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0 2026 주일설교

부활절 제 6주(어버이 주일, 졸업예배 주일)

두려운 나그네에게

To the Fearful Stranger

베드로전서 3장 13-22절

13여러분이 열심히 선한 일을 하려 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려 하겠습니까? 14혹 옳은 일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더라도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겁먹지 마십시오.” 15오직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하게 모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가진 희망에 관하여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계십시오. 16그러나 답변을 할 때에는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천하는 선한 행실을 헐뜯던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십시오. 17만일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악한 짓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의 죄 때문에 단 한 번이자 마지막으로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께 인도하시려고 죄를 지은 적이 없는 분이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몸은 죽임을 당했으나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19또한 성령으로, 갇혀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20그 영들은 오래 전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리셨으나 순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에 들어감으로써 물을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21그 물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와 같습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드리는 서약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22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쉬운 성경)

13 Now, who will want to harm you if you are eager to do good? 14 But even if you suffer for doing what is right, God will reward you for it. So don’t worry or be afraid of their threats. 15 Instead, you must worship Christ as Lord of your life. And if someone asks about your hope as a believer, always be ready to explain it. 16 But do this in a gentle and respectful way. Keep your conscience clear. Then if people speak against you, they will be ashamed when they see what a good life you live because you belong to Christ. 17 Remember, it is better to suffer for doing good, if that is what God wants, than to suffer for doing wrong! 18 Christ suffered[d] for our sins once for all time. He never sinned, but he died for sinners to bring you safely home to God. He suffered physical death, but he was raised to life in the Spirit. 19 So he went and preached to the spirits in prison 20 those who disobeyed God long ago when God waited patiently while Noah was building his boat. Only eight people were saved from drowning in that terrible flood. 21 And that water is a picture of baptism, which now saves you, not by removing dirt from your body, but as a response to God from a clean conscience. It is effective because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22 Now Christ has gone to heaven. He is seated in the place of honor next to God, and all the angels and authorities and powers accept his authority.(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어버이 주일과 졸업예배를 함께 드립니다. 여러분은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공부하며 나그네로 살아가며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을 품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내가 세운 계획이 틀어지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막힌 길 앞에 서야 했던 날이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돌아가고 싶은 날도 있었고 흔들리는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두 단어가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첫 번째는 나그네입니다. 낯선 땅에 살고 있어서 나그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삶의 주인이 아님을 실감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나그네임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낯선 길에서 흔들릴 때,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허락하셨고 우리의 삶의 방향과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인생을 세워가게 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바로 나그네들이었습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한다고 편지의 서두에 기록합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낯선 땅에서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두 가지를 말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주로 거룩히 모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인용한 이사야 말씀을 보면, “전능하신 만군의 주, 오직 그분만이 네가 거룩하다고 여겨야 할 유일한 분이시고, 네가 두려워할 유일한 분이시며, 또한 네가 무서워할 유일한 분이시다 “(사8:13)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거룩히 모시는 것, 그것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길입니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세상의 어떤 두려움보다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사건속에 이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은 400년간 애굽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출애굽의 그 순간에도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길을 막고 있었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맹렬히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완전한 막다른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바다를 여셨습니다. 가장 절박한 순간,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구원을 그들로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경쟁사회 속에서 쫓아오는 압박들로 인해 두렵고 조급해 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막다른 그 자리, 두려움이 깊어지는 순간에 바다에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갈라진 바닷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증거였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흔적이 남습니다. 바다가 갈라진 자리에 길이 생겼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건짐 받은 삶에도 그 증거가 나타납니다.

죄와 죽음에서 건짐 받은 성도는 세상 속에서 선한 일을 향해 살아갑니다. 베드로는 선을 행할수록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을 복으로 여기라고 합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합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9-10)

세상을 살면서 낙심할 만한 상황을 만날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지니고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선을 행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과 선한 일은 분리 될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새롭게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말씀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도록 오래전에 이미 예정해 두셨습니다.(엡 2:10)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한 일을 행하는 삶, 그것이 구원받은 자가 마땅히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주신 구원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순종을 받으시고 그 은혜를 깊이 누리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구원 안에서 맺어지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베드로는 두려워 하지 않을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거룩하게 모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주로 인정하여 구별된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내 삶의 주인이 되면 세상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살아가면 더이상 세상의 죽음의 권세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세상은 엄격한 법과 질서로 유지하지만, 세상의 힘은 사람의 영혼까지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과 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삶” 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은 마음의 공허를 채우려 수학 연구에 더욱 몰두했지만 외적 사물에 관한 학문을 고뇌할 때 영적인 위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그 경험을 양피지에 적어 평생 안주머니에 꿰매고 다녔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철학자나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고, 생명의 근원인 주님을 버렸었도다. 원컨대, 나 영원히 주를 떠나지 않으리.” 그를 무릎 꿇게 한것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경외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소망의 이유를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학문 너머의 그 뿌리를 봅니다.  우리가 배우는 지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방향을 얻을 때, 지식은 지혜가 됩니다. 그 지혜가 소망의 이유를 말할 수 있게 합니다. 베드로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15오직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하게 모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가진 희망에 관하여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계십시오. 16그러나 답변을 할 때에는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천하는 선한 행실을 헐뜯던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십시오.

이번주 한 청년의 부모님을 뵈었습니다. 자녀를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마음이 마치 아이를 강물에 띄워 보내는 것 같았는데 역청으로 갈대상자를 보호하듯 교회의 공동체에서 잘 견딜수 있었다는 마음을 전해주셨습니다. 낯선 땅에서 살아갈 자녀를 생각하며 홀로 기도하셨을 그 시간, 학비를 내야할 때마다 마주해야 했던 현실의 무게를 기도의 자리에서 감당하셨을 것입니다. 멀리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운 분들이 계십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홀로 견뎌야 했던 분들, 그 그리움을 가슴 안에 묻고 살아가는 분들, 하나님은 그 자리도 아십니다. 자녀를 외국에 보내놓고 손이 닿지 않는 자리를 기도로 채울 수 밖에 없었던 부모님들의 눈물의 기도가 우리 교회를 향하고 있습니다. 맡겨진 한 영혼을 더 소중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신실하게 붙드는 것이 우리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이제 보스턴을 떠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교우들은 낯선 땅으로 향하게 될텐데, 그 걸음이 새로운 부르심의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정든 곳을 떠나는 아쉬움의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 받은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강의실, 실험실, 가정, 직장 그 자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삶이 되도록 살아가십시오. 어떤이들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첫 날을 기억할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자리에서 기도로 버텨냈던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고, 혼자 성경을 펼치고 홀로 기도해야 했던 그 자리에서부터 예배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작은 기도의 방에서 우리는 온 열방과 민족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주안에서의 헤어짐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뻐하며 기대하는 파송의 시간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가장 가까운 가정에서, 작은 일상에서 시작됩니다. 기도의 자리는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나의 자녀들이 사방이 막힌 것 같은 길 앞에 서는 날이 온다면 그때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의 자리를 지켜내십시오. 믿음은 혼자 끌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기도를 보고 자란 자녀는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자랍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삶의 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일주일 한 번의 예배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훈련이 쌓여 단단한 믿음의 뿌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혼자 감당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의 뜻을 함께 받아들이고, 함께 사랑하며, 함께 이루어 가도록 공동체를 허락하셨습니다

세상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우리는 작고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그 자리에 서 계셨던 분이 계십니다. 주님도 두려우셨을 텐데, 피하고 싶으셨을 텐데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십자가의 사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이 지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세상의 지식을 지닌 자들에게 어리석어 보여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비록 눈앞의 상황이 우리를 두렵게 하더라도 묵묵히 선을 행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보다 훨씬 더 크신 분임을 알게 됩니다. 사명은 위에서 누르는 짐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자리입니다. 일상의 자리가 늘 평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씀합니다. 우리의 고난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있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 서면 내 아픔으로 타인의 부족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솔직히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사랑의 길을 걷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여전히 그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섬길수록, 자꾸만 내가 먼저 서려 합니다. 불편한 자리는 피하고, 편한 자리를 택하려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도 삶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 그 간격은 우리의 힘으로 좁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피하지 마시고 주님을 가장 깊이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의 죄로 인해 죽으신 주님을 한 번 더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두려워하는 나그네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짐을 없애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짐을 지고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두려운 나그네의 삶 위에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은혜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새롭게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혼자 감당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도록 공동체를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아직 그리스도를 삶의 주로 모시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믿음의 초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그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이웃을 아끼고 돌보는 성도로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나그네 길이 낯설어도 두렵지 않도록 앞서 가시며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0503 2026 주일 설교

부활절 제 5주

하늘을 보면 주님이 보입니다.

Heaven Opened, Christ Revealed

사도행전 7장 55-60절, 베드로전서 2장 9-10절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59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55 But Stephen, full of the Holy Spirit, gazed steadily into heaven and saw the glory of God, and he saw Jesus standing in 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 56 And he told them, “Look, I see the heavens opened and the Son of Man standing in 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 57 Then they put their hands over their ears and began shouting. They rushed at him 58 and dragged him out of the city and began to stone him. His accusers took off their coats and laid them at the feet of a young man named Saul. 59 As they stoned him, Stephen prayed, “Lord Jesus, receive my spirit.” 60 He fell to his knees, shouting, “Lord, don’t charge them with this sin!” And with that, he died.(New Living Translation)

9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며 왕의 제사장입니다. 또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홀로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심을 선포하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10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전에는 은혜를 몰랐지만, 지금은 은혜를 받고 누리고 있습니다. (쉬운 성경)

9 But you are not like that, for you are a chosen people. You are royal priests, a holy nation, God’s very own possession. As a result, you can show others the goodness of God, for he called you out of the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10 “Once you had no identity as a people now you are God’s people. Once you received no mercy now you have received God’s mercy.”(New Living Translation)

칼빈은 사도행전을 ‘거룩한 역사’라 불렀습니다. 박해와 고통 속에서도 교회가 세워져 가는 그 과정을, 칼빈은 거룩한 역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기 교회를 친히 돌보시는 역사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 교회로 부터 유대지역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인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역사가 왜 성령을 통해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되었습니다. 인류는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며 하나님께 도전했고, 그 교만의 결정체인 바벨탑은 결국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결과 언어가 혼잡해 졌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도 서로에게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벨탑을 쌓기 위한 목적으로 모인 연합은 겉으로는 함께해도 속마음까지 하나 되지는 못합니다. 이해관계가 바뀌면 흩어지고, 내 뜻이 꺾이면 돌아섭니다. 죄의 본성은 언제나 자신이 중심이 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의 연합은 다릅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내가 중심이 되려는 욕구를 내려놓습니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완고함, 용서하지 못하는 완악함을 성령께서 소멸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죽음의 권세로 부터 건져내시고, 믿음이 우릴 뒤돌아서지 않게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던 일들이 새롭게 행해지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서로 다른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흩어진 사람들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두 가지 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서 계신 주님을 보았던 것과 하늘을 본 사람이 용서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의 역사에 비하면 짧은 여정이지만 성령이 임하면 삶 가운데 죽음의 힘을 이기는 뜨거운 열정이 임합니다.

세상에는 억울함을 외치는 사람도 있고,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고, 말없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위해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기도는 죽음을 이긴 고백입니다. 순교의 장면 가운데 돌에 맞아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 스데반 집사님의 입술의 고백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였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핍박과 박해, 죽음이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사람에게 하늘을 여시고 죽음을 이기는 고백을 주셨습니다.

1.하나님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대와 설렘이 있습니다. 말씀을 알아가고 싶고 섬기는 것이 기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열심이 익숙함이 되고 하나님을 찾기보다 내 습관의 열심으로 의무를 다하게 됩니다. 열심과 섬김의 자리에서 익숙함이 무뎌짐이 되고 의무가 되고 무감각이 찾아 옵니다. 실망과 상처가 자리하면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딘가에 있습니까? 56절을 보십시오.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스데반 앞에서 주님이 서 계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는 갈등이 있고 재정의 압박이 있고 예상치 못한 사고와 질병이 있습니다.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던 그 산에서, 모세의 광야 40년의 시간 속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어 있던 그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한번도 그들을 버려둔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뿐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자신이 어떻게 세상에 왔는지 모릅니다. 그저 밥상이 차려지면 먹고, 잠들면 이불을 덮어 주는 손길을 당연히 여깁니다. 그 손길이 사랑인지 어떤 헌신인지 모르고 자랍니다. 그런데 어른이 된 후에 삶의 무게를 알아가는 날 그 사랑과 헌신을 깨닫게 됩니다. 아이를 낳는 순간 친정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아이를 낳는 기대와 설렘으로 기뻐하다가 그 고통 앞에서 비로소 어머니의 고통을 몸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은 가장이 되어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다가 말없이 걸어가시던 무뚝뚝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이해하게 됩니다. 부모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스데반의 눈도 그렇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해하던 메시야의 이해보다 한 걸음 앞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이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가 구약의 인물을 빗대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을때 유대교인들은 신성 모독적 발언으로 이해했습니다. 이후 이성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에 의해 그 즉시 처형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그 순간에도 자신에게 향하는 돌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바로 알았기에 죽음도 그를 이길수 없었습니다. 성령이 그의 눈을 열어 서 계신 주님을 보게 했던 것입니다.

2. 하늘을 본 사람은 땅에 묶이지 않고 세상으로 파송되어 살아갑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율법을 알았고 성경을 알았던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의 구조가 흔들리고 위협받자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습니다. 듣지 않겠다는 의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길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방향은 분명한데 그 길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나기도 하고, 숨겨져 있던 암초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이후 안정되어 가던 예루살렘 지역 교회에 엄청난 박해의 광풍을 몰고 오게  됩니다. 성도들은 박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흩어졌지만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 된 것입니다. 흩어진 자리였지만 보냄 받은 자리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 열심이 교회를 핍박하는 데 쓰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울을 바꾼 것은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설득도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그 열정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선교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예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때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고 가장 깊은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1806년 미국 부흥의 시기에 뉴잉글랜드 리치필드(Litchfield)지역 윌리엄스 대학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다섯 명의 청년이 강가에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비를 피해 건초더미 속으로 몸을 숨겼고, 건초더미속에서 기도를 하는데 성령께서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가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고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그 기도회가 수많은 청년들이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한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른 것을 봅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기도는 원망이 아니라 용서였습니다.

그 용서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했던 기도와 동일한 기도였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34) 스데반은 자신이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용서도 사랑도 결심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받은 은혜를 기억할 때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논리로 설득되지 않습니다. 설명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용서하고 사랑할 때 복음이 전해지게 됩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죄를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용서의 기도를 올려 드릴 때 교회의 본질이 살아납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에는 은혜보다 상처가 더 깊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하는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면서도 혼자 안고 있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 있다면 하나님이 기억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상처는 오래되면 마음을 차갑게 만듭니다. 귀를 닫게 하고,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홀로 감당하지 않고 함께 나누어 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한 몸으로 부르셨습니다. 용서의 기도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면 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은 은혜 받은 자의 기도를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59절과 60절입니다. 59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우리의 기도는 나의 한계를 마주하는 그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스데반은 그 한계의 자리에서 자신의 죽음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 왕의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을 드렸습니다.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제사장의 직무였습니다. 스데반은 돌이 날아오는 그 자리에서도 예수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었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받아 들였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선 것입니다. 하늘을 본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였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제가 처음 외국 땅에 왔을 때, 의지할 곳도 없고 낯설고 힘든 상황 속에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6개월 된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아빠인 저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의 답을 제 안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때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을 붙들게 하셨습니다. 붙들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서 그 낯설고 외로웠던 그 시간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낯선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전히 낯선 사람들을 내 마음에서 빼내지 말고 그대로 두시고 기도하십시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흩어진 나그네 디아스포라로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경쟁하기 위해 보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이 자리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이 선교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자녀들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 자리가 우리의 선교지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신 이유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그 사람을 위한 기도의 자리에 서십시오. 내 마음에서 품기 어렵다면 주님께 맡기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땅을 떠나는 순간에도 그는 고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의 죽음을 ‘잔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교회됨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공동체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매년 5월이 되면 함께 했던 지체들이 새로운 곳으로 떠납니다. 이민 교회에서 떠나보냄은 익숙해질만도 한데 매번 아쉽고 마음이 쓰입니다. 어떤 헤어짐이든 빈자리는 늘 마음에 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셨고, 서로의 삶을 중보하는 삶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떠남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함께 울었고 함께 배우며 웃었습니다. 그 시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그 자리를 함께 했다는 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제 새롭게 떠나는 그 현장에서도 계속 하늘을 보는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떠나보내는것도 아쉬운것이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모든 만남과 헤어짐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변함없이 우리의 자리에서 하늘을 보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셨다면, 주어진 어떤 상황에도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는 순간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을 본 사람은 상황의 어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씨앗은 땅에 묻혀야 열매 맺습니다. 하나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 힘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끝까지 의탁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땅을 보면 땅의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보면 주님이 보입니다. 하늘을 보면 주님이 보이고, 주님을 보면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면 용서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삶을 나누고, 서로의 짐을 함께 지며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심으십시오. 죽음이 생명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늘을 보십시오. 주님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