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강림후 제 18주, 세계성찬 주일)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I have always lived before God with a clear conscience!
사도행전 23:1, 6-11
유민용 목사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쉬운말 성경)
1Gazing intently at the high council,[a] Paul began: “Brothers, I have always lived before God with a clear conscience!” 6 Paul realized that some members of the high council were Sadducees and some were Pharisees, so he shouted, “Brothers, I am a Pharisee, as were my ancestors! And I am on trial because my hope is in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7 This divided the council—the Pharisees against the Sadducees 8 for the Sadducees say there is no resurrection or angels or spirits, but the Pharisees believe in all of these. 9 So there was a great uproar. Some of 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who were Pharisees jumped up and began to argue forcefully. “We see nothing wrong with him,” they shouted. “Perhaps a spirit or an angel spoke to him.” 10 As the conflict grew more violent, the commander was afraid they would tear Paul apart. So he ordered his soldiers to go and rescue him by force and take him back to the fortress. 11 That night the Lord appeared to Paul and said, “Be encouraged, Paul. Just as you have been a witness to me here in Jerusalem, you must preach the Good News in Rome as well.”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세계성찬 주일로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이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성찬의 빵은 인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의미하지요. 포도주는 인류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오늘 성찬의 식탁에 참여하는 교우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무엇보다 주님의 마음에 연합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서로가 자기의 의로움만 주장하는 세상속으로 예수께서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성찬식이며 세례식, 주일예배와 성경공부, 기도회 등 고유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우리는 어떤 열매들을 맺어가야 할까요? 믿음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변화를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고 나서 천부장은 다음날 결박을 풀고, 산헤드린 공회로 바울을 데리고 갑니다. 바울은 공회원들 앞에 섰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기관으로 의장인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구성원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 등 의장을 포함하여 총 71명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마음에 담을 준비가 안된 사람들입니다.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갈릴레이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 1642)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고 있다는 천동설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이 일로 당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합니다. 갈릴레이는 고문과 화형의 위협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 했지만,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속삭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공회원들 앞에서 창조와 구속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깨닫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의 발견은 피조물인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에게서는 경험되지 않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세상 너머의 창조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있어서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믿음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발견하려고 말씀을 해석하고 묵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믿음이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니까 믿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날마다 우리의 양심을 깨웁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양심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보든 안보든, 상황이 좋은 안좋든 하나님을 내 옆에 모시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양심’이라는 헬라어는 ‘쉬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입니다. ‘쉰’(συν)이라는 함께’라는 뜻과 ‘알다’라는 ‘에이데시스’(εἰδησις)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바울의 고백속에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하고도 개인적인 인격적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망을 경험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율법에 매여 있지 않고 자신과 함께 살아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공회원들 앞에 죄수의 옷을 입고 서 있었지만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담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례를 받고 거룩한 직분을 받았어도 양심이 죽어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산헤드린 공회원들도 사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외형만 그럴듯하게 갖추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에 긍휼의 눈으로 회원들을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 인류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그의 살은 십자가에서 찢겼고,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성찬은 이것을 기억하며 동참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매주마다 성만찬에 참여했습니다. 주님과의 연합은 두려운 현실속에서 그들의 믿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유대교의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공격에서도 복음은 예루살렘 반경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되는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믿음은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과정입니다. 지속적으로 믿을때 우리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우리는 낯선 것을 어려워 하고 두려워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만 안전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때로는 조용한 기도, 부르짖는 기도, 그저 눈만 감고 있어도 기도하는 자리에 있는 것 만으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다 듣고 계십니다. 우리의 서로 다른 방식, 서로 다양한 모습을 인정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더 깊은 영성의 세계를 알아가게 됩니다. 어릴 적 모태에서 부터 신앙을 배우고 교회에서 자란 사람들은 ‘모태 신앙인’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자란 사람들 중에 뜨겁지 않아서 ‘못해 신앙인’이라고 하는 말도 있었습니다. 뜨겁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슬비에 옷 젖듯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도 하시고, 뜨거운 경험을 통해 회심 시키기도 하십니다. 혹은 말씀을 연구하다가 만나기도 하고, 지체들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크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개인의 성향과 기질에 따라서 만나는 방법이 다양한 것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분이 있다면 모든 만남 중에 놓쳐서는 안될 만남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계획하심 안에서 하나님은 믿지 않는 그 자리, 뜨겁지 않은 그 자리를 자라게 하시고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산헤드린은 크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합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 6절 7절입니다.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전하니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집니다. 바리새인은 분리주의자인데 반해 종교적인 사람들이었고, 사두개인은 세속적인 사람들로 부활도, 천사도, 영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죽은 자의 소망을 전하는 바울의 말로 인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눠집니다. 이는 서로가 신학적 논쟁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일로 인해 매우 심각하게 분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부대에 담으려면 우리는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향한 구원계획을 철회하지 않으시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밭에 감추인 보물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절박한 이들은 쟁기를 손에 들고 밭에 감추인 하나님의 나라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찾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믿음을 얻게 되고, 사랑함으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역설적인 표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가지가 돈에 대한 역설입니다.
잠언 11장 24-25절을 보면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언 11:24-25)
구제를 한다는 것은 주머니의 돈을 사용하는 것인데 더욱 부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복을 흘려 보내면 오히려 복은 들어 오게 되는 것이 성경의 법칙입니다. 이러한 역설이 현실일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께서 먼저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복은 나누고 섬기고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성만찬 주일에 장학헌금을 통해 실제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나누자고 했습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지식을 쌓아가는 일이기는 하지만 신앙과 하나가 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믿음은 지식을 참되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일에 우리가 동참함으로 어려운 가운데 공부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가난한 자들이 부요케 되기를 원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을 얻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주신 은혜를 되새기며 베품의 즐거움에 참여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이라고 심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에게 그날 밤은 위기의 밤이고, 고난의 밤이었습니다. 고난 받으신 주님은 그날 밤에 바울을 찾아 오셨습니다. 바울 곁에 늘 가까이 계셨던 주님은 그날 밤에 ‘담대하라 네가 나의 일을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고 적극적으로 위로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고난의 밤일수록 주님의 음성은 또렷이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주님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서로가 주님을 만난 경험들, 서로가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변화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일에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무딘 쟁기로 밭을 갈아야 하니 힘만 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의 밤은 찾아 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걸어가신 길만 보고 따라가면 됩니다.
1996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양심 냉장고’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적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에 한국은 정지선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지키는 사람도 거의 희박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정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한 개그맨 이경규씨는 지금도 잊지 못했던 촬영 기억을 언급했습니다. 그날은 새벽 4시까지 양심 운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포기하려던 순간 한 차량이 나타나 정지선을 지켰는데 이경규씨는 PD가 방송을 위해 사람을 보냈구나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 4시에 정지선을 지킨 운전자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옆 자리에 있던 아내도 장애인이었는데 “왜 정지선을 지키냐고 하니까 지켜야 하는거 아니에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날 신문에도 기사가 크게 났었다고 회상합니다. 실제 해당 방송은 도덕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이경규씨는 지금도 정지선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핑 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방송을 통해 사람들의 운전 양심을 높였다고 회상합니다. 그 당시 그 프로그램은 위기 상황이었고 다른 방송사에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 변화가 없이는 일어서기가 어려운 때였다고 합니다. 야심한 밤에 도로에 잠복하여 안전선과 속도를 지키는 사람을 찾는 방송 프로가 모두의 우려를 뛰어넘어 우리 사회의 공중도덕과 질서를 깨치는 계기가 되었고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의 삶을 느끼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 일상의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선한 양심을 지니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을 헐뜯고, 고난이 온다고 해도 진리의 편에 서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억압받는 일은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힘들고 어려울 때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찢기신 살과 피를 묵상하며 주님의 피가 여러분의 삶에서 흘러 나오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7) 주님께서 여러분의 굳건한 마음에 믿음의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성령강림후 제 17주)
목적은 하나입니다!
The purpose is one!
사도행전 22:22-30
유민용 목사
22:22 ○ 그 자리에 모인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는, 일제히 소리를 질러 댔다. “이런 자를 그냥 살려두어선 안 된다! 그는 죽어야 마땅하다!” 23 그들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 대면서, 옷을 벗어 던지고 흙을 움켜쥐고서 공중에 던졌다. 24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빨리 데리고 들어가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를 채찍으로 심문하여, 사람들이 왜 이렇게 소동을 벌이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라고 지시했다. 25 그래서 군인들이 채찍으로 치려고 바울을 결박하려 하자,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은 채 매질을 가하는 법이 어디에 있소?” 26 이 말을 듣고, 백부장이 얼른 천부장에게 달려가서 보고했다. “천부장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사람이 로마 시민이랍니다.” 27 그러자 천부장이 놀라워하며 바울에게 와서 물었다. “그대가 정말 로마 시민이오?” 바울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28 천부장이 말했다. “나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데, 돈이 꽤 많이 들었소.” 바울이 대답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입니다.” 29 이 말을 듣고, 바울을 심문하려고 했던 군인들이 즉시 물러갔다. 천부장 또한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결박한 일 때문에 덜컥 겁이 났다. 30 이튿날, 천부장은 바울이 왜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했는지 그 이유를 직접 알아보려 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을 묶었던 사슬을 풀어 주게 한 뒤, 유대인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 의원들을 모이게 했다. 그런 다음, 천부장은 바울을 데리고 나가서, 그들 앞에 세웠다.”(쉬운말 성경)
22 The crowd listened until Paul said that word. Then they all began to shout, “Away with such a fellow! He isn’t fit to live!” 23 They yelled, threw off their coats, and tossed handfuls of dust into the air. 24 The commander brought Paul inside and ordered him lashed with whips to make him confess his crime. He wanted to find out why the crowd had become so furious. 25 When they tied Paul down to lash him, Paul said to the officer[d] standing there, “Is it legal for you to whip a Roman citizen who hasn’t even been tried?” 26 When the officer heard this, he went to the commander and asked, “What are you doing? This man is a Roman citizen!” 27 So the commander went over and asked Paul, “Tell me, are you a Roman citizen?” “Yes, I certainly am,” Paul replied. 28 “I am, too,” the commander muttered, “and it cost me plenty!”
Paul answered, “But I am a citizen by birth!” 29 The soldiers who were about to interrogate Paul quickly withdrew when they heard he was a Roman citizen, and the commander was frightened because he had ordered him bound and whipped.
30 The next day the commander ordered the leading priests into session with the Jewish high council.[e] He wanted to find out what the trouble was all about, so he released Paul to have him stand before them.(New Living Translation)
바울이 자신의 간증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말을 이어가는 순간,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끊어 버렸습니다. 바울의 연설이 특별히 자극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미친듯이 고함을 질러 대면서, 옷을 벗어 던지고 흙을 움켜 쥐고서 공중에 던졌습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야 할 순간이었는데, 개역개정은 ‘이 말하는 것까지 듣다가’, 쉬운말 성경은 ‘바울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는’이라고 기록합니다. 이후 일제히 소리를 질러 대며 바울을 살려 두지 말고 죽어야 마땅 하다고 소리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더러운 짐승에 불과했습니다. 경건을 독점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들을때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다는 바울의 말은 너무도 불쾌했던 것입니다. 그의 말을 끊고 종교적 경건을 빙자하여 바울을 살려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째로 외우고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보면 613개로 분류됩니다. 248개의 계명은 “~하라”이고, “하지 말라”의 계명이 365개입니다. 그들은 율법만 잘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만 지키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형식은 있는데 율법을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 안에서도 그러하지요. 서로를 향한 마음과 사랑이 없이 원칙만 세워놓고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 관계는 늘 엄격하고 불편할 것입니다. 22절에 하반절을 보면 유대인들의 종교적 행위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려 두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는 완고한 마음에 어떻게 거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종교적 행위만 있었지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허상뿐인 하나님이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복음은 죽어가는 마땅한 죄인까지 되살려 새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기독교 믿음은 실제적 관계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겸손함이 내 안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지만 다시 일으켜 주시는 십자가 아래에서 영원한 생명이 경험되는데, 주안에서 새롭게 하시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인간의 어떤 행위도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음에서 있음이 된 것입니다. 이렇듯 구원은 완전히 새롭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를 따르는 옛질서를 붕괴시키고, 흠이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새롭게 창조하심으로써 다시는 사망의 세력이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의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 중심을 달라지게 합니다.
본회퍼 목사는 테켈 형무소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를 썼습니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다. 나는 불행한 나날을 보낼 때에도 마치 승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침착하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당당했다고. 정말 나는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인가? 새장속의 새처럼 불안해 하고, 그리움에 지쳐서 병들고, 목을 졸린 것처럼 숨을 쉬려 발버둥 치고…사소한 모욕에 분노를 떨고… 오늘은 이런 사람이고 내일은 저런 사람인가? 아니면 내 안에 그 두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가? 오 하나님,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당신이 아시듯,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 시는 히틀러에 저항하며 옥중에서 자신을 깊이 바라보며 고백한 시입니다. 주님 앞에 서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를 통찰하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니까 마음 중심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적 차원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고 말했습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문자로 읽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문자를 뛰어 넘어 주께서 실제적으로 함께하시는 믿음의 관계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후 찢어지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에 가득 찬 고기를 보며 욕망으로 가득 찬 자신의 옛모습을 자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의인되게 하려고 자신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은 어떤 죄인이라도 세상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한 삶을 살았어도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3:10)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며 세상을 치유하는 사명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다가 멈춰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듣기도 전에 귀를 막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성도는 매사에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끝까지 경주하는 사람이 참 신앙인입니다. 그날에 잘했다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 믿어 보다가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고 여긴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바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과의 사귐인 것입니다. 평생 말씀을 묵상한다고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처럼 여긴다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필요가 없어집니다. 지속적인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기 위해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여인을 돌로 쳐라”라고 하면 로마의 법을 정면적으로 어긴 것이 되기 때문에 고소거리가 되고, “돌로 치지 말라”하면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하십니다. 이후 예수를 고발하던 모든 사람들이 양심에 찔려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스스로를 책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결정적인 죄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줄 모르고 남의 눈에 작은 티를 탓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누군가를 돌로 치라고 외치는 세상입니다. 정치 사회의 현상만 봐도 이러한 일들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교회 안이라고 이런 일이 없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제대로 통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을 깊이 성찰하지 않고 경건의 모양만 따르게 되면 예수를 고발하려고 찾아 온 유대 지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하였으니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경건의 모양은 하고 있는데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나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의인의 권리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 8:10,11)
예수께서는 돌로 치러 온 사람들에게 자신을 성찰하며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또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예수님께 용서 받은 여인은 매순간 선택과 곤경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믿음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돌에 맞게 된 여인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자신의 생명과 교환해 주셨습니다.
24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빨리 데리고 들어가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를 채찍으로 심문하여, 사람들이 왜 이렇게 소동을 벌이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라고 지시했다.
당시 유대인의 일상 언어는 히브리 언어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전통 유대인들이 하는 히브리 말로 전했습니다. 당연히 로마의 천부장은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듣던 유대인들이 다시 난폭한 군중들로 변하니까 바울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던 것입니다. 천부장은 죄를 정하지도 않고 채찍부터 들도록 명령을 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어들였고 바울을 채찍질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인 나를 재판도 하지 않고 채찍질을 할 수 있느냐고 말했고, 바울 곁에 서 있는 백부장은 얼른 가서 천부장에게 보고합니다.
26 이 말을 듣고, 백부장이 얼른 천부장에게 달려가서 보고했다. “천부장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사람이 로마 시민이랍니다.” 27 그러자 천부장이 놀라워하며 바울에게 와서 물었다. “그대가 정말 로마 시민이오?” 바울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28 천부장이 말했다. “나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데, 돈이 꽤 많이 들었소.” 바울이 대답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입니다.”
바울은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로마 시민권자임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의식 안에 주님을 전하는 일로 온통 가득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자신의 시민권을 잊고 전도를 했는지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로마 시민권이 바울의 삶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사역을 마칠때 쯤이니 노년의 나이었을 것이고, 채찍에 맞는다면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 순간은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채찍은 여섯개의 가죽끈으로 되어 있었는데, 끈 하나마다 납덩이가 달려 있어서 채찍에 맞다가 죽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 채찍으로 맞을 경우 바울은 버텨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바울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생각나고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때에 로마 시민들은 재판도 하지 않는 상태에 매질을 하지 못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안전하게 로마까지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행정구역이던 다소에서 바울이 태어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도, 한평생을 살다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로마의 시민권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소중한 도구로 사용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외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는 영주권. 시민권이 주는 힘과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러니 천부장은 큰 돈을 주고서라도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지 못하면 소유와 결핍을 끊임없이 채워가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할 것입니다. 천부장이 획득한 로마 시민권은 로마 황제의 사람일 뿐이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속에서 살아 가지만 실제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분명하게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소유는 사람을 해치는 일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데 쓰이는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천국 시민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자녀들의 권세입니다.
여러분은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구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삶의 목적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한 것들이 백년 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삶을 드릴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세상속으로 뚫고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최후 승리가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기만 하면 시민권을 그 자리에서 발급한다고 증거합니다(요 1:12) 성경은 천국 시민된 성도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증거합니다(살전 2:9)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할 것임을 증거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천국 시민 된 성도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 28:19.20) 성령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로 사는 인생은 매일 매일 가르침 받고 배워가는 삶입니다. 나를 증명하며 사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삶의 주관자가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에 그 안에서 진정한 평안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때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 앞에서 무너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이며 분명하고 선명합니다. 목적을 알고 걷는 길은 흔들릴수는 있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붙들어 주심을 믿고 주님의 손에 내 삶을 맡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나라는 삶속에서 더 깊어져 갈 것입니다. 한주도 삶의 이유가 되시고, 삶의 목적이 되시는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