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5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6주

내가 쌓은 두로의 성벽

My Tyre, My Wall

스가랴 9:9-12

9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10 “내가 에브라임에서 전차들을 없애겠고 예루살렘에서 말들을 없애겠다. 전쟁에서 쓰이는 활들은 부러질 것이다. 그 왕이 나라들에게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의 나라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11내 백성아, 내가 너희와 언약을 맺었으며 희생 제물의 피로 그 언약을 봉인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가운데 포로 된 사람을 물 없는 웅덩이에서 풀어 주겠다. 12희망을 가진 너희 포로들아, 너희의 요새로 돌아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이른다. 너희를 옛날보다 두 배로 회복시켜 주겠다. (쉬운 성경)

9 Rejoice, O people of Zion! Shout in triumph, O people of Jerusalem! Look, your king is coming to you.  He is righteous and victorious, yet he is humble, riding on a donkey riding on a donkey’s colt.
10 I will remove the battle chariots from Israel and the warhorses from Jerusalem. I will destroy all the weapons used in battle, and your king will bring peace to the nations. His realm will stretch from sea to sea and from the Euphrates River to the ends of the earth.
11 Because of the covenant I made with you, sealed with blood, I will free your prisoners from death in a waterless dungeon.
12 Come back to the place of safety, all you prisoners who still have hope! I promise this very day that I will repay two blessings for each of your troubles.(New Living Translation)

지난 두주 동안 예레미야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던 백성들에게 다가올 징계를 전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스가랴서는 예언의 배경이 다릅니다. 바벨론에서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징계를  받고 돌아온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스가랴서는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면서 이전에 화려했던 성전의 영광이 과연 회복될까? 그 옛날의 영광이, 정말 다시 우리에게 임할까?” 낙심을 마주한 백성들에게 전했던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오직 하나, 자기 백성과의 관계 회복에 있습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난 백성에게 징계를 내리신 것도, 포로 생활에 지쳐버린 백성에게 “내가 너희를 버려두지 않았다, 결코 잊지 않았다” 말씀하신 것도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זְכַרְיָה, 즈카르야)라는 이름 자체가 설교입니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하나님께서 잊으신 것 같은 깨어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스가랴서를 읽을 때마다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려 보기 바랍니다. 때때로 나의 생각과 욕심이 하나님 보다 앞서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서 선수들은 수없는 패배를 거칩니다. 더 강한 상대에게 실패를 반복하면서 경험과 실력을 쌓게 됩니다. 그런데 가장 위대한 실패를 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강해지기 위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 패배자의 자리에 내려가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실패하지 않으려고, 넘어지거나 뒤쳐지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왕은 반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 가장 패배한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세상은 골고다를 실패의 현장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가 결코 스스로 쌓을 수 없는 견고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오늘 본문은 시온 백성들에게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기뻐하고 즐거이 외치라고 시작합니다.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피난처가 되신 그분이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9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겸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עָנִי(아니)는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고난받는 자’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당시에 왕은 군용 말을 탔는데 예수께서는 전투 능력을 상징하는 군마(軍馬)가 아니라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시온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왕이 갑옷을 입고 강한 말을 타고 오실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의로우신 왕이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를 두려워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미 무너뜨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그분의 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입을 수 없는 값비싼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의를 “호심경”이라 부릅니다(엡 6:14). 호심경은 심장을 지키는 갑옷과 같습니다. 의의 갑옷은 전쟁터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화살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사단이 자주 사용하는 교만과 결핍이라는 화살로 부터 지켜 주는 것이 의의 호심경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수많은 화살이 성도의 심장을 향해 날아올 때, 의로우신 주님은 성도들이 즐거이 외칠 승리의 이유가 되어 주십니다.

세상은 그 왕을 배척했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배척의 뿌리는 영적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눈을 뜨지 못했고 자신의 죄를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열심과 의로움으로 우리를 형식에 가두거나 영적 교만으로 유혹하지만 의로우신 예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십니다.

둘째, 스스로 강해지려던 요새는 무너집니다.

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 4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 (스가랴 9:3-4)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기대하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즐거움과 기쁨도 영적 교만이 될수 있습니다. 교만은 세상의 즐거움이나 부요함을 통해서도 우리를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며 즐거워하고, 내가 쌓아올린 것들로 의롭게 여기는 것도 영적 교만입니다. 뿐만 아니라 상처로 인해 결핍에 갇혀 사람의 위로만 구하는 것도 사단이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소유로, 하나는 결핍으로 향하지만 결국은 같은 곳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설 수 있다는 자기기만도, 하나님이 계셔도 소용없다는 체념도 의로우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 교만을 보여주는 도시가 바로 두로입니다. 두로는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서 요새를 세웠습니다. 적들로 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 약 800미터 떨어진 섬에 성벽의 높이가 약 45m나 되는 견고한 성읍을 건설하였고 역사속에서 누구도 이 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치 철옹성 같은 요새였습니다. 게다가 온 바다의 상업을 도맡아 하던 나라이므로 해상에서 그들을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은을 티끌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아 올렸다고 표현합니다. 두로는 누구보다 현명했고 부유했고 강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두로에 대한 예언이 크게 현실성이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두로 왕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씀합니다. “2 사람아, 두로 왕에게 전하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마음에 교만한 생각을 품으며 ‘나는 신이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신의 보좌에 앉아 있다’라고 말한다. 네가 네 자신을 신처럼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겔 28:2) 두로의 진짜 문제는 강함이 아니었습니다. 강함을 쌓으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버린 것이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신의 악단’ 영화를 교우들과 함께 보았습니다. 당의 명령에 충성하는 군인들의 신념이 마치 두로가 쌓아 올린 높고 강했던 성벽 같아 보였습니다. 북한 보위부는 외화 지원금을 얻기 위해 지시를 내리고 승리 악단원들과 함께 부흥회를 준비하게 합니다. 이 단원들은 숨어서 주님을 믿는 악단이었습니다. 승리 악단원들은 찬양이 금지된 땅에서 진짜 찬양을 부르지만 보위부 군인들은 당의 명령에 따라 예배를 연극처럼 드립니다. 그들의 심장은 수령님을 향한 충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연기하듯 읊조리던 찬양과 읽어 내려가던 성경의 말씀이 보위부 군인들 내면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수령을 향하던 충성이 주님을 향한 예배가 됩니다. 신의 악단 한 인물의 고백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머리와 생각은 당을 따르는데, 마음과 영혼은 예수를 따르네요. 곧 처형 당할 목숨이니, 오늘 고백하는 거라우.” 예배의 회복은 이처럼 무릎 꿇는 대상을 바꾸어 줍니다.

라틴어 가운데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단어입니다. 성도에게 메멘토 모리는 단순히 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잊는 순간, 우리는 두로 왕을 닮아갑니다. 입술로는 찬양하고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나의 재물과 성공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과 겸손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겸손해지려는 바로 그 순간에도 교만은 속삭입니다. 찬양하는 자리에서도, 기도하는 자리에서도, 심지어 섬기는 자리에서도 “네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 네가 이만큼 했으면 하나님께서 네 편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라는 유혹입니다. 결국 교만은 인생과 영혼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독입니다. 실제로 역사속에서 두로는 동방을 정벌하던 알렉산더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7개월의 항전 끝에 마침내 함락되고 불에 탄 재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권력도, 재물도 언젠가는 다 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인생은 다릅니다. 시작이 좋은 인생은 많아도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인생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은 더 강해지고 더 높이 쌓으라고 요구하지만 성도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이 아무리 정교해도 하나님의 뜻보다 지혜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약함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때, 평화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10 “내가 에브라임에서 전차들을 없애겠고 예루살렘에서 말들을 없애겠다. 전쟁에서 쓰이는 활들은 부러질 것이다. 그 왕이 나라들에게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의 나라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요새로 돌아올 때 참된 쉼을 얻습니다

11 내 백성아, 내가 너희와 언약을 맺었으며 희생 제물의 피로 그 언약을 봉인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가운데 포로 된 사람을 물 없는 웅덩이에서 풀어 주겠다.

믿음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실패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서 행하신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진짜 삶의 왕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심으로 죄와 사망의 자리를 생명과 화목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성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두려워 말고 내가 찢긴 살과 흘린 피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피의 언약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주님의 새 언약입니다. 이것은 오래전 선지자들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맺고 결단했지만 그 언약을 잊을 때도 있었고,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12 희망을 가진 너희 포로들아, 너희의 요새로 돌아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이른다. 너희를 옛날보다 두 배로 회복시켜 주겠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주님께서 멍에를 먼저 지셨고, 멍에를 지고 하는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내 멍에가 무겁지 않고, 쉽고 가볍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이 이미 멍에를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왕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전쟁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끊어 버리셨습니다. 칼과 창이 아니라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 인간의 죄와 부정한 것들을 씻겨 내셨습니다. 불신앙으로 인한 절망과 미움, 시기 가운데 갇혀 살던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오신 예수를 인해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풍성한 삶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따라 하루하루 순종의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 예배의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으로 자유를 누리며 기쁨을 회복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내 삶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더 간절히 원할때가 많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의 자리에 나를 앉혀 놓았습니다. 지금도 예배할 수 없는 곳에서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들의 삶이 우리와 다른 삶일까요? 우리는 자유 안에서 일상에 묻혀 식어진 마음을 발견하며 우리에게 있는 그 간절함이 내 삶의 문제에만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두로가 스스로 쌓아올린 요새도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뒤에 감추어진 결핍과 상처와 불안, 내 힘으로 애쓰는 감정들, 내 인생을 내 힘으로 붙들려고 하는 교만은 내 안에 높게 쌓아 올린 벽입니다. 우리는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서 나만 아는 두로의 성벽을 쌓았지만, 그분은 무너짐의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이 벽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질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예배의 회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겸손의 왕은 우리를 회복시키러 오셨습니다. 형식이 아니라 기쁨으로, 은혜로 나아오는 예배자로 우리를 세우십니다. 우리를 은혜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찬양하기 원합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실망한 이 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찬송가 272장)

0628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5주

하나님의 본심

The Heart of God

예레미야 28:5-9

지난 주 우리는 예레미야 20장에서 뼛속에서 타오르는 말씀의 불을 함께 보았습니다. ‘여호와를 잊어 버리겠다.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 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씀을 들고 백성에게 나아갔지만 돌아온 것은 조롱과 멸시였습니다. 침묵하려 해도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더욱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어느 쪽도 자신의 힘으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가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심어 두신 말씀의 불이 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예레미야를 붙드시고, 어떤  환경에도 굴복하지 않도록 그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두 선지자의 대립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냐와 예레미야입니다. 성경은 시드기야가 유다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한지 사년째 되는 해 다섯째 달에 일어난 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두 선지자의 예언의 대립이 첨예한 관심사였고,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두 선지자의 시작은 똑같았습니다. 하나냐 선지자는 예언을 시작하기 전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시작했고,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만군의 여호와,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라고 예언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언의 내용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나냐는 2년 뒤에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의 왕이 유다백성에게 한 멍에를 꺾어 버린다고 예언을 해서 평안을 빌어 주었고, 예레미야는 모든 나라의 목에 쇠 멍에를 씌울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고 그의 종이 되게 할 것이다. 라고 심판을 전했습니다. 예언의 내용만 놓고 보면, 하나냐는 듣기 좋은 말을 했고, 예레미야는 들어야 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듣기 좋은 편으로 몰렸습니다.

구약신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 1901-1971)는 하나냐의 예언을 도덕적 타락의 문제라기보다 시온신학을 절대화한 것으로 봅니다. 당시 하나냐는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지 않을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던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구약시대 성전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었고, 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했습니다. 하나냐가 선지자의 자리에서 쉽게 드러날 거짓을 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확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하나냐 자신의 예언이 거짓이라면, 굳이 2년이라는 시간을 명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2년 뒤면 자신의 예언이 거짓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도 구체적이고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같은 현실과 같은 고통속에서 두 갈래 길에 서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해 더 깊이 나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떠나 멀어지는 길입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때 우리는 내안의 나를 지키려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 보호를 위한 기도만 드리게 됩니다. 살아냄의 자리에서 오는 절박함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 가운데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것은 나의 확신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성취됨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휘장을 찢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시간을 열어 주셨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우리는 예수께서 흘리신 보혈로 새성전과 새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레미야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노래하면서 자신들에게 평안을 주는 말씀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삶이 평안하기를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내게 좋은 것만을 적용할때에 말씀이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절대적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삶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과 다를지라도 고통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의 길을 따라 걷는 자리에서 은혜를 잃어버리고 판단자의 자리에서 서는 순간 인간은 위선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개인의 신앙도 그렇고 신학도 그렇습니다. 내 안의 확신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다보면 정작 살아가야 믿음의 방향을 잃어버릴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도 특별하게 일하시는 완전하심을 믿으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모습을 영적 교만으로 책망하셨습니다. 영적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형식은 남아 있지만 생명력을 잃게 합니다. 사사시대도 그랬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각 사람은 자기 확신과 신념 속에서 살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서 있는가입니다.

예언의 목적

요나는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니느웨를 향해 선포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욘 3:4) 이것은 요나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거짓 선지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은 언제나 회개를 향한 부르심을 그 안에 품고 있습니다. 니느웨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예언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예언의 목적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요나의 마음 안에 있었습니다. 그의 발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을 때, 요나는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자신의 기대를 벗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동안에도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대신 자신을 중심에 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심판 자체가 아니라 회개와 회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심을 품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6 예언자 예레미야가 말하였다. “아멘! 여호와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소. 당신이 예언한 말을 여호와께서 이루어 주시면 정말 좋겠소.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안에 있던 모든 물건들을 바빌론에서 이 곳으로 가져오시고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도 다시 이 곳으로 데려오시면 좋겠소.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예언이 틀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본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 지라도 참된 선지자는 고통 받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심판 보다 더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아멘,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소’ 라고 했던 말 안에는 하나님의 본심이 담겨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에는 심판을 넘어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본심이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열했던 원인은 은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영적 우월감과 지식, 방언과 예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풍성함이 오히려 교회를 분열하게 했습니다. 아볼로, 게바, 바울파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 파로 나누어 지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사라진 자리에 비교와 자기자랑과 교만이 들어섭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그 무너진 교회 한가운데 서서 선언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것은 단순한 권면이 아닙니다. 흩어진 교회를 다시 세우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고통을 은혜로 회복시켜 주시고, 악함을 보혈로 씻겨 주시는 능력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참된 길로 나아가게 되고, 교회답게 섬기며 일하게 합니다.

믿음의 길을 내 힘으로만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처가 깊어질수록 내뜻과 다른 이들 앞에서 마음에 불편함이 찾아옵니다. 자기목숨을 버리는 것이 우리의 용기와 본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를 버려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주님이 십자가에서 지셨습니다. 십자가 아래 있는 성도는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고 주안에서 자랑할 뿐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값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지면 나의 낮아짐도 나의 부요함도 내 공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풍진 세상에서 눈물 나는 그 자리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하나님을 앞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믿음 생활은 없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냐처럼 되어 가는가? 하나냐가 예언했던 좋은 말만을 더 듣고 싶어지는가? 삶의 방향을 세상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목자 되신 주님을 따라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비유하셨습니다. 이리떼가 올때 삯군 목자는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우리는 쉽게 비겁하다. 거짓되다라고 정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나의 자녀에게 이리떼들이 헤치려 온다면, 너는 그 자리에서 네 목숨을 바쳐야 한다.라고 말할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 자녀가 이리떼를 피해 맡긴 역할을 못했다고 해서 ‘너는 악하고 거짓되구나. 너는 삯군이다’라고 정죄할 부모가 있겠습니까? 이리떼로 부터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갚을 수 없는 은혜는 어떤 합리적인 설명으로 온전히 설명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플 때, 내가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을 부모라면 압니다. 자녀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끝까지 중보자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양들을 살려내기 위해 모든 위협과 위험을 온 몸으로 막아 내셨습니다. 그 사랑과 믿음의 자리에서 죽음은 더 이상 최종 권세가 아니었고, 오히려 생명이 드러나는 자리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안에 숨겨진 괜찮은 척, 강한 척, 믿는 척했던 모습을 벗겨내고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서야 합니다. 참된 변화에 대한 갈망은 단순히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인간적인 소망이 아닙니다. 때로는 멍에를 지는 것이 고통스럽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대와 다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1900년대 초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 즐겨 불렀던 희망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같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이후 한국 교회에서 새로운 가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우리 할 일이 무엇이냐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형제여 서로 사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자 사랑의 주님 계명 지켜 힘써서 사랑하자. ‘나의 희망’을 묻던 노래가 ‘우리의 사명’을 묻는 찬양으로 바뀐 것입니다.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절망 속에서도 사명을 발견하게 했습니다. 너의 꿈이 무엇이냐 묻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성도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묻고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맡겨 주신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속에서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심판의 경고 앞에서는 겸손히 회개하고, 약속의 말씀 앞에서는 흔들림 없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시선을 돌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믿음의 경주자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