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07 2025 주일 설교

내 제자

My Disciple

누가복음 14:25~33

14:25 ○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면서 길을 가고 있을 때,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14:26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보다 나를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도 더욱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14:28 여러분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 사람은 먼저 전체 비용이 얼마나 들 것인지 계산부터 뽑아 보지 않겠습니까? 14:29 그렇게 하지 않아서, 만일 그 사람이 기초공사만 해놓고 비용이 모자라 망대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사람들마다 그를 비웃으며 말하기를, 14:30 ‘저 사람이 건축을 한답시고 시작만 해놓고는 마무리를 못하는구나!’ 하지 않겠습니까? 14:31 또 만일 어떤 왕이 다른 왕과 전쟁을 해야 한다면, 1만 명의 자기 병사로 2만 명의 적들을 과연 물리칠 수 있을 것인지, 미리 헤아려 보지 않겠습니까? 14:32 그렇게 헤아려 보아서, 아무래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면, 적군이 아직 먼 거리에 있을 때 화친을 맺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14:33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쉬운말 성경)

매년 새학기가 되면 보스턴의 곳곳에는 이삿짐 트럭과 손수레를 끌고 짐을 옮기는 학생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청년들의 모습에서는 설레임과 기대가 느껴지지만 자녀들을 새로운 땅에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부모들에게는 염려와 애틋한 마음이 함께 할 것입니다. 이제 이곳에 온 청년들은 자신의 꿈을 향해 새롭게 도전하는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낯선 환경에서 공부를 해야 하고, 끼니를 챙기는 것도 지치는 날이 있을 것이며 외로움이 찾아 올때면, 눈물로 마음을 달래고 기도하며 꿈을 향한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 낯선 땅에서 홀로 서게 되는 자녀들은 세상과 믿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결단을 해야하고, 자녀를 떠나 보내는 부모는 이제 하나님께 나의 자녀를 맡기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여러 호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빛의 자녀, 성도,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입니다. 이 호칭들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뿌리를 둡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믿음 안에서 거룩한 성도로 선택을 받았으며, ‘제자’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여러 표현들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된 호칭이 제자입니다.신약성경에 ‘제자가 되다’ 라는 동사는 25회 정도 나오고, ‘제자’라는 명사는 246회 이상 나옵니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서  요한은 특별히 사랑을 많이 받는 제자였습니다.  그의 서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제자, ‘마데테스:μαθητής’는 ‘배운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제자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입니다. 선생과 제자는 배움을 통하여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갑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잇는 제자의 삶을 살았고, 엘리사는 엘리야의 가르침을 받아 그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예수님도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셔서 가르치셨습니다. 12제자 외에도 70여명의 제자를 훈련하여 파송하셨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을 보고 엘리야와 같다고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라고 말하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던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누가 내 제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분명하고도 강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카일 아이들먼(Kyle Idleman)의 ‘오늘 제자로 살기’에 보면 제자됨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에 ‘관한’ 사실을 줄줄 읊을 줄 안다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지식이나 재능에 감동하시지 않는다그분이 정말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주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다십자가라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말이다그분이 지독히도 낮아지셔서 타인을 이타적으로 섬기신 궤도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여기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제자의 조건을 말씀하시며, 그 조건을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세번씩이나 말씀 하셨습니다. ‘내 제자’라는 말은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요구와 내가 기대하는 것 사이에서 충돌을 경험 해본 적이 있다면, 우리는 ‘내 제자’라는 말이 부담스러운 조건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내 제자’는 주님과 특별한 관계임을 의미합니다.

“쉬운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부모나 아내와 자녀,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라고 번역합니다. 반면 개역개정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고 번역하여 보다 강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즉 어떤 대상도 예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가족보다도 나를 더 사랑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면, 그때 나를 선택할 수 있겠느냐?” 묻고 계신 것입니다. 당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모두가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이 질문 앞에 서게 하셨을때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쉽지 않겠다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가정은 마음의 안식처이자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든든한 울타리와 같습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을 배워갑니다. 하지만 주님은 혈연적 가족보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름 받았음을 더 우선순위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주님을 선택해야 할 때가 온다면 주저하지 말고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의 가족, 물질, 명예가 중요하여 내 삶의 평안을 지키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 질문은 우리가 진정한 제자인가를 돌아보게 합니다. 제자의 길을 가기 전에 반드시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네’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않아’ 이 고백은 주님의 초청에 대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만 제시하신 분이 아닙니다. 제자의 길이 힘들고 험난할 수 있지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 28:19) 마지막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끝날까지 내 제자들과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부모는 자녀의 부족함에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말씀 하신 망대 비유는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망대는 전쟁시 적의 동태를 살피는 높은 탑입니다. 만일 망대를 건축하다가 기초공사만 하고 멈추게 되면, 적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오히려 안 짓는 건만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망대를 세울 비용을 먼저 계산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길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으나 대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시작하면, 사명의 무게 앞에서 쉽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승리를 보장 받은 믿음의 경주자들입니다. 만일 건축회사들이 이곳 저곳 기초공사만 해놓고, 힘들다고 포기하고 중단해 버린다면 그 도시는 황폐해 보일 것입니다.

십자가는 짐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지고’라는 헬라어 동사 바스타조 (βαστάζω)는 ‘참다’, ‘짐을 짊어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로마는 자국의 통치에 반항한 범죄자나 전쟁 포로를 처형할 때 십자가에 못박히는 자가 처형 장소까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도시 한복판을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며, 이를 통해 로마 제국이 사형을 집행한 것이 옳고, 죄수들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침묵으로 인정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주님께서 옳고 참됨을 시인하는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무거울수록, 그 길에는 고통과 부담이 따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리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무게를 끝까지 감당하며 지고 가야만 합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시인하겠다.’(마 10:32)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제자들의 삶을 헛되지 않게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증거는 십자가를 짐어지는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녀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짐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공부하며 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주를 위해 흘린 땀과 시간은 언제가 내 인생에 유익이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견뎌야 할 폭풍속의 문제들도 산적히 쌓여 있습니다. 자녀의 십자가, 직장에서 져야 할 십자가, 사명의 길에서 져야 할 십자가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픈 몸을 맡기며 기도하고 있고, 사랑하는 가족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길에서 홀로 있는 것만 같은 외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자는 삶에서 치열하게 살아내며 주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 아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 다른 이들은 병이 낫게 되었지만 정작 자신이 지녔던 육체적 질병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고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해결되지 않은 육체의 가시가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고후12:7 그리고 내가 받은 계시가 너무나 크고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너무 교만해질까 봐 내 몸에 가시 같은 병을 주셨습니다이것은 내가 교만하지 않도록 나를 괴롭히는 사탄의 사자입니다.  12:8 나는 이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12:9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러므로 나는 나의 약한 것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자랑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 머물러 있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지만, 이는 세상의 거대한 풍조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믿음의 시련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기에 허락하신 것이라면, 십자가의 짐이 무거울수록 그만큼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녀임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있으나 열심은 사라지고, 지식은 많으나 순종은 없고, 알고 있어도 삶으로 헌신하고 포기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나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으로만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피하고 싶던 아픔과 고난의 자리, 외로움과 눈물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인생의 높은 산을 넘어 갈때마다 우리가 교만하지 않도록 주님과의 관계를 더 깊어지게 합니다. 지나고 보면 내가 진 십자가가 나를 바르게 살아가도록 안내해 주는 것이었구나 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때 비로소 성령께서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제자의 길은 우리의 힘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포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도는 MADE BY GOD,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삶입니다. 우리는 분명 죄인이었는데 주님께서 거룩한 사람이라 일컬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모든 권리와 소유권을 하나님께 넘기고 하나님이 내 삶에 주인 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님은 ‘내려놓음’이 포기보다 굉장히 적극적인 행위라고 말합니다. 선교사님께서 하신 인터뷰의 내용 일부입니다.

저라고 하는 사람은 제 안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어떤 생각들미움이라든지 남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인정 욕구 같은 걸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어요해결한 척 포장은 할 수 있겠지만 제 안에는 그런 힘이 없어요하지만 앞이 막막하고 희망이 안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질 때 제 삶이 여전히 감사가 넘치고 행복하고 더는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저는 삶 속에서 체험했습니다.”진정한 내려놓음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는 내 제자다”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외롭고 지친 순간에도 다시 일어납니다. 마라톤 경주를 하기 위해서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달려야 하는 것처럼 인생의 경주에서도 짐이 많을수록 경주는 더 힘들어집니다. 주님은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 가운데 있을때 우리가 손에 붙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의 높고 크신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주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제자들이 보여줄 믿음의 태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안에는 우리의 선택과 책임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이기심으로 쌓아올린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이고, 견디기 힘들고 낙심되는 자리에서도 주님의 명령을 책임있게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치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끝까지 심고 나누고, 십자가를 지는 삶에 있습니다.  상처와 아픔이 있어도 주님이 가신 길을 기꺼이 따라가야 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돌아보니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보다 나를 위해 살았고, 눈 앞에 보이는 세상을 따라가기에 급급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놓치며 믿음의 길에서 돌아서서 쉽고 형식적인 신앙의 자리에 머무르게 됩니다. 바울이 고난 중에도 영광을 바라본 이유는, 그 길 끝에 주님이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 Kate B. Wilkinson 이 빌립보서 2장 5절의 말씀을 담은 찬양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찬송시는 처음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매주 부르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돕기 위해 쓰였습니다. 삶의 간절한 고백으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내 구주 그리스도의 마음이 날마다 내 안에 살게 하시고 그분의 사랑과 능력이 내 모든 행동과 말을 다스리게 하소서. 2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시간마다 풍성히 거하게 하시고 내가 보는 모든 것에서 오직 그분의 능력으로 이기게 하소서. 3내 아버지 하나님의 평안이 내 모든 삶을 다스리게 하시고 아플 때나 슬플 때 고요히 위로 받게 하소서. 4예수님의 사랑이 물이 바다를 채우듯 나를 채우게 하시고 그분이 높아지고 나는 낮아지게 하소서. 5 내 앞에 놓인 경주를 하며 강하고 담대하게 적과 싸우며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전진하게 하소서. ” (Kate B. Wilkinson, “May the Mind of Christ, My Savior)

경기에 나가는 선수가 자신의 의욕만으로 경주를 끝까지 완주할 수가 없습니다. 매일 훈련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믿음의 경주 중입니다. 아직 내 인생이 더 중요하고 내 가족이 더 소중합니다. 내 목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는 고백도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고백속에서도 죄와 싸우며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인생의 공사는 우리의 삶이 여전히 폭풍 속과 같지만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달려갈 때 포기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무거운 짐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8 31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12주)

은혜의 자리

The Place of Grace

누가복음 14:7~14

7 ○ 하루는 예수께서 초대 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식탁의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눈여겨보시고는,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다. 8 “결혼 잔치에 초대받아 가거든, 여러분은 윗자리에 앉지 마십시오. 여러분보다 더 귀한 손님이 초대를 받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9 그렇게 되면, 주인은 여러분이 앉은 자리에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주시오.’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안을 당하면서 구석진 자리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10 그러니 초대를 받거든, 여러분은 아예 잔치 자리 중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십시오. 그러면 주인이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친구여, 이리로 올라와서 윗자리에 앉으시오.’ 하고 권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손님들 앞에서 당신이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11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 12 ○ 그러고서 예수께서는 자기를 초대한 집 주인에게 말씀하셨다. “점심이나 저녁 식사에 사람을 초대하려거든, 친구들이나 형제들이나 친척들이나, 또는 잘 사는 이웃들은 초대하지 마시오. 그들은 너를 다시 초대하여 되갚을 것이기 때문이오. 13 잔치를 베풀 때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과 절름발이들과 맹인들을 초대하시오. 14 그리하면, 당신은 복을 받을 것이오. 비록 그들을 당신에게 되갚아주지 못하겠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되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오.” (쉬운말 성경)

7 When Jesus noticed that all who had come to the dinner were trying to sit in the seats of honor near the head of the table, he gave them this advice: 8 “When you are invited to a wedding feast, don’t sit in the seat of honor. What if someone who is more distinguished than you has also been invited? 9 The host will come and say, ‘Give this person your seat.’ Then you will be embarrassed, and you will have to take whatever seat is left at the foot of the table! 10 “Instead, take the lowest place at the foot of the table. Then when your host sees you, he will come and say, ‘Friend, we have a better place for you!’ Then you will be honored in front of all the other guests. 11 For those who exalt themselves will be humbled, and those who humble themselves will be exalted.” 12 Then he turned to his host. “When you put on a luncheon or a banquet,” he said, “don’t invite your friends, brothers, relatives, and rich neighbors. For they will invite you back, and that will be your only reward. 13 Instead, invite the poor, the crippled, the lame, and the blind. 14 Then at the resurrection of the righteous, God will reward you for inviting those who could not repay you.”(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자리가 어디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초대 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식탁의 윗자리(The most important seat)에 앉으려는 것을 눈여겨 보시고는, 이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간 사람들에게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에서 주인을 강조하는 것은 최종 평가는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나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우리에겐 언제나 익숙한 자리가 있습니다. 내가 앉는 자리, 내 눈에 보여지는 자리입니다. 눈에 띄고 싶고 인정 받고 싶은 자리도 있고, 겉으로는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불안과 비교, 불만족으로 인해 내가 숨기고 싶은 자리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며 섬길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갈 것인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에겐 여전히 남들보다 더 우월해지고자 하는 마음, 칭찬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겸손은 내가 가진 능력을 부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높이지 않고, 주신 능력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참된 겸손

라파엘 메리 델 발(Rafael Merry del Val, 1865-1930) 추기경의 겸손의 기도(Litanies of Humility) 의 일부입니다.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저를 구해주소서.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저를 구해주소서. 칭찬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저를 구해주소서. 무시당할까 두려워하는 저를 구해주소서. 거절당할까 두려워하는 저를 구해주소서. 다른이들이 저보다 더 사랑 받기를 바라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다른이들이 저보다 더 존경 받기를 바라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이 기도문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욕망과 두려움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우리의 이런 욕구는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 중 가장 특이한 것은 자리 배치였습니다. 이러한 배치 원리는 오늘날 경쟁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비행기 안에도 좌석에 따라 등급이 나눠져 있고, 영화 시사회에서도 주연과 조연의 자리가 다르게 배치됩니다. 당시 로마의 영향을 받은 유대사회에도 식탁을 ‘ㄷ’자형으로 배치하고, 존경 받는 손님이 앉을 자리를 별도로 준비하고, 삼면의 중앙자리가 가장 지위가 높은 자리였습니다. 사회적 권위와 명예를 나타내는 자리였습니다. 초대 받은 바리새인들은 서로 주인의 눈에 드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비유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 속에서 말씀하신 “높은 자리”는 인간적인 노력이나 권력으로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자리입니다.

믿음과 삶을 살아낼 실력이 부족한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먼저 그 자리로 가셨습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예수를 핍박하던 바울의 삶이 바뀐 것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높은 자리나 끝자리가 아니라 혼인 잔치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후 12: 9-10)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곳, 그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까지 함께 갑시다. 서로의 약함이 조금은 불편해도 품어줄때 우리는 잔치의 은혜를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자랑하고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 안에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향해 경멸하고 박해하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섬기고 희생하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나의 공로와 이름을 내세우고자 한다면, 그것 역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3년간 훈련을 받았지만, 최후의 만찬에서 서로 높아지려 다투지 않았습니까?

오늘을 위해서는 오늘의 은혜가 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의 평가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 안에서 믿음으로 살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은혜가 우리의 의지를 깨우고, 주님을 닮아가도록 행동하게 합니다. 만약 은혜는 없고 율법과 형식만 의지하면, 금식과 기도, 전도와 같은 행위도 우리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영혼이 건조해집니다. 은혜가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마주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가 아니라 주를 아는 겸손함에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 붙들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겸손한 삶은 세상의 시각에서는 나약한 삶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으로 낮아지는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 깊어지는 시간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서 실력 있는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일상의 평범한 시간속으로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삶 전체의 자리에서도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는 자리에서 마음이 지쳐 있지는 않으신가요? 예수님은 주를 찾는 마음에 진실한 믿음이 살아나게 하십니다. 주님과 만나는 자리는 새힘이 임하는 자리입니다. 사모함과 무뎌짐 사이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겨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폴트립은 ‘우리의 과거의 후회와 회한을 예수님의 보혈이 완전히 덮어 가려주었다고 말하며 이제 더이상 과거의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나 자신을 완전히 바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폴 트립의 365 아침 묵상)

일상의 시간에서 거룩함은 주님과 친해지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인간의 본성과 충돌하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에서 시험과 유혹을 받으셨지만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 세상의 가치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관계를 풀어가는 일 만큼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힘을 그 안에서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하게 만드신다고 생각합니다. 창 자체가 밝아서 햇빛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먼저 창을 비추었기 때문에 밝아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C.S 루이스)

참된 겸손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이끄시는 값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삶이 때때로 흔들리거나 불안한 순간에도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좁은 길로 걷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

참된 자비를 베풀어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는 모두가 허물과 죄가 많았던 사람들입니다. 지극히 가난한 사람들과 같았고, 병들어 걷지 못하고, 한 치 앞도 볼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갚을 길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결핍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갚을 능력이 없는 염려에도 눌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8-11 절 비유의 대상이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에 관한 것이라면, 12절부터는 초청하는 자로 바뀌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점심이나 저녁 식사에 사람을 초대하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점심으로 번역된 ‘아리스톤’은 일반적인 식사 자리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즉 일상에서 크고 작은 식사를 베풀때에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과도 비슷합니다. “마 6:1 “남들에게 보이려고 선행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아무런 상도 받을 수 없습니다. 3 그러므로 당신이 친절을 베풀 때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십시오. 심지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조차도 모르게끔 하십시오. 4 그렇게 해서, 당신의 자선 행위를 아무도 모르게 고이 숨겨 두십시오.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는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일들, 이름 없이 행하는 모든 선행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상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구약의 모세의 율법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4장 29절입니다. 14:29 여러분과는 달리 토지를 나누어 받지 못한 레위인들이나, 여러분의 마을에 함께 사는 외국인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인의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보상을 받게 될 그 시기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부활 시기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때는 우리가 행한대로 받게 될 날입니다. 복이 될 시기는 부활의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에 기쁘게 달려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부활의 때에 임할 복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가 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하게 될 것이며,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보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답을 받는 자가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삶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여전히 고통과 슬픔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주저앉아 있는 이들, 갈길이 보이지 않아 소망 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계산으로 하나님의 초대를 망설이는 사람들, 학업과 직장, 가정의 자리에서 두려움과 염려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버티고 견뎌내지만 여전히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인해 지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방식 안에 자비의 삶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이 삶이 성도에게는 복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부르심 가운데 허락하실 복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선수들의 수고와 땀은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이미 승리한 사람의 넉넉함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4장 본문에 이어지는 또 다른 잔치 비유에서는 주인이 잔치를 열고 많은 사람을 초대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갖구실을 대면서 거절했습니다. 밭을 샀으니 가서 밭을 보아야 하겠다며 생계와 자기 일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장가를 들었으니 해야 할 책임 때문에 갈수 없다고 거절하고, 장사를 시작했으니 경제적 이유 때문에 잔치 자리를 거절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삶이 우선순위에서 밀려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편안하고 익숙한 곳에만 앉고 싶어 합니다. 일부러 불편한 자리로 찾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학교와 직장, 가정과 교회 안에서 잘 살아가고는 있지만 여기에 삶의 책임의 무게가 더해지면 가끔은 길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광야의 시간을 통하여 버거웠던 눈물의 자리, 불안과 외로움의 자리가 주님의 마음을 만나게 되면, 영혼을 살게하는 은혜의 자리가 됩니다.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은혜의 자리, 자비의 자리는 비교와 경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삶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이웃을 사랑으로 돌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낮은 자리에서 눈물로 드리는 믿음과 기도입니다.

우리의 분주한 마음 뒤에 감추어진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혼인잔치의 진정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인정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지 말고, 축복에 참여하게 될 의인들의 자리를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08 24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11주)

일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라

Building God’s Kingdom in Daily Life

누가복음 13:10~17

13:10 ○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그런데 그곳에는 18년 동안이나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허리가 굽어져 있어, 몸을 똑바로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그녀를 앞으로 불러내어 말씀하셨다. “여인이여, 당신이 병마에서 해방되었소.” 13 그리고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시자, 그 여자는 즉시 허리를 똑바로 펴고는, 하나님을 찬양했다. 14 ○ 그러자 안식일에 예수께서 병을 고치신 것에 크게 화가 난 회당장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일을 하게 되어 있는 날이 일주일에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날에 와서 병을 고쳐 달라고 하시오. 하지만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 말을 듣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들 위선자들이여! 당신들은 안식일이라고 하여, 외양간에 매여 있는 당신들의 소나 나귀의 고삐를 풀어 물을 먹이지도 않는단 말이오? 16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도 18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소. 그런데 안식일이라고 하여, 이 여자를 풀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이오?” 17 이 말씀에, 예수를 반대하던 자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쉬운말 성경)

10 One Sabbath day as Jesus was teaching in a synagogue, 11 he saw a woman who had been crippled by an evil spirit. She had been bent double for eighteen years and was unable to stand up straight. 12 When Jesus saw her, he called her over and said, “Dear woman, you are healed of your sickness!” 13 Then he touched her, and instantly she could stand straight. How she praised God! 14 But the leader in charge of the synagogue was indignant that Jesus had healed her on the Sabbath day. “There are six days of the week for working,” he said to the crowd. “Come on those days to be healed, not on the Sabbath.” 15 But the Lord replied, “You hypocrites! Each of you works on the Sabbath day! Don’t you untie your ox or your donkey from its stall on the Sabbath and lead it out for water? 16 This dear woman, a daughter of Abraham, has been held in bondage by Satan for eighteen years. Isn’t it right that she be released, even on the Sabbath?” 17 This shamed his enemies, but all the people rejoiced at the wonderful things he did.( New Living Translation)

영국의 복음주의 목회자 마틴로이드 존스 (Martin Lloyd-Jones, 1899-1981)는 1963년 웨스트 민스터 채플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을 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복음이 선포된 지 2천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복음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오해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지금 직면한 현실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히 다가올 미래만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현실임을 강조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봅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나? 참 바쁘고 분주한 요즘입니다. 한주가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게 일상의 분주함 속에 있습니다. 생각해야 할일은 너무 많고, 해야 할 일도 더해집니다. 이렇게 바쁜 우리의 삶에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가는 여정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때 임하냐는 질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18년 동안 보이지 않는 악한 힘에 사로잡혀 있던 여인이 나옵니다. 그녀는 긴 세월 동안 허리가 굽은 채로 굳어져 있었고, 이로 인해 하늘 한번 쳐다 보지 못했을 것이며, 땅만 바라보며 살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악한 힘에 사로 잡혀 있었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병을 죄의 결과로 여겼기에, 그녀는 부정한 자로 배척당하며 사회와 종교 공동체에서 소외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가 고통 속에 갇혀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매여 근심하고, 내 힘으로 안되는 일로 걱정의 시기를 보내는 분들, 감당해야 하는 문제와 책임 앞에서 잠못 이루는 날들을 보내는 분들도 계십니다.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회복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힘겹게 버티고 있는 그 일상의 자리도 보이지 않는 문제에 묶일때가 있지만 굽은 마음의 자리에도 주님이 오시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1.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회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께서 회당에 나온 이 여인을 보셨고, 불러 내어서 여자에게 손을 얹자 여자는 즉시 허리를 똑바로 펴고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눅 13:13) 그 동안 누려보지 못했을 해방과 자유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은혜가 이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어둠과 죽음의 권세는 힘을 잃고, 죄에 사로 잡힌 인생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사단은 지금도 끊임없이 교회와 성도들의 영혼을 흔들며 유혹합니다. 수시로 찾아오는 불안과 두려움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뤄집니다.

예수님은 팔복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 안에 있는 미움과 탐욕, 분노와 시기심의 소리에 이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한 척 할때 우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겉도는 대화속에서 관계가 깊어질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위선적 모습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시들어 집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병을 고치신 사건으로 회당을 책임지던 회당장과 예수님 사이에 정면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회당장이 분노한 이유는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회당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안식일에 일만 할수 없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들어서도 안되고 심지어 불을 피어도 안되도록 엄격하게 규정했습니다. 지금도 정통파 유대교(Orthodox Judaism)인들은 전기를 켜고 끄는 행위가 ‘불을 지피는’ 것과 유사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자동 타이머를 설정해 놓고 전기를 미리 켜고 끄는 방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는 회당장의 관점에서 여인을 치료하는 예수의 행동이 안식일의 전통과 충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과 종교적 형식을 중시하던 회당장의 충돌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안식일의 참된 정신이 무엇인지,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안식’이란 단어 샤바트(שַׁבָּת, Shabbat)는 ‘쉬다, 멈추다, 그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며 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5장 말씀에 보면, “5:15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펼친 팔로 해방시켜 주신 것을 기억하여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쉬도록 너희에게 명령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해방하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안식일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회당장은 안식일의 율법과 규정의 이유로 분노했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며 오히려 그 여인에게 회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형식과 규칙에 매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놓칠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억눌리고 갇힌 자 자유함이 없는 자에게 다가가 회복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주일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의 은혜를 찬양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거룩한 주일을 지키며 그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할때 우리 안에 참된 안식과 회복이 경험될 줄로 믿습니다.

2. 내 마음을 방해하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13장 16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병 고침을 받은 이 여인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딸’ 이라고 부르 셨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전통에 매였던 자들은 가축을 돌보는 데에는 세심한 배려를 했으면서도 예수께서 사람을 치유하신 것에 대해서는 율법 해석의 자기 의에 매여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여전히 우리도 마음 안에 완악함과 교만함으로 인해 굳어진 마음을 마주하고 사랑을 거부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일하심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교만일 것입니다. 교만은 현대인들의 마음을 강팍하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단은 예수님 조차 ‘너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라’고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셔서 힘과 폭력 대신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사단은 우리 안에 악한 마음을 심어 하나님께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하고 성령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교만은 하나님과 단절되는 죄의 시작이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1828-1917)는 겸손은 예수님의 지상 최고의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 물은 언제나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서 가득 채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피조물이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그분의 영광과 능력이 가득 흘러들어 한껏 높임과 축복을 받게 하신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 자기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데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결국 높임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강한 능력과 위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사람을 높여주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도 잘 뿌리 내리지 못하지만, 마음이 깨끗하면 작은 겨자씨 같은 말씀도 자라나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요즘 시대에 크게 영항을 끼치는 것 중 하나가 미디어입니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세상 곳곳에 타락한 권세들이 얼마나 많이 퍼져 있는지 보게 됩니다. 전 세계의 사건과 사고에 우리의 시선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무질서한 경쟁, 비인격적인 언어와 물리적인 폭력들, 모든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생각들, 불안감을 조장하는 수많은 공포심,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생각들, 상처와 결핍의식을 통해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일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의미없는 짧은 영상들을 보다 보면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영적인 감각은 점점 무뎌지고 마음의 중심에도 비교와 불안, 불신과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영성 신학자 마르바 던(Marva J. Dawn,1948-2021)은 안식의 4단계를 그침(ceasing), 쉼(resting), 받아들임(embracing), 향연(feasting)임을 보여 줍니다. 그침(ceasing)은 ‘나’ 중심에서 비롯된 성과에 대한 보상이나 소유에 대한 집착을 멈추고(ceasing) ‘하나님’ 중심의 리듬을 찾는 것이며, 쉼(resting)은 모든 긴장과 근심되는 일들을 멈추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활동으로 부터의 자유함을 말합니다. 무엇보다 ‘샬롬(שָׁלוֹם, Shalom)’을 온전히 받아들이기(embracing) 위해 끈기를 지니고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다른 사람들과 경쟁적이지만, 안식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경험하도록 정기적으로 안식하는 습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인 항연(feasting)은 참된 예배를 통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며, 특별히 친구들이나 낯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과 나눔을 통해 향연속에서 곳곳에 숨겨진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마음이 머물 곳을 알게 해줍니다. 우리가 이전에 가보지 않던 길을 가게 하시고, 할수 없는 것을 할수 있도록 새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때 은혜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 밖에 영원히 머물러야 할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다 덮어 주시고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합니다.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 주님을 바라보며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또 때를 따라 도우시는 그분의 은혜를 받도록 합시다.”(히 4:16)  

3. 우리의 예배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참된 예배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한주간 살면서 많은 긴장감과 삶의 무게로 인해 힘겨울 때가 있지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끊임없이 찾아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관계속에서의 상처, 아픔의 문제들, 현실의 문제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다가 믿음이 무너진 것 같은 좌절감은 우리의 마음을 더 강팍해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꼭 붙잡고, 주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인간이 만든 엄청난 문명들로 인해 수많은 것들이 하나님처럼 여겨집니다. 눈 앞에 보이는 첨단 문명들, 소유하고 또 소유해도 여전히 공허한 마음들, 치열한 현실에 압도 되어지면, 하나님의 나라는 숨겨진 듯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임했고 성령의 다스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주님께 영광 돌리는 참된 예배를 통하여,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를 섬기는 자들로 살아갈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납니다.

악한 영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마치 주님이 승천하실때 함께 사려져 버린 것처럼 여겨지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세상권세로 부터 이미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성도는 세상을 뒤덮고 있고 어둠을 깨뜨리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싸움은 시작이 되었고, 우리의 운명은 이미 승리하도록 결정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속에 속했지만 믿음을 붙잡고 승리와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내 뜻과 내 의지를 따르는 삶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우리를 또 다시 얽매게 하는 짐일 뿐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싸움이 아니라 세상 권세 잡고 있는 악한 영과의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권세와의 싸움이지 권세 편에 선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불행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재정 문제, 자녀 문제, 인간관계, 건강 문제 등 삶의 어려움들을 솔직하게 주님 앞에 내어 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위로와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도 하나님 앞에서 고백될 때, 그의 나라는 영원하며 참된 평안과 자유를 주시는 나라임을 알게 됩니다.

안식일날 주님께 행하신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누구에게 나타나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인생의 문이 닫혀서 막막한 시기를 걷고 계신다면 주님께서 새 일을 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릴 구원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진정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믿음의 깊은 터널을 지나고, 삶의 허무함에 빠진 이들을 자유케 해 주십니다. 낮은 자를 높여 주시고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며 소외된 자들을 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본문속에 고통을 받던 여인이 고침 받은 후 그녀의 삶이 완전히 바뀌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도 증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잠을 자도 마음이 쉬지 못하고, 불안과 염려에 매여 있는 분들 계십니까? 예배로 나오는 발걸음이 여전히 무겁고 감격없는 습관에 매여 나온 분들이 계십니까? 그저 잘 살아내고 싶었을 뿐인데 다시 일어날 힘이 없어 주저 앉아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참된 예배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내 결단과 마음으로는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 앞에 나의 마음을 올려 드릴 때 굽어진 삶과 눌려진 마음에 찾아와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 위하여 살아가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08 17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10주)

하나님의 불을 켜라

Light the Fire of God

누가복음 12:49~56

49 ○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기 위해 왔다. 이미 불이 활활 붙어 있었더라면, 내가 얼마나 좋았겠느냐! 50 하지만 내가 받아야 할 고난의 세례가 있는데,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내가 얼마나 더 고난을 당할는지 모른다. 51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아느냐? 그렇지 않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한 집안의 식구가 다섯이라면, 이제부터는 둘씩 셋씩 패가 갈라져서 싸우기 바쁠 것이다. 53 서로서로 분열되어, 아버지가 아들과 대립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등질 것이다. 어머니가 딸을, 딸이 어머니를,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여 서로 맞서 싸울 것이다.” 54 ○ 예수께서 군중을 향해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고는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런 예상이 들어맞곤 합니다. 55 또 남풍이 불면 ‘날씨가 더워지겠다.’ 하고 말하는데, 그것 역시 들어맞곤 합니다. 56 위선자들이여! 여러분은 이처럼 하늘과 땅의 기상은 잘 분간할 줄 알면서도, 어찌하여 이 시대의 징조는 분간할 줄 모릅니까?” (쉬운말 성경)

49 “I have come to set the world on fire, and I wish it were already burning! 50 I have a terrible baptism of suffering ahead of me, and I am under a heavy burden until it is accomplished. 51 Do you think I have come to bring peace to the earth? No, I have come to divide people against each other! 52 From now on families will be split apart, three in favor of me, and two against—or two in favor and three against. 53 ‘Father will be divided against son and son against father; mother against daughter and daughter against mother; and mother-in-law against daughter-in-law and daughter-in-law against mother-in-law.’[e]” 54 Then Jesus turned to the crowd and said, “When you see clouds beginning to form in the west, you say, ‘Here comes a shower.’ And you are right. 55 When the south wind blows, you say, ‘Today will be a scorcher.’ And it is. 56 You fools! You know how to interpret the weather signs of the earth and sky, but you don’t know how to interpret the present times.(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본문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기 위해 왔다’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불은 태우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불은 사람의 옛본성을 태우시고 전혀 다른 존재로 변화시키십니다. 이처럼 성도는 다른 존재로 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또 다른 불의 특징은 불꽃이 위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크던 작던 불꽃은 어떤 상황에도 위를 향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이방 땅에 끌려가서도 ‘뜻을 정해’ 왕의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 결과 열흘이 지났을때 왕의 음식을 먹었던 소년들보다 얼굴이 더 건강하고 빛나 보였습니다. 그러나 뜻을 정한 삶이 항상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니엘과 세친구들은 용광로 보다 더 뜨거운 풀무불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풀무불은 다니엘과 세친구들을 묶었던 손과 발의 줄만을 태웠을 뿐,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들의 신앙과 생명까지 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본문의 불은 죄에 대한 심판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모든 사람은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수술을 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수술대에 위에 수술등이 켜지는 순간을 기억할 것입니다. 차가운 온도, 수술실 안의 고요함 속의 소음, 강렬하게 비추는 불빛 앞에서는 나의 어떤 것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의료진들의 손에 내 몸을 맡길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일점 일획의 빈틈도 없이 철저합니다.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 앞에서 사람의 지혜와 실력은 너무도 초라합니다. 숨기고 싶던 작은 죄도 밝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거룩한 빛 앞에서 값없이 주어진 새생명을 감사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1.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는 내 마음 안의 잔재들을 태우는 불

성령은 우리를 혼란과 불신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십자가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려 애쓰지 않게 합니다.(갈5:16) 하나님의 불은 마음이 강팍한 사람에게도 임하고, 성품이 온유한 사람에게도 임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내게 편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와 잘 맞는 사람들을 선호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겸손한 자들을 사용하십니다. 성령을 자신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처럼 사용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믿음의 기초 위에 다른 것을 쌓기 시작하면 십자가는 변질됩니다.

바울은 신앙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신앙의 터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습니다. 신앙 생활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의 기준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훌륭해 보이는 사역이나 선행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과 인기를 얻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다 태워지고 없어질 것임을 말씀합니다. 무엇가를 남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이치입니다. 성경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사람의 인정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께 받을 상을 향해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금, 은, 보석”같이 가치 있는 인생으로, 사람의 박수와 갈채를 위한 삶은 “나무, 풀, 지푸라기”처럼 사라지는 삶으로 대조합니다. 매주일 우리는 사도신경을 암송하며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세상의 것들은 바람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초가 불에 녹아지는 것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쌓아 올린 것들만 그날에 남게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등 특정 사람을 따르는 여러 파가 생겨서 분열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는 심고 물을 줄 뿐이고,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고전 3:6–7) 신앙생활의 열매나 부흥은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땅을 갈고 복음의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뿌린 씨앗이 지금 세대에 결실을 맺을지, 다음 세대에 결실을 맺을지 알수 없지만, 결과에 매달리기 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헌신하다 보면 하나님의 때에 결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내가 진다고 결심하면, 우리가 겪게 될 고난도 두려움도 다 이기게 됩니다. 50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12:50 하지만 내가 받아야 할 고난의 세례가 있는데,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내가 얼마나 더 고난을 당할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는 인간의 죄와 세상의 깨어짐으로 인해 고난의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가르쳤던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셨고, 유대 지도자들과 갈등을 겪으며 세상의 창과 검에 의해 외로운 싸움을 홀로 견뎌내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은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애타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준비하신 예수님의 고난의 세례는 우리를 향한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이기적으로 살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입술로는 높이고 고백하지만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현실 앞에 놓여질 때가 있습니다. 거룩하게 보이지만 사랑하는 일을 쉽게 포기해 버리고 내 기준의 편안함, 내게 익숙한 것들만 더 소중한 것으로 여기며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내가 얼마나 더 고난을 당할는지 모른다. 주님은 모진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견뎌내어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완성하셨습니다. 우리가 따라 가야 할 푯대입니다.

이제 51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아느냐? 그렇지 않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분열’은 단순한 다툼이 아니라, 복음이 들어올 때 일어나는 ‘필연적인 갈등’입니다. 교만한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배치되고, 인간의 이기심, 거짓과 위선과 자기중심성과 화평케 하신 주님의 십자가 정신 사이에서 마음의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 우리는 여전히 죄의 본성과 세상의 가치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고, 주님과 연합하게 되었으니 모든 상황속에서 끝까지 주를 따라가야 합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0장 34절은 ‘분열’이라는 단어를 ‘칼’로 표현하며 ‘나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기록합니다. ‘분열’과 ‘칼’이라는 용어는 ‘구별됨’과 ‘분리됨’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거룩하다’라는 것은 ‘분리와 잘라냄’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수용하는 사람과 예수를 진리로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선택하며 세상과 구별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52-53절을 보면, 가정안에서도 갈등과 분열이 생기는 긴장감을 줍니다.

12:52 한 집안의 식구가 다섯이라면, 이제부터는 둘씩 셋씩 패가 갈라져서 싸우기 바쁠 것이다. 12:53 서로서로 분열되어, 아버지가 아들과 대립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등질 것이다. 어머니가 딸을, 딸이 어머니를,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여 서로 맞서 싸울 것이다.”

성도는 진리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따르면 고난이 따라옵니다. 때로는 이로 인해 가장 가까운 가족 안에서도 갈등과 긴장이 생기곤 합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분들은 이러한 경험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성장과 믿음이 깊어지는 과정이 됩니다.

예수님은 명목상으로만 평화로운 관계가 아니라, 분쟁을 통해서라도 참된 평화, 곧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로 인한 작은 문제도 갈등을 일으키는데, 영혼이 죽고 사는 믿음생활은 한번 뿐인 인생에서 진검을 들고 싸우는 영적전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야 할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말씀을 믿고 모든 상황 속에서 세상적 기준을 넘어서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분노와 갈등만 커지게 되므로,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도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인한 갈등이라면,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긍휼한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말씀은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는 간절한 초청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참 빛으로 오셔서, 죄와 사망의 어둠 가운데 있는 세상을 비추셨을때에도(요 8:12) 빛이 나타나면 어둠은 물러가야 하지만, 죄로 눈이 가려진 사람들은 그 빛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어둠을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는 사람은, 마침내 이 진리에 의해서 살게 될 것입니다.

2. 사명으로 새롭게 살아가는 불

12:54 ○ 예수께서 군중을 향해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고는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런 예상이 들어맞곤 합니다.
12:55 또 남풍이 불면 ‘날씨가 더워지겠다.’ 하고 말하는데, 그것 역시 들어맞곤 합니다.
12:56 위선자들이여! 여러분은 이처럼 하늘과 땅의 기상은 잘 분간할 줄 알면서도, 어찌하여 이 시대의 징조는 분간할 줄 모릅니까?”

세상속의 거대한 변화와 흐름은 커지고, 교회의 부흥은 줄어들고 있는 시대입니다. 현대 기술은 점점 발달하여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그 이상의 결과들을 만들어낼 정도로 발전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새로운 제품이나 기술이 나오면 사람들의 관심과 돈이 쉽게 쏠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사역과 본질이 변질되는 일에는 우리의 영적인 눈이 쉽게 둔해집니다. 이 영적 분별력은 하나님의 불이 임할 때 비로소 생기며, 마음이 정결해질 때 우리는 한 달 뒤 날씨를 예측하듯 세상의 변화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깨어 준비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빛의 자녀임을 깨달은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언젠가 회심을 하게 된다면 그들을 변하게 한 것은 분명 이 빛일 것입니다. 비록 그 죄인들이 비참한 상태에 있고 빛을 두려워한다 해도 그들을 계속해서 빛으로 인도하다 보면 점차 그 빛도 그들에게 기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자연인이 누리고 있는 안락과 평화와 위로는 어둠과 무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어둠이 사라질때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안정을 누리게 도와 주는 어둠을 파헤쳐야 하느냐고 따지는 것은 옳은 주장이 아닙니다.”

온갖 세상의 모순들과 불확실한 시대에 주님이 길 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면, 평생 모순속에서 답이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답이 없는 상황속에 빠지고, 수많은 길에서 길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허한 영혼의 빈자리를 채워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빛은 우리가 성육신 하신 예수님처럼 빛으로 어둠을 비추고 소금처럼 사람을 살리게 합니다.

신앙의 년수가 더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수록 우리는 말씀와 삶의 괴리를 경험하고, 다 실천하지 못하는 부족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불이 우리 안에 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불로 정화된 마음은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을 달라지게 합니다. 믿어지도록 살아내도록 동전의 앞뒷면처럼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을 받은 사람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모든 진리가 같다는 세상에서 유일한 진리를 드러내는 일은 때론 고난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한 일을 실천하는 일에 우리의 시간과 재능을 쏟아내는 일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성과를 내야 하고 변화의 긴장감이 높은 세대속에서도, 자녀를 키우며 내 커리어가 멈춘 것만 같고 뒤떨어지는 것만 같은 마음이 들때에도, 은퇴를 하고 지나온 고단한 삶을 돌아보는 세대를 지나고 있더라도 우리 모두가 지나고 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사명을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열된 세상에 책임을 느끼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책임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바른 신앙관은 교회를 세상과 분리해서 탈교회화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세상속으로 더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참된 평화를 심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가고는 있지만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무뎌진 마음의 열심과 식어진 마음의 온도가 내 마음의 불을 꺼트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새로운 삶의 낯섬과 긴장감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내 결정 앞에서 고민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끊임없는 성과의 압박, 관계의 상처, 가정의 아픔, 나의 삶을 자녀에게 투영하며 기대하고 실망을 반복하고 계신가요? 하나님의 불이 임하면 내안의 죄와 두려움을 태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내가 손해 보면 그곳에 은혜가 생겨납니다. 개인의 신념으로 옳고 그름을 외치는 세상속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죄사함의 은혜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게 하시는 성령의 불로 내 안의 깨어짐을 확인해야 합니다. 삶의 무게 앞에서도 기쁨으로 순종하고,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의 사명입니다. 변하지 않는 세상과 가정, 삶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나로부터 변화되어 시작되는 그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08 10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9주)

주님 언제 오셔도 괜찮습니다

Lord, I’m Ready Anytime

누가복음 12:32~40

32 ○ 어린 양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진정 기뻐하신다. 33 너희가 가진 소유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어라. 그리하여 너희 자신을 위하여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지갑을 만들어라. 그렇게 너희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이 쏠 일이 절대로 없다. 34 명심하여라. 너희의 재물이 있는 바로 그곳에 너희의 마음도 함께 있다.” 35 ○ “너희는 허리띠를 동여매고, 등불을 항상 켜 놓고, 삼가 준비하고 있어라. 36 마치 결혼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금세 열어 줄 준비를 갖추고 있어라. 37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처럼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종들에게는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이 몸소 시중드는 사람의 옷을 입고서, 그 종들을 식탁에 앉힌 후 그들의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 38 주인이 한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에게는 복이 있다. 39 너희는 이것을 알아라. 도둑이 언제 집에 들지를 알고 있다면, 집 주인은 도둑을 막아, 자기 집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40 그러므로 너희도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인자는 너희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때에 갑자기 올 것이기 때문이다.” (쉬운말 성경)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어린 양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개역개정은 ‘적은 무리여’라고 번역했는데 개역개정 번역이 원어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하지 말라. 하늘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진정 기뻐하신다.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속에서 제자들은 힘도 약하고 숫자도 적지만 하늘 아버지가 특별히 보호해 주시니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 나라의 물질관을 보여줍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인색하지 말고 가진 소유물을 팔아 도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을 기쁨으로 나눌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되고, 그 삶에 평안과 감사가 채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온갖 나무 열매를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규정합니다. 이는 주신 모든 것을 바르게 사용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바르게 사용해야 할 도구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물질이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현실 앞에 놓여 있습니다. 내것을 나누고 베푸는 삶은 적당히 순종하고 나의 가치를 높이고 소유하려는 유혹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나의 욕심으로 부터 더 자유롭기 위해서는 내 소중한 것을 나누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탐심에 대한 경고와 하나님 나라의 임박함을 준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한 사람이 주님께 나와 형과의 유산분배 문제를 갖고 돈에 의한 분쟁을 해결해 달라고 찾아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부모로 부터의 장남이 더 많이 상속받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말씀속에서 유추해 보면, 동생은 자신에게 부여된 유산이 부족하다고 여겼거나 모세법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유산분배의 과정에서 일어난 탐심으로 인한 돈 문제에 직접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에게 “사람의 생명이 재산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시며 어리석은 한 부자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이 부자는 이미 많은 재산과 곡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고에 가득 채우고도 곡식이 남아 더 이상 넣어 둘 데가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루 하루 일하는 소작농들과는 달리 어리석은 부자는 많은 재산을 소유할 창고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제 어리석은 부자는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넘쳐나는 곡식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눌 것인지? 아니면 창고를 더 크게 지어 저장해 놓을까 궁리합니다. 결국 그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야겠다고 결정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모든 재산을 자기 곳간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여러해 쓸 것을 많이 쌓아 두고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 하리라 하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너를 위해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이 비유는 물질에 대한 탐심을 자제하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위해 물질을 잘 사용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명심하여라. 너희의 재물이 있는 바로 그곳에 너희의 마음도 함께 있다.(12:34)

주님은 너희가 목숨을 위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염려하고 걱정해서 수명을 하루라도 연장할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난주 전해진 설교 말씀이 한 주 동안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어린아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어린아이와 같은 미숙한 모습은 없는지, 품고 돌보는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고 하지만 작은 것도 나누기 어려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짜 성숙한 믿음을 지켜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빼앗아가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을 허락하셨고, 믿음을 통해 삶의 회복을 주시며, 간절히 구하면 살아갈 지혜도 아낌없이 주십니다. 성경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약속하셨습니다. 물질이 삶의 주인이 된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삶의 조건에 따라 바르게 인식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성숙해 지고 온전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점검할 것은 지금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마음과 삶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입니다.

주님은35절 37절과 38절에서 준비하고 기다리는 종들이 복이 있다고 반복하시며, 허리띠를 동여매고, 등불을 항상 켜 놓고, 삼가 준비하고 있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교회사에서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당시 고난 속에서도 신분을 넘어서 주인과 종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었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라는 말씀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시대속에 휩쓸려 가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며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1940– 현재)는 듀크 대학교에서 신학, 윤리학, 법학을 가르친 명예교수입니다. 그는 기독교 평화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연합감리교회 윌리몬 감독과 함께 공동 집필한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이라는 책에서 윌리몬은 스탠리가 세상이 정치를 말할 때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말해야 한다고 평생 가르치려고 애썼다고 표현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정치나 이념도 하나님 뜻 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며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바울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라고 한 말씀을 스탠리와 윌리몬은 “우리는 하늘나라의 식민지입니다”라고 표현합니다. 교회를 이방문화 식민지로 표현하는 것이 지나치기도 하지만 이 표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의 소속이 바뀜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에 대해서 식민지라는 표현을 쓴 것이라 생각됩니다. 부족하고 자격없는 우리가 이 땅에서 분투하며 살아가지만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진정 기뻐하신다.라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분의 나라는 상대방을 힘으로 꺾을 필요도 없고, 다툼이나 갈등이 없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 그분의 부르심을 따라 믿음의 여정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기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자기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참된 평화는 인간의 제도나 정치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정치적 평화는 자신의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평화로 치장하는 겉치레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임하는 참된 평화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의 작은 마음과 삶을 나누며, 서로를 지지해 주는 동역자들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이러한 동지애는 우리 인생에 믿음의 여정을 견디게 하는 깊은 위로와 힘이 됩니다.

외국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의 첫 순간을 다들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약 없는 이별로 가족과 헤어져야 했고, 이루고 해내야 하는 마음을 품고 새로운 도전 앞에 섰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땅에서 마주하는 일들은 매 순간이 도전이었고, 만나는 사람들은 어제는 친구가 되었다가 오늘은 남이 되어야 하는 현실을 마주하며 치열하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꿈을 찾아온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인 날들도 많았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 주는 긴장감 탓인지 진정한 기쁨을 누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잘 가고 있는지 괜히 내가 더 뒤쳐진 것 같고 걸음이 무겁기만 한날도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믿음의 걸음 걸음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기에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주어진 현실을 살아가도록 부르십니다. 우리의 시선을 걱정하고 염려할 일들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신뢰하는 차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부모를 찾고 의지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책임 있게 감당하면 됩니다. 믿음의 삶은 때론 두렵고 무거운 길이지만 주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배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입니다. 예배의 어원인 ‘아바드’(עָבַד)라는 단어는 ‘예배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일하다, 섬기다, 봉사하다’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그렇다면 매주일 나와서 예배 드리고 봉사하는 일 외에도 일상과 현실의 터전에서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는 것도 예배의 연장선입니다.

첫째, 세상이 우리의 삶을 궁금해 하도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다시오심을 미래의 일로만 생각하면, 신앙의 긴장감을 잃어 버리고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시고, 믿고 따라가는 자에게는 영원한 상급을 주시러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35절입니다. 35 “너희는 허리띠를 동여매고, 등불을 항상 켜 놓고, 삼가 준비하고 있어라.

당시 유대인들이 입었던 겉옷은 길고 통이 넓었기 때문에 일을 할 때나 여행을 하거나 전쟁시에 겉옷을 허리띠로 동여 매야 했습니다. 게다가 종들이 허리에 띠를 맨 이유는 혼인 집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입니다. 등불을 항상 켜놓아야 하는 이유도 어두워진 세상속에서 빛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생활 방식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점점 쉽고 편안해져 갑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 지 알 수 없으니 주님의 재림을 먼 훗날의 막연한 사건으로 여기며 보낼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속에서 종들은 업무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혼인잔치는 밤에 열렸기 때문에 종들은 결혼식에 갔던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 한밤중이나 새벽이나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피곤한 시간대입니다. 그런데 깨어 있는 종들에게 복이 주어집니다.

주인이 와서는 몸소 시중드는 사람의 옷을 입고, 깨어 있는 종들을 식탁에 앉힌 후 시중을 들어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깨어 있는 성도가 누리게 될 영광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줍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받을 복입니다. 비록 믿음의 여정은 때론 힘들때도 있고, 고난도 겪게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게 다가오는 한밤중이나 새벽의 때에도 끝까지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역사를 기대하고 사랑의 수고를 더하며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36절 부터 보시겠습니다. 36 마치 결혼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금세 열어 줄 준비를 갖추고 있어라. 37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처럼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종들에게는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이 몸소 시중드는 사람의 옷을 입고서, 그 종들을 식탁에 앉힌 후 그들의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 38 주인이 한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에게는 복이 있다.

둘째, 세상속에서 진리의 허리띠를 매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허리띠는 기록된 말씀입니다. 복음의 전신갑주를 입고 허리띠로 마무리 하는 것입니다. 적의 공격으로 부터 살아 남기 위한 방어적인 무장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진리의 허리띠는 세상에서 믿음의 성도로 살아가는 든든한 방패가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길을 묻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 마음안에 이미 확증되게 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이 오셔도 괜찮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삶에는 무엇이 들려져 있습니까? 지금은 준비가 안되어 있다고 부르심도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채워지면 순종할 수 있다고 이것만 해결되면 괜찮아질거라고 생각하며 매일을 고민 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셔도 괜찮을 만큼 매일을 준비하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불안함과 두려움 앞에서 스스로의 힘만을 의지하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가져 갈수 없는 것에 매여 염려하기 보다는 이미 주어진 것들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더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평소에 쉽게 보이지 않던 물건들이 집을 정리하고 이사를 가야 할 때 보면, 의외로 많이 발견되게 됩니다. 그때가 되어서 아끼면서 사용하지 못한 물건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많은것을 이고 지고 살고 있었구나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 한번쯤은 있을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집착하여 채워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누릴 것을 과감히 나누고 흘려 보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무거운 짐, 불필요한 짐은 결국 인생의 걸음을 더 힘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해 생명의 길을 허락하셨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 길을 따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은 우리의 믿음을 점검할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비로소 내 믿음의 상태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마음의 작은 실천에서 부터 변화가 시작됩니다. 가진 것을 전부 포기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실천할 때에 복된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종들을 몸소 높여 주시고, 함께 먹고 마시는 교제의 자리로 이끄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날마다 새롭게 해 주실 것이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지킬 힘을 주실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면 현재의 고난도 불안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의 손길이 나의 삶에 함께 하심이 감사하고 감격스러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