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강림후 제 25주, 추수감사 주일)
바울의 감사
Paul’s Thanksgiving
사도행전 27:33-38
33 Just as day was dawning, Paul urged everyone to eat. “You have been so worried that you haven’t touched food for two weeks,” he said. 34 “Please eat something now for your own good. For not a hair of your heads will perish.” 35 Then he took some bread, gave thanks to God before them all, and broke off a piece and ate it. 36 Then everyone was encouraged and began to eat— 37 all 276 of us who were on board. 38 After eating, the crew lightened the ship further by throwing the cargo of wheat overboard.(New Living Translation)
올해 5월부터 시작된 사도행전 강해가 다음주일이면 마치게 됩니다. 사도행전 27장의 말씀은 누가가 정밀화를 그리듯 로마로 가는 바울의 항해 여정을 세밀하게 그려 놓았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으로 부터 떠나온 청교도인들이 신대륙에 와서 드린 추수 감사 주일 유래를 생각나게 합니다. 27장 본문의 말씀을 추수감사 주일에 전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항해하는 배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평화롭고 잔잔한 바다를 만나기도 하지만 거대한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항해하시며 어떤 날을 보내고 계시는지요?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바울이 탄 배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타 있었습니다. 여러 죄수들, 바닷길에 대해서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주, 로마 군대 장교인 백부장 율리오와 군인들, 장사하기 위해서 물건을 갖고 탄 상인들입니다. 가이사랴에서 출발한 그들은 그레데섬 미항이라는 작은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바울은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으니 더 이상의 항해를 만류하고 미항에서 겨울을 머물다가 출항하자고 했습니다. 유대력으로 속죄일이 7월 10일이니까 오늘날로 9월 10월경에 해당합니다. 당시 지중해는 9월 중순 이후에 항해하는 것이 위험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항해를 멈춰야 했는데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충고 보다는 바닷길의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주의 의견대로 무리한 출항을 하게 됩니다. 한 죄수의 말보다 선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겠지요. 결국 얼마 가지 못해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는 선장의 경험과 지식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조금 더 빨리 가려고 했던 백부장 율리오와 선장과 선주의 교만이 부른 역경인 것입니다. 겨울에 출항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선장과 선주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에 빨리 가고자 하는 조바심이었을까요? 아니면 바울보다 자기들의 지식이 더 풍부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던 교만이었을까요? 결국 수많은 곡물과 276명의 인원을 싣고 출발한 알렉산드리아호는 풍랑 앞에서 표류하게 됩니다. 방향을 잃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앞둔 제 눈에 들어 온 말씀은 35절입니다. 바울이 빵을 들어 사람들 앞에서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떡을 떼어 먹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이 감사기도를 드린 시점은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해 14일 동안 대략 800km를 떠밀려 온 때였습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해와 별도 보이지 않은 채, 사나운 폭풍만 거세게 휘몰아 쳤고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니까 살 소망을 잃어 버리고 최후의 순간만을 기다리며 있었습니다.
한번 말씀속으로 들어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디베랴 호수가에서 풍랑을 잔잔케 했던 예수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만 점점 더 깊어 졌습니다. 거센 바람으로 인해 파도가 계속 몰아 칩니다. 어둠은 깊어져 가고 흔들리는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뒹굴며 상인들의 물건은 배 안에서 부서지고 배의 돛은 이미 찢어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성경은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해와 별도 보이지 않은 채, 사나운 폭풍만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보고 완전히 소망을 잃었다.”
온 세상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배와 같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풍랑을 만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멈추지 않는 전쟁의 소식과 재난의 소식들은 희망조차 사라져 광풍을 만난 모습들입니다. 사실 인생의 짐을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진 배 안에서 바울이라고 두렵지가 않았겠습니까? 아마도 자기 앞에서 죽어간 스데반 집사님의 모습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다메섹에서의 주님의 음성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날 밤 바울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서 말씀을 해 주시는데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틀림없이 황제 앞에 서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너와 함께 항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
바울은 사명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그대로 되리라 믿었습니다.(24절) 그 평안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믿음이었습니다.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바라 본 것입니다.
(1) 감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열쇠입니다.
우리는 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 사람입니다. 누가가 바울의 항해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이유는 바울의 회심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는 회심이 끝이 아니라 온전한 제자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변화라는 것은 회심되는 것보다 더 큰 의미의 영역을 담고 있습니다.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회심의 시작이라면 변화의 삶은 지속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인생을 맡기기 시작했다면 세상의 것을 내려 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 뜻과 내 경험을 내려놓는 연습입니다. 불안과 두려움, 세상의 욕심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이제껏 쌓아 올린 경험은 점 하나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만이 아니라 유대인과 헬라인, 애굽인 등 많은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속에서 어떤 사람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그것 자체가 전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유대지역과 사마리아를 넘어서 로마에 까지 이동하고 있지만 바울이 거쳐 갔던 모든 지역에서 동시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의 대표성을 띠는 것이지 하나님이 바울만 통해서 일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거쳐 간 전도여행의 여러 지역에는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동시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적 용어 중에 Glocalization이라는 합성어가 있습니다. 글로벌(Global)+로컬 (Local)를 합쳐서 지역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일하는 선교적 교회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시대는 지역의 한계를 넘어 공존의 시대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한 지역의 예배를 한국과 여러 나라에서 동시적으로 함께 참여하여 은혜를 받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한 사람의 신앙을 넘어 공동체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지상의 교회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어디서 부터 변화를 시켜야 하고, 어떤 방법으로 선교를 해야할까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 되게 하시는 섬김과 사랑으로 일치해 나아갈 때에 교회는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내게 됩니다. 우리는 매년 추수감사주일 헌금의 일부를 지역의 목회자를 돕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가며 걸어가고 있는 귀한 사역이지요.
(2)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감사의 선물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만이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침울하다고 해도 성도는 구원의 소망을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338장을 보면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찬송을 작사한 플라워 아담즈(Flower Adams, 1805-1848)) 는 25세에 연기자로 무대에 설수 없게 되자 연기를 그만두게 되고 어느날 창세기를 읽다가 야곱이 벧엘에 있었던 이야기를 묵상하며 이 찬송의 가사를 작사하게 됩니다. 그 후 이 찬송은 1912년 4월 14일 타이타닉 호가 침몰한 날 주일 저녁에 영국 감리교회 성도였던 바이오리니스트 하틀리(Wallace Hartley, 1878-1912) 악장이 생애 마지막 찬송으로 노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울려 퍼진 이 찬양을 듣고 이어서 8명의 악사들이 함께 참여했고, 잠시 후 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마지막 찬송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깨어진 세상속으로 들어 오셔서 십자가에서 두팔 벌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그 손은 우리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괴롭고 지칠때 주님께서 구원의 손으로 붙들어 주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감사의 삶입니다.
침몰하는 갑판 위에서 마지막 감사의 찬양을 부른 이들의 고백이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인생 항로에 누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장으로 있습니까? 주님의 손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그 손은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가장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한 사람의 삶은 무엇을 믿고 바라보고 살아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매순간 인식되어 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기도가 고백됩니다. 오늘도 이 자리에 주님께서 계심을 믿는다면 예배를 드리는 교우들의 숫자만큼 주님께서 실제적으로 내옆에 계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 물, 빛 조차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온 인생임을 깨닫고 살아갈 때에 조바심을 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소명에 집중하게 됩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안에 의심과 불안,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이 방황하는 이들을 주님은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십자가에서 부둥켜 앉으셨고 하늘로 승천하시며 지금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진정한 감사는 우리의 손끝과 발끝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 계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에 흘러나오는 고백입니다.
개역개정은 바울이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 시작하매 라고(35절) 기록합니다. 쉬운말 성경은 35 이렇게 말하고, 바울은 빵을 들어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 떼어서 먹기 시작했다. 36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용기를 내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3) 감사의 기도는 우리를 회복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죽음의 위협에 처해있으니 바울의 감사기도에 반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공개적으로 고백한 감사의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효과를 거두었을 것입니다. 14일이라는 시간동안 배 안에 일행들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는데 그제서야 다른이들도 안심하며 받아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떼어 먹은 것은 떡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이었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준비하다 보니까 사도 바울이 성만찬을 하듯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사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떼듯이 떡을 떼는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감사의 고백은 예배 드릴때에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행함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구별되었고 윤리적으로 볼때에도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 마음 안에 거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전통이 중요했고 형식이 중요했기에 주님은 그들 곁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형통해 보이나 하나님과 멀어져 있을 수 있고, 유라굴로 인생의 광풍을 만났지만 바울처럼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배는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한일은 배에 남은 식량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무사히 육지에 내리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다면 마지막 비상 식량만큼은 끝까지 배에 남겨 두려 하였을텐데 배안에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비상 식량을 다 바다에 버립니다. 무사히 육지에 내리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두려움과 죽음의 바다에서 견져 주신 주님으로 인해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배에 탔던 276명의 사람들이 머리털 하나 상함이 없었습니다.
백부장은 죄수들과 군사들이 한 사람도 도망가거나 실종되지 않도록 파악한 숫자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시선에서 276명이라는 사람들의 숫자는 한사람의 생명과 그 영혼의 소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지식과 경험은 참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 되지 않을 때 나의 방법을 내려 놓기가 더 쉽지 않지만 내가 열고자 하는 문이 닫힐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문이 열려져 있음을 보게 될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우리를 삶의 모든 영역을 회복하게 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겸손히 느낄수 있게 합니다. 1918년 미국의 미네소타주 보베이라는 작은 탄광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엔스트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백발이 무성하고 몹시 지쳐 보이는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노인은 사진관에 들어와 잠시 쉬면서 차 한잔 얻어 마실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에게 빵과 스프를 주었더니 그 앞에서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진사 엔스트롬씨는 그 모습을 보고 큰 감동과 전율을 느꼈다고 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며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누추하고 연약해보이던 그의 모습이 큰 사람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구나를 느낍니다. 노인의 겉모습은 삶에 지쳐 있고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기도속에서 누구와도 비교할수 없는 마음이 부유한 자임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혹시 우리의 마음에서도 가진자와 갖지 못한자를 나누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진사가 찍은 노인의 사진은 후에 유화로 그려져서 작품이 되었습니다. 바로 ‘감사 기도’ 하는 노인의 ‘은혜(The Grace)’ 입니다. 감사기도 드리는 저 깊은 마음의 사진이 우리의 삶에도 남겨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사의 고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를 담은 감사여야 합니다. 추수감사 주일에 사도 바울의 복음의 전도 여정을 통하여 그가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복음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 항상 함께 했던 감사의 기도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성령강림후 제 24주)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Just Like Jesus Loves Us
사도행전 26:23-32
유민용 목사
26:23 즉, 장차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할 것이며,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부활하셔서, 자기 백성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포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24 ○ 바울이 이같이 말하자, 갑자기 총독 베스도가 바울의 변호를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바울아, 네가 정녕 미쳤구나! 배운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정신이 돌아 버렸구나!” 25 그러자 바울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절대 미치지 않았습니다. 베스도 총독 각하, 저는 다만 맑은 정신으로 참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26 아그립바 왕께서도 이런 일들을 잘 알고 계시므로, 제가 왕께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구석에서 몰래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왕께서 모르실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7 아그립바 왕이시여, 왕께서는 예언자들을 믿으십니까? 물론, 믿으시는 줄 압니다.” 28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29 바울이 대답했다.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저는 왕뿐만 아니라 오늘 제 말을 듣고 있는 모든 분들이, 쇠사슬에 묶인 처지인 것만 제외하고는 저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30 ○ 왕과 총독과 버니게 및 그들과 함께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31 그들은 밖으로 나가면서 서로 말했다. “들어 보니, 이 사람은 사형을 당하거나 투옥되어야 할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32 아그립바 왕도 베스도 총독에게 말했다. “그가 황제에게 상소하지만 않았더라면,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오.”(쉬운말 성경)
23 that the Messiah would suffer and be the first to rise from the dead, and in this way announce God’s light to Jews and Gentiles alike.”24 Suddenly, Festus shouted, “Paul, you are insane. Too much study has made you crazy!”25 But Paul replied, “I am not insane, Most Excellent Festus. What I am saying is the sober truth. 26 And King Agrippa knows about these things. I speak boldly, for I am sure these events are all familiar to him, for they were not done in a corner! 27 King Agrippa, do you believe the prophets? I know you do—”28 Agrippa interrupted him. “Do you think you can persuade me to become a Christian so quickly?”29 Paul replied, “Whether quickly or not, I pray to God that both you and everyone here in this audience might become the same as I am, except for these chains.”30 Then the king, the governor, Bernice, and all the others stood and left. 31 As they went out, they talked it over and agreed, “This man hasn’t done anything to deserve death or imprisonment.”32 And Agrippa said to Festus, “He could have been set free if he hadn’t appealed to Caesar.”(New Living Translation)
I like Jesus, but I don’t like his Church.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디가 오랜 전에 교회의 타락을 예언이라도 한 것일까요? 아니면 당시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대영제국의 가혹한 식민지 정치를 비꼬며 한 말이었을까요? 간디의 자서전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를 보면, 그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 인도사회를 변화시켰던 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루 매분마다 신을 깨닫기 위해 동지들이 일어나기 전에 새벽 4시에 잠을 깨워 일을 시작했고, 때로는 기름이 떨어진 작은 등잔을 옆으로 밀어두고 달빛에 의지해 편지를 썼는다. 나는 절대 진리인 하나님의 희미한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 참이 아니라는 확신이 날마다 자랐다.“ 라고 고백합니다. 신학적으로 상대적 진리냐? 절대적 진리냐? 의견이 갈리겠지만 본질은 진리의 힘은 삶의 변화에 있다는 것입니다.
(1) 진리는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속에서 완전하지 않아도 교회를 통해서 일해 오셨습니다. 세상의 지배 통치 구조 안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인해 섬기고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있다면 신학적 지식을 알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려는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지식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는 것이 문제이고,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과 교회는 실제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포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그날이 “Good Friday”가 된 것입니다.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는 이 끊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으로 맺어진 친밀한 관계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는 서로의 이익과 욕심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으로 든든히 서가는 것 입니다.
1세기 유대인들의 착각은 예수가 자신들의 전통을 위협하는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바울을 이단의 두목이라고 말했겠지요.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의 전통을 폐지하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얻는 구원은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기에 모든 인류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뚜렷한 경계선이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서 무너졌습니다. 감춰져 있던 하나님 나라가 바울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전에는 바울에게 한민족의 하나님이셨는데 이제는 모든 민족을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고 계신 예수의 십자가가 나의 자랑이라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구약성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구속사의 시간표를 정확히 알고 있었는데 그에게 있어 이 변화의 사건이 다메섹에서의 회심입니다.
그런 바울을 보는 베스도 총독은 너가 미쳤구나 여겼습니다. 예수로 인해 미쳤다는 것입니다. 비단 바울 뿐이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세상에서 무엇가에 빠져 살아갑니다. 구원을 이루려는 또 다른 삶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울을 부르십니다. 그가 들은 주님의 음성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소리였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십자가의 진리는 부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는 자리에만 있을지 모릅니다. 여전히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도록 주의 말씀을 충분히 묵상하며 채우시기 바랍니다. 이기심의 본성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회복의 상태로 이르게 되도록 그리스도의 완전한 법을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케하셨습니다.
(2) 십자가로 인해 인간의 이해가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바라 보는 인간의 이해가 달라졌습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창조주 하나님을 외면하고 관계하지 않으려는 죄의 본성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이를 영적으로 죽은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영이 죽으면 육체가 영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거룩한 산제물이 되셨음을 깨닫고 죄의 종노릇 하던 죄의 뿌리에 눈을 뜬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의 진리는 예수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에 두지 않으면 무너지고 맙니다. 이 일어난 사건 앞에서 성도는 겸손해 져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스펙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존귀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성숙해지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겸손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부모의 손을 잡고 걷는 아이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의 깊은 골짜기를 통과해 보고, 내 삶에 높이 쌓여진 산적한 문제 앞에서 번지점프를 하듯 구원의 줄에 매달려 뛰어 내려 보기도 해야 합니다. 경험해 보아야 구원의 줄이 끊어지지 않는 안전한 줄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랑의 줄을 붙잡고 살아갈 때에 우리의 경험과 힘으로 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미웠던 사람을 사랑하는 일,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일, 남에게 대접하는 일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이끌린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부요한 환경에 있으면 부요해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부족한 환경에 있으면 부족해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에 붙들리면 그 사랑에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반복되는 바울의 간증입니다. 9장에서는 다메섹에서 바울의 회심 사건을 다뤘고 22장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죽을 만큼 맞고 난 후에 영내로 들어가며 천부장에게 연설할 기회를 얻은 후 바울은 이 회심을 간증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하는 바울의 반복되는 회심 간증입니다. 그의 간증을 보면 먼저 유대교인으로 살 때를 회상합니다. 철저히 유대교 바리새인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겼고 나사렛 예수를 대적하여 복음을 핍박하던 자였다고 지난날 자신의 실수를 고백합니다. 자신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성도를 죽이는 일에 어김없이 앞장 섰고, 모든 회당을 돌아다니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를 죽이는 일에 어김없이 찬성 투표를 했으며, 격분하여 외국의 성까지 찾아 다니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들였기에 나에게 죄목이 있다면 이러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박해하러 가는 중에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췄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바울은 이 간증을 한 후에 자신이 결박된 것 외에는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로마 총독과 아그립바 왕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고 전하니 베스도는 바울을 향해서 너가 미쳤다고 외쳤고, 아그립바 왕은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서로 다른 두 고백은 십자가 전의 우리의 모습과 이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3)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26:28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29 바울이 대답했다.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저는 왕 뿐만 아니라 오늘 제 말을 듣고 있는 모든 분들이, 쇠사슬에 묶인 처지인 것만 제외하고는 저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아그립바 왕은 인생의 최고의 자리에서 세상 권세를 다 누리고 있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앞에서 바울은 자신이 결박된 이것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날의 재판 심리는 아그립바 왕에게 큰 감명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가는 훗날 AD70년 유대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그립바가 그리스도교에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때는 2년 동안 결박된 죄수복을 입고 있는 초라한 바울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그가 전했던 말들이 아그립바 왕에게 인상 깊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몇해전 한 사진 작가분과 교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분은 선천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일부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제약이 있었습니다. 색약임에도 불구하고 그분 안에 주님을 향한 믿음은 그의 발걸음을 하나님을 드러내는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찍는 작가이기에 토론토의 랜드마크를 사진에 담아내 실 줄 알았는데 그분의 카메라 초점은 화려한 건물이나 지역의 랜드마크가 아니라 거리의 작은 삶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손에 들린 카메라는 이땅 구석구석 하나님과 함께 살아내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랑으로 애쓰고 힘쓰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 사람들과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누리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며칠 동안 함께 대화하면서 작가님의 내면의 따뜻함은 시간이 흘러도 제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강한 힘은 화려한 것을 바라보고 동경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살아냄의 겸손함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게 해를 입힌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감격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갈라디아 지역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고생한 흔적으로 가득했고 마음은 지쳐 있었습니다. 성서기자들은 바울이 당시 풍토병에 걸렸거나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에 몸이 성하지 않았을 거라 추측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자 그들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실제적 역사가 일어나고 갈라디아 지역 사람들은 바울을 천사나 되는 것처럼 대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완벽한 환경과 조건에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해져 있을 때 복음은 더 강하게 역사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연약하고 경건치 않을 때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롬 5:6)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의 있는 부정적인 일들을 다 맛보셨습니다. 외로움과 수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배신감과 상실감, 그렇게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말 구유에서 태어나고 청년의 나이에 십자가에 처형 당하신 삶을 보면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약함을 숨겨야 하는 문화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적당히 오픈하고 적당히 나누고 숨기는 것에 익숙해져 갑니다. 그런데 복음의 능력은 우리가 약함을 드러낼 때에 역사합니다. 우리가 강하면 예수님이 필요 없지요. 바울은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달았기에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유는 그 감격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편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함께 기뻐했었는데 또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식어질 때에 껍데기에 집착합니다. 형식과 틀 안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합니다.
바울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다고 한 것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야 하고, 학문에 능통하고, 종교적으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삶을 불꽃처럼 태워 산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새마음을 얻게 됩니다. 인간의 이해가 달라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이해가 달라집니다. 모인 사람들 중에 마음의 문이 열려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간증은 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앉아 있던 아그립바 왕도 바울의 무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무죄를 확인했으니 바울을 풀어 주어야 하나 그가 로마에 상소를 했기에 바울은 로마에 갈수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로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로마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로마로 호송되게 됩니다. 바울이 만약 이때 석방되었다면 집요한 유대인들의 암살 음모에 의해 살해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음주에 설교하게 될 사도행전 27장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항해여정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장입니다. 설교의 본문도 오묘한 섭리 안에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1620년 9월 6일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온 청교도인들을 통해 이 땅에 복음이 들어 오게 된 것과 이미 1500년전 하나님의 섭리로 압송되어 가던 바울의 항해가 오버랩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로마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가이사로 가는 것보다 안전한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억울함도 불행함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주신 기회입니다. 한해도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합시다. 성도는 세상속에서 이미 빛입니다. 소금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연약한 존재에게 부어 주시는 끊임없는 사랑 때문에 주의 빛을 비추는 것이고, 소금이 되어 부패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모든 상황속에서 가장 안전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시며 한주도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했던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