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1. 2026 주일설교

(케임브리지한인교회 창립 48주년 기념예배)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The Church Gathered and The Church Scattered

사도행전 2:1-4

김태환 목사

1 오순절이 되어 제자들이 한 곳에 모두 모였습니다. 2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나더니, 사람들이 앉아 있던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3 그리고 혀처럼 생긴 불꽃이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불꽃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그 곳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머물렀습니다. 4 사람들은 다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는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는 대로 자기들의 언어와 다른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1-4, 쉬운성경)

1 On the day of Pentecost, all the believers were meeting together in one place. 2 Suddenly, there was a sound from heaven like the roaring of a mighty windstorm, and it filled th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3 Then, what looked like flames or tongues of fire appeared and settled on each of them. 4 And everyone present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speaking in other languages, as the Holy Spirit gave them this ability. (Acts2:1-4 NLT)

교회의 기원에 대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약속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의 공동체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성령께서 임하셨고, 그 모임은 곧 교회의 탄생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하며,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ἐκκλησία)’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됩니다(사도행전 5:11).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탄생시킨 힘이 성령이었고, 교회를 움직이고 이끄는 힘도 성령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계속 읽어 내려가면 이런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있는 교회들이 평화를 되찾았으며, 터전을 든든하게 잡았습니다. 교회는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사도행전 9:31) 이 말씀은 초대 교회 공동체를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성장하게 했던 가장 핵심적인 원동력이 바로 성령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가 곧 갈릴리와 사마리아 땅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성령은 교회를 한 곳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은 모이게도 하시지만, 때가 되면 흩어지게도 하십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 “성령의 불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각 사람(each of them)’에게 임했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다른 언어를 말하게 하셨다(3절)”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성령을 받은 ‘각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루살렘 밖으로 나아가 다른 사람, 다른 문화, 다른 지역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게 하려는 선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20세기의 교회론을 새롭게 제시한 두 신학자가 있습니다. 한스 큉(Hans Küng)과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입니다. 이 두 신학자는 교회를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성령으로부터 태어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라고 보았습니다. 몰트만은 그의 책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creature of the Spirit)’이다. 따라서 교회가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인위적인 목적에 사로잡히는 것은 성령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다. 교회는 성령께서 자유롭게 일하시도록 자신을 개혁하고 미래를 향해 개방하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성령이 이끄는 공동체는 모든 구성원에게 부어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통해 상호 유기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저는 최근에 성경공부 모임에서 자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질문해 보았습니다. 참석자들 대부분이 모른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 모르고도 열심히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는지를 발견하고 그 은사에 따라 봉사한다면, 우리는 더욱 자유롭고 기쁘게 성령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은사 사용의 장소를 꼭 교회 안으로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교회 안에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은사를 교회 안에만 가두는 것은 도리어 성령의 자유로운 사역을 제한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 사이의 담을 허물고, 세상을 우리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봉사해야 할 선교적 삶의 현장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의사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병원에서 환자들을 고치고, 교사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로, 사업가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사업 현장에서, 음악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음악을 연주하거나 곡을 만드는 일로, 상담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로, 섬김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교회는 섬김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네델란드의 선교 신학자 호켄다이크(J.C. Hoekendijk)가 그의 저서 ‘The Church Inside Out (흩어지는 교회, 1966)’에서 처음으로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라는 개념을 소개했습니다. 교회가 건물 안에만 갇혀 있으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교회 내부(Inside)에서 나와 세상 밖(Out)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섬기는 교회는 “나는 이 세상에 섬기러 왔다(마가복음 10:45)”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섬기는 교회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10)”이 기도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섬기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마가복음 16:1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전치사 ‘into’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에이스(εἰς)’는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의미하는 전치사입니다. 사람들의 기쁨이 있는 곳, 눈물이 있는 곳, 아픔이 있는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흩어짐’이야말로 성령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입니다.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들어가 삶과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복음을 너무 좁은 의미로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책임질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복음의 실천적 의미를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해서 복음에 대한 ‘통전적인 이해(holistic understanding)’를 해야 합니다. 단순히 “예수를 믿으라”는 말의 선포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적인 섬김의 삶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가 로마서 말씀을 읽다가 큰 은혜를 받은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거룩하여지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였습니다.”(로마서 15:16)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섬김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섬김을 통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를 직접 보여줌으로써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합당한 존재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호켄다이크가 강조했던 ‘흩어지는 교회’의 참된 의미입니다. ‘모이는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가 되기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교회가 선포해야 할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교회가 가까이 왔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복음 4:17)”였습니다. 한스 큉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증언하며, 그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공동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한스 큉과 몰트만의 교회론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교회가 사람을 모으고, 예배를 드리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건물을 유지하고,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공을 교인 수나 예산이나 건물의 크기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 얼마나 자신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구원을 드러내셨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지난 48년 동안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얼마나, 어떻게 드러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미국의 여류 시인 중에 베시 앤더슨 스탠리(Bessie Anderson Stanley, 1879-1952)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1904년 보스턴의 한 출판사가 성공을 주제로 주최한 공모전을 열었는데, 스탠리는 이 공모전에 응모해 1등을 차지해 상금 250달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195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의 묘비에 그녀의 시 “성공(Success)”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동안 이 시가 에머슨의 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에머슨의 글과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원작자가 누구인지 밝혀진 것입니다.

그녀의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자신이 세상에 왔을 때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만들어 놓고 떠난 사람, 이런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다……그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영감(靈感)이 되었고, 그가 남긴 기억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었다.” 저는 이 말을 우리 교회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었는가?” 스탠리는 당신 때문에 세상이 더 아름다워졌다면,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면, 당신은 성공적인 인생을 산 것이라고 했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고,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인정하게 되었다면, 그것으로도 우리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이 시대의 교회의 사명은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으로 흩어져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답습해 왔던 제도와 구조에 머물러 변화되지 않았던 것이 교회가 신뢰를 잃어버린 중요한 원인입니다. 신뢰를 잃어버린 교회는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우리가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어떻게 사용하시고, 이교회를 통해 무엇을 하실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게 주어진 과제는, 과거의 구조와 제도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하면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것인지, 그 실천적 방안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교회 안에 가두어 두지 않고 우리를 세상으로 내보내십니다. 부디 우리 교회가 성령의 사역에 민감하게 응답해서 우리 교회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0 04 2026 주일 설교

세계성만찬 / 장학헌금 주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

Looking to God

시편 19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3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4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5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6하늘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10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11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12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13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1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쉬운성경)

1 The heavens proclaim the glory of God. The skies display his craftsmanship. 2 Day after day they continue to speak; night after night they make him known. 3 They speak without a sound or word; their voice is never heard. 4 Yet their message has gone throughout the earth, and their words to all the world.God has made a home in the heavens for the sun. 5 It bursts forth like a radiant bridegroom after his wedding. It rejoices like a great athlete eager to run the race. 6 The sun rises at one end of the heavens and follows its course to the other end. Nothing can hide from its heat.  7 The instructions of the LORD are perfect, reviving the soul. The decrees of the LORD are trustworthy, making wise the simple. 8 The commandments of the LORD are right, bringing joy to the heart. The commands of the LORD are clear, giving insight for living. 9 Reverence for the LORD is pure, lasting forever. The laws of the LORD are true; each one is fair. 10 They are more desirable than gold, even the finest gold. They are sweeter than honey, even honey dripping from the comb. 11 They are a warning to your servant, a great reward for those who obey them. 12 How can I know all the sins lurking in my heart? Cleanse me from these hidden faults. 13 Keep your servant from deliberate sins! Don’t let them control me. Then I will be free of guilt and innocent of great sin. 14 May the words of my mouth and the meditation of my heart be pleasing to you, O LORD, my rock and my redeemer.[Psalms 19:1-14, NLT]

인생의 큰 문제 앞에서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만나면 마음이 깊은 곳까지 떨어집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시선은 자꾸 문제에 갇힙니다. 시편은 그런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려놓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아픔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보게 합니다. 시편 19편의 시인은 세 곳을 바라봅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숨김없이 드러내시지만 그런 우리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빛과 은혜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하늘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1절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2절은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고 말합니다. 문제에 갇혔던 시선이 하늘을 향할 때, 우리는 우리를 지으시고 오늘도 붙드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3절), 하늘은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떠오른 해를 보며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 자체가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도 놀랍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목회할 때 한 성도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집 벽에는 작은 해 모양 장식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침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먼저 떠난 남편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와 아이들을 지키신다는 마음을 붙든다고 하셨습니다. 말없이 떠오르는 해가 그분에게는 날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말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해를 노래하며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늘로 피할 수는 있어도 해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빛도 그렇게 온 세상과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비춥니다. 그 빛은 우리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5절은 해가 자기 길을 기뻐하며 달리는 용사 같다고 노래합니다. 이번 주 금요 찬양 예배에서 인도자가 자신이 청년 시절부터 금요 예배를 찾아온 이유를 돌아보며 고백했습니다. 팀장들의 권면 때문이기도 했고, 간사님들에게 미안해서이기도 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보다 더 솔직한 이유는 힘들고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 회사에서도 잘하는 것 같지 않은 불안, 비자와 신분의 문제, 모아둔 돈도 없었던 미래의 불확실함, 하나님 앞에 불평과 불만을 쏟아놓기도 했고 원망하기도 했지만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말씀해 주셨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삶에 문제가 사라지기를 바라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일, 직장에 다니는 일, 가정을 돌보고 자녀를 양육하는 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자라가는 일을 통해 우리는 애쓰고 수고합니다.

해는 기뻐하며 자기 길을 달리는데 우리는 불안해서 달리고 두려워서 달리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달려갑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까? 그 끝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흔들릴 때마다 다시 예배하고, 다시 말씀 앞에 서고, 다시 기도하며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주님과 함께 걸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삶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삶이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알아갑니다.

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10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11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시편의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이 완전하고, 그 증거가 확실하여 영혼을 살리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고 순결하여 듣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으며 위로와 은혜를 얻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던 내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시편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고,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달게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더 달콤한 것들에 길들여져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욥의 신앙을 의심합니다.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십니까?” (욥 1:9)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의 소유물 때문이라고 참소합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잃은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소유물을 잃고 난 후의 이 고백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말씀 앞에 서면 내 마음이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그 마음을 그대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권의 책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는 날마다 머리 위에 펼쳐지는 하늘이라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손에 들린 성경이라는 책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라고 부릅니다. 하늘이 말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면,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더욱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시인은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됩니다.

셋째, 말씀 앞에서 나를 봅니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 ‘허물’은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모르고 짓는 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레위기 4장은 부지중에 지은 죄에도 속죄제를 드리라고 명합니다. 내가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죄, 내가 죄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잘못까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드러납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고의로 짓는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시인 한 사람만의 경험이 아닙니다. 성경 속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성전에서 높이 들린 보좌를 보았습니다. 스랍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외치는 소리 앞에서 그가 처음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재앙이 내게 닥쳤구나.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요, 또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서 사는데, 이런 내가 왕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내 눈으로 직접 뵈었구나.” 그때 스랍이 제단에서 핀 숯을 가져와 그 입술에 대며 말합니다. “네 허물은 사라지고 네 죄도 용서받았다.” 이사야의 고백은 우리가 드려야 할 입술의 고백입니다.

베드로는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빈 그물 앞에서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을 때, 그는 기뻐하는 대신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그가 본 것은 고기가 아니라 고기를 채우신 분이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선생님”이라 부르던 분을 이제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말씀이 그분을 보게 했고, 그분이 베드로 자신을 보게 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고백합니다. 율법이 “탐내지 마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롬 7:7) 살인이나 도둑질은 남의 눈에 보이지만, 탐심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숨은 허물입니다. 말씀이 그 숨은 허물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그 죄인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이었습니다.”(딤전 1:15) 신앙의 성숙은 내가 덜 죄인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죄인임을 알고 더 크게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서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말과 마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깨끗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하게 한 숯불이 제단에서 왔듯이,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은혜도 우리의 노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은혜를 기억하는 성찬의 식탁 앞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고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기념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고백했고,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한 자리에서 사람을 낚는 제자로 부름받았습니다. 바울 역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가 다른 사람을 살리는 본이 되게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오늘 함께 드리는 장학헌금도 그 고백입니다. 말씀으로 받은 은혜를 다음 세대를 섬기는 일로 실천하는 삶의 고백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성찬의 식탁 앞에서, 나의 숨은 마음을 솔직하게 주님께 내려놓으십시오. 작은 걱정 하나가 하나님보다 더 크게 내 삶을 붙들었던 마음, 소유와 욕심이 내 삶의 이유가 되었던 마음, 그리고 누군가를 치열하게 미워했던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 대신 자리하고 있던 그 모든 것을 오늘 이 식탁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시편 19편의 마지막 구절이 우리의 기도가 되도록 함께 고백하겠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4절) 주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더욱 깊은 만남을 이루어 가는 사랑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09 27 2026 주일 설교

성령강림절 제 18주

무엇이 우리를 낮아지게 합니까?

What Makes Us Humble?

빌립보서 2:1-13

1 Is there any encouragement from belonging to Christ? Any comfort from his love? Any fellowship together in the Spirit? Are your hearts tender and compassionate 2 Then make me truly happy by agreeing wholeheartedly with each other, loving one another, and working together with one mind and purpose. 3 Don’t be selfish; don’t try to impress others. Be humble, thinking of others as better than yourselves. 4 Don’t look out only for your own interests, but take an interest in others, too. 5 You must have the same attitude that Christ Jesus had. 6 Though he was God, he did not think of equality with God as something to cling to. 7 Instead, he gave up his divine privileges; he took the humble position of a slave and was born as a human being. When he appeared in human form, 8 he humbled himself in obedience to God and died a criminal’s death on a cross. 9 Therefore, God elevated him to the place of highest honor and gave him the name above all other names, 10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ow,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11 and every tongue declare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12 Dear friends, you always followed my instructions when I was with you. And now that I am away, it is even more important. Work hard to show the results of your salvation, obeying God with deep reverence and fear. 13 For God is working in you, giving you the desire and the power to do what pleases him. [Php 2:1-13, NLT]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 이라는 고백을 늘 품고 살았습니다. 내 생각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고, 내 감정보다 말씀에 순종하며, 내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 드러나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고백이 점점 막연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나를 죽이려고 애쓰는 것만으로 정말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참 많은 것을 합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예배하고, 헌신하고, 봉사합니다. 이런 믿음의 훈련과 형식은 참 중요합니다. 형식은 믿음의 본질을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식이 있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까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솔직하게 들어가 보면 예배의 자리에서는 은혜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지만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가장 가까운 사람 앞에서, 일상의 자리에서 내가 주님을 드러내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이기적인 마음이나 교만한 마음으로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쉬운성경이 “교만한 마음”으로 옮긴 이 말을 개역개정은 “허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로 케노독시아(κενοδοξία)인데, ‘텅 빈 영광’을 뜻합니다. 채우고 또 채워도 남는 것이 없는 영광입니다. 이 텅 빈 영광은 세상의 자리에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장 경건해 보이는 자리에서도 드러납니다. “나는 하나님만 바라보면 된다”는 말은 신실하게 들리지만, 그 말이 또 다른 모습의 고집스런 마음이 됩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기도를 오래 할수록 마음이 단단해져서, 믿음의 잣대로 사람을 쉽게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기도의 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 기도는 자기를 높이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7권에서 회심 이전의 자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교만으로 부어올라 당신에게서 멀어졌고, 너무 부풀어 오른 얼굴이 제 눈을 덮어 버렸습니다.” 내가 삶의 중심에 서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야가 가려집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가려진 자리에는 내가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던 기도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도로 바뀌고 내 말이 맞다는 것을, 내 방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분주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 안의 욕심과 교만이 오히려 나를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교만이 성공할 때만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깊어지는데, 정작 다른 사람을 대하는 내 마음은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연수가 쌓일수록, 우리는 더 자주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의 의지만으로 내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까? 교만한 마음이 스스로 교만을 이길 수 있습니까? 미움이 가득한 마음이 미움을 이길 수 있습니까? 교만한 마음이 스스로 교만을 이길 수 없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낮아질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우리의 결심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것에서 시작합니다. 쉬운성경은 1절을 이렇게 옮겼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로받고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서로 교제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권면(παράκλησις)이 있고, 사랑의 위로가 있고, 성령의 교제(κοινωνία)가 있고, 긍휼과 자비가 있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내 마음이 메마른 날에도 그 은혜는 실재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이미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2그렇다면 서로 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한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  3무슨 일을 할 때, 이기적이거나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존중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순종하기 시작하면, 말씀을 아는 것과 말씀대로 사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설수록 오히려 내 안에 있는 교만과 자기중심성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게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타페이노프로쉬네(ταπεινοφροσύνη)입니다. ‘낮다’는 뜻의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 와 ‘마음과 생각’을 가리키는 프렌(φρήν)의 합성어입니다. 기독교의 겸손은 내 삶의 중심을 예수님께 내어 드리고,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존중하라고 말합니다.

이 낮아짐은 바울 시대 헬라-로마 사회에서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비천함, 노예의 품성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명예와 지위,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낮아짐을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시면서도, 그 높으심을 자기를 위해 움켜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종의 모습을 입으시고, 스스로 낮은 자가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가 져야 할 죄를 대신 지신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과한 성도는 허영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바울은 4절에서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교만으로 부풀어 오른 눈을 내려놓고, 그 사람이 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필요를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하다가 갈등을 겪었던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가장 가까운 사이, 관계, 공동체 안에서 시험받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흉내내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은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시고 십자가까지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공동체의 하나됨을 가로막는 내 안의 자기중심성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빛 아래에서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삶은 나 자신을 더 몰아 붙이는 삶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으며 오늘의 한 걸음을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 길에서 억울함을 만나고 곤고한 날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막 10:45) 우리의 섬김이 지칠 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섬김의 시작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 섬김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것은 인정받기 위해서도, 내 믿음의 크기를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이제 그 사랑의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12절 보시겠습니다. 12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항상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 여러분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곁에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늘 힘쓰기 바랍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던 성도들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 내는 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구원을 얻기 위해 애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구원이 우리의 생각과 관계와 선택 속에서 실제로 드러나도록 두려움과 떨림으로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두려움과 떨림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경외의 태도입니다. 또한 빌립보 교우들은 바울이 곁에 있을 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곁에 없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사람이 보고 있을 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자녀를 양육할 때, 부모로서의 내 권위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지 않았습니까? 배우자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아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릴 때, 그 안에 내 자존심을 지키려는 마음은 없었습니까? 밖에서는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려고 애쓰면서도, 정작 가까운 사람 앞에서는 내 뜻을 내려놓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옳고 그름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의 길을 따라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을 신뢰하며 순종의 걸음 지속하시기 바랍니다. 순종의 길은 나를 증명하는 길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며 걷는 길입니다. 주님 가신 길을 따라 걷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구절이 눈에 들어 옵니다. 1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원하게 하시고 행할 힘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힘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그 힘을 의지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이 낮아짐의 길은 어떻게 끝났습니까? 9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10하늘과 땅 위, 땅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심을 선포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이 옳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세상이 가장 수치스럽다고 여긴 종의 길, 십자가의 길을 하나님께서 높이셨습니다.

주가 지신 십자가는 가장 수치스런 죽음을 생명의 자리로 바꾸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낮아지게 합니까? 굳은 결심도, 더 오래 참는 인내도 아닙니다. 우리를 낮아지게 하는 것은, 나를 위해 십자가의 자리까지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의 낮아지심 앞에서 우리는 주님을 더욱 신뢰할 힘을 얻게 됩니다. 지금도 주를 신뢰하는 자들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행함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고백한 이 말씀이 오늘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