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강림후 제 8주)
예수의 세례
The Baptism of Jesus
사도행전 18: 24-28
유민용 목사
24 ○ 그 무렵, ‘아볼로’라는 한 유대인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에베소에 왔다. 그는 학식이 풍부하고, 성경에 두루 능통한 사람이었다. 25 그는 일찍부터 주님의 말씀을 배운 사람으로, 열심히 전도할 뿐만 아니라 예수에 관해서도 정확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26 아볼로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설교를 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27 그런 뒤, 아볼로가 아가야 지방으로 가고 싶어 하자, 신도들은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편지를 써 주어, 아가야 지방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따뜻하게 영접해 주도록 했다. 그리하여 아가야에 도착한 아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뭇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28 그것은, 아볼로가 회중 앞에서 유대인들의 말을 조리 있게 열정적으로 논박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힘 있게 증거했기 때문이다.(쉬운말 성경)
24 Meanwhile, a Jew named Apollos, an eloquent speaker who knew the Scriptures well, had arrived in Ephesus from Alexandria in Egypt. 25 He had been taught the way of the Lord, and he taught others about Jesus with an enthusiastic spirit[h] and with accuracy. However, he knew only about John’s baptism. 26 When Priscilla and Aquila heard him preaching boldly in the synagogue, they took him aside and explained the way of God even more accurately. 27 Apollos had been thinking about going to Achaia, and the brothers and sisters in Ephesus encouraged him to go. They wrote to the believers in Achaia, asking them to welcome him. When he arrived there, he proved to be of great benefit to those who, by God’s grace, had believed. 28 He refuted the Jews with powerful arguments in public debate. Using the Scriptures, he explained to them that Jesus was the Messiah.(New Living Translation)
비혼시대, 혼밥(혼자 밥먹기), 혼여행(혼자 여행하기) 등의 신조어가 오늘날 시대를 말해줍니다. 상대방을 맞추면서 살아가는 것이 불편하니 자신의 삶을 홀로 책임지며 살아가는 싱글라이프에 젊은이들의 공감이 더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부대끼며 그 안에서 서로를 배우고 성숙해 졌다면 오늘날의 시대는 모두가 혼자를 적응하는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동굴 증후군’은 비대면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회적 고립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서 안정감을 느끼다 보니 다시 사람들을 만나려고 할때에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생각들은 세례의 의미도 희석시킵니다. 세례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에 비유할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때 우리는 사랑을 확인하고 약속하고 싶어 합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세례는 회개의 표시이며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습니다. 매년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믿느냐고 문답을 하는 것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의 세례가 무엇인지 자세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에는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있습니다. 19장에서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며 에베소로 갔을때에 그 곳에서 몆 명의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도다” 그러자 바울은 그러면 “너희가 어떤 세례를 받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 선생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가르쳤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들은 바울의 설명을 듣고 즉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안수를 했습니다. 그때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으며, 그들은 방언과 예언을 했습니다. 이후 바울은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강론을 하게 됩니다. 물세례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차원이라면 성령의 세례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복음의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복음의 확신이 들때에 우리는 증거자로 살게 됩니다.
많은 성도들은 성령세례라고 하면, 현상적인 측면을 떠올립니다. 현상적인 것은 성령의 얼굴이지요. 성령충만한 기도를 할때에 방언과 예언 등을 경험합니다. 간절한 믿음으로 기도할때 주의 권능과 힘이 임하게 됩니다. 간절한 믿음이 없이는 이러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마치 풍선 안에 바람을 부는 것처럼 양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을 아시지요? 본질적인 부분이 비본질이 되고 비본질적인 부분이 본질로 둔갑될 때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성령충만을 말할때 흔히 일어나는 오해들입니다.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으면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슬픔이 변하고 기쁨이 충만한 현상이라고 믿습니다. 죄의 모든 유혹으로 부터 완전히 해방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령세례를 받고도 내 뜻대로만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성령의 얼굴은 일그러집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성령의 본질을 깊이 알아가야 하지요. 성령은 사람의 종교적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훈련을 통해서 신앙의 깊은 단계로 들어가 주의 말씀이 전생애를 인도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성령의 본질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여전히 성령님과 비대면으로만 만나고 나눔이 없다면 성령의 충만함에 흠뻑 젖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공동체속에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도록 돕습니다. 이 자리에도 인생의 기로에 선 분들이 계시다면, 성령님의 부드러운 초대에 응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전생애를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18장 24절부터는 3차 전도여행의 시작인데, 누가는 2차와 3차 전도여행 사이에 아볼로라는 사람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볼때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을 하면 어떻습니까? 어떤 인물일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누가는 바울의 2차전도여행을 기록한 후에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아볼로라는 사람은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아볼로의 정보를 줍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어려서 부터 헬레니즘 문화에 익숙한 학문적 도시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또한 학식이 풍부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많이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열심히 전도하고 예수에 대해서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아볼로가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아직은 불완전했다는 사실을 유추해 보게 됩니다.
1세기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의 베드로나 바울과 대등한 위치에 아볼로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아볼로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 영향력이 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교회 안에 세례로 인해서 파가 갈라졌는지, 인물의 영향력에 의해서 나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교회 안에 여러파가 있었습니다. 1세기 초기 기독교를 연구하는 성서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가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바울의 복음적 견해는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교우들에게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했습니다(고전 3:6) 그러나 여전히 나는 바울의 사람이다. 나는 아볼로의 사람이다 하는 사람은 육의 사람이라고 편지합니다.(고전 3:4)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한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몸됨’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당시 학식에 있어서 능통하고 성경을 많이 알았지만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몰랐던 것이지요. 오늘날처럼 인터넷이 없었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점차적으로 전파되기는 했지만 듣지 못한 지역도 있고, 시기적으로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때였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은 예부터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화가 뿌리 깊이 있기 때문에 초기 선교사들은 제사 문화를 우상숭배로 규정했어야 했습니다. 한편에서는 한국의 풍습을 일방적으로 폐지하고 바꾸는 것에 대해서 한국 교인들이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신중론을 제시하기도 했지요. 이처럼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은 모세의 전통을 완전히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고 기록한 것은 예수를 가르치면서도 예수의 부활, 그리고 40일 동안의 현현, 이어서 승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열려져야 합니다.
한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자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대법관이지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예수님께 찾아 온 것을 보면 신경 쓸 일도 있고, 주변에 눈치 볼일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 마음 안에 진리의 대한 갈망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사람들도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만 가지면 큰 폐해를 낳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도 예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선물 받은 책중에 미치 글레이저 (Mitch Glazer)박사가 쓴 ‘이사야 53장 해설서’ 라는 책이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한 랍비가 쓴 책입니다. 1894년 헝가리계 랍비였던 레오폴드 콘(Leopld Cohn 1862-1937)이 미국에 와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게 된 후 유대인들에 대해 목자의 심정을 갖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회를 만들게 됩니다. 이후에 미치 글레이저 박사가 이 선교회를 이어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어머니에게 이사야 53장을 읽어드렸답니다. 유대교인이었던 어머니는 나한테 신약 성경은 읽지 말라고 했는데, 글레이저 박사는 이사야서를 읽어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이사야 53장을 읽어드렸습니다. 어머니는 화를 내며 신약성경을 읽지 말라고 하는데 왜 자꾸 신약성경을 읽느냐고 했답니다. 글레이저 박사는 제가 방금 읽은 것은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것이라고 어머니께 말했다고 합니다.”
이사야 53장은 메시아가 오기 7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인데 여러분은 묵상하게 될때 누가 생각이 나십니까?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1-6)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티오피아 내시가 성경을 읽으며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그가 이사야서 말씀을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묻는 것을 시작으로 성경을 풀어줌으로써 예수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모세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는 사람만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면 내시는 부적합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내시와 같은 자들에게도 닫혀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사람, 모든 나라에게 열려진 것을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의 만남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세례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 시킬 수 없는 연약한 자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매일 매일 예수님 안에서 생겨나는 믿음의 의를 통한 거룩성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모든 일이 잘될꺼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달라지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집니다. 나에게 필요한 말씀의 구절만 적용하며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믿음의 지체들과 분쟁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여러 문제들로 분쟁할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약한 자들과 형제들을 배려하라는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왜냐하면 분쟁은 서로가 높아지려는 마음을 갖고 있을 때 발생합니다. 성육신(Incarnation)의 교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영광을 비우시고 십자가에서 수치와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하향성’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를 포기하고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나를 증명하는 방법을 배워나가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지구상의 수십억명중에 한 사람이 아니라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 여겨 주십니다. 그래서 한번 구원한 존귀한 자녀는 하나님의 손으로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맛을 보면 볼수록 삶속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울시대나 오늘날이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교리는 신론과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핵심인데 우리는 논리적으로 성육신의 교리를 다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조건 믿으라고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수천년 동안 기독교 교리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예수의 길을 따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었다면 이미 기독교 교리는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깨달음으로 믿어진 것입니다. 이것의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임이 확실합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증거자들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성경의 66권을 관통하는 주제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높은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육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낮은 자리를 향해 있나요? 아니면 높은 자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나요? 믿음의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영역일뿐입니다.
아볼로는 이 온전한 복음을 듣고 성령의 감동이 임하니까 자신이 전했던 이들에게 다시 온전한 복음을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로 복음을 전하러 갑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7 그런 뒤, 아볼로가 아가야 지방으로 가고 싶어 하자, 신도들은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편지를 써 주어, 아가야 지방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따뜻하게 영접해 주도록 했다. 그리하여 아가야에 도착한 아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뭇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28 그것은, 아볼로가 회중 앞에서 유대인들의 말을 조리 있게 열정적으로 논박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힘 있게 증거했기 때문이다.
27절에는 그리스도를 만난 성도들의 믿음의 태도가 보여집니다. 예수의 세례를 먼저 받은 평신도 브리스길라 부부는 어떻게 보면 목회자인 아볼로의 증거를 듣자 그의 부족함을 알아차렸지만 핀잔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친절하게 온전한 복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한 아볼로도 그 가르침을 겸손하게 배우며,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는 무능함을 깨닫게 됩니다. 전에는 자신을 증명해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증명해 내기 위해서 아가야 지방으로 갑니다. 기독교 변증은 내 마음을 전하는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입니다. 전에는 가르침을 통해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제는 예수만을 높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는이가 위대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물을 주는 이가 위대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심는 일이 힘드냐, 물을 주는 일이 힘드냐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자기의 주관대로 개인적인 성향대로 누가 위대한가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심는이도 필요하고 물을 주는이도 필요합니다. 수많은 교회의 일꾼들이 그렇게 걸어왔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 했을때 우리의 모든 행위는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내가 가진 것을 기준 삼게 될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소유이든, 지식이든, 믿음 생활에 있어서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우리 안에 교만은 자취를 감추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리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때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의 증인입니다. 심는 일도 물을 주는 일도 즐거운 일입니다. 즐겁게 성실하게 지속하다 보면 아름다운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라가게 하십니다. 삶이 분주하고 마음이 불편하면 심는일도 물을 주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증거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몇년전 제가 살고 있던 도시에 전기와 물이 끊겨서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때가 있었습니다. 자고 있는 두 아이를 안고 16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처음 3층까지는 아빠의 사랑으로 가능했는데 층이 오를수록 땀도 나고 아이들을 깨워서 걸으라고 할까, 쉬다 갈까, 수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따뜻한 팔이 저를 감싸고 곤히 잠든 아이들을 보니 저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작은 아이들의 존재가 감사하고 뭉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이 세상에서 수많은 일을 만나겠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랑하는 자녀들을 안고 묵직한 한발을 떼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먼저 걷고 있는 걸음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힘이 될수만 있다면 더 잘 걸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사랑에 집중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집중하며 16층까지 천천히 찬양을 부르며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냥 올라가도 숨이 차는데 두 아이를 안고 올라가니 점점 속도가 느려졌겠지요. 그러나 내가 안고 있는 두 아이의 무게가 짐이 아니라 사랑임을 느끼며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그런 걸음 아니겠습니다. 무거워도 힘들어도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하나님 안에 머물러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에도, 어느 곳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작은일이든 큰일이든 일상속에서 복음의 확신으로 담대함으로 살아가십시요.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연합하여 선을 이룰수 있는 귀한 과정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의 성숙, 공동체의 성숙, 가정의 성숙의 과정 가운데에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서 그 하나님 나라를 아름답게 살아내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령강림후 제 7주)
아름다운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 지지 않는다.
Beautiful People Do Not Just Happen
사도행전 18:18-23
유민용 목사
18 ○ 이런 일이 있은 뒤, 바울은 얼마 동안 더 고린도에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 신도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배편으로 수리아를 향해 떠났다. 그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과 동행했다. 그리고 항해를 하기 전에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그것은 예전에 하나님께 서원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남겨둔 채 혼자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과 토론을 벌였다. 20 그들은 바울에게 며칠만 더 있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바울은 거절했다. 21 그러면서 바울은 그들과 작별인사를 하며 약속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내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22 에베소를 떠난 바울은 가이사랴로 내려갔고, 거기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가서 형제들에게 인사한 후,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23 바울은 안디옥에서 얼마 동안 지낸 다음, 다시 안디옥을 떠나 갈라디아 지방과 브루기아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모든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쉬운말 성경)
18 Paul stayed in Corinth for some time after that, then said good-bye to the brothers and sisters and went to nearby Cenchrea. There he shaved his head according to Jewish custom, marking the end of a vow. Then he set sail for Syria, taking Priscilla and Aquila with him. 19 They stopped first at the port of Ephesus, where Paul left the others behind. While he was there, he went to the synagogue to reason with the Jews. 20 They asked him to stay longer, but he declined. 21 As he left, however, he said, “I will come back later, God willing.” Then he set sail from Ephesus. 22 The next stop was at the port of Caesarea. From there he went up and visited the church at Jerusalem[f] and then went back to Antioch. 23 After spending some time in Antioch, Paul went back through Galatia and Phrygia, visiting and strengthening all the believers.(New Living Translation)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독교라는 큰 이야기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법을 배우는 여정입니다. 성경을 믿고 날마다 묵상하는 일은 숨을 쉬듯이 지속하는 것입니다. 정말 말씀을 믿고 살아 간다면 변화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변화시키십니다. 왜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가? 인간의 욕망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정욕은 그대로 내버려 두면 점점 더 욕망의 손과 발이 향하는 곳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지켜가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이가 어릴 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아빠를 믿고 계속 페달을 밟다 보면 균형을 잡게 되고 잡았던 손을 놓아도 혼자서 자전거를 타게 됩니다. 아이는 아빠가 잡아 주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서 두려움을 이겨낸 것이죠. 주님이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고 계십니다. 성화의 삶은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선물이기는 하지만 믿음생활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아서 페달을 밟는 수고를 지속하지 않으면 거룩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힘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주위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의 마무리 단계에 있는데, 짧은 본문 안에 작별이라는 단어가 2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 평생 길 위에서 작별과 떠남의 여정을 살았던 바울의 걸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만남과 작별 그리고 떠나는 발걸음 안에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18 ○ 이런 일이 있은 뒤, 바울은 얼마 동안 더 고린도에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 신도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배편으로 수리아를 향해 떠났다. 그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과 동행했다. 그리고 항해를 하기 전에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그것은 예전에 하나님께 서원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1년 6개월 머물면서 함께 했던 교우들과 작별하고 떠납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극심한 박해나 소동을 피워서 어쩔 수 없는 작별이었지만 고린도에서의 작별은 다릅니다. 고린도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난 뒤에 아쉬운 작별이었습니다. 긴 선교 여행 중에 찾아온 여유와 평온을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적인 감정과 서운함은 뒤로합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영원한 이별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헤어짐의 현재가 아니라 다시 만남의 미래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매일의 삶과 작별하고 새 옷을 입게 됩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옷을 입는다고 해서 완전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존재 자체가 변화된 것이지 새옷을 입는 행위는 결과일 뿐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한 인격, 온전한 지성을 갖추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존재의 변화를 통해서 매일 새롭게 입혀 주시는 옷을 경험할 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항해를 하기 전에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습니다. 서원을 하는 것이죠. 나실인의 서원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하늘 나그네로 사는 것에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그리스도교가 종교로 인정받지도 못하던 시대에 유대인들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1세기 기독교의 상황은 그리스도교 종교가 정식으로 출발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이 법정에 가서 바울을 고소를 하는 것도 다 이런 상황이었음을 대변해 줍니다. 18절에 ‘이런 일이 있은 뒤’ 라는 말은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는 로마제국이 허용한 종교만 전할 수가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유대교가 아니라고 강조하며 바울의 말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식으로 고소했던 사건을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한지 몇개월 후에 아가야 지역에 갈리오라는 신임총독이 부임하게 됩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2절) 일반적으로 이렇게 총독이 교체되어 부임하면 민심을 얻기 위해 처음에는 민원을 많이 들어줍니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노리고 신임 아가야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자기들의 율법을 어겼다고 하면 로마 총독에게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로마제국의 국법을 어겼다고 고발합니다. 그러나 당시 아가야 지역 로마 총독이던 갈리오의 법정에서 바울은 죄가 없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불법이 아니니 복음을 계속 전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나중에 이 갈리오의 무죄 판례는 바울이3차 전도여행 중에 로마로 향하는 길을 열게 하는 놀라운 준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가야 총독으로 갈리오를 준비해 두신 것은 우연한 사건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이 로마에까지 전파되도록 하려는 예비하심이었습니다.
2차 대전 때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이라는 심리학자이면서 의사였던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옥중생활을 하면서 수험번호 외에 자신을 증명해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첫날 앞서 죽었던 포로가 입었던 옷을 받았는데 그 옷 주머니에서 나온 히브리어 성경 구절이 적힌 종이 조각이 나왔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전심으로 사랑하라.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영혼을 사랑하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죽어야만 나갈 수 있는 고통의 현장에서 말씀을 통해서 마음의 새 옷을 입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삶의 의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위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짜 위기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갈망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일제 식민주의 시대에 나라를 뺏앗겼을 때에도 군사독재 박해 속에서도 교회는 더 강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참 신비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말에 너무 친숙해 있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제자들은 자신의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합당한 자로 살아낸 것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멀리서 바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에 들린 쟁기를 들고 밭을 일궈야 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고난이 예견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막8:34) 때때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평안한 길을 뒤로하고 혼자 걸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며 하나님 앞에 홀로 설 때가 있었습니다.
출 34: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홀로 지어야 할 몫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홀로 있는 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주어진 그 몫을 주님과 함께 감당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친밀함으로 동행해 주십니다.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 잠시 머물고 사람들과 작별하며 의미심장한 말씀을 건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내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기 싫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을 환영하는 지역에서 더 오래동안 머물며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다 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2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반드시 돌아 올 것이라 말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의 3차 전도여행때에 3년 동안 에베소 지역에 머물며 사역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지금 주어진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돌보심과 은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내면의 나침반이 있어서 내가 머물고 싶은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향하신 방향으로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기도 하지만 배척을 당하기도 합니다. 바울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뜻을 이루는 것이 존재 이유이자 기쁨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환란을 당하게 될 때에는 찬양하고 기도했으며 속히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자신을 환영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돌아올 것이라 말하고 가던 길을 갈수 있었습니다. 가끔은 신앙의 길에서 그 목표가 사라진 것처럼 보일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희미해 보이고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 같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 마음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상대주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을 절대화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감정을 믿다가 우울감에 깊이 빠지고 절망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세상은 저마다 자기의 상처를 싸매기에 급급한 시대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바쁩니다. 그러나 나의 스토리를 써내려 가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의 스토리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십시요. 아름다운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실패도 해보고 낮은 자리에서 가난한 자의 마음도 느껴보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찾아보고 십자가의 복음이 내 삶의 전부라고 고백도 해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삶에서 십자가를 붙드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도 바빠졌습니다. 먹고 사는 것도 어느 정도는 편안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최고가 되고 싶어합니다. 모든 것이 풍성한 때를 지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편안함이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이유들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실 때에는 빈손으로 나아오십시오. 삶의 문제, 한숨, 풀리지 않는 어려움, 소유해야 하는 높은 목표, 불안한 삶의 이유들을 다 내려놓고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것을 온전히 내려놓지 않고는 바쁜 세상에서 십자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녁에 기도하러 이 자리에 나오면 작은 불빛이 비춰주고 있는 본당의 십자가가 보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이지요. 이 십자가로 많은 말을 하고 싶던 마음을 멈추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살아내고자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우리의 삶의 소유가 되는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천년전 예수님은 고난을 한몸에 지니고 비틀거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예수를 죽이려 할 때 고난의 종으로 인류 역사에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해도 십자가에 또 다시 달리셔야만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예수가 구원자 되심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은 강박적 불안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과 기쁨이 내면에 솟아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도 자꾸 불안하다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해 보십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갈망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이라는 세상속에서 건져 내시고 출애굽 공동체를 인도해 가셨습니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일 때에만 행군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막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처럼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주어진 하루 하루를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아가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건 사람들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기 전에 잠잠히 기도하고 걷다 보면 가장 아름다운 삶을 하나님은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가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 드라마라고 하는데요.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 였을 그대들에게…”
여러분, 지금의 시간이 그 어느때 보다 눈이 부시게 밝은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걷는 우리의 이 길을 통해 서로의 빛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안에서 살아내는 것. 삶으로 함께 한다는 것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믿음의 여정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산다는 것이 그저 감사한 오늘입니다. 한주도 우리를 부르시는 그곳으로 우리의 마음이 향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