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9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11주

다시 걷게 하시는 은혜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Grace That Makes Us Walk Again (Why Are You Here?)

열왕기상 19:9~18

9 시내 산에 도착한 엘리야는 한 동굴 속에 들어가 밤을 지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야,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10 엘리야가 대답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저는 언제나 제 힘을 다해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제단을 부수고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죽였습니다. 살아 남은 예언자는 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저까지 죽이려 합니다.” 11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산 위에서 내 앞에 서 있어라. 내가 네 앞으로 지나가겠다.” 그러더니 매우 센 바람이 불어와 여호와 앞에서 산을 가르고 큰 바위를 쪼갰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불고 난 뒤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지진 속에도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12 지진이 일어난 뒤에 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이 난 뒤에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동굴 입구에 섰습니다. 그 때에 어떤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엘리야야!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14 엘리야가 대답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저는 언제나 제 힘을 다해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제단을 부수고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죽였습니다. 살아 남은 예언자는 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저까지 죽이려 합니다.” 15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왔던 광야 길로 돌아가 다마스커스로 가거라. 그 성에 들어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으로 세워라. 16 그런 다음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므홀라 사람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는 너의 뒤를 이을 예언자가 될 것이다. 17 하사엘의 칼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은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은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18 또한 내가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는데, 그들은 한 번도 바알에게 절한 적이 없고 바알의 우상에게 입을 맞춘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쉬운성경)

9 There he came to a cave, where he spent the night. But the Lord said to him, “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 10 Elijah replied, “I have zealously served the Lord God Almighty. But the people of Israel have broken their covenant with you, torn down your altars, and killed every one of your prophets. I am the only one left, and now they are trying to kill me, too.” 11 “Go out and stand before me on the mountain,” the Lord told him. And as Elijah stood there, the Lord passed by, and a mighty windstorm hit the mountain. It was such a terrible blast that the rocks were torn loose, but the Lord was not in the wind. After the wind there was an earthquake, but the Lord was not in the earthquake. 12 And after the earthquake there was a fire, but the Lord was not in the fire. And after the fire there was the sound of a gentle whisper. 13 When Elijah heard it, he wrapped his face in his cloak and went out and stood at the entrance of the cave. And a voice said, “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 14 He replied again, “I have zealously served the Lord God Almighty. But the people of Israel have broken their covenant with you, torn down your altars, and killed every one of your prophets. I am the only one left, and now they are trying to kill me, too.” 15 Then the Lord told him, “Go back the same way you came, and travel to the wilderness of Damascus. When you arrive there, anoint Hazael to be king of Aram. 16 Then anoint Jehu grandson of Nimshi to be king of Israel, and anoint Elisha son of Shaphat from the town of Abel-meholah to replace you as my prophet. 17 Anyone who escapes from Hazael will be killed by Jehu, and those who escape Jehu will be killed by Elisha! 18 Yet I will preserve 7,000 others in Israel who have never bowed down to Baal or kissed him!”(New Living Translation)

지난 주 우리는 얍복강가에서 홀로 씨름하던 야곱을 만났습니다. 그는 밤새 하나님을 붙잡았고, 엉덩관절이 어긋나는 아픔 속에서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는 그 당시 영적인 거장이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던 바알 선지자들 450명과 홀로 대결합니다. 450대 1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바알신을 부르짖던 선지자들 앞에서 불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을 보며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보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땅은 3년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바짝 말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자 하늘이 캄캄해지고,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큰 비가 내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강한 능력을 경험하고도 무너진 엘리야를 다시 순종의 걸음을 걷게 하시는 은혜를 보게 합니다.

1.무너진 자를 먹이시는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는 승리를 경험한 후 이세벨이 보낸 사신의 말로 인해, 두려워 하여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이스르엘에서 브엘세바까지 도피한 엘리야는 광야 길로 다시 하루를 더 걸어 들어가 한 로뎀나무 아래 몸을 눕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을까요? 갈멜산에서의 선지자가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거룩한 길을 애쓰며 걷는 성도의 삶에도 수많은 유혹과 씨름해야 할 문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뎀나무 밑에 있던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회복시켜 주셨던 하나님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죽기를 청하는 그 두려움에서 누가 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엘리야를 책망하시지 않으시며 주의 천사를 통해 어루만져 주시고,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뜨겁게 달군 돌에 구워 낸 빵과 물로 엘리야의 육신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엘리야의 육신은 하나님의 이러한 자상한 보살핌으로 인하여 음식을 먹고 사십을 밤낮을 걸으며, 하나님의 산 호렙에까지 이를 수 있는 힘을 비축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이러한 영적침체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보다 두려움을 주는 이세벨의 말이 마음 안에 더 크게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가장 뜨겁게 은혜 받고도, 눈물의 승리를 거두고도, 이유 없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번아웃의 자리가 찾아옵니다. 도망가고 싶고, 돌아가고 싶은 자리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 열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마음이 허해지는 그런 때입니다. 마치  3년 6개월 비가 오지 않았던 땅처럼 마음이 굳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고 회복시키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성도는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거룩한 삶을 배워 나가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된 바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평생 이방인 선교사로 복음을 전하며 살수 있던 힘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두려움을 덜어 내시는 분입니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항상 희망과 생기가 넘치는 시절만 있지는 않습니다. 영적인 어려움에 빠져서 낙심하여 지낼 때도 있습니다.

얼마전 찬양을 들으며 무심코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을 읽어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한참을 읽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성도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남긴 마지막 신앙의 고백, 하나님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교우의 눈물의 간증, 돌아가고 싶지만 여전히 상처안에서 숨어있는 고통, 자신의 삶 속에서 씨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살고 싶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누군가의 짧은 고백도 있었습니다. 간절한 고백들이 로뎀나무 아래로 찾아온 엘리야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신음하던 엘리야를 먼저 먹이시고 회복시키신후 사명을 주셨다면,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동일합니다. 

2.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은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고 기쁨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부르심까지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소명은 분명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알게 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한때는 기쁨으로 감당했던 그 일이, 지금은 버거운 짐처럼 느껴지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명은 우리를 영적 침체 속에 그냥 머물러 있게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서 우리를 먹이시고 다시 걷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에서 엘리야를 먹이신 후에 호렙산 굴 앞에서 다시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그의 몸은 회복 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엘리야야,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엘리야였지만 엘리야는 “저밖에 없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혼자라고 느낀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고립감과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생활하며 우리는 홀로 있는 것 같은 마음이 들때가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혼자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 감정 안에 갇히면 두려움은 더 커지고 시야는 좁아져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질과 감정이 우리의 믿음을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삶의 기반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한없이 연약해지고 하나님의 마음과 점점 멀어져 갑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여호와께서 그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고,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 지진 가운데도,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개역개정은 이 소리를 세미한 소리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로 콜 데마마 다카 (קוֹל דְּמָמָה דַקָּה )입니다. 고요하고 미세한 침묵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이 침묵 뒤에 다시 네가 왔던 광야 길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도 삶의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인 순간들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자책하고, 내 안의 상처로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그 상처의 이유를 하나님께 돌리며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오래 묵혀둔 그 상처가, 잘 살아내고 싶어 발버둥 쳤던 그 시간들이 예배의 자리, 은혜의 자리에 서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새 명령을 주셨습니다. 광야 길로 돌아가 다마스커스로 가서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그리고 엘리사를 그의 후계자 선지자로 세우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달라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하사엘과 예후에게 가서 그들을 왕으로 세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7 하사엘의 칼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은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은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하사엘의 군대는 이스라엘을 침공했고 예후는 아합의 왕가를 심판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의 군대는 피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에게 주어진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재능은 자격이 아니라 은혜로 맡겨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엘리야는 두려움이 사라진 후가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다시 걸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자를 먹이시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걷게 하십니다.

히즈윌의 날개 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매일 성전 뜰만 밟고 서성이다 / 늘 그만큼만 주님을 의지하다/ 내 것인 줄 알았던 내 삶이 /  이리저리 흔들리고 무너질 때/ 주님, 나는 주님 없이는 /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 주님, 나는 주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 주님과 함께 날아오를 때/ 높은 산은 점점 더 낮아지고/ 삶의 골짜기마다 흘러넘치는 / 주님의 은혜/ 이제껏 살게 하신 주님의 은혜가 / 이후의 삶도 지켜주시리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날개로 /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날개로 날아오르리

주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우리가 그 은혜로 오늘도 사명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명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네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엘리야가 있어야 할 자리는 떨어져 나간 로뎀나무 아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고, 칠천 명의 남은 자 가운데, 엘리야는 다시 자기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이처럼 은혜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낙심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있던 주어진 사명을 인식하게 합니다.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은 절망이 막을 수 없습니다. 폭풍이 다 지나간 다음이 아니라, 폭풍이 여전히 그대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순종의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멈춰 섰던 그 자리가 다시 걷는 자리가 되는 것은, 우리를 붙드시고 끝까지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시며, 두려워 멈추었던 자리, 혼자라 생각하여 포기하려고 했던 자리에서 우리를 먹이시고 재우시고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두려움과 염려 앞에, 이미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서 도망쳤던 내 삶의 로뎀나무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먹이고 재우시며 다시 일어나 가라고 하시는 그 자리는 어디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로뎀나무 아래에서 주시는 위로는 우리를 다시 일어나 걷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말씀을 살아내는 힘은 내 삶의 바람과 지진과 불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걸음을 내딛는 데서 시작됩니다. “저밖에 없습니다” 라고 주저 앉아 있는 마음을 주님이 먹이시고 재우십니다. 그리고 “일어나 걸어라.” 말씀하시며 찾아오십니다. 혼자 걷는 것 같아도 함께 걷고 있는 길입니다. 로뎀나무의 위로에만 멈추어 있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의 길을 향해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위로하시며 다시 사명을 허락하시고 생명을 살리십니다. 무너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은혜 붙들고 순종의 자리에서 걷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0802 2026

성령강림절 제 10주

우리 안에 새겨 두신 은혜의 흔적

The Scar He Chose to Leave

창세기 32:22~32

22그날 밤 야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명의 아들을 데리고 얍복 강 나루를 건넜다. 23그는 자기의 가족 모두를 강 건너로 보낸 다음 자기의 재산도 모두 강 건너로 보냈다. 24그리하여 야곱이 혼자 남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날이 밝을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25그 사람은 자기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관절을 쳤다. 그 때문에 야곱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엉덩관절이 어긋나게 되었다. 26그런 다음 그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였다. “날이 새려고 하니 날 놓아다오.” 그러나 야곱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게 복을 빌어 주지 않으시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27그 사람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28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였다. “이제부터는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 이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고 사람들과도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 29  야곱이 말하였다. “부디 어르신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네가 내 이름을 묻느냐?” 그런 다음 그는 거기에서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30그래서 야곱은 그 곳을 브니엘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었구나. 그런데도 아직 살아 있다니!” 31  야곱이 브니엘을 지나갈 때 해가 솟아올랐다. 그는 엉덩관절을 다쳐서 절뚝거리며 걸었다. 32이런 까닭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엉덩관절에 붙어 있는 힘줄을 먹지 않는다. 야곱이 그 힘줄 가까이에 있는 엉덩관절을 다쳤기 때문이다. (쉬운성경)


22 During the night Jacob got up and took his two wives, his two servant wives, and his eleven sons and crossed the Jabbok River with them. 23 After taking them to the other side, he sent over all his possessions. 24 This left Jacob all alone in the camp, and a man came and wrestled with him until the dawn began to break. 25 When the man saw that he would not win the match, he touched Jacob’s hip and wrenched it out of its socket. 26 Then the man said, “Let me go, for the dawn is breaking!” But Jacob said, “I will not let you go unless you bless me.” 27 “What is your name?” the man asked. He replied, “Jacob.” 28 “Your name will no longer be Jacob,” the man told him. “From now on you will be called Israel, because you have fought with God and with men and have won.” 29 “Please tell me your name,” Jacob said. “Why do you want to know my name?” the man replied. Then he blessed Jacob there. 30 Jacob named the place Peniel (which means “face of God”), for he said, “I have seen God face to face, yet my life has been spared.” 31 The sun was rising as Jacob left Peniel, and he was limping because of the injury to his hip. 32 (Even today the people of Israel don’t eat the tendon near the hip socket because of what happened that night when the man strained the tendon of Jacob’s hip.(NLT)

우리는 태어나 많은 것을 손에 쥐는 연습을 하며 삽니다. 어린아이는 장난감을 손에 쥐고 빼앗기지 않으려 힘을 줍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내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것을 움켜 쥔 채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속의 야곱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강 건너로 보내고 홀로 남은 밤에 무언가를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홀로 남은 밤 우리는 무엇과 씨름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을 강 건너편으로 보낸 홀로 남은 밤에 역사하십니다. 그날 밤 야곱은 두 아내, 두 여종, 열한명의 아들들과 지난 세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재산들을 강 건너편에 보내 놓고 홀로 남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20년간 라반의 집에서 얻어낸 것이었고 자신을 지탱해 온 전부였습니다.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은 야곱을 불안과 두려움에 짓눌리게 했을 것입니다. 20년 전, 늙으신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도망쳤던 그 날의 빚이, 이제 400명의 군사가 되어 자신 앞에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열매로부터 도망칠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인간의 연약함만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인생의 그 절박한 순간 혼자 있는 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날 밤 야곱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면, 먼저 야곱이라는 사람이 평생 무엇과 씨름하며 살아왔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났고 장자의 축복을 얻기 위해 씨름했습니다. 20년간 장인 라반과 씨름하며 재산을 쌓기 위해 씨름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얍복강 나루에 홀로 남은 그 밤, 야곱의 씨름의 대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경은 씨름하던 상대를 ‘그 사람’ 이라고 부릅니다. 25 그 사람은 자기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관절을 쳤다. 그 때문에 야곱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엉덩관절이 어긋나게 되었다. 씨름을 마친 후 야곱은 새 이름을 받게 됩니다. NLT성경은, you have fought with God으로 번역합니다. 그날 밤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고 밤새 씨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길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 날밤 야곱은 하나님과의 씨름 속에서 20년 동안 자기 힘으로 버텨 온 자신 안에 옛사람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 주셨습니다.

    야곱은 밤새 붙들고 놓지 않다가 야레크(יָרֵךְ, yarek)  라고 하는 엉덩이 관절을 다쳐서 평생 절뚝거리게 됩니다. 야레크 (יָרֵךְ, yarek) 라는 단어는 종종 후손·생산력의 자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입니다. 야곱의 직계 자손들이 66명이니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창 46:27), 허리에서 나온 자라고 번역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히브리어 단어도 야레크(יָרֵךְ, yarek) 입니다. 하나님이 정확히 이 지점을 치셨다는 것은 야곱의 힘을 상징하는 근원을 꺾으시고 새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야곱이 이긴자라는 새이름을 얻게 되지만 절뚝거리는 삶으로 마무리 됩니다.

    우리는 자기 신념의 틀 안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약속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의 문제 앞에서는 자꾸 넘어지고 내 힘으로 버티려 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 하나님은 야곱이 의지하던 힘을 꺾으셨습니다. 고집과 이기심, 하나됨을 막아버리는 우리 안에 평생 붙잡고 있던 그 손을 펴는 것입니다. 비록 절뚝거리며 걷지만 새이름으로 첫걸음을 떼는 것입니다. 이김을 주신 주님 바라보며 적당히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다 드리며 주가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2. 힘이 꺾여진 자리에서 받은 은혜

    사람의 삶에는 수많은 광야가 찾아옵니다. 광야는 내 힘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그 곳에서 생각이 뒤집히고 마음 안에 하나님의 새 법이 새겨집니다.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힘을 꺾으신 자리에서 새 이름을 허락하셨습니다. 찬양 “나” 는 송명희 시인의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그녀에게 남들과 다른 삶의 고난을 주셨지만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이라 고백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그녀에게 공평하심은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앞에 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동일한 은혜였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성취와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라 요구하지만 이 찬양의 고백은 세상이 채울 수 없는 은혜를 깨달은 자의 고백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힘이 꺾인 자리에서 새 이름을 받았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힘이 꺾일 때 비로소 참된 이름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에게든지 그 십자가 앞으로 나아올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그 피 값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달라집니다. 우리의 아픔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픔이 있는 그 자리에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이 먼저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닿는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리한 상황과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판단 기준이 되어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주 씨름하고 넘어지는 상황은 무엇입니까? 그릇된 마음이 만들어 놓은 그 틀을 깨고 들어 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십시오,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채워 나가는 삶이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입니다.

    시내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도 똑같았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지 40일이 되도록 내려오지 않자, 백성은 보이지 않는 약속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아론에게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 기록합니다. 완고함이란 멍에를 메기 싫어 목을 뻣뻣이 세우고 버티는 황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서 목을 곧추세우고 버티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죄의 본질입니다.

    시대마다 사람들은 무엇을 자신의 마음의 자리에 앉힐 것인가를 바꾸어 왔습니다. 율법을 앉히고, 이성을 앉히고, 오늘날은 감성과 느낌을 진리의 자리에 앉힙니다. 감정과 기분이 태도가 되고 경험이 되고 삶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내 감정과 기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옛 자아의 습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십시오. 우리의 연약한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올때 하나님의 얼굴과 나의 연약한 그 모습이 만나는 그 자리에서 참된 은혜가 회복됩니다.

    누구에게나 피할수 없는 현실은 찾아옵니다. 멀리에서 보면 부러운 누군가의 삶도 가까이에서 보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눈물의 기도의 자리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버틸 수 없는 삶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 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매일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나의 인생을 내 힘으로 끝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지체들을 만나기 전에,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예배에 오기 전에 우리는 먼저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삶의 예배를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믿음생활의 균형은 하나님 앞에 서는 삶이 가장 먼저임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언젠가 절뚝이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우리는 지으신 모습 그대로 서게 될 것입니다.

    주의 사랑 안에 거할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도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온전한 성전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참 자아를 회복하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언덕을 오르셨고, 교회의 모퉁잇 돌이 되셨습니다.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될때 우리 안에 새겨진 십자가의 흔적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릴 새롭게 하신 증거입니다. 마귀는 참소하며 우리를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도록 속삭입니다. 세상속에서 형성되는 수많은 평가와 정죄는 거짓자아를 만들어 내지만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구원의 은혜는 세상의 부요함에 있지 않고, 세상을 이기신 주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데서 얻게 됩니다

    오래전 저는 사고로 의식을 잃었던 적이 있습니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어 다섯 시간을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의식을 찾고 눈을 떴을 때 저는 제 인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오른손 마디마디가 차갑게 굳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불편한 손을 볼 때 저는 야곱의 절뚝거림을 생각합니다. 제 몸에 남겨진 그 흔적은, 여전히 단단하고 뻣뻣한 제 삶 속에서 하나님이 저를 살려주셨다는 감사의 고백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매일 주가 주신 살과 피를 매일의 양식 삼아 먹어야 살아납니다. 지금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잃고 싶지 않아 밤새 씨름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내 힘으로 내려놓을 수 없음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올려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밤 이후 야곱은 다리를 절뚝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절뚝이던 야곱은 에서에게로 가서 일곱 번 땅에 엎드렸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씨름의 중심에 두지 않았기에 몸을 낮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절뚝거리며 오는 동생을 보며 에서는 두팔로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함께 울었습니다. 형제 사이에 있었던 죄책감과 정죄심, 억울함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 안에서 서로가 온전히 이어졌습니다. 그 절뚝거림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밤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30그래서 야곱은 그 곳을 브니엘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었구나. 그런데도 아직 살아 있다니!” 31  야곱이 브니엘을 지나갈 때 해가 솟아올랐다. 그는 엉덩관절을 다쳐서 절뚝거리며 걸었다. 32이런 까닭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엉덩관절에 붙어 있는 힘줄을 먹지 않는다. 야곱이 그 힘줄 가까이에 있는 엉덩관절을 다쳤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삶에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힘을 꺾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걸음이 증명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으로 값을 다 치르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아름답고 위대한 삶으로 빚어 가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미 다 부서지고 무너진 존재입니다. 성도는 이제 기도의 무릎으로 절뚝이며 나아갈 뿐입니다.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움켜진 손을 펴고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새 아침을 맞이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