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09.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스물 두번째 주일)

네가 나를 믿느냐

Do You Believe This?

누가복음 20:27~38

27 ○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들 몇 명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28 “선생님, 모세의 율법을 보면,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대를 이을 자식을 낳아 주어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29 그런데 어느 집에 일곱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맏형이 결혼을 했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그 형수와 결혼했지만, 그 역시 자식을 두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1 그래서 차례대로 일곱 형제가 다 그 여자와 결혼했지만, 아무도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32 그러다가 마침내 그 여자마저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까? 일곱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말입니다!” 34 ○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오. 35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시집도 가지 않고, 장가도 가지 않소. 36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음을 경험하지도 않소.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새로운 생명을 얻은 부활의 자녀들이므로,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오. 37 옛적의 모세도 불에 타면서도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해 보여주지 않았소? 그때에 모세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소. 38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시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모든 자들이 다 살아 있소.” (쉬운말 성경)

27 Then Jesus was approached by some Sadducees—religious leaders who say there is no resurrection from the dead. 28 They posed this question: “Teacher, Moses gave us a law that if a man dies, leaving a wife but no children, his brother should marry the widow and have a child who will carry on the brother’s name.[c] 29 Well, suppose there were seven brothers. The oldest one married and then died without children. 30 So the second brother married the widow, but he also died. 31 Then the third brother married her. This continued with all seven of them, who died without children. 32 Finally, the woman also died. 33 So tell us, whose wife will she be in the resurrection? For all seven were married to her!” 34 Jesus replied, “Marriage is for people here on earth. 35 But in the age to come, those worthy of being raised from the dead will neither marry nor be given in marriage. 36 And they will never die again. In this respect they will be like angels. They are children of God and children of the resurrection. 37 “But now, as to whether the dead will be raised—even Moses proved this when he wrote about the burning bush. Long after Abraham, Isaac, and Jacob had died, he referred to the Lord[d] as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e] 38 So he is the God of the living, not the dead, for they are all alive to him.”(New Living Translation)

요즘처럼 많은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시대 속에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은 더 큰 불안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들은 내가 결정하고 관리하여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상황이 불안해 지면 믿음도 흔들리게 됩니다. 언제까지 버티고 견뎌야 하나’ 라는 불편이 현실을 버거워 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요약하면 한 여자가 결혼했으나 자녀를 낳지 못한 채 남편이 죽자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의 형제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일곱 형제에게까지 반복되고 결국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이제 부활이 있다면,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곤욕스런 질문을 합니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전제로 질문을 한 것이기도 하고, 가족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모세법을 이용해서 부활 교리의 모순을 지적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의심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의 진리 대해서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1.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방식과 다르다.

당시 사두개인들은 유대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사장 가문의 귀족층이었습니다. 그들은 풍족한 현실의 삶에 만족했기 때문에 부활을 바라보지도 믿지도 않고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믿음을 세상의 차원으로 끌어 내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늘 나라는 다른 차원이라고 말씀합니다. ‘부활의 때에는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일이 없다’, ‘더 이상 죽음을 경험하지도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비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죽음 이후 삶이 정말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죽음 이후에 영원한 죽음이 있고 죽음의 세력이 손댈 수 조차 없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이들의 삶과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의 삶의 목적은 같을 수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이 땅에서 믿음이 흔들릴 때,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갑니다.

팀켈러는 왕의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포기에서 시작된다. 목숨을 버리면서 시작된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약하게 시작하셨다. 먼저 약한 인간이 되셨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달리셨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려면 우리도 약하게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언젠가 예수님이 돌아와 우리를 회복된 세상으로 데려가실 때 사랑이 미움을 완전히 이기고 생명이 죽음을 완전히 이길 것이다.”《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

십자가는 주님 없이 살수 없는 믿는 자들을 위한 사랑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도 우리 없이는 살수 없기에 죽음의 고통을 견디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출생은 세상에 나와 출세하는 삶이 목적이라면 주안에서의 탄생은 하나님과 내가 끊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찬송 한 곡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 믿음이 되어 다시 힘 있게 일어 서게도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은 인생의 방황속에서도 방향이 되어 주시고,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기도 합니다. 부활은 논리로 설명되거나 이해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면, 복음도 믿음도 헛되고 죄사함도 없으며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은 영원히 죽는 것이며, 영원한 희망이 없다면 크리스챤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합니다. 사람들의 삶은 저마다 달라도 마지막 운명은 다 같습니다. 죽음 이후 우리는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생명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이 부활 진리를 믿는 것은 지금껏 우리가 살아온 삶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한 삶이 무엇입니까?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논쟁으로 갖고 갔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답하셨습니다. 자녀는 해야 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신뢰하고 사랑하기에 그 관계에서 살아갑니다. 그 중심에는 사랑과 신뢰가 있기에 주어진 삶이 자유해집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하라, 하지말라’는 가르침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해주지만 구원을 완성하지는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꾸 세상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의지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거룩함의 완성을 향해 걸어가게 됩니다. 현재는 주님을 따르며, 주의 형상으로 점점 변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장차 부활의 때에 완전히 변화될 거룩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본질상 허물과 죄 가운데 죽었던 존재였지만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는 경험을 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허벅지 관절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의 상징이고 삶의 기초였습니다. 평생 붙들고 살았던 야곱이 의지하던 힘을 하나님께서 꺾어지게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일평생 절뚝거리는 다리로 살아야 했지만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흔적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몸에 새겨진 흔적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는 삶을 잊지 않도록 하는 부활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음을 망쳐 버리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근심과 걱정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합니다. 여러분 죽음 이후를 한번 걱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죄의 흔적으로 인해 근심하고 탄식해 본 사람은 죽음의 고통으로 죄를 이기신 주님 앞에 감사하게 됩니다. 근심과 걱정의 끝에서 철저하게 자신에게 절망하십시요. 근심과 걱정으로 인하여 주님께 소망을 둘 수 있다면 오히려 하나님께로 향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근심 중에 붙잡은 못 자국 난 주의 손이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하십니다. 주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후회함이 없고, 모든 것이 협력하여 유익이 됩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불에 타면서도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언급하시며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해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 안에 그 어떤 착함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없어지지 않는 불꽃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인도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정체되어 있고, 막다른 길목에 있는 것 같을 때에도 하나님의 자녀는 변함없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습니다. 상처로 마음이 지치고, 답답하고 막막하여 잃어 버린 시간을 마주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받을 유업을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3.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잘 알고 있는 모세오경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말씀을 트집 잡고자 했지만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익숙한 구절로 깨닫지 못하는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깨닫도록 감동을 주십니다. 감동(感動)은 문자 그대로 느끼고(感) 움직이게(動)하는 힘입니다. 믿음의 힘을 지닐 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부활의 믿음은 절망 속에서도 도전하게 하고, 현실속에서 실패해도 또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었기에 100세에 얻었던 이삭을 제단에 드리기 위한 순종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어린양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지금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이 땅의 일에만 관심을 지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나의 현재와 미래를 온전히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필립시먼스가 쓴 ‘소멸의 아름다움’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루게릭 병을 앓았지만 자신의  마지막 삶을 아름답게 바라보았습니다. 원제목을 직역하면 ‘’넘어짐을 배우다’ 입니다. 그가 자신의 마지막 삶을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책의 일부분입니다. “나는 조언을 주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란 해결해야 할 문젯거리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문제를 인지하고 자전거를 조립하는 지침서처럼 순서대로 질서정연하게 해결책을 늘어 놓고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한다….우리의 잘못이 여기에 있다. 인생은 가장 깊은 단계에서는 문젯거리가 아니라 신비이기 때문이다.” 《필립시먼스의 소멸의 아름다움》

성도들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하나님 곁으로 보내 드리며 하늘의 소망을 고백하는 간증들을 종종 듣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소망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모세 앞에서 지금도 교제하는 산자라로 부르셨습니다. 생전에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로 부르셨고, 현재 우리 눈 앞에 이삭과 야곱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살아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만났던 생생한 기록이 담긴 성경을 진리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도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계속 살아 있는 자로 계셨습니다. 이 약속은 죽음 너머까지도 지속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나를 믿으냐?”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네가 믿느냐? ” “네가 너와 함께 영원토록 있음을 믿느냐?”

주님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에겐 믿음의 자녀들이 필요합니다. 영생을 주신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삶의 어려움 앞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지 말아라.’ ‘나의 사랑으로 견뎌내라’ 말씀 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선택에서 부활의 삶을 드러내시면 됩니다. 믿음의 선택이 죽어 있던 사회를 깨우고 멈춰 있던 우리의 신앙을 살리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11. 02 2025 주일 설교

(성령강림 스물 한번째 주일)

내 삶에 찾아오신 주님

The Lord Who Comes to My Life

누가복음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 성읍에 들어가, 거리를 지나가실 때였다. 2 거기에는 ‘삭개오’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세리장이었고, 큰 부자였다. 3 삭개오는 예수를 보려고 애썼지만, 키가 작은데다가 사람들에게 떠밀려 예수를 볼 수가 없었다. 4 그래서 그는 일행을 앞질러 달려가, 길가에 있는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5 일행이 그곳에 이르자, 예수께서 위를 쳐다보시고 삭개오를 부르셨다. “삭개오여! 어서 내려오시오. 오늘은 내가 당신의 집에서 묵어야 하겠소.” 6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크게 기뻐하면서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들였다. 7 이것을 보고서, 사람들이 서로 수군거리며 “아니,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묵으시려고 들어가시다니!” 하고 말했다. 8 삭개오는 일어서서 주님 앞에 이렇게 말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남을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9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소. 이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오. 10 보시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이 땅에 왔소.” (쉬운말 성경)

1 Jesus entered Jericho and made his way through the town. 2 There was a man there named Zacchaeus. He was the chief tax collector in the region, and he had become very rich. 3 He tried to get a look at Jesus, but he was too short to see over the crowd. 4 So he ran ahead and climbed a sycamore-fig tree beside the road, for Jesus was going to pass that way.5 When Jesus came by, he looked up at Zacchaeus and called him by name. “Zacchaeus!” he said. “Quick, come down! I must be a guest in your home today.”6 Zacchaeus quickly climbed down and took Jesus to his house in great excitement and joy. 7 But the people were displeased. “He has gone to be the guest of a notorious sinner,” they grumbled.8 Meanwhile, Zacchaeus stood before the Lord and said, “I will give half my wealth to the poor, Lord, and if I have cheated people on their taxes, I will give them back four times as much!”9 Jesus responded, “Salvation has come to this home today, for this man has shown himself to be a true son of Abraham. 10 For the Son of Man[a] came to seek and save those who are lost.”(New Living Translation)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편안한 길로만 안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것을 들으면서도 삭개오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보는 편안함을 등지고 불편함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 같습니다. 그 절정이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수군거림 속에는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 라는 타인을 향한 불완전한 자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그 불편함도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절실한 마음에 매일 찾아오십니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캐내며 묵상하다 보면, 각자의 상황속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시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거룩함으로 살아갈 힘이 됩니다.

여리고 성읍에 살던 삭개오는 키가 작고 큰 부자였습니다. 그는 일에 대한 열심으로 재력을 쌓고 세리장까지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세리라는 직업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동족들의 세금을 빼앗고 로마사회를 위해 일하던 세리를 ‘허가받은 도둑’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아마도 삭개오도 삶의 관심이 재물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재산이 늘어나면 늘어 날수록 적지 않는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 속에서 외로웠을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받는 정죄감도 고민거리였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은 삭개오를 더 악착같이 현실을 살도록 했을 것이며, 더 깊은 어둠으로 밀어 넣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보고자 할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떠밀려 주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일행들을 앞질러 달려가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의 기질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보시고 “어서 내려 오시오. 오늘은 내가 당신의 집에서 묵어야 하겠소” 말씀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크게 기뻐하며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결단하고 남을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삶의 목적을 변화 시켰을까요? 삶의 관심이 달라지면 실제적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18장에 율법을 잘 지키던 부자 관리와 예수님의 대화를 염두에 둔다면, 그 차이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기 위해 온 부자 관리에게 그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와서 예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어려서 부터 종교적인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소유와 영생을 바꿀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취급받던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부를 축적하던 삶을 내려놓고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나누고, 속여 빼앗은 것은 네배로 갚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부자 관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영생의 주님을 만난 믿음의 반응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예수님 중심으로 보면서 구원의 과정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삭게오의 집을 찾아가시자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방식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입니다. 예수님은 수군거림을 넘어 삭개오의 집을 찾아 가셨습니다. 18장에 35절도 보면, 여리고에 가까이 도착했을때, 한 소경이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습니다. 구원을 향한 마음의 절박함입니다. 이때에도 주변의 사람들은 소경을 향해 잠잠하라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소경은 사람들의 시선과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간절한 믿음으로 나아간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영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주님의 구원을 증거해야 할 교회가 마치 스스로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처럼 행하는 연약함에서 비롯됩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볼수 있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과 행위로 구원을 얻는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비롯되며, 구원의 결과는 성도의 삶속에 나눔과 섬김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교회를 평가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그 모든 판단이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세상의 관점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되며, 성경의 기준대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며, 진리 안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조금씩 타협하며 그 경계에 서 있습니다. 믿음과 세상의 즐거움 사이에서 적당히 믿고 살아가고 있고, 미움과 분열, 갈등의 마음 앞에서도  주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분리하려고 합니다. 세상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하고, 주님의 기쁨을 온전히 구하지도 못한 채 여전히 주님과 세상과의 경계에서 예수님을 멀리에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기준과 틀을 넘어 우리의 마음에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삭개오 본문에서 2가지를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서로를 세워주고 사랑으로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수군거림은 다름이 이해되어 지지 않을때 찾아오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지극히 자연스런 인간의 정서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옛사람이 살아 있는 본성으로 인하여 불편함을 마주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길로 걷게 하시고 믿음의 용기를 내도록 이끄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죄인 중의 죄인인 삭개오를  엄하게 꾸짖고 심판하고 정죄하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들의 수군거림 가운데 삭개오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불편함이 찾아올때 무의식적으로 불평의 말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인간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를 믿는 자녀들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에 대한 모든 대가를 지불하시고 다 갚아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응원하는 마음이 될때 자신에게도 새로운 삶이 열려집니다. 하나님 주시는 간증들을 경험하게 되고 서로를 향한 지지와 응원은 공동체를 놀라운 방향으로 이끌어 갑니다. 세상은 치열하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성공을 향해 나아가지만 예수님은 말씀에 길들여 지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케 하여 매일 빚으시고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삶의 다른 차원의 목적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하시지요?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온 국민이 열두번째 대표선수가 되어 한마음으로 응원했습니다. 그 시간에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가치가 같아서 응원한 것이 아니라 한 민족으로의 지지와 응원이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한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이렇게 구름 떼처럼 수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므로, 오늘날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들과 쉽사리 얽혀들게 하는 모든 죄악을 다 떨쳐 버리고, 믿음으로 우리 앞에 놓인 목표를 향해 끝까지 참고 견디며 달려갑시다.”(히 12:1) 믿음의 성도는 홀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가신 길입니다. 앞서간 수많은 증인들이 이미 승리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하면 됩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과 그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합니다. 믿음의 길에서 불편함은 잠시이지만 구원은 변하지 않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앞에 보이는 기쁨을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온갖 모욕과 수치와 조롱까지 참으시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끝이없고 보장된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이 땅에 왔소.

삭개오의 집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처럼,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찾아 오십니다. 기쁨을 잃고 삶에 지친 마음, 세상의 수군거림 속에서 상처받은 마음, 외로움에 갇힌 마음, 나만이 아는 완악한 불평의 마음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 마음안에 구원을 향한 절박함을 보시고, 그의 집에 머물러야 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의 집을 죄인의 집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순간 거룩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영생이 보장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나의 자존심과 인생의 목표를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무 위에 있었던 삭개오를 내려오게 하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귀한 것을 되찾아 주시는 분입니다. 지금의 이 자리에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도 살피시는 주님께 우리에게 숨겨진 어둠까지도 거룩하고 새롭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성전 삼아 주시기 위해서 말씀 속에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시험을 받은 순간은 아들 이삭을 바쳐야 했던 모리아 제단에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자리에서 미리 예비하신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은 시험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어둠속 혼돈, 불신과 수군거림은 우리를 어두운 밤으로 인도하지만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을때 성도들은 가장 안전합니다.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라는 찬양의 가사입니다.

내 아버지 그 품안에서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주 손길로 내 삶을 안으시니 그 평강이 나를 덮습니다. 나 비록 넘어지며 흔들리지만 주 내 안에 거하며 나를 붙드시니  내 생각을 주께로 돌리고 
주시는 평강의 옷을 입습니다. 주 약속 안에서 내 영혼 평안해  내 뜻보다 크신 주님의 계획 나 신뢰해 두려움 다 내려놓고 주님만 의지해 주 안에서 내 영혼 안전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품 안에서 안전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거룩한 주의 성전이 되게 하시며 주님의 약속 안에서 평강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삭개오가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도 내 힘으로 지키려고 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갈 책임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받은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맞이하는 아침의 공기를 마실수 있음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주신 삶과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수많은 문화와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고 책임있는 성도로 살아가는 힘을 주님 안에서 얻어야 합니다. 새 삶은 단순한 자유나 권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말씀 앞에 설때 주시는 깨달음이며,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거룩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이번 한주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깨달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10. 26.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스무번째 주일)

하나님 앞에 서는 기도

Standing in Prayer Before God

누가복음 18:1~14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끈질기게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2 “어떤 도시에 사람들을 무시하고,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다. 3 그런데 그 도시에 살고 있는 한 과부가 그를 줄곧 찾아가서 졸라대기를, ‘재판관님, 저의 억울한 처지를 들으시고, 법으로 제 권리를 찾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 그러나 그 재판관은 오랫동안 그 과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무시해 왔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5 하지만 이 과부가 이토록 줄기차게 나를 찾아와 성가시게 하니, 할 수 없이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나를 찾아와서 아주 귀찮게 졸라댈 것이다.’” 6 주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간구를 어찌 들어주지 않겠느냐? 어찌 계속 모른 체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가 있겠느냐? 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밤낮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간구를 들으시고, 신속하게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다시 돌아올 때, 과연 세상에서 이 같은 믿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는지, 그것이 걱정이구나!”  9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소.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소. 11 바리새파 사람은 따로 서서 이렇게 기도했소. ‘하나님, 저는 남의 것을 빼앗는 강도나 정직하지 못한 사기꾼이나 간음을 저지르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더구나 저기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꼬박꼬박 하나님께 바치고 있습니다.’ 13 그런데 세리는 멀찌감치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생각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하기를 ‘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하였소. 14 내가 당신들에게 분명히 말하겠소. 결국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세리요. 이처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오.” (쉬운말 성경)

1 One day Jesus told his disciples a story to show that they should always pray and never give up. 2 “There was a judge in a certain city,” he said, “who neither feared God nor cared about people. 3 A widow of that city came to him repeatedly, saying, ‘Give me justice in this dispute with my enemy.’ 4 The judge ignored her for a while, but finally he said to himself, ‘I don’t fear God or care about people, 5 but this woman is driving me crazy. I’m going to see that she gets justice, because she is wearing me out with her constant requests!’” 6 Then the Lord said, “Learn a lesson from this unjust judge. 7 Even he rendered a just decision in the end. So don’t you think God will surely give justice to his chosen people who cry out to him day and night? Will he keep putting them off? 8 I tell you, he will grant justice to them quickly! But when the Son of Man[a] returns, how many will he find on the earth who have faith?” 9 Then Jesus told this story to some who had great confidence in their own righteousness and scorned everyone else: 10 “Two men went to the Temple to pray. One was a Pharisee, and the other was a despised tax collector. 11 The Pharisee stood by himself and prayed this prayer[b]: ‘I thank you, God, that I am not like other people—cheaters, sinners, adulterers. I’m certainly not like that tax collector! 12 I fast twice a week, and I give you a tenth of my income.’ 13 “But the tax collector stood at a distance and dared not even lift his eyes to heaven as he prayed. Instead, he beat his chest in sorrow, saying, ‘O God, be merciful to me, for I am a sinner.’ 14 I tell you, this sinner, not the Pharisee, returned home justified before God. For those who exalt themselves will be humbled, and those who humble themselves will be exalted.”(New Living Translation)

요즘은 모든 것이 빠르게 답하는 시대입니다. 오늘 물건을 주문하면 다음날 배송이 됩니다. 한국에는 로켓배송과 새벽배송이 있어서 필요한 물건을 아주 빠르고 편하게 받아보게 됩니다. 내 물건이 어디쯤 왔는지 검색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알수 없는 기다림 속에서 인내하고 버텨내야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을 통해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굳게 서며 믿음으로 기도하는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두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18:1-8)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18:9-14) 두개의 비유는 기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하나님의 응답을 끝까지 신뢰하며 기도할 수 있는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조율되도록 기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비유는 지금까지 의심치 않고 지켜온 기도생활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교훈입니다. 말씀을 통해 성도들이 꼭 붙들어야 할 몇가지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기도를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평가하고 비판하며 깨어진 현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 나라의 기대와 기쁨 보다는 불안과 의심이 쌓여져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혼돈과 불안 속에서도 힘차게 다가오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불의한 세상을 구원하셨고, 지금도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다만 그때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믿음의 간구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도 과부의 끈질긴 간청에 응답했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조율하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실리가 없습니다. 끈질긴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선택할 힘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결과에 연연하기 보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주의 자녀들에게 주신 즐거움입니다. 주의 자녀들은 낙심될 자리 상심할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높이게 됩니다. 이것은 기도의 결과의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미에 반전의 말씀을 하시며 믿음에 대해서 분명히 하셨습니다. “인자가 다시 돌아올 때, 과연 세상에서 이 같은 믿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는지, 그것이 걱정이구나!” 모든 성도는 인자가 다시 오는 날을 기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방향을 점검하며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입니다. 성경에서 그날은 심판의 때를 가리킵니다. 누구도 알수 없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그 마지막 날에는 불의한 일들이 사라지고 정의와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며 경험하게 되는 불의와 혼란은 천년이 하루처럼 정말 잠시 스쳐가는 고난일 뿐입니다. 낙심되는 일을 만나 기도가 힘을 잃어 버릴때마다 기도의 방향을 점검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절망의 끝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할 힘이 부족할 때는 불의한 재판관 앞에서 간절히 호소하던 과부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완전히 이루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목적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빌1:6)

둘째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두번째 비유를 보면,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옳다고 여기는 신앙적인 일들을 행하며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인 것에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경건함의 상징인 금식을 일주일에 두번이나 했다는 기도에서는 한해 동안 104일을 금식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게다가 소득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며 경건함을 지켰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 역할을 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뇌물을 받고, 자기 민족의 세금으로 부를 축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던 사람들은 당연히 바리새인이 더 의롭다고 생각했을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는 사람은 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결론으로 ‘이처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오.’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감사를 드리며 겉으로는 경건해 보였지만 그 마음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기도였습니다. 금식은 마음을 깨끗히 하고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는 시간인데, 바리새인의 금식은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느라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자신을 높이는데 집중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 상황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과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그분께 마음을 내어 맡기면, 모든 상황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기도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변화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오스왈드 챔버스의 기도》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교만은 무너지고 불안한 삶의 이유는 하나님의 평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낮아진 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자신을 높이고 싶었던 바리새인과 자신을 낮춘 세리의 기도의 차이는 단 하나 였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 앞에 서 있었고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무의식적으로 우월감을 느끼고 이쯤이면 선하다 착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유혹으로 부터 벗어나려면 내 안에 교만한 마음이 보일때마다 작은 불의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타인을 향해서는 더 겸손한 마음을 가지며 형식적인 신앙에 갇히지 않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의지적으로 기도의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 이후 시대를 살아갑니다. 세리는 당시 흔한 행동이 아닌 가슴을 치며 기도드리고 있었음을 묘사합니다. 구원을 이뤄가는 여정에서 성도는 끊임없는 자기점검과 영적 긴장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는 나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드는 고백입니다.

과부는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 앞에 섰습니다. 그녀는 흔들림 속에서도 끝까지 기도하며 호소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응답을 받은 결과가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였던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 삶도 불안과 의심으로 흔들리지만 하나님 안에서 견고한 믿음으로 확신을 갖으며 기도함과 동시에 우리에게 맡겨진 믿음의 성도로서의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을 보면 불의한 일들이 가득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이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의로우시고 사랑이 풍성하십니다. 결국엔 진리가 승리합니다. 그날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기대해야 합니다. 맡겨진 일을 다 마친 그때에 내려 놓는 것이 허무함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충성된 자에게 허락해 주시는 영광과 존귀의  자리에 앉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세번째 복음 안에서 겸손한 회개의 삶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육신의 죄를 따르려 하지만, 우리는 혼자의 힘으로 의로워 질 수도 없고 혼자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본문속 과부의 끈질긴 기도는 하나님의 의를 끝까지 신뢰하며 인내할때,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의 논리와 권력, 평가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워집니다. 기독교의 가치는 생명을 살리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정의로움도 지나치면 생명을 해치는 행동이 되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우리도 어느 순간 마음이 안일해져 겉으로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듯하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그 기도 속에 자기의 의가 담겨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하지만 하나님 보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살아가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 (마15:8 )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도 ‘인자가 다시 돌아올 때, 과연 세상에서 이 같은 믿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는지, 그것이 걱정이구나!”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두개의 비유는 오늘날 신앙인들의 상태를 비추는 영적인 거울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집중하기에는 일상의 즐거움과 분주함이 더 큰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제 주안에 있는 참된 보물을 발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 생각과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단순히 쉽고 편안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책임과 헌신, 사랑과 겸손한 회개로 날마다 믿음의 길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제 그 사랑에 응답하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신실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의 풍성한 은혜와 진리 안에서 죄와 사망으로 부터 자유케 된 길을 따라 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0. 19.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열아홉번째 주일)

누가복음 17:11~19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소

Your Faith Has Made You Well

11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예수께서는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예수께 크게 소리를 질렀다. 13 “예수 선생님, 저희를 불쌍히 보시고,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가시오, 제사장에게 가서 당신들의 몸을 보이시오.” 그래서 그들은 제사장에게로 가는데, 가는 도중에 모두 병이 나았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께 돌아와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16 그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예수께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시기를 “열 사람이 깨끗하게 낫지 아니하였소? 그런데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소? 18 고침 받은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내게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는 것이오?” 하셨다. 19 그리고는,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자, 일어나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소.” (쉬운말 성경)

11 As Jesus continued on toward Jerusalem, he reached the border between Galilee and Samaria. 12 As he entered a village there, ten men with leprosy stood at a distance, 13 crying out, “Jesus, Master, have mercy on us!” 14 He looked at them and said, “Go show yourselves to the priests.”[b] And as they went, they were cleansed of their leprosy. 15 One of them, when he saw that he was healed, came back to Jesus, shouting, “Praise God!” 16 He fell to the ground at Jesus’ feet, thanking him for what he had done. This man was a Samaritan. 17 Jesus asked, “Didn’t I heal ten men? Where are the other nine? 18 Has no one returned to give glory to God except this foreigner?” 19 And Jesus said to the man, “Stand up and go. Your faith has healed you.”( New Living Translation)

성령강림절 열아홉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을 통해 새로운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생의 절망 가운데 주님을 부르짖는 열명의 나병환자가 나옵니다. 나병은 육체적으로 감각이 무뎌지고, 당시에 고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육체적 고통을 오랜 시간 겪게 되면 마음의 힘도 점차적으로 사라집니다. 그런데 열명의 나병환자들은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지나가셨는데, 열명의 나병환자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크게 소리를 질렀다’는 표현은 주님을 향한 믿음의 외침입니다. 예수와의 만남을 위한 믿음의 외침속에서 이미 치유의 시작이 있었습니다.

“예수 선생님, 저희를 불쌍히 보시고,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불쌍히 보시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인생을 바꾸는 시작이 이 기도의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성전 구석에서 감히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하던 세리가 생각납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교만한 기도보다 세리의 눈물의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1. 절박함 속에서 찾은 하나님

절망과 절박함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온전히 설수 없는 사람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긍휼이 가장 필요한 사람입니다. 나병환자들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도할 힘 조차 없는 절망 속에서 깨어 기도하는 일 또한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나병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사라지고, 영혼을 무디게 합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깨끗하다, 나는 괜찮다”고 여기는 영적 병입니다. 우리의 기준에서 이 정도면 괜찮겠지 만족하는 신앙생활 안에 멈추어 있다면 주님을 향한 갈망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은밀한 것도 살피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비춰보면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라고 다 같은 기도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진실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모습을 말씀으로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말씀의 거울 앞에 마음 깊은 곳까지 성찰하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위선과 연약함을 인정할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구하는 절박한 기도 가운데 주님의 순전한 은혜가 풍성하게 부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소리를 지르던 나병환자들에게 ‘가시오, 제사장에게 가서 당신들의 몸을 보이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나병은 치유된 후에 제사장에게 가서 검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사장에게 갑니다. 나병으로 부터 치유 될 것이라는 믿음을 볼수 있는 지점입니다. 예수님께서 한사람씩 직접 치유하실수 있으셨지만, 그들을 제사장에게 직접 가라고 하신  말씀에는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현재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내딪는 용기가 믿음입니다. 열명의 나병환자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자신들의 몸이 완전히 깨끗해진 걸 알게 되었습니다. 

시편 30편의 고백은 다윗이 죽음에서 깨어나 하나님을 찾는 기도시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자신에게 주어진 성공이 하나님의 손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침대에 누운 채 죽어가는 동안 깊은 상실감을 경험하고 난 후에 고백한 기도를 보면, “11 주께서 내 슬픔의 눈물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고, 나에게서 통곡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입혀 주셨도다. 12 그러므로 내 영혼이 어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이까? 내가 어찌 입 벌려 주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오 주여, 내 하나님이시여, 내가 영원토록 주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리렵니다.(시 30:11-12) 다윗은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영원토록 돌린다고 고백합니다.

인생에는 기도 외에는 길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저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손길을 절박하게 찾을때입니다. 그때마다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하게 임하지만, 그 은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고침받은 열명중에 단 한명만이 예수님께 다시 돌아갑니다. 얼마쯤 갔는 지 알수 없지만 이미 계셨던 곳에서 예수님이 떠난 후였을텐데 그는 가던 길에서 돌이켜 주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오늘날 처럼 통신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임에도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자신의 얼굴을 떨어트리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이 깨끗하게 낫지 아니하였소? 그런데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냐고 묻습니다. 고침 받은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내게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 밖에 없는 것이오?” 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말씀하십니다.

아홉명의 나병환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 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치유받은 기쁨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내가 받은 기쁨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돌이켜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 여전히 세상이 좋고, 선택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2. 감사의 삶은 구원 받는 성도들의 증거입니다.

감사를 선택한다는 것은 내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단 한 명만이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께 돌아왔습니다. 이 사실은 감사하는 삶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마리아인이었던 한사람은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방향을 돌이켜야 합니다. 세상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기 위해 결단된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소.”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경탄의 마음이 줄어들면, 구원을 이뤄 나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질 것입니다. 은혜로 시작된 구원이지만 그 신비와 경외심이 사라지면 감사도 줄어들게 됩니다. 율법에 매여 살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내 삶에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발견하고, 그 깨달음을 자신의 고백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매주일 우리교회는 새로운 청년들이 찾는 교회입니다. 이 청년들이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발걸음하는지 알수 없지만 교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소’ 라는 말씀을 자주하셨습니다. 몸의 치유만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구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세우는 차원이 아니라 가장 크고 높으신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앞에  머무는 것, 그것이 참된 구원의 삶입니다.

찬송가 492장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는 찰스 가브리엘Charles H. Gabriel) 목사가 전쟁터로 떠나는 아들이 한 말에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입니다. 아들이 전쟁에 나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만약에 제가 돌아오지 못하면, 하늘나라 열린 문 앞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아들을 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두렵고 아팠을까요? 그런데 아들이 남긴 이 한마디는 절망과 두려움에 있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소망과 찬양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아들의 한마디가 뭉클하지 않습니까? 근심속에 있던 아버지의 마음이 소망으로 변하였듯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근심과 절망에서 끌어내어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는 인생의 방향이 바뀐 성도들이 부르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감사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전에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7장 무익한 종의 비유에서 큰 믿음을 구하는 제자들에게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주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인의 명령을 따라 자신이 할 일을 다한 종이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나의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 고 고백합니다. 크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작은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 세상에서 내가 바라고 구하는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의 편안함과 자기 만족 속에서는 믿음의 눈이 쉽게 열리지 않지만, 감사를 고백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주님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3. 감사의 훈련으로 구원을 이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영원한 삶을 허락받는 크신 은혜가 우리의 삶을 살립니다. 이 은혜를 통하여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성경적 가치를 따라 살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우리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주어진 믿음의 길에서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들은 행위로 구원을 더하는 것이 큰 믿음이라고 성도들을 미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어떤 율법적 요소도 구원에 더할 수 없음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값없이 주어진 은혜에만 안주하지 말고, 구원을 이뤄가는 거룩한 삶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를 통하여 깨닫게 된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태도가 참된 믿음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아홉명의 유대인들은 치유는 경험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경험했을 뿐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를 선택한 단 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찬양했고,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한사람은 몸도 나았지만 영혼이 회복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무엇입니까? 넓은 길로 가는 90%의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켜 감사했던 그 한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곡의 찬양이 생각이 납니다.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외롭고도 쓸쓸한 모습  말 없이 홀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을 다 버린 나그네  정녕 그 분이 내 형제 구원 했나  나의 영혼도 구원하려나  의심 많은 도마처럼 물었네 내가 주를 처음 만난 날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내가 이제 주를 만남으로  죽음의 길 벗어나려네  변찮는 은혜와 사랑 베푸신  그분 만이 나의 구세주  주 예수 따라 항상 살리로다  십자가 지고 따라가리라”  

인생의 무게를 홀로 짊어지시고 외롭고도 쓸쓸한 모습으로 걸어가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믿음의 자리로 불러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은 뒤 이틀이나 더 머물다가 찾아 가셨습니다. 나사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절망 가운데서도 인생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감사를 선택하고 돌아온 한 사람에게 ‘자 일어나 가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살다 보면 구원을 이뤄가는 삶이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 자 일어나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소.” 이 믿음으로 걷는 주의 자녀들의 걸음을 붙들어 주시고, 살아계신 주님께서 그 구원을 이루어 가도록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매주일 예배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신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이 단 한 사람의 나병환자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가 보여 준 삶은, 바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믿음과 감사의 삶입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그 순간, 감사는 우리의 삶속에 열매가 됩니다. 한 주를 시작하며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 교회가 절망 가운데 있는 삶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이키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이곳 케임브리지에 세워진 우리교회를 통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지길 기도합니다.

10 12 2025 주일설교

(케임브리지한인교회 창립 47주년 기념예배)

우리의 영광의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Christ, Our Hope of Glory
골로새서 1:24-29

김태환 목사


24 나는 여러분을 위해 받는 고난을 기뻐합니다.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겪으셔야 할 고난의 남은 부분을 내가 겪을 수 있으니, 그것을 기쁨으로 견뎌 냅니다. 25 나는 특별한 사명을 받고 여러분을 돕기 위해 보내진 교회의 일꾼입니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숨김없이 여러분 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26 이 말씀은 이 세상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숨겨져 왔던 비밀이었는데,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27 모든 사람을 위한 풍성하고도 영광스러운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만민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이 진리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며,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영광스러운 소망이 되십니다. 28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어느 누구에게나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힘껏 사람들을 가르치고 바 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기 원하기 때 문입니다. 29 이 일을 위해 힘쓰고 애쓰며, 내 안에서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힘차게 나 아갑니다. (쉬운성경)


24 I am glad when I suffer for you in my body, for I am participating in the sufferings of Christ that continue for his body, the church. 25 God has given me the responsibility of serving his church by proclaiming his entire message to you. 26 This message was kept secret for centuries and generations past, but now it has been revealed to God’s people. 27 For God wanted them to know that the riches and glory of Christ are for you Gentiles, too. And this is the secret: Christ lives in you. This gives you assurance of sharing his glory. 28 So we tell others about Christ, warning everyone and teaching eve- ryone with all the wisdom God has given us. We want to present them to God, perfect1 in their relationship to Christ. / 1Or mature 29 That’s why I work and struggle so hard, depending on Christ’s mighty power that works within me.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47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오늘 예배는 평소와 달리 우리 교회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갖게 하는 예배입니다. 불행하게도 지금은 교회의 영향력이 급 격하게 감소하고 있는 때입니다. 유럽과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교회의 영향력 이 쇠퇴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포스트 지(紙)에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9가지 이유’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이유들을 보면 이렇습니다. (1) 교회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2) 교회가 반지성적(anti- intellectual)이다. (3) 교회 안에 사랑이 없다. (4) 무조건적인 경건의 삶을 요구한다. (5) 맹목 적인 봉사와 헌신을 요구한다. (6) 교회 외에도 다른 옵션들이 많이 있다. (7) 교회가 복음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는다. (8) 교회가 더 이상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9) 진부하고 무식한 (unenlightened) 목사의 설교/교인들의 삶과 연관성(relevance)이 부족한 설교를 한다.

물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이유가 모두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겸손하게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공신력 있는 여론조사와 통계로 유명한 Pew Research Center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현재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종교가 없는 사람들 의 수가 증가하고 있고, 기독교를 탈퇴하는 현상(disaffiliation)이 지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2024년 한국 리서치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국에서도 종교가 없다고 답한 사람들이 51% 로,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2024년 9월에 ‘한국 개신교 교세 현 황 및 감소 원인 분석’이라는 AI의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한국 개신교 교회의 교인 비율 이 계속 감소 추세에 있고, 특히 젊은 세대들의 감소 현상이 두드러진다고 합니다. 2001년 부터 2023년까지 개신교 교인의 비율이 20.6%에서 16.3%로 감소했고, 2050년에는 11.9% 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 교회는 창립 47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입니 다. 교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입니다. ‘세상에서(ek-) 불러냄(kaléō) 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특별한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 되신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선교활동을 하던 때는 대략 서기46-57년 경입니다. 이 때 복음을 위협하던 세력 중 하나가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영과 지식을 최고의 덕목(德 目)으로 삼는 그리스 철학사상입니다. ‘영지주의’의 핵심은 모든 현상과 사물을 이원론적(二 元論的)으로 구분해서 영은 선하고 물질(육체)은 악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동시에 영지주의 는 최고의 지식은 비밀(mystery)에 감춰져 있어 소수의 ‘완전한 사람들(Gnostics)’에게만 공 개되기 때문에 결국 구원은 이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합니다.

바울은 영지주의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영지주의에 대한 주의를 환 기시킵니다. 바울은 영지주의를 ‘헛된 속임수’ ‘초등학문’, ‘헛된 말(골로새서 2:8)’, ‘거짓된 지 식(디모데전서 6:20)’이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이 영지주의를 배격한 이유는 그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 구원은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 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은퇴하고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다 보니 음악을 많이 듣습니다. 장르를 정해 놓고 듣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듣게 됩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S. Bach, 1685–1750)의 칸타타 BWV 147 ‘With Heart, Mouth, Action, And Life (마음과 입과 행위 와 삶)’의 마지막 합창 부분에 ‘예수, 인간의 갈망의 기쁨(Jesu, Joy of Man’s Desiring)’이라 는 유명한 곡이 나옵니다. 바흐가 300년 전에 작곡한 이 곡은, 저에게는 우리 시대에 주는 메시지처럼 들렸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갈망(渴望)하는 이유는 거기에서 기쁨을 얻기 위해 서입니다. 하지만, 모든 갈망의 끝에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갈망의 끝이 허무하게 끝 나기도 하고, 절망적으로 끝나기도 하고, 방황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바흐는 인간의 갈망 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기쁨이 예수라고 했습니다. 바흐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해서 궁극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지금은 가치의 다양성이 인정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 매우 혼란스러운 때입니다. 2,000년 전의 크리스천들도 그랬습니다. 아직 교회가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영지주의’라는 사상이 교회로 밀려들 어왔습니다. 당시에 ‘영지주의’는 사회의 엘리트들이 따르는 세련된 철학 사상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그 시대의 대세(大勢)였습니다. 골로새 교회 교인들은 영지주 의자들의 주장과 복음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런 때에 바울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은밀 한 지식의 비밀과 지혜는 이미 여러분이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 모두 들어 있습니 다(27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숨겨 있습니다(골로새서 2:3).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희망은 “앞으로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 라 ‘영광의 희망(27절, the hope of glory, ἐλπὶς τῆς δόξης)’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영광 을 의미하는 독사(δόξα)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들어갈 영광 스러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영광으로 들어 갈 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수도 있고, 실패를 맛볼 수도 있고,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영광의 희망 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시시 와이넌스(CeCe Winans)가 부른 노래 “Come Jesus Come”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납니다.

“가끔 나는 무릎 꿇고 기도해요. 오소서 예수님, 오늘이 그날이 되게 해 주세요. 가끔은 무 너질 것만 같아요. 하지만 나는 붙잡고 있어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Sometimes I feel like I’m gonna break. But I’m holding on To a hope that won’t fade)” 가사가 아주 감동적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도 이 희망에 대하여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 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희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4) 바울은 이 희망을 ‘하나님의 영광의 희망’이라 고(로마서 5:2)했습니다. 이 희망은 하나님의 영광이 보증된(guaranteed) 희망입니다. 우리 에게 이 희망이 있기 때문에 환난을 당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더 견고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지금 당하고 있는 환난을 더 나은 삶을 창조할 기회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약속된 희망을 가지고 어떻게 세 상을 살아가는지, 사람들에게 말(설교)하고(proclaiming), 주의를 주고(admonishing), 가르치 고(teaching), 보여주고(presenting), 사람들과 함께 그것을 나누는 것(sharing)을 말합니다 (28절).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 신실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 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 2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 해 받는 고난을 기뻐합니다.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겪으셔야 할 고난의 남 은 부분을 내가 겪을 수 있으니, 그것을 기쁨으로 견뎌 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옵니다. “I am glad when I suffer for you in my body, for I am partici- pating in the sufferings of Christ that continue for his body, the church.” 이 말씀은 예수 그 리스도의 고난은 오늘날에도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고난을 함께 나눌 때,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 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교회의 정체성은 큰 교회 건물이나 그 교회에 모이는 많은 교인들, 그리 고 많은 교회 예산에 있지 않습니다. 2020년 1월 20일에 선언했던 팬데믹은 교회에게 많은 과제를 안겨주었습니다. 팬데믹은 교회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시도를 중단하고 겸손하 게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였습니다. 교회는 팬데믹을 겪으면서 정체성을 새롭게 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런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 지 못하고 오히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 독일)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희망의 신학 (1964)’,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 등의 책들을 저술했습니다. 저는 이 책들을 읽으면서 신학교와 대학원 시절을 보냈습니다. 몰트만은 2,000년에 쓴 ‘신학의 체험’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신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돌보는 사람은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 스도는 그들이 받는 고난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몰트만은 교회는 고난 받는 공 동체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고난 받는 사람들 과 함께 하고, 그들을 돕고,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교회가 오늘날처럼 섬김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던 적이 과거에 없었던 것 같 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섬김과 봉사의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 프로 그램을 운영하는지, 왜 그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에 대한 설명 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同參)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 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 1910-1997)는 오스만 제국의 코소보(현, 북마케도니아)에서 출 생했습니다. 1929년에 소속 수도회의 결정에 따라 인도로 건너가 콜카타(옛 이름 캘커타)의 빈민가를 둘러본 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라”는 소명(召命)을 받습니다. 그 리고, 거기서 그녀는 죽을 때까지 무려 68년 동안 빈자와 약자들의 어머니로 살았습니다. 인종과 국경을 넘어서, 그것도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섬기며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삶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 람들에게 많은 영감(靈感)을 줍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테레사 수녀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섬김의 삶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외로운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 대화의 상대가 되 어 주고,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친구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는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로마서 12:15). 그리고, 주변에서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다가가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로 마서 12:16). 그리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람들을 사랑과 용서와 온유함으로 대하 는 것입니다(에베소서 4:32).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이런 섬김의 삶이 곧 그리 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4절). 섬김의 삶을 크고 대단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상의 생활 속에서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케임브리지한인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들이 케임브리지한인교회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 케임브리지한인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정체성(identity)이 결 정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 를 통해 새롭게 창조되는 교회, 그리고, 주변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교회, 환 난과 고난을 오히려 성장의 기회로 삼아 더욱 단단해지는 교회, 그리고 세상으로 들어가서 각자의 위치에서 조용히 섬김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그 질문에 답해 야 합니다.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우리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