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1. 2025 주일설교

성탄 :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

Christmas — God Has Come to Us

누가복음 2:10–14, 마태복음 2:10-11

눅 2:10 그러자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이 소식은 모든 백성에게 아주 큰 기쁨이 될 것이다.” 11 오늘 밤,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의 구주가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12 너희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뵙게 되면, 그분이 바로 주님이신 줄 알아라.” 13 그때 갑자기 수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쉬운말 성경)

마2:10 박사들은 그 별이 멈추어 선 것을 보자, 뛸 듯이 무척 기뻐하였다. 2:11 박사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었다. 박사들은 아기에게 엎드려 절한 후, 보물 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쉬운말 성경)

하나님은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셔서 세상의 높은 사람들이 아니라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구주의 탄생을 전하셨습니다. 성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역사적인 사건이며 예언의 성취입니다. 로마 황제의 인구조사 칙령으로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베들레헴으로 호적 등록을 위해 이동했고 이는 미가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예수의 탄생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 황제의 칙령까지 사용하셔서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찬송하며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눅 2:14)  

올 한 해를 돌아보면 우리의 삶에도 참 많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산다고 생각했지만 힘든 순간 앞에 서보니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와 주심을 알게 되었고, 믿음이 단단하다 여겼지만 속사람은 참 많이 흔들렸고, 기도하기보다는 내 경험을 의지했으며, 예배보다는 내 삶이 더 중요하여 분주한 날이 더 많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나의 삶만이 너무 고단하고 외롭다 생각했지만 우리의 주변에는 여전히 홀로 버티며 눈물 흘리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자리까지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성탄의 참된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당시 예수님의 탄생이 헤롯왕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목자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납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헤롯 왕에게 찾아가 유대인의 새로 태어난 왕에게 예를 갖추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헤롯왕의 마음은 불안해 졌습니다. 그에게 아기 예수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자일뿐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찾으면 나도 함께 경배하려고 하니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예배하려는 마음이 아닌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동쪽의 한 별이 나타나 동방의 박사들을 아기 예수가 있는 곳을 인도합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나아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며 경배했습니다.

황금은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개인의 삶의 안정과 성공을 위해 바쁘게 살아갑니다. 세상은 개인이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소유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치열한 구조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의 빛을 남겨 두셨습니다. 치열한 세상속에서 죄로 인해 메마를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마음에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위대하신 하나님을 고백하게 합니다.

바울은 권면합니다.”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받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영적 예배입니다.” 왕권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입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며 이로 인해 내면은 고단하고 비참한 현실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치열한 현실속에서도 마음을 새롭게 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라고 강조합니다. 세상 풍조를 본받지 말고 물질이 왕이 되버린 사회속에서도 거룩한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헤롯왕은 예수를 배척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안에는 자기의 권력을 지키려는 욕심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심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평화를 내려 주십니다. 우리도 매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세상의 유혹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삶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유향은 고대시대 신께 드리는 제사의 용도에 쓰이는 향수입니다.

이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목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인간의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구약의 사람들에게는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인간을 압도하는 경험일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도 그렇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닫혀 있던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슬픔과 인생의 불확실함을 기쁨과 평안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임재의 목마름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거룩함이 살아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몰약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몰약을 시체에 발라 방부제로 썼습니다. 수천년 전에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나의 것으로 경험되어질때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더 진하게 느끼게 됩니다. 사람은 건강을 잃고 난 후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고, 늘 곁에 있던 소중한 이들이 떠나고 난후에 그 소중함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주의 죽으심은 우리의 믿음을 다시 살리는 힘이 되고 사랑할 수 없는 본성을 지닌 우리를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외침은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겪는 수많은 갈증과 마음의 상함, 불과 같은 시련속에서도 우리의 상황을 압도하는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전에는 후회하고 완고한 의지로 이겨내려고 했다면 주의 십자가는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주의 손에 붙잡힌 인생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성탄의 기쁨, 그리고 우리의 예배(προσκυνέω)

예배라는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온 몸으로 전해져 손에 입 맞추다, 무릎을 꿇다’라는 뜻입니다. 프로스퀴네오는 엎드려 경외를 표현하는 행위로, 나의 존재를 낮추는 예배를 뜻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는 예배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감히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높아진 예배는 현실속에서 금방 무너지지만,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느헤미야 시대, 40일 동안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 앞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을 듣다가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때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지만 느헤미야는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예배는 거룩한 잔치입니다. 슬픔을 지나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물질을 나누고 베풀며 모인 백성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허락하시는 은혜와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삶의 자리, 교회와 가정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은혜의 예배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매년 우리교회는 성탄 예배를 드리며 세례식과 입교식을 거행합니다. 유아세례를 받는  아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역사적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은 아이들이 하나님을 알기 전 부모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 세상속으로 나아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가정에 맡기신 자녀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 주고, 가정에서 부터 삶을 통해 기도와 예배의 본을 보이겠다는 결단의 자리입니다. 세례받는 아이들이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가며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깊이가 더해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함께 하는 믿음의 지체들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귀한 아이들을 바라보며 기도와 사랑으로 동행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시간입니다.

성인 세례를 받는 이들과 입교하는 이들은 주님을 따르겠다는 믿음의 고백과 결단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신앙 공동체안에서 거룩한 길을 시작하며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겠다는 믿음을 공동체 앞에서 확인하고, 초대받는 시간입니다. 부서별 성탄 발표회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행하신 성탄의 기쁨과 사랑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예배를 드리며 우리의 삶 한가운데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느끼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주를 기뻐하는 사람들 곁에 머무시며 그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함께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치셨고 떡을 떼어 나누셨고 사람들을 사랑으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쁨의 고백과 감사의 모양은 다 다르지만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간절한 믿음의 고백은 하나로 흘러갈 것입니다. 성탄은 단순히 연말에 찾아오는 이벤트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온 기쁨의 소식이며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구원을 이루신 평화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이 기쁨을 누리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 기쁨의 누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 같지만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생명의 빛을 따라 걸으며 흔들리는 길 위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한주간 들판의 목자들 처럼 깨어서 주님의 성탄의 소식을 듣기를 원합니다. 인생의 깊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주시는 성탄의 은혜가 우리 안에만 머물지 않고 작은 나눔과 격려, 기도의 손길을 통해 홀로 있는 외로운 이웃들의 삶 속에 전해지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 움직이는 증거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2. 14. 2025 주일설교

대강절 시리즈 – 하나님과 함께

빛 : 인생을 비추시는 그 빛으로

The Light: Into the Light That Illuminates Our Lives

요한복음 3:16-21

3:16 ○ 진실로 그렇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소. 그것은,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오. 17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려고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고 보내셨소. 18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사람은 정죄를 당하지 않소. 그러나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은 것이오. 19 그런 자들이 죄인으로 판결을 받는 까닭은, 참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그들의 행위가 악하여 빛보다는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오. 20 악을 행하는 자들은 모두가 빛을 싫어하는 법이오. 악인들은 자기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 빛 가운데로 나오지 않소. 21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꺼이 빛 가운데로 나오는 법이오. 그것은, 자신의 행위가 모두 하나님을 통해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오.”(쉬운말 성경)


16 “For this is how God loved the world: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17 God sent his Son into the world not to judge the world, but to save the world through him. 18 “There is no judgment against anyone who believes in him. But anyone who does not believe in him has already been judged for not believing in God’s one and only Son. 19 And the judgment is based on this fact: God’s light came into the world, but people loved the darkness more than the light, for their actions were evil. 20 All who do evil hate the light and refuse to go near it for fear their sins will be exposed. 21 But those who do what is right come to the light so others can see that they are doing what God wants.”(New Living Translation)

팬데믹 시절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서로에게 전해질 수 있는 바이러스를 끊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나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감염을 막고 서로를 지키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안에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그림자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다 상처받고, 기대가 무너지면 그 틈 사이로 어둠이 찾아옵니다. 그 어둠은 불평으로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어 마음을 짓누르고,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과는 멀어져 살아가게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탄생할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 60:1)

빛으로 세우신 교회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우리를 회복시키고 일으키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고, 함께 걷는다는 것은 어둠을 지나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어둠을 밝혀 주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며 삶 속에서 일어설 힘을 얻게 됩니다. 현재 인생의 어두운 시간을 걷고 계신분이 계신가요? 예수님도 그 어둠속을 지나가셨고, 이 땅에서 겪으신 어둠과 고통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루의 시작은 아침이 아니라 저녁입니다. 인생에도 저녁을 거쳐 어둠의 시간을 잘 견뎌 낼때, 아침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내가 세상의 빛이다’(요 8:12)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어둠속 작은 틈 사이에도 들어와 공간을 밝혀줍니다. 우리의 마음이 고통 가운데 완고해지고 단단해질지라도, 말씀이 스며들 틈만 있다면 하나님은 그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역사하십니다

1.빛으로 나아오라.

예수께서 빛이라고 하신 자기고백을 오늘 본문 3장 16절의 말씀과 연관해서 보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이 빛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으로 번역된 코스모스(κόσμος)는 ‘질서, 조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세상(κόσμος)을 극진히 사랑하셔서’라는 것은 죄로 인하여 깨어진 세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엿볼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노력과 열심의 차원이 아닙니다. 구원 받기 위한 어떤 조건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사랑입니다.

죄로 물든 세상속에서 우리의 모습은 지극히 작은 어린아이 같을지라도 성령께서는 빛의 자녀들을 강하게 세우셔서 거룩함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게 합니다. 빛으로 가까이 나아올때 빛의 열기가 성도의 거룩함을 유지하고 살아나게 합니다. 예배가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예배는 마음 중심에 있는 어둠을 밀어내고,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사랑을 마음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어둠이 왕이 될수 없음을 선언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연결됩니다. 인간의 사랑도 국경을 넘어 갈 정도로 힘이 있는데,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연결되면 우리의 삶에 놀라운 축복과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 보다 깊은 이 사랑을 막을 어둠은 없습니다. 이 사랑은 죽음의 권세를 뚫고 세상에 들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빛 가운데로 나아온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2.빛 앞에서 드러난다.

오늘날 세상과 교회에는 이 빛을 가리려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복음을 세상적 관점으로 포장하거나 형식에 머물게 하여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만을 원하고 훈계와 책망을 거부하는 시대가 되어갑니다. 우리의 마음은 점점 편하고 쉬운 길로 향하려고 하고, 내 뜻과 다르면 사랑하고 함께하는 일도 불편한 일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은 우리의 자랑속에 담긴 교만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내 삶이 충분하다고 여기는 자만한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고, 나보다 더 탁월한 사람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전 영역에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곳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숨길 수 있는 영역은 단 한곳도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죄의 권세로 부터 자유로워진 택함을 입은 신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재하는 죄의 능력을 죽이는 일을 그들 평생의 임무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죄란 태양을 중심으로 질서 있게 유지되는 행성이 스스로의 힘으로 궤도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을 혼자 감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알지만 여전히 현재의 세상에 더 끌리고, 어둠 가운데서 만족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이런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구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우리의 성과와 실력으로 살았더라도 먼저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그런 깨달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눈물로 함께 기도하고 감사와 사랑을 선택하며 서로의 기도 제목을 품고 삶 속에서 힘이 되어주는 지체들을 만나는 곳, 서로가 약함을 자랑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경험하게 됩니다.

3.빛은 삶으로 나타난다.

마태는 이 빛을 ‘착한 행실’로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그 빛을 그 사람들 앞에서 비취게 하라.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그 착한 행실들 보게 하라. 그래서 그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그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우리는 이 구절을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문의 성경은 순서가 반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빛을 우리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비추게 하여, 이 빛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착한 행실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윤리적 도덕적 착한 행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 보다 앞설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착한’이라는 헬라어 ‘칼로스’는 본질적으로 선함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나는 선한(καλός) 목자라”(요 10:11)하실때도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70인역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말씀하실때 ‘좋았다’라는 의미를 이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착한 행실은 창조의 선함이 드러나는 아름다움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를 믿는 이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과 연관 지어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광야에서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놋뱀을 들어 올리게 하시고, 쳐다 보는 사람은 치유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빛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성경에서 뱀은 죄를 짓게 하는 기원으로 봅니다. 죽어가는 백성은 죄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백성들은 모세의 말씀을 믿고 장대에 올린 놋뱀을 바라보았을때 살아났습니다. 놋뱀은 죄의 심판으로 십자가에서 죽어진 예수님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절규하시며, 거절당하고 버림받으셨는데, 그 주님을 믿을때 인간의 삶의 목적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삶의 익숙치 않는 경험들 속에서 정신없이 가던 삶을 멈추고 은혜로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은 은혜로 살아가도록 주신 시간들입니다. 주님께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향할 때 우리의 예배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깨어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가 있어야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믿음을 성장하게 하는 힘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14절로 16절을 잊고 세상을 판단하고 정죄 받을 대상으로 여기며 복음을 전하다 보니 그 시각은 점점 어두워지고, 밝은 면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가는 것은 성령에 매여 지속적인 거룩함의 과정을 추구하는 길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진리의 눈이 열렸는데, 깨어진 세상을 보고 나니까 오히려 사명자로 살아가기 보다는 눈 뜨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기도를 드린다거나,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3:21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꺼이 빛 가운데로 나오는 법이오. 그것은, 자신의 행위가 모두 하나님을 통해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오.”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62년전 1953년 링컨 기념관 앞에 모인 25만명 앞에서 루터 킹은 자신의 소박한 꿈을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그 일부분입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골짜기 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는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그는 빛이 어둠을 이기듯 사랑이 미움을 이기는 세상을 간절히 바라보았습니다. 거룩한 부르심을 외치는 연설과도 같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주신 부르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꿈을 꾸며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걷는 분들의 삶을 깊이 들어가 보면, 삶의 현실 앞에서 연약한 양과 같습니다. 캄캄한 터널 가운데 있으니 믿음의 발걸음은 느려집니다. 그런데 사단은 인간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영적으로 침체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진리와 사랑의 빛을 없앨 수 없으니 이 빛에 익숙해 지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말씀을 들어도 감격을 사라지게 하고, 복음의 형식은 있는데 능력이 사라져 버리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물이 닿는 그 곳에, 조용히 멈추어 있는 기도의 자리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한숨 속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같은 현실을 보면서도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의 일방적인 선언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대강절 세번째 촛불이 켜졌습니다. 이 빛은 단지 상징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빛은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빛을 발견하는데 멈추지 않고, 그 빛을 드러내며 살아야 합니다. 이 빛이 우리의 삶을 비추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고백이, 우리의 작은 마음이 사람을 살리는 빛이 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깊은 고독의 자리에서도 이 빛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빛을 지닌 자녀들입니다. 넉넉한 사랑의 품으로 가정과 일터, 학업의 현장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받은 빛으로 주변을 환하게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흔들림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처럼,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믿는 성도들의 삶을 통해 살아 역사하시는 진리의 빛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12 07 2025 주일설교

대강절 시리즈 – 하나님과 함께

길: 주님을 따라 걷는 믿음

The Path: Walking in Faith with the Lord

요한복음 14:1-6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참으로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에게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간다. 3 그래서 너희가 있을 곳이 다 준비되면, 그때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항상 같이 있도록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때 제자들 중 하나인 도마가 말했다. “주님, 우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오지 못한다.(쉬운말 성경)

1“Don’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Trust in God, and trust also in me. 2 There is more than enough room in my Father’s home.[a] If this were not so, would I have told you that I am going to prepare a place for you?[b] 3 When everything is ready, I will come and get you, so that you will always be with me where I am. 4 And you know the way to where I am going.” 5 “No, we don’t know, Lord,” Thomas said. “We have no idea where you are going, so how can we know the way?” 6 Jesus told him,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an come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New Living Translation)

인생의 낯선 길을 걸을 때 우리의 불안과 긴장의 중심에는 ‘나’ 자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내 계획과 내 근심에 흔들릴 때 우리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당시 제자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알 수 없었기에 불안했을 것입니다. 3년 동안 함께한 예수님께서 곧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마음에는 평안 보다 불안과 근심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나는 너희를 위해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간다. 다 준비가 되면, 그때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항상 있도록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주님이 가시는 길을 알고 싶어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오지 못한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길 중에 하나가 아니라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오직 하나뿐인 길 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라고 하셨기에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패할수 없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직장과 학업의 현장, 가정 속에서 내 목표와 내 능력과 실력을 갖추기 위해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 길을 따라 살아가도 진정한 만족함을 누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은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와 함께 걷는 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견고한 믿음 입니다.

견고한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일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히 알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의심이라면, 건강한 생각의 일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도마는 정말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시 다른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도마의 질문으로 부터 예수님의 위대한 자기 고백이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시작하는 과정에서도 같은 질문과 고민을 합니다. 팀 켈러 목사님의 “이 시대가 잃어버린 이름” 이란 책에는 한 자매의 이야기가 소개 됩니다. 그녀는 교회에 나가 본적도 없던 성도였습니다. 목사님이 자매에게 현재 신앙이 어느 단계에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녀는 “전에는 기독교가 터무니 없어 보였는데 이제는 아닙니다. 사실 알고 보니 다른 대안들이 더 믿어지지 않더군요. 어쨌든 스스로 원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기대한 것처럼 크고 화려한 길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동행하며 걷다 보면 그 길위에서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의 노력과 결심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실 때 임하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주신 분께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견고한 믿음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사명을 따라 섬기고,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요구에 순종할 때 믿음이 견고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배는 우리 삶의 근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약속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단순히 삶의 근심을 내려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근심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한해 동안 드린 예배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순간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더 큰 평안과 은혜를 채워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근심 중에도 기도하고 찬양할수 있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믿음을 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견고한 믿음은 오직 주님 안에서 얻어집니다. 어제 받은 은혜로 오늘을 살 수 없듯,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이 되심을 신뢰하며 한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삶에서 믿음을 선택하고 주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주님께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건강, 삶의 안정, 삶에서 마주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작은 불편을 감수하기 보다는 편안한 내일을 꿈꾸게 됩니다. 그런데 견고한 믿음은 이전에 의지하던 삶의 중심을 내어놓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붙들 때 더 깊어집니다.

두번째는 선택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꿈이 성취되는 것을 위해 하나님과 협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우리의 믿음보다 위대하고 크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란 단어를 스물다섯번이나 언급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과 선택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예배와 삶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 붙들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게 합니다.

길이라는 단어 ‘호도스’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라고 선언하신 것은 하늘 처소에 이르는 길이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열려 있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 길은 용서와 섬김의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도 도마는 믿지 못했고 예수님을 직접 만져보고 확인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마에게 “자, 이리 와서 네 손가락을 여기 넣어 보고,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도마는 그제서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구나. 그러나 나를 보지 않고도 나를 믿는 사람은 더욱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과 마음이 주님을 보지 못할 때에도 의심과 불안이 믿음을 가로막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붙들고, 한 걸음씩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믿음의 길은 나만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길입니다.

비록  나의 기도가 응답 되지 않고 내 삶이 부족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끝까지 믿음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안에 거하시며 참된 생명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은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복음을 온전히 전하고 지키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현재 하시고자 하는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시니 우리도 그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2026년도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위해 우리가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세워가는 일에 우리의 삶을 아낌없이 드려야 합니다. 우리 삶과 가정이 예배로 시작되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때 삶이 예배로 채워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지식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시대적 책임을 감당하는 일도 변화속에서 믿음을 앞에 두는 것입니다. 믿음이 내 삶의 주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나누어 드리는 2026년 달력의 1월의 첫 장을 여시면 우리 마음안에 주님의 마음을 채우소서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상한 마음을 만져주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마음을 채워가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죄를 범했을 때, 그가 두려웠던 것은 전쟁에서 패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시선도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죄를 직면하고 하나님께 적극적인 행위로 나아갔습니다. 진심의 기도를 드릴때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믿음을 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사랑과 순종으로 이루신 길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예수의 길> 에서 두려움으로 따르는 삶은 제자도의 형태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는 두려움이 많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따르되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따르기를 원하신다. 두려움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그분은처음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어서 우리에게 있는 두려움의 방벽을 뚫고 들어온다. 예수님은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순전히 그분을 사랑해서 따른다는 뜻이다. 우리는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 믿음의 고백은 우리가 함께 믿고 걸어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섬김의 자리로 한 걸음씩 나아가게 합니다. 이제 우리 교회도 50주년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맡기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며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명자로 세워져야 합니다.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더 큰 믿음을 허락해 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삶은 세상이 주는 약속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은 잠시입니다. 하나를 이루고 나면 또 공허해지고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수많은 길중의 한 길이 아니라 오직 한길 오직 예수님 안에서 걸어야 하는 유일한 그 길을 기쁨으로 걷는 믿음의 성도들의 삶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1. 30. 2025 주일설교

대강시리즈하나님과 함께

1주 숨: 함께 호흡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42:1-4

42:1 주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붙들어 주는 내 종이 여기에 있다. 그는 내가 선택한 자요, 내가 기뻐하는 자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부어 주었으니, 그가 세상의 뭇 민족들에게 공의를 전하고 베풀 것이다.
42:2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것이고, 길거리에서 크게 떠들지도 않을 것이다.
42:3 그는 상한 갈대도 부러뜨리지 않을 것이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신실하게 공의를 실천할 터인데,
42:4 세상에 공의를 굳게 세울 때까지, 그는 머뭇거리거나 쇠약해지거나 낙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멀리 있는 섬들까지도 그에게 가르침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쉬운말 성경)

1“Look at my servant, whom I strengthen.  He is my chosen one, who pleases me. I have put my Spirit upon him. He will bring justice to the nations.
2 He will not shout or raise his voice in public.
3 He will not crush the weakest reed or put out a flickering candle. He will bring justice to all who have been wronged. 4 He will not falter or lose heart until justice prevails throughout the earth. Even distant lands beyond the sea will wait for his instruction.”(New Living Translation)

2025년 한해도 열심히 잘 달려오셨습니다. 삶의 자리를 돌아보니 참 많은 순간들이 있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믿음 지키며 사느라 애쓴 순간들도 떠오를 것입니다. 예측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들로 우리 삶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여 주셨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번 대강절 설교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함께 호흡하시고 (숨), 함께 길을 걸어 주시며 (길), 우리가 걷는 인생의 길을 비추시는 (빛)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1. 상한 마음에도 함께 하시는 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그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 결과 말씀을 떠나 정의와 공의가 무너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자신들의 힘으로는 벗어날수 없는 노예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포로기의 때가 찼을때 하나님은 다시 회복을 이루셨습니다. 인간은 약속을 어겼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으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기 위해 직접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생길에는 뜨거운 광야처럼 숨이 턱 막히는 순간도 있고, 열심을 다해 걷다 보면 숨이 차오르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내리면 메마르고 건조했던 우리의 마음도 옥토처럼 부드러워 집니다. 새 마음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탄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 계셨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삶속에도 여전히 함께하고 계시고, 지치고 힘들 때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위로하시고 회복해 주시는 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종을 통해 이루신 일을 바라볼 때, 우리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보라’라고 하는 BEHOLD 라는 단어는 ‘보다’라는 동사의 의미도 있지만 원문상 ‘헨’이라는 단어는 동사가 아니라 감탄사입니다. 감탄이 사라져 가는 세상에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이사야는 강조합니다. 연약한 인간은 척박한 현실 속에서 상한 갈대처럼 흔들리고, 꺼져가는 등불처럼 힘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믿음의 눈을 돌리면,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과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 중심에 놓게 됩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메시지 성경은 이사야 42장 1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의 종을 유심히 보아라. 내가 전적으로 지지하는 종이다. 그는 내가 택한 사람이며, 나는 그가 더없이 마음에 든다. 나는 그를 온통 내 영으로, 내 생명으로 감싸 주었다. 그가 민족들 사이에서 모든 일을 바로 잡을 것이다”

이 종은 단순한 ‘종’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하셔서 우리에게 회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로 세우시고 공의를 이루실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로 살다가 고레스 왕을 통하여 다시 돌아왔듯이 이 종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는 이사야가 예언한 이 메시아가 예수님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9절에서 예수님은 안식일날 유대 회당으로 들어가시다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17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것은 그분에 관한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라고 이사야가 했던 말씀을 인용해서 자신을 말씀하셨습니다.  깨어지고 흩어진 마음을 바로 잡아 주실 그 분, 상한 갈대도 부러뜨리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종을 통하여 바른 정의를 회복해 나가시며 교회를 세워 나가십니다.

그렇다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상한 갈대는 이미 부러진 가지입니다. ‘가지가 부러졌다’라는 것은 그대로 놔 두어도 살아날 가망이 없습니다. 죄는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고 강팍하게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의 병을 죄의 결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자비로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준다고 비판하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오그라진 손을 펴 주시고 죄로 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예수의 이름은 우리가 전해야 할 교회의 사명이요. 세상 끝날까지, 심판의 날까지 성도들이 지녀야 할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날에는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다 주 앞에 서게 됩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을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환경이 당장 바뀌지 않아도 마음과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릴 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길이 조금씩 선명해 집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깊은 바다와 같아서 그 속에서 모든 악은 깊이 가라앉고 수면은 고요해 집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틈속에서도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풍성하게 부어 주십니다.

마지막 날에 심판의 절차는 누구나 통과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다고 모두가 주님의 변호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때 믿음이 없음으로 드러나면 예수님은 변호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주님을 진정으로 믿을때 주님은 부러지고 꺾어진 나약한 가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다시 타오르도록 회복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2.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도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숨

이 생기는 단순히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호흡이 되고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도 우리를 붙들어 줍니다. 세상에는 여러 길이 있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은 물위의 길을 알고, 하늘을 나는 기장은 하늘의 길을 따라 비행합니다. 땅에도, 바다에도, 하늘에도 길이 있듯 우리가 믿는 믿음에도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길입니다. 때로는 인생의 길이 보이지 않아 고통의 광야를 걸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는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가장 분명한 길이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가장 바른 길입니다.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새 생명의 호흡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이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한해도 우리는 참 많은 시간들을 보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삶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 드린 기도의 시간과 감사의 시간이 충분했는지를 돌아봅니다. 아직 채우지 못한 기도와 감사의 시간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지친 숨과 무거운 마음 속에도 하나님의 숨결이 우리를 새롭게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님은 공의를 전하고 베푸시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시고 크게 떠들지도 않으시며 신실하게 공의를 실천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자신의 죽음과 바꾸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알면, 우리의 눈이 밝아져 교만한 마음을 보게 하시고,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덮어 주시며, 죄를 이길 능력이 되십니다. 여전히 악의 저항으로 믿음으로 싸워 나가야 할 영역들이 존재하지만 예수가 걸어가신 길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소명입니다.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긴 포로 생활 속에서 바벨론의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다시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내 힘으로 살아가던 그 자아를 내려놓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주를 따르는 길이 낯설고 불편함을 마주하게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낙심하지 않도록 새 영을 부어 주시고, 주를 위해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통해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일상에서의 작은선택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속에서 잃어 버렸던 감사와 기쁨, 내 환경이 어떠하던지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고 회복할 호흡을 허락하십니다.

랄프 턴불 목사의 저서 하나뿐인 교회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턴불 목사가 심한 신경통으로 고통 중에 누워있는 할머니 교우를 심방했습니다.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하고 문안하자 할머니는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습니다.  “ 손에 못이 박힌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평안합니다.” 또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 머리에 가시가 박히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시 옆구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내 옆구리는 창에 찔리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목사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삶의 증거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이 상처받는 일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손으로 많은 일들을 해내야 하고, 머리에는 염려와 걱정이 가득하며, 마음의 옆구리에는 삶의 아픔들이 쌓여만 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처와 깨어짐 속에서도 다시 살아가게 하시고 회복하게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손에 들려진 것들을 주님께 맡기고 내 마음속의 깊은 곳에서 멈추지 않았던 생각과 흔들림을 주님께 맡겨 보시기 바랍니다. 대강절의 기다림 속에서 우리의 굳은 마음과 아픈 상처와 가시가 치유되고 숨이 막혀 있던 자리에도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 넣어지는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상하고 지친 자리, 숨이 차 멈추어 있던 그 자리에서 함께 호흡하시는 주님의 숨결과 임재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약속을 믿고 삶의 자리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1. 23. 2025 주일설교

(추수감사주일)

우리는 왜 예수를 찾고 있는가?

Why Do We Seek Jesus?

요한복음 6:25~35

25 사람들은 호수를 건너와 예수를 찾게 되자, “선생님, 언제 이리로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찾는 것은, 여러분들이 기적의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들을 배불리 먹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27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기 위해 애쓰지 말고, 영원토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기 위해 애쓰십시오. 인자가 그 영원한 양식을 여러분들에게 제공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인자가 이런 일을 하도록 승인해 주셨습니다.” 28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으십시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30 사람들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믿을 수 있도록 어떤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시겠습니까? 31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를 ‘그분은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그들로 먹게 하셨다.’ 하지 않았습니까?”32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여러분들에게 밝히 말하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늘에서 빵을 내려주었던 이는 모세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늘에서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십니다. 33 하나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가 세상에 참 생명을 주는 바로 그것입니다.” 34 ○ 사람들이 예수께 말했다. “선생님, 이제부터 그 빵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35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생명의 빵입니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쉬운말 성경)

25 They found him on the other side of the lake and asked, “Rabbi, when did you get here?” 26 Jesus replied, “I tell you the truth, you want to be with me because I fed you, not because you understood the miraculous signs. 27 But don’t be so concerned about perishable things like food. Spend your energy seeking the eternal life that the Son of Man[f] can give you. For God the Father has given me the seal of his approval.”28 They replied, “We want to perform God’s works, too. What should we do?”29 Jesus told them, “This is the only work God wants from you: Believe in the one he has sent.”30 They answered, “Show us a miraculous sign if you want us to believe in you. What can you do? 31 After all, our ancestors ate manna while they journeyed through the wilderness! The Scriptures say, ‘Moses gave them bread from heaven to eat. 32 Jesus said, “I tell you the truth, Moses didn’t give you bread from heaven. My Father did. And now he offers you the true bread from heaven. 33 The true bread of God is the one who comes down from heaven and gives life to the world.” 34 “Sir,” they said, “give us that bread every day.” 35 Jesus replied, “I am the bread of life. Whoever comes to me will never be hungry again. Whoever believes in me will never be thirsty.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본문은 사람들이 호수까지 건너와 예수님을 찾았다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대단한 열심을 보여줍니다. 지난 밤 사람들은 항구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북쪽 호수 벳세다 근처 오병이어 기적을 베푼 곳에서 주님을 기다리다가 예수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제자들이 그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갈때에도 예수님이 함께 타지 않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찾기 위해 그분이 올라가셨던 산에도 올라가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벳세대로 들어온 작은 배를 타고 호수까지 건너와 예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갈릴리 바다로 나갔을때 그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날은 일상과 달리 갑자기 강풍이 휘몰아치면서 물결이 사나워졌습니다. 제자들의 힘으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모든 방법을 시도했을때쯤 예수께서 풍랑 위를 걸어오셨고, 제자들은 배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배는 순조롭게 가버나움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은 밤 중에 물 위를 걸어 가신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를 찾던 사람들은 작은 배들을 타고 호수를 건너와 예수님을 다시 찾게 된 것입니다. 66절에 보면, 결국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를 찾았습니까? 기적을 통하여 사람들의 배고픔을 채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 채 자기 목적으로 주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한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쉽게 이해하도록 비유로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선언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첫번째 자기선언입니다. 빵 자체는 언젠가 썩게 되는 음식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생명의 빵이라고 설명했을때 믿지 못한 사람들은 다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이 무슨 뜻일까요? 빵이라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밥이었습니다. 모세시대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이 생명의 빵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처럼 생명의 빵은 오늘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근원이며, 삶 속에서 내 의지대로 살아가다가 내 힘으로 안되는 막막한 순간 앞에 서서 우리가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그 의미가 깊어집니다.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잠드는 것을 내 실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호흡은 우리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주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의 인생의 길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광야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믿음의 시련을 견디던 순간이 모두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버겁기만 할 때 모든 것의 품이 되어 주셨던 어머니의 밥상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식탁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마음을 품어주던 사랑과 보호의 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빵은 고단함과 피로가 가득한 삶의 길에서, 우리를 살리시고 회복시키는 생명이고 은혜입니다. 얼마전에는 보스턴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금요예배 후 교우들과 함께 나누었던 식탁의 시간을 은퇴를 앞두고 추억하시며 편지를 보내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그 식탁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일상의 자리에서 서로가 나눈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나를 먹고 마시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내가 흘린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죄사함을 주신 그 용서의 은혜를 날마다 먹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붙드신다는 믿음,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는 믿음을 일생동안 선택하는 것이 생명의 떡을 먹는 삶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예수님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찾는 것은 기적의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들을 배불리 먹여 주었기 때문입니다.”(요 6:26)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으십시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요 6:29) 하나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가 세상에 참 생명을 주는 바로 그것입니다.” (요 6:33) “내가 곧 생명의 빵입니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요 6:35)

미국 텍사스 달라스 도심 한 가운데에 있는 First Baptist church of Dallas 교회 앞 분수대에는 요한복음 4장 14절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나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참 샘물이 될 것이오.” 이 교회는 지난 세월 동안 주님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지역 사회에 소망의 닻을 내리고, 세속의 물결에 떠내려 가지 않도록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되시는 예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생명이 되신 주님을 전하고, 생명을 살리는 사명을 함께 감당하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주안에서 하나의 몸을 이룰때 그 안에서 사람들의 생명이 살아나고, 세상과 다른 공동체가 됩니다.

오늘의 우리는 학업의 경쟁과 결과의 압박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꿈을 향해 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현실이 버겁게 느껴지고 불확실한 두려움 앞에서 감사의 마음을 찾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현실이 아무리 척박해도 하나님 나라의 시선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볼 수 있다면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란 하늘에 계신 주를 바라 보고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하다가 넘어질 때도 실패라 생각하며 무너져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넘어짐 조차 주님께 맡길 때 주님은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시고 방향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는 새로운 시작의 설레임도 있고 열정과 힘을 가지고 살 때도 있고 노력의 결실을 맺고 풍요로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변화가 없고 수확이 없는 때도 있습니다. 마음 한켠에는 항상 불안과 두려움 갈급한 마음을 마주할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내 삶의 부요와 기적, 배부름과 현실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며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기쁨, 만족, 행복을 향해 가는 삶은 결국 목마른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채워짐은 오직 주님께 붙어 있을 때 얻게 됩니다. 우리 삶의 감사가 삶의 실력이 되도록 주님과 함께 걷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이끌어 주신 은혜는 말로 다 나열할 수 없습니다. 이 땅 보스턴과 케임브리지 한인교회, 우리의 가정과 학업의 현장에서도 보이지 않으나 이미 누리고 인도함 받은 은혜가 가득합니다. 이제 우리도 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며 감사로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생명의 빵 되신 주님이 우리의 힘이 되신다.

진정한 감사는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를 지탱하는 신앙의 힘이 됩니다. 삶이 불안정하고, 마음이 낙심되어도, 진리 되시는 주님 안에서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지쳐 단단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믿음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십니다. 아무리 좋은 차도 기름이 없으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경적인 길을 알아도 걸어갈 힘이 없으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증인들은 주님이 바라보시는 같은 곳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고 주님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에 삶의 목적을 둡니다. 예수님을 찾던 무리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을 찾았지만 생명의 빵이 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 채 자신들의 배를 채워주었던 그 떡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주님은 언제나 자신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목자였습니다. 목동으로 양들을 돌보고 지키는 순간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주님의 은혜가 아닌 순간이 없습니다. 작은 일상에서도 내 힘으로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생명의 빵 되신 예수님도, 우리의 삶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인도하시고, 풍랑과 광야 같은 상황에서도 생명을 붙들어 주십니다. 감사는 환경과 상황의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동행하여 주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이 감사는 우리가 주를 따르게 하는 힘입니다. 좁은 길을 걸어갈 때, 앞을 가로막는 험한 산 앞에서도  주님께 올려드리는 노래가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교회를 살아나게 합니다.

믿음의 성도는 감사하는 삶을 매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감사하다는 것은 넘어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평생 감사하며 살겠다는 결단은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의 방향입니다. 나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내 안에 세운 우상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생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만나는 일들을 하나님 안에서 감사로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때에도,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감사를 고백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이 살아가는 길입니다.

어릴 적 추수감사절이 되면 가장 좋은 과일과 곡식들을 정성껏 준비하여 받은 은혜의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릴 수 있는 준비가 되셨습니까? 내 삶의 은혜가 주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믿으십니까? 이제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드려져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매년 추수감사 헌금의 일부를 도움이 필요한 목회자들에게 선교 헌금으로 전달합니다. 감사의 마음이 우리 교회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신뢰함으로 흘려보내며 섬기는것 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허락하신 사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와 성도의 사명은 감사함으로 생명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매년 추수감사예배 때 장학금을 수여합니다. 그저 정해진 날에 형식적으로 정해진 일을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기도와 은혜의 감사의 마음을 흘려 보내는 일입니다. 삶의 선교이며 결단이고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며 생명을 얻는 믿음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통하여 천국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기도의 씨앗을 심고, 이렇게 채워진 사랑을 흘려 보낼때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포기하지 않을것입니다. 어제보다 더 깊어진 오늘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게 되어 열방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장학금을 수여 받는 청년들에게 우리 성도들의 눈물과 기도가 담겨있는 사랑이라고 전해주었습니다. 장학금을 수여 받았던 청년이 교우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주었습니다. 편지 내용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케임브리지 한인교회는 저에게 큰 안식처와 나의 힘든 마음을 끌고와 기도와 예배로 눈물을 쏟아내고, 또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한국에 있으면서는 부모님의 신앙을 모방하는 정도의 믿음 이었다면, 케임브리지 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는 오로지 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인격적인 믿음의 확장을 경험하게 해준 너무 감사한 저의 아버지 교회 같은 교회 입니다. 장학생들을 위해 기도 해주셨던 예배본을 편집해 그 기도를 한동안 붙잡고 지냈습니다. 비록 내가 이 세상에 혼자 인것 같고, 힘든 일을 다 내가 짊어지고 나아가는것 같아서 내 어깨가 무겁게 느껴져도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기 때문에 때에 따라 필요한 것들을 부족함 없이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으며 항상 감사함으로 살게끔 인도해 주십니다. 제가 재정적으로 힘들어 집 밖에 나가기도 부담 스러웠던 상황에 감사하게도 장학금을 받게 되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운것 같아서 참 감사합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잘 배움 받아서 지금은 다른 지역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FKCC에 많은 유학생들이 있기에 짧은 인연으로 끝나는 것 같아 보여도  교회를 거쳐간 많은 청년들이 좋은 영향과 배움을 받고 이곳 저곳에 좋은 믿음의 뿌리를 내리며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공부하는 저희를 위해 항상 주저하지 않고 도와주시는 많은 성도님들께도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청년에게 전해진 편지속의 고백을 통해 그리고 장학금 수여식을 영상으로 보며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우리 청년들의 부모님들의 고백을 통해,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교회를 떠난 후에도 잊지 않고 장학헌금을 드리는 그 손길 속에서 우리가 받은 삶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불안과 두려움 가득한 시대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주님을 찾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24:14)  우리는 세상의 기적과 표적들에 흔들리며 내 손으로 만들어 내는 일에 집중하다 보니 주님께서 오신 삶의 목적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빵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선택하게 하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감사의 삶을 선택할 때, 그 감사는 교회와 가정을 살리고 열방을 살려내는 생명의 힘이 됩니다. 우리는 생명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의 은혜는 우리 삶 속에서 잠시의 기쁨의 고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