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7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2주 

호세아 6:1-6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What Shall I Do with You?

1“어서 주께로 다시 돌아가자. 그 분은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우리를 싸매 주시고 그 분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2이틀 만에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를 주의 곁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 3우리가 주님을 알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 애쓰자. 주님은 동터오는 새벽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단비처럼 땅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처럼 그렇게 오시리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대답하시다 4“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에 대한 너의 충정은 아침나절의 안개만 같구나. 너희의 충정이 아침 일찍 사라지는 이슬만 같구나. 5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시켜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를 해처럼 샅샅이 비추었다. 6왜냐하면 내가 반기는 것은 사랑이지 희생제물이 아니며 예물을 불에 태워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라기 때문이다. (쉬운 성경)

1 “Come, let us return to the Lord. He has torn us to pieces  now he will heal us. He has injured us  now he will bandage our wounds. 2 In just a short time he will restore us,  so that we may live in his presence. 3 Oh, that we might know the Lord!  Let us press on to know him. He will respond to us as surely as the arrival of dawn or the coming of rains in early spring.” 4 “O Israel and Judah, what should I do with you?” asks the Lord. “For your love vanishes like the morning mist   and disappears like dew in the sunlight. 5 I sent my prophets to cut you to pieces   to slaughter you with my words,  with judgments as inescapable as light. 6 I want you to show love,  not offer sacrifices. I want you to know me more than I want burnt offerings.(NEW LIVING TRANSLATION)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 코아부 수련회를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호세아 10장 말씀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부들이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했습니다. 수련회를 준비하는 섬김이들은 과연 잘 진행될 것인지 염려도 했을것이고, 빽빽한 일정을 비우고 예배의 자리로 찾아오는 것 자체가 이미 영적 싸움의 시간을 뚫고 왔을 것입니다. 희망과 믿음의 세대를 이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준비한 모든 순서를 통해 보았습니다. 

16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마크 트웨인(Mark Twain:1835-1920)의 ‘왕자와 거지’란 소설이 있습니다. 거지의 아들과 왕궁에서 태어난 아들이 어느날 친해지고 두 소년은 재미삼아서 옷을 바꿔입게 됩니다. 이후 두 아이는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어린시절 학대받던 톰은 신분이 변화된 왕자로 살게 되고, 에드워드 왕자는 거지로 취급되면서 거지소굴을 돌아다니며 엄청난 고생을 합니다. 소설의 결말에서 진짜 왕이 맞는지 테스트를 하여 가까스로 왕의 자리로 복귀하는 내용으로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입니다. 

신분의 변화는 삶에 분명한 차이를 가져다 줍니다. 겉 모습이 아닌 본질적인 변화의 사건은 우리의 삶속에서 놀라운 변화를 갖고 오게 됩니다. 성경은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왕이신 분이 스스로 수치의 옷을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옷을 바꿔 입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바꾸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호세아서는 스스로 수치의 옷을 입고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가리킵니다. 도저히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끝까지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존귀한 자녀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의 품에 있던 북이스라엘을 향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정치적으로 불안했고, 영적으로는 암흑에 가까운 시대였습니다. 호세아의 외침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에 온 마음을 쏟으십시오(1, 2)

1“어서 주께로 다시 돌아가자. 그 분은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우리를 싸매 주시고 그 분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2이틀 만에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를 주의 곁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

어서 주께 돌아가자, 주님을 힘써 알자는 이 고백은 매주일 우리가 부르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 믿음의 노래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랑의 고백이며, 세상을 살며 상처와 실패로 인해 공허한 우리의 빈 마음에 끊임없이 메아리 쳐야할 희망의 노래입니다. 

호세아서를 묵상하면 죄에 대한 심판과 회복이 동일한 손에서 나오기에 긴장감이 조성되지만, 찢으신 분이 싸매시고, 상처를 내신 분이 그 손으로 아물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죄에 대한 심판의 끝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입니다. 원망과 서운함, 상처로 닫혀진 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빗껴간 삶의 목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우리의 얼굴을 향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얼굴을 드러내시고, 또 다시 용서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약속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틀 만에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를 주님 곁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라고 약속합니다. 우리는 이 약속이 이미 이뤄진 시대를 살아갑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삶의 방향입니다. 이 약속 안에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님께 돌아가면,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주의 곁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알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고 스스로를 ‘제때 나지 못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늦게 부르심을 받은 자, 자격 없는 자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환난을 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핍박 속에서도, 자신이 전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자신은 깨어질 질그릇과 같지만 그 안에 예수께서 계시니, 사방이 막힌 것 같아도 괴롭지 않고 당혹스러운 일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몸에 예수의 죽으심의 흔적을 지닐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 가운데 살아 있는 자신의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형식이 아니라 믿음의 본질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제사보다 낫습니다(3, 6)

3우리가 주님을 알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 애쓰자. 주님은 동터오는 새벽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단비처럼 땅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처럼 그렇게 오시리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대답하시다 6왜냐하면 내가 반기는 것은 사랑이지 희생제물이 아니며 예물을 불에 태워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교회는 형식만 남아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 주목하고 지난 날의 영광에만 머무는 교회는 역사 속에서 교회 건물이 결국 박물관이 되거나 술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초라해 보여도 은혜가 부어진 교회에는 부흥과 영광이 임재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재한 교회는 겉으로 초라해 보여도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그 어떤 상처난 마음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의 상처를 깨끗하고 온전하게 씻겨 주실 분은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고, 무감각해진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힘써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자녀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쉬울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는 자기 아들을 죽게 한 대가를 치르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히브리어로 다아트 엘로힘(דַּעַת אֱלֹהִים)입니다. 그 동사 어근은 야다(יָדַע)인데, 창세기 4장에서 “아담이 하와를 알더니”라고 쓸 때 바로 이 단어를 씁니다. 부부가 몸과 영혼을 나누는 친밀한 앎입니다. 이 친밀함에는 틈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 제품 매뉴얼을 읽는 수준의 차원이 아니라 몸을 맞대고 사는 부부처럼 그렇게 나를 알라는 것입니다.

토저 목사(Aiden Wilson Tozer, 1897 ~ 1963) 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보통 사람들의 시대이다.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평범한 수준으로 끌어 내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를 다시 깨닫는 것이다. 성실한 말씀 전파와 기도를 회복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라” 경건하고 거룩한 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멈추지 마십시오. 믿음의 경주에서 벗어날때 우리의 삶은 좋지 않은 것들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따라가야 할 방향은 대세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충정은 아침안개 같지만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십니다(4–5)

4“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에 대한 너의 충정은 아침나절의 안개만 같구나. 너희의 충정이 아침 일찍 사라지는 이슬만 같구나. 5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시켜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를 해처럼 샅샅이 비추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아, 부르시며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두번이나 물으십니다. 이 물음은 심판의 선언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헤세드 사랑은 동이 뜨는 새벽빛과 땅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처럼 일상속에서 변함없이 확실하게 주시는 선물이지만 우리는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에브라임처럼 주어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닌데 평생 내 것인 양 살아갑니다. 우리의 사랑은 아침 안개 같고 금방 사라지는 이슬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흔들립니다.

새벽에 일어나 예배를 준비할때면 생각나는 추억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아버지께서는 방학이면 새벽에 저를 깨우셨습니다.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간, 새벽시장으로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세상이 고요한 그 시간에 이미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방학때 늦잠도 자고 싶고, 풀어 지고 싶은데 아버지는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한번은 용돈을 바로 주시지 않고 포도 열박스를 사주시면서 너가 한번 팔아 보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린 마음에 불편했고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잘 사주겠지 하고 찾아갔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포도 박스를 사준 것은 약국에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이었어요. 많이 가져서 헌신하고 베풀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마음이 부요한 사람이 사랑을 나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사랑의 방법이셨습니다. 세상을 알고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하시는 훈련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에브라임에게 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예언자들을 시켜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를 해처럼 샅샅이 비추었다.’ 빛이 샅샅이 비춘다는 것은 숨길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 그들을 찢고 상하게 하셨습니까? 드러내는 것이 아프고, 찢고 터뜨리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낫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חֶסֶד) 앞에서 서면 우리의 죄가 죄 그대로 보이고,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깨우심에 긴장감이 있지만 결국엔 그 사랑이 우리를 살리는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찢겨진 자리가 치유의 자리가 된 곳이 예수께서 우릴 위해 달리신 십자가입니다. 고통의 자리로 내려오신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우릴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져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릴 회복시키십니다. 사명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높이 계신 하나님께로 끌어 올리는 힘이 있습니다. 포기 하지 않고 내가 너를 살리겠다는 하나님의 심장소리를 듣는 순간, 죽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그 어떤 계획도 하나님 보다 앞설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언가를 형식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때, 우리는 비로소 보게 됩니다. 식어진 마음 안에서도 여전히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깨달을 때, 온 마음과 삶을 다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 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지극히 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목적은 풍요와 소유이지만 다시 태어난 성도들의 삶의 목적은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그 명령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있습니다. 세상의 풍요는 우리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라는 물음 앞에 서기 바랍니다. 자신이 찢기신 채 싸매주시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그 주님만이 우리의 목적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