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26.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스무번째 주일)

하나님 앞에 서는 기도

Standing in Prayer Before God

누가복음 18:1~14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끈질기게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2 “어떤 도시에 사람들을 무시하고,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다. 3 그런데 그 도시에 살고 있는 한 과부가 그를 줄곧 찾아가서 졸라대기를, ‘재판관님, 저의 억울한 처지를 들으시고, 법으로 제 권리를 찾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 그러나 그 재판관은 오랫동안 그 과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무시해 왔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5 하지만 이 과부가 이토록 줄기차게 나를 찾아와 성가시게 하니, 할 수 없이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나를 찾아와서 아주 귀찮게 졸라댈 것이다.’” 6 주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간구를 어찌 들어주지 않겠느냐? 어찌 계속 모른 체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가 있겠느냐? 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밤낮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간구를 들으시고, 신속하게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다시 돌아올 때, 과연 세상에서 이 같은 믿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는지, 그것이 걱정이구나!”  9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소.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소. 11 바리새파 사람은 따로 서서 이렇게 기도했소. ‘하나님, 저는 남의 것을 빼앗는 강도나 정직하지 못한 사기꾼이나 간음을 저지르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더구나 저기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꼬박꼬박 하나님께 바치고 있습니다.’ 13 그런데 세리는 멀찌감치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생각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하기를 ‘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하였소. 14 내가 당신들에게 분명히 말하겠소. 결국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세리요. 이처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오.” (쉬운말 성경)

1 One day Jesus told his disciples a story to show that they should always pray and never give up. 2 “There was a judge in a certain city,” he said, “who neither feared God nor cared about people. 3 A widow of that city came to him repeatedly, saying, ‘Give me justice in this dispute with my enemy.’ 4 The judge ignored her for a while, but finally he said to himself, ‘I don’t fear God or care about people, 5 but this woman is driving me crazy. I’m going to see that she gets justice, because she is wearing me out with her constant requests!’” 6 Then the Lord said, “Learn a lesson from this unjust judge. 7 Even he rendered a just decision in the end. So don’t you think God will surely give justice to his chosen people who cry out to him day and night? Will he keep putting them off? 8 I tell you, he will grant justice to them quickly! But when the Son of Man[a] returns, how many will he find on the earth who have faith?” 9 Then Jesus told this story to some who had great confidence in their own righteousness and scorned everyone else: 10 “Two men went to the Temple to pray. One was a Pharisee, and the other was a despised tax collector. 11 The Pharisee stood by himself and prayed this prayer[b]: ‘I thank you, God, that I am not like other people—cheaters, sinners, adulterers. I’m certainly not like that tax collector! 12 I fast twice a week, and I give you a tenth of my income.’ 13 “But the tax collector stood at a distance and dared not even lift his eyes to heaven as he prayed. Instead, he beat his chest in sorrow, saying, ‘O God, be merciful to me, for I am a sinner.’ 14 I tell you, this sinner, not the Pharisee, returned home justified before God. For those who exalt themselves will be humbled, and those who humble themselves will be exalted.”(New Living Translation)

요즘은 모든 것이 빠르게 답하는 시대입니다. 오늘 물건을 주문하면 다음날 배송이 됩니다. 한국에는 로켓배송과 새벽배송이 있어서 필요한 물건을 아주 빠르고 편하게 받아보게 됩니다. 내 물건이 어디쯤 왔는지 검색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알수 없는 기다림 속에서 인내하고 버텨내야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을 통해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굳게 서며 믿음으로 기도하는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두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18:1-8)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18:9-14) 두개의 비유는 기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하나님의 응답을 끝까지 신뢰하며 기도할 수 있는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조율되도록 기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비유는 지금까지 의심치 않고 지켜온 기도생활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교훈입니다. 말씀을 통해 성도들이 꼭 붙들어야 할 몇가지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기도를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평가하고 비판하며 깨어진 현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 나라의 기대와 기쁨 보다는 불안과 의심이 쌓여져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혼돈과 불안 속에서도 힘차게 다가오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불의한 세상을 구원하셨고, 지금도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다만 그때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믿음의 간구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도 과부의 끈질긴 간청에 응답했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조율하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실리가 없습니다. 끈질긴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선택할 힘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결과에 연연하기 보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주의 자녀들에게 주신 즐거움입니다. 주의 자녀들은 낙심될 자리 상심할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높이게 됩니다. 이것은 기도의 결과의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미에 반전의 말씀을 하시며 믿음에 대해서 분명히 하셨습니다. “인자가 다시 돌아올 때, 과연 세상에서 이 같은 믿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는지, 그것이 걱정이구나!” 모든 성도는 인자가 다시 오는 날을 기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방향을 점검하며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입니다. 성경에서 그날은 심판의 때를 가리킵니다. 누구도 알수 없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그 마지막 날에는 불의한 일들이 사라지고 정의와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며 경험하게 되는 불의와 혼란은 천년이 하루처럼 정말 잠시 스쳐가는 고난일 뿐입니다. 낙심되는 일을 만나 기도가 힘을 잃어 버릴때마다 기도의 방향을 점검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절망의 끝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할 힘이 부족할 때는 불의한 재판관 앞에서 간절히 호소하던 과부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완전히 이루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목적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빌1:6)

둘째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두번째 비유를 보면,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옳다고 여기는 신앙적인 일들을 행하며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인 것에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경건함의 상징인 금식을 일주일에 두번이나 했다는 기도에서는 한해 동안 104일을 금식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게다가 소득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며 경건함을 지켰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 역할을 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뇌물을 받고, 자기 민족의 세금으로 부를 축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던 사람들은 당연히 바리새인이 더 의롭다고 생각했을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는 사람은 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결론으로 ‘이처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오.’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감사를 드리며 겉으로는 경건해 보였지만 그 마음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기도였습니다. 금식은 마음을 깨끗히 하고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는 시간인데, 바리새인의 금식은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느라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자신을 높이는데 집중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 상황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과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그분께 마음을 내어 맡기면, 모든 상황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기도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변화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오스왈드 챔버스의 기도》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교만은 무너지고 불안한 삶의 이유는 하나님의 평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낮아진 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자신을 높이고 싶었던 바리새인과 자신을 낮춘 세리의 기도의 차이는 단 하나 였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 앞에 서 있었고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무의식적으로 우월감을 느끼고 이쯤이면 선하다 착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유혹으로 부터 벗어나려면 내 안에 교만한 마음이 보일때마다 작은 불의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타인을 향해서는 더 겸손한 마음을 가지며 형식적인 신앙에 갇히지 않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의지적으로 기도의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 이후 시대를 살아갑니다. 세리는 당시 흔한 행동이 아닌 가슴을 치며 기도드리고 있었음을 묘사합니다. 구원을 이뤄가는 여정에서 성도는 끊임없는 자기점검과 영적 긴장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는 나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드는 고백입니다.

과부는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 앞에 섰습니다. 그녀는 흔들림 속에서도 끝까지 기도하며 호소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응답을 받은 결과가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였던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 삶도 불안과 의심으로 흔들리지만 하나님 안에서 견고한 믿음으로 확신을 갖으며 기도함과 동시에 우리에게 맡겨진 믿음의 성도로서의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을 보면 불의한 일들이 가득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이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의로우시고 사랑이 풍성하십니다. 결국엔 진리가 승리합니다. 그날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기대해야 합니다. 맡겨진 일을 다 마친 그때에 내려 놓는 것이 허무함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충성된 자에게 허락해 주시는 영광과 존귀의  자리에 앉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세번째 복음 안에서 겸손한 회개의 삶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육신의 죄를 따르려 하지만, 우리는 혼자의 힘으로 의로워 질 수도 없고 혼자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본문속 과부의 끈질긴 기도는 하나님의 의를 끝까지 신뢰하며 인내할때,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의 논리와 권력, 평가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워집니다. 기독교의 가치는 생명을 살리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정의로움도 지나치면 생명을 해치는 행동이 되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우리도 어느 순간 마음이 안일해져 겉으로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듯하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그 기도 속에 자기의 의가 담겨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하지만 하나님 보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살아가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 (마15:8 )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도 ‘인자가 다시 돌아올 때, 과연 세상에서 이 같은 믿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는지, 그것이 걱정이구나!”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두개의 비유는 오늘날 신앙인들의 상태를 비추는 영적인 거울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집중하기에는 일상의 즐거움과 분주함이 더 큰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제 주안에 있는 참된 보물을 발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 생각과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단순히 쉽고 편안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책임과 헌신, 사랑과 겸손한 회개로 날마다 믿음의 길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제 그 사랑에 응답하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신실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의 풍성한 은혜와 진리 안에서 죄와 사망으로 부터 자유케 된 길을 따라 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0. 19.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열아홉번째 주일)

누가복음 17:11~19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소

Your Faith Has Made You Well

11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예수께서는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예수께 크게 소리를 질렀다. 13 “예수 선생님, 저희를 불쌍히 보시고,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가시오, 제사장에게 가서 당신들의 몸을 보이시오.” 그래서 그들은 제사장에게로 가는데, 가는 도중에 모두 병이 나았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께 돌아와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16 그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예수께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시기를 “열 사람이 깨끗하게 낫지 아니하였소? 그런데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소? 18 고침 받은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내게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는 것이오?” 하셨다. 19 그리고는,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자, 일어나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소.” (쉬운말 성경)

11 As Jesus continued on toward Jerusalem, he reached the border between Galilee and Samaria. 12 As he entered a village there, ten men with leprosy stood at a distance, 13 crying out, “Jesus, Master, have mercy on us!” 14 He looked at them and said, “Go show yourselves to the priests.”[b] And as they went, they were cleansed of their leprosy. 15 One of them, when he saw that he was healed, came back to Jesus, shouting, “Praise God!” 16 He fell to the ground at Jesus’ feet, thanking him for what he had done. This man was a Samaritan. 17 Jesus asked, “Didn’t I heal ten men? Where are the other nine? 18 Has no one returned to give glory to God except this foreigner?” 19 And Jesus said to the man, “Stand up and go. Your faith has healed you.”( New Living Translation)

성령강림절 열아홉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을 통해 새로운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생의 절망 가운데 주님을 부르짖는 열명의 나병환자가 나옵니다. 나병은 육체적으로 감각이 무뎌지고, 당시에 고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육체적 고통을 오랜 시간 겪게 되면 마음의 힘도 점차적으로 사라집니다. 그런데 열명의 나병환자들은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지나가셨는데, 열명의 나병환자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크게 소리를 질렀다’는 표현은 주님을 향한 믿음의 외침입니다. 예수와의 만남을 위한 믿음의 외침속에서 이미 치유의 시작이 있었습니다.

“예수 선생님, 저희를 불쌍히 보시고,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불쌍히 보시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인생을 바꾸는 시작이 이 기도의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성전 구석에서 감히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하던 세리가 생각납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교만한 기도보다 세리의 눈물의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1. 절박함 속에서 찾은 하나님

절망과 절박함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온전히 설수 없는 사람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긍휼이 가장 필요한 사람입니다. 나병환자들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도할 힘 조차 없는 절망 속에서 깨어 기도하는 일 또한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나병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사라지고, 영혼을 무디게 합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깨끗하다, 나는 괜찮다”고 여기는 영적 병입니다. 우리의 기준에서 이 정도면 괜찮겠지 만족하는 신앙생활 안에 멈추어 있다면 주님을 향한 갈망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은밀한 것도 살피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비춰보면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라고 다 같은 기도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진실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모습을 말씀으로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말씀의 거울 앞에 마음 깊은 곳까지 성찰하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위선과 연약함을 인정할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구하는 절박한 기도 가운데 주님의 순전한 은혜가 풍성하게 부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소리를 지르던 나병환자들에게 ‘가시오, 제사장에게 가서 당신들의 몸을 보이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나병은 치유된 후에 제사장에게 가서 검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사장에게 갑니다. 나병으로 부터 치유 될 것이라는 믿음을 볼수 있는 지점입니다. 예수님께서 한사람씩 직접 치유하실수 있으셨지만, 그들을 제사장에게 직접 가라고 하신  말씀에는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현재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내딪는 용기가 믿음입니다. 열명의 나병환자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자신들의 몸이 완전히 깨끗해진 걸 알게 되었습니다. 

시편 30편의 고백은 다윗이 죽음에서 깨어나 하나님을 찾는 기도시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자신에게 주어진 성공이 하나님의 손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침대에 누운 채 죽어가는 동안 깊은 상실감을 경험하고 난 후에 고백한 기도를 보면, “11 주께서 내 슬픔의 눈물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고, 나에게서 통곡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입혀 주셨도다. 12 그러므로 내 영혼이 어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이까? 내가 어찌 입 벌려 주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오 주여, 내 하나님이시여, 내가 영원토록 주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리렵니다.(시 30:11-12) 다윗은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영원토록 돌린다고 고백합니다.

인생에는 기도 외에는 길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저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손길을 절박하게 찾을때입니다. 그때마다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하게 임하지만, 그 은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고침받은 열명중에 단 한명만이 예수님께 다시 돌아갑니다. 얼마쯤 갔는 지 알수 없지만 이미 계셨던 곳에서 예수님이 떠난 후였을텐데 그는 가던 길에서 돌이켜 주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오늘날 처럼 통신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임에도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자신의 얼굴을 떨어트리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이 깨끗하게 낫지 아니하였소? 그런데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냐고 묻습니다. 고침 받은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내게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 밖에 없는 것이오?” 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말씀하십니다.

아홉명의 나병환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 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치유받은 기쁨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내가 받은 기쁨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돌이켜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 여전히 세상이 좋고, 선택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2. 감사의 삶은 구원 받는 성도들의 증거입니다.

감사를 선택한다는 것은 내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단 한 명만이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께 돌아왔습니다. 이 사실은 감사하는 삶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마리아인이었던 한사람은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방향을 돌이켜야 합니다. 세상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기 위해 결단된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소.”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경탄의 마음이 줄어들면, 구원을 이뤄 나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질 것입니다. 은혜로 시작된 구원이지만 그 신비와 경외심이 사라지면 감사도 줄어들게 됩니다. 율법에 매여 살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내 삶에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발견하고, 그 깨달음을 자신의 고백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매주일 우리교회는 새로운 청년들이 찾는 교회입니다. 이 청년들이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발걸음하는지 알수 없지만 교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소’ 라는 말씀을 자주하셨습니다. 몸의 치유만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구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세우는 차원이 아니라 가장 크고 높으신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앞에  머무는 것, 그것이 참된 구원의 삶입니다.

찬송가 492장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는 찰스 가브리엘Charles H. Gabriel) 목사가 전쟁터로 떠나는 아들이 한 말에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입니다. 아들이 전쟁에 나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만약에 제가 돌아오지 못하면, 하늘나라 열린 문 앞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아들을 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두렵고 아팠을까요? 그런데 아들이 남긴 이 한마디는 절망과 두려움에 있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소망과 찬양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아들의 한마디가 뭉클하지 않습니까? 근심속에 있던 아버지의 마음이 소망으로 변하였듯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근심과 절망에서 끌어내어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는 인생의 방향이 바뀐 성도들이 부르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감사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전에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7장 무익한 종의 비유에서 큰 믿음을 구하는 제자들에게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주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인의 명령을 따라 자신이 할 일을 다한 종이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나의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 고 고백합니다. 크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작은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 세상에서 내가 바라고 구하는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의 편안함과 자기 만족 속에서는 믿음의 눈이 쉽게 열리지 않지만, 감사를 고백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주님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3. 감사의 훈련으로 구원을 이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영원한 삶을 허락받는 크신 은혜가 우리의 삶을 살립니다. 이 은혜를 통하여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성경적 가치를 따라 살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우리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주어진 믿음의 길에서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들은 행위로 구원을 더하는 것이 큰 믿음이라고 성도들을 미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어떤 율법적 요소도 구원에 더할 수 없음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값없이 주어진 은혜에만 안주하지 말고, 구원을 이뤄가는 거룩한 삶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를 통하여 깨닫게 된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태도가 참된 믿음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아홉명의 유대인들은 치유는 경험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경험했을 뿐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를 선택한 단 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찬양했고,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한사람은 몸도 나았지만 영혼이 회복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무엇입니까? 넓은 길로 가는 90%의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켜 감사했던 그 한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곡의 찬양이 생각이 납니다.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외롭고도 쓸쓸한 모습  말 없이 홀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을 다 버린 나그네  정녕 그 분이 내 형제 구원 했나  나의 영혼도 구원하려나  의심 많은 도마처럼 물었네 내가 주를 처음 만난 날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내가 이제 주를 만남으로  죽음의 길 벗어나려네  변찮는 은혜와 사랑 베푸신  그분 만이 나의 구세주  주 예수 따라 항상 살리로다  십자가 지고 따라가리라”  

인생의 무게를 홀로 짊어지시고 외롭고도 쓸쓸한 모습으로 걸어가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믿음의 자리로 불러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은 뒤 이틀이나 더 머물다가 찾아 가셨습니다. 나사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절망 가운데서도 인생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감사를 선택하고 돌아온 한 사람에게 ‘자 일어나 가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살다 보면 구원을 이뤄가는 삶이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 자 일어나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소.” 이 믿음으로 걷는 주의 자녀들의 걸음을 붙들어 주시고, 살아계신 주님께서 그 구원을 이루어 가도록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매주일 예배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신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이 단 한 사람의 나병환자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가 보여 준 삶은, 바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믿음과 감사의 삶입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그 순간, 감사는 우리의 삶속에 열매가 됩니다. 한 주를 시작하며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 교회가 절망 가운데 있는 삶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이키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이곳 케임브리지에 세워진 우리교회를 통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지길 기도합니다.

10 12 2025 주일설교

(케임브리지한인교회 창립 47주년 기념예배)

우리의 영광의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Christ, Our Hope of Glory
골로새서 1:24-29

김태환 목사


24 나는 여러분을 위해 받는 고난을 기뻐합니다.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겪으셔야 할 고난의 남은 부분을 내가 겪을 수 있으니, 그것을 기쁨으로 견뎌 냅니다. 25 나는 특별한 사명을 받고 여러분을 돕기 위해 보내진 교회의 일꾼입니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숨김없이 여러분 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26 이 말씀은 이 세상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숨겨져 왔던 비밀이었는데,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27 모든 사람을 위한 풍성하고도 영광스러운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만민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이 진리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며,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영광스러운 소망이 되십니다. 28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어느 누구에게나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힘껏 사람들을 가르치고 바 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기 원하기 때 문입니다. 29 이 일을 위해 힘쓰고 애쓰며, 내 안에서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힘차게 나 아갑니다. (쉬운성경)


24 I am glad when I suffer for you in my body, for I am participating in the sufferings of Christ that continue for his body, the church. 25 God has given me the responsibility of serving his church by proclaiming his entire message to you. 26 This message was kept secret for centuries and generations past, but now it has been revealed to God’s people. 27 For God wanted them to know that the riches and glory of Christ are for you Gentiles, too. And this is the secret: Christ lives in you. This gives you assurance of sharing his glory. 28 So we tell others about Christ, warning everyone and teaching eve- ryone with all the wisdom God has given us. We want to present them to God, perfect1 in their relationship to Christ. / 1Or mature 29 That’s why I work and struggle so hard, depending on Christ’s mighty power that works within me.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47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오늘 예배는 평소와 달리 우리 교회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갖게 하는 예배입니다. 불행하게도 지금은 교회의 영향력이 급 격하게 감소하고 있는 때입니다. 유럽과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교회의 영향력 이 쇠퇴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포스트 지(紙)에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9가지 이유’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이유들을 보면 이렇습니다. (1) 교회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2) 교회가 반지성적(anti- intellectual)이다. (3) 교회 안에 사랑이 없다. (4) 무조건적인 경건의 삶을 요구한다. (5) 맹목 적인 봉사와 헌신을 요구한다. (6) 교회 외에도 다른 옵션들이 많이 있다. (7) 교회가 복음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는다. (8) 교회가 더 이상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9) 진부하고 무식한 (unenlightened) 목사의 설교/교인들의 삶과 연관성(relevance)이 부족한 설교를 한다.

물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이유가 모두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겸손하게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공신력 있는 여론조사와 통계로 유명한 Pew Research Center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현재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종교가 없는 사람들 의 수가 증가하고 있고, 기독교를 탈퇴하는 현상(disaffiliation)이 지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2024년 한국 리서치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국에서도 종교가 없다고 답한 사람들이 51% 로,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2024년 9월에 ‘한국 개신교 교세 현 황 및 감소 원인 분석’이라는 AI의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한국 개신교 교회의 교인 비율 이 계속 감소 추세에 있고, 특히 젊은 세대들의 감소 현상이 두드러진다고 합니다. 2001년 부터 2023년까지 개신교 교인의 비율이 20.6%에서 16.3%로 감소했고, 2050년에는 11.9% 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 교회는 창립 47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입니 다. 교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입니다. ‘세상에서(ek-) 불러냄(kaléō) 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특별한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 되신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선교활동을 하던 때는 대략 서기46-57년 경입니다. 이 때 복음을 위협하던 세력 중 하나가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영과 지식을 최고의 덕목(德 目)으로 삼는 그리스 철학사상입니다. ‘영지주의’의 핵심은 모든 현상과 사물을 이원론적(二 元論的)으로 구분해서 영은 선하고 물질(육체)은 악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동시에 영지주의 는 최고의 지식은 비밀(mystery)에 감춰져 있어 소수의 ‘완전한 사람들(Gnostics)’에게만 공 개되기 때문에 결국 구원은 이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합니다.

바울은 영지주의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영지주의에 대한 주의를 환 기시킵니다. 바울은 영지주의를 ‘헛된 속임수’ ‘초등학문’, ‘헛된 말(골로새서 2:8)’, ‘거짓된 지 식(디모데전서 6:20)’이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이 영지주의를 배격한 이유는 그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 구원은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 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은퇴하고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다 보니 음악을 많이 듣습니다. 장르를 정해 놓고 듣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듣게 됩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S. Bach, 1685–1750)의 칸타타 BWV 147 ‘With Heart, Mouth, Action, And Life (마음과 입과 행위 와 삶)’의 마지막 합창 부분에 ‘예수, 인간의 갈망의 기쁨(Jesu, Joy of Man’s Desiring)’이라 는 유명한 곡이 나옵니다. 바흐가 300년 전에 작곡한 이 곡은, 저에게는 우리 시대에 주는 메시지처럼 들렸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갈망(渴望)하는 이유는 거기에서 기쁨을 얻기 위해 서입니다. 하지만, 모든 갈망의 끝에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갈망의 끝이 허무하게 끝 나기도 하고, 절망적으로 끝나기도 하고, 방황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바흐는 인간의 갈망 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기쁨이 예수라고 했습니다. 바흐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해서 궁극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지금은 가치의 다양성이 인정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 매우 혼란스러운 때입니다. 2,000년 전의 크리스천들도 그랬습니다. 아직 교회가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영지주의’라는 사상이 교회로 밀려들 어왔습니다. 당시에 ‘영지주의’는 사회의 엘리트들이 따르는 세련된 철학 사상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그 시대의 대세(大勢)였습니다. 골로새 교회 교인들은 영지주 의자들의 주장과 복음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런 때에 바울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은밀 한 지식의 비밀과 지혜는 이미 여러분이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 모두 들어 있습니 다(27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숨겨 있습니다(골로새서 2:3).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희망은 “앞으로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 라 ‘영광의 희망(27절, the hope of glory, ἐλπὶς τῆς δόξης)’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영광 을 의미하는 독사(δόξα)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들어갈 영광 스러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영광으로 들어 갈 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수도 있고, 실패를 맛볼 수도 있고,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영광의 희망 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시시 와이넌스(CeCe Winans)가 부른 노래 “Come Jesus Come”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납니다.

“가끔 나는 무릎 꿇고 기도해요. 오소서 예수님, 오늘이 그날이 되게 해 주세요. 가끔은 무 너질 것만 같아요. 하지만 나는 붙잡고 있어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Sometimes I feel like I’m gonna break. But I’m holding on To a hope that won’t fade)” 가사가 아주 감동적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도 이 희망에 대하여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 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희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4) 바울은 이 희망을 ‘하나님의 영광의 희망’이라 고(로마서 5:2)했습니다. 이 희망은 하나님의 영광이 보증된(guaranteed) 희망입니다. 우리 에게 이 희망이 있기 때문에 환난을 당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더 견고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지금 당하고 있는 환난을 더 나은 삶을 창조할 기회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약속된 희망을 가지고 어떻게 세 상을 살아가는지, 사람들에게 말(설교)하고(proclaiming), 주의를 주고(admonishing), 가르치 고(teaching), 보여주고(presenting), 사람들과 함께 그것을 나누는 것(sharing)을 말합니다 (28절).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 신실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 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 2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 해 받는 고난을 기뻐합니다.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겪으셔야 할 고난의 남 은 부분을 내가 겪을 수 있으니, 그것을 기쁨으로 견뎌 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옵니다. “I am glad when I suffer for you in my body, for I am partici- pating in the sufferings of Christ that continue for his body, the church.” 이 말씀은 예수 그 리스도의 고난은 오늘날에도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고난을 함께 나눌 때,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 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교회의 정체성은 큰 교회 건물이나 그 교회에 모이는 많은 교인들, 그리 고 많은 교회 예산에 있지 않습니다. 2020년 1월 20일에 선언했던 팬데믹은 교회에게 많은 과제를 안겨주었습니다. 팬데믹은 교회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시도를 중단하고 겸손하 게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였습니다. 교회는 팬데믹을 겪으면서 정체성을 새롭게 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런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 지 못하고 오히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 독일)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희망의 신학 (1964)’,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 등의 책들을 저술했습니다. 저는 이 책들을 읽으면서 신학교와 대학원 시절을 보냈습니다. 몰트만은 2,000년에 쓴 ‘신학의 체험’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신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돌보는 사람은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 스도는 그들이 받는 고난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몰트만은 교회는 고난 받는 공 동체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고난 받는 사람들 과 함께 하고, 그들을 돕고,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교회가 오늘날처럼 섬김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던 적이 과거에 없었던 것 같 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섬김과 봉사의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 프로 그램을 운영하는지, 왜 그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에 대한 설명 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同參)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 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 1910-1997)는 오스만 제국의 코소보(현, 북마케도니아)에서 출 생했습니다. 1929년에 소속 수도회의 결정에 따라 인도로 건너가 콜카타(옛 이름 캘커타)의 빈민가를 둘러본 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라”는 소명(召命)을 받습니다. 그 리고, 거기서 그녀는 죽을 때까지 무려 68년 동안 빈자와 약자들의 어머니로 살았습니다. 인종과 국경을 넘어서, 그것도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섬기며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삶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 람들에게 많은 영감(靈感)을 줍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테레사 수녀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섬김의 삶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외로운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 대화의 상대가 되 어 주고,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친구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는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로마서 12:15). 그리고, 주변에서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다가가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로 마서 12:16). 그리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람들을 사랑과 용서와 온유함으로 대하 는 것입니다(에베소서 4:32).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이런 섬김의 삶이 곧 그리 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4절). 섬김의 삶을 크고 대단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상의 생활 속에서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케임브리지한인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들이 케임브리지한인교회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 케임브리지한인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정체성(identity)이 결 정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 를 통해 새롭게 창조되는 교회, 그리고, 주변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교회, 환 난과 고난을 오히려 성장의 기회로 삼아 더욱 단단해지는 교회, 그리고 세상으로 들어가서 각자의 위치에서 조용히 섬김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그 질문에 답해 야 합니다.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우리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10. 05 2025 주일설교

(세계 성만찬, 장학헌금 주일)

내 작은 믿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Offering My Little Faith to God

 누가복음 17:5~10

17:5 ○ 사도들이 주께 말했다. “주님, 저희의 믿음을 키워 주소서.” 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저 바다에 심겨져라!’ 하고 명령해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7 ○ “너희 중에 누군가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돌보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일하다가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이리 와서, 식탁에 앉아 밥부터 먹어라.’ 하고 챙겨 줄 사람이 어디 있느냐? 8 오히려 너희는 그 종에게 주인의 식사를 먼저 준비하게 하고, 또 주인에게 시중들게 한 다음, 그러고 나서 ‘너도 먹고 마셔라.’ 하고 허락하지 않겠느냐? 9 그리고 또 종이 고분고분 주인의 말을 잘 듣는다고 해서, 주인은 특별히 그 종에게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10 이와 마찬가지다. 너희도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다 따른 다음에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희는 다만 보잘것없는 종일 따름입니다. 그저 종의 마땅한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쉬운말 성경)

5 The apostles said to the Lord, “Show us how to increase our faith.”6 The Lord answered, “If you had faith even as small as a mustard seed, you could say to this mulberry tree, ‘May you be uprooted and be planted in the sea,’ and it would obey you!7 “When a servant comes in from plowing or taking care of sheep, does his master say, ‘Come in and eat with me’? 8 No, he says, ‘Prepare my meal, put on your apron, and serve me while I eat. Then you can eat later.’ 9 And does the master thank the servant for doing what he was told to do? Of course not. 10 In the same way, when you obey me you should say, ‘We are unworthy servants who have simply done our duty.’”(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세계 성만찬 주일입니다. 이 성찬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을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작고 연약하지만 성찬의 믿음을 통해서 서로의 삶의 고단함을 위로해 주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길 소망합니다.

믿음의 시작

성경에는 예수께서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을 언급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재물로 인하여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이여!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조차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 주시거늘 하물며 여러분들이야 오죽 잘 돌보아 주시지 않겠습니까?”(마6:30) 말씀하시며 믿음을 작게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로마의 백부장이 자신의 집에 하인이 중풍병으로 몹시 괴로워 하는 상황에서, “주님,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 칭찬하셨습니다. 자신의 자녀나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종은 가치가 없던 존재로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의 생명을 하나의 인격체로 소중하게 여긴 백부장의 믿음을 크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또 가나안 이방 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 들려 괴로워하는 상황에서 예수께 나아와 간구하며,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겸손한 고백을 드렸을때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여인이지만 주를 향한 간절한 갈망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보실때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의 믿음을 키워 주소서” 라는 요청으로 시작됩니다. 이 요청의 앞서서 1절로 4절에 보면, 예수님은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죄에 대해 경고하시며, “삼가 너희 자신을 조심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7:1–3) 이어서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짓거든 책망하고,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반복해서 죄를 짓고 또 회개하면, 그때마다 용서하라고 명하십니다 (눅 17:4)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7’ 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였습니다. 그렇다면 회개하고 돌아오는 형제를 제한 없이 용서하라는 권면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요구사항을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더 큰 믿음을 달라고 간구한 것은 하루동안 내게 일곱 번 죄를 짓고 회개하는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고백입니다. 제한없이 용서할 믿음이 없으니 더 큰 믿음을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큰 믿음을 달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의 양을 늘려주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도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저 바다에 심겨져라!’ 하고 명령해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뽕나무는 뿌리를 깊고 넓게 내려서 폭풍 속에서도 견고하게 버티는 나무였지만 예수님은 그만큼 어려운 일도,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도 가능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을까요? 큰 믿음을 달라는 우리의 기도가 과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간구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믿음을 달라는 간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가리우는 명분이나 내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은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의 기도 속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갈망보다, 여전히 내 뜻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간절히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믿음의 성장

믿음은 우리가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에도 수용하는 힘입니다. 염려와 근심되는 상황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빚으시기 위함을 믿고, 상황과 환경에 흔들리는 감정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 받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연약함과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뽑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 한알의 믿음 안에 담긴 본질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죄를 씻겨 주신 주의 이름을 의지할때 마음과 영혼이 살아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영혼이 호흡하고,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존 낙스는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 없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 라는 확신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또한 “기도하지 않는 기독교인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성화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한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는 크고 작은 문제가 있습니다. 일터에서의 스트레스와 피곤함이 다툼이 될 때도 있고, 아이를 양육하며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믿음의 시험과 마음의 유혹은 우리의 일상을 전쟁터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일상의 자리에서도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께 붙들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회복과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은 아주 작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자라나면 큰 나무가 되듯이, 믿음이 작아 보여도 삶으로 연결되어 질때에 하나님 뜻이 드러나게 됩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방향과 그 삶을 살아내는데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가 밭에 잘 심겨지려면 좋은 땅이 필요합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말씀 앞에서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내 고집과 자아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질 때 믿음의 생명이 자라납니다.   

한 사례를 생각해 봅니다.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부주를 이끌던 링컨 대통령은 매일 2~3시간씩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남부군 로버트 리 장군도 매일 눈물로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참모가 링컨에게 말했습니다. “각하, 하나님도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두분 모두 이렇게 기도하시니,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들어주셔야 합니까?” 그러자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링컨이 기도했던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지 돌아보았던 것입니다. 링컨은 현재의 상황은 어렵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맡겨진 일을 감당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연약함속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갈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왜 믿음이 필요한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곤 합니다. 매순간 인간의 본성의 한계를 깨닫고  일상의 작은 일 속에서도 믿음을 시험하는 순간들을 마주합니다. 한참을 애써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 앞에서 실망하고 분노가 일어나고, 오해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상처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감정으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겨자씨 만한 믿음 붙들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지를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살아 있어서 어려운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할 것이고 그분을 닮아가게 할 것입니다.

믿음의 완성

예수님은 제자로서 갖춰야 할 겸손의 덕목을 가르치기 위해 종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7-9절은 예수님 당시에 시대적 문화속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었습니다. ‘종이 밭을 갈고 양을 돌보았다고 해서 주인이 종을 식탁에 앉아서 챙겨주지 않는다. 그 종이 일하다가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이리 와서, 식탁에 앉아 밥부터 먹어라.’ 하고 챙겨 줄 사람이 어디 있느냐? 8 오히려 너희는 그 종에게 주인의 식사를 먼저 준비하게 하고, 또 주인에게 시중들게 한 다음, 그러고 나서 ‘너도 먹고 마셔라.’ 하고 허락하지 않겠느냐? 9 그리고 주인은 종에게 식사를 준비하게 할 것이다. 명한 대로 했다고 주인이 종에게 감사하지 않고,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종은 ‘저희는 다만 보잘것없는 종일 따름입니다. 그저 종의 마땅한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나의 자랑을 위해 일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더라도 나의 일이라 여기며 생색을 내고, 보상을 바란다면 믿음의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 교훈은 앞서 주어진 “형제를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며 서로가 겪었을 삶의 어려움을 위로할 줄 아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서로 서로가 감사와 존중을 나누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완성은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아니어도 이루어 질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거룩한 책임감을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하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겸손히 섬기게 됩니다. 제자의 삶의 목적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맡겨 주신 일을 책임 있게 감당하며 그 속에서 감사와 기쁨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평생동안 우리의 믿음의 방향을 점검하고 내 믿음을 시험하는 순간들을 이겨내고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 안에는 우리만 아는 연약한 본성과 욕심이 있습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삶을 살아낼 실력이 없습니다. 그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이겨 내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받는 자녀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책임감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사랑을 누려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일하고 있음을 잊지 않고, 언제나 겸손히 주를 섬기는 삶에 있습니다. 내 컨디션과 내 선택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 만족만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그 삶이 행복할까요? 잠시는 편하고 행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청지기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무게가 더해 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우리에게 거룩한 부담감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맡겨진 일을 겸손하게 순종할 때, 우리는 그 일을 지속해 나갈 기쁨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무언가 대단하고 준비된 큰 믿음을 기대하지만 반복되는 쓰러짐과 실망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께 붙들리며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인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다듬어 가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믿음은 함께 하는 자리에서 성장하고 깊어집니다. 혼자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함께 가야 합니다. 본회퍼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서로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는형제라는 말씀속에 계신 그리스도보다 약합니다. 이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귐을 갖는 목적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은 서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로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는 이상이 아니라, 거룩한 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본회퍼-성도의 공동 생활)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속한 형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회복될 때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세상은 혼란스럽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잃어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채워지면 우리의 인생은 더이상 허전하거나 결핍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의 자리 앞에 서게 됩니다. 성찬은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며 삶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은혜의 자리입니다. 감사와 새 언약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을 가지고 성찬에 참여 하시기 바랍니다.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자들을 주께서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굳은 마음을 녹이고 상한 마음을 싸매시며 우리를 다시 세워주십니다. 하나님은 큰 믿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믿음을 찾으십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09 28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16주)

하나님의 시선으로

Through God’s Eyes

누가복음 16:19~31

16:19 ○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소. 그 부자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잔치를 벌이며 사치스러운 나날을 보냈소. 20 그런데 그 부잣집의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고 하는 병든 거지가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21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나마 허기를 채우려고 애쓰고 있었소. 그러나 개들만이 와서, 나사로의 헌데를 핥고 갈 뿐이었소. 22 때가 되어 거지가 죽자, 천사들은 그를 아브라함 품으로 데리고 갔소. 그 부자도 역시 죽어서 땅에 묻혔소. 23 그 부자는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아득히 먼 곳에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었소. 24 그래서 그 부자가 크게 소리쳤소. ‘아브라함 조상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이리로 보내어, 그 손가락에 물을 찍어 제 혀라도 살짝 적시게 해 주십시오. 타오르는 불덩이 속에서 너무나 괴롭습니다.’ 25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했소. ‘안 된다, 생각해 보아라. 너는 살아 있을 때 온갖 좋은 것들을 다 가져 보았으나,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지금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있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26 더구나 우리와 너 사이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그리로 건너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거기서 이리로 건너오고 싶어도 오지 못한다.’ 27 그러자 그 부자가 애원했소. ‘아브라함 조상님이여, 그러면 제발 부탁합니다. 나사로를 제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큼은 이곳으로 와서 나처럼 고통 받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29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했소. ‘그들에게는 지금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언제든지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30 그 부자가 대답했소.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이여,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죽은 사람을 그들에게로 보낸다면,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서 회개할 것입니다.’ 31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설령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그들에게 돌아간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을 것이다.’하였소.” (쉬운말 성경)

19 Jesus said, “There was a certain rich man who was splendidly clothed in purple and fine linen and who lived each day in luxury. 20 At his gate lay a poor man named Lazarus who was covered with sores. 21 As Lazarus lay there longing for scraps from the rich man’s table, the dogs would come and lick his open sores.22 “Finally, the poor man died and was carried by the angels to sit beside Abraham at the heavenly banquet.[e]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23 and he went to the place of the dead.[f] There, in torment, he saw Abraham in the far distance with Lazarus at his side.24 “The rich man shouted, ‘Father Abraham, have some pity! Send Lazarus over here to dip the tip of his finger in water and cool my tongue. I am in anguish in these flames.’25 “But Abraham said to him, ‘Son, remember that during your lifetime you had everything you wanted, and Lazarus had nothing. So now he is here being comforted, and you are in anguish. 26 And besides, there is a great chasm separating us. No one can cross over to you from here, and no one can cross over to us from there.’27 “Then the rich man said, ‘Please, Father Abraham, at least send him to my father’s home. 28 For I have five brothers, and I want him to warn them so they don’t end up in this place of torment.’29 “But Abraham said, ‘Moses and the prophets have warned them. Your brothers can read what they wrote.’30 “The rich man replied, ‘No, Father Abraham! But if someone is sent to them from the dead, then they will repent of their sins and turn to God.’31 “But Abraham said, ‘If they won’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they won’t be persuaded even if someone rises from the dead.’”(New Living Translation)

지난주 설교에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올바른 재물관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인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는 재물을 그릇되게 사용한 부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유속의 이 부자는 재물을 우상으로 삼고 살다가 심판을 받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은혜 안에서 발견하는 믿음의 삶

이 비유에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인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참 대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비유속에 한 부자는 화려한 옷을 입고 늘 잔치를 벌리며 사치스러운 날들을 보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관은 잔치를 열어 즐겁게 사는 것이었다. 하나님없는 세속적 즐거움과 사교적 향락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 집 대문 앞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살아가던 병든 거지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겨우 허기를 달랬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를 도와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매일 잔치를 벌이는 부자인 집으로 가면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겠다 싶어서 불편한 몸으로 대문에 누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유 가운데 부자가 왜 음부에 떨어질 정도로 불의 했는지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일 잔치를 열다 보면 그 쾌락도 만족감이 점점 줄어 들긴 했을 것입니다. 그는 매일 잔치를 열며 자신의 행복과 삶에 몰두하느라 집 앞에 죽어가는 나사로를 보지 못했고 내가 지닌 돈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착각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이 비유 속에서 참 흥미로운 점은 비유 속 인물들은 보통 “선한 사마리아인”, “아버지의 집을 떠난 둘째 아들”, “불의한 재판관” 등으로만 지칭되는데 이 비유에서는 거지의 이름이 특별하게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히브리어 ‘엘르아자르’에서 온 이름으로 “하나님이 돕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름을 통해 볼 때, 나사로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고 의지하며 살아가던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잃어버린 한 사람이도 더 찾기 위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주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길은 찾는 이들이 적지만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는 자리입니다. 나사로는 비록 이 땅에서 삶이 힘들고 가난했지만 자신의 환경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갈망합니다. 어떤 이들은 개인의 행복과 세속적 자유를 우선시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단순히 자유를 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매일의 선택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사는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돈이나 개인의 만족은 구원의 문을 여는 조건이 될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보고 기대하는 천국은 어떤 나라인가요? 성경은 ‘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추구하십시오. 이것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히 12:14) 말씀합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믿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좁은 곳에서도 평안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은 눈물과 땀에 젖은 우리의 삶과 고달픈 수고속에서도 주를 믿는 모든 자들을 기억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거룩하심 안에서 우리는 상처와 고통에서 치유를 받고, 나만의 행복과 자기 중심적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시편118편 5절을 보시겠습니다. 118:5 ○ 내가 고통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이끌어 내시어 넓은 곳에 세워 주셨도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걷는 좁은 길은 생명의 면류관을 향한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하시며, 부활의 믿음 지니고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새롭게 하는 참된 희망이며, 우리를 생명과 승리로 이끄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삶

두 사람은 돌이킬수 없는 운명으로 인생이 역전되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두 사람 모두 죽었는데,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고통스러운 지옥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대한 구덩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있어서 물 한모금도 얻어 마실 수 없었습니다. 부자는 타오르는 불덩이 속에서 너무나 괴롭고 갈증이 나서 고통 속에서 물 한 모금이라도 허락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 때 나온 아브라함의 대답은 ‘안 된다, 생각해 보아라. 너는 살아 있을 때 온갖 좋은 것들을 다 가져 보았으나,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지금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있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 대답은 부자가 단순히 재산을 가졌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속에서 풍요로움을 누렸음에도 고통받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즉 자기 만족에만 머물렀던 것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을 의미합니다. 부자가 애원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섯 형제들이 있는데, 자신처럼 극한 고통을 경험하지 않도록 나사로를 제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오늘날 시대는 돈 때문에 울고 갈등하며 가까웠던 가족도 돈과 싸우며 남이 됩니다. 돈으로 사람을 속이고, 수많은 죄가 자라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음부에서 간청하는 부자의 애원은 세상 누구보다 간절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도 지금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고 언제든지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으니. 만일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설령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그들에게 돌아간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매순간 삶속에서 물질이 주인되는지 아닌지 구분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이들을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속에서 바쁜 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주변에 절박한 마음으로 있는 연약한 이웃에게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인색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절박한 삶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며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길에서 우리의 삶은 새로워집니다.

아브람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부여 받고 약속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사울도 큰자에서 이방인들의 복음 선교사로 작은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사도로 복음 증거자의 자세로 살았습니다. 주님은 “내가 한 일을 너희도 하고 더 큰 일들을 하리라”(요 14:12) 고 하셨는데 우리는 우리를 위해 고통의 풀무풀 속에 뛰어 드신 주님의 사랑을 알면서도 여전히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여전히 과거의 나의 상처에 묶여 나의 상황과 나의 약함만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물질로 인한 결핍이나 혹은 풍요로 인한 교만함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회복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를 믿고 의지하는 삶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때 그의 곁에 있던 강도를 향해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께서 오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 땅을 바라보는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내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주어진 삶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분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가난한 마음으로 주를 의지하는 이들을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한 사람이라도 더 찾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하늘의 뜻을 들려주시지만, 우리의 생각이 땅의 것에만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과의 소통은 막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하나님의 관점이 열리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비록 기도 가운데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아 여전히 어려움의 길을 걷는 것 처럼 보여도, 주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깨닫게 되면 우리는 의의 길로 인도함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에서 말씀하신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은 단순히 물질적 가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아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이고 내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겸손한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현실의 부족함에만 매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 속 작은 감사들을 통해 미래를 바꿔나가길 원하십니다. 인생의 버거운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그분께서 이루실 삶의 변화를 기대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가 변화된 삶을 살게 합니다.

지금은 별세하셨지만, 2007년 7월 24일 당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도쿄 프린스파크 호텔에서 세례를 받을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시대적 지성인으로 불리며 신념 있는 무신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태까지 생명, 지성 다 내 것인 줄 알았다. 숨 쉬는 것, 말하는 것이 다 기프트다. 위대한 재산을 내가 받은 것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것에 대한 질문에는 “부모님을 만난 것처럼 엉엉 울 것 같다. ‘그 동안 얼마나 고생 많으셨어요. 우리 때문에 얼마나 속썩으셨어요…’ 이렇게 호소하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탕자처럼 가슴을 아프게 해 드렸는데, 저를 받아주신 주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나. 이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고백은 우리의 마음에도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많은 것들이 그저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라 생각하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혹여 내 마음이 나만을 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나의 고백이 입술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신 은혜를 당연하게 누리며 살아가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경제적 압박과 삶의 불안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답답하고 힘이 들어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고민합니다. 예배 안에서도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삶의 장애물이 너무 많습니다. 마음이 막혀 사방을 둘러보아도 한숨이 나오는 그런 날들이 우리 인생에는 너무 쉽게 자주 찾아옵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향해 살아가면 하나님의 뜻과 이웃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인생의 문제가 버겁고 어려워도 예배의 자리에서 나의 삶의 시선을 주님께 돌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시선에 머무는 삶, 내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고자 엎드리는 삶에서 영원한 길을 만나게 됩니다. 내 마음이 주님께 머문다면 그 인생이 바로 천국이 되고, 그 마음의 모든 선택이 주님께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