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강림절 제 10주
우리 안에 새겨 두신 은혜의 흔적
The Scar He Chose to Leave
창세기 32:22~32
22그날 밤 야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명의 아들을 데리고 얍복 강 나루를 건넜다. 23그는 자기의 가족 모두를 강 건너로 보낸 다음 자기의 재산도 모두 강 건너로 보냈다. 24그리하여 야곱이 혼자 남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날이 밝을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25그 사람은 자기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관절을 쳤다. 그 때문에 야곱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엉덩관절이 어긋나게 되었다. 26그런 다음 그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였다. “날이 새려고 하니 날 놓아다오.” 그러나 야곱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게 복을 빌어 주지 않으시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27그 사람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28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였다. “이제부터는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 이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고 사람들과도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 29 야곱이 말하였다. “부디 어르신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네가 내 이름을 묻느냐?” 그런 다음 그는 거기에서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30그래서 야곱은 그 곳을 브니엘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었구나. 그런데도 아직 살아 있다니!” 31 야곱이 브니엘을 지나갈 때 해가 솟아올랐다. 그는 엉덩관절을 다쳐서 절뚝거리며 걸었다. 32이런 까닭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엉덩관절에 붙어 있는 힘줄을 먹지 않는다. 야곱이 그 힘줄 가까이에 있는 엉덩관절을 다쳤기 때문이다. (쉬운성경)
22 During the night Jacob got up and took his two wives, his two servant wives, and his eleven sons and crossed the Jabbok River with them. 23 After taking them to the other side, he sent over all his possessions. 24 This left Jacob all alone in the camp, and a man came and wrestled with him until the dawn began to break. 25 When the man saw that he would not win the match, he touched Jacob’s hip and wrenched it out of its socket. 26 Then the man said, “Let me go, for the dawn is breaking!” But Jacob said, “I will not let you go unless you bless me.” 27 “What is your name?” the man asked. He replied, “Jacob.” 28 “Your name will no longer be Jacob,” the man told him. “From now on you will be called Israel, because you have fought with God and with men and have won.” 29 “Please tell me your name,” Jacob said. “Why do you want to know my name?” the man replied. Then he blessed Jacob there. 30 Jacob named the place Peniel (which means “face of God”), for he said, “I have seen God face to face, yet my life has been spared.” 31 The sun was rising as Jacob left Peniel, and he was limping because of the injury to his hip. 32 (Even today the people of Israel don’t eat the tendon near the hip socket because of what happened that night when the man strained the tendon of Jacob’s hip.(NLT)
우리는 태어나 많은 것을 손에 쥐는 연습을 하며 삽니다. 어린아이는 장난감을 손에 쥐고 빼앗기지 않으려 힘을 줍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내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것을 움켜 쥔 채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속의 야곱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강 건너로 보내고 홀로 남은 밤에 무언가를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홀로 남은 밤 우리는 무엇과 씨름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을 강 건너편으로 보낸 홀로 남은 밤에 역사하십니다. 그날 밤 야곱은 두 아내, 두 여종, 열한명의 아들들과 지난 세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재산들을 강 건너편에 보내 놓고 홀로 남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20년간 라반의 집에서 얻어낸 것이었고 자신을 지탱해 온 전부였습니다.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은 야곱을 불안과 두려움에 짓눌리게 했을 것입니다. 20년 전, 늙으신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도망쳤던 그 날의 빚이, 이제 400명의 군사가 되어 자신 앞에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열매로부터 도망칠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인간의 연약함만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인생의 그 절박한 순간 혼자 있는 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날 밤 야곱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면, 먼저 야곱이라는 사람이 평생 무엇과 씨름하며 살아왔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났고 장자의 축복을 얻기 위해 씨름했습니다. 20년간 장인 라반과 씨름하며 재산을 쌓기 위해 씨름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얍복강 나루에 홀로 남은 그 밤, 야곱의 씨름의 대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경은 씨름하던 상대를 ‘그 사람’ 이라고 부릅니다. 25 그 사람은 자기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관절을 쳤다. 그 때문에 야곱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엉덩관절이 어긋나게 되었다. 씨름을 마친 후 야곱은 새 이름을 받게 됩니다. NLT성경은, you have fought with God으로 번역합니다. 그날 밤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고 밤새 씨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길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 날밤 야곱은 하나님과의 씨름 속에서 20년 동안 자기 힘으로 버텨 온 자신 안에 옛사람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 주셨습니다.
야곱은 밤새 붙들고 놓지 않다가 야레크(יָרֵךְ, yarek) 라고 하는 엉덩이 관절을 다쳐서 평생 절뚝거리게 됩니다. 야레크 (יָרֵךְ, yarek) 라는 단어는 종종 후손·생산력의 자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입니다. 야곱의 직계 자손들이 66명이니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창 46:27), 허리에서 나온 자라고 번역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히브리어 단어도 야레크(יָרֵךְ, yarek) 입니다. 하나님이 정확히 이 지점을 치셨다는 것은 야곱의 힘을 상징하는 근원을 꺾으시고 새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야곱이 이긴자라는 새이름을 얻게 되지만 절뚝거리는 삶으로 마무리 됩니다.
우리는 자기 신념의 틀 안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약속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의 문제 앞에서는 자꾸 넘어지고 내 힘으로 버티려 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 하나님은 야곱이 의지하던 힘을 꺾으셨습니다. 고집과 이기심, 하나됨을 막아버리는 우리 안에 평생 붙잡고 있던 그 손을 펴는 것입니다. 비록 절뚝거리며 걷지만 새이름으로 첫걸음을 떼는 것입니다. 이김을 주신 주님 바라보며 적당히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다 드리며 주가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2. 힘이 꺾여진 자리에서 받은 은혜
사람의 삶에는 수많은 광야가 찾아옵니다. 광야는 내 힘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그 곳에서 생각이 뒤집히고 마음 안에 하나님의 새 법이 새겨집니다.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힘을 꺾으신 자리에서 새 이름을 허락하셨습니다. 찬양 “나” 는 송명희 시인의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그녀에게 남들과 다른 삶의 고난을 주셨지만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이라 고백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그녀에게 공평하심은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앞에 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동일한 은혜였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성취와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라 요구하지만 이 찬양의 고백은 세상이 채울 수 없는 은혜를 깨달은 자의 고백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힘이 꺾인 자리에서 새 이름을 받았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힘이 꺾일 때 비로소 참된 이름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에게든지 그 십자가 앞으로 나아올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그 피 값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달라집니다. 우리의 아픔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픔이 있는 그 자리에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이 먼저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닿는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리한 상황과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판단 기준이 되어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주 씨름하고 넘어지는 상황은 무엇입니까? 그릇된 마음이 만들어 놓은 그 틀을 깨고 들어 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십시오,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채워 나가는 삶이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입니다.
시내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도 똑같았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지 40일이 되도록 내려오지 않자, 백성은 보이지 않는 약속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아론에게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 기록합니다. 완고함이란 멍에를 메기 싫어 목을 뻣뻣이 세우고 버티는 황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서 목을 곧추세우고 버티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죄의 본질입니다.
시대마다 사람들은 무엇을 자신의 마음의 자리에 앉힐 것인가를 바꾸어 왔습니다. 율법을 앉히고, 이성을 앉히고, 오늘날은 감성과 느낌을 진리의 자리에 앉힙니다. 감정과 기분이 태도가 되고 경험이 되고 삶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내 감정과 기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옛 자아의 습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십시오. 우리의 연약한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올때 하나님의 얼굴과 나의 연약한 그 모습이 만나는 그 자리에서 참된 은혜가 회복됩니다.
누구에게나 피할수 없는 현실은 찾아옵니다. 멀리에서 보면 부러운 누군가의 삶도 가까이에서 보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눈물의 기도의 자리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버틸 수 없는 삶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 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매일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나의 인생을 내 힘으로 끝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지체들을 만나기 전에,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예배에 오기 전에 우리는 먼저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삶의 예배를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믿음생활의 균형은 하나님 앞에 서는 삶이 가장 먼저임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언젠가 절뚝이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우리는 지으신 모습 그대로 서게 될 것입니다.
주의 사랑 안에 거할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도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온전한 성전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참 자아를 회복하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언덕을 오르셨고, 교회의 모퉁잇 돌이 되셨습니다.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될때 우리 안에 새겨진 십자가의 흔적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릴 새롭게 하신 증거입니다. 마귀는 참소하며 우리를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도록 속삭입니다. 세상속에서 형성되는 수많은 평가와 정죄는 거짓자아를 만들어 내지만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구원의 은혜는 세상의 부요함에 있지 않고, 세상을 이기신 주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데서 얻게 됩니다
오래전 저는 사고로 의식을 잃었던 적이 있습니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어 다섯 시간을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의식을 찾고 눈을 떴을 때 저는 제 인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오른손 마디마디가 차갑게 굳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불편한 손을 볼 때 저는 야곱의 절뚝거림을 생각합니다. 제 몸에 남겨진 그 흔적은, 여전히 단단하고 뻣뻣한 제 삶 속에서 하나님이 저를 살려주셨다는 감사의 고백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매일 주가 주신 살과 피를 매일의 양식 삼아 먹어야 살아납니다. 지금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잃고 싶지 않아 밤새 씨름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내 힘으로 내려놓을 수 없음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올려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밤 이후 야곱은 다리를 절뚝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절뚝이던 야곱은 에서에게로 가서 일곱 번 땅에 엎드렸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씨름의 중심에 두지 않았기에 몸을 낮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절뚝거리며 오는 동생을 보며 에서는 두팔로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함께 울었습니다. 형제 사이에 있었던 죄책감과 정죄심, 억울함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 안에서 서로가 온전히 이어졌습니다. 그 절뚝거림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밤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30그래서 야곱은 그 곳을 브니엘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었구나. 그런데도 아직 살아 있다니!” 31 야곱이 브니엘을 지나갈 때 해가 솟아올랐다. 그는 엉덩관절을 다쳐서 절뚝거리며 걸었다. 32이런 까닭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엉덩관절에 붙어 있는 힘줄을 먹지 않는다. 야곱이 그 힘줄 가까이에 있는 엉덩관절을 다쳤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삶에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힘을 꺾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걸음이 증명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으로 값을 다 치르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아름답고 위대한 삶으로 빚어 가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미 다 부서지고 무너진 존재입니다. 성도는 이제 기도의 무릎으로 절뚝이며 나아갈 뿐입니다.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움켜진 손을 펴고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새 아침을 맞이하시길 축복합니다.









성령강림절 제 9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When Words Run Out, the Spirit Prays
로마서 8:26~30
26.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9.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셨고,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쉬운성경)
26 And the Holy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For example, we don’t know what God wants us to pray for. But the Holy Spirit prays for us with groanings that cannot be expressed in words. 27 And the Father who knows all hearts knows what the Spirit is saying, for the Spirit pleads for us believers[l] in harmony with God’s own will. 28 And we know that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m]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29 For God knew his people in advance, and he chose them to become like his Son,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 30 And having chosen them, he called them to come to him. And having called them, he gave them right standing with himself. And having given them right standing, he gave them his glory.(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되면 삶의 고민과 흔들림이 멈추고 믿음이 더욱 분명하고 선명해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현실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에게도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오고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시간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1) 라고 탄식합니다. 우리 안에는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죄의 세력이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팽팽하게 맞서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내면의 정직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거룩한 싸움의 한복판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선포합니다.
1.우리의 연약함을 중보하시는 성령님
26.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이 무엇일까요?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내 힘으로 할수 없는 한계에 부딪힐 때 우리에게는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그 사실을 깊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기쁨은 내가 구한 대로 응답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를 누리는 데 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있어도 그분의 선하심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와 같지 않을수가 있습니다. 기도한 대로 되지 않는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바울 안에 선한 일 행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를 이끌었습니다. 고린도 후서의 고백에 보면, 그의 사역속에서 복음의 영광은 완전한 그릇이 아니라,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나 자신의 연약함 속에 담겨 있지만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하려고 애써도 결국 우리가 감추고 싶었던 연약함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만 같은 상황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조차,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자리 그 앞에 서는 것이 기도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그 어떤 언어와 표현으로도 담아낼 수 없어 그저 눈물만 흐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간절히 갈망한다면, 오히려 연약함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분이 아니라 깊숙히 들어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무슨 말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물로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그 시간에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돕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단지 곁에 머무는 차원의 위로만이 아니라 짐을 함께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약함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소망의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시가 있습니다.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라는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슬픔이나 절망이 전혀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지은 작사자 엘리자 히윗(Eliza E. Hewitt, 1851-1920) 여사는 1887년 학교에서 불량학생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폭력으로 척추 부상을 입고 오랜 병상 생활을 하던 중, 몸이 완쾌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영혼에 깊숙이 스며드는 햇살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고 기도하며 이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오늘 내 영혼에 햇빛이 비치네. 이 세상 하늘에서 빛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밝은 빛이라네. 예수님이 나의 빛이기 때문이라네. 오늘 내 영혼에 한 음악이 흐른다네. 나의 왕되신 분께 찬양을 드린다네. 내게 귀 기울이시는 예수님이 들으신다네. 입으로 노래할 수 없는 영혼의 찬송들을.
몸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성령 안에서 찬양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노래할 수 없는 영혼의 찬송들을 예수님이 들으신다는 고백은 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성령이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것, 이미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그 절망의 자리에 멈추어 서는 것이 아니라 영광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 영광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기복적인 성공의 간증이 아니라 성령의 탄식을 말합니다. 서로의 시간표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결코 헛된 시간이 없습니다.
2.부르심의 증거
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는 우리의 탄식의 기도, 우리가 겪는 세상의 수많은 고난도 포함 됩니다. 오늘의 세상을 보십시오. 이상 기후와 재난 속에 신음하고,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 권력과 정치의 자리에는 다툼과 폭력이 흐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세상이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깨어짐은 먼 곳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선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갑자기 찾아오는 아픔과 설명할 수 없는 고난 앞에 설 때가 있고, 세상속의 불의한 일 앞에 가슴 아픈 탄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괜찮아 다 잘될거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모든 것이 잘될 것을 바라며 그 말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증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신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통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해치기 위해서 모의하고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 선으로 바꾸사 요셉의 생애 가운데 협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선을 이룬 것이지, 요셉이 선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겪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의 일생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가 하는 일이 잘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선을 이루는 사람은 고난 가운데 그 보다 더 큰 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인내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요셉이 자신의 손으로 형들이 주었던 고통을 되 갚을 수 있는 위치에서 했던 말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입니다.
내 시간과 재능은 지금 누구를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까? 내 삶은 무엇을 위해 준비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교회에서의 나, 가정과 일터에서의 나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삶의 모든 순간이 예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내 삶에 더해지는 무게와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우리와 늘 동행하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29.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셨고,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부르심에는 인간의 그 어떤 자격과 조건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선택받은 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것도 자랑할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자격이 포함된다면 구원의 완전성이 상실됩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힘입어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 분의 사랑 앞에 서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삶으로 세워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그렇게 빚어 가십니다. 우리 눈에는 불안과 불확실한 시간이 더디고 답답하게 느껴져 피하고만 싶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 속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시는 더 크신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완성하시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 자리는 두려움의 자리가 아니라 기쁨의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아가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만날 때가 있고,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는 나 혼자만의 아픈 시간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절절한 마음으로 붙들고 있는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이든, 아픔의 시간이든, 혹은 평탄하고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시간이든 하나님의 손에서 버려지는 시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을 사용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아직 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바울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의 최종적 구원은 반드시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과 관계 맺는 삶을 통해 그 사랑을 실제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가르침을 배울 책임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미 성령께서 탄식속에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엘리자 히윗의 고백처럼 몸의 고통은 그대로인데 내 영혼에는 찬양이 흐르는 그 은혜의 감격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부르심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으로, 특권이 아니라 선교적 삶으로, 의심이 아니라 확신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 변화의 과정이 성령의 역사이고 이 회복의 과정이 거룩한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