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제 7주
우리에게 남겨진 단어 “서로”
The Word Left to Us “One Another”
베드로전서 4장 7-11절
7모든 것의 끝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잘 다스려서 기도에 힘쓰십시오. 8무엇보다도 먼저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용서해 주기 때문입니다. 9불평하지 말고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10여러분은 하나님께 각기 다른 은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진 종들과 같습니다. 그러니 신실한 종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갖가지 은혜의 선물을 가지고 서로에게 봉사하십시오. 11설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받은 사람답게 일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하십시오. 영광과 권능이 영원토록 그분께 있습니다. 아멘. (쉬운 성경)
7 The end of the world is coming soon. Therefore, be earnest and disciplined in your prayers. 8 Most important of all, continue to show deep love for each other, for love covers a multitude of sins. 9 Cheerfully share your home with those who need a meal or a place to stay. 10 God has given each of you a gift from his great variety of spiritual gifts. Use them well to serve one another. 11 Do you have the gift of speaking? Then speak as though God himself were speaking through you. Do you have the gift of helping others? Do it with all the strength and energy that God supplies. Then everything you do will bring glory to God through Jesus Christ. All glory and power to him forever and ever! Amen.(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본문은 종말로 시작해서 영광으로 마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과 장차 받게 될 영광은 뗄수가 없는 진리입니다. ‘모든 것의 끝이 가까웠다’는 말씀은 우리가 그 시간 안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 편지는 현실의 불안과 삶의 위기 가운데 있던 디아스포라 나그네들에게 보내졌습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는 소망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편지를 손에 든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반복해서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서로’라는 단어입니다.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십시오. 불평하지 말고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은혜의 선물을 가지고 서로에게 봉사하십시오. ‘ 예수님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요 13:34) 이 말씀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서로 앞장서서 남을 존경하십시오. 서로 합심하십시오.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십시오.’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서로 기다리십시오. 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하십시오.’ 이 밖에도 성경 안에 공동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서로’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서로’ 라는 말 앞에 높은 벽 이 서 있습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도, 사람과 사람 사이도 점점 양극단으로 갈라지는 시대입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진리의 말씀도 낯설게 들리는 시대입니다.
1. 우리는 지금 깨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7모든 것의 끝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잘 다스려서 기도에 힘쓰십시오
베드로는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로 번역된 ‘소프로네사테: σωφρονήσατε’는 ‘자기 마음을 통제하다. 건전한 마음을 갖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사람은 기도의 자리가 부족하면 쉽게 결정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의 자리는 내가 해결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해결하신 그 자리에 내가 서는 것입니다. 해결받는 자라는 것을 기억할때 생각이 절제되고, 말씀 앞에 마음이 고요해 집니다. “잘 다스려서” 라는 ‘넵사테: νήψατε’는 맑은 정신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지나친 사치와 소비로부터 우리를 돌이키게 합니다. 맑은 정신으로 삶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NLT성경은 ‘세상의 끝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기도에 있어서 진지하고 절제하라: Therefore, be earnest and disciplined in your prayers’고 번역한 것입니다. 이 힘이 기도의 자리에서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내 뜻과 맞지 않으면 교만한 마음, 섭섭한 마음, 비뚤어진 생각들이 마음 안에 찾아오고, 내 뜻이 옳다는 생각이 마음을 흔듭니다. 누군가를 향한 원망의 마음이 찾아올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 한계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말씀 없는 기도는 자기 확신으로 향합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종말을 날짜로 계산했던 이들이 무너진 것은, 그 뜨거움이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기도 후의 삶, 기도 후의 절제, 기도 후의 순종이 없었습니다. 진짜 기도는 내 열심이 아니라 내 이기적인 마음을 말씀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리가 익숙해 질때 우리의 마음은 말씀을 알지만 지켜낼 힘을 잃어버리고, 내뜻대로 살아내는 익숙함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을 밀어냅니다. 하나님보다 내 일상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가 신앙의 위기입니다.
우리의 본성 안에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삶이 힘든 날은, 그 갈망조차 사라집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가 나오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는 날이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살아 계셔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돕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 7:25)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다한 죄를 덮으시고, 죄의 지배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며, 지금도 영광의 자리에 이르도록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는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위해 지금도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씻으시기 위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걷는다는 것은 마치 외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하며 흔들리기에,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금방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길에서 넘어진다 해도, 주님의 손이 언제나 우리를 붙드시고 건져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 기도하지 않고도 이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하시던 주님 곁에서 졸고 있던 제자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겟세마네에서 깨어 있지 못했던 베드로가, 은혜의 선물을 받은 후에 두려워하는 나그네들에게 기도에 힘쓰라고 위로의 편지한 것입니다.
2. 우리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8무엇보다도 먼저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용서해 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라는 단어를 여러 성경 번역을 보았습니다. 개역개정은 ‘뜨겁게’로 마음의 온도를 떨어뜨리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NIV ‘Deeply, 겉치레의 사랑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KJV는 fervent 열렬하게 라고 번역했습니다. 원어 에크테데는 ἐκτενή 는 ek (밖으로) + teinō (당기다, 뻗다) 의 합성어로 활시위를 끝까지 잡아당겨 팽팽해진 상태입니다. 느슨한 활에서는 화살이 나가지 않습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엔진 안에서 압축이 일어나야 폭발이 되고, 폭발이 되어야 바퀴가 굴러갑니다. 신앙생활에도 영적인 긴장이 없으면 동력도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삶의 현실이 우리를 압박하고 연약해 질때, 그 압박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끝까지 붙들게 하는 힘이 됩니다.
믿음의 행군에서 어려운 것은 큰것이 아닙니다. 작은 모래 알갱이가 신발에 들어와도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작은 모래알 하나가 신발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할수록 우리는 대범해지지 못하고 소심해 지는 것입니다. 내가 던지는 작은 것이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랑을 진지하게 갈망할수록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더 진하게 깨닫게 됩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아버지의 마음이 끊임없이 깨달아질 때 삶속에서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율법이 성취되는 삶을 살게되고, 아파하는 이들에게서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오래전에 쓰던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오늘 본문 위에 20년 전의 설교노트가 적힌 포스트잇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근신하여 기도하라, 서로 사랑하라, 서로 원망없이 대하라, 선한 청지기가 되라” 그 포스트잇을 한참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20년 전 말씀을 들으며 적었던 메모를 다시 보며 그때 마음에 새겼던 말씀과 지금 제 삶의 모습 사이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하나님께서 다시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전해 주시던 목사님이 떠올랐습니다. 천국의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웃으며 고백하시던 목사님. 항상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신앙생활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던 분이셨습니다. 환경과 상황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마지막 때를 알고 천국의 소망을 기다리며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믿음으로 살아내시던 목회 현장에 후배들이 찾아올때마다 차비를 봉투에 담아 건네주시며 필요한 곳에 잘 쓰라고 흘려 보내라고 하셨던 사랑의 손길이 아직도 제 마음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고 있습니까?
오늘날은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지라’는 말보다 ‘서로가 ‘각자 개개인의 성숙과 자기계발을 위한 일에 삶의 중심을 더 두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은혜의 선물은 서로에게 흘려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가 흘려 보내는 일에 마음을 다할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더욱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9불평하지 말고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10여러분은 하나님께 각기 다른 은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진 종들과 같습니다. 그러니 신실한 종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갖가지 은혜의 선물을 가지고 서로에게 봉사하십시오. 11설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받은 사람답게 일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하십시오. 영광과 권능이 영원토록 그분께 있습니다. 아멘.
낯선 사람을 내 집으로 들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불편한 사람을 내 마음의 자리로 들이는 일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원망없이 불평하지 말고 대접하라고 말씀합니다. 흩어진 나그네들이 광야의 옛 백성처럼 원망하는 자리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이민자로, 유학생으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유난히 불안과 두려움과 싸워야 하는 날들이 참 많습니다.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살아내는 현실 속에서 견디고 버텨야 하는 순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도 이렇게 낯선데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주고 사랑하며 손을 내미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매일 선택해야 하는 자리, 때론 타협해야 하는 자리, 말씀대로 살아내려고 했지만 더 외로웠던 자리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말씀이 내 삶이 되도록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완벽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타협하고, 실패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연약했던 그 자리에 십자가 사랑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해결받은 사람임을 알게 합니다. 내 삶의 짐 앞에 멈추어 서면 그 무게가 더 커집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환경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우리의 힘을 약해지게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게 합니다.
‘서로’ 라는 말은 참 따뜻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묵직한 대가가 들어 있습니다. 서로 섬기고 서로 대접하려면 반드시 나의 것을 내려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고는 서로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심으로 우리와의 ‘서로’가 시작되었듯이 말입니다. 새삶을 얻는 성도는 매일 자신이 죽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매일 부서지며 우리는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주가 주신 은혜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고백은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가장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서로’ 라는 말 안에 공동체가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사람들과 관계하고 기억합니다. 교회의 어른들의 모습, 함께 하다 떠난 이들의 얼굴, 아직 낯선 이의 얼굴도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독일 신약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튀빙엔 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고 직접 공동체 안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의 종말론적 관점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질수 있고 볼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 대해 쓴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라는 책에 보면, 바울의 선교 공동체들은 유대인과 헬라인,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들이 서로 함께 일하는 데서 세워져 나갔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며 공동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석 위에 놓고, 그 다음에 공동체가 계속해서 공동체를 세워 나가기 위해 그리스도께 뿌리를 두고 구별되라고 전합니다. 주 안의 공동체는 그리스도께 영혼의 닻을 내린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하는 이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삶 안에서 내 심장이 함께 뛰고 있음을 느낍니다. 누군가의 상처가 나의 눈물의 기도가 되고 누군가의 한숨이 나의 기도가 됩니다. 이것이 ‘서로’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서로의 얼굴을 마음에 품고, 내 것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깨어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이제 다음 주일부터 성령강림절기가 시작됩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가 결단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기도하게 하시고, 식어버린 자리에서 뜨겁게 사랑하게 하시고, 원망하고 불편했던 자리에서 받은 은혜의 선물로 봉사하며 살게 합니다. 마지막 때를 아는 사람의 삶은 두렵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결단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처음도 끝도 주님의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지금 이 자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