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3. 2023 주일설교

(대림절 첫번째 주일)

기다림 시리즈 1

구원의 약속을 기다린 여인: 라합

The woman who was promised salvation: Rahab

여호수아 2:8-21

유민용 목사

8 ○ 정탐꾼들이 잠들기 전, 라합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그들에게 말했다. 9 “나는 주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두려움에 짓눌려 있습니다. 10 우리는 당신들에 대해서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주께서 어떻게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셨는지, 또 당신들이 요단 강 동쪽의 두 아모리 족속의 왕들을 어떻게 파멸시켰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11 그런 말을 들을 때에 우리의 심장은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정신이 나갈 지경입니다. 당신들의 주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2 ○ 그러므로 부탁합니다. 내가 이렇게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이제 당신들도 우리 집안에 은혜를 베풀어주겠다는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해 주십시오. 13 나의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식구들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죽지 않도록, 우리 생명을 구해주십시오.” 14 정탐꾼들이 그 여인에게 다짐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당신의 생명을 지켜 드리겠소. 당신이 우리가 한 일에 대해 입을 다물어 준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 우리는 당신에게 성심껏 우리의 성의를 표할 것이오.” 15 ○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있는 집이어서, 그녀는 창문 밖으로 밧줄을 늘어뜨려 그들을 아래로 내려가게 해주었다. 16 여인은 그들에게 말했다. “추적자들에게 발각당하지 않도록 산으로 올라가십시오. 사흘 동안 거기에 꼼짝 말고 숨어 있다가, 추적자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에 당신들의 갈 길을 가도록 하십시오.” 17 정탐꾼들이 여인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한 맹세는 꼭 지키도록 하겠소. 18 우리가 이 땅으로 들어올 때에, 당신이 우리를 탈출시켜 준 창문에 진홍색 밧줄을 매어 두시오.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과 온 가족과 친척을 모두 당신의 집에 모여 있게 하시오. 19 누구든지 당신의 집 밖으로 나가서 변이라도 당하면, 그건 그 사람의 책임이지 우리의 책임이 아니오. 그러나 당신과 함께 집 안에 있는 사람이 혹시 변을 당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소. 20 하지만 당신이 우리에 대해서 발설한다면, 지금 우리와 맺은 맹세는 아무런 효력이 없게 된다는 걸 명심하시오.” 21 그러자 라합은 그들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하고, 그들을 보냈다. 그들이 간 뒤에, 라합은 진홍색 밧줄을 창문에 매달았다. (쉬운말 성경)

대림절의 영성은 기다림입니다. 대림절기를 통해 성도들은 곁에 계신 주님을 더 깊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 마음을 닮기 원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한 자리에 주님의 마음으로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저의 스톨의 색깔도 보라색으로 바뀌었습니다. 보라색은 정결한 마음과 새마음을 상징합니다. 이제 대림절 소망의 촛불이 켜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하신 이 촛불은 하나님 나라의 첫번째 빛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구원의 약속을 기다린 한 여인이 나오는데 이방인 출신이었으며 기생의 신분임에도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라합이라는 여인이 어떻게 기생이 되었는지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른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관, 구조적인 차별과 편견, 출신에 따른 경계선입니다. 이 경계선 사이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간극, 신앙의 보수와 진보, 정치적으로는 좌파나 우파의 성향으로 나눠집니다. 성향이 다를 수 있지만 극단적으로 치우칠수록 그 경계선에 위에 선 사람들의 삶은 참 고달픕니다. 경계선에 위에서 균형을 잡고 걷는 길은 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중심부에서 밀려나 경계선 위에 있던 이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소외되고 헐벗은 이들을 품어 주셨고, 다름의 차이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방인들을 용납해 주셨습니다. 이 신비의 은총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주님의 ‘오심과 다시 오심 사이’에서 어려운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너무 쉽게 잊어 버리지만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본향집을 찾아가는 길과 방향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대림절기는 서로 어울려 사는 의미를 전혀 다르게 보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는데 새롭게 눈을 뜬 사람들은 한 형제 자매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본문은 라합의 집을 소개하는데 ‘그녀의 집은 성벽 위에 있었다’라고 기록합니다.(15절) 당시 요새였던 여리고 성은 아래 쪽에 돌로 된 기초 성벽을 가지고 있었고, 거대한 토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습니다. 이 벽의 높이가 4-5미터의 높이였습니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기초 성벽 안쪽으로는 내벽이 있는데 외벽에 비해서 14미터나 높았습니다. 여리고 성은 당시에 이중 벽으로 되어 있던 요새인 것이지요. 라합의 집은 도성 안에 있던 것도 아니고 도성 밖도 아닌 이중벽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라합은 경계선에서 거주하며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아마도 성안의 여인들은 창녀로 살아가는 라합을 조롱하기도 하고 멸시하기도 했을 겁니다. 라합은 남자들의 멸시와 인격적 무시를 당하는 삶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스라엘 군대가 요단강 동편에서 아모리 왕들을 격파했다는 소문이 이미 가나안에 까지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여리고 성안에 사람들은 바짝 긴장하고 낯선 사람들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두려움에 짓눌려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에 대해서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주께서 어떻게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셨는지, 또 당신들이 요단 강 동쪽의 두 아모리 족속의 왕들을 어떻게 파멸시켰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에 우리의 심장은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정신이 나갈 지경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곧 가나안으로 진격할 것이란 사실이 명백했기에 여리고 성을 비롯하여 가나안 일대의 성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경계령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여리고 왕은 성안의 공격을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기생의 집에 유숙했던 것입니다. 대략 3500백년전이니까 당시 술집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장소였을 것이고, 술을 마시며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정보를 얻는 장소이기도 했겠지요. 여리고 성을 살피러 온 정탐꾼은 성 안의 백성들에게 정보도 얻어야 했고, 군사적으로는 자신들의 몸을 숨기기에 적절한 곳을 찾아 라합의 집에 유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읍안에 수상한 사람들에 대한 보고가 여리고 왕에게 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그 사실을 2장 2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리고 왕에게 이런 보고가 들어왔다. 몇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늘 밤 이 땅을 정탐하려고 왔습니다.”

성경속으로 들어가 보면 당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여리고 왕은 라합의 집으로 군사들을 보냈고 이제 정탐꾼은 들통나면 죽게 될 것입니다.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라합이라는 여인이 2명의 정탐꾼들을 발견되지 않도록 지붕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여리고 군사들이 도착하자 그들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경로를 알지 못하나 예상되는 방향으로 급히 따라가면 잡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건 보고였습니다.

라합이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살려준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라합은 오고 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들었습니다. “당신들의 주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구원을 향한 기다림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호수아가 보낸 2명의 정탐꾼이 라합의 집에 유숙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을 보게 됩니다. 복음은 어떤 경로를 통해 듣든지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의 생명을 살리는 복된 소식입니다. 라합의 사건은 열린 마음을 지닌 이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그녀는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한 여인이 됩니다.

(1) 하나님의 구원은 기다리는 자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구원은 비천함과 풍요함에 있지 않습니다. 라합이 비록 술을 팔고 자신의 몸을 파는 비천한 인생이었지만 구원을 기다린 여인에게 하나님은 정탐꾼들을 보내셨습니다. 성경은 그의 행동을 믿음으로 인정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에 라합과 그녀의 가족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복음의 수용은 이처럼 뜻밖의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멸시와 소외를 당하고 죄인이라 취급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복음이 수용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영적교만은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지만 믿음의 겸손함은 영적인 흐름을 타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됩니다. 구원역사 뒤에는 인간의 선행과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매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지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고, 성도는 믿음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기 38년 전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발길을 되돌렸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보낸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불신앙적인 보고로 인해서 20세 이상의 성인이 모두 광야생활을 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파견되었던 정탐꾼들의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보고가 계기가 되었습니다.(민 13) 그러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음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제적 경험으로 체득했습니다. 이제는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파견하는 위치에서 2명만 보냈다는 것은 군사적 전략도 있지만 구원이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공간의 영역에 있어서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나라와 나라를 넘고, 일터와 가정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거에는 교회의 장소도 제한적이었지만 이제는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으면 지리적 공간을 넘어 교회의 모임을 할 수 있습니다. 긴밀하게 연결만 되어 있으면 경계선을 넘어서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중요한 마음은 기다림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은 우리의 모든 공간을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2) 하나님을 아는 믿음은 들음에서 났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는 것이고, 전인격적인 삶을 통한 믿음의 응답입니다. 라합은 소문만 듣고도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10절을 보면 ‘우리는 당신들에 대해서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정탐꾼이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라합을 설득한 것이 아니라 라합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들의 입으로 들었을 때에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지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 6:3) 매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듣기 위함입니다. 설교를 듣는 이유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깊어지기 위함입니다. 설교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일상에서 잊지 말라고 지속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더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았고,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두려운 마음이 변하여 경외심이 된 것입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마음이 약해지기도 하고 완악해지기도 합니다. 여리고 성의 사람들처럼 두려움에 짓눌리고 불안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가운데 자신의 신세만 한탄하며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믿음이 부쩍 자라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더 실제적으로 더 확실하게 경험하게 될 겁니다. 신앙은 저절로 깊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영적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대한 인간의 인식과 이해는 모든 지식을 동원한다고 해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라합이 낯선 이스라엘 정탐꾼을 환대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신앙고백이었습니다.

(3) 기다림은 약속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약속은 ‘묶을 약, 묶을 속’으로 이뤄진 단어입니다. 마음을 굳게 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약속의 말씀이지요. 구약은 오실 주님에 대한 약속이고, 신약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약속들로 가득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약속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라합은 정탐꾼에게 나와 내 부모 형제를 죽음에서 건지겠다는 구원의 증표를 요구합니다.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구원의 증표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으로 들어올 때에, 당신이 우리를 탈출 시켜 준 창문에 진홍색 밧줄을 매어 두시오.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과 온 가족과 친척을 모두 당신의 집에 모여 있게 하시오. 누구든지 당신의 집 밖으로 나가서 변이라도 당하면, 그건 그 사람의 책임이지 우리의 책임이 아니오. 그러나 당신과 함께 집 안에 있는 사람이 혹시 변을 당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소…그러자 라합은 그들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하고, 그들을 보냈다. 그들이 간 뒤에, 라합은 진홍색 밧줄을 창문에 매달았다”

진홍색 밧줄은 라합과 정탐꾼이 맺는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약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에 임하게 됩니다. 언약적 삶은 인생의 소유가 누구인지를 매일 확인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시며 ‘새언약’을 말씀하셨습니다. 새 언약은 지친 이들의 품이 되어 주시고, 상처받은 이들을 감싸 주십니다. 진홍색 밧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상징입니다. 이 언약은 생명이 걸린 중대한 일이기에 거룩한 성도는 반복적으로 새언약을 확인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세상속에서 씨름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내게로 와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배우라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언약백성은 마음의 자리에 누군가 앉을 수 있는 여유를 지니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번주 새벽예배 오늘의 양식에 실린 예화입니다. “아홉 살 난 댄 길은 가장 친한 친구 아치와 함께 같은 반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갔습니다. 그러나 생일을 맞은 친구의 어머니는 아치를 보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의자가 모자라”라고 하며 안 된다고 했습니다. 댄은 같이 온 흑인 친구 아치를 앉히고 자기는 바닥에 앉겠다고 했지만 그 어머니는 계속 거절했습니다. 낙심한 댄은 둘이 가져온 선물을 친구 어머니에게 주고 아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댄의 가슴에는 친구가 문전박대 당한 것이 아픈 상처로 남았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선생님이 된 댄은 그의 교실에 늘 빈 의자 하나를 둡니다. 학생들이 이유를 물으면, “교실에 언제나 누구든 와서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잊지 않고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어릴적 자신의 친구가 문전박대를 당한 모습을 보고 아픈 상처를 받은 댄은 성인이 되어 선생님이 되었을 때 교실에 누구든지 앉을 수 있는 빈 의자를 두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빈 의자를 남겨 놓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주님의 계실 자리가 있어야 하고, 서로가 함께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고백과 실천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 자라가라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보혈이며, 죄가 없으신 분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언약의 피입니다. (마26:28)

교회 같은 가정, 가정 같은 교회는 가정과 교회의 문패에 그리스도가 흘리신 언약의 붉은 줄이 달려 있는지 확인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이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사명자의 자리를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고 인내하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약 5:11)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 하셨습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은 막연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대적 영적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에 여러분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고전1:8) 대림절기를 시작하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에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수 있도록 기다리며 기도하는 소망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1.26. 2023 주일설교

(성령강림후 마지막 주일)

위대한 기적

A Great Miracle

사도행전 28:1-10

유민용 목사

1 우리가 무사히 해변에 상륙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곳이 멜리데 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섬사람들은 우리를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고 날이 추웠기 때문에, 그들은 불을 피워 주면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3 바울이 마른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아다가 불 속에 넣었다. 그런데 나뭇가지 속에 있던 독사 한 마리가 뜨거운 불기운에 놀라 튀어나오더니, 바울의 손에 착 달라붙었다. 4 섬사람들은 독사가 달라붙은 것을 보고 서로 수군거렸다. “저 사람은 살인자가 틀림없다. 바다에서는 살아났지만, 정의의 여신이 그 사람을 그대로 살려두지 않는구나.” 5 그러나 바울은 그 뱀을 불 속에 떨어뜨렸고,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6 섬사람들은 바울의 몸이 이내 부어올라 당장 쓰러져 죽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생각을 바꾸어,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다. 7 ○ 해안 가까운 곳에는 그 섬의 추장인 보블리오가 소유하고 있는 농장이 있었다. 그가 우리를 그리로 초대해서, 사흘 동안이나 친절하게 대접해 주었다.
8 그때 마침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고열과 이질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었다. 바울이 가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손을 얹어 낫게 해주었다. 9 이런 일이 생기자, 섬 안에 있는 병자들이 앞다투어 바울을 찾아왔고, 병자들은 모두 고침을 받았다. 10 섬사람들은 우리를 극진히 대접해 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그 섬을 떠날 때는 여행하는 데 필요한 온갖 물건들을 배에 실어 주었다. (쉬운말 성경)

오늘은 성령강림후 마지막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 스물여섯번째 주일이 지나고 나면 교회력으로는 한해가 또 다시 시작됩니다. 12월 첫째 주일이 한해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순환은 매년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고, 사순절 기간에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며, 부활주일을 거쳐 승천하신 주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26주 동안 성령강림절기로 보내게 됩니다. 예수님 생애에 대한 주기는 우리에게 예수의 옷을 입혀 주고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생애 사이클에 삶을 조율해 나갈 때 그리스도와 한몸의 원리로 연합되어지게 됩니다.

지난 주일 바울과 그 일행은 죽음의 유라굴로 강풍을 만나 갈 방향을 잃어 버린채 800km를 표류했습니다. 14일이 지나고 난 후 아침 그들이 타고 있던 배가 한 섬에 상륙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풍랑에 의해서 800km를 표류한 배가 로마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있는 멜리데 섬에 걸렸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멜리데 섬 근처 뻘에 배 앞부분이 걸려서 배가 파손되자 수영할 수 있는 사람들은 먼저 헤엄을 쳐서 육지로 나가고 이후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과 부조물을 의지해 헤엄쳐 지상으로 나왔습니다.

인생이 그렇지요. 풍랑을 만나고 역경속에 놓여 질 때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막연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오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믿음의 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고 부르심을 따라 응답하며 믿음으로 걷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다 한 가운데 항해하는 것 같을 때에도 믿음으로 부르심에 응답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해도 달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살 소망 조차 잃어 버렸던 이들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은 배가 파선 되는 위기속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게 육지에 상륙했으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이끄심을 알게 해 줍니다.

2절을 보면 때마침 비가 오고 날이 추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가 11월이니까 겨울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 낮은 기온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노년의 때가 되어 육체가 쇠약해진 바울을 비롯해 겨울 바다를 헤엄쳐서 상륙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불이었습니다. 누가는 그 섬에 살던 사람들이 불을 피워 주면서 친절하게 대해 주며 맞이해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어찌 보면 276명은 배가 난파되어 구조된 난민들입니다. 14일 동안 먹지 않았으니까 몸은 극도로 쇠약해 져 있었을 것이고, 몸에 비축했던 당분도 바닥이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어진 환경속에서 섬에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 통해서 환대를 받게 하시고 3개월이라는 시간동안 바울에게 쉼을 주십니다.

(1) 환대의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갑자기 몇 백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섬에 상륙했다면 경계하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2023년 세계난민의 날 국제구조위원회에서는 유엔난민기구(UNHCR)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전 세계적으로 난민들이 많아져서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된 이주민이 1억 1천만명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인데요. 아무래도 계속되는 전쟁과 여러가지 전염병으로 인해 세계경제도 불안정하다 보니까 안타깝게도 안전을 찾아 헤매는 난민들이 환영 받지 못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경쟁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현대사회속에서 낯선 이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는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섬사람들이 보여준 모습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게도 인상 깊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구조된 사람들을 환대했던 섬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믿음의 태도는  세상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구원은 자기중심적 죄의 뿌리가 뽑히고 하나님의 사랑에 다시 뿌리 내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내가 원하는 것만 요구하지만 믿음이 성숙해 지면 나만 옳다고 여기는 생각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게 됩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말하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게 할테지만 기적의 시작은 환대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환대하는 사람입니까? 경계하는 사람입니까? 주님은 연약한 우리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시고 두팔로 감싸주심으로 십자가를 참으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후 바울을 통해서 놀라운 기적과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3절을 보면 바울이 주변을 다니며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섬사람들이 피워 놓은 불 속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었습니다. 불에 내려 놓을 때 나뭇가지에 숨어 있던 뱀이 뜨거우니까 튀어 오르며 바울의 손을 문 것입니다. 그 뱀은 분명히 독사였습니다. 섬 사람들은 독사에 물린 바울이 살인죄를 지어 정의의 여신의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죽을 때만 기다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바울에게 아무런 이상도 나타나지 않자 섬사람들은 바울을 신으로 오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제와 다르고 오늘이 다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바라보고 믿고 있는지에 따라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섬에서 독사의 물린 사건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하나님의 사람 바울을 주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 일 후에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섬의 가장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에게 까지 알려지게 됩니다. 보블리오는 친절하게도 사흘씩이나 자신의 집에 유숙할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독사에 물린 사건으로 인해서 섬 전체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에서 뱀은 인간의 원죄를 가져 오게 한 간교한 동물입니다. 죄의 기원도 뱀이 간교함으로 인간을 미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뱀을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뱀은 피조물 가운데 한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영리함을 선물 받은 피조물이었는데 슬기로움에서 간교함으로 변질되어 하나님의 선물을 악용한 것입니다. 멜리데 섬에서 뱀은 오히려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해주는 도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아니하며..”주신 권세를 기억해 보면(막 16:18)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이끌릴 때에 주께서 주신 권세를 성취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선과 악의 양면성이 누구나 존재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할 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권고하셨지요. 뱀처럼 슬기롭게 세상속에 살아가며 비둘기처럼 거룩함을 더하라는 뜻일 겁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의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자 하나님은 불뱀으로 그들을 치셨고, 구리뱀을 만들어 쳐다보는 자들을 낫게 하십니다. 구리뱀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예표하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날 죄악된 세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주의 피로 씻김을 받게 됩니다. 지친 마음을 위로 받게 되고요. 그 사랑은 바닷물과 같아서 평생을 마셔도 마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회복될 때까지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마치 마음의 성전에 새로운 가구가 들어서는 것과 같이 새로운 마음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섬기고 환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도들에게는 ‘독(毒)도 약(藥)이 됩니다. 독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잘 활용하여 약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벌의 침은 독이 있지만 봉독을 소염 진통제로도 사용하고, 그 안에 멜라틴이라는 성분은 혈액순환과 면역기능을 강화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뱀에 있는 독에서 추출한 ‘캡토프릴’도 고혈압 치료제로 사용한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독은 무엇일까요?

토마스 머튼은 ‘현대사회에서 돈은 성령이 교회에서 차지해야 할 역할을 악마적으로 찬탈해 버렸다’라고 했습니다. 돈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협할 수 있는 어두운 면과 좋은 면인 양면성을 다 지녔습니다.

돈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돈의 풍족함은 신앙생활을 잘했다라고 하는 축복의 표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대상은 언제나 가난하고 상처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뜻은 돈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었을 때에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돈의 힘을 거부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 힘은 우리를 사로잡는 영적인 힘이고, 죄의 유혹으로 끌고가는 힘입니다. 인간은 경제적인 사회 구조를 벗어나서 살아 갈수는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출세를 하고 공적인 위치에 있다면 그 이유는 부와 권력까지도 선한 영향력을 위한 일로 사용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바울은 배고픔과 풍족함이라는 모든 환경에서 만족하는 비결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땅에서 재산, 후손을 얻었지만 그는 여전히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이스라엘 자녀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어 들일 때 하루 먹을 분량 이상의 것은 썩게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매일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는 법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물질적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뢰를 배워가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격려 해야 합니다. 성도 간의 교제 안에서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이 하나님의 품을 느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노동을 통해 재정을 채워 가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며 감사를 배우는 것입니다. 매일밤 뒤척이며 잠못 이루던 날들을 보낸 이는 아침에 일어나서 잠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일은 하나님과 깊어지는 시간이 됩니다.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되어 간다면 이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믿음이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3) 기적은 값없이 받은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멜리데 섬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신앙은 미신적이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뱀에 물렸으니 신에게 벌을 받는 자로 여기고 몸이 이내 부어올라 당장 쓰러져 죽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자 생각을 바꾸어,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울을 숭배했다는 언급은 없는 것으로 보아 바울이 신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여겼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소문이 멜리데 섬의 추장이던 보블리오에게 까지 알려졌던 것입니다.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의학적으로 고열과 이질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던 점을 감안해 볼 때에 매우 정확한 진단이었을 것입니다. 의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이 병을 쉽게 치료하지만 당시에는 이질이 걸린 환자로 인해 세균이 전염되어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생명을 잃게 되는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병들어 있는 보블리오 아버지에게 겁 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가갑니다. 고열과 이질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는 것을 알고도 손을 얹고 기도한 것은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병에서 치유된 소식은 온 마을에 삽시간에 퍼졌을 것입니다. 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자신들의 병도 고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로 가는 길에 거쳐가는 작은 섬이었지만 복음이 필요한 그곳에 바울을 보내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병에 대한 이유를 묻지도 않고 기도해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결과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는 문화속에 있습니다. 결과에 따라서 믿음도 평가합니다. 믿음을 설명하려고 하다 보니까 원인을 규명하게 되지요. 그런데 세상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예기치 않은 문제 앞에서 한결같이 질문합니다. 주님,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부족하고 잘못된 일들을 밝히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인해 섬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마음 한켠에는 소외된 마음이 있었을텐데 바울의 치유사역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에게 찾아온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줍니다. 이것이 다시 한해를 살아가기 위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권세입니다.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믿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멜리데 섬에서의 뱀에 물린 사건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말씀해 줍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었던 보볼리오가 멜리데의 섬에 세워진 바울 기념 교회의 최초 감독이 되었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멜리데 섬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예배를 드리던 장소인 지하 묘지 카타콤(Catacomb)’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말타섬에는 90%가 넘는 인구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삶의 위기는 단순히 시련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값없이 받은 그 은혜를 전하는 자의 삶은 나의 만족과 유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척박한 삶의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강절기를 보내게 되는데 성탄의 기쁨을 사모함으로 기다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마쳐졌지만 이제부터는 각자에게 허락하신 거룩한 사명으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실 사도행전 29장을 써 나가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은혜를 만나게 하셨지만 이제 다음의 역사하심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부어지는 기적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기적의 주인공이 바로 여러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