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강림후 제 16주)
바울의 간증
Paul’s Testimony
사도행전 22:1-21
유민용 목사
22:1 “형제 여러분, 또 여러 어르신 되시는 동포 여러분, 저의 해명을 잘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2 바울이 히브리 말로 말하기 시작하자, 군중은 더욱 조용해졌다. 바울이 말을 이었다.3 “저는 유대 사람입니다. 길리기아 지방에 있는 다소에서 태어나, 여기 예루살렘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가말리엘 스승 밑에서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 대해 철저히 교육을 받았고, 오늘 여러분이 보여 주신 것과 똑같이 저도 하나님을 열성적으로 믿어 왔습니다.4 저는 ‘예수의 도’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여 죽이기까지 하였고, 그 도를 믿는 자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5 이런 사실은 대제사장과 공회 의원들 모두가 입증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느 날, 저는 그들에게 부탁해서,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보내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거기에 있는 ‘예수의 도’를 따르는 자들을 모조리 붙잡아서 예루살렘으로 연행하여 처벌할 계획이었습니다.”6 “그런 임무를 띠고 가는데, 정오 무렵 제가 다메섹에 거의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밝은 빛이 내려와 제 주변을 눈부시게 비추었습니다. 7 그 빛에 휩싸여, 저는 그만 땅에 엎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8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제가 물었더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다.’ 하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9 그때 저와 함께 가던 다른 사람들은 환한 빛은 보았지만, 제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은 듣지 못했습니다.10 제가 물었습니다. ‘주여,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거기에 가면,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11 저는 그 강렬한 하늘의 빛 때문에 앞을 볼 수 없게 되어서, 함께 가던 사람들이 제 손을 붙들고 다메섹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12 ○ 다메섹에 들어가니,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열성적으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다메섹의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13 그가 저를 찾아와, 제 곁에 서서 말하기를 ‘사울 형제여, 눈을 뜨시오!’ 했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에 저는 즉시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14 아나니아가 제게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셨습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의로우신 분을 만나게 하시며,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듣게 하시려고 당신을 택하신 것입니다.15 이제부터 당신은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뭇 사람들에게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16 그러니 이제 주저할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일어나서, 즉시 세례를 받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당신의 죄를 씻도록 하십시오.’” 17 “ 그 후에 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순간, 저는 황홀경의 상태에 빠졌는데,18 그때 저는 주님을 뵙고, 그분이 제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서 예루살렘을 떠나라. 네가 나를 증거하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네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19 저는 주께 대답했습니다. ‘주여, 이 사람들은 제가 회당을 돌아다니면서 주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 매질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20 게다가 주의 증인인 스데반이 피를 흘리며 죽임을 당할 때, 저는 그 자리에서 그 일을 승인했고, 뿐만 아니라 스데반을 돌로 치는 사람들의 겉옷을 지켜주기까지 했습니다. 21 그러나 주께서는 제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예루살렘을 떠나라. 나는 너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낼 것이다.’ 하였습니다.” (쉬운말 성경)
1“Brothers and esteemed fathers,” Paul said, “listen to me as I offer my defense.” 2 When they heard him speaking in their own language,[a] the silence was even greater.3 Then Paul said, “I am a Jew, born in Tarsus, a city in Cilicia, and I was brought up and educated here in Jerusalem under Gamaliel. As his student, I was carefully trained in our Jewish laws and customs. I became very zealous to honor God in everything I did, just like all of you today. 4 And I persecuted the followers of the Way, hounding some to death, arresting both men and women and throwing them in prison. 5 The high priest and the whole council of elders can testify that this is so. For I received letters from them to our Jewish brothers in Damascus, authorizing me to bring the followers of the Way from there to Jerusalem, in chains, to be punished.6 “As I was on the road, approaching Damascus about noon, a very bright light from heaven suddenly shone down around me. 7 I fell to the ground and heard a voice saying to me, ‘Saul, Saul, why are you persecuting me?’8 “‘Who are you, lord?’ I asked.“And the voice replied, ‘I am Jesus the Nazarene,[b] the one you are persecuting.’ 9 The people with me saw the light but didn’t understand the voice speaking to me.10 “I asked, ‘What should I do, Lord?’“And the Lord told me, ‘Get up and go into Damascus, and there you will be told everything you are to do.’11 “I was blinded by the intense light and had to be led by the hand to Damascus by my companions. 12 A man named Ananias lived there. He was a godly man, deeply devoted to the law, and well regarded by all the Jews of Damascus. 13 He came and stood beside me and said, ‘Brother Saul, regain your sight.’ And that very moment I could see him!14 “Then he told me, ‘The God of our ancestors has chosen you to know his will and to see the Righteous One and hear him speak. 15 For you are to be his witness, telling everyone what you have seen and heard. 16 What are you waiting for? Get up and be baptized. Have your sins washed away by calling on the name of the Lord.’17 “After I returned to Jerusalem, I was praying in the Temple and fell into a trance. 18 I saw a vision of Jesus[c] saying to me, ‘Hurry! Leave Jerusalem, for the people here won’t accept your testimony about me.’
19 “‘But Lord,’ I argued, ‘they certainly know that in every synagogue I imprisoned and beat those who believed in you. 20 And I was in complete agreement when your witness Stephen was killed. I stood by and kept the coats they took off when they stoned him.’21 “But the Lord said to me, ‘Go, for I will send you far away to the Gentiles!’” (New Living Translation)
사도행전은 AD 30-63년 사이의 기록입니다. 복음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누가는 주요 사건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하지만 어떤 사건들은 사도행전에서 과감히 생략합니다. 예를 들어 3년여 기간의 아라비아에서 체류한 시간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임에도 21장에서 체포되는 과정부터 유대 군중들을 향한 바울의 간증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무려 43절에 걸쳐 기록했습니다.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이 시작된 13장에서 28장까지가 대략 17년간인데 이를 날수로 따지면 대략 6,205일입니다. 그런데 13장부터 28장까지가 총 569절입니다. 따라서 43절에 해당하는 분량은 대략 7.5%가 됩니다. 수치적으로 볼때 누가는 바울의 간증을 평균치의 몇백배 이상 자세히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계획에 있어서 바울이 받는 소명과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건에 대한 43절의 기록은 바울의 위대한 간증이기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실제적 경험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몇년 전에 받은 은혜의 기억으로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몇달전에 몇년전에 먹는 밥심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오늘의 양식을 통해서 주시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은 새부대에 매일의 말씀을 담는 것이지요. 어느날 수없이 읽던 구절이 내 마음에 다가오고 마음이 뜨거워 집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말씀을 통해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열어 주시니 반짝이는 별빛처럼 마음 속에 쏟아져 내려 오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관하시도록 내어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내 자녀가 진짜 부모가 맞는지 매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마음 아픈 일입니까? 거짓이 없는 하나님 사랑을 경험할때 인생에는 간증이 시작이 됩니다.
바울은 사람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1절에 자신을 죽이려고 한 이들에게 바울은 ‘형제 여러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기전에 자신을 심문하는 최후 진술의 자리에서 유대인들에게 사용했던 호칭입니다. 영어성경은 brothers and fathers라고 번역했고, 유대인들을 향한 존경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단어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의 행동에 비하면 참 온유한 언어입니다. 헬라어로 아델포스(αδελφός) ‘형제’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연합된 형제인데, 바울은 핍박하는 너희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고 배척당하면서도 ‘사랑하는 내 형제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의심하는 사람도 만나게 되고,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임을 기억하시고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놓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때에 주님의 빛과 음성이 보이고 들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윤복희씨가 부른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아실겁니다.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윤항기 목사는 1978년 폐결핵 말기 판정으로 6개월 선고를 받았는데, 동생 윤복희가 이혼의 아픔을 겪고 힘들어 할때 절망속에서 희망을 놓지 말자는 취지로 동생을 위로하기 위한 노래를 만듭니다. 한 방송에 나온 윤복희씨의 인터뷰를 들었는데요. 노래 가사의 위로, 등불, 벗, 형제, 노래, 기쁨이 되어 주겠다는 고백은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존재임을 약속하는 내용들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대중들에게 이 노래가 위로가 되는 이유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때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네가 만약 외로울때면 내가 친구가 될께, 네가 만약 기쁠때면 내가 웃음이 되리.”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가 되는 기쁨이 이런것 아니겠습니까?
주안에서 우리는 형제를 품어 안으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번 학기 금찬을 시작하고 많은 청년들에게 도전이 되는 메세지와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간사님들의 모습을 통해 은혜를 받고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지체들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과 기대하는 마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형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달라지게 합니다. 바울과 스데반에게서 영혼을 바라보는 애통함이 묻어납니다. 복음을 향한 열린마음을 갖으십시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에게서 자유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는 죄수의 몸으로 체포되었고, 몸은 상처로 가득했는데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자유와 담대함입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살아가야 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경험했기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 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될 때에 더 큰 세계가 열려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알아가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뜻을 깨닫게 될 수록 삶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유대인들은 편협한 확신과 종교적 열심으로 십자가의 도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의 마음에는 선천적으로 죄가 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슨 일을 해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바울에게 예수의 경험은 자신의 이성과 종교적 열심이 진리의 원천이라고 믿는 확신이 산산조각 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살면서 빛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망각한 채 살았던 바울에게 참빛이 되시는 예수의 음성이 들려오자 자신 안에 빛이 있는 것처럼 여기며 예수를 거부하던 어리석음을 본 것입니다. 오늘날 물질주의는 우리에게 빛으로 다가옵니다. 물질주의를 절대적 가치로 삼는 현대사회는 과다한 자원의 개발로 인해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물질주의로 인한 과도한 소비주의는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초래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안에 물질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저마다 물질만을 빛으로 여기고 참 빛이신 진리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동물과는 다르게 예수를 아는 빛을 알도록 남겨 두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에 대한 인식을 진리로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은 예수의 빛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만약 인간의 양심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가능성이 없다면 피조물인 인간과 동물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 권세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고,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힘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유대인들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확신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판단하려고 했지 바울의 고백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지만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깨닫는 것은 역사적으로 예수를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역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연구해도 이 신앙적 체험이 없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있는 인격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믿는 자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십니다. 바울에게 성경은 이전에 읽던 관점과 완전히 달려져 새로운 해석의 관점을 열어 준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만들어진 예수가 고난과 핍박을 감수하고 순교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행하던 바울이 자신의 생명조차 아까워하지 않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경험하고 구약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언약이 발견되고, 옛언약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바울은 새 성전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동물이 아니고 사람이라고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바울은 이사야 66장 20절을 새언약의 계시로 받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종류의 제물을 요구하시는 것이 나타나는데,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뭇 나라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바울은 이사야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희생제물로 바쳐진 양이나 소는 제단에 바쳐진 순간 이미 다른 존재로 변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경험은 바울에게 생애 전 존재의 변화요, 세상과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예수를 믿고 이사야 66장 1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음을 보게 됩니다.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행7:47-49) 예수님을 경험하고 난 스데반의 마음에도 주님이 계셨습니다. 성령께서 스데반 집사의 마음의 성전에 거하시며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고, 바울도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인격적 간증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의 성전에 계시면 간증이 시작됩니다. 아나니아와 같은 믿음의 성도들을 만나게 되고, 예수께서 함께하는 간증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회복의 간증들이 넘쳐나는 것은 주님을 통해 성경과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없이도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오랜 시간 연구하다 보면 성경적 지식이 쌓여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3인칭 시점일 것입니다. 오늘날 뿐만 아니라 바울의 시대에도 지성이 없어서 문제가 일어난 게 아닙니다. 지성은 차고 넘칩니다. 문제는 근본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간증은 언제나 1인칭이 되어야 합니다. 내 삶에 함께하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받아들임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먼저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선택 받았다는 확신속에서 다른 계시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아들이는데 그들의 확신은 걸림돌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분명한 경험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지닌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십니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아져야 비로소 땅을 보며 살던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의 탐욕, 불의, 합당치 못한 것들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구원의 감격을 더 깊이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 신앙적 경험이 2천년 기독교 역사를 지탱해 온 힘이지요. 그래서 기독교는 경험의 종교인 것입니다. 바울의 간증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선량한 유대인입니다. 여기 예루살렘에서 교육 받았고, 랍비 가말리엘의 엄격한 지도 아래 우리 종교의 전통을 철저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처럼 나도 항상 열정적으로 하나님 편에 있었습니다. 나도 이 예수의 도와 관련된 사람은 누구나 맹렬히 공격해서, 하나님을 위해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그들을 잡아 들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최고의회의 누구에게나 물어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추적하고 체포하려고 우리 형제들이 있는 다메섹으로 떠났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데려와서 형을 받게 하는 권한이 부여된 공문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오쯤 다메섹 외곽에 이르렀을때,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강하게 비쳤습니다. 나는 바닥에 쓰러졌고 시야가 흐려졌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해치려고 하느냐? 나는 주님 누구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하고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동료들은 그 빛은 보았으나 그 대화는 듣지 못했습니다. 이후에 주님께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더니, 다메섹으로 들어가면,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줄 사람이 거기에 있다고 말해 주셨습니다. 내가 처음 계획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 성에 들어간 것입니다. 나는 눈이 멀어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동료들이 내 손을 잡고 데리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거기서 나는 아나니아를 만났습니다. 그는 율법을 잘 지키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이것은 다메섹 유대인공동체가 다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그가 와서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눈을 들어 보시오하고 말했고, 내가 눈을 들었는데, 어느새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대를 택하셔서 그분의 활동계획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대는 의롭고 죄가 없으신 분을 실제로 뵈었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대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대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핵심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일어나 세례를 받으십시오. 죄를 깨끗이 씻어내고, 하나님과 직접 사귀십시오. 정말로 아나니아가 말한 대로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에 어느날 나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잠겨 기도하다가 그분을 뵈었습니다. 하나님의 죄 없으신 분을 뵈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이유를 묻지 말고 거거라. 내가 너를 이방인들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전도여행을 다 마치고 노년에 쓴 디모데서를 보면 그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고백합니다. 자신을 구원해 주신 은혜를 지속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지성을 압도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날마다 덮어줍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을때 비로소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아나니아를 만났던 경험들 말입니다. 믿음생활 안에 있는 수많은 간증들은 실제로 가슴 떨리는 고백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감격을 쉽게 생각하면 얕은 감격만 누리게 됩니다. 인간은 한시라도 주님의 은혜를 떠나면 서로를 비방하고 비판하며 평가하는 흉악한 죄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겸손해 지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우리가 설수 있는 은혜의 감격을 실제적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에 실패하지 말라고 가르치시겠습니까? 아니면 실패했을때 어떻게 일어서야 하는지 그 지혜를 가르치시겠습니까?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시며 자라가십시오. 존재의 변화없이 우리가 어떻게 증인으로 살아 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받은 은혜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며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성경은 지금이 은혜 받을 때이고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고후 6:2) 변화된 성도들에게 은혜는 언제나 지금입니다. 바울의 간증을 통하여 우리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의 새로운 눈이 떠지고 ,그 빛이 인도하시는대로 하나님께 은혜 받는 일, 사랑하는 일을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행길에 만나게 되는 일들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생명을 전하는 간증을 채워가는 삶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령강림후 제 15주)
문들이 곧 닫히더라.
The gates were closed soon
사도행전 21:27-40
21:27 ○ 정해진 이레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아시아에서 온 몇몇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는, 군중을 선동해서 그를 붙잡은 뒤 소리쳤다. 28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 사람은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민족과 우리 율법, 그리고 거룩한 성전을 거역하는 가르침을 퍼뜨리고 다닙니다. 더구나 이 사람은 헬라인들을 성전에 데리고 와서, 거룩한 이곳을 더럽히기까지 했습니다.” 29 그들은 바울이 예전에 에베소 사람인 드로비모와 같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바울이 으레 그를 성전으로 데리고 온 줄로 알았던 것이다. 30 그리하여 온 도시가 시끄러워졌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바울을 붙잡아 성전에서 끌고 나갔다. 그러자 성전 문이 곧 닫혔다. 31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소동을 벌이는 동안, 예루살렘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로마군대의 천부장이 듣게 되었다. 32 천부장은 즉시 수하의 백부장과 군인들을 인솔하여 군중들에게로 달려왔다. 로마 군인들이 오는 것을 보자, 폭도들은 바울을 때리는 것을 멈추었다. 33 천부장은 바울을 체포하도록 명령한 뒤, 부하들에게 두 개의 쇠사슬로 그를 결박하게 했다. 그런 다음, 천부장은 군중을 향해 바울이 어떤 사람이며, 무슨 잘못을 저질렀냐고 물었다. 34 그러나 군중이 제각기 이러쿵저러쿵 다른 소리로 떠들어 댔기 때문에, 천부장은 사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천부장은 일단 바울을 병영으로 연행하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35 바울이 층계에 이르렀을 때는 군중이 더욱 난폭해져서 군인들은 바울을 메고 올라가야 했다. 36 군중은 계속 뒤따르면서 “그자를 없애 버려라!” 하고 소리를 질러 댔다.
37 ○ 병영 앞에 이르렀을 때, 바울이 천부장에게 말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천부장은 놀라면서 “당신은 헬라 말을 할 줄 아오?” 하고는, 말을 이었다. 38 “그러면 당신이 바로 얼마 전에 폭동을 일으킨 뒤 자객 사천 명과 함께 광야로 도망친 그 이집트 사람이오?” 39 바울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그 유명한 도시의 시민입니다. 저 사람들에게 제가 잠시 한마디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40 “그렇게 하시오.” 천부장이 허락하자, 바울은 층계 위에 서서 군중에게 조용히 해 달라고 손짓을 했다. 무리가 잠잠해지자, 바울은 히브리 말로 연설하였다. (쉬운말 성경)
27 The seven days were almost ended when some Jews from the province of Asia saw Paul in the Temple and roused a mob against him. They grabbed him, 28 yelling, “Men of Israel, help us! This is the man who preaches against our people everywhere and tells everybody to disobey the Jewish laws. He speaks against the Temple—and even defiles this holy place by bringing in Gentiles.[d]” 29 (For earlier that day they had seen him in the city with Trophimus, a Gentile from Ephesus,[e] and they assumed Paul had taken him into the Temple.) 30 The whole city was rocked by these accusations, and a great riot followed. Paul was grabbed and dragged out of the Temple, and immediately the gates were closed behind him. 31 As they were trying to kill him, word reached the commander of the Roman regiment that all Jerusalem was in an uproar. 32 He immediately called out his soldiers and officers[f] and ran down among the crowd. When the mob saw the commander and the troops coming, they stopped beating Paul. 33 Then the commander arrested him and ordered him bound with two chains. He asked the crowd who he was and what he had done. 34 Some shouted one thing and some another. Since he couldn’t find out the truth in all the uproar and confusion, he ordered that Paul be taken to the fortress. 35 As Paul reached the stairs, the mob grew so violent the soldiers had to lift him to their shoulders to protect him. 36 And the crowd followed behind, shouting, “Kill him, kill him!” 37 As Paul was about to be taken inside, he said to the commander, “May I have a word with you?” “Do you know Greek?” the commander asked, surprised. 38 “Aren’t you the Egyptian who led a rebellion some time ago and took 4,000 members of the Assassins out into the desert?” 39 “No,” Paul replied, “I am a Jew and a citizen of Tarsus in Cilicia, which is an important city. Please, let me talk to these people.” 40 The commander agreed, so Paul stood on the stairs and motioned to the people to be quiet. Soon a deep silence enveloped the crowd, and he addressed them in their own language, Aramaic.(New Living Translation)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박해를 받게 될 것은 20장부터 계속 예고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한주간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며 실제적으로 바울에게 찾아온 죽음에 가까운 고난을 다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비밀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바울은 소망에 대한 이유를 항상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염려와 두려움이 찾아올 때 소망에 관한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은 소망의 이유가 되시는 분께서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두려운 상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의 이유는 성도들을 지켜주는 방패가 됩니다.
바울을 붙잡고 끌고 나간 후에 성전 문이 닫혀졌습니다. 개역개정은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라고 번역합니다. 굳게 닫혀진 문은 바울을 향한 유대인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성전 밖으로 끌려 간 바울을 죽이려고 사람들이 달려 들었고 죽을 만큼 맞게 된 상황입니다.
해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구절들을 조사해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내일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지의 내일에 짓눌려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러니 죄에 짓눌려 좌절하고, 불안에 짓눌려 떨고,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을 묵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까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해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구절들을 조사해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내일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지의 내일에 짓눌려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러니 죄에 짓눌려, 불안에 짓눌려,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을 묵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까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는 묵상하는 관점에 따라 세상이 그렇게 보여집니다. 내 몸이 아프면 비로소 아픈 사람들이 보여집니다. 바울의 눈에는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이들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인생의 문이 닫힌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관계속에서 굳게 닫혀진 마음의 문,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간 아픔과 슬픔, 이런 환경이 직면하게 되면 인생의 문이 닫혀져 있는 느낌이 듭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그 문은 바울을 향해 열려진 문입니다.
여러분이 현재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한주도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살아내시느라 애쓰셨습니다. 경쟁사회에서 겸손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는 일입니다. 자기중심성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회속에서 예수님의 겸손함으로 다리 놓는 사명자로 살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 바울의 모습을 여러분의 삶에도 적용하며 따라와 보시기 바랍니다. 2천년 상황속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본문의 상황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 출신 신자들의 오해를 해소시켜 주기 위해서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1주일간 결례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결례가 끝나갈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과 드로비모가 함께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전에 에베소 사람인 드로비모와 같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바울이 으레 그를 성전으로 데리고 온 줄로 알았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단지 추측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성전 모독했다는 이유로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성전 밖에서 죽을 만큼 맞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된 로마의 천부장이 수하의 백부장과 군인들을 인솔하여 달려와서는 때리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그런 다음 바울에게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묻습니다. 이미 현장은 소동으로 인해 바울의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고 사태 파악이 안되니까 천부장은 바울을 체포하라고 명령합니다. 사실 천부장의 체포가 없었다면 아마도 바울은 그 현장에서 스데반처럼 순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그 상황 앞에서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바라보는 시선은 두려운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견된 일이었기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천부장에 의해서 체포되어 죽음을 모면하게 됩니다. 당시 바울의 생각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구절이 40절에 나타나는데요.
“저 사람들에게 제가 잠시 한마디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오. 천부장이 허락하자, 바울은 층계 위에 서서 군중에게 조용히 해 달라고 손짓을 했다. 무리가 잠잠해지자, 바울은 히브리 말로 연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죽도록 맞고도 설교를 합니다. 설교의 내용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간증입니다. 다메섹 도상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바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열심을 내던 사람이었는데 바울이 바라보는 세상의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를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부르신 상급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 속에는 온통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가득차 있어 보입니다. 그는 주리고 목마르며 추위와 헐벗음을 당하며 견디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 동족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전도자였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을 보면,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는 동족을 위해서라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생명을 다해 복음을 증거합니다. 도대체 바울 안에 있던 예수의 생명이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에게 생명은 예수께서 주신 생[生]을 살라는 명령[命] 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 6:40)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분리된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다는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지요. 죽고 사는 시간적 차원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지금 이곳에서 누려집니다. 바울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해서 이제 자신의 자랑거리는 자랑할 것이 아님을 깨닫고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바울의 신분과 정체성이 새롭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고귀했으면 지금으로 보면 바울의 출신은 대통령 집안의 출신 배경이었고, 유대교 3대 종파인 바리새파 사람이며, 학벌도 최고 자랑거리인데, 좋은 학벌과 집안 배경들 자신의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처럼 여겨졌을까요? 예수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인생의 자랑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구원 받는데 어떤 효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뜻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임이구요. 세상속에서 교회의 사명은 성도들의 컨디션에 따라 우리가 지닌 자랑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전하는 말씀이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생명을 다해서 전하는 마지막 외침의 그 말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1933년 1월 15일 독일의 한 교회 저녁예배에서 본훼퍼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우리가 죄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두려워 하는 자는 이미 그 속에 빠져 든 것입니다. 두려움은 악의 그물입니다. 악은 처음에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 혼란에 빠뜨리고, 그 다음에는 두려움에 복종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두려워 떠는 마음으로 어떻게 원수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죄 보다 크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강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죄는 쓰러져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두려움은 그 당시 독일 땅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각자의 삶에도 지금 예배 드리는 이곳에도 있습니다. 두려움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주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땅끝까지 복음의 전도자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버리지 않으신 것처럼 바울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은 바울에게는 구원을 이루는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성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성전 안뜰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1.4m 높이의 돌로 된 벽을 만들어 쌓았습니다. 그곳에는 헬라어, 라틴어로 외국인은 성전과 둘러싼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다는 경고 문구를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 체제에 갇혀 살던 이들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희생 제물이 되셔서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로빈 마이어가 쓴 Saving Jesus from the church 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를 교회에서 구출하라입니다. 마이어는 입술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을 이제는 멈추고 예수를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신앙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는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데 있어서 수고와 헌신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입술로만 경배 하는 신앙은 복음을 교회의 틀 안에만 가두는 것이고 복음의 껍데기만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아는 것을 넘어 행동하는 것에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에 좀더 사랑하며 살걸 그랬나, 좀더 베풀며 살아야 했나 후회하는 삶이 되면 안됩니다. 인생의 종착지에서 후회가 없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후회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삶은 끝까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난이 올 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지키는 일에는 힘쓰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영은 그들의 화려한 성전에서 이미 떠났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죄와 시기심, 미움과 정죄하는 마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희생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스스로 제어할 능력이 없어서, 실수가 많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아픔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마음의 자리에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제적인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사명은 울면서라도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정결법으로 인해 부정한 자로 여겼던 이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심으로 그 사람의 부정함을 자신의 몸으로 옮겨 오셨습니다. 그리고 살려 내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살아갈수록 우리 앞에 문이 닫힌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성밖으로 내쳐진 듯 우리를 외롭고 고독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워 하지 말라 하십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일에 헌신하는 이들 가운데도 함께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옥중에서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생명에 이끌려 지속적으로 깨달으려고 달려간다고 절절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계속하여 달려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생활에 고난이 오고 삶이 힘들어 지면,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는 복이 있다(마 5:10)하십니다. 진정한 제자는 고난 가운데서 넘어질 수 있고, 오해를 받고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명은 다시 일어나 마땅히 가야 할 곳을 향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경쟁에서 이기고 빨리 달리는 경기가 아닙니다. 믿음은 누군가를 이기려는 자기욕심과 욕망의 도구도 아닙니다. 고난이 올 때에 옛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고 지극히 크고 영광의 중한 영생을 얻게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이라는 포장지를 벗겨내면 그 안에 장미빛 같이 붉게 물든 십자가와 푸른 하늘처럼 높고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눈물겨운 수고가 없다면 어떻게 영혼들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도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일을 가르켜 해산의 수고라고 했습니다. 성전을 지켜야 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말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제 남겨진 과업은 저와 여러분이 이뤄야 할 사명입니다. 한주도 사명자들이 걷는 걸음 걸음마다 주의 은총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