마음에 불편함이 찾아옵니다. 자기목숨을 버리는 것이 우리의 용기와 본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를 버려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주님이 십자가에서 지셨습니다. 십자가 아래 있는 성도는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고 주안에서 자랑할 뿐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값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지면 나의 낮아짐도 나의 부요함도 내 공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풍진 세상에서 눈물 나는 그 자리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하나님을 앞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믿음 생활은 없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냐처럼 되어 가는가? 하나냐가 예언했던 좋은 말만을 더 듣고 싶어지는가? 삶의 방향을 세상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목자 되신 주님을 따라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비유하셨습니다. 이리떼가 올때 삯군 목자는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우리는 쉽게 비겁하다. 거짓되다라고 정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나의 자녀에게 이리떼들이 헤치려 온다면, 너는 그 자리에서 네 목숨을 바쳐야 한다.라고 말할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 자녀가 이리떼를 피해 맡긴 역할을 못했다고 해서 ‘너는 악하고 거짓되구나. 너는 삯군이다’라고 정죄할 부모가 있겠습니까? 이리떼로 부터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갚을 수 없는 은혜는 어떤 합리적인 설명으로 온전히 설명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플 때, 내가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을 부모라면 압니다. 자녀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끝까지 중보자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양들을 살려내기 위해 모든 위협과 위험을 온 몸으로 막아 내셨습니다. 그 사랑과 믿음의 자리에서 죽음은 더 이상 최종 권세가 아니었고, 오히려 생명이 드러나는 자리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안에 숨겨진 괜찮은 척, 강한 척, 믿는 척했던 모습을 벗겨내고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서야 합니다. 참된 변화에 대한 갈망은 단순히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인간적인 소망이 아닙니다. 때로는 멍에를 지는 것이 고통스럽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대와 다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1900년대 초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 즐겨 불렀던 희망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같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이후 한국 교회에서 새로운 가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우리 할 일이 무엇이냐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형제여 서로 사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자 사랑의 주님 계명 지켜 힘써서 사랑하자. ‘나의 희망’을 묻던 노래가 ‘우리의 사명’을 묻는 찬양으로 바뀐 것입니다.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절망 속에서도 사명을 발견하게 했습니다. 너의 꿈이 무엇이냐 묻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성도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묻고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맡겨 주신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속에서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심판의 경고 앞에서는 겸손히 회개하고, 약속의 말씀 앞에서는 흔들림 없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시선을 돌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믿음의 경주자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