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강림절 제 9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When Words Run Out, the Spirit Prays
로마서 8:26~30
26.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9.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셨고,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쉬운성경)
26 And the Holy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For example, we don’t know what God wants us to pray for. But the Holy Spirit prays for us with groanings that cannot be expressed in words. 27 And the Father who knows all hearts knows what the Spirit is saying, for the Spirit pleads for us believers[l] in harmony with God’s own will. 28 And we know that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m]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29 For God knew his people in advance, and he chose them to become like his Son,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 30 And having chosen them, he called them to come to him. And having called them, he gave them right standing with himself. And having given them right standing, he gave them his glory.(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되면 삶의 고민과 흔들림이 멈추고 믿음이 더욱 분명하고 선명해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현실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에게도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오고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시간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1) 라고 탄식합니다. 우리 안에는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죄의 세력이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팽팽하게 맞서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내면의 정직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거룩한 싸움의 한복판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선포합니다.
1.우리의 연약함을 중보하시는 성령님
26.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이 무엇일까요?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내 힘으로 할수 없는 한계에 부딪힐 때 우리에게는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그 사실을 깊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기쁨은 내가 구한 대로 응답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를 누리는 데 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있어도 그분의 선하심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와 같지 않을수가 있습니다. 기도한 대로 되지 않는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바울 안에 선한 일 행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를 이끌었습니다. 고린도 후서의 고백에 보면, 그의 사역속에서 복음의 영광은 완전한 그릇이 아니라,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나 자신의 연약함 속에 담겨 있지만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하려고 애써도 결국 우리가 감추고 싶었던 연약함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만 같은 상황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조차,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자리 그 앞에 서는 것이 기도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그 어떤 언어와 표현으로도 담아낼 수 없어 그저 눈물만 흐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간절히 갈망한다면, 오히려 연약함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분이 아니라 깊숙히 들어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무슨 말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물로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그 시간에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돕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단지 곁에 머무는 차원의 위로만이 아니라 짐을 함께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약함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소망의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시가 있습니다.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라는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슬픔이나 절망이 전혀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지은 작사자 엘리자 히윗(Eliza E. Hewitt, 1851-1920) 여사는 1887년 학교에서 불량학생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폭력으로 척추 부상을 입고 오랜 병상 생활을 하던 중, 몸이 완쾌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영혼에 깊숙이 스며드는 햇살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고 기도하며 이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오늘 내 영혼에 햇빛이 비치네. 이 세상 하늘에서 빛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밝은 빛이라네. 예수님이 나의 빛이기 때문이라네. 오늘 내 영혼에 한 음악이 흐른다네. 나의 왕되신 분께 찬양을 드린다네. 내게 귀 기울이시는 예수님이 들으신다네. 입으로 노래할 수 없는 영혼의 찬송들을.
몸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성령 안에서 찬양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노래할 수 없는 영혼의 찬송들을 예수님이 들으신다는 고백은 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성령이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것, 이미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그 절망의 자리에 멈추어 서는 것이 아니라 영광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 영광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기복적인 성공의 간증이 아니라 성령의 탄식을 말합니다. 서로의 시간표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결코 헛된 시간이 없습니다.
2.부르심의 증거
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는 우리의 탄식의 기도, 우리가 겪는 세상의 수많은 고난도 포함 됩니다. 오늘의 세상을 보십시오. 이상 기후와 재난 속에 신음하고,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 권력과 정치의 자리에는 다툼과 폭력이 흐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세상이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깨어짐은 먼 곳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선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갑자기 찾아오는 아픔과 설명할 수 없는 고난 앞에 설 때가 있고, 세상속의 불의한 일 앞에 가슴 아픈 탄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괜찮아 다 잘될거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모든 것이 잘될 것을 바라며 그 말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증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신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통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해치기 위해서 모의하고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 선으로 바꾸사 요셉의 생애 가운데 협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선을 이룬 것이지, 요셉이 선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겪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의 일생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가 하는 일이 잘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선을 이루는 사람은 고난 가운데 그 보다 더 큰 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인내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요셉이 자신의 손으로 형들이 주었던 고통을 되 갚을 수 있는 위치에서 했던 말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입니다.
내 시간과 재능은 지금 누구를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까? 내 삶은 무엇을 위해 준비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교회에서의 나, 가정과 일터에서의 나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삶의 모든 순간이 예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내 삶에 더해지는 무게와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우리와 늘 동행하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29.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셨고,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부르심에는 인간의 그 어떤 자격과 조건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선택받은 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것도 자랑할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자격이 포함된다면 구원의 완전성이 상실됩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힘입어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 분의 사랑 앞에 서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삶으로 세워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그렇게 빚어 가십니다. 우리 눈에는 불안과 불확실한 시간이 더디고 답답하게 느껴져 피하고만 싶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 속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시는 더 크신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완성하시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 자리는 두려움의 자리가 아니라 기쁨의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아가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만날 때가 있고,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는 나 혼자만의 아픈 시간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절절한 마음으로 붙들고 있는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이든, 아픔의 시간이든, 혹은 평탄하고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시간이든 하나님의 손에서 버려지는 시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을 사용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아직 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바울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의 최종적 구원은 반드시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과 관계 맺는 삶을 통해 그 사랑을 실제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가르침을 배울 책임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미 성령께서 탄식속에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엘리자 히윗의 고백처럼 몸의 고통은 그대로인데 내 영혼에는 찬양이 흐르는 그 은혜의 감격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부르심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으로, 특권이 아니라 선교적 삶으로, 의심이 아니라 확신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 변화의 과정이 성령의 역사이고 이 회복의 과정이 거룩한 삶입니다.
성령강림절 제 8주
함께 자라게 두어라
Let Them Grow Together
마태복음 13:24~30, 36~43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또 다른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심은 사람에 빗댈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원수가 와서 밀 사이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26밀이 자라서 낟알이 익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27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했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디서 이런 가라지가 나왔을까요?’ 28주인이 대답했다. ‘원수가 그랬구나.’ 종들이 주인에게 물었다. ‘저희가 가서 가라지를 다 뽑아 버릴까요?’ 29주인이 대답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뽑을 때에 밀도 함께 뽑힐라. 30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놔 두어라. 추수할 때,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 묶어서 불에 태우고, 밀은 거두어 곳간에 쌓으라고 하겠다.'”
오늘 본문은 가라지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며 씨 뿌리는 비유 이후 가리지를 심는 존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어떤 밭인지를 돌아보았습니다. 무감각한 길가, 뿌리 없는 자갈밭, 염려와 재물로 뒤덮인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입니다. 밭에 난 가라지는 무엇일까요? 마음의 밭에 심겨지는 가라지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믿도록 심는 씨입니다. 남보다 내가 먼저여야 한다는 욕심입니다. 끊임없이 악에 의해 만들어 지는 우상들입니다. 문제는 이 우상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조차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에 작은 이상이 느껴지면 약을 챙겨 먹고 병원에 다녀옵니다. 내 몸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정작 내 삶의 자리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심각하게 들여다 보지 않습니다. 믿음도 훈련하지 않으면 점점 무뎌집니다. 그 이유가 원수가 가라지를 심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연약해지면 삶의 작은 흔들림 하나에도 쉽게 무너지고 힘겨워집니다.
본문속에 주인의 종들은 눈 앞에 있는 가라지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주인에게 두가지 질문을 합니다. “어디서 이 가라지가 나왔을까요?” “저희가 가서 가라지를 다 뽑아 버릴까요?” 주인은 두 질문에 답하는데 “아니다.”입니다. 왜 주인은 선과 악이 분명한데 추수때까지 참고 기다리고 하신 것일까요? 의인과 악인이 한 세상, 한 사회, 한 공동체 안에 섞여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37절 38절 보시겠습니다. 37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이다. 38그리고 밭은 세상이다.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모든 아들들이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다.
무엇이 하늘나라의 아들과 악한 자의 아들을 가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아들들이 세상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1. 조급함의 유혹 (가서 뽑아버릴까요?)
종들의 질문 안에 조급함이 있습니다. “어디서 이 가라지가 나왔을까?” 라는 첫번째 질문은 원인을 찾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질문은 “가서 뽑아버릴까요?” 자신들이 해결하겠다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에 주인은 왜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가라지는 낟알이 맺히기 전까지 밀과 구별되지 않아서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 할 수 없었고,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다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원수는 가리지를 심고 갈뿐이지 주의 자녀들을 헤칠 힘이 없습니다. 어둠을 흩어서 뿌림으로 빛의 자녀들이 혼란에 빠지도록 할 뿐입니다.
우리는 악의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려고 하다가 조급함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조급함으로 인해 오히려 악에 주목하다가 하나님이 선하시지 않거나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고 여기게 되는 혼란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 질문은 성경에서도 욥이 이미 물었던 질문이고, 우리도 여전히 완전한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들은 악의 문제에 열중해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주인이 한 대답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라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시적인 방법과 힘으로 악을 이길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검을 잡으면 필연적으로 검으로 망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30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놔 두어라. 추수할 때,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 묶어서 불에 태우고, 밀은 거두어 곳간에 쌓으라고 하겠다.
성경은 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엔 하나님의 공의가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그 순간에는 너무도 크게 느껴졌던 일들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니라 깨닫는 때가 있습니다. 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놔 두라는 것은 심고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끝까지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놔두라 아페테(ἄφετε)는 원래 “허락하다, 그대로 두다”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자리를 내어드리는 의지적인 허용입니다. 믿음은 내게 힘이 있음에도 하나님의 뜻에 나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악은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 나가며, 내 상처에 붙들리고 타인과 비교하며 낙심하고, 미움과 정죄가 뿌리내릴 때 선하신 하나님을 더욱 더 바라보며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강요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으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걸음은 고통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이루어 낸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의롭다 인정받은 자들을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겠다고. 그날에 의인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라고.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포기하지 않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점검할 것은 하나입니다. 내가 정말로 예수를 믿고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할 때, 바로 그 순간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심고 자라게 하시는 분을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내 손으로 판단하고 심판하려는 조급함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날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고통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라지로 인해 부드러운 마음이 굳어지고, 축복의 입술이 막히고, 조각난 마음으로 인해 믿음의 걸음이 멈춰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도구화 되고 하나님의 자리를 수많은 현대 문명들이 대체해 버리는 시대속에서 관계속에 담긴 진실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깨닫고, 선함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상품과 도구로 삼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라고 하신 감탄은 우리를 다시 깨우는 말씀입니다. 악함이 선함을 이길수 없고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방향을 잡고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선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빠르게 답을 얻는 시대에 기다림을 어려워하는 우리가 조급함을 이기는 길이 무엇입니까? 온전한 신뢰를 이루는 것입니다. 내 손에 있다고 생각하면 조급해 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심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을 뿐입니다. 말씀을 자라게 하여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구원의 신비이며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은 예일대학교 신학생들에게 4세기 사막 교부들의 영성을 가르쳤습니다. 그 강의를 엮은 책 ‘마음의 길’에서 그는 사막 교부 마카리우스에 관한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누가 교부 마카리우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장황한 말을 늘어놓을 필요가 전혀 없다. 손을 내밀고 주여 주께서 아시오니 주의 뜻대로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아뢰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도 갈등이 더 거세지거든 주여 도와주소서 라고 아뢰라.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분이 훤히 아시고 자비를 베푸신다.”
온전한 신뢰는 조급함의 유혹속에서도 하나님의 때가 이를때까지 흐트러지지 않는 끈질김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붙잡고 있던 문제의 자리에서 벗어나 기도의 자리에서 설때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2. 영적 나태함 (항상 깨어 있어라)
가라지는 하루아침에 자라지 않습니다. 원수가 가라지 씨를 심는 때는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입니다. 육신의 잠이 아닙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몇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결국에 잠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를 두드리기 때문입니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항상 깨어 있어라!’”(막 13:37)
영적으로 잠들면 우리는 내 마음에 자꾸 집중하게 됩니다. 내 감정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동역자들을 삶에서 밀어내게 됩니다. 삶이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여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작은 타협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그 틈을 통해 죄의 영향력이 자라게 됩니다. 무뎌진 마음, 미루어 둔 마음, 적당히 타협하는 삶, 외면하는 마음, 굳어진 마음, 가시돋힌 말은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주인이 여행을 떠난 사이 종들은 주인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갑자기 돌아오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미루어 두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삶에만 함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골로새서 4:2) 성경에서 깨어 있으라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엎어진 자리가 아니라 온전하게 채워 주시는 그 자리에서 말씀의 은혜를 누리기 바랍니다. 예배는 주를 믿는 자들의 뛰는 심장과 같고, 기도는 성도들의 호흡과 같습니다. 심장이 뛰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고, 호흡하지 않으면 심장은 멈춰버리게 됩니다. 성령의 기름을 채우기 바랍니다.
만약 인생의 마지막 시간이 주어져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 한통을 남겨야 한다면 그 글에 남긴 내용은 일상의 언어들과 다를 것입니다. 마지막을 아는 사람의 시간은 그렇게 달라집니다. 우리의 오늘은 단순히 내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힘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앎에 그치고 삶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미루어 두고 외면하고 있는 그 틈이 바로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자리입니다.
가라지가 다 뽑혀 불에 태워지듯, 세상의 마지막 날도 그러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심판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시고 새호흡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전하는 일에 온 마음을 쏟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가는 길에는 여전히 가라지가 밀 사이에 자라고 있어서 눈물이 있고, 고통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쉬운 길을 택하고 싶어합니다. 믿음도 적당히, 헌신도 적당히, 이만하면 된다고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구원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그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걸어온 인생의 길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금도 그 손길로 세상의 어둔 그늘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보내진 자리에서 그 나라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악의 공격을 받으시던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원수가 심어 놓은 죄를 뽑아내는 대신, 그 죄 값을 스스로 짊어지기 위해 십자가로 걸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회복은 값싸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라는 고난의 과정을 통과해서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기쁨은 세상의 어떤 일에도 갇히지 않고 제한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고 특별한 백성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의 권위 아래 머물러야 합니다. 어둔 밤에 원수가 뿌려 놓은 씨들이 자라서 선한 일을 하는 시간속에서도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 나라의 것들로 가득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가라지가 무성한 밭 한가운데 서 있을 때에도, 그 밭을 붙들고 계신 분이 하늘과 땅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