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제 5주
하나님의 본심
The Heart of God
예레미야 28:5-9
지난 주 우리는 예레미야 20장에서 뼛속에서 타오르는 말씀의 불을 함께 보았습니다. ‘여호와를 잊어 버리겠다.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 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씀을 들고 백성에게 나아갔지만 돌아온 것은 조롱과 멸시였습니다. 침묵하려 해도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더욱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어느 쪽도 자신의 힘으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가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심어 두신 말씀의 불이 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예레미야를 붙드시고, 어떤 환경에도 굴복하지 않도록 그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두 선지자의 대립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냐와 예레미야입니다. 성경은 시드기야가 유다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한지 사년째 되는 해 다섯째 달에 일어난 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두 선지자의 예언의 대립이 첨예한 관심사였고,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두 선지자의 시작은 똑같았습니다. 하나냐 선지자는 예언을 시작하기 전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시작했고,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만군의 여호와,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라고 예언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언의 내용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나냐는 2년 뒤에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의 왕이 유다백성에게 한 멍에를 꺾어 버린다고 예언을 해서 평안을 빌어 주었고, 예레미야는 모든 나라의 목에 쇠 멍에를 씌울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고 그의 종이 되게 할 것이다. 라고 심판을 전했습니다. 예언의 내용만 놓고 보면, 하나냐는 듣기 좋은 말을 했고, 예레미야는 들어야 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듣기 좋은 편으로 몰렸습니다.
구약신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 1901-1971)는 하나냐의 예언을 도덕적 타락의 문제라기보다 시온신학을 절대화한 것으로 봅니다. 당시 하나냐는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지 않을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던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구약시대 성전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었고, 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했습니다. 하나냐가 선지자의 자리에서 쉽게 드러날 거짓을 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확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하나냐 자신의 예언이 거짓이라면, 굳이 2년이라는 시간을 명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2년 뒤면 자신의 예언이 거짓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도 구체적이고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같은 현실과 같은 고통속에서 두 갈래 길에 서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해 더 깊이 나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떠나 멀어지는 길입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때 우리는 내안의 나를 지키려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 보호를 위한 기도만 드리게 됩니다. 살아냄의 자리에서 오는 절박함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 가운데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것은 나의 확신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성취됨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휘장을 찢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시간을 열어 주셨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우리는 예수께서 흘리신 보혈로 새성전과 새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레미야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노래하면서 자신들에게 평안을 주는 말씀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삶이 평안하기를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내게 좋은 것만을 적용할때에 말씀이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절대적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삶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과 다를지라도 고통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의 길을 따라 걷는 자리에서 은혜를 잃어버리고 판단자의 자리에서 서는 순간 인간은 위선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개인의 신앙도 그렇고 신학도 그렇습니다. 내 안의 확신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다보면 정작 살아가야 믿음의 방향을 잃어버릴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도 특별하게 일하시는 완전하심을 믿으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모습을 영적 교만으로 책망하셨습니다. 영적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형식은 남아 있지만 생명력을 잃게 합니다. 사사시대도 그랬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각 사람은 자기 확신과 신념 속에서 살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서 있는가입니다.
예언의 목적
요나는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니느웨를 향해 선포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욘 3:4) 이것은 요나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거짓 선지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은 언제나 회개를 향한 부르심을 그 안에 품고 있습니다. 니느웨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예언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예언의 목적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요나의 마음 안에 있었습니다. 그의 발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을 때, 요나는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자신의 기대를 벗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동안에도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대신 자신을 중심에 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심판 자체가 아니라 회개와 회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심을 품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6 예언자 예레미야가 말하였다. “아멘! 여호와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소. 당신이 예언한 말을 여호와께서 이루어 주시면 정말 좋겠소.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안에 있던 모든 물건들을 바빌론에서 이 곳으로 가져오시고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도 다시 이 곳으로 데려오시면 좋겠소.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예언이 틀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본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 지라도 참된 선지자는 고통 받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심판 보다 더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아멘,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소’ 라고 했던 말 안에는 하나님의 본심이 담겨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에는 심판을 넘어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본심이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열했던 원인은 은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영적 우월감과 지식, 방언과 예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풍성함이 오히려 교회를 분열하게 했습니다. 아볼로, 게바, 바울파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 파로 나누어 지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사라진 자리에 비교와 자기자랑과 교만이 들어섭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그 무너진 교회 한가운데 서서 선언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것은 단순한 권면이 아닙니다. 흩어진 교회를 다시 세우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고통을 은혜로 회복시켜 주시고, 악함을 보혈로 씻겨 주시는 능력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참된 길로 나아가게 되고, 교회답게 섬기며 일하게 합니다.
믿음의 길을 내 힘으로만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처가 깊어질수록 내뜻과 다른 이들 앞에서 마음에 불편함이 찾아옵니다. 자기목숨을 버리는 것이 우리의 용기와 본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를 버려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주님이 십자가에서 지셨습니다. 십자가 아래 있는 성도는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고 주안에서 자랑할 뿐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값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지면 나의 낮아짐도 나의 부요함도 내 공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풍진 세상에서 눈물 나는 그 자리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하나님을 앞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믿음 생활은 없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냐처럼 되어 가는가? 하나냐가 예언했던 좋은 말만을 더 듣고 싶어지는가? 삶의 방향을 세상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목자 되신 주님을 따라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비유하셨습니다. 이리떼가 올때 삯군 목자는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우리는 쉽게 비겁하다. 거짓되다라고 정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나의 자녀에게 이리떼들이 헤치려 온다면, 너는 그 자리에서 네 목숨을 바쳐야 한다.라고 말할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 자녀가 이리떼를 피해 맡긴 역할을 못했다고 해서 ‘너는 악하고 거짓되구나. 너는 삯군이다’라고 정죄할 부모가 있겠습니까? 이리떼로 부터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갚을 수 없는 은혜는 어떤 합리적인 설명으로 온전히 설명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플 때, 내가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을 부모라면 압니다. 자녀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끝까지 중보자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양들을 살려내기 위해 모든 위협과 위험을 온 몸으로 막아 내셨습니다. 그 사랑과 믿음의 자리에서 죽음은 더 이상 최종 권세가 아니었고, 오히려 생명이 드러나는 자리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안에 숨겨진 괜찮은 척, 강한 척, 믿는 척했던 모습을 벗겨내고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서야 합니다. 참된 변화에 대한 갈망은 단순히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인간적인 소망이 아닙니다. 때로는 멍에를 지는 것이 고통스럽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대와 다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1900년대 초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 즐겨 불렀던 희망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같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이후 한국 교회에서 새로운 가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우리 할 일이 무엇이냐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형제여 서로 사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자 사랑의 주님 계명 지켜 힘써서 사랑하자. ‘나의 희망’을 묻던 노래가 ‘우리의 사명’을 묻는 찬양으로 바뀐 것입니다.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절망 속에서도 사명을 발견하게 했습니다. 너의 꿈이 무엇이냐 묻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성도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묻고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맡겨 주신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속에서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심판의 경고 앞에서는 겸손히 회개하고, 약속의 말씀 앞에서는 흔들림 없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시선을 돌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믿음의 경주자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