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12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7주

묵은 땅을 기경하라

Break Up Your Fallow Ground

마태복음 13:1~9, 18~23

1 그 날,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습니다. 2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가 앉으셨고, 사람들은 호숫가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가4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다. 그러자 새들이 날아와 씨를 모두 먹어 버렸다. 5 어떤 씨는 흙이 별로 없고, 돌이 많은 곳에 떨어졌다. 곧 싹이 났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6 해가 뜨자 시들어 버렸고, 뿌리가 없어서 곧 말라 버렸다. 7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졌다. 가시덤불이 자라서 그 씨를 자라지 못하게 하였다. 8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또 어떤 것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8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마음 속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 버린다. 이런 사람은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이다. 20 돌무더기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쁘게 얼른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21 그러나 뿌리가 없어 오래가지 못한다. 말씀 때문에 어려움이 생기고 박해를 당하면, 곧 넘어진다. 22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가로막아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쉬운성경)

1 Later that same day Jesus left the house and sat beside the lake. 2 A large crowd soon gathered around him, so he got into a boat. Then he sat there and taught as the people stood on the shore. 3 He told many stories in the form of parables, such as this one “Listen! A farmer went out to plant some seeds. 4 As he scattered them across his field, some seeds fell on a footpath, and the birds came and ate them. 5 Other seeds fell on shallow soil with underlying rock. The seeds sprouted quickly because the soil was shallow. 6 But the plants soon wilted under the hot sun, and since they didn’t have deep roots, they died. 7 Other seeds fell among thorns that grew up and choked out the tender plants. 8 Still other seeds fell on fertile soil, and they produced a crop that was thirty, sixty, and even a hundred times as much as had been planted! 9 Anyone with ears to hear should listen and understand.”

…18 “Now listen to the explanation of the parable about the farmer planting seeds: 19 The seed that fell on the footpath represents those who hear the message about the Kingdom and don’t understand it. Then the evil one comes and snatches away the seed that was planted in their hearts. 20 The seed on the rocky soil represents those who hear the message and immediately receive it with joy. 21 But since they don’t have deep roots, they don’t last long. They fall away as soon as they have problems or are persecuted for believing God’s word. 22 The seed that fell among the thorns represents those who hear God’s word, but all too quickly the message is crowded out by the worries of this life and the lure of wealth, so no fruit is produced. 23 The seed that fell on good soil represents those who truly hear and understand God’s word and produce a harvest of thirty, sixty, or even a hundred times as much as had been planted!”(New Living Translation)

마틴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 , 1899~ 1981)는 그의 책 “영적 침체”에서 그리스도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상태, 세상을 마냥 즐기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만족스럽지도 않은 상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상태를 “괴로운 상태”라 말합니다. 그는 이런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의 밭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치셨는데 그 첫번째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가장 먼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음의 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더 넓게는 이 비유가 예수님의 말씀 사역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전하실때 제자들은  왜 이 비유를 말씀 하시는지 질문 했습니다. 주님의 대답11절과 12절입니다. 10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 여쭈었다. “어찌하여 선생님께서는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11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나라에 관한 비밀을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12그 특권을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넉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같은 말씀 앞에서 어떤 사람의 마음은 열리고, 어떤 사람의 마음은 닫힙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8십자가에 관한 소식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물리치리라.”(고전 1:18-19) 세상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 깨닫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냥 십자가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감춰져 있는 것입니다.  

미국 성공회 사제 로버트 파라 카폰(Robert F. Capon:1925-2013)은『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원제: Kingdom, Grace, Judgment) 에서 세상에는 두 가지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즉각적인 힘입니다. 사람들은 이 힘에 본능적으로 이끌립니다. 그러나 또 다른 힘이 있는데 씨 뿌리는 비유가 전하고 있는 힘입니다. 약해 보이고 숨겨져 있지만, 끝내 이기는 힘입니다. 씨가 땅에 묻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세상은 이 방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어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말씀을 뿌리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알로 심겨 지셨고,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내어 맡기셨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자리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손을 붙드시고 그를 온 세계의 가장 뛰어난 이름으로 올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한결같지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외부의 침입으로 수시로 바뀝니다. 어떤 날엔 길가 밭이었다가, 어떤 날엔 자갈 밭이고, 어떤 날엔 가시덤불을 만납니다. 한번 경작했다고 해서 늘 좋은 땅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여호와를 찾을 때니‘(호10장 12절)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으십니까? 예수를 믿고 주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매일 누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마음의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의 것들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담긴 말씀의 씨를 먹어 버리는 새들이 온다는 것입니다. 복수형입니다. “4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다. 그러자 새들이 날아와 씨를 모두 먹어 버렸다.” 말씀을 빼앗아 가는 새들은 악한 자를 상징합니다.  19절 보시기 바랍니다.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마음 속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 버린다. 이런 사람은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이다.” 악한 자가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은 마음이 깨닫지 못한 채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마음의 밭을 부지런히 경작해야 합니다. 예배는 바로 그 자리, 우리의 굳은 마음과 묵은 땅을 하나님께서 갈아엎으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기쁨이 회복되고, 용서할 힘도 생깁니다. 그러나 이 갈아엎음은 나의 결심과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경작하려 할수록 오히려 환경 앞에 무너집니다. 마음 밭을 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감각한 길가 –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마음 속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 버린다. 이런 사람은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이다. 헬라어로 길가는 파라 텐 호돈(παρὰ τὴν ὁδόν) 입니다. 수없이 밟고 지나간 길옆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길가 밭과 같은 마음은 말씀이 심겨질 틈이 없습니다. 말씀이 자라기도 전에 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는 있지만 내 삶의 깊은 곳을 뚫고 오지 못합니다. 말씀이 뿌리내릴 틈조차 없는 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조차 강제로 열어 보이시지 않지만, 우리의 온 마음과 삶을 내어드릴 때 말씀이 지닌 생명력이 길가 밭과 같은 마음도 말씀에 붙들린 삶이 되어지도록 바뀌는 것입니다.

뿌리 없는 자갈 밭 – 20 돌무더기에 뿌려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쁘게 얼른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21 그러나 뿌리가 없어 오래가지 못한다. 말씀 때문에 어려움이 생기고 박해를 당하면, 곧 넘어진다. 자갈 밭의 마음은 두려움 앞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줄 뿌리가 깊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쑥 불쑥 찾아오는 어려움과 불안 앞에서 믿음이 쉽게 흔들립니다. 자갈 밭 신앙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쁘게 얼른 받아들이지만, 뿌리 내릴 깊이가 없어 문제가 생기면 바로 흔들리고 넘어지는 신앙입니다. 단순히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삶을 붙들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누구보다 먼저 고백했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돌 같은 마음을 뚫고 들어와 그의 마음을 만지시고 사랑으로 회복시키시는 주님 앞에서 그는 새로워졌습니다. 오순절 성령께서 그의 마음 밭을 새롭게 하셨을 때, 베드로는 생명까지도 내어 드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실패와 불안 속에서도 찾아오셔서 가장 쉽게 흔들리던 그 자리가 가장 깊이 뿌리 내리는 자리로 바꿔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삶을 둘러싼 가시덤불 – 22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가로막아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한 가정의학과 의사가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원인 모를 두통과 이유 없는 통증으로 병원을 수시로 찾아오던 환자가 어느 순간부터 오지 않아 알고 보니 오랜 시간 해결되지 않았던 염려가 사라지고 나니까 오랫동안 괴롭히던 몸의 아픔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풀리지 않은 마음의 짐이 자신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내 삶을 둘러싼 가시덤불은 처음에는 보이지 않지만 점점 커지며 영향을 줍니다. 삶이 안정되어 부족함이 없다고 여겨질수록 마음 깊은 곳에 자라고 있는 가시덤불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나님 보다 물질을, 내 삶의 평안을, 성공을 더 생각하고 미래를 더 염려하여 의지한다면 내 삶에 가시덤불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재물이 죄가 아니라, 재물이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염려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 염려가 우리 마음을 차지하여 하나님의 것을 누리지 못하게 가로막는다면 그것이 바로 가시입니다. 물질 뿐 아니라 완벽주의, 인정받고 싶은 마음, 안정에 대한 집착도 말씀을 막는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가장 많이 생각하고 마음 두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삶을 둘러싼 가시를 발견하고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말씀보다 더 크게 자라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 안의 가시를 드러내십니다. 기도할 때 내 안에 자라고 있는 염려와 불안을 주님께 내어 놓게 하십니다.

좋은 땅 – 23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삭개오의 삶을 보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남의 것을 토색하며 살았지만 주님을 만난 후에는 이제껏 토색했던 것을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회복은 삶에 맺힌 열매였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지금도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 안에서 일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으로 풀어가는 인생에 답이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내 방식과 뜻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마음은 지금 어떤 밭입니까? 이 낯선 땅에서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버거운 우리에게 마음 밭을 기경하는 것은 내 의지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내 힘으로 하려 할수록 더 지칠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을 기경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두 눈을 예수께로부터 떼지 맙시다. 그분은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요 완성자 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고 십자가의 부끄러움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히 12:2)

우리의 무감각한 길가, 뿌리 없는 자갈밭, 상처와 염려로 찔린 가시덤불, 이 굳은 땅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신 값을 치르셨습니다. 삶의 현실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눈물짓게 할지라도, 그 눈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빚어가시는 자리가 됩니다. 이제 믿음의 땅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어드릴 때 하나님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0705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6주

내가 쌓은 두로의 성벽

My Tyre, My Wall

스가랴 9:9-12

9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10 “내가 에브라임에서 전차들을 없애겠고 예루살렘에서 말들을 없애겠다. 전쟁에서 쓰이는 활들은 부러질 것이다. 그 왕이 나라들에게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의 나라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11내 백성아, 내가 너희와 언약을 맺었으며 희생 제물의 피로 그 언약을 봉인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가운데 포로 된 사람을 물 없는 웅덩이에서 풀어 주겠다. 12희망을 가진 너희 포로들아, 너희의 요새로 돌아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이른다. 너희를 옛날보다 두 배로 회복시켜 주겠다. (쉬운 성경)

9 Rejoice, O people of Zion! Shout in triumph, O people of Jerusalem! Look, your king is coming to you.  He is righteous and victorious, yet he is humble, riding on a donkey riding on a donkey’s colt.
10 I will remove the battle chariots from Israel and the warhorses from Jerusalem. I will destroy all the weapons used in battle, and your king will bring peace to the nations. His realm will stretch from sea to sea and from the Euphrates River to the ends of the earth.
11 Because of the covenant I made with you, sealed with blood, I will free your prisoners from death in a waterless dungeon.
12 Come back to the place of safety, all you prisoners who still have hope! I promise this very day that I will repay two blessings for each of your troubles.(New Living Translation)

지난 두주 동안 예레미야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던 백성들에게 다가올 징계를 전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스가랴서는 예언의 배경이 다릅니다. 바벨론에서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징계를  받고 돌아온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스가랴서는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면서 이전에 화려했던 성전의 영광이 과연 회복될까? 그 옛날의 영광이, 정말 다시 우리에게 임할까?” 낙심을 마주한 백성들에게 전했던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오직 하나, 자기 백성과의 관계 회복에 있습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난 백성에게 징계를 내리신 것도, 포로 생활에 지쳐버린 백성에게 “내가 너희를 버려두지 않았다, 결코 잊지 않았다” 말씀하신 것도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זְכַרְיָה, 즈카르야)라는 이름 자체가 설교입니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하나님께서 잊으신 것 같은 깨어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스가랴서를 읽을 때마다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려 보기 바랍니다. 때때로 나의 생각과 욕심이 하나님 보다 앞서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서 선수들은 수없는 패배를 거칩니다. 더 강한 상대에게 실패를 반복하면서 경험과 실력을 쌓게 됩니다. 그런데 가장 위대한 실패를 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강해지기 위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 패배자의 자리에 내려가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실패하지 않으려고, 넘어지거나 뒤쳐지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왕은 반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 가장 패배한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세상은 골고다를 실패의 현장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가 결코 스스로 쌓을 수 없는 견고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오늘 본문은 시온 백성들에게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기뻐하고 즐거이 외치라고 시작합니다.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피난처가 되신 그분이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9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겸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עָנִי(아니)는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고난받는 자’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당시에 왕은 군용 말을 탔는데 예수께서는 전투 능력을 상징하는 군마(軍馬)가 아니라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시온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왕이 갑옷을 입고 강한 말을 타고 오실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의로우신 왕이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를 두려워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미 무너뜨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그분의 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입을 수 없는 값비싼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의를 “호심경”이라 부릅니다(엡 6:14). 호심경은 심장을 지키는 갑옷과 같습니다. 의의 갑옷은 전쟁터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화살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사단이 자주 사용하는 교만과 결핍이라는 화살로 부터 지켜 주는 것이 의의 호심경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수많은 화살이 성도의 심장을 향해 날아올 때, 의로우신 주님은 성도들이 즐거이 외칠 승리의 이유가 되어 주십니다.

세상은 그 왕을 배척했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배척의 뿌리는 영적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눈을 뜨지 못했고 자신의 죄를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열심과 의로움으로 우리를 형식에 가두거나 영적 교만으로 유혹하지만 의로우신 예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십니다.

둘째, 스스로 강해지려던 요새는 무너집니다.

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 4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 (스가랴 9:3-4)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기대하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즐거움과 기쁨도 영적 교만이 될수 있습니다. 교만은 세상의 즐거움이나 부요함을 통해서도 우리를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며 즐거워하고, 내가 쌓아올린 것들로 의롭게 여기는 것도 영적 교만입니다. 뿐만 아니라 상처로 인해 결핍에 갇혀 사람의 위로만 구하는 것도 사단이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소유로, 하나는 결핍으로 향하지만 결국은 같은 곳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설 수 있다는 자기기만도, 하나님이 계셔도 소용없다는 체념도 의로우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 교만을 보여주는 도시가 바로 두로입니다. 두로는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서 요새를 세웠습니다. 적들로 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 약 800미터 떨어진 섬에 성벽의 높이가 약 45m나 되는 견고한 성읍을 건설하였고 역사속에서 누구도 이 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치 철옹성 같은 요새였습니다. 게다가 온 바다의 상업을 도맡아 하던 나라이므로 해상에서 그들을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은을 티끌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아 올렸다고 표현합니다. 두로는 누구보다 현명했고 부유했고 강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두로에 대한 예언이 크게 현실성이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두로 왕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씀합니다. “2 사람아, 두로 왕에게 전하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마음에 교만한 생각을 품으며 ‘나는 신이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신의 보좌에 앉아 있다’라고 말한다. 네가 네 자신을 신처럼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겔 28:2) 두로의 진짜 문제는 강함이 아니었습니다. 강함을 쌓으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버린 것이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신의 악단’ 영화를 교우들과 함께 보았습니다. 당의 명령에 충성하는 군인들의 신념이 마치 두로가 쌓아 올린 높고 강했던 성벽 같아 보였습니다. 북한 보위부는 외화 지원금을 얻기 위해 지시를 내리고 승리 악단원들과 함께 부흥회를 준비하게 합니다. 이 단원들은 숨어서 주님을 믿는 악단이었습니다. 승리 악단원들은 찬양이 금지된 땅에서 진짜 찬양을 부르지만 보위부 군인들은 당의 명령에 따라 예배를 연극처럼 드립니다. 그들의 심장은 수령님을 향한 충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연기하듯 읊조리던 찬양과 읽어 내려가던 성경의 말씀이 보위부 군인들 내면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수령을 향하던 충성이 주님을 향한 예배가 됩니다. 신의 악단 한 인물의 고백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머리와 생각은 당을 따르는데, 마음과 영혼은 예수를 따르네요. 곧 처형 당할 목숨이니, 오늘 고백하는 거라우.” 예배의 회복은 이처럼 무릎 꿇는 대상을 바꾸어 줍니다.

라틴어 가운데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단어입니다. 성도에게 메멘토 모리는 단순히 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잊는 순간, 우리는 두로 왕을 닮아갑니다. 입술로는 찬양하고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나의 재물과 성공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과 겸손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겸손해지려는 바로 그 순간에도 교만은 속삭입니다. 찬양하는 자리에서도, 기도하는 자리에서도, 심지어 섬기는 자리에서도 “네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 네가 이만큼 했으면 하나님께서 네 편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라는 유혹입니다. 결국 교만은 인생과 영혼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독입니다. 실제로 역사속에서 두로는 동방을 정벌하던 알렉산더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7개월의 항전 끝에 마침내 함락되고 불에 탄 재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권력도, 재물도 언젠가는 다 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인생은 다릅니다. 시작이 좋은 인생은 많아도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인생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은 더 강해지고 더 높이 쌓으라고 요구하지만 성도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이 아무리 정교해도 하나님의 뜻보다 지혜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약함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때, 평화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10 “내가 에브라임에서 전차들을 없애겠고 예루살렘에서 말들을 없애겠다. 전쟁에서 쓰이는 활들은 부러질 것이다. 그 왕이 나라들에게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의 나라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요새로 돌아올 때 참된 쉼을 얻습니다

11 내 백성아, 내가 너희와 언약을 맺었으며 희생 제물의 피로 그 언약을 봉인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가운데 포로 된 사람을 물 없는 웅덩이에서 풀어 주겠다.

믿음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실패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서 행하신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진짜 삶의 왕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심으로 죄와 사망의 자리를 생명과 화목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성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두려워 말고 내가 찢긴 살과 흘린 피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피의 언약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주님의 새 언약입니다. 이것은 오래전 선지자들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맺고 결단했지만 그 언약을 잊을 때도 있었고,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12 희망을 가진 너희 포로들아, 너희의 요새로 돌아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이른다. 너희를 옛날보다 두 배로 회복시켜 주겠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주님께서 멍에를 먼저 지셨고, 멍에를 지고 하는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내 멍에가 무겁지 않고, 쉽고 가볍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이 이미 멍에를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왕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전쟁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끊어 버리셨습니다. 칼과 창이 아니라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 인간의 죄와 부정한 것들을 씻겨 내셨습니다. 불신앙으로 인한 절망과 미움, 시기 가운데 갇혀 살던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오신 예수를 인해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풍성한 삶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따라 하루하루 순종의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 예배의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으로 자유를 누리며 기쁨을 회복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내 삶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더 간절히 원할때가 많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의 자리에 나를 앉혀 놓았습니다. 지금도 예배할 수 없는 곳에서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들의 삶이 우리와 다른 삶일까요? 우리는 자유 안에서 일상에 묻혀 식어진 마음을 발견하며 우리에게 있는 그 간절함이 내 삶의 문제에만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두로가 스스로 쌓아올린 요새도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뒤에 감추어진 결핍과 상처와 불안, 내 힘으로 애쓰는 감정들, 내 인생을 내 힘으로 붙들려고 하는 교만은 내 안에 높게 쌓아 올린 벽입니다. 우리는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서 나만 아는 두로의 성벽을 쌓았지만, 그분은 무너짐의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이 벽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질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예배의 회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겸손의 왕은 우리를 회복시키러 오셨습니다. 형식이 아니라 기쁨으로, 은혜로 나아오는 예배자로 우리를 세우십니다. 우리를 은혜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찬양하기 원합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실망한 이 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찬송가 27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