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28. 2025 주일 설교

송년주일

예수는 우리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

Jesus is not ashamed of us

히브리서 2:10-11, 17-18

10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만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많은 자녀들을 영광에 이르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해 완전케 하셨는데,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또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가 한 분이신 하나님께 속한 한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된 사람들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

17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모든 면에서 자기 형제인 우리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기 형제인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18 결국 예수께서는 몸소 시험을 받으시고 또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에, 시험당하는 사람들을 넉넉히 도우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쉬운말 성경)

10 God, for whom and through whom everything was made, chose to bring many children into glory. And it was only right that he should make Jesus, through his suffering, a perfect leader, fit to bring them into their salvation. 11 So now Jesus and the ones he makes holy have the same Father. That is why Jesus is not ashamed to call them his brothers and sisters… …

17 Therefore, it was necessary for him to be made in every respect like us, his brothers and sisters,[h] so that he could be our merciful and faithful High Priest before God. Then he could offer a sacrifice that would take away the sins of the people. 18 Since he himself has gone through suffering and testing, he is able to help us when we are being tested.(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한해의 마지막 송년(送年)주일입니다. 지난 한해도 함께 해 주신 하나님께서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매일 드렸던 새벽기도회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기도의 등불이 되었고 주님을 바라보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2025년 사순절 새벽 기도회는 ‘섬김의 십자가’란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코비드로 인해 우리의 신앙생활도 속도를 내지 못하는 듯 많은 것이 변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주의 뜻을 따라 함께 걸으며 인도되는 길이었기에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금요찬양 예배를 통해서는 봄 학기에 데살로니가전서 강해를, 가을 학기에는 야고보서 강해로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연약한 우리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영화 ‘신은 죽지 않았다'(God’s Not Dead)에서 무신론자 철학 교수는 수업 시작전 80명의 수강생들에게 종이 위에 ‘신은 죽었다’라고 쓰라고 강요합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불평하지만 학점을 받기 위해 ‘신은 죽었다’라고 적었지만 조시라는 주인공은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습니다. 화가 난 교수는  3주 동안 조시에게 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을 과제를 주고 증명하지 못하면 낙제 시킬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믿음의 인내로 복음을 전하고 결국 무신론자 교수는 논쟁에서 패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조시는 과제를 풀어낸 것이 아니라 진리의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이 영화의 스토리가 히브리서 2장 18절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몸소 시험을 받으시고 또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에, 시험당하는 사람들을 넉넉히 도우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2:18)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진리 보다는 거짓을, 사랑과 용서보다는 권위와 압박의 시험에 부딪히게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속에서 우리가 믿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 길을 먼저 걸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와 시험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는 위축되어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죽음의 위협에서 풀려지도록 자신이 온 몸으로 죽음을 껴안고 자기 안에 받아 들이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예수께서 거룩하게 된 우리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죄가 주는 고통을 잘 압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죽음의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안에 죄성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죄의 즐거움이 우리를 여전히 유혹하지만 성령께서는 죄의 쾌락과 영적 싸움을 하게 하십니다. 죄는 지금도 기회만 나면 틈을 타고 우리를 집어 삼키려고 하지만 성령은 죄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게 이끌어 가십니다. 말씀의 빛으로 우리 안에 죄를 드러내셔서 죄의 열매를 제거해 나가는 일이 어렵거나 두렵지 않도록 한없는 사랑으로 치유하시고 덮어 주십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능력이 율법과 형식의 경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을 하나의 형제로 묶는 하나님의 약속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진리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기도해도 여전히 응답이 보이지 않을때가 있고, 선하게 살려고 애써도 고난과 시련을 겪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도의 거절감이나 마음에 남은 상처들로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죄성은 우리를 십자가 없는 신앙으로 살아가게도 합니다. 한 해 동안 우리는 스스로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 속에 살았습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섬김의 자리에 서고, 오래 교회에 다녔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를 괜찮은 신앙인으로 인식하게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인간의 신념위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자기신념 위에 세운 신앙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결핍을 느끼게 되고 복음이 아닌 판단과 기준으로 불평하게 합니다. 그 불평이 기쁨보다 커지니 어느새 우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진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스스로의 신념으로 변화가 될수 있다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확신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굴곡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우리를 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눈물을 지니고 주님을 따라갈 때, 우리는 복음 안에서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능력이 우리를 다시 은혜의 자리로 데려다 놓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현실속에서 부딪히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쉬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모른채 살아가는 우리를 부끄럽다 여기지 않으시며 형제 삼아 주셨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결핍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음이 끝이 아님을 세상에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걸음을 걷다 보면, 하나님이 여전히 일하고 계시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고 계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일생은 한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또 생겨납니다. 예수께서 세상오시던 역사적 상황도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 로마제국은 칼과 창으로 주변 민족들을 다스렸습니다. 헤롯 왕의 위협속에서도 동박박사들은 특별한 한 별을 보고, 그곳이 어딘지 알지 못하는 두려움 가운데서도 별을 따라 믿음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박사들의 순종과 믿음은 우리의 믿음생활에 도전을 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이 신뢰가 무엇인지, 성경은 마리아와 요셉의 삶을 통해 보여줍니다. 예수를 뱃속에 품고 수태해야 했던 마리아는 사회적인 수치와 오해와 말없이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요셉도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주의 천사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라는 말씀을 듣고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마리아를 보호해 주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요셉에게는 마리아 데려오는 일이 부끄러움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도 성령으로 수태된 아이는 두려움이 아니라 세상이 알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께서 이렇게 오셨습니다. 혼란스런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오해 한가운데로, 부끄러움이 아닌 사랑을 안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연약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거룩하게 된 우리를 조금도 주저함없이 가족으로 대하시며 “너는 나의 형제요 나의 친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는 신약의 감추어진 보석 중 하나라고 불립니다. 말씀 앞에서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섬김과 봉사의 자리에서 지쳐 있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 나의 일이 되어 버려 순종이 아니라 나의 열심으로 하다가 기쁨이 사라지고 마음이 사라지면 섬김의 자리를 떠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시기보다,  이 자리에 나를 두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왜 이 자리에 있게 하시는지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도우심 뿐입니다.

함께 회복하며 주님을 닮아가는 삶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또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가 한 분이신 하나님께 속한 한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된 사람들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 모두가 한 분이신 하나님께 속한 한 가족입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의 삶 속에도 주님의 모습이 조금씩 배어 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문제와 우리의 신앙의 길을 정직하게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주님이 먼저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형제 된 우리를 회복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때, 앞으로 이루어질 몸의 부활을 미리 맛보게 됩니다.

시편34편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바라보고 그 삶을 닮아가려고 할 때, 점점 주님을 닮아가는 변화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세상과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정이 들고 익숙해지듯 우리 삶에도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님의 삶을 닮아가고 따르게 됩니다. 세상과 교회는 다른 가치와 방식으로 움직이기에 외롭고 힘들때가 많지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함께 걸으며 함께 회복하고 격려하며 예수님처럼 살아가도록 함께 도와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믿음 생활이 종교적 열심으로 멈추어 있거나 주님의 마음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될 때마다 이 찬양을 부르게 됩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순 없을까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러게 살순없을까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 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주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알지만 여전히 욕심과 이기적인 마음이 우리를 지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를 도우시고 형제로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바울은 주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진정한 새해의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많은 자녀들을 영광에 이르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비록 우리는 넘어지고 현실에 매여 세상의 유혹에도 흔들리며, 작은 일에도 마음이 조급하여 요동칠 때가 많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며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가 일어서도록 기다려주십니다. 믿음이 연약하여 주저하고 버틸 힘이 없어 낙심했습니다. 삶의 무게는 너무 무거웠고 가장 두려운 것은 주님 없이도 예배없이도 너무 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고 자녀삼아 주신 그 은혜를 무엇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함께 회복하며 걸을 때 세상과 다른 가치속에서도 우리의 교회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많이 아파하고 눈물 흘려야 했던 순간 조차 하나님과 함께 걷는 믿음의 거룩한 여정은 참 감사한 길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고 주님의 마음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삶의 다른 조건들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 이 진리를 깨닫는 귀한 은혜의 삶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2.21. 2025 주일설교

성탄 :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

Christmas — God Has Come to Us

누가복음 2:10–14, 마태복음 2:10-11

눅 2:10 그러자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이 소식은 모든 백성에게 아주 큰 기쁨이 될 것이다.” 11 오늘 밤,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의 구주가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12 너희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뵙게 되면, 그분이 바로 주님이신 줄 알아라.” 13 그때 갑자기 수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쉬운말 성경)

마2:10 박사들은 그 별이 멈추어 선 것을 보자, 뛸 듯이 무척 기뻐하였다. 2:11 박사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었다. 박사들은 아기에게 엎드려 절한 후, 보물 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쉬운말 성경)

하나님은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셔서 세상의 높은 사람들이 아니라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구주의 탄생을 전하셨습니다. 성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역사적인 사건이며 예언의 성취입니다. 로마 황제의 인구조사 칙령으로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베들레헴으로 호적 등록을 위해 이동했고 이는 미가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예수의 탄생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 황제의 칙령까지 사용하셔서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찬송하며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눅 2:14)  

올 한 해를 돌아보면 우리의 삶에도 참 많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산다고 생각했지만 힘든 순간 앞에 서보니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와 주심을 알게 되었고, 믿음이 단단하다 여겼지만 속사람은 참 많이 흔들렸고, 기도하기보다는 내 경험을 의지했으며, 예배보다는 내 삶이 더 중요하여 분주한 날이 더 많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나의 삶만이 너무 고단하고 외롭다 생각했지만 우리의 주변에는 여전히 홀로 버티며 눈물 흘리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자리까지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성탄의 참된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당시 예수님의 탄생이 헤롯왕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목자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납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헤롯 왕에게 찾아가 유대인의 새로 태어난 왕에게 예를 갖추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헤롯왕의 마음은 불안해 졌습니다. 그에게 아기 예수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자일뿐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찾으면 나도 함께 경배하려고 하니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예배하려는 마음이 아닌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동쪽의 한 별이 나타나 동방의 박사들을 아기 예수가 있는 곳을 인도합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나아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며 경배했습니다.

황금은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개인의 삶의 안정과 성공을 위해 바쁘게 살아갑니다. 세상은 개인이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소유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치열한 구조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의 빛을 남겨 두셨습니다. 치열한 세상속에서 죄로 인해 메마를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마음에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위대하신 하나님을 고백하게 합니다.

바울은 권면합니다.”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받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영적 예배입니다.” 왕권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입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며 이로 인해 내면은 고단하고 비참한 현실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치열한 현실속에서도 마음을 새롭게 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라고 강조합니다. 세상 풍조를 본받지 말고 물질이 왕이 되버린 사회속에서도 거룩한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헤롯왕은 예수를 배척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안에는 자기의 권력을 지키려는 욕심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심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평화를 내려 주십니다. 우리도 매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세상의 유혹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삶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유향은 고대시대 신께 드리는 제사의 용도에 쓰이는 향수입니다.

이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목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인간의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구약의 사람들에게는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인간을 압도하는 경험일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도 그렇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닫혀 있던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슬픔과 인생의 불확실함을 기쁨과 평안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임재의 목마름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거룩함이 살아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몰약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몰약을 시체에 발라 방부제로 썼습니다. 수천년 전에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나의 것으로 경험되어질때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더 진하게 느끼게 됩니다. 사람은 건강을 잃고 난 후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고, 늘 곁에 있던 소중한 이들이 떠나고 난후에 그 소중함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주의 죽으심은 우리의 믿음을 다시 살리는 힘이 되고 사랑할 수 없는 본성을 지닌 우리를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외침은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겪는 수많은 갈증과 마음의 상함, 불과 같은 시련속에서도 우리의 상황을 압도하는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전에는 후회하고 완고한 의지로 이겨내려고 했다면 주의 십자가는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주의 손에 붙잡힌 인생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성탄의 기쁨, 그리고 우리의 예배(προσκυνέω)

예배라는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온 몸으로 전해져 손에 입 맞추다, 무릎을 꿇다’라는 뜻입니다. 프로스퀴네오는 엎드려 경외를 표현하는 행위로, 나의 존재를 낮추는 예배를 뜻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는 예배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감히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높아진 예배는 현실속에서 금방 무너지지만,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느헤미야 시대, 40일 동안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 앞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을 듣다가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때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지만 느헤미야는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예배는 거룩한 잔치입니다. 슬픔을 지나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물질을 나누고 베풀며 모인 백성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허락하시는 은혜와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삶의 자리, 교회와 가정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은혜의 예배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매년 우리교회는 성탄 예배를 드리며 세례식과 입교식을 거행합니다. 유아세례를 받는  아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역사적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은 아이들이 하나님을 알기 전 부모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 세상속으로 나아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가정에 맡기신 자녀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 주고, 가정에서 부터 삶을 통해 기도와 예배의 본을 보이겠다는 결단의 자리입니다. 세례받는 아이들이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가며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깊이가 더해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함께 하는 믿음의 지체들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귀한 아이들을 바라보며 기도와 사랑으로 동행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시간입니다.

성인 세례를 받는 이들과 입교하는 이들은 주님을 따르겠다는 믿음의 고백과 결단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신앙 공동체안에서 거룩한 길을 시작하며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겠다는 믿음을 공동체 앞에서 확인하고, 초대받는 시간입니다. 부서별 성탄 발표회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행하신 성탄의 기쁨과 사랑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예배를 드리며 우리의 삶 한가운데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느끼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주를 기뻐하는 사람들 곁에 머무시며 그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함께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치셨고 떡을 떼어 나누셨고 사람들을 사랑으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쁨의 고백과 감사의 모양은 다 다르지만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간절한 믿음의 고백은 하나로 흘러갈 것입니다. 성탄은 단순히 연말에 찾아오는 이벤트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온 기쁨의 소식이며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구원을 이루신 평화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이 기쁨을 누리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 기쁨의 누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 같지만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생명의 빛을 따라 걸으며 흔들리는 길 위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한주간 들판의 목자들 처럼 깨어서 주님의 성탄의 소식을 듣기를 원합니다. 인생의 깊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주시는 성탄의 은혜가 우리 안에만 머물지 않고 작은 나눔과 격려, 기도의 손길을 통해 홀로 있는 외로운 이웃들의 삶 속에 전해지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 움직이는 증거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2. 14. 2025 주일설교

대강절 시리즈 – 하나님과 함께

빛 : 인생을 비추시는 그 빛으로

The Light: Into the Light That Illuminates Our Lives

요한복음 3:16-21

3:16 ○ 진실로 그렇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소. 그것은,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오. 17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려고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고 보내셨소. 18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사람은 정죄를 당하지 않소. 그러나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은 것이오. 19 그런 자들이 죄인으로 판결을 받는 까닭은, 참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그들의 행위가 악하여 빛보다는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오. 20 악을 행하는 자들은 모두가 빛을 싫어하는 법이오. 악인들은 자기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 빛 가운데로 나오지 않소. 21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꺼이 빛 가운데로 나오는 법이오. 그것은, 자신의 행위가 모두 하나님을 통해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오.”(쉬운말 성경)


16 “For this is how God loved the world: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17 God sent his Son into the world not to judge the world, but to save the world through him. 18 “There is no judgment against anyone who believes in him. But anyone who does not believe in him has already been judged for not believing in God’s one and only Son. 19 And the judgment is based on this fact: God’s light came into the world, but people loved the darkness more than the light, for their actions were evil. 20 All who do evil hate the light and refuse to go near it for fear their sins will be exposed. 21 But those who do what is right come to the light so others can see that they are doing what God wants.”(New Living Translation)

팬데믹 시절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서로에게 전해질 수 있는 바이러스를 끊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나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감염을 막고 서로를 지키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안에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그림자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다 상처받고, 기대가 무너지면 그 틈 사이로 어둠이 찾아옵니다. 그 어둠은 불평으로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어 마음을 짓누르고,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과는 멀어져 살아가게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탄생할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 60:1)

빛으로 세우신 교회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우리를 회복시키고 일으키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고, 함께 걷는다는 것은 어둠을 지나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어둠을 밝혀 주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며 삶 속에서 일어설 힘을 얻게 됩니다. 현재 인생의 어두운 시간을 걷고 계신분이 계신가요? 예수님도 그 어둠속을 지나가셨고, 이 땅에서 겪으신 어둠과 고통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루의 시작은 아침이 아니라 저녁입니다. 인생에도 저녁을 거쳐 어둠의 시간을 잘 견뎌 낼때, 아침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내가 세상의 빛이다’(요 8:12)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어둠속 작은 틈 사이에도 들어와 공간을 밝혀줍니다. 우리의 마음이 고통 가운데 완고해지고 단단해질지라도, 말씀이 스며들 틈만 있다면 하나님은 그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역사하십니다

1.빛으로 나아오라.

예수께서 빛이라고 하신 자기고백을 오늘 본문 3장 16절의 말씀과 연관해서 보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이 빛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으로 번역된 코스모스(κόσμος)는 ‘질서, 조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세상(κόσμος)을 극진히 사랑하셔서’라는 것은 죄로 인하여 깨어진 세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엿볼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노력과 열심의 차원이 아닙니다. 구원 받기 위한 어떤 조건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사랑입니다.

죄로 물든 세상속에서 우리의 모습은 지극히 작은 어린아이 같을지라도 성령께서는 빛의 자녀들을 강하게 세우셔서 거룩함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게 합니다. 빛으로 가까이 나아올때 빛의 열기가 성도의 거룩함을 유지하고 살아나게 합니다. 예배가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예배는 마음 중심에 있는 어둠을 밀어내고,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사랑을 마음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어둠이 왕이 될수 없음을 선언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연결됩니다. 인간의 사랑도 국경을 넘어 갈 정도로 힘이 있는데,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연결되면 우리의 삶에 놀라운 축복과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 보다 깊은 이 사랑을 막을 어둠은 없습니다. 이 사랑은 죽음의 권세를 뚫고 세상에 들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빛 가운데로 나아온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2.빛 앞에서 드러난다.

오늘날 세상과 교회에는 이 빛을 가리려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복음을 세상적 관점으로 포장하거나 형식에 머물게 하여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만을 원하고 훈계와 책망을 거부하는 시대가 되어갑니다. 우리의 마음은 점점 편하고 쉬운 길로 향하려고 하고, 내 뜻과 다르면 사랑하고 함께하는 일도 불편한 일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은 우리의 자랑속에 담긴 교만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내 삶이 충분하다고 여기는 자만한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고, 나보다 더 탁월한 사람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전 영역에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곳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숨길 수 있는 영역은 단 한곳도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죄의 권세로 부터 자유로워진 택함을 입은 신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재하는 죄의 능력을 죽이는 일을 그들 평생의 임무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죄란 태양을 중심으로 질서 있게 유지되는 행성이 스스로의 힘으로 궤도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을 혼자 감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알지만 여전히 현재의 세상에 더 끌리고, 어둠 가운데서 만족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이런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구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우리의 성과와 실력으로 살았더라도 먼저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그런 깨달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눈물로 함께 기도하고 감사와 사랑을 선택하며 서로의 기도 제목을 품고 삶 속에서 힘이 되어주는 지체들을 만나는 곳, 서로가 약함을 자랑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경험하게 됩니다.

3.빛은 삶으로 나타난다.

마태는 이 빛을 ‘착한 행실’로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그 빛을 그 사람들 앞에서 비취게 하라.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그 착한 행실들 보게 하라. 그래서 그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그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우리는 이 구절을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문의 성경은 순서가 반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빛을 우리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비추게 하여, 이 빛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착한 행실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윤리적 도덕적 착한 행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 보다 앞설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착한’이라는 헬라어 ‘칼로스’는 본질적으로 선함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나는 선한(καλός) 목자라”(요 10:11)하실때도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70인역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말씀하실때 ‘좋았다’라는 의미를 이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착한 행실은 창조의 선함이 드러나는 아름다움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를 믿는 이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과 연관 지어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광야에서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놋뱀을 들어 올리게 하시고, 쳐다 보는 사람은 치유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빛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성경에서 뱀은 죄를 짓게 하는 기원으로 봅니다. 죽어가는 백성은 죄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백성들은 모세의 말씀을 믿고 장대에 올린 놋뱀을 바라보았을때 살아났습니다. 놋뱀은 죄의 심판으로 십자가에서 죽어진 예수님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절규하시며, 거절당하고 버림받으셨는데, 그 주님을 믿을때 인간의 삶의 목적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삶의 익숙치 않는 경험들 속에서 정신없이 가던 삶을 멈추고 은혜로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은 은혜로 살아가도록 주신 시간들입니다. 주님께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향할 때 우리의 예배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깨어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가 있어야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믿음을 성장하게 하는 힘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14절로 16절을 잊고 세상을 판단하고 정죄 받을 대상으로 여기며 복음을 전하다 보니 그 시각은 점점 어두워지고, 밝은 면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가는 것은 성령에 매여 지속적인 거룩함의 과정을 추구하는 길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진리의 눈이 열렸는데, 깨어진 세상을 보고 나니까 오히려 사명자로 살아가기 보다는 눈 뜨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기도를 드린다거나,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3:21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꺼이 빛 가운데로 나오는 법이오. 그것은, 자신의 행위가 모두 하나님을 통해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오.”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62년전 1953년 링컨 기념관 앞에 모인 25만명 앞에서 루터 킹은 자신의 소박한 꿈을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그 일부분입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골짜기 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는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그는 빛이 어둠을 이기듯 사랑이 미움을 이기는 세상을 간절히 바라보았습니다. 거룩한 부르심을 외치는 연설과도 같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주신 부르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꿈을 꾸며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걷는 분들의 삶을 깊이 들어가 보면, 삶의 현실 앞에서 연약한 양과 같습니다. 캄캄한 터널 가운데 있으니 믿음의 발걸음은 느려집니다. 그런데 사단은 인간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영적으로 침체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진리와 사랑의 빛을 없앨 수 없으니 이 빛에 익숙해 지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말씀을 들어도 감격을 사라지게 하고, 복음의 형식은 있는데 능력이 사라져 버리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물이 닿는 그 곳에, 조용히 멈추어 있는 기도의 자리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한숨 속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같은 현실을 보면서도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의 일방적인 선언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대강절 세번째 촛불이 켜졌습니다. 이 빛은 단지 상징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빛은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빛을 발견하는데 멈추지 않고, 그 빛을 드러내며 살아야 합니다. 이 빛이 우리의 삶을 비추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고백이, 우리의 작은 마음이 사람을 살리는 빛이 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깊은 고독의 자리에서도 이 빛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빛을 지닌 자녀들입니다. 넉넉한 사랑의 품으로 가정과 일터, 학업의 현장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받은 빛으로 주변을 환하게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흔들림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처럼,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믿는 성도들의 삶을 통해 살아 역사하시는 진리의 빛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12 07 2025 주일설교

대강절 시리즈 – 하나님과 함께

길: 주님을 따라 걷는 믿음

The Path: Walking in Faith with the Lord

요한복음 14:1-6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참으로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에게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간다. 3 그래서 너희가 있을 곳이 다 준비되면, 그때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항상 같이 있도록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때 제자들 중 하나인 도마가 말했다. “주님, 우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오지 못한다.(쉬운말 성경)

1“Don’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Trust in God, and trust also in me. 2 There is more than enough room in my Father’s home.[a] If this were not so, would I have told you that I am going to prepare a place for you?[b] 3 When everything is ready, I will come and get you, so that you will always be with me where I am. 4 And you know the way to where I am going.” 5 “No, we don’t know, Lord,” Thomas said. “We have no idea where you are going, so how can we know the way?” 6 Jesus told him,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an come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New Living Translation)

인생의 낯선 길을 걸을 때 우리의 불안과 긴장의 중심에는 ‘나’ 자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내 계획과 내 근심에 흔들릴 때 우리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당시 제자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알 수 없었기에 불안했을 것입니다. 3년 동안 함께한 예수님께서 곧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마음에는 평안 보다 불안과 근심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나는 너희를 위해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간다. 다 준비가 되면, 그때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항상 있도록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주님이 가시는 길을 알고 싶어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오지 못한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길 중에 하나가 아니라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오직 하나뿐인 길 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라고 하셨기에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패할수 없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직장과 학업의 현장, 가정 속에서 내 목표와 내 능력과 실력을 갖추기 위해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 길을 따라 살아가도 진정한 만족함을 누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은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와 함께 걷는 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견고한 믿음 입니다.

견고한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일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히 알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의심이라면, 건강한 생각의 일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도마는 정말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시 다른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도마의 질문으로 부터 예수님의 위대한 자기 고백이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시작하는 과정에서도 같은 질문과 고민을 합니다. 팀 켈러 목사님의 “이 시대가 잃어버린 이름” 이란 책에는 한 자매의 이야기가 소개 됩니다. 그녀는 교회에 나가 본적도 없던 성도였습니다. 목사님이 자매에게 현재 신앙이 어느 단계에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녀는 “전에는 기독교가 터무니 없어 보였는데 이제는 아닙니다. 사실 알고 보니 다른 대안들이 더 믿어지지 않더군요. 어쨌든 스스로 원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기대한 것처럼 크고 화려한 길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동행하며 걷다 보면 그 길위에서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의 노력과 결심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실 때 임하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주신 분께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견고한 믿음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사명을 따라 섬기고,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요구에 순종할 때 믿음이 견고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배는 우리 삶의 근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약속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단순히 삶의 근심을 내려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근심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한해 동안 드린 예배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순간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더 큰 평안과 은혜를 채워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근심 중에도 기도하고 찬양할수 있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믿음을 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견고한 믿음은 오직 주님 안에서 얻어집니다. 어제 받은 은혜로 오늘을 살 수 없듯,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이 되심을 신뢰하며 한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삶에서 믿음을 선택하고 주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주님께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건강, 삶의 안정, 삶에서 마주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작은 불편을 감수하기 보다는 편안한 내일을 꿈꾸게 됩니다. 그런데 견고한 믿음은 이전에 의지하던 삶의 중심을 내어놓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붙들 때 더 깊어집니다.

두번째는 선택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꿈이 성취되는 것을 위해 하나님과 협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우리의 믿음보다 위대하고 크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란 단어를 스물다섯번이나 언급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과 선택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예배와 삶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 붙들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게 합니다.

길이라는 단어 ‘호도스’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라고 선언하신 것은 하늘 처소에 이르는 길이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열려 있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 길은 용서와 섬김의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도 도마는 믿지 못했고 예수님을 직접 만져보고 확인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마에게 “자, 이리 와서 네 손가락을 여기 넣어 보고,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도마는 그제서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구나. 그러나 나를 보지 않고도 나를 믿는 사람은 더욱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과 마음이 주님을 보지 못할 때에도 의심과 불안이 믿음을 가로막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붙들고, 한 걸음씩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믿음의 길은 나만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길입니다.

비록  나의 기도가 응답 되지 않고 내 삶이 부족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끝까지 믿음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안에 거하시며 참된 생명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은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복음을 온전히 전하고 지키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현재 하시고자 하는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시니 우리도 그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2026년도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위해 우리가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세워가는 일에 우리의 삶을 아낌없이 드려야 합니다. 우리 삶과 가정이 예배로 시작되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때 삶이 예배로 채워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지식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시대적 책임을 감당하는 일도 변화속에서 믿음을 앞에 두는 것입니다. 믿음이 내 삶의 주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나누어 드리는 2026년 달력의 1월의 첫 장을 여시면 우리 마음안에 주님의 마음을 채우소서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상한 마음을 만져주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마음을 채워가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죄를 범했을 때, 그가 두려웠던 것은 전쟁에서 패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시선도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죄를 직면하고 하나님께 적극적인 행위로 나아갔습니다. 진심의 기도를 드릴때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믿음을 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사랑과 순종으로 이루신 길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예수의 길> 에서 두려움으로 따르는 삶은 제자도의 형태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는 두려움이 많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따르되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따르기를 원하신다. 두려움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그분은처음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어서 우리에게 있는 두려움의 방벽을 뚫고 들어온다. 예수님은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순전히 그분을 사랑해서 따른다는 뜻이다. 우리는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 믿음의 고백은 우리가 함께 믿고 걸어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섬김의 자리로 한 걸음씩 나아가게 합니다. 이제 우리 교회도 50주년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맡기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며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명자로 세워져야 합니다.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더 큰 믿음을 허락해 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삶은 세상이 주는 약속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은 잠시입니다. 하나를 이루고 나면 또 공허해지고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수많은 길중의 한 길이 아니라 오직 한길 오직 예수님 안에서 걸어야 하는 유일한 그 길을 기쁨으로 걷는 믿음의 성도들의 삶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