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5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6주

내가 쌓은 두로의 성벽

My Tyre, My Wall

스가랴 9:9-12

9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10 “내가 에브라임에서 전차들을 없애겠고 예루살렘에서 말들을 없애겠다. 전쟁에서 쓰이는 활들은 부러질 것이다. 그 왕이 나라들에게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의 나라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11내 백성아, 내가 너희와 언약을 맺었으며 희생 제물의 피로 그 언약을 봉인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가운데 포로 된 사람을 물 없는 웅덩이에서 풀어 주겠다. 12희망을 가진 너희 포로들아, 너희의 요새로 돌아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이른다. 너희를 옛날보다 두 배로 회복시켜 주겠다. (쉬운 성경)

9 Rejoice, O people of Zion! Shout in triumph, O people of Jerusalem! Look, your king is coming to you.  He is righteous and victorious, yet he is humble, riding on a donkey riding on a donkey’s colt.
10 I will remove the battle chariots from Israel and the warhorses from Jerusalem. I will destroy all the weapons used in battle, and your king will bring peace to the nations. His realm will stretch from sea to sea and from the Euphrates River to the ends of the earth.
11 Because of the covenant I made with you, sealed with blood, I will free your prisoners from death in a waterless dungeon.
12 Come back to the place of safety, all you prisoners who still have hope! I promise this very day that I will repay two blessings for each of your troubles.(New Living Translation)

지난 두주 동안 예레미야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면 백성들에게 다가올 징계를 전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스가랴서는 예언의 배경이 다릅니다. 바벨론에서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징계를  받고 돌아온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스가랴서는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면서 이전에 화려했던 성전의 영광이 과연 회복될까? 그 옛날의 영광이, 정말 다시 우리에게 임할까?” 낙심을 마주한 백성들에게 전했던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오직 하나, 자기 백성과의 관계 회복에 있습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난 백성에게 징계를 내리신 것도, 포로 생활에 지쳐버린 백성에게 “내가 너희를 버려두지 않았다, 결코 잊지 않았다” 말씀하신 것도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זְכַרְיָה, 즈카르야)라는 이름 자체가 설교입니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하나님 잊으신 것 같은 자리에서 스가랴서를 읽을 때마다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려 보기 바랍니다. 때때로 나의 생각과 욕심이 하나님 보다 앞서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서 선수들은 수없는 패배를 거칩니다. 더 강한 상대에게 실패를 반복하면서 경험과 실력을 쌓게 됩니다. 그런데 가장 위대한 실패를 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강해지기 위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 패배자의 자리에 내려가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실패하지 않으려고, 넘어지거나 뒤쳐지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왕은 반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 가장 패배한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세상은 골고다를 실패의 현장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가 결코 스스로 쌓을 수 없는 견고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오늘 본문은 시온 백성들에게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기뻐하고 즐거이 외치라고 시작합니다.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피난처가 되신 그분이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9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겸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עָנִי(아니)는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고난받는 자’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당시에 왕은 군용 말을 탔는데 예수께서는 전투 능력을 상징하는 군마(軍馬)가 아니라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시온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왕이 갑옷을 입고 강한 말을 타고 오실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의로우신 왕이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를 두려워 합니다. 예수께서 순종함으로 사탄의 권세를 이미 무너뜨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그분의 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입을 수 없는 값비싼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의를 “호심경”이라 부릅니다(엡 6:14). 호심경은 심장을 지키는 갑옷과 같습니다. 의의 갑옷은 전쟁터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화살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사단이 자주 사용하는 교만과 결핍이라는 화살로 부터 지켜 주는 것이 의의 호심경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수많은 화살이 성도의 심장을 향해 날아올 때, 의로우신 주님은 성도들이 즐거이 외칠 승리의 이유가 되어 주십니다.

세상은 그 왕을 배척했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배척의 뿌리는 영적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눈을 뜨지 못했고 자신의 죄를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열심과 의로움으로 우리를 형식에 가두거나 영적 교만으로 유혹하지만 의로우신 예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십니다.

둘째, 스스로 강해지려던 요새는 무너집니다.

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 4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 (스가랴 9:3-4)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기대하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즐거움과 기쁨도 영적 교만이 될수 있습니다. 교만은 세상의 즐거움이나 부요함을 통해서도 우리를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며 즐거워하고, 내가 쌓아올린 것들로 의롭게 여기는 것도 영적 교만입니다. 뿐만 아니라 상처로 인해 결핍에 갇혀 사람의 위로만 구하는 것도 사단이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소유로, 하나는 결핍으로 향하지만 결국은 같은 곳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설 수 있다는 자기기만도, 하나님이 계셔도 소용없다는 체념도 의로우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 교만을 보여주는 도시가 바로 두로입니다. 두로는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서 요새를 세웠습니다. 적들로 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 약 800미터 떨어진 섬에 성벽의 높이가 약 45m나 되는 견고한 성읍을 건설하였고 역사속에서 누구도 이 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치 철옹성 같은 요새였습니다. 게다가 온 바다의 상업을 도맡아 하던 나라이므로 해상에서 그들을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은을 티끌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아 올렸다고 표현합니다. 두로는 누구보다 현명했고 부유했고 강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두로에 대한 예언은 크게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두로 왕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씀합니다. “2 사람아, 두로 왕에게 전하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마음에 교만한 생각을 품으며 ‘나는 신이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신의 보좌에 앉아 있다’라고 말한다. 네가 네 자신을 신처럼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 (겔 28:2) 두로의 진짜 문제는 강함이 아니었습니다. 강함을 쌓으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버린 것이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신의 악단’ 영화를 교우들과 함께 보았습니다. 당의 명령에 충성하는 군인들의 신념이 마치 두로가 쌓아 올린 높고 강했던 성벽 같아 보였습니다. 북한 보위부는 외화 지원금을 얻기 위해 지시를 내리고 승리 악단원들과 함께 부흥회를 준비하게 합니다. 이 단원들은 숨어서 주님을 믿는 악단이었습니다. 승리 악단원들은 찬양이 금지된 땅에서 진짜 찬양을 부르지만 보위부 군인들은 당의 명령에 따라 예배를 연극처럼 드립니다. 그들의 심장은 수령님을 향한 충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연기하듯 읊조리던 찬양과 읽어 내려가던 성경의 말씀이 보위부 군인들 내면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수령을 향하던 충성이 주님을 향한 예배가 됩니다. 신의 악단 한 인물의 고백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머리와 생각은 당을 따르는데, 마음과 영혼은 예수를 따르네요. 곧 처형 당할 목숨이니, 오늘 고백하는 거라우.” 예배의 회복은 이처럼 무릎 꿇는 대상을 바꾸어 줍니다.

라틴어 가운데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단어입니다. 성도에게 메멘토 모리는 단순히 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잊는 순간, 우리는 두로 왕을 닮아갑니다. 입술로는 찬양하고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나의 재물과 성공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과 겸손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겸손해지려는 바로 그 순간에도 교만은 속삭입니다. 찬양하는 자리에서도, 기도하는 자리에서도, 심지어 섬기는 자리에서도 “네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 네가 이만큼 했으면 하나님께서 네 편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라는 유혹입니다. 결국 교만은 인생과 영혼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독입니다. 실제로 역사속에서 두로는 동방을 정벌하던 알렉산더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7개월의 항전 끝에 마침내 함락되고 불에 탄 재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권력도, 재물도 언젠가는 다 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인생은 다릅니다. 시작이 좋은 인생은 많아도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인생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은 더 강해지고 더 높이 쌓으라고 요구하지만 성도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이 아무리 정교해도 하나님의 뜻보다 지혜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약함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때, 평화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10 “내가 에브라임에서 전차들을 없애겠고 예루살렘에서 말들을 없애겠다. 전쟁에서 쓰이는 활들은 부러질 것이다. 그 왕이 나라들에게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의 나라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요새로 돌아올 때 참된 쉼을 얻습니다

11 내 백성아, 내가 너희와 언약을 맺었으며 희생 제물의 피로 그 언약을 봉인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가운데 포로 된 사람을 물 없는 웅덩이에서 풀어 주겠다.

믿음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실패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서 행하신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진짜 삶의 왕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심으로 죄와 사망의 자리를 생명과 화목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성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두려워 말고 내가 찢긴 살과 흘린 피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피의 언약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주님의 새 언약입니다. 이것은 오래전 선지자들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맺고 결단했지만 그 언약을 잊을 때도 있었고,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12 희망을 가진 너희 포로들아, 너희의 요새로 돌아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이른다. 너희를 옛날보다 두 배로 회복시켜 주겠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9-30) 주님께서 멍에를 먼저 지셨고, 멍에를 지고 하는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내 멍에가 무겁지 않고, 쉽고 가볍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이 이미 멍에를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왕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전쟁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끊어 버리셨습니다. 칼과 창이 아니라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 인간의 죄와 부정한 것들을 씻겨 내셨습니다. 불신앙으로 인한 절망과 미움, 시기 가운데 갇혀 살던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오신 예수를 인해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풍성한 삶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따라 하루하루 순종의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 예배의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으로 자유를 누리며 기쁨을 회복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내 삶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더 간절히 원할때가 많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의 자리에 나를 앉혀 놓았습니다. 지금도 예배할 수 없는 곳에서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들의 삶이 우리와 다른 삶일까요? 우리는 자유 안에서 일상에 묻혀 식어진 마음을 발견하며 우리에게 있는 그 간절함이 내 삶의 문제에만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두로가 스스로 쌓아올린 요새도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뒤에 감추어진 결핍과 상처와 불안, 내 힘으로 애쓰는 감정들, 내 인생을 내 힘으로 붙들려고 하는 교만은 내 안에 높게 쌓아 올린 벽입니다. 우리는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서 나만 아는 두로의 성벽을 쌓았지만, 그분은 무너짐의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이 벽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질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예배의 회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겸손의 왕은 우리를 회복시키러 오셨습니다. 형식이 아니라 기쁨으로, 은혜로 나아오는 예배자로 우리를 세우십니다. 우리를 은혜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찬양하기 원합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실망한 이 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찬송가 27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