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6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9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When Words Run Out, the Spirit Prays

로마서 8:26~30

26.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9.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셨고,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쉬운성경)

26 And the Holy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For example, we don’t know what God wants us to pray for. But the Holy Spirit prays for us with groanings that cannot be expressed in words. 27 And the Father who knows all hearts knows what the Spirit is saying, for the Spirit pleads for us believers[l] in harmony with God’s own will. 28 And we know that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m]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29 For God knew his people in advance, and he chose them to become like his Son,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 30 And having chosen them, he called them to come to him. And having called them, he gave them right standing with himself. And having given them right standing, he gave them his glory.(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되면 삶의 고민과 흔들림이 멈추고 믿음이 더욱 분명하고 선명해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현실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에게도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오고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시간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1) 라고 탄식합니다. 우리 안에는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죄의 세력이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팽팽하게 맞서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내면의 정직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거룩한 싸움의 한복판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선포합니다.

1.우리의 연약함을 중보하시는 성령님

26.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이 무엇일까요?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내 힘으로 할수 없는 한계에 부딪힐 때 우리에게는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그 사실을 깊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기쁨은 내가 구한 대로 응답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를 누리는 데 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있어도 그분의 선하심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와 같지 않을수가 있습니다. 기도한 대로 되지 않는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바울 안에 선한 일 행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를 이끌었습니다. 고린도 후서의 고백에 보면, 그의 사역속에서 복음의 영광은 완전한 그릇이 아니라,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나 자신의 연약함 속에 담겨 있지만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하려고 애써도 결국 우리가 감추고 싶었던 연약함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만 같은 상황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조차,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자리 그 앞에 서는 것이 기도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그 어떤 언어와 표현으로도 담아낼 수 없어 그저 눈물만 흐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간절히 갈망한다면, 오히려 연약함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분이 아니라 깊숙히 들어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무슨 말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물로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그 시간에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돕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단지 곁에 머무는 차원의 위로만이 아니라 짐을 함께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약함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소망의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시가 있습니다.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라는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슬픔이나 절망이 전혀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지은 작사자 엘리자 히윗(Eliza E. Hewitt, 1851-1920) 여사는 1887년 학교에서 불량학생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폭력으로 척추 부상을 입고 오랜 병상 생활을 하던 중, 몸이 완쾌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영혼에 깊숙이 스며드는 햇살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고 기도하며 이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오늘 내 영혼에 햇빛이 비치네. 이 세상 하늘에서 빛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밝은 빛이라네. 예수님이 나의 빛이기 때문이라네. 오늘 내 영혼에 한 음악이 흐른다네. 나의 왕되신 분께 찬양을 드린다네. 내게 귀 기울이시는 예수님이 들으신다네. 입으로 노래할 수 없는 영혼의 찬송들을.

몸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성령 안에서 찬양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노래할 수 없는 영혼의 찬송들을 예수님이 들으신다는 고백은 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성령이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것, 이미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그 절망의 자리에 멈추어 서는 것이 아니라 영광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 영광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기복적인 성공의 간증이 아니라 성령의 탄식을 말합니다. 서로의 시간표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결코 헛된 시간이 없습니다.

2.부르심의 증거

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는 우리의 탄식의 기도, 우리가 겪는 세상의 수많은 고난도 포함 됩니다. 오늘의 세상을 보십시오. 이상 기후와 재난 속에 신음하고,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 권력과 정치의 자리에는 다툼과 폭력이 흐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세상이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깨어짐은 먼 곳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선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갑자기 찾아오는 아픔과 설명할 수 없는 고난 앞에 설 때가 있고, 세상속의 불의한 일 앞에 가슴 아픈 탄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괜찮아 다 잘될거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모든 것이 잘될 것을 바라며 그 말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증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신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통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해치기 위해서 모의하고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 선으로 바꾸사 요셉의 생애 가운데 협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선을 이룬 것이지, 요셉이 선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겪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의 일생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가 하는 일이 잘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선을 이루는 사람은 고난 가운데 그 보다 더 큰 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인내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요셉이 자신의 손으로 형들이 주었던 고통을 되 갚을 수 있는 위치에서 했던 말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입니다.

내 시간과 재능은 지금 누구를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까? 내 삶은 무엇을 위해 준비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교회에서의 나, 가정과 일터에서의 나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삶의 모든 순간이 예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내 삶에 더해지는 무게와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우리와 늘 동행하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29.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셨고,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부르심에는 인간의 그 어떤 자격과 조건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선택받은 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것도 자랑할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자격이 포함된다면 구원의 완전성이 상실됩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힘입어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 분의 사랑 앞에 서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삶으로 세워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그렇게 빚어 가십니다. 우리 눈에는 불안과 불확실한 시간이 더디고 답답하게 느껴져 피하고만 싶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 속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시는 더 크신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완성하시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 자리는 두려움의 자리가 아니라 기쁨의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아가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만날 때가 있고,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는 나 혼자만의 아픈 시간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절절한 마음으로 붙들고 있는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이든, 아픔의 시간이든, 혹은 평탄하고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시간이든 하나님의 손에서 버려지는 시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을 사용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아직 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바울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의 최종적 구원은 반드시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과 관계 맺는 삶을 통해 그 사랑을 실제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가르침을 배울 책임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미 성령께서 탄식속에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엘리자 히윗의 고백처럼 몸의 고통은 그대로인데 내 영혼에는 찬양이 흐르는 그 은혜의 감격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부르심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으로, 특권이 아니라 선교적 삶으로, 의심이 아니라 확신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 변화의 과정이 성령의 역사이고 이 회복의 과정이 거룩한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