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7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2주 

호세아 6:1-6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What Shall I Do with You?

1“어서 주께로 다시 돌아가자. 그 분은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우리를 싸매 주시고 그 분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2이틀 만에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를 주의 곁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 3우리가 주님을 알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 애쓰자. 주님은 동터오는 새벽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단비처럼 땅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처럼 그렇게 오시리라.”  4“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에 대한 너의 충정은 아침나절의 안개만 같구나. 너희의 충정이 아침 일찍 사라지는 이슬만 같구나. 5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시켜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를 해처럼 샅샅이 비추었다. 6왜냐하면 내가 반기는 것은 사랑이지 희생제물이 아니며 예물을 불에 태워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라기 때문이다. (쉬운 성경)

1 “Come, let us return to the Lord. He has torn us to pieces  now he will heal us. He has injured us  now he will bandage our wounds. 2 In just a short time he will restore us,  so that we may live in his presence. 3 Oh, that we might know the Lord!  Let us press on to know him. He will respond to us as surely as the arrival of dawn or the coming of rains in early spring.” 4 “O Israel and Judah, what should I do with you?” asks the Lord. “For your love vanishes like the morning mist   and disappears like dew in the sunlight. 5 I sent my prophets to cut you to pieces   to slaughter you with my words,  with judgments as inescapable as light. 6 I want you to show love,  not offer sacrifices. I want you to know me more than I want burnt offerings.(NEW LIVING TRANSLATION)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 코아부 수련회를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호세아 10장 말씀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부들이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했습니다. 수련회를 준비하는 섬김이들은 과연 잘 진행될 것인지 염려도 했을것이고, 빽빽한 일정을 비우고 예배의 자리로 찾아오는 것 자체가 이미 영적 싸움의 시간을 뚫고 왔을 것입니다. 희망과 믿음의 세대를 이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준비한 모든 순서를 통해 보았습니다.

16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마크 트웨인(Mark Twain:1835-1920)의 ‘왕자와 거지’란 소설이 있습니다. 거지의 아들과 왕궁에서 태어난 아들이 어느날 친해지고 두 소년은 재미삼아서 옷을 바꿔입게 됩니다. 이후 두 아이는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어린시절 학대받던 톰은 신분이 변화된 왕자로 살게 되고, 에드워드 왕자는 거지로 취급되면서 거지소굴을 돌아다니며 엄청난 고생을 합니다. 소설의 결말에서 진짜 왕이 맞는지 테스트를 하여 가까스로 왕의 자리로 복귀하는 내용으로 흥미를 유발하는 이야기입니다.

신분의 변화는 삶에 분명한 차이를 가져다 줍니다. 겉 모습이 아닌 본질적인 변화의 사건은 우리의 삶속에서 놀라운 변화를 갖고 오게 됩니다. 성경은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왕이신 분이 스스로 수치의 옷을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옷을 바꿔 입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바꾸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호세아서는 스스로 수치의 옷을 입고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가리킵니다. 도저히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끝까지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존귀한 자녀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의 품에 있던 북이스라엘을 향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정치적으로 불안했고, 영적으로는 암흑에 가까운 시대였습니다. 호세아의 외침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에 온 마음을 쏟으십시오(1, 2)

1“어서 주께로 다시 돌아가자. 그 분은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우리를 싸매 주시고 그 분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2이틀 만에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를 주의 곁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

어서 주께 돌아가자, 주님을 힘써 알자는 이 고백은 매주일 우리가 부르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 믿음의 노래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랑의 고백이며, 세상을 살며 상처와 실패로 인해 공허한 우리의 빈 마음에 끊임없이 메아리 쳐야할 희망의 노래입니다. 호세아서를 묵상하면 죄에 대한 심판과 회복이 동일한 손에서 나오기에 긴장감이 조성되지만, 찢으신 분이 싸매시고, 상처를 내신 분이 그 손으로 아물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죄에 대한 심판의 끝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입니다. 원망과 서운함, 상처로 닫혀진 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빗껴간 삶의 목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우리의 얼굴을 향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얼굴을 드러내시고, 또 다시 용서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약속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틀 만에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를 주님 곁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라고 약속합니다. 우리는 이 약속이 이미 이뤄진 시대를 살아갑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삶의 방향입니다. 이 약속 안에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님께 돌아가면,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주의 곁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껏 알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고 스스로를 ‘제때 나지 못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늦게 부르심을 받은 자, 자격 없는 자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환난을 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핍박 속에서도, 자신이 전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자신은 깨어질 질그릇과 같지만 그 안에 예수께서 계시니, 사방이 막힌 것 같아도 괴롭지 않고 당혹스러운 일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몸에 예수의 죽으심의 흔적을 지닐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 가운데 살아 있는 자신의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형식이 아니라 믿음의 본질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제사보다 낫습니다(3, 6)

3우리가 주님을 알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 애쓰자. 주님은 동터오는 새벽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단비처럼 땅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처럼 그렇게 오시리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대답하시다 6왜냐하면 내가 반기는 것은 사랑이지 희생제물이 아니며 예물을 불에 태워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교회는 형식만 남아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 주목하고 지난 날의 영광에만 머무는 교회는 역사 속에서 교회 건물이 결국 박물관이 되거나 술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초라해 보여도 은혜가 부어진 교회에는 부흥과 영광이 임재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재한 교회는 겉으로 초라해 보여도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그 어떤 상처난 마음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의 상처를 깨끗하고 온전하게 씻겨 주실 분은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고, 무감각해진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힘써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자녀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쉬울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는 자기 아들을 죽게 한 대가를 치르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히브리어로 다아트 엘로힘(דַּעַת אֱלֹהִים)입니다. 그 동사 어근은 야다(יָדַע)인데, 창세기 4장에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라고 쓸 때 바로 이 단어를 씁니다. 부부가 몸과 영혼을 나누는 친밀한 앎입니다. 깊은 친분을 맺는 그 친밀함에는 틈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 제품 매뉴얼을 읽는 수준의 차원이 아니라 몸을 맞대고 사는 부부처럼 그렇게 나를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가 맡기신 일을 감당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집니다. 맡겨진 일을 내가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거닐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그 자세와 마음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토저 목사(Aiden Wilson Tozer, 1897 ~ 1963) 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보통 사람들의 시대이다.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평범한 수준으로 끌어 내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를 다시 깨닫는 것이다. 성실한 말씀 전파와 기도를 회복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라” 경건하고 거룩한 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멈추지 마십시오. 믿음의 경주에서 벗어날때 우리의 삶은 좋지 않은 것들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따라가야 할 방향은 대세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충정은 아침안개 같지만,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십니다(4–5)

4“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에 대한 너의 충정은 아침나절의 안개만 같구나. 너희의 충정이 아침 일찍 사라지는 이슬만 같구나. 5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시켜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를 해처럼 샅샅이 비추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아, 부르시며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두번이나 물으십니다. 이 물음은 심판의 선언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헤세드 사랑은 동이 뜨는 새벽빛과 땅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처럼 일상속에서 변함없이 확실하게 주시는 선물이지만 우리는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에브라임처럼 주어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닌데 평생 내 것인 양 살아갑니다. 우리의 충심은 아침 안개 같고 금방 사라지는 이슬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흔들립니다.

새벽에 일어나 예배를 준비할때면 생각나는 추억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아버지께서는 방학이면 새벽에 저를 깨우셨습니다.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간, 새벽시장으로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세상이 고요한 그 시간에 이미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방학때 늦잠도 자고 싶고, 풀어 지고 싶은데 아버지는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한번은 용돈을 바로 주시지 않고 포도 열박스를 사주시면서 너가 한번 팔아 보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린 마음에 불편했고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잘 사주겠지 하고 찾아갔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포도 박스를 사준 것은 약국에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이었어요. 많이 가져서 헌신하고 베풀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마음이 부요한 사람이 사랑을 나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사랑의 방법이셨습니다. 세상을 알고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하시는 훈련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에브라임에게 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예언자들을 시켜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를 해처럼 샅샅이 비추었다.’ 빛이 샅샅이 비춘다는 것은 숨길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 그들을 찢고 상하게 하셨습니까? 드러내는 것이 아프고, 찢고 터뜨리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낫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חֶסֶד) 앞에서 서면 우리의 죄가 죄 그대로 보이고,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깨우심에 긴장감이 있지만 결국엔 그 사랑이 우리를 살리는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찢겨진 자리가 치유의 자리가 된 곳이 예수께서 우릴 위해 달리신 십자가입니다. 고통의 자리로 내려오신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우릴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져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릴 회복시키십니다. 사명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높이 계신 하나님께로 끌어 올리는 힘이 있습니다. 포기 하지 않고 내가 너를 살리겠다는 하나님의 심장소리를 듣는 순간, 죽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그 어떤 계획도 하나님 보다 앞설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언가를 형식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때, 우리는 비로소 보게 됩니다. 식어진 마음 안에서도 여전히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깨달을 때, 온 마음과 삶을 다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 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지극히 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목적은 풍요와 소유이지만 다시 태어난 성도들의 삶의 목적은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그 명령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있습니다. 세상의 풍요는 우리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라는 물음 앞에 서기 바랍니다. 자신이 찢기신 채 싸매주시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그 주님만이 우리의 목적지입니다.

0531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1주

오늘, 이 말씀이 이루어졌다

Today, This Word Is Fulfilled

누가복음 4장 16-21절

16 예수께서는 자신이 자라나신 동네인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셨습니다. 17 그때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펴서 다음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습니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나를 보내사 포로된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며, 억눌린 사람을 풀어주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예수께로 쏠렸습니다. 21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쉬운 성경)

16 When he came to the village of Nazareth, his boyhood home, he went as usual to the synagogue on the Sabbath and stood up to read the Scriptures. 17 The scroll of Isaiah the prophet was handed to him. He unrolled the scroll and found the place where this was written 18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for he has anointed me to bring Good New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that captives will be released, that the blind will see, that the oppressed will be set free, 19     and that the time of the Lord’s favor has come.  20 He rolled up the scroll, handed it back to the attendant, and sat down. All eyes in the synagogue looked at him intently. 21 Then he began to speak to them. “The Scripture you’ve just heard has been fulfilled this very day!”(New Living Translation)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공허하고 외로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름 모를 두려움과 공허함은 하나님을 찾으라는 신호입니다. 감리교회 설립자인 존 웨슬리는 어려서 부터 경건을 알았고 말씀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복음이 그의 삶의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35살때 쓴 일기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웨슬리는 마지못해 올더스게이트의 한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이루시는 변화를 서술하는 단락에서,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분께서 진정 나의 죄를, 나의 죄까지도 가져가셨다는 사실과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게 주어졌다.”

웨슬리는 오랜 시간 말씀과 기도로 경건훈련을 하며 신앙생활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그날 주어진 말씀이 웨슬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성경 안에 성취된 것이 말씀을 통해 믿어지고 깨달아진 것입니다. 웨슬리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은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안에 쌓여 있던 말씀이 살아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운동선수가 결정적인 순간 골을 넣는 장면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훈련장에서 흘린 땀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르실때 준비시키고 훈련하신 후에 사명을 부어주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고향땅 나사렛 유대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쉬운 성경) 예수님께서는 은혜의 때가 왔음을 선포하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이루어졌다.’ 는 페플레로타이: πεπλήρωται는 ‘가득차게 하다. 성취하다.’ 라는 뜻을 지닌 플레로오: πληρόω의 단어의 수동태 직설법으로 그것이 ‘성취되었다. 충만하게 되었다. 가득차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약속의 말씀이 이뤄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61장을 읽으시며 700년전 이사야를 통해 주어졌던 약속이 이제 내게 이뤄졌다, 자신을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는 것은 부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 안에는 ‘부어주다, 임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크리스토스, Χριστός 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이 기름부음은 삼중직을 맡은 자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보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메시아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중보자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으로 받아 내셨습니다. 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세상이 줄수 없는 사랑과 기쁨이 주를 믿는 자들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 안에 성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부여 받은 사명을 말하고 있는데,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포로된 사람에게 자유를,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다시 보도록, 억눌린 사람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가난한 자리가 복음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가난한 마음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결핍, 사랑의 목마름, 끝없는 경쟁 속에서 느끼는 허무함과 공허함, 두려움이 나를 잡고 채워도 만족하지 못하는 자리가 바로 가난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해지면 그 자리에서 나의 시선이 바뀝니다. 상처와 삶의 짐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마음 무겁게 하지만 사명자는 오래참음과 눈물의 시간을 요구하는 그 자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시는 자리, 품고 기도해야 할 이유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걸음입니다. 복음은 아무것도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사명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다면 내 자아를 포기하고 내려놓는 일은 어렵습니다. 사명이 분명한 사람은 흔들릴 수는 있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흩어졌습니다. 함께 말씀을 듣고 살아냈어도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죽음이 두려워 문을 잠갔던 제자들이 거리로 나아갔습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이미 이기신 주님과 함께 나아간 것입니다. 죄에 포로된 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주저합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담대히 나아갑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장 15-16절) 하나님께 마음이 열린 사람들에게 부요함을 주시고 그 부요함으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때때로 사명이 오래참음과 눈물의 시간을 요구받게도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힘을 주시며 도와 주십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고 돌보고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계절들을 지나다 보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버티기 어려운 날들이 찾아옵니다. “하나님 더는 못하겠습니다.” “두렵습니다.” “너무 힘들어요.”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답을 주지 못합니다. 위로도 관심도 오히려 더 힘들고 불편해집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옵니다. 그토록 두려워 하던 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숨을 쉬게 합니다. 세상에 두었던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붙들 때 말씀 안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나를 오래 붙들고 있던 두려움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말씀을 신뢰하고, 말씀에 마음을 열며 기록된 말씀이 마음에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말씀이 발목에서 무릎으로, 허리에서 머리끝까지 채워질때 세상에 취해 가던 욕망이 힘을 잃고, 은혜의 물에 잠겨 주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꾸 내 힘으로 감당하려 합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버티는 것은 나 자신을 믿고 있는 것이기에 결국 소진되고 지쳐갑니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나를 보내사 포로된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며, 억눌린 사람을 풀어주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가난한 마음이 채워지면 묶인 것들이 끊어집니다.

포로 되고 눌린 자들에 대한 메시야의 선물은 묶여있는 것들에게 ‘자유함’을 주신 것입니다. 메시야가 주는 자유와 해방은 구약에서 희년과 관련이 됩니다. ‘주의 은혜의 해’는 구체적으로 ‘희년(year of jubilee)’을 기다리는 해방의 해를 뜻했습니다(레 25:8-55). 이 희년 제도는 매 50년마다 실시되었는데 그때는 땅의 경작이 중지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고향으로 귀환되며 노예들이 해방되었습니다. 빚을 탕감받는 것과 노예의 해방 차원만이 아니라 희년은 하나님께서 베푸실 구원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에 의해 터져 나오는 구원의 기쁨입니다.

우리를 포로로 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끊으려고 해도, 용서하려고 해도, 사랑하려고 해도 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자리에서 우리는 자주 멈추게 됩니다. 하늘에서 불을 끌어 내렸던 엘리야도 깊은 실의에 빠져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먹이시고 재우시며, 세미한 음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끊어낼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온 것입니다. 성결은 하나님께 끌리는 것이고, 세상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하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수록 매일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더 깊은 나의 죄성을 보게 됩니다. 주 앞에서 가까이 나아갈수록 하나님은 세상속에서 구별되게 하십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의 힘으로 안되는 문제를 만나기도 하고, 용서하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 일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포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포로 된 것들로부터 해방시킵니다. 말씀에 삶을 드릴때 내가 집착하고, 중독되었던 우상들이 힘을 잃어 가고, 근심이 변하여 주님의 말씀으로, 상처보다 진한 주님의 보혈이 삶을 채우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열심이 아닙니다. 그 열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의 씨름은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주를 의지함으로 다시 일어 서는 것입니다. 거룩한 여정을 걸을수록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복음과 사명을 나의 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내 힘을 붙들수록 오히려 더 지칩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우리는 날마다 죽음의 권세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나의 연약함을 마주할수록 변함없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봅니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말씀이 들립니다. 자기중심적 삶의 어둠이 걷히고 감춰진 하나님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인간의 완고한 마음을 두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거룩해 지도록, 날마다 새 힘을 부어주시고 거룩함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가난한 자가 부요해지고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할때 우리 안에 상처와 결핍이 회복됩니다. 내 뜻대로 살고 싶던 마음이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싶어집니다. 기도하고 싶어지고,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집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시고, 권세를 지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열어두신 은혜의 날은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성령님을 구하십시오. 1738년 웨슬리는 자신에게 대단한 일이 일어날거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말씀이 그의 심장을 뛰게 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감옥에서 사형 당하기 전 약혼자에게 시 한편을 써보냅니다. “지나간 일들이 우리 마음을 누르고 힘든 날들이 우리를 짓누르지만, 주님, 두렵고 지친 우리 영혼을 당신이 원하신 모습으로 구해 주소서. 두려움 없이, 사랑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신의 사랑, 그 능력에 안전하게 둘러싸여 우리는 두려움 없이 내일을 기다립니다. 하나님 당신은 저녁에도, 아침에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죽음 앞에서도 말씀이 사람을 붙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말씀이 살아있는 자리입니다. 현실의 문제는 여전히 가득하고 마음의 결핍도 남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의 열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는가? 내 안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충만하게 채워지는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부요하게 하고 있는가? 하나님께 가난한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그 자리가 복음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머리로 알던 말씀이 가슴으로 내려와 내 죄를 대신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리, 가난한 자가 부요하게 되고,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으며, 눈먼 자가 다시 보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0524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성령이 임하면 예배는 계속됩니다

The Spirit Comes, the Worship Continues

요한복음 14:16-17, 26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대신하여 너희를 도와주실 성령을 보내실 것이다. 그러면 그분이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이제 내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돕는 분’이신 성령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줄 것이고, 또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너희가 생각해낼 수 있도록 그가 너희에게 또다시 일깨워 줄 것이다.”(쉬운성경)

16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 who will never leave you. 17 He is the Holy Spirit, who leads into all truth. The world cannot receive him, because it isn’t looking for him and doesn’t recognize him. But you know him, because he lives with you now and later will be in you. 26 But when the Father sends the Advocate as my representative that is, the Holy Spirit. he will teach you everything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told you.(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교회력으로 오늘부터 26주간, 우리는 성령강림절기를 보내게 됩니다. 한해의 절반이 넘은 시간을 성령의 계절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6주가 지나갈 때, 각자의 삶 속에서 성령의 세밀한 음성을 들었던 순간들이 쌓여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장 어둡고 두려운 순간, 제자들 곁을 떠나야 했던 그 자리에서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대신하여 너희를 도와주실 성령을 보내실 것이다. 그러면 그분이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다.”(요한복음 14장 16절, 쉬운성경) 보시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에게 성령을 요청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선물입니다.

1년에 한번 야외에 나와 예배하고 설교를 하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쉼을 얻는 날이 되지만 제게는 다른 주일예배 외에 또 다른 긴장감이 있습니다. 날씨입니다. 너무 더워도, 비가 와도, 내 힘으로 할수 없는 일들 앞에서 찾아오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비가 오는 관계로 예배하는 장소가 변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여러 부서가 말없이 움직이며 서로 힘을 모아 움직이는 것을 보며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운행하심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이루는 교회는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의 그 어떤 좋은 생각이 성령의 이끄심보다 앞설수 없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보다 앞세우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주인삼고 있는 우상들이 될수  있습니다.우리의 계획이 흔들려도, 성령께서는 이미 이 자리에 와 계셨습니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성도를 돕는 인격체입니다.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개역개정은 ‘도와주실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로 번역했습니다. Niv 성경은 Counselor, KJB은 Comforter로 번역했습니다. 원어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인데, παρά는 곁에+κλητός는 부르심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령강림절 26주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와 함께 걷는 훈련의 계절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위로해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말씀이 든든하지 않습니까?

자녀들의 졸업식에 참석한 청년들의 부모님을 만나보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자리에서도 자녀를 위해 무릎 꿇어 기도하며, 믿음으로 그 자리를 지켜오신 분들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 기도와 헌신이 자녀에게는 곁에 있는 든든함이 되어, 타국에서도 담대하게 공부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서 “할 수 있다”고 격려하시고, 쓰러진 자리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이것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입니다. 나를 위해 중보하시는 분이 곁에 계시니, 우리는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 곁에서 돕고, 위로하고,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주시고 말씀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외로운 기도의 자리에서 조차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으시며, 보이지 않는 침묵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연구의 긴 시간 속에서, 반복된 연습의 자리, 경쟁해야 하는 자리, 외로운 밤이 깊어 잠 못 이루는 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너무 멀리 하나님을 떠난것 같은 영적 어둠의 터널을 지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배우게 하시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특별한 존재 방식입니다. 말씀 한 구절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슴이 뜨거워질 때에 그 자리에 나와 함께 계시고,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을 품게 되는 그 때에도 함께 계십니다. 진리 가운데 거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룩한 길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요한1서 2장 1절 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동일하게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시는 분임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우리 안에서 계속하시며 우리를 거룩한 길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죄의 유혹에 이끌리지만 성령은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합니다. 성령을 따라 힘써서 살아가십시오.

물질이 주인되어 살아가는 시대속에서 우리의 선택이 어떠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마땅히 해야할 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기에 주가 걸어가신 길을 힘써서 걷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을 내 능력의 도구로만 이해한다면 내뜻대로 안될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 둔 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자녀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항상 주의 뜻을 전하도록 함께 거하시며,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게 도우십니다. 비록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없지만 성령께서 계시기에 선한 길로 걸어가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선택을 좀더 주의 깊게 관찰해 보시고 마음과 생각으로도 성령님의 가르침을 더 깊이 알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셔서 우리 안에 내가 주인되어 내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들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아가시며, 그분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십시요. 성령께서 우리를 가장 안전한 길로 이끌고 계심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룩한 길로 이끄실 뿐 아니라,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말씀 안에서 분별하게 하십니다.

거룩한 영이 있다면 악한 영의 존재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영역, 도달하지 못한 영역들이 많습니다. 영적 세계는 단순히 인간 이성만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성령께서 말씀 가운데 분별하게 하십니다. 거룩한 영과 악한 영은 실제합니다.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영적인 세계를 믿고 인정할때 우리는 믿음생활하며 나태해 질수 없고, 내 힘을 의지하며 안심해서도 안됩니다. ‘근신하라’는 내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며, ‘깨어라’는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왜 깨어지고, 인간이 왜 육체적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지 그 근원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창조의 기원을 창세기 2장 안에 압축해서 소개하고 3장에서 죄의 기원에 대해서 분명히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것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이 아닙니다.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던 그 방향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줄 때, 무엇을 줄지 선택권은 주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받는 사람의 자격이 선물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성령은 바로 그런 선물입니다.  

좋은 예배로 끝내고 돌아가는 삶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내는 삶, 성령강림절 26는 바로 그 훈련의 시간입니다. 주의 일을 하고 있는데 나의 의무가 되고 나의 일이 되어서 기쁨이 사라진 분이 계십니까? 예배하고 있지만 익숙한 마음에 머물러 성령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포기하고 싶고 편하게 살고 싶어 성령님과 함께 하는 자리를 외면하고 홀로 서는 자리에 서있는 분은 없으십니까? 아무리 선한 열심과 헌신도 내 힘으로 버티면 결국 멈추게 됩니다. 불평이 올라오고, 비난하게 되고, 기쁨이 사라지는것은 우리가 연결되어야 할 뿌리가 끊어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이심을 믿으십니까? 성령은 우리 안에서 진짜와 거짓을 분별하게 하십니다.

불평하게 하고 비난하게 하고 포기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마음들을 진리의 영이 분별하여 알게 하실 것입니다. 성도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혼합된 진리를 걸러낼 수 있습니다. 악한 영이 이끄는 불의한 생각에 이끌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그 사역에 동참해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때론 불 가운데를 걸어가야 할 때도 있고 폭풍 가운데에서 무너지는 날도 있습니다. 온몸을 덮쳐오는 폭풍 속에서도 잠잠히 주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불 가운데를 걸어가야 할 때도, 폭풍 앞에서 꺾이는 날도, 그 자리에서 주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삶입니다.

이제 분주했던 마음, 너무 많은 것을 붙들고 살아온 것들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의 가정도, 공동체도, 오늘의 이 예배도 우리의 열심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고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지금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식었던것을 뜨겁게 하시고 포기하고 싶었던 그 마음안에서 끝까지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님께서 살아있는 말씀을 선명하게 보게 하실것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서로를 기억하세요. 말하지 않지만 보이지 않지만 인생의 불 가운데에서도, 폭풍 가운데에서도,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도 예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완성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함께 아픈날도 마주하고 실망하는 날도 마주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배의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자리로 출발합니다. 다시 연구실로 , 다시 가정으로, 다시 외롭고 무거운 그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성령께서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성령강림절 26주 동안 기쁨이 멈추는 순간, 뿌리가 흔들리는 순간에서 도망가지 말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성령과 함께 이 자리를 버티시기 바랍니다. 그 이끄심 안에 머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대신하여 너희를 도와주실 성령을 보내실 것이다. 그러면 그분이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다. 내게 가장 두려웠던 그 자리에서, 가장 외로웠던 자리에서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예배는 어떤 환경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05 17 2026 주일 설교

부활절 제 7주

우리에게 남겨진 단어 “서로”

The Word Left to Us “One Another”

베드로전서 4장 7-11절

7모든 것의 끝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잘 다스려서 기도에 힘쓰십시오. 8무엇보다도 먼저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용서해 주기 때문입니다. 9불평하지 말고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10여러분은 하나님께 각기 다른 은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진 종들과 같습니다. 그러니 신실한 종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갖가지 은혜의 선물을 가지고 서로에게 봉사하십시오. 11설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받은 사람답게 일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하십시오. 영광과 권능이 영원토록 그분께 있습니다. 아멘. (쉬운 성경)

7 The end of the world is coming soon. Therefore, be earnest and disciplined in your prayers. 8 Most important of all, continue to show deep love for each other, for love covers a multitude of sins. 9 Cheerfully share your home with those who need a meal or a place to stay. 10 God has given each of you a gift from his great variety of spiritual gifts. Use them well to serve one another. 11 Do you have the gift of speaking? Then speak as though God himself were speaking through you. Do you have the gift of helping others? Do it with all the strength and energy that God supplies. Then everything you do will bring glory to God through Jesus Christ. All glory and power to him forever and ever! Amen.(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본문은 종말로 시작해서 영광으로 마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과 장차 받게 될 영광은 뗄수가 없는 진리입니다. ‘모든 것의 끝이 가까웠다’는 말씀은 우리가 그 시간 안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 편지는 현실의 불안과 삶의 위기 가운데 있던 디아스포라 나그네들에게 보내졌습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는 소망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편지를 손에 든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반복해서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서로’라는 단어입니다.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십시오. 불평하지 말고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은혜의 선물을 가지고 서로에게 봉사하십시오. ‘ 예수님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요 13:34) 이 말씀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서로 앞장서서 남을 존경하십시오. 서로 합심하십시오.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십시오.’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서로 기다리십시오. 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하십시오.’ 이 밖에도 성경 안에 공동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서로’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서로’ 라는 말 앞에  높은 벽 이 서 있습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도, 사람과 사람 사이도 점점 양극단으로 갈라지는 시대입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진리의 말씀도 낯설게 들리는 시대입니다.

1. 우리는 지금 깨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7모든 것의 끝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잘 다스려서 기도에 힘쓰십시오

베드로는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로 번역된 ‘소프로네사테: σωφρονήσατε’는 ‘자기 마음을 통제하다. 건전한 마음을 갖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사람은 기도의 자리가 부족하면 쉽게 결정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의 자리는 내가 해결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해결하신 그 자리에 내가 서는 것입니다. 해결받은 자라는 것을 기억할때 생각이 절제되고, 말씀 앞에 마음이 고요해 집니다. “잘 다스려서” 라는 ‘넵사테: νήψατε’는 맑은 정신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지나친 사치와 소비로부터 우리를 돌이키게 합니다. 맑은 정신으로 삶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NLT성경은 ‘세상의 끝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기도에 있어서 진지하고 절제하라: Therefore, be earnest and disciplined in your prayers’고 번역한 것입니다. 이 힘이 기도의 자리에서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내 뜻과 맞지 않으면 교만한 마음, 섭섭한 마음, 비뚤어진 생각들이 마음 안에 찾아오고, 내 뜻이 옳다는 생각이 마음을 흔듭니다. 누군가를 향한 원망의 마음이 찾아올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 한계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말씀 없는 기도는 자기 확신으로  향합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종말을 날짜로 계산했던 이들이 무너진 것은, 그 뜨거움이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기도 후의 삶, 기도 후의 절제, 기도 후의 순종이 없었습니다. 진짜 기도는 내 열심이 아니라 내 이기적인 마음을 말씀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리가 익숙해 질때 우리의 마음은 말씀을 알지만 지켜낼 힘을 잃어버리고, 내뜻대로 살아내는 익숙함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을 밀어냅니다. 하나님보다 내 일상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가 신앙의 위기입니다.

우리의 본성 안에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삶이 힘든 날은, 그 갈망조차 사라집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가 나오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는 날이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살아 계셔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돕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 7:25)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다한 죄를 덮으시고, 죄의 지배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며, 지금도 영광의 자리에 이르도록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는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위해 지금도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씻으시기 위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걷는다는 것은 마치 외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하며 흔들리기에,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금방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길에서 넘어진다 해도, 주님의 손이 언제나 우리를 붙드시고 건져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 기도하지 않고도 이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하시던 주님 곁에서 졸고 있던 제자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겟세마네에서 깨어 있지 못했던 베드로가, 은혜의 선물을 받은 후에 두려워하는 나그네들에게 기도에 힘쓰라고 위로의 편지한 것입니다.

2. 우리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8무엇보다도 먼저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용서해 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라는 단어를 여러 성경 번역을 보았습니다. 개역개정은 ‘뜨겁게’로 마음의 온도를 떨어뜨리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NIV ‘Deeply, 겉치레의 사랑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KJV는 fervent 열렬하게 라고 번역했습니다. 원어 에크테데는 ἐκτενή 는 ek (밖으로) + teinō (당기다, 뻗다) 의 합성어로 활시위를 끝까지 잡아당겨 팽팽해진 상태입니다. 느슨한 활에서는 화살이 나가지 않습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엔진 안에서 압축이 일어나야 폭발이 되고, 폭발이 되어야 바퀴가 굴러갑니다. 신앙생활에도 영적인 긴장이 없으면 동력도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삶의 현실이 우리를 압박하고 연약해 질때, 그 압박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끝까지 붙들게 하는 힘이 됩니다.

믿음의 행군에서 어려운 것은 큰것이 아닙니다. 작은 모래 알갱이가 신발에 들어와도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작은 모래알 하나가 신발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할수록 우리는 대범해지지 못하고 소심해 지는 것입니다. 내가 던지는 작은 것이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랑을 진지하게 갈망할수록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더 진하게 깨닫게 됩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아버지의 마음이 끊임없이 깨달아질 때 삶속에서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율법이 성취되는 삶을 살게되고, 아파하는 이들에게서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오래전에 쓰던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오늘 본문 위에 20년 전의 설교노트가 적힌 포스트잇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근신하여 기도하라, 서로 사랑하라, 서로 원망없이 대하라, 선한 청지기가 되라” 그 포스트잇을 한참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20년 전 말씀을 들으며 적었던 메모를 다시 보며 그때 마음에 새겼던 말씀과 지금 제 삶의 모습 사이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하나님께서 다시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전해 주시던 목사님이 떠올랐습니다. 천국의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웃으며 고백하시던 목사님. 항상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신앙생활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던 분이셨습니다. 환경과 상황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마지막 때를 알고 천국의 소망을 기다리며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믿음으로 살아내시던 목회 현장에 후배들이 찾아올때마다 차비를 봉투에 담아 건네주시며 필요한 곳에 잘 쓰라고 흘려 보내라고 하셨던 사랑의 손길이 아직도 제 마음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고 있습니까?

오늘날은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지라’는 말보다 ‘서로가 ‘각자 개개인의 성숙과 자기계발을 위한 일에 삶의 중심을 더 두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은혜의 선물은 서로에게 흘려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가 흘려 보내는 일에 마음을 다할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더욱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9불평하지 말고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10여러분은 하나님께 각기 다른 은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진 종들과 같습니다. 그러니 신실한 종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갖가지 은혜의 선물을 가지고 서로에게 봉사하십시오. 11설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받은 사람답게 일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하십시오. 영광과 권능이 영원토록 그분께 있습니다. 아멘.

낯선 사람을 내 집으로 들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불편한 사람을 내 마음의 자리로 들이는 일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원망없이 불평하지 말고 대접하라고 말씀합니다. 흩어진 나그네들이 광야의 옛 백성처럼 원망하는 자리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이민자로, 유학생으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유난히 불안과 두려움과 싸워야 하는 날들이 참 많습니다.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살아내는 현실 속에서 견디고 버텨야 하는 순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도 이렇게 낯선데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주고 사랑하며 손을 내미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매일 선택해야 하는 자리, 때론 타협해야 하는 자리, 말씀대로 살아내려고 했지만 더 외로웠던 자리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말씀이 내 삶이 되도록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완벽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타협하고, 실패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연약했던 그 자리에 십자가 사랑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해결받은 사람임을 알게 합니다. 내 삶의 짐 앞에 멈추어 서면 그 무게가 더 커집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환경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우리의 힘을 약해지게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게 합니다.

‘서로’ 라는 말은 참 따뜻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묵직한 대가가 들어 있습니다. 서로 섬기고 서로 대접하려면 반드시 나의 것을 내려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고는 서로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심으로 우리와의 ‘서로’가 시작되었듯이 말입니다. 새삶을 얻는 성도는 매일 자신이 죽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매일 부서지며 우리는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주가 주신 은혜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고백은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가장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서로’ 라는 말 안에 공동체가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사람들과 관계하고 기억합니다. 교회의 어른들의 모습, 함께 하다 떠난 이들의 얼굴, 아직 낯선 이의 얼굴도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독일 신약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튀빙겐 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고 직접 공동체 안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의 종말론적 관점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질수 있고 볼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 대해 쓴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라는 책에 보면, 바울의 선교 공동체들은 유대인과 헬라인,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들이 서로 함께 일하는 데서 세워져 나갔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며 공동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석 위에 놓고, 그 다음에 공동체가 계속해서 공동체를 세워 나가기 위해 그리스도께 뿌리를 두고 구별되라고 전합니다. 주 안의 공동체는 그리스도께 영혼의 닻을 내린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하는 이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삶 안에서 내 심장이 함께 뛰고 있음을 느낍니다. 누군가의 상처가 나의 눈물의 기도가 되고 누군가의 한숨이 나의 기도가 됩니다. 이것이 ‘서로’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서로의 얼굴을 마음에 품고, 내 것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깨어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이제 다음 주일부터 성령강림절기가 시작됩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가 결단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기도하게 하시고, 식어버린 자리에서 뜨겁게 사랑하게 하시고, 원망하고 불편했던 자리에서 받은 은혜의 선물로 봉사하며 살게 합니다. 마지막 때를 아는 사람의 삶은 두렵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결단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처음도 끝도 주님의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지금 이 자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510 2026 주일설교

부활절 제 6주(어버이 주일, 졸업예배 주일)

두려운 나그네에게

To the Fearful Stranger

베드로전서 3장 13-22절

13여러분이 열심히 선한 일을 하려 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려 하겠습니까? 14혹 옳은 일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더라도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겁먹지 마십시오.” 15오직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하게 모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가진 희망에 관하여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계십시오. 16그러나 답변을 할 때에는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천하는 선한 행실을 헐뜯던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십시오. 17만일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악한 짓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의 죄 때문에 단 한 번이자 마지막으로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께 인도하시려고 죄를 지은 적이 없는 분이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몸은 죽임을 당했으나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19또한 성령으로, 갇혀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20그 영들은 오래 전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리셨으나 순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에 들어감으로써 물을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21그 물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와 같습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드리는 서약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22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쉬운 성경)

13 Now, who will want to harm you if you are eager to do good? 14 But even if you suffer for doing what is right, God will reward you for it. So don’t worry or be afraid of their threats. 15 Instead, you must worship Christ as Lord of your life. And if someone asks about your hope as a believer, always be ready to explain it. 16 But do this in a gentle and respectful way. Keep your conscience clear. Then if people speak against you, they will be ashamed when they see what a good life you live because you belong to Christ. 17 Remember, it is better to suffer for doing good, if that is what God wants, than to suffer for doing wrong! 18 Christ suffered[d] for our sins once for all time. He never sinned, but he died for sinners to bring you safely home to God. He suffered physical death, but he was raised to life in the Spirit. 19 So he went and preached to the spirits in prison 20 those who disobeyed God long ago when God waited patiently while Noah was building his boat. Only eight people were saved from drowning in that terrible flood. 21 And that water is a picture of baptism, which now saves you, not by removing dirt from your body, but as a response to God from a clean conscience. It is effective because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22 Now Christ has gone to heaven. He is seated in the place of honor next to God, and all the angels and authorities and powers accept his authority.(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어버이 주일과 졸업예배를 함께 드립니다. 여러분은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공부하며 나그네로 살아가며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을 품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내가 세운 계획이 틀어지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막힌 길 앞에 서야 했던 날이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돌아가고 싶은 날도 있었고 흔들리는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두 단어가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첫 번째는 나그네입니다. 낯선 땅에 살고 있어서 나그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삶의 주인이 아님을 실감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나그네임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낯선 길에서 흔들릴 때,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허락하셨고 우리의 삶의 방향과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인생을 세워가게 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바로 나그네들이었습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한다고 편지의 서두에 기록합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낯선 땅에서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두 가지를 말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주로 거룩히 모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인용한 이사야 말씀을 보면, “전능하신 만군의 주, 오직 그분만이 네가 거룩하다고 여겨야 할 유일한 분이시고, 네가 두려워할 유일한 분이시며, 또한 네가 무서워할 유일한 분이시다 “(사8:13)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거룩히 모시는 것, 그것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길입니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세상의 어떤 두려움보다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사건속에 이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은 400년간 애굽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출애굽의 그 순간에도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길을 막고 있었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맹렬히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완전한 막다른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바다를 여셨습니다. 가장 절박한 순간,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구원을 그들로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경쟁사회 속에서 쫓아오는 압박들로 인해 두렵고 조급해 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막다른 그 자리, 두려움이 깊어지는 순간에 바다에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갈라진 바닷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증거였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흔적이 남습니다. 바다가 갈라진 자리에 길이 생겼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건짐 받은 삶에도 그 증거가 나타납니다.

죄와 죽음에서 건짐 받은 성도는 세상 속에서 선한 일을 향해 살아갑니다. 베드로는 선을 행할수록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을 복으로 여기라고 합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합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9-10)

세상을 살면서 낙심할 만한 상황을 만날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지니고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선을 행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과 선한 일은 분리 될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새롭게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말씀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도록 오래전에 이미 예정해 두셨습니다.(엡 2:10)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한 일을 행하는 삶, 그것이 구원받은 자가 마땅히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주신 구원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순종을 받으시고 그 은혜를 깊이 누리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구원 안에서 맺어지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베드로는 두려워 하지 않을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거룩하게 모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주로 인정하여 구별된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내 삶의 주인이 되면 세상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살아가면 더이상 세상의 죽음의 권세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세상은 엄격한 법과 질서로 유지하지만, 세상의 힘은 사람의 영혼까지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과 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삶” 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은 마음의 공허를 채우려 수학 연구에 더욱 몰두했지만 외적 사물에 관한 학문을 고뇌할 때 영적인 위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그 경험을 양피지에 적어 평생 안주머니에 꿰매고 다녔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철학자나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고, 생명의 근원인 주님을 버렸었도다. 원컨대, 나 영원히 주를 떠나지 않으리.” 그를 무릎 꿇게 한것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경외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소망의 이유를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학문 너머의 그 뿌리를 봅니다.  우리가 배우는 지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방향을 얻을 때, 지식은 지혜가 됩니다. 그 지혜가 소망의 이유를 말할 수 있게 합니다. 베드로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15오직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하게 모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가진 희망에 관하여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계십시오. 16그러나 답변을 할 때에는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천하는 선한 행실을 헐뜯던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십시오.

이번주 한 청년의 부모님을 뵈었습니다. 자녀를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마음이 마치 아이를 강물에 띄워 보내는 것 같았는데 역청으로 갈대상자를 보호하듯 교회의 공동체에서 잘 견딜수 있었다는 마음을 전해주셨습니다. 낯선 땅에서 살아갈 자녀를 생각하며 홀로 기도하셨을 그 시간, 학비를 내야할 때마다 마주해야 했던 현실의 무게를 기도의 자리에서 감당하셨을 것입니다. 멀리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운 분들이 계십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홀로 견뎌야 했던 분들, 그 그리움을 가슴 안에 묻고 살아가는 분들, 하나님은 그 자리도 아십니다. 자녀를 외국에 보내놓고 손이 닿지 않는 자리를 기도로 채울 수 밖에 없었던 부모님들의 눈물의 기도가 우리 교회를 향하고 있습니다. 맡겨진 한 영혼을 더 소중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신실하게 붙드는 것이 우리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이제 보스턴을 떠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교우들은 낯선 땅으로 향하게 될텐데, 그 걸음이 새로운 부르심의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정든 곳을 떠나는 아쉬움의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 받은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강의실, 실험실, 가정, 직장 그 자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삶이 되도록 살아가십시오. 어떤이들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첫 날을 기억할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자리에서 기도로 버텨냈던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고, 혼자 성경을 펼치고 홀로 기도해야 했던 그 자리에서부터 예배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작은 기도의 방에서 우리는 온 열방과 민족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주안에서의 헤어짐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뻐하며 기대하는 파송의 시간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가장 가까운 가정에서, 작은 일상에서 시작됩니다. 기도의 자리는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나의 자녀들이 사방이 막힌 것 같은 길 앞에 서는 날이 온다면 그때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의 자리를 지켜내십시오. 믿음은 혼자 끌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기도를 보고 자란 자녀는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자랍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삶의 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일주일 한 번의 예배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훈련이 쌓여 단단한 믿음의 뿌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혼자 감당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의 뜻을 함께 받아들이고, 함께 사랑하며, 함께 이루어 가도록 공동체를 허락하셨습니다

세상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우리는 작고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그 자리에 서 계셨던 분이 계십니다. 주님도 두려우셨을 텐데, 피하고 싶으셨을 텐데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십자가의 사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이 지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세상의 지식을 지닌 자들에게 어리석어 보여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비록 눈앞의 상황이 우리를 두렵게 하더라도 묵묵히 선을 행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보다 훨씬 더 크신 분임을 알게 됩니다. 사명은 위에서 누르는 짐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자리입니다. 일상의 자리가 늘 평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씀합니다. 우리의 고난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있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 서면 내 아픔으로 타인의 부족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솔직히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사랑의 길을 걷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여전히 그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섬길수록, 자꾸만 내가 먼저 서려 합니다. 불편한 자리는 피하고, 편한 자리를 택하려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도 삶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 그 간격은 우리의 힘으로 좁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피하지 마시고 주님을 가장 깊이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의 죄로 인해 죽으신 주님을 한 번 더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두려워하는 나그네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짐을 없애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짐을 지고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두려운 나그네의 삶 위에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은혜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새롭게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혼자 감당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도록 공동체를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아직 그리스도를 삶의 주로 모시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믿음의 초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그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이웃을 아끼고 돌보는 성도로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나그네 길이 낯설어도 두렵지 않도록 앞서 가시며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