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6 2026 주일설교

부활절 제 4주

목자의 품으로

Home in the Shepherd’s Arms

베드로전서 2:19~25

19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지라도 공의로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딘다면,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20 그러나 악한 일을 저지른 탓에 그 죄로 매를 맞고 참는다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다만 옳은 일을 행하다가 핍박을 받고 참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21 ○ 바로 이런 일을 위해,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몸소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여러분들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22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죄를 지으신 적이 없고, 한 번도 그 입에 거짓말이라곤 담으신 적도 없는 분이십니다. 23 사람들은 그분에게 온갖 모욕을 가했지만, 그분은 아무런 앙갚음도 하지 않으셨고, 사람들은 그분을 학대하고 핍박했지만, 그분은 아무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분께서는 모든 일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전부 맡기셨습니다. 24 또 그분께서는 몸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분께서 매를 맞고 상함으로써 여러분이 낫게 되었습니다. 25 전에는 여러분이 길 잃은 양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쉬운말 성경)

19 For God is pleased when, conscious of his will, you patiently endure unjust treatment. 20 Of course, you get no credit for being patient if you are beaten for doing wrong. But if you suffer for doing good and endure it patiently, God is pleased with you. 21 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22 He never sinned, nor ever deceived anyone. 23 He did not retaliate when he was insulted, nor threaten revenge when he suffered. He left his case in the hands of God, who always judges fairly. 24 He personally carried our sins in his body on the cross so that we can be dead to sin and live for what is right. By his wounds you are healed. 25 Once you were like sheep who wandered away. But now you have turned to your Shepherd, the Guardian of your souls.(New Living Translation)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는 억울함과 쉽게 풀리지 않는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부당한 일로 인해 겪었다면 그 상처는 더 깊게 남겨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2장은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지라도 공의로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감정의 자리가 아닌 부르심의 자리로 이끌고 갑니다. 성경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본훼퍼는 옥중서신 ‘저항과 복종’에서 “영혼을 걸고 고난을 받는 것에 비하면, 육신의 생명을 걸고 고난을 받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영혼의 건짐을 받는 성도라면, 우리는 고난에 집중하기 보다 고난을 실제적으로 체득함으로 타인의 고통에 더 집중해야 할 것이며, 까다로운 사람이 되기 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고난을 통과함으로 마음의 크기를 더 넓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자리는 감정의 자리가 아닌 부르심의 자리가 됩니다.

1. 억울함은 우리를 목자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먼저 본문의 앞 절 18절을 보겠습니다. 18 ○ 종들이여, 모든 일에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선량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 뿐만 아니라, 까다롭고 못된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십시오. 당시 종들 가운데에는 일부러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으면서도, 그 고통을 묵묵히 견디며 동료들 앞에서 강인함을 과시하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말합니다. 잘못을 행하고 매를 맞으면서 참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받는 고난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결과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말하는 고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의로운 고난입니다. 죄를 짓는 고난과 선을 행하다 받는 억울한 고난은 본질이 다릅니다.

본문의 19절과 20절에 두번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원어는 ‘χάρις'(카리스) ‘은혜’ 라는 단어입니다. 킹제임스(KJV)성경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acceptable)으로, NIV 성경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commendable)으로 번역했습니다. 억울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드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삶을 아름답게 빚어 가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21절에서 그 근거를 말합니다.

21 ○ 바로 이런 일을 위해,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몸소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여러분들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억울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은 단순한 인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것은 낯선 길에서 먼저 걸어가신 그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대로 따라 걷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면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왜 몸소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살길을 내시고 갈길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생각하며 그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몸소 고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부당한 모욕과 수치를 분명하게 당하셨고, 찔림과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22절과 23절을 보십시오. ’22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죄를 지으신 적이 없고, 한 번도 그 입에 거짓말이라곤 담으신 적도 없는 분이십니다. 23 사람들은 그분에게 온갖 모욕을 가했지만, 그분은 아무런 앙갚음도 하지 않으셨고, 사람들은 그분을 학대하고 핍박했지만, 그분은 아무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분께서는 모든 일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전부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벗어날 능력이 있으셨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인간은 고난이 올때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고난의 상황을 바꾸려고 합니다.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은 멀게 느껴집니다. 내 억울함만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환경과 사람이 먼저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전부 맡기셨습니다.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은 다릅니다. 고난과 억울함 속에서 우리는 목자로부터 멀어지려 하지만 목자는 우리를 끝까지 찾아 오십니다.

2. 목자는 길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오십니다.

양은 본래 방어 능력이 없는 동물입니다. 뿔도 없고, 발톱도 없고, 날카로운 이빨도 없습니다. 양의 유일한 안전은 목자 곁에 있는 것입니다. 무리에서 벗어난 순간, 그 양은 이리떼의 가장 우선적인 표적이 됩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리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교회가 답답하고, 사람들이 싫어집니다. 고난이 우리를 목자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면 헌신은 짐이 되고, 섬김은 의무가 되며, 감사는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죄 없는 자신의 아들을 불의한 세상 한복판으로 보내셨습니다. 가장 억울한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을 회복하셨습니다. 세상이 내놓은 답은 우리를 더 강한 자리로 이끌지만, 하나님이 내놓으신 답은 십자가였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힘과 성과로 복음을 대체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당한 세상속으로 친히 들어오신 주님은 인간의 삶에 가장 확실한 기쁜소식입니다.  ‘목자’(ποιμένα,포이메나)는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낼 때(시 23:1)쓰였고, 신약성경에서는 구원받은 자들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마 25:32;요 10:14;히 13:20)

본문 속의 흩어진 나그네들은 훨씬 혹독한 자리에서도 목자의 품을 붙들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당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기쁜 소식 즉 εὐαγγέλιον, (유앙겔리온)을 선포했습니다. 로마제국 곳곳에서 구원자로 불리우며, 복음이라는 단어는 황제의 출생과 즉위식에 관련되어 사용했습니다. 로마는 황제의 힘으로 평화를 유지했고, 신의 아들로 숭배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 가장 낮은 자리에서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복음을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식민지 통치 아래 고난 받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인이시고, 세상의 주인이시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당시 유다 변방에서 태어난 나사렛 예수를 구원자요, 기쁜 소식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목숨을 건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나그네들은 억울함과 부당함속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인내했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믿음의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거룩한 씨앗이 되었고, 그 복음은 지금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통해 전해집니다. 세상은 힘으로 증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성도는 한없이 쏟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머물때 십자가 정신의 선교적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4 “또 그분께서는 몸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분께서 매를 맞고 상함으로써 여러분이 낫게 되었습니다.”

상처는 우리의 마음의 문을 닫고 예민해 지게하며, 현실의 불안은 우리를 냉소적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무리에서 벗어났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아침식사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길 잃은 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답답한 삶에, 분주하여 감동을 잃어버린 삶에, 다 알면서도 바뀌지 않는 그 자리에, 여전히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는 그 자리에 주님은 끝까지 찾아 오십니다.

우리가 목자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내 힘이 회복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를 먼저 찾아오신 목자의 은혜 때문입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영원히 보호해 주십니다.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될때, 영적으로 우리는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일에 동참하도록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너무도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속적으로 위태롭게 하는 것들이 세상에는 존재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주어진 삶을 사랑합니다.

베드로전서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그 편지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전해집니다.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다시 흩어질 것입니다. 주일의 은혜가 월요일 아침의 시간까지 이어지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삶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상황 가운데 놓여 있기도 합니다. 그 세상의 자리가 때로는 차갑고, 억울하고, 부당하고 홀로 있는 것만 같은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25 전에는 여러분이 길 잃은 양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죽음을 넘어 우리를 소망으로 이끄십니다.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 이들은 행복과 불행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진리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며, 세상과는 다른 눈으로 모든 사건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바로 그 자리까지, 목자께서 먼저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믿음대로 사는 것,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이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변화된 존재입니다. 나를 붙들고 계신 목자의 품 안에서 살아가도록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 자리가 차갑고, 억울하고, 홀로인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오늘 이 말씀을 붙드십시오. “전에는 여러분이 길 잃은 양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