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절 세번째 주일
오늘의 예배
Today’s Worship
시편 95편
95:1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같이 주님께 기쁨의 노래를 불러 드리자. 소리 높여 우리 구원의 반석이신 주님을 찬양하자. 2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분께 나아가자. 그분을 기리는 즐거운 찬송을 부르자. 3 주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4 깊디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디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이다. 5 주께서 바다를 지으셨으니 바다도 주님의 것이요, 마른 땅도 주님이 손수 빚으신 것이다. 6 그러므로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함께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 7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이요 그분께서 돌보시는 양 떼라. 오늘날 너희는 주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 8 ○ “므리바에서 너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맛사에서 너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희는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고 완고한 마음을 품지 말아라. 9 그때에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들을 똑똑히 보고서도, 나를 거듭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다. 10 그러므로 나는 40년 동안이나 그 백성들에게 분노하며 말하기를 ‘저들은 마음이 삐뚤어진 백성이요, 내 길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이로다.’ 하였고, 11 또 나는 화가 나서 맹세하기를 ‘저들은 내가 편히 쉬라고 저들에게 허락한 그 땅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쉬운말 성경)
1 Come, let us sing to the Lord!
Let us shout joyfully to the Rock of our salvation.
2 Let us come to him with thanksgiving.
Let us sing psalms of praise to him.
3 For the Lord is a great God,
a great King above all gods.
4 He holds in his hands the depths of the earth
and the mightiest mountains.
5 The sea belongs to him, for he made it.
His hands formed the dry land, too.
6 Come, let us worship and bow down.
Let us kneel before the Lord our maker,
7 for he is our God.
We are the people he watches over,
the flock under his care.If only you would listen to his voice today!
8 The Lord says, “Don’t harden your hearts as Israel did at Meribah,
as they did at Massah in the wilderness.
9 For there your ancestors tested and tried my patience,
even though they saw everything I did.
10 For forty years I was angry with them, and I said,
‘They are a people whose hearts turn away from me.
They refuse to do what I tell them.’
11 So in my anger I took an oath:
‘They will never enter my place of rest.’”(New Living Translation)
산을 오르는 사람은 정상을 향합니다. 입구에서 첫 발을 내딛을 때와 정상까지 올랐을때의 감격은 전혀 다릅니다. 같은 산이지만 도달해 본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올랐습니다. 믿음의 길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들 이삭과 함께 올라갑니다. 그리고 정상에서 순종의 손을 들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양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성소로 올라가며 시편 95편을 함께 노래했을 것으로 봅니다. 1절에서 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는 마음으로 성소 안으로 올라갑니다. 그 첫단어가 ‘오라’입니다.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같이 주님께 기쁨의 노래를 불러 드리자” 6절도 보시면,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함께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라’는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3절로 5절은 주를 처음 만난 기쁨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3 주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4 깊디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디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이다. 5 주께서 바다를 지으셨으니 바다도 주님의 것이요, 마른 땅도 주님이 손수 빚으신 것이다.’ 넓은 바다도 우리가 딛고 살아가는 땅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빚으셨기에 성도는 믿음으로 하루하루 땅을 밟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작은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합니다. 오늘날 미세한 반도체 칩 하나에 세상 모든 정보가 담기고, 작은 화면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들여다 보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잃어버린 시대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믿음을 통해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됩니다. 그리고 그 동행 안에서 우리를 향해 품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여정입니다.
7절에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라는 선언과 함께 시편의 분위기가 갑자기 전환됩니다. 그리고 8절부터는 광야에서의 사건, 곧 므리바와 맛사에서 조상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했던 일을 상기시켜 줍니다. 므리바(מְרִיבָה)는 ‘다툼’, 맛사(מַסָּה)는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물이 없자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다투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만나를 먹었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앞서 가는 것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출 17:7)를 물었습니다. 므리바와 맛사에서의 사건은 하나님을 불신하며 불평했던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38년을 광야에서 연단받고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약속의 땅을 보지 못했습니다. 시편 95편을 묵상하며 우리가 기억해야 교훈을 나누겠습니다.
첫째, ”오늘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완고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의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할 때 시편 95편을 인용합니다. “7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는다면, 8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시험받던 기간에 반역했던 것처럼,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히3:7-8)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4장에서도 히브리서 기자는 다윗을 통해 ‘오늘의 예배’가 무엇인지 다시금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시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그 말에 순종하고 너희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히 4:7). 우리의 ‘오늘’이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단어 ‘하이욤’은 지금 주의 음성을 듣고 현재를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어제의 말씀으로 오늘을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예배’는 매일 주시는 새로운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매일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십자가에 이끌림으로 우리의 강팍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불평과 불신의 언어가 시작됩니다. 예배는 주의 음성을 ‘오늘’ 듣고, ‘지금’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주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광야 1세대는 하나님을 불신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기억하고 마음을 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완고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자리를 채우십니다. 7절을 보시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이요 그분께서 돌보시는 양 떼라. 오늘날 너희는 주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
둘째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입니다.
‘기르시다’의 히브리어 마르이트(מַרְעִית)를 영어성경은 pasture로 번역했습니다. 풀밭, 목초지입니다. 목초지에서 풀을 먹고 살아가는 양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양식이 되시는 것입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들이 먹을 풀밭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에게 “나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기 위해 왔다”라고 말씀셨습니다. 양은 주의 말씀을 들을때 영혼이 살찌웁니다. 주의 자녀들의 영혼을 살찌우는 것은 세상의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업에 성공한 사람도, 실패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태어난 아이를 안고 헌아예배를 드리는 부부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이들도 주의 말씀을 듣고 영혼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조용히 병이 자라납니다. 반면에 주가 인도하는 양들은 깊은 골짜기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은 하나님의 훈련이었습니다. 광야에 풀이 없으니, 하나님은 매일 아침 어김없이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광야가 없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알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광야의 시간에 있는 이들에게 그 은혜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광야는 어제 저장해 놓은 은혜로 살수 없는 땅입니다. 욕심을 낼때 그 만나에 악취가 나고 벌레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만나로 사는 것이 아닌 오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내 삶의 안정을 위해 살아갑니다. 집을 장만하고, 자녀를 위해 많은 것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선명하던 목자의 음성이, 삶이 안정될수록 왜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것일까요? 하루의 양식이 넉넉해질수록 왜 기도의 절박함은 사라져 가는 것일까요? 아는 것은 많아지고 경험도 깊어지는데 하나님께 무릎 꿇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그러나 양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옛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고, 마음이 굳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현실의 문제를 넘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는 시간이 지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진 사람의 손을 잡아 주고,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함께 걸어 주며, 아직 길을 잡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의 책임입니다.
셋째 문제는 밖에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8-10)
기적을 보았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마음이 굳어진 것은 기적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기적이 아니라 참된 순종입니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 그것이 우리가 지금 드려야 할 ‘오늘의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을 주셨다면 우리에겐 오늘을 살아내야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내려 놓아야 합니까? 기도의 중심에 있었던 나만을 위한 날카로운 검, 겸손한 척 포장된 교만, 손과 발은 움직이지만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린 종교적 형식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왜 예수여야만 했는지,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다시 진지하게 그 음성 앞에 서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예배 드리러 올라가는 공동체에게 굳이 광야의 실패를 상기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배하는 자들도 동일한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기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여전히 완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귀로 듣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거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오늘 너희에게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의 설교 가운데 「거의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이라는 설교문이 있습니다. 웨슬리는 Almost Christian을 겉으로는 신앙의 모든 모양을 갖추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중심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배하고 기도하지만, 그 은혜가 삶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려드려야 할 예배는 내 삶의 ‘거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거의 다 온 것 같지만, 거의 다 드리는 것 같지만, 거의 다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 같지만 내 전부를 드리지 못하는 그 자리에서 오늘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어제의 양식으로 살 수 없었고, 오늘 주시는 믿음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려는 유혹 앞에 서 있었습니다. 끝까지 구하십시오, 찾으십시오, 두드리십시오.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입니다.
배척받고 조롱받으신 예수께서 그 길을 먼저 걸으셨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드럽게 마음을 열고, 그 길 위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나의 몸은 주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점점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씀보다,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말에 더 끌립니다.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보다 내 상처를 공감해 주는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 편리한 도구가 많아질수록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헌신은 점점 가벼워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13 도리어 여러분은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매일의 그날그날 동안에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마음이 완고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히3:13)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고 얻게 되는 그 어떤 것도 구원을 보증해 주지 않습니다. 신실한 성도는 서로가 깨워주고 복음이 치료제가 될수 있도록 서로를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부부도 서로의 정서적 외로움만을 채워주는 관계라면 세상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부부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도록 서로를 깨우고 ‘오늘의 복음’으로 서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이 시간 지금 이곳은 거룩한 공간입니다. 시편 기자가 전하는 ‘주의 음성을 들으라’는 권면 앞에 더 진지하게 마음에 새기며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닫혀있던 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종의 자리가 어디인지,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나 홀로 씨름하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던 것이 무엇입니까?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가 함께 올라가며 주 앞에 엎드렸습니다. 엎드려 고개를 숙일때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요, 주님께서 우리를 풀밭이 되시고 풍성한 목초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라’로 시작된 시편 95편은 ‘들어가지 못하리라’로 끝이 납니다. 광야 세대에게 닫혔던 그 문이 우리에게는 ‘오늘’로 열려 있습니다. 그 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열어 주셨습니다. 깊고 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고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바다를 지으신 분, 마른 땅을 손수 빚으신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의 풀밭이 되시고 풍성한 목초가 되어 끝까지 돌보아 주십니다. 이 ‘오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순절 두번째 주일
고개를 들어 바라보라
Look Up and Live
요한복음 3:8-15
3:8 바람은 제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법이오. 당신은 바람소리를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불어온 것인지, 다음에는 그 바람이 어디로 갈 것인지 알 수 없소.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도 이와 같소.” 3:9 니고데모가 다시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3: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오? 3:11 내가 진정으로 당신에게 말하겠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 말하고, 또 우리가 본 것에 대해 증언하오. 하지만 당신들은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소. 3:12 내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말해도 당신들이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면 당신들이 어찌 믿을 수 있겠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외에는 아무도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소. 3:14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높이 쳐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높이 들려져야 하오. 3:15 그것은, 인자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오.(쉬운말 성경)
8 The wind blows wherever it wants. Just as you can hear the wind but can’t tell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is going, so you can’t explain how people are born of the Spirit.” 9 “How are these things possible?” Nicodemus asked. 10 Jesus replied, “You are a respected Jewish teacher, and yet you don’t understand these things? 11 I assure you, we tell you what we know and have seen, and yet you won’t believe our testimony. 12 But if you don’t believe me when I tell you about earthly things, how can you possibly believe if I tell you about heavenly things? 13 No one has ever gone to heaven and returned. But the Son of Man[e] has come down from heaven. 14 And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15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New Living Translation)
지난주 창세기 3장을 통해 뱀에게 유혹당한 아담과 하와를 보았습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그 탐스러운 열매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만은 ‘먹지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이후 단단한 사람도 냉정한 사람도 순하고 착한 사람도 죄의 기원 앞에서 누구도 벗어날 사람이 없기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삶의 중심에 두고 걷자고 권면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는 유대사회에서 유력한 지도자였고, 율법교육도 철저하게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간 것은 그의 영적인 어둠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표적을 보고(3:2)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았기에 그 말씀을 더 알고 싶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찾아 온 밤이 우리의 인생에도 있을 것입니다. 생각했던 답이 흔들리고 낯설게 느껴지는 밤, 하나님의 뜻이 느껴지지 않는 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인생의 밤에 찾아오시며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초대하십니다. 신앙의 연수가 쌓이고 성경적 지식이 쌓일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식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깨어 살아가라는 도전을 주십니다. 내게 익숙한 예배의 자리, 말씀, 기도의 자리가 더 이상 새롭지 않다고 느껴질 때에도 성령의 바람은 멈추지 않습니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독자적으로 붑니다. 스스로 시간을 결정하기 때문에 언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알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이 이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야고보 사도는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라고 표현하고(야 1:18), 바울은 창조하다의 뜻을 담아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단어로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이 무엇일까요?
1.거듭남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 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 “내가 진정으로 당신에게 말하겠소.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 아노덴(ἄνωθεν)이라는 단어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다시’라는 뜻입니다.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율법을 교육받은 니고데모는 구원을 위해 무엇을 쌓아올려야 한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다시”라는 것은 다시는 삶의 중심이 이전처럼 살수 없도록 바뀐것입니다. 아노덴의 두번째 의미는 ‘위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는 말씀처럼 위로 부터 다시 주어지는 영적인 삶을 의미입니다.
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깊은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0.1%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끝까지 스스로 빠져나오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결국 나올 수 없었습니다. 내 삶이 지금 척박하고 절박하든, 평온하고 아무 문제가 없든 성경은 인간이 영적으로 죽어 있어서(엡 2:1),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손을 내밀어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이것이 곧 거듭남입니다.
또 거듭남은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형질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그 순간 아무것도 스스로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심겨졌기에 세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점점 알아가듯이, 거듭난 사람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단 하나,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고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인자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오. 진실로 그렇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소. 그것은,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오.”(요 3:15-16) 예수님을 믿는 누구든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라는 말이 가끔 마음에 걸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더 열심히 하고 노력한 사람이 인정 받고 성과를 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기준으로 신앙의 자리에 서면 불편함이 생길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더 오래 믿었고, 더 많이 헌신했고, 더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그 자리에 서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가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믿음은 내가 쌓아 올린 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헌신과 내 공로를 내려놓고 그분을 붙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는 우리의 자격과 공로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은혜를 경험하고 이해하면 대부분의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믿음은 내 공로로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내 삶의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안에 감추어져 있던 나의 의로움과 교만을 내려놓고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삶속에서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연약해지는 그 자리에 십자가를 세워주셨습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 스스로 삶의 문턱을 경험하고 실수를 배우고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 때가 옵니다. 그때 부모는 아이의 부족함을 대신 채워줄 수 없고 문턱을 대신 넘어줄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말없이 안아주고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살아가지만 결국 품에 안고 기도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를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그 자리, 실수하여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더 깊이 만나주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능통한 니고데모에게 그가 알고 있었던 민수기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3:14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높이 쳐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높이 들려져야 하오. 3:15 그것은, 인자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오.”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장대에 매단 것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죽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광야의 뱀에게 물린 것은 심판의 자리 한가운데에 있는 백성들을 위해 구원의 길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릴수만 있다면 예수께서 기꺼이 십자가에 달릴것이니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이뤄 놓으신 방법을 믿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내려놓지 못한 것들을 만납니다. 그 불편한 자리가 우리를 멈추게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을 닮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이 생명의 원리가 계속 작동이 됩니다. 그래서 더 깊이 은혜를 발견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들려지다’ 휩소데나이 (ὑψωθῆναι)는 단순히 위로 올려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 그것이 곧 높임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설교 하시면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조차 이것이 어떤 죽음을 가리키는지 물었을 만큼, 십자가는 이해하기 어려운 자리였습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오? 3:11 내가 진정으로 당신에게 말하겠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 말하고, 또 우리가 본 것에 대해 증언하오. 하지만 당신들은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소. 3:12 내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말해도 당신들이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면 당신들이 어찌 믿을 수 있겠소?
쌓아온 지식으로는 이 일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이 일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영적인 어둠 속에서 어디로 가는지 조차 알지 못하던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기에 십자가의 능력에 이끌림 받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쌓아 올려서 하나님의 뜻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생의 광야 길에서 불평과 낙심의 자리, 스스로 해결할수 없는 자리에 놓일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실패하면 안되고 약해지지 말라고 흔들리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광야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가 버티고 감당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 삶의 민낯을 만나는 자리, 연약함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시작됩니다. 환경 앞에 고개 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분명 로마의 처형 도구였지만 하나님은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오래 믿었는지, 잘 살아 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고개를 들었는지를 보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인자를 믿는 순간, 이미 시작되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일을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바람을 만들지 못하지만 그 바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가장 낮은 자리가 영광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시작된 생명을 품고 걷는 사람들입니다. 고개를 들고 십자가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다시 살아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