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2023 주일설교

(대림절 세번째 주일)

기다림 시리즈 3

아름답고 감동적인 고백의 이야기 :  룻

The beautiful and touching story of confession: Ruth

룻기 1:1-5, 14-18

유민용 목사

1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절, 그 땅에 기근이 크게 든 적이 있었다. 그래서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남자가 기근을 피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떠났다. 2 그 남자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아내는 ‘나오미’이고, 두 아들은 각각 ‘말론’과 ‘기룐’이었다. 이들은 유다 베들레헴 출신으로, 에브랏 집안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모압 지방에서 살았다. 3 그러던 중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남겨둔 채 먼저 세상을 떠났다. 4 그리고 엘리멜렉의 두 아들은 모압 여인들을 아내로 맞았다. 큰며느리의 이름은 ‘룻’이었고, 작은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였다. 그들이 모압 땅에서 10년쯤 살았을 때, 5 말론과 기룐도 세상을 떴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여의고, 홀로 남게 되었다…

14 두 며느리는 다시 소리 높여 울었다. 그런 다음, 둘째 며느리인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 곁을 절대 떠나려 하지 않았다. 15 ○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다. “얘야, 네 동서는 자기 동족들과 자기 신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니? 너도 어서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 16 룻이 말했다. “저에게 돌아가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저는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함께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함께 머물겠어요. 어머님의 동족이 제 동족이고, 어머님이 섬기시는 하나님이 제 하나님입니다. 17 어머님이 눈 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을 감겠어요. 어머님 곁에 묻히겠어요. 주께서 설령 제게 심한 벌을 내리신다고 해도, 저는 어머님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전 어머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18 나오미는 룻이 그토록 자기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쉬운말 성경)

오늘 우리는 세례식을 하게 됩니다. 세례 받는 이들은 이제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의 여정을 걷게 될 것입니다. 세례는 신앙세계 밖에서 외로움의 자리를 벗어나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처음에는 교회 문화가 낯설고 익숙치 않지만 신앙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지체들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환대를 경험하며 믿음이 깊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례 받는 모든 이들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고백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과 동행해 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입니다. 우리는 신앙 여행의 동반자로 오늘 세례 받는 이들의 믿음이 더 깊어지도록 함께 기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먼저 된 자들의 책임과 의무입니다. 유아세례를 받는 자녀들은 축복의 기회를 얻은 자녀들입니다. 믿음의 부모와 함께 신앙공동체에서 자라갈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가정에서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속에서 태어나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 은혜가 덧입혀 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여인은 룻입니다. 룻기서는 룻이 모압여인이라는 사실을 여러차례 강조하며 밝히고 있습니다. 총 4장으로 구성된 룻기서는 신앙생활을 처음 하시는 분들이 읽어도 신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있었던 여인입니다. 성경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보여 줍니다.

룻이라는 여인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녀의 확고한 믿음의 고백은 외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살아갈 소망과 바른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1)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1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절, 그 땅에 기근이 크게 든 적이 있었다. 그래서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남자가 기근을 피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떠났다. 2 그 남자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아내는 ‘나오미’이고, 두 아들은 각각 ‘말론’과 ‘기룐’이었다. 이들은 유다 베들레헴 출신으로, 에브랏 집안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모압 지방에서 살았다. 3 그러던 중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남겨둔 채 먼저 세상을 떠났다. 4 그리고 엘리멜렉의 두 아들은 모압 여인들을 아내로 맞았다. 큰며느리의 이름은 ‘룻’이었고, 작은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였다. 그들이 모압 땅에서 10년쯤 살았을 때, 5 말론과 기룐도 세상을 떴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여의고, 홀로 남게 되었다.

룻기서는 유다 지방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으로 시작됩니다. 엘리멜렉의 가족은 베들레헴을 떠나서 모압 땅으로 이주를 합니다. 한 가정이 잘 살아 보려고 꿈을 안고 이민을 갔는데 외국땅에서 나오미는 남편 엘리멕렉을 잃게 됩니다. 남편의 죽음 이후 나오미의 두 아들들은 어머니의 삶의 전환을 위해서였을까요? 두 아들 모두 모압 지역에 있는 이방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큰아들과 결혼한 며느리가 성경책 제목인 룻이라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10년쯤 지났을 때 나오미의 두 아들 마저 죽게 됩니다. 이때 나오미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성경해석자들은 엘리멜렉 가문의 불행이 하나님의 땅 유대지역 베들레헴을 떠나서 이방나라 모압으로 이주한 결과라고 보기도 하는데 사실 성경은 불행의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말씀을 대하고 기도하면서 사는 삶을 산다면 남의 삶의 이야기와 불행을 쉽게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시대에도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나오미는 다시 역이민을 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여인 두 며느리들에게 이제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을 종용합니다.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와 동행하고자 하는 결심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에게 익숙했던 모압땅과 모압의 신, 평생 자라며 익숙했던 문화를 포기해야 하는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가는 길은 새롭고 낯선 지역으로 가는 모험인 것입니다. 믿음의 모험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떠나야 합니다. 익숙한 곳을 떠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안고 가는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제 주님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이 결심은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은혜 가운데 깊은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 17절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늘문이 열리고 성령께서 자기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증인으로  증언하는 사역을 감당하실 때에 요한에게 세례 받았던 세례식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으니 기독교에서 세례는 참 중요한 예식입니다. 세례의 본질이 마음의 변화라고 한다면 세례식은 앞으로 믿음의 여정에서 주의 사랑과 신비를 담아 내기 위한 그릇인 셈입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서 익숙했던 옛삶을 청산하고 새삶을 얻는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자녀를 키울때에 아이의 모습을 우리는 끊임없이 사진과 영상으로 남깁니다. 그때의 순간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서 아이의 사랑스러움과 소중함을 간직하려고 합니다. 아이가 처음 말을 했을 때, 처음 걸었을 때, 처음 이유식을 먹었던 순간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는 사회로 한발 한발 내딛게 되고 어느 순간이 되면 부모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성장입니다. 사랑스럽다고 아이의 시절에서 성장이 멈추면 안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으로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16 룻이 말했다. “저에게 돌아가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저는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함께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함께 머물겠어요. 어머님의 동족이 제 동족이고, 어머님이 섬기시는 하나님이 제 하나님입니다. 17 어머님이 눈 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을 감겠어요. 어머님 곁에 묻히겠어요. 주께서 설령 제게 심한 벌을 내리신다고 해도, 저는 어머님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전 어머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18 나오미는 룻이 그토록 자기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룻의 이 고백을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바꿔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에 우리도 함께 가고, 예수께서 머무시는 곳에 우리도 함께 머물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백성을 주께하듯 섬기겠습니다. 주께서 나의 백성이라 부르는 형제와 자매는 우리에게도 사랑하는 형제 자매입니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앞으로 함께 지고 따를 것이며, 예수께서 앉아 계신 하늘보좌를 지금부터 영원까지 바라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땅에서 살아 내겠습니다.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주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고백이 삶속에서 저절로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시간 간절하게 한번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인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장을 경험합니다.

룻은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따라 낯선 공동체 안으로 들어 섭니다. 유대 풍습과 문화가 룻에게는 낯선 것들일테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낮춰보는 문화였는데, 모압 여인으로 유대공동체로 들어가는 것이 고생일수도 있었습니다. 합리적으로 보면 룻이 모압 땅에 머무는 것이 더 쉬운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룻기 1장 14절을 개역개정으로 보면 ‘룻은 나오미를 붙좇았더라’고 기록합니다. ‘붙좇았다’는 ‘다바크’라는 단어인데 연합한다는 의미이며, 전인격적인 삶으로 함께하다라는 뜻입니다. 나오미가 볼때에도 어떤 인생이 펼쳐질지 모르고 눈에 보이는 보장된 것이 없었는데 시어머니인 자신을 믿고 발걸음을 떼는 룻을 책임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먼저 된 자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눠 주었습니다. 낯선 문화속으로 들어가 적응해 가는 나오미의 가르침을 룻은 순종함으로 따릅니다. 믿음은 개인의 회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 관계속에서 더 많은 배움을 얻게 됩니다. 공동체는 우리 안에 부족한 모습을 보게 해주기도 하고, 서로를 지지해 주고 격려 해주며 성장시켜 줍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게 될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생활은 참 중요합니다.

첫째는 기도생활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도하며 믿음이 견고해 집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인격적 관계에서 가능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될수록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말씀생활입니다. 시편 119편 10절을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둔 우리의 마음을 밝히 비춰 주십니다. 왜 사람들이 죄의 길, 욕망의 길로 가면서도 깨닫지 못합니까? 사랑의 빚 진자임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사랑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지속적으로 깨닫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거칠어 지고 메말라 지는 것입니다.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을 함께 이뤄가는 자리이며 개개인의 마음안에 있는 외로움의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특별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삶은 너무도 치열합니다. 걱정과 근심은 끊이질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안한 자아를 만나는 시대입니다. 세상의 풍조는 거대한 바다처럼 우리의 믿음을 요동치게 하고 공동체로 부터 밀려나게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공동체를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믿음의 방향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3) 룻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우리 모두는 고국을 떠나 외국이라는 땅에서 믿음의 모험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자기 한계에 부딪히기도 하며 수많은 인내와 아픔의 시간을 달려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믿음의 길을 이민 땅에서 절실하게 만나 인생이 변화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반복되는 생활속에서 안전하고 평탄한 길만 찾다 보니 내 신앙의 자리도 예전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분도 있으시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제자의 삶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불행한 인생속에서도 믿음의 고백으로 찬란한 소망의 여인이 된 룻처럼, 참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관심을 갖어야 합니다.

룻기의 역사적 배경은 사사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에는 사람마다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부르짖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멈추지 않으시고, 우연처럼 주어지는 일상의 삶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룻의 이야기는 이름없는 들풀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말해 줍니다. 현실의 불빛만 보고 주저한다면 창조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의 빛을 못 본채 인공빛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때에 죄와 사망의 삶으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하는 일은 그 고백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결단입니다. 그러나 그 삶은 철저하게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합니다.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속에서도 한걸음 한걸음 발을 내딪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속에 하나님의 뜻을 펼쳐 나가십니다. 이스라엘에는 친족의 대가 끊기게 되면 대를 이어 주어야 할 ‘고엘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룻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게 된 여인임을 알려 줍니다. 나오미 가문에 기업무를 자로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삼고, 오벳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오벳은 훗날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습니다. 즉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룻이 모압에 머물렀다면 이 일       은 일어 날수 없었습니다. 룻과 나오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인생이었지만 조각난 부분들을 하나씩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보게 합니다

룻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고, 믿음의 공동체인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믿음의 여정은 우리가 참여하기 전부터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오는 룻의 삶은 조각난 인생이었지만 하나님은 조각난 부분들을 하나로 묶어서 회복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주님을 따라 주께서 지으신 세계속으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알게 하시고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 낯선 길을 걸었던 룻처럼 간절함으로 이 자리에 나온 지체들을 따뜻하게 환대하여 아픔의 자리를 대신해 주고, 살아갈 공간을 허락해 주는 아름다운 교회와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12.10. 2023 주일설교

(대림절 두번째 주일)

기다림 시리즈 2

이제 만나러 갑니다 : 수가성의 여인

On the way to meet you : Village of Sychar Woman

요한복음 4:6-14

유민용 목사

6 이 동네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고, 예수께서는 여행길에 피곤하셨으므로, 그 우물가에 앉아 쉬고 계셨다. 때는 낮 12시 무렵이었다. 7 ○ 그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오자,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을 거셨다. “나에게 물을 좀 주겠소?” 8 (당시 제자들은 모두 음식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으므로,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께 대답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저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 예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셨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사를 알고, 또 당신에게 물을 청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당신이 그에게 생수를 청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가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오.”11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두레박도 없는데다, 이 우물은 굉장히 깊지 않습니까? 어디서 생수를 길어다 주신다는 말입니까?12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은 물론이고, 그의 자녀들과 가축들이 즐겨 마시던 물입니다. 이 우물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당신이 더 위대한 분이란 말입니까?” 1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곧 다시 목마를 것이오. 14 하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나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참 샘물이 될 것이오.” (쉬운말 성경)

대림절기 기다림의 두번째 여인은 라합에 이어 수가성의 한 여인입니다. 성경에는 이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녀가 왜 자신의 마을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긷지 않고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여인은 불행한 과거를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섯명의 남편과 헤어지고 여섯번째 남편과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물 한모금 달라는 요청에도 까칠하고 야박한 대화속에서 다른 사람을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아픔과 상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들로부터 받은 공허함과 인간적인 배신감이었을까요? 지역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였을까요? 이 여인은 인생을 살면서 벼랑 끝에 서는 기분을 수차례나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태양이 뜨겁게 내려째는 낮 12시 무렵에 물을 길러 온 것 아니겠습니까. 이 우물가 여인의 이야기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설교나 찬양으로도 한번쯤 다 들어 본 것입니다.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참 샘물을 마실 때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대림절기를 보내며 예수님과 이 여인의 대화속에 담겨진 은혜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갈증이 없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어느 깊은 경지의 단계에 올라 무소유로 삶고 살고 계신가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소유의 목마름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구를 내려놓기 보다 지나친 욕망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창조적 인간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는 비워 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채우는 삶입니다. 거룩한 갈증과 거룩한 목마름으로 세상의 욕망을 대체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4장의 말씀은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연속선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일곱가지 표적 및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계시에 대한 보도입니다. 2장에서는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기적이 나옵니다. 3장에서는 지체 높고 존경받는 대법관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서 질문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태앙이 내려 쬐는 한낮에 천대받고 부도덕한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해 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먼저 우물가에 계셨습니다. 이후에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뜨러 옵니다. 예수께서는 우물가에서 이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예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며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셨구나. 주님이 먼저 이곳에 계셨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구원의 신비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한 인생 시간표를 만들어 놓으시고, 나를 향한 인생의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영적인 눈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 매일 살아가는 것이 영성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보자이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1) 예수께서는 목마름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과 유대지역을 왕래 할 때에 가장 빠른 경로인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멀리 우회하였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말도 섞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에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으로 혈통적으로 혼합되어 부정한 민족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금기를 깨시며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단지 빨리 가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기록한 ‘예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말씀안에는 유대인들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마름의 자리는 우리와 같이 피곤함을 느끼는 완전한 사람의 몸을 지닌 자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적인 연약함을 경험하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4:6 이 동네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고, 예수께서는 여행길에 피곤하셨으므로, 그 우물가에 앉아 쉬고 계셨다. 때는 낮 12시 무렵이었다.

여러분은 목마름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십니까? 추운날 따뜻한 차 한잔이 얼었던 몸을 녹여주듯 , 지쳐 있던 마음에 진정한 사랑의 지체들의 위로가 마음이 힘이 되는 것처럼 믿음은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고 예수께서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을 함께 해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모든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의 목마름과 갈증, 아픔과 고뇌를 친히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의 자리, 두려움의 자리, 낙심의 자리에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이 경험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날이 갈수록 건조해질 것입니다. 마음이 메말라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은 다른 행성이나 우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더 알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마음에 찾아오시는 주님에 대한 감각은 모조리 잃어 버리고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은 더 편리하고 물질적인 대상은 열렬히 추구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는 의심도 많고 냉소적입니다. 작은 소자를 보면서 주님이 보여지고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볼 때에 우리와 함께 울기도 하시고 웃기도 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여 지기를 소망합니다.

7 ○ 그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오자,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을 거셨다. “나에게 물을 좀 주겠소?

‘나에게 물을 좀 주겠소?’라는 요청에 ‘내가 목이 마르다’라고 하신 십자가의 장면이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사이에서 목이 마르다고 외쳤습니다.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실 사이의 간격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애타는 목마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피를 힘입어 나아갈수 있게 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갈망하고 있으신지요? 대림절기에 주님의 탄생을 기억하고 주의 다시 오심을 깨어 기다리고 계시는지요?

(2) 경계를 너머 만나는 것은 서로 하나가 되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나는 곳’입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면서 하늘문이 열리고 친히 내려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는 곳입니다. 유대인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이른 대낮에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요청할 때에 이 여인은 마음을 닫은 채  묻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저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까칠한 반응이지요. 이에 예수님은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사를 알고, 또 당신에게 물을 청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당신이 그에게 생수를 청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가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오.” 대답합니다. 이 여인은 다시 퉁명스럽게 되묻습니다.

“당신에게는 두레박도 없는데다, 이 우물은 굉장히 깊지 않습니까? 어디서 생수를 길어다 주신다는 말입니까?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은 물론이고, 그의 자녀들과 가축들이 즐겨 마시던 물입니다. 이 우물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당신이 더 위대한 분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은,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나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참 샘물이 될 것이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자 여인은 정색을 하고 “선생님, 그 물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러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후에 예수님은 뜬금없이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당황했는지 아니면 마음이 불편했는지 나에게는 남편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시치미를 땐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17절 18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소. 남편이 없다고 말한 당신의 말이 옳소.
당신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그 남자도 사실은 당신 남편이 아니오. 그러니 방금 당신이 한 말이 맞소.” 우물가의 여인은 눈이 열려지고 예수가 메시아임을 비로소 보게 됩니다.

20절에 보면 예수님과의 대화 끝에 여인은 예배하고 싶은 열망에 질문을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느껴질 때 우리 마음에서 끓어 올라오는 마음은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람은 경험하는 만큼 알게 됩니다. 배고픈 경험이 없는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사람들의 마음을 어찌 알겠으며, 타는 목마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물의 소중함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환대는 배고픈 자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삶은 상품이 아닙니다. 다 쓰고 나서 일의 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지는 소모품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친 주님은 거룩한 삶의 변화의 자리까지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과거에 비해 바쁘게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여인의 다섯 남편처럼 사회적인 업적과 취미생활 등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마음은 더 공허해져만 갑니다. 소비주의문화는 예배까지도 행위로만 여기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행위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기다리십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수고해서 길러내는 물이 아니라 실제적 삶으로 먼저 찾아 오신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우리의 노력과 공로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 샘물은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씻겨 주시고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힘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은 종교일 뿐입니다. 그 길은 수고와 고통 뿐입니다. 열매가 열리는 것 같아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은혜로 구원을 유지시켜 줍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 세상을 보면 많은 아이들이 헤롯 왕의 손에 아무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헤롯왕은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느끼고 베들레헴 인근에서 태어난 두살 아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이고 명령했습니다. 그의 권력욕과 거친 성격으로 인해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죽어가는 갓난 아이의 부모였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예수가 성장해서 자신이 태어날 때에 일어난 이 비극적인 일들을 알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 느꼈을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가 공생애 기간 동안 슬퍼하고 탄식하는 이들을 찾아가는 원동력이 되었겠지요. 우리가 잘 알듯 세상은  불의와 폭력에 의해 언제나 선한 사람들이 희생량이 되는 일들을 적잖게 보게 됩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말로 할 수 없는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시고 온전하십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절망의 파도 근심의 파도 두려움의 파도가 몰려 올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진행 과정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세상의 시스템에 의해서 무고한 희생량이 되었습니다. 깨어진 세상속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점점 차가워져 가고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심을 받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도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홀로 고립된 채 내몰리는 연약한 이들에게 찾아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의 삶을 추적해 보면 삶의 면면에 따뜻함이 묻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상처는 우리의 상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인생의 상처와 멸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리였고, 남편과의 헤어짐 이후 새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고 지속하면서도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 가는 여인의 삶은 우리 모두의 갈증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메시아로 만난 여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증언합니다. 그분을 만나 보라고 전도를 합니다.

대림절기의 기다림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관계에서 있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품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 기도의 자리가 더 깊어질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과 선행은 주님을 더 깊이 알게 하기 위한 자극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홀로 고립된 채 물을 길러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늘 가족이 되어 함께 동행하니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깊은 만남은 숨기고 가리던 것이 드러나는 자리이고 마음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주님과 더 깊이 사귀십시요. 그리고 우리를 만나러 이미 와 계시는 주님과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메말라 무뎌져 있던 나의 마음과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복음이 전해지면 희미하게 느껴졌던 삶의 방향이 선명해짐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덮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에 물질이  있으면 그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결과와 성과만을 위한 길을 걷게 되면 그 안에 무수히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주님이 계시다면 우리가 만나는 일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대림절의 기다림 속에서 삶을 화해하게 하는 평화의 주님을 따라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