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6 2026 주일설교

부활절 제 4주

목자의 품으로

Home in the Shepherd’s Arms

베드로전서 2:19~25

19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지라도 공의로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딘다면,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20 그러나 악한 일을 저지른 탓에 그 죄로 매를 맞고 참는다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다만 옳은 일을 행하다가 핍박을 받고 참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21 ○ 바로 이런 일을 위해,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몸소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여러분들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22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죄를 지으신 적이 없고, 한 번도 그 입에 거짓말이라곤 담으신 적도 없는 분이십니다. 23 사람들은 그분에게 온갖 모욕을 가했지만, 그분은 아무런 앙갚음도 하지 않으셨고, 사람들은 그분을 학대하고 핍박했지만, 그분은 아무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분께서는 모든 일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전부 맡기셨습니다. 24 또 그분께서는 몸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분께서 매를 맞고 상함으로써 여러분이 낫게 되었습니다. 25 전에는 여러분이 길 잃은 양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쉬운말 성경)

19 For God is pleased when, conscious of his will, you patiently endure unjust treatment. 20 Of course, you get no credit for being patient if you are beaten for doing wrong. But if you suffer for doing good and endure it patiently, God is pleased with you. 21 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22 He never sinned, nor ever deceived anyone. 23 He did not retaliate when he was insulted, nor threaten revenge when he suffered. He left his case in the hands of God, who always judges fairly. 24 He personally carried our sins in his body on the cross so that we can be dead to sin and live for what is right. By his wounds you are healed. 25 Once you were like sheep who wandered away. But now you have turned to your Shepherd, the Guardian of your souls.(New Living Translation)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는 억울함과 쉽게 풀리지 않는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부당한 일로 인해 겪었다면 그 상처는 더 깊게 남겨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2장은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지라도 공의로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감정의 자리가 아닌 부르심의 자리로 이끌고 갑니다. 성경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본훼퍼는 옥중서신 ‘저항과 복종’에서 “영혼을 걸고 고난을 받는 것에 비하면, 육신의 생명을 걸고 고난을 받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영혼의 건짐을 받는 성도라면, 우리는 고난에 집중하기 보다 고난을 실제적으로 체득함으로 타인의 고통에 더 집중해야 할 것이며, 까다로운 사람이 되기 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고난을 통과함으로 마음의 크기를 더 넓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자리는 감정의 자리가 아닌 부르심의 자리가 됩니다.

1. 억울함은 우리를 목자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먼저 본문의 앞 절 18절을 보겠습니다. 18 ○ 종들이여, 모든 일에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선량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 뿐만 아니라, 까다롭고 못된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십시오. 당시 종들 가운데에는 일부러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으면서도, 그 고통을 묵묵히 견디며 동료들 앞에서 강인함을 과시하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말합니다. 잘못을 행하고 매를 맞으면서 참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받는 고난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결과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말하는 고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의로운 고난입니다. 죄를 짓는 고난과 선을 행하다 받는 억울한 고난은 본질이 다릅니다.

본문의 19절과 20절에 두번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원어는 ‘χάρις'(카리스) ‘은혜’ 라는 단어입니다. 킹제임스(KJV)성경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acceptable)으로, NIV 성경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commendable)으로 번역했습니다. 억울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드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삶을 아름답게 빚어 가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21절에서 그 근거를 말합니다.

21 ○ 바로 이런 일을 위해,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몸소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여러분들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억울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은 단순한 인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것은 낯선 길에서 먼저 걸어가신 그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대로 따라 걷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면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왜 몸소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살길을 내시고 갈길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생각하며 그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몸소 고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부당한 모욕과 수치를 분명하게 당하셨고, 찔림과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22절과 23절을 보십시오. ’22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죄를 지으신 적이 없고, 한 번도 그 입에 거짓말이라곤 담으신 적도 없는 분이십니다. 23 사람들은 그분에게 온갖 모욕을 가했지만, 그분은 아무런 앙갚음도 하지 않으셨고, 사람들은 그분을 학대하고 핍박했지만, 그분은 아무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분께서는 모든 일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전부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벗어날 능력이 있으셨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인간은 고난이 올때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고난의 상황을 바꾸려고 합니다.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은 멀게 느껴집니다. 그때 억울함만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환경과 사람이 먼저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전부 맡기셨습니다.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은 다릅니다. 고난과 억울함 속에서 우리는 목자로부터 멀어지려 하지만 목자는 우리를 끝까지 찾아 오십니다.

2. 목자는 길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오십니다.

양은 본래 방어 능력이 없는 동물입니다. 뿔도 없고, 발톱도 없고, 날카로운 이빨도 없습니다. 양의 유일한 안전은 목자 곁에 있는 것입니다. 무리에서 벗어난 순간, 그 양은 이리떼의 가장 우선적인 표적이 됩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리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교회가 답답하고, 사람들이 싫어집니다. 고난이 우리를 목자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면 헌신은 짐이 되고, 섬김은 의무가 되며, 감사는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죄 없는 자신의 아들을 불의한 세상 한복판으로 보내셨습니다. 가장 억울한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을 회복하셨습니다. 세상이 내놓은 답은 우리를 더 강한 자리로 이끌지만, 하나님이 내놓으신 답은 십자가였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힘과 성과로 복음을 대체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당한 세상속으로 친히 들어오신 주님은 인간의 삶에 가장 확실한 기쁜소식입니다.  ‘목자’(ποιμένα,포이메나)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낼 때(시 23:1)쓰였고, 신약성경에서는 구원받은 자들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마 25:32;요 10:14;히 13:20)

본문 속의 흩어진 나그네들은 훨씬 혹독한 자리에서도 목자의 품을 붙들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당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기쁜 소식 즉 εὐαγγέλιον, (유앙겔리온)을 선포했습니다. 로마제국 곳곳에서 구원자로 불리우며, 복음이라는 단어는 황제의 출생과 즉위식에 관련되어 사용했습니다. 로마는 황제의 힘으로 평화를 유지했고, 신의 아들로 숭배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 가장 낮은 자리에서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복음을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식민지 통치 아래 고난 받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인이시고, 세상의 주인이시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당시 유다 변방에서 태어난 나사렛 예수를 구원자요, 기쁜 소식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목숨을 건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나그네들은 억울함과 부당함속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인내했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믿음의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거룩한 씨앗이 되었고, 그 복음은 지금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통해 전해집니다. 세상은 힘으로 증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성도는 한없이 쏟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머물때 십자가 정신의 선교적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4 “또 그분께서는 몸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분께서 매를 맞고 상함으로써 여러분이 낫게 되었습니다.”

상처는 우리의 마음의 문을 닫고 예민해 지게하며, 현실의 불안은 우리를 냉소적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무리에서 벗어났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아침식사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길 잃은 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답답한 삶에, 분주하여 감동을 잃어버린 삶에, 다 알면서도 바뀌지 않는 그 자리에, 여전히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는 그 자리에 주님은 끝까지 찾아 오십니다.

우리가 목자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내 힘이 회복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를 먼저 찾아오신 목자의 은혜 때문입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영원히 보호해 주십니다.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될때, 영적으로 우리는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일에 동참하도록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너무도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속적으로 위태롭게 하는 것들이 세상에는 존재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주어진 삶을 사랑합니다.

베드로전서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그 편지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전해집니다.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다시 흩어질 것입니다. 주일의 은혜가 월요일 아침의 시간까지 이어지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삶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상황 가운데 놓여 있기도 합니다. 그 세상의 자리가 때로는 차갑고, 억울하고, 부당하고 홀로 있는 것만 같은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25 전에는 여러분이 길 잃은 양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죽음을 넘어 우리를 소망으로 이끄십니다.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 이들은 행복과 불행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진리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며, 세상과는 다른 눈으로 모든 사건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바로 그 자리까지, 목자께서 먼저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믿음대로 사는 것,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이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변화된 존재입니다. 나를 붙들고 계신 목자의 품 안에서 살아가도록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 자리가 차갑고, 억울하고, 홀로인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오늘 이 말씀을 붙드십시오. “전에는 여러분이 길 잃은 양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04 19 2026 주일설교

부활절 제 3주

칼을 내려놓고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라

Lay Down the Sword, Come to Grace

베드로전서 1:22-25

1:22 ○ 오늘날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변함없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1:23 여러분이 거듭 태어난 것은, 이 세상의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언제까지나 영원토록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습니다. 1:24 기록되기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의 모든 영광은 들에 핀 풀의 꽃과 같도다. 풀은 이내 시들고 꽃은 쉬이 떨어지지만, 1:25 주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에게 전파된 기쁜 소식입니다.(쉬운말 성경)

22 You were cleansed from your sins when you obeyed the truth, so now you must show sincere love to each other as brothers and sisters. Love each other deeply with all your heart.  23 For you have been born again, but not to a life that will quickly end. Your new life will last forever because it comes from the eternal, living word of God. 24 As the Scriptures say, “People are like grass their beauty is like a flower in the field. The grass withers and the flower fades. 25     But the word of the Lord remains forever.” And that word is the Good News that was preached to you.(New Living Translation)

1940년,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거리에서 끌려가던 그 시절, 하를렘의 작은 시계점을 운영하던 텐 붐 가족은 집 안 벽장 뒤에 비밀 방을 만들어 유대인들을 숨겼습니다. 약 800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결국 밀고자의 배신으로 가족 전체가 체포되었고, 코리와 언니 벳시는 라벤스브룩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굶주림과 질병과 폭력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벳시가 코리에게 말했습니다. “이곳을 예배당으로 만들자” 그들은 나치의 감시를 피해 숨겨 가지고 온 성경으로 기도 모임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벳시는 “어떤 어둠도 예수님의 빛을 꺼뜨릴 수 없다.” 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버티게 한 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벳시는 끝내 수용소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동생 코리는 언니의 마지막 말을 가슴에 품고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아무리 깊은 구덩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더 깊으니,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그 사랑을 전해야 해”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도 바로 그 자리에서 쓰인 편지입니다. 로마 황제의 박해 아래 두려워 하던 성도들에게 보내는 베드로 생애 끝에서 보내는 편지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의 모든 영광은 들에 핀 풀의 꽃과 같도다. 풀은 이내 시들고 꽃은 쉬이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도다.” 칼을 든 베드로, 병사들 앞에서 두려움으로 무너졌던 베드로가 주를 경험한 깊은 고백입니다. 기록된 말씀의 은혜가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에 능력과 위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1.베드로는 칼을 들었고 주님은 잔을 드셨습니다.

깊은 밤 횃불을 든 무리가 몰려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칼을 뽑았습니다. 베드로가 정확히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손에 들린 것이 칼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고별설교에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한 베드로는 칼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잔을 드셨습니다. 그 잔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주님이 지셔야 할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이 그 잔을 드신 것은 죄로 끊어졌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은 잔을 드시며 ‘너희들이 내 잔을 마실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걸으신 그 길에 동참하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베드로가 든 칼이 있습니다. 나의 원칙과 가치라는 이름으로 드는 칼입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나를 보호하는 칼, 자신을 지키려 하는 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칼의 뿌리에는 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내 마음, 내 힘과 내 기준으로 나를 증명하여 지키려고 하는 칼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며 나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깊은 고통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더 깊은 사랑 안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잔을 마실 수 있는 힘이 된 것입니다.

이제 거듭난 베드로가 쓴 편지를 보겠습니다. “1:22 오늘날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변함없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뜨겁게’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크테노스(ἐκτενῶς)로, ‘전력을 다하여, 지속적으로’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밖으로”를 뜻하는 ‘ek’와 ‘뻗다’를 뜻하는 ‘teino’의 결합된 단어입니다. 문자적으로 연결해 보면 ‘줄기차게 전력을 다하여 뻗어 나가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이 지금도 줄기차게 확장되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나그네된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상처받아도, 기대가 무너져도, 전력을 다해 계속 뻗어 나가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원천이 십자가이기에, 그 사랑은 공동체를 넘어 세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날 밤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단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날 아침 주님이 그 앞에 계셨지만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물밖으로 끌어 올릴수 조차 없을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 요한이 “주님이시다” 라고 말하자마자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 내립니다. 주님께 달려간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지키지 못한 고백과 주님에 대한 마음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날 아침 베드로는 주님이시다 라는 요한의 외침에 주님을 더 가까이 보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아침식사를 마치신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한 번, 두 번, 세 번을 물으십니다. 그 질문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의 물음이었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 앞에서 베드로는 무너진 자리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 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기도해야 할 때 잠들어 있었고, 침묵하게 할 때 말했고, 고난의 잔을 마실때에는 칼을 들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베드로 같은 마음으로 서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 다른 것을 붙잡고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두려워 더 움켜 쥡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한 번, 두 번, 세 번 그 이상 부인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대부분이 쉽게 타오르고 쉽게 식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쓴 1장 19절을 보십시오. “19 오직 한 점의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롭고 고귀한 피로 된 것입니다.”

‘보배롭고’라는 표현의 헬라어 티미오스(τίμιος)는, 사람이 그 가치를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의미합니다. 주님이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가 우리의 죄사함을 이루셨습니다. 죄사함의 능력이 얼마나 값진 것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고난의 잔을 드셨기에 우리의 잔이 은혜로  채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손에 쥔 칼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그 잔을 드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기준 앞에서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성도의 삶은 나를 증명해 내고, 내 힘을 드러내는 싸움이 아닙니다. 은혜에 붙들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게 있는 칼이 없으면 내가 약해질까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내가 가진 칼을 갈고 닦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우리의 결심과 열심으로 오지 않습니다.

거듭난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편지합니다. “23 여러분이 거듭 태어난 것은, 이 세상의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언제까지나 영원토록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다른 것이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 썩지 않는 씨,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우리 안에 심겨졌습니다.

2. 세상 속에 심겨진 썩지 않는 씨

썩어질 씨는 무엇입니까?  금과 은이 넘쳐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목마름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여전히 공허한 그 자리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무엇가 붙잡으려고 끊임없이 달려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를 채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결국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그 빈 그물이 있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입니다. 그 빈 공간은 더 열심히 한다고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썩지 않는 씨가 되시는 주님이 들어오시는 자리입니다.

썩지 않는 씨가 심기는 것은 단순한 위로나 감동이 아니라 존재가 변화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밤새 빈 그물을 끌어올리며 낙심하던 그 자리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신 자리에 그물을 던졌을 때,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채워졌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자리에 우리의 삶을 드릴때, 우리 안에 변화가 시작됩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부르실 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랑을 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이 부르심은 영원토록 함께하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주신 은혜의 초대입니다.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지만 주가 이끄시는 은혜가 우리를 사명의 자리로 살게합니다. 사명자로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약속을 모든 상황속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주를 위해 기꺼이 삶을 드릴 자들을 지금도 찾으십니다. 말씀이 되신 주님께서 무덤을 깨고 나오셨습니다. 그 부활의 생명이 말씀을 통해 들어와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썩지 않는 씨로 심겨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1세기, 성도들은 로마 황제의 박해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집도 없었고, 직업도 빼앗겼고, 가족도 흩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소망되시는 주님의 말씀을  동일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24 기록되기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의 모든 영광은 들에 핀 풀의 꽃과 같도다. 풀은 이내 시들고 꽃은 쉬이 떨어지지만 25 주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도다.”

여기서 베드로가 인용한 말씀은 이사야 40장입니다. 수천 년 전 바벨론 포로기, 절망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 더 큰 힘에 의해 이끌리는 것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그 은혜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거룩한 나그네 된  백성들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 말씀이 울려 옵니다. 우리는 이 땅을 밟고 살아가지만 여전히 우리 손에는 자신을 지키려고 드는 칼이 있습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마음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 상처 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날카로운 칼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꺼내 들었던 그 날카로운 칼을 거두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우리를 다시 불러주십니다.

은혜의 삶은 하나님이 세상 안에 세우신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 질서의 중심에는 언제나 우릴 살리시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 부르심은 완전한 회복입니다. 그 은혜의 손이 지금도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이상 내가 붙잡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우리를 향해 먼저 다가오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식탁의 자리를 준비하시고 수치와 상처가 있는 자리, 돌아서고 싶은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주님께 우리의 시간과 마음을 드리길 원합니다. 결코 헛되지 않고 아깝지 않을 영광의 날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마음을 주를 위해 부어 드리길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부모와 자녀보다 나를 더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부활의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갈망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우리는 다시 세워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시 내 힘과 내 경험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그 질문 앞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정죄가 아니라 회복으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서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은혜 안으로 옮겨진 사람, 십자가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썩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심겨졌습니다. 어떤 어둠도 예수님의 빛을 꺼뜨릴 수 없었던 그 고백은 썩지 않는 씨,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심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살아있는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끝없는 사랑 안에서 오늘을 살아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