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25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3주)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I Will Follow the Lord

누가복음 9:51-62

9:51 ○ 예수께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실 때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에 굳게 결심하시고, 52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냈다. 그들은 사마리아 동네에 들어가서 방을 구하려다가 그냥 돌아왔다. 53 그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예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겠다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54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말했다. “선생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리게 해서 그들을 태워 버릴까요?” 55 그러자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다. 57 ○ 예수 일행이 길을 가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58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소. 하지만 인자는 머리 누일 곳조차 없소.” 59 또 한 번은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가서, 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60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를 지내게 하고, 당신은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 세상에 전파하시오.” 61 한번은 또 다른 사람이 예수께 말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집안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 62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소.” (쉬운말 성경)

51 As the time drew near for him to ascend to heaven, Jesus resolutely set out for Jerusalem. 52 He sent messengers ahead to a Samaritan village to prepare for his arrival. 53 But the people of the village did not welcome Jesus because he was on his way to Jerusalem. 54 When James and John saw this, they said to Jesus, “Lord, should we call down fire from heaven to burn them up?” 55 But Jesus turned and rebuked them.[k] 56 So they went on to another village. 57 As they were walking along, someone said to Jesus, “I will follow you wherever you go.” 58 But Jesus replied, “Foxes have dens to live in, and birds have nests, but the Son of Man has no place even to lay his head.” 59 He said to another person, “Come, follow me.” The man agreed, but he said, “Lord, first let me return home and bury my father.” 60 But Jesus told him, “Let the spiritually dead bury their own dead![l] Your duty is to go and preach about the Kingdom of God.” 61 Another said, “Yes, Lord, I will follow you, but first let me say good-bye to my family.” 62 But Jesus told him, “Anyone who puts a hand to the plow and then looks back is not fit for the Kingdom of God.”(New Living Translation)

성령강림절기 세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평안이 교우들 마음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The Purpose Driven Life’이라는 책을 아실겁니다. 이 책은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도 번역되었고, 성경적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는데 도전을 주었습니다. 40일의 훈련을 통하여, 내면의 상처, 피해의식, 삶의 죄된 습관이 변화되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땅에 교회가 세워진 목적, 예배를 드리는 목적, 주안에서 교제하는 목적이 분명할때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께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때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에 ‘굳게 결심하시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굳게 결심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예루살렘 길은 십자가로 향하는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뜻이었습니다. 그 길은 수난과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간절히 기도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가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 한 마을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숙소를 구하기 위해 일행중 몇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요단강 동편으로 우회해서 가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서 통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와 그 일행들을 배척합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이 분노해서 말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리게 해서 그들을 태워 버릴까요?” 이는 구약의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때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한 것을 떠올리며 사마리아 사람들을 동일한 방식으로 심판하자고 요청한 것입니다.

54절을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시겠습니다. “이에 그분의 제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목격하자 그들이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께서는 우리가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도록 명령하여 바로 엘리야가 한 것처럼 저들을 소멸시키기를 원하시나이까?” 하였더라.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종교 혼합주의로 인해 경멸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할수 없었고, 대신 그리심 산에 독자적으로 성전을 세워놓고 예배해 왔습니다. 이러한 관계속에서 사마리아 사람들 내면에는 피해의식과 분노가 깊이 뿌리 박혀 있어서 유대인들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일부 극단적인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유대인 순례자들을 위협하고 살해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적대적인 분위기속에서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의 극단적인 요청을 들으셨지만, 동의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55절 56절을 킹제임스 성경 버전으로 보시겠습니다. 55 그러나 그분께서 돌이키시어 그들을 꾸짖으셨고 이같이 말씀하셨더라. “너희는 어떤 부류의 영이 너희에게 있는지 모르는도다 56 이는 인자가 사람들의 생명들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라.” 그런즉 그들이 또 다른 촌락으로 갔더라. 요한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사랑과 인내의 길을 선택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목적을 잘 몰랐기에 감정에 휘둘려 심판하자는 마음을 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목적지를 향해가는 여행과도 같습니다. 때로는 가는 길이 막히기도 하고 우회해야 하는 상황도 있지만 목적지만 분명하면 우리가 겪는 거절이 끝은 아닙니다.

예루살렘행은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창조의 목적대로 다시 회복하는 것은 섬김과 낮아짐을 통해서 이뤄졌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이나 사마리아인들의 마음은 우리 안에도 존재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숨막히는 광야, 답답하고 낙심되었던 삶의 순간들이 나를 고통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이뤄지게 해달라고 진심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감정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종종 부딪히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이 영적 싸움에서 내가 죽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승리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도와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되게 하는 영이고, 성령이 임했을때 사람들은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salvation)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거룩함의 중요성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에 치중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거룩함이 없이 주를 보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히12:14)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거룩함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 또한 가볍지 않습니다. 때때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위기의 순간도 마주합니다. 때로는 그 길에서 많은 눈물과 아픔, 갈등도 있지만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생명의 은혜가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우리는 고난의 시간 앞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주가 걸으신 길만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주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현실이 믿음대로 펼쳐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헛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에는 분명하지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얽매이기 쉬운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한 짐은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주님을 따르는 길을 어렵게 만듭니다. 때로는 고난이 두려워 등을 돌리기도 했고 성공이 아니면 실패인 것처럼 두려워 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 (James Packer, 1926-2020) 는 ‘거룩의 재발견’이라는 책에서 거룩함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추구하려면 인내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사적인 면이나 대인관계에서 죄를 대적하며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 거룩한 삶이란 구별된 삶, 즉 하나님을 위해 성별되고 그분의 능력에 의해 내적으로 새롭게 된 삶의 향기이다.’《제임스 패커-거룩의 재발견》

본문에 보면 한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57 “선생님,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58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소. 하지만 인자는 머리 누일 곳조차 없소.”

주께서 머물 곳 없는 이 길을 걸어가신 것은 우리의 짐과 고통을 가볍게 해주시기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믿음의 수천 수만의 앞서간 증인들도 인내로 이 경주를 뛰었고, 지금은 둘러싸서 믿음의 길을 걷는 자들을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습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응원하는 승리의 함성으로 주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길에는 결심과 포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야 할 길이 결코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편안한 곳, 낙심이 없는 곳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머리 누일 곳 조차 없는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손해 보고 싶지 않고 많은 것을 보장 받고 싶은 삶에서 그것이 약속되지 않고 보장받지 못한다면 나의 기대와 다른 그 길이 낯설고 두렵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는 참 소망을 이미 얻었습니다. 복음은 조율되거나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림 없이 우리에게 찾아온 구원의 삶이며 우리를 소망 가운데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또 다른 제자가 말합니다. “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에게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를 지내게 하고, 당신은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 세상에 전파하시오.”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는 주님의 말씀 안에는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절박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이 땅에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땅의 일은 잠시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장례식을 치르며 세상의 아픔과 슬픔속에 멈춰 있을 수 밖에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은 변하지 않으시고 잠시 머무르는 이 땅보다 더 큰 기쁨과 소망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슬픔 앞에서도 하늘 소망을 구하는 것은 주님의 영원한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제자의 말을 들어보실까요?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집안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 62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소.”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분명한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방해 요소가 참 많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메시아 였습니다. 그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이유가 있었겠지요. 표적을 보고 따라온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에만 주목했고, 예수의 제자들 마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정치적인 승리를 가져 오실 분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의 가르침도 자신들의 뜻으로 해석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를 따라가는 길에는 돌아보아야 할것도 많고 챙겨야 할것도 많고 안되는 이유가 가득합니다.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에 모든 것을 드리지 못할 것을 알기에 여전히 손에 쥐고 그것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뒤를 돌아보는 내 삶의 안전지대 안에만 서 있습니다. 믿는다고 해서 성공도 포기하고 명예도 구하지 말고 자녀를 잘 키워내고자 함도 다 내려놓고 현실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두는 선택을 하며 내 삶의 안전 지대를 벗어나야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내 안의 것을 내려 놓는다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약속과 소망을 붙들겠다는 결단입니다.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는 소망을 가진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세상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면서,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 건강은 큰 축복이지만, 건강을 직접적이고 주된 목표로 삼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노상 어디가 병들지는 않았나 노심초사하며 까다롭게 살피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받은 교육은 전부 이 세상에 마음을 붙들어 놓는 것들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볼 줄만 안다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바란다는 사실, 그것도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C. S. Lewis 순전한 기독교》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결단은 실패와 낙심의 그림자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담대하게 걸어가는 삶입니다. 성공을 통해서만 인생의 길을 찾아가려고 한다면 실패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가 어렵겠지만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 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겪는 현실속에서 그 뜨거운 눈물과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닫고 그 사랑을 풍성히 누릴수록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능력과 은혜가 우리를 참된 제자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 고백은 사람의 계산과 타협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길입니다. 불확실한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분명한 고백이고 결단입니다.

06. 22.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2주)

누가복음 8:26-39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Where Are We Now?

26예수 일행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 호수 맞은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에 닿았다. 27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실 때, 그곳에 사는 귀신 들린 사람과 마주쳤다. 이 사람은 오랫동안 귀신에게 사로잡혀, 옷도 입지 않고 집도 없이,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28 그는 예수를 보자 비명을 지르며 예수 앞에 엎드리더니 크게 외쳤다. “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저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29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그를 단단히 묶어 놓아도, 그 사람은 수시로 귀신에게 강하게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끊어 버리고 광야로 뛰쳐나가곤 했다.) 30 예수께서 그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 사람 속에 있는 귀신들이 대답했다. “군대입니다.” 마치 군대처럼, 수많은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31 귀신들은 지금 당장은 자기들을 지옥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께 계속 빌었다. 32 ○ 마침, 그곳과 가까운 산기슭에 놓아기르는 돼지 떼가 있었다. 귀신들이 그 돼지 떼를 보고,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33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우르르 몰려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들이 갑자기 산비탈을 내리달리더니, 몽땅 호수에 빠져죽고 말았다. 34 이 광경을 보고, 돼지 치던 사람들이 가까운 읍내와 마을을 다니면서 그 사실을 알리고 다녔다. 35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나왔다가, 귀신 들렸던 그 사람이 옷을 입고 멀쩡하게 예수의 발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모두 크게 겁에 질렸다. 36 그동안의 일을 처음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들이 나서서, 그 귀신 들린 자가 어떻게 치유를 받게 되었는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37 그러자 거라사 인근의 모든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면서, 예수께 그곳을 떠나 달라고 간청했다. 예수께서 떠나시려고 배에 오르셨다. 38 귀신 들렸던 사람이 자신도 함께 따라가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셨다. 39 “당신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베푸셨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주시오.” 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간 뒤,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예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크고 놀라운 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낱낱이 알렸다. (쉬운말 성경)

26 So they arrived in the region of the Gerasenes,[c] across the lake from Galilee. 27 As Jesus was climbing out of the boat, a man who was possessed by demons came out to meet him. For a long time he had been homeless and naked, living in the tombs outside the town.28 As soon as he saw Jesus, he shrieked and fell down in front of him. Then he screamed, “Why are you interfering with me, Jesus, Son of the Most High God? Please, I beg you, don’t torture me!” 29 For Jesus had already commanded the evil[d] spirit to come out of him. This spirit had often taken control of the man. Even when he was placed under guard and put in chains and shackles, he simply broke them and rushed out into the wilderness, completely under the demon’s power.30 Jesus demanded, “What is your name?”“Legion,” he replied, for he was filled with many demons. 31 The demons kept begging Jesus not to send them into the bottomless pit.32 There happened to be a large herd of pigs feeding on the hillside nearby, and the demons begged him to let them enter into the pigs.So Jesus gave them permission. 33 Then the demons came out of the man and entered the pigs, and the entire herd plunged down the steep hillside into the lake and drowned.34 When the herdsmen saw it, they fled to the nearby town and the surrounding countryside, spreading the news as they ran. 35 People rushed out to see what had happened. A crowd soon gathered around Jesus, and they saw the man who had been freed from the demons. He was sitting at Jesus’ feet, fully clothed and perfectly sane, and they were all afraid. 36 Then those who had seen what happened told the others how the demon-possessed man had been healed. 37 And all the people in the region of the Gerasenes begged Jesus to go away and leave them alone, for a great wave of fear swept over them.So Jesus returned to the boat and left, crossing back to the other side of the lake. 38 The man who had been freed from the demons begged to go with him. But Jesus sent him home, saying, 39 “No, go back to your family, and tell them everything God has done for you.” So he went all through the town proclaiming the great things Jesus had done for him.(New Living Translation)

성령강림절기 두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평안이 교우들 마음에 가득하길 바랍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삶과 성령 없이 사는 삶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삶의 자리를 말씀에 맡깁니다. 성령은 굳어진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영적인 생각을 하고,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양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참된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비한 체험을 하고, 은사를 받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될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성도들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면, 여러분은 육신에 따르지 않고 성령에 따라 살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므로 그리스도께 속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살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도 그리스도께 속하면 다른 차원에서 바로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믿음이 자라가는 과정을 경험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주의 말씀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인생을 설계하는 수많은 세상의 이론 가운데에서 가장 확실한 이론은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이론일 것입니다. 말씀은 인간을 거룩한 삶의 자리로 이끕니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때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인 거라사 지역은 팔레스타인 땅 경계에 가까웠던 이방인들이 살던 지역입니다. 그 마을에 악한 영에 불들린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집도 없이 배회하며 무덤에서 머물러 살았고, 공동체 안에서도 난폭하고 통제가 어려운 사람이었기에 사람들이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단단히 묶어 봤지만 워낙 힘이 강해서 다 끊어버리고 광야로 뛰쳐 나가곤 했습니다. 무덤 곁에 머물렀다는 것은 그가 온전한 삶보다는 죽음의 자리에 더 가까이 있던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 사람 곁에 가까이 다가가자, 악한 영에 붙들린 사람은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애원합니다. 예수가 그의 이름을 묻자 자신의 정체성을 군대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속에서 군대는 중무장한 6천여명의 보병, 120명 가량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강한 영이 이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마귀의 활동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며 사역을 시작하셨고, 팔레스타인에서 펼친 그의 모든 사역들은 인류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선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시니 ‘귀신들은 지금 당장은 자기들을 지옥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께 계속 빌었습니다. 마침, 그곳과 가까운 산기슭에 놓아기르는 돼지 떼가 있었고. 귀신들이 그 돼지 떼를 보고,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우르르 몰려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돼지들이 갑자기 산비탈을 내리달리더니, 몽땅 호수에 빠져죽고 말았습니다.’

당시 돼지는 유대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짐승이었습니다. 악한 영이 돼지떼에 들어가자 돼지들이 미친 듯이 물속으로 달려가 몰살당합니다. 이 장면은 죽음을 불러오는 마귀의 정체성을 보여 줍니다. 악한 영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여 절망에 빠뜨리고 결국 죽음으로 이끄는 영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다릅니다. 성령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사람을 살리며 마음에 참 평안을 주십니다.

악한 영에 붙들린 한 사람은 가정과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 오지도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본문 27절과 39절을 보면 ‘이 사람은 오랫동안 귀신에게 사로잡혀, 옷도 입지 않고 집도 없이,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간 뒤,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예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크고 놀라운 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낱낱이 알렸다.”

두 구절 속에 ‘집’과 ‘무덤’이라는 단어는 대조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덤에 살고 있던 그가 무슨 행복이 있었을 것이며,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무슨 기쁨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치유받고 난 후에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베푸신 크고 놀라운 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낱낱히 알렸다고 기록합니다. 악한 영이 나갔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회복되고,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주님께 속하기 전에는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적인 본성과 충돌하게 되어서 말씀 앞에 자기 본성을 죽이는 삶이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성경 말씀의 요구가 상당히 부담스럽고 어리석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관점입니다. 바울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전서 1장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게 들리겠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입니다.”

예수께서 이방인의 땅 거라사로 발걸음을 옮기신 이유는 억눌려 있던 한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시선은, 성령의 사역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지키고 싶어하는 경계가 있는데 그것을 침해 당하면 성령의 다가오시것 조차도 불편하게 여기며 방어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인간의 교만과 아집을 다듬어 가시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십니다. 신앙은 이 거룩한 힘을 길러가는 과정입니다. 회복은 무너진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고 새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저절로 쉽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삶속에서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지만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를 의지하면 반복되는 실패에 빠지기 쉽습니다. 성도는 끊임없이 말씀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주께서 이끄시는 거룩한 삶으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과 바울이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바울은 사역을 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슬픔을 크게 느꼈고,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를 배척한 동족들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안에는 영원한 소망과 충만한 기쁨이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는 탄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묵상하면서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이라는 찬양의 가사가 생각이 납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 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로마서 9장 2-3절입니다. “9:2 나는 지금 마음 깊은곳에서 큰 슬픔을 느끼고 있고,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9:3 내 형제요 내 동족인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비록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는 저주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차라리 그 편을 택할 것입니다.”

이에 반해 당시 거라사 마을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키던 사람이 회복 되었는데 기뻐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마음과 대조적입니다.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인데,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 하여 예수님께 마을을 떠나달라고 요구합니다. 거라사 사람들을 사로잡은 두려움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돼지떼의 몰락으로 갑작스럽게 닥친 경제적 손실이었을까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 앞에 서면 마음의 죄성이 드러나기에 두렵고, 삶의 주도권을 내어 드리는 것은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의 삶에 언제든지 일어 날수 있습니다.

사람이 회복된 일 보다, 경제적인 이익이 삶의 우선순위가 된다면, 말씀을 따르는 삶에는 끊임없은 현실의 염려와 두려움이 찾아 올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삶의 목적이 사역의 성공과 결과에 치중하게 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떠나 달라고 요청 했습니다. 그런데 변화된 사람만이 주님을 따라 가겠다고 요청합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겉으로 온전해 보이지만 마음이 불안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시대에는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며 비판하고 추궁하기 보다 영적인 회복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인간적 본성을 따르는 일들은 주님 보시기에는 무덤에서 배회하는 인생과도 같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목격한 후에도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은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무덤 사이에 머물고 계십니까? 본향집을 향하여 걸어 가고 계십니까? 주님은 죽음의 무덤에 있던 사람을 살리시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기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39 “당신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베푸셨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주시오. 온 마을 사람들을 위해 증인이 되라는 사명입니다. 자신의 과거 허물을 알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와 어둠에 붙들렸던 그를 통해 주가 행하신 일이 전해졌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 깊이 확신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뒤에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새옷을 입어야 합니다. 만일 새옷을 입지 않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옛모습이 부끄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암을 판정받고100차례 이상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 불린 천정은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안티 기독교인이었던 천정은 집사는 다큐멘터리 영화 <부활: 그 증거>의 주인공입니다. 사업가로, 피아니스트로 살면서 ‘노력해서 안 되는건 없다’고 믿어왔던 집사님은 암이라는 죽음의 문턱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집사님의 고백의 글입니다.

“아마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멈추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인생의 목적도 모른 채 그저 살기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어요. 예수님 안에서는 무조건 안전하다. 이것이 제 담대함의 근원이에요. 사람들이 두려움에 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주님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내 구속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너는 내 것이니까 내가 보호할 거야, 안전하게 보호할 거야, 라고 하셨는데, 지금 난 아프고 무서우니까 당장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달라고 해요. 두려움과 불평을 끊을 수 있는 길은 사람이 위로해 줘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해해 줘서 되는 것도 아니에요. 정확하게 복음 앞에 이 사람이 굴복했을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더군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러 가는 발걸음을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생애 마지막은 소망을 주신 주님의 증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불평과 두려움, 부활의 소망과 평안 어디쯤에 머물러 있습니까? 우리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고통을 참아내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12:2 우리는 오직 믿음의 창시자이시요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영광스런 기쁨을 위해 모든 부끄러움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 내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에게 고통과 영광스런 기쁨이 공존하는 자리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통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기억하셨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누구보다 외로운 길을 걸어가신 주님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누구보다 억울했던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다시 살아난 성도는 죽음의 그늘진 곳에서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서 소망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는자로 멈추지 말고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정말 복음을 믿는다면 살아냄의 자리에서 우리가 두려워 하는 거라사 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그곳으로 들어 가라는 사명을 담대하게 붙잡고 돌아갑니다. 우리에게도 주시는 사명입니다.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거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은 단지 머리 속으로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다거나 그를 본받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그들을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픔을 마주하며 괴로움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우리의 ’거라사’ 땅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곳에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복음을 품고 살아가는 삶은 반복되는 일상과 치열한 현실에서도 주의 말씀을 마음에 심는 삶입니다. 그 생명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의 사명은 쉽게 지치게 됩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믿음의 여정은 불편하고 힘들어도 반드시 우리가 살아내야 할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피할수 만은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낼때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새힘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06. 15.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1주)

불안한 시대에 붙드는 소망

The Anchor of Hope in Uncertain Times

로마서 5:1-5

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로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인내를 낳고, 4 인내는 우리의 성품을 단련시켜 주며, 그러한 성품은 마침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5 우리가 품는 소망은 우리를 절대로 낙심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가득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쉬운말 성경)

1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made right in God’s sight by faith, we have peace[a] with God because of what Jesus Christ our Lord has done for us. 2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and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3 We can rejoice, too, when we run into problems and trials, for we know that they help us develop endurance. 4 And endurance develops strength of character, and character strengthens our confident hope of salvation. 5 And this hope will not lead to disappointment. For we know how dearly God loves us, because he has given us the Holy Spirit to fill our hearts with his love.(New Living Translation)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은총이 이곳에 모인 우리에게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19세기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1813-1855)는 『죽음에 이르는 병』(The Sickness Unto Death)이 ‘절망’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는 책에서 ‘절망’을 자기인식의 단계로 구분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무지(無知)로 인한 절망,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고 회피하려는 소극적인 절망, 하나님 없이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려는 적극적인 절망입니다. 가령 살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 낙심하는 마음이 들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 마음에 머물러 있으면, 낙심된 마음은 완전히 포기하는 상태인 절망으로 빠져 들게 됩니다. 만일 소망이 없다면, 절망은 우리를 더 깊은 어둠속으로 끌고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번쯤 삶의 영역에서 기대하는 것으로 부터 무너졌던 경험이 있을 겁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다가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믿었던 관계속에서 상실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 말씀대로 실천하려고 애쓰지만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마주하며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75세에 받았던 하나님의 약속을 25년 동안 기다렸는데 인간적으로 소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100세가 되었을때에 자신은 죽은 자처럼 연약해 졌고, 아내는 태의 기능이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지니고 약속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대로’ 말씀이 성취가 됩니다. 이 믿음은 ‘나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성도들을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된 약속입니다. 로마서 4장의 증언을 보시겠습니다.

4:18 모든 소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에도 아브라함은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4:19 아브라함은 백 살이 거의 다 되어 자기 몸이 죽은 자처럼 연약해졌고, 아내 사라의 태 또한 기능이 다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조금도 연약해지지 않았습니다. 4:20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믿음이 날로 더욱 굳건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까지 했습니다.

성경에서 ‘소망’이라는 단어 엘피스(ἐλπὶς)는 헛된 기대라든지 두려움의 의미로는 사용하지 않고, 항상 좋은 것에 대한 기대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속에서 하게 되는 감정적인 기대감과 성경이 말하는 소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감정적 기대감이라는 것은 사람과의 인간관계의 거리, 주어진 환경에 따라 상대적이고, 쉽게 흔들립니다. 이에 반해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변하지 않는 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낙심시키지 않습니다.

본문 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확신으로 소망(ἐλπὶς)이라는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바울은 수많은 고난과 죽음에 직면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좋은 것 만을 기대하는 엘피스(ἐλπὶς) 소망을 바라 볼 수 있었을까요? 로마서 5장 1절과 2절을 보시겠습니다.

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로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인정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후에는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으며, 과거의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며 즐거워 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인기 있는 식당을 가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리고 줄을 섭니다. 단지 입소문만으로도 사람들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누군가의 만족과 기대를 이미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고 소유하는 것에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도 쉽게 신뢰하고 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증명하기 원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찾기 원하지만 정작 분명하고 확실한 복음 앞에서는 수없이 고민하고 의심하며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듣고 싶은 말에만 귀를 기울이게 되고 편한 관계들로만 관계 형성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소망은 세상과 사람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의롭다 하시는 믿음이며, 그 사랑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혀진 담이 있고, 깨어져 있을 때 오는 절망은 인간의 노력으로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은혜의 자리에 있는 성도들에게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품으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관계에 틈이 생기면 점점 더 버거워집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속적으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령 죄를 반복적으로 짓다보면 마음이 굳어지지만,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나아가면 용서를 통하여 새마음을 주십니다. 은혜는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서로의 연약함에 집중하느라 이미 주신 화평의 자리를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휘장을 찢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주셨습니다. 은혜 밖에 있던 삶이 은혜 안에 초대 되었기에 소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성도들이 삶에서 만나는 어떤 풍랑속에서도 은혜의 자리에서 떠내려 가지 않도록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복음 안에서 살아가기로 결단하면 할수록 믿음의 길은 좁고 낮은 길이지만 우리가 지닌 소망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6장 19절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같은 소망은 안전하고 튼튼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휘장 안의 지성소에까지 곧장 들어가게 해줍니다.”

찬송가 490장은 제가 참 좋아하는 찬송시입니다. “마음 괴롭고 아파서 낙심 될 때 내게 소망을 주셨으며 내가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니 앞길 환하게 보이도다. 세상 풍조는 나날이 변하여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이 세상에서 이슬같은 삶을 살다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찬양의 참된 의미를 알고 그 소망을 찬양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미 참된 삶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소망은 고난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어지게 합니다. 우리의 꿈은 주님의 얼굴 뵙기를 소망하는 것이고 그 소망은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바울은 소망의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합니다.

5: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인내를 낳고, 5:4 인내는 우리의 성품을 단련시켜 주며, 그러한 성품은 마침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어려움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견디며 인내를 낳습니다. 그 인내는 우리의 성품을 단련시켜 주며, 그렇게 다듬어진 성품은 마침내 소망을 이루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1장 3절에서는 소망(ἐλπὶς)의 인내를 말하며 소망을 인내의 원천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8절에서는 소망(ἐλπὶς)의 투구라고 표현하며, 사단으로 부터 믿음을 지키는 방어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찾아오는 고난은 두가지의 얼굴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끝이라 여기는 절망의 얼굴과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소망의 얼굴입니다. 소망 없는 마음은 영적으로 사단에게 우리의 마음을 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사단은 “너는 절대 회복할 수 없어”, “이겨내기엔 너무 늦었어” “하나님은 너와 함께 하지 않어”라고 속삭이며 우리 안에 소망이 사라지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망 가운데에 있는 우리들을 끝까지 품고 새힘을 주십니다. 주님은 책망하시기 보다 따스한 손길로 우리를 먼저 감싸 안아 주십니다. 다윗은 세상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조롱하고, 마치 사막에 홀로 있는 것 같아서 밤낮으로 눈물을 흘릴때 중요한 선택을 합니다. 그가 선택한 소망의 기도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42:5 오 나의 영혼아, 어찌 그리 풀이 죽어 낙심하느냐? 어찌 그리 불안해하며 괴로워하느냐? 오직 너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살아라. 이제 나는 내 구원자이신 나의 하나님을 도리어 찬양하며 살리로다. 다윗의 이 고백은 우리를 믿음의 시선으로 전환시켜 줍니다.

다니엘은 소망의 근거를 말씀에서 깨닫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다가 포로생활이 70년간 지속될 것을 깨닫고 상황을 탓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단 9:2 곧 다리오가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하던 첫 해에, 나 다니엘이 두루마리 책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다가, 주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황폐함에 관한 연수를 정해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70년 만에 끝날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9:3 그러므로 나는 굵은 베옷을 걸치고 잿더미에 앉아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며 간구했다. 9:4 그때 나는 우리 동족이 지은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오, 크시고도 두려우신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진실로 주께서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주님의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고 또 주님의 크신 자비를 풍성히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니엘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민족을 향한 중보자로 서서 아픈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하란 땅으로 도망가는 신세였습니다. 가장 깊은 외로움의 자리에서 돌을 베고 잠이 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 말씀 하시는데 “내가 너희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창28:15) 야곱은 그 소망을 붙잡고 연단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며 과거에 아버지와 형을 속였던 자신의 죄성을 직면했을 것입니다. 무려 20년 동안 외삼촌의 집에 머물며 연단을 받는 동안 하나님은 그의 성품을 다듬어 가십니다. 야곱은 인내하며 마침내 형과도 극적인 화해를 이루게 됩니다. 야곱의 삶의 여정은 바울의 말씀처럼 어려움-인내-성품-소망의 열매를 맺어가는 복음의 예표를 보여줍니다.

5:5 우리가 품는 소망은 우리를 절대로 낙심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가득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의료의 방향을 바꾼 감동적인 포옹 The hug that helped change medicine’이란 제목의 CNN 토픽 영상이 있습니다. 1995년 10월 17일 우스터의 매사추세츠 메디컬 센터에서 쌍둥이 여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좋은 진전을 보이고 있었지만 한 아이는 호흡과 심박수에 문제가 있었고, 산소 수준은 낮았습니다. 의사들은 이 아이의 병세를 지켜보았고 계속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얇은 팔과 다리는 푸르스름한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아이의 심박수가 천천히 뛰었고, 그의 부모는 어린 딸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며 지켜보았습니다. 절박한 순간에 간호사는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사용했던 미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절차를 시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부모의 허락을 받고 그녀를 쌍둥이 언니의 같은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녀가 인큐베이터 문을 닫자마자, 건강한 언니가 작은 여동생을 왼팔을 뻗어서 감쌌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었습니다. 아팠던 아이의 심박수가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더니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통의 자리에 있을 때 진짜 믿음이 드러납니다. 때로는 서로의 마음의 온기를 통해서도 회복되고 살게 되는것 처럼 고통과 절망 가운데에서도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실 소망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더딘 길, 내 약점이 드러나는 자리,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자리에서 참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품은 소망은 영광의 소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삶 속에서 진정한 십자가를 만났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인생의 갈보리,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 실패의 길이 아니라 구원의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과의 성공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찾아내려 애쓰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무너진 자리, 실패의 자리에서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불 가운데서도 우리를 신실하게 지키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세상의 절망 앞에 지칠때마다 주님께서 소망이 되심을 기억하십시오. 고난이 깊어질수록 은혜도 커집니다.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안아 주시고, 지금도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로마서 5장 1-5절의 말씀은 불안한 시대에서도 소망을 품고 살아내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음의 메세지입니다. 공허한 세상의 말로 위로받지 않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삶 속에서도 반드시 주님의 일하심을 믿음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의 품으로 소망을 기대할 것입니다. 서로의 기도 제목을 품고 함께 성장하는 성도, 말씀을 통해 현실을 살아내며 복음의 기적을 경험하는 삶,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영원한 소망을 품고 하나님 안에서 다스림 받는 공동체가 되어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붙드시는 소망의 하나님과 함께 오늘을 살아내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6 08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주일)

‘그래도’  

Do it anyway

요한복음 14:16-18

14:16 그러면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다른 ‘돕는 분’을 너희에게 보내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하게 하실 것이다. 14: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살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14:18 명심하여라. 나는 너희를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꼭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쉬운말 성경)

16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 who will never leave you. 17 He is the Holy Spirit, who leads into all truth. The world cannot receive him, because it isn’t looking for him and doesn’t recognize him. But you know him, because he lives with you now and later will be in you. 18 No, I will not abandon you as orphans—I will come to you.(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당시 유대 전통에 따라 천하 각국에서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각국의 방언으로 말하자, 어떤 이들은 그들을 이상히 여기며 새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은 요엘 선지지를 통해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성령강림절기를 보내며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세상에 지친 마음 위에 주의 권능이 임하고, 낮아진 심령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

‘고아의 아버지’로 알려진 조지 뮬러목사(George Müller, 1805 -1898)의 생애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청소년때 부터 온갖 죄를 다 저지르며 집 보다 많은 시간을 감옥에 오가며 살았습니다. 그런데1825년 11월 뮬러가 스무살이 되던 해, 어느 기도 모임에서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후 뮬러는 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던 하나님이란 도대체 어떤 분이실까? 고민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이후 그의 삶에 대한 태도와 관점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수년간 성경 말씀을 통해 속죄의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이후 뮬러 목사는 1898년 3월 10일 별세할 때까지 60년의 사역을 통해서 수천명의 고아들을 돌보고 한 끼도 굶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역의 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뮬러는 “내가 완전히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인정이나 비난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는 다만 나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살아갔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고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은 그는 단지 고아들의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돌보며,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삶은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는 종종 자기가 죽은 후에도 고아원들이 진부한 인습들에 얽매이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는 고아들에게 남겨진 가장 귀한 유산일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기도해도 평안을 잃을때가 있고, 하나님을 붙들면서도 세상의 가치와 인정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본질이요, 대상입니다. 뮬러에게 하나님은 수천명, 수만명도 먹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내려놓으면 약해질까 두렵지만 하나님 앞에 삶을 맡길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일하심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안에 짓누르는 죄의 짐 앞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자아가 죽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럴때에 연약한 우리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주시고 시대적인 혼란과 불안을 넘어설 수 있게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믿음의 성도들이 붙들어야 할 신앙의 정체성입니다.

14:16 그러면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다른 ‘돕는 분’을 너희에게 보내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하게 하실 것이다. 14: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살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14:18 명심하여라. 나는 너희를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꼭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하실 일에 대해서 알려 주셨는데 3가지로 정리해 볼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은 또 다른 돕는 분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곁에 와서 도와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둘째, 성령은 고아처럼 너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실 분이십니다. 오늘날처럼 변화가 빠른 시대에 ‘영원히’ 라는 단어가 주는 힘이 있습니다. 낯선 이민땅에서 문화적, 언어적, 환경적인 긴장감 속에 점점 작아지는 것만 같은 우리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셋째, 성령은 진리의 영(Spirit of the Truth)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하시며 영(spirit)과 진리(truth)로 예배할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어디서 드려지는 예배가 진짜 예배인지 묻는 여인의 질문에 주님은 장소의 차원이 아니라 성령 안에 거하는 예배(Worship in the Holy Spirit), 진리 안에 거하는 예배(Worship in the truth)를 드릴 때가 온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당시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마와 빌립의 질문만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준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시자, 그때 제자들 중 하나인 도마는 “주님, 우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요 14:5) 빌립도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대답하시며, (요 14:6)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너희가 믿지 못하느냐? 내가 하는 말은 나 자신의 말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셨지만, 이제는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너희를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된 시대를 살아갑니다. 세상속에서 수없이 무너지고 낙심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가 분명해질때 세상의 기준과 판단, 그리고 정죄하며 불안해 하는 관계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비난과 정죄의 끝에는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죽은 자가 살아나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구원자가 되신 사건입니다. 성육신과 부활은 우리의 지식과 논리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능력이 됩니다.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을 회복시킵니다.(엡 4:15)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모르실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떠나신다고 하시니 제자들은 두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가 함께 했던 것처럼 성령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며 도우실 것이다라고 약속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안에 내주(內住) 하고 계시는 성령은 때때로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적인 상실감과 거절감 속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핍박속에서도 제자들이 믿음을 지킬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이었습니다. 성령의 오심은 어린아이로 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주를 믿는 이들 가운데 거하시는 진리의 영(Spirit of the Truth)입니다. 죽음의 권세도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고단한 삶의 현실 속에서도 기쁨의 근원이 외적 환경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의 샘처럼 솟아납니다.

바울은 몇 사람에게라도 이 복음이 전해 질수 있다면, 자신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소외되고 연약한 이들에게는 연약한 자처럼 살았습니다. 우상에 바쳐진 고기도 먹을 수 있었지만 믿음 없는 이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은 평생 제사 음식을 먹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나고 이해받으려 하기보다 이해하는 존재로 살기 위해 성령을 따라 살아간 것입니다.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결박과 핍박이 기다리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성령의 힘으로 주의 길을 따라 갑니다. 성령께서 하늘의 상급을 보게 하셨을 것이고, 바울은 영원한 소망을 지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롬8:15 여러분 꼭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을 또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닙니다. 삶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무감에 따라 행동하는 종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육신대로 살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몸의 행실을 죽여서 우리를 살리는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육신의 감정과 욕망따라 행하다가 오랜 세월 쌓아 둔 믿음의 탑을 허물어 뜨리는 일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믿음의 겉모습은 경건해 보이나 성령의 도우심 없는 삶의 속사람은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고, 결국 기쁨을 잃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거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죽을 몸을 살리신 하나님께 기뻐하며, 또한 성령으로 인해 죽을 몸 또한 살리실 것을 소망하며 참된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로마서 8:9 ○ 그러나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면, 여러분은 육신에 따르지 않고 성령에 따라 살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므로 그리스도께 속할 수 없습니다. 8:10 하지만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로 인해 죽은 것이지만, 여러분의 영은 의로 인해 살아 있게 됩니다. 8:11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자신의 영 곧 성령으로 인해 여러분의 죽을 몸 또한 살리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고문과 박해를 견딘 힘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 함께한 성령님의 권능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성령님은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하여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고난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얻게 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앞서지 않으며 내 힘으로 길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 고백은 주 안에 거하는 은혜의 삶을 만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반복적으로 무너지고 실패하는 것 같은 두려움을 숨겨야만 할것 같은 염려에 묶이지 마시고 우리 영혼을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승리의 기쁨만이 아니라 실패 안에서의 기쁨을 찾아 가시는 성령강림절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Do it anyway) / 마더 테레사의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힐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래도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래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라.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도 다시 일으켜 세우라.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래도 평화롭고 행복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래도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캘커타 어린이 집 ‘쉬슈 브라반’ 벽에 있는 표지판

우리 삶에 ‘그래도’ (Do it anyway)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결심이나 사람의 마음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중심이 되어 진리와 사랑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지만 성령님의 능력은 우리 마음의 굳어 있던 돌이 은혜 앞에서 부서지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고백이 없습니다. 주를 아는 기쁨으로 감사하며 내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인해 절망 중에도 기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빚을 안고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은 다시 일으켜 세우며 ‘그래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막막하지만 이 세상이 감당 못할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기쁨으로 이 길을 함께 걸으시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열번을 깨어지고 무너졌다면 말씀 앞에서는 수 백번을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서 더 이상 내 힘으로 서려고 하지 않는 철저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굳어진 마음의 돌이 깨어지고 형식적인 신앙과 무관심, 사람들과의 갈등, 세상을 향한 불신, 그리고 우리 안에 숨겨진 상처가 성령님과 함께 울고 또 울며 진리로 이끄시는 회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도’의 믿음은 단순한 결단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붙드는 몸부림입니다. 이 믿음은 어렵고 힘들어서 답을 찾지 못해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도 주님을 붙들겠다는 결단입니다. 비록 어제의 기쁨이 오늘의 근심이 될 지라도 우리는 이 땅의 소망이 아닌, 영원한 소망이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습니다. 성령강림절, 사람들의 비난이 무서웠고 박해가 두려워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했습니다. 불신과 의심, 두려움에 머물던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강한 역사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이 능력은 삶 속에서 나 혼자만의 믿음에 갇혀 고립되어 살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떡을 나누며 서로의 연약함을 감추지 않고 아픔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품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06 01 2025 주일설교

(부활절 제 7주, 승천주일)

주께서 다스리시니

The Lord Reigns!

시편 97:1-5, 10-12

97:1 주께서 다스리시니, 온 땅아, 기뻐하여라. 바다의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 97:2 짙은 구름과 흑암이 주님을 에워쌌고, 공의와 공평이 주님 보좌의 기초가 되었도다. 97:3 불이 주님 앞에서 나와, 사방의 적들을 모두 태워 버리는구나. 97:4 주께서 일으키시는 번개가 번쩍번쩍 온 세상을 두루 비추니, 땅이 보고서 무서워 벌벌 떨고, 97:5 산들이 주님 앞에서, 온 땅을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서, 양초처럼 녹아내리는구나 …… 97:10 주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여라. 주께서는 신실한 성도들의 영혼을 지켜주시고, 모든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신다. 97:11 의로운 자들에게는 빛이 비추일 것이고,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에게 기쁨이 넘쳐나리라. 97:12 너희 의인들아, 주님을 기뻐하여라.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에 감사를 드려라. (쉬운말 성경)

1 The Lord is king! Let the earth rejoice! Let the farthest coastlands be glad.
2 Dark clouds surround him. Righteousness and justice are the foundation of his throne.
3 Fire spreads ahead of him and burns up all his foes.
4 His lightning flashes out across the world. The earth sees and trembles.
5 The mountains melt like wax before the Lord, before the Lord of all the earth.

10 You who love the Lord, hate evil! He protects the lives of his godly people and rescues them from the power of the wicked.
11 Light shines on the godly, and joy on those whose hearts are right.
12 May all who are godly rejoice in the Lord and praise his holy name!(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부활절 7번째 주일로, 다음주일 부터 성령강림절기가 시작됩니다. 한 철학자가 중력과 은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중력은 아래로 떨어지게 한다. 그러나 은총은 들어 올린다. 은총이 없다면 우리는 오직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세상은 중력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들이 걸음마를 하면서 수천번 넘어지는 것도 중력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어릴적부터 걷기 위해서 넘어지고 일어나며 스스로 일어날 힘을 키워갑니다. 장성한 어른이 되어도 인생의 무거운 짐은 마음을 짓누르지만, 소망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줍니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말씀과 씨름할때 넘어짐과 일어섬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주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넘어짐을 보셨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스스로 불균형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아들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묵상하며 인생의 넘어짐 속에서도 회복을 경험합니다. 날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 앞에 설때 한 사람의 일생은 하나님의 크신 은총 앞에 저절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1절에서 ‘온 땅아, 기뻐하여라. 바다의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 선언하는데, 온땅과 많은 섬들은 이땅의 성도들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눈에 공평하지 않게 보이는 캄캄한 곳, 외딴 섬처럼 고립된 듯 느껴지는 때에도 하나님의 통치는 계속되며, 실패의 자리, 넘어짐의 자리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통치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온 땅이며, 바다의 많은 섬들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97:1 주께서 다스리시니, 온 땅아, 기뻐하여라. 바다의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 97:2 짙은 구름과 흑암이 주님을 에워쌌고, 공의와 공평이 주님 보좌의 기초가 되었도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듯한 상황 앞에서 믿음이 무기력해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의 눈에는 그저 부조리하게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짙은 구름과 흑암이 주님을 에워싸고 있어서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의와 공평을 기초삼아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시편의 기자는 그것을 믿음으로 본 것입니다.성경은 그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는 그림 이상의 메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중앙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전에는 중후한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는데, 미켈란젤로가 그린 예수는 근육질의 인간의 몸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 안에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강력한 권위를 가지면서도, 우리를 십자가의 은총과 회복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그날에 주의 의를 따라 살아온 이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셨습니다. 좁은 문 앞에서 은총에만 기대어 머뭇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좁은 길을 주와 함께 걸어 온 이들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 에서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죄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자아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갖게 되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자기 자신을 앞세울 가능성—스스로 중심에 있고 싶어할 가능성, 사실상 하나님이 되고 싶어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은 죄였고, 사탄이 인류에게 가르친 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상관 없는 행복이나 평화를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스스로 중심에 있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매일 성령의 불로 자기 의로움을 소멸시키고, 마음 안에 아집과 교만을 태워가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의 꺼지지 않는 불은 마음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인간의 죄성을 태우시며 양초가 녹듯 우리의 자아를 천천히 녹여 가십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수없이 녹아지고 깨어지며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가게 됩니다. 주의 크신 신비 앞에서 우리는 더 녹아지고 작아지지만 그 삶에 불꽃이 타오르게 됩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다 이해하지 못할때에도 그 길을 신뢰하도록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더 밝히 깨닫게 하십니다.

다윗은 육신의 정욕으로 인해 죄를 짓고 난 후,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난 후에 회복시켜 달라고 했던 기도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는 통회하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스스로 정직한 길로 갈수가 없습니다. 시편 97편은 기뻐하라. 즐거워하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11절에서 의로운 자들에게 빛이 비추일 것이고,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에게 기쁨이 넘쳐나리라 고백합니다. 즉 의로운 자들과 마음의 정직함이 연결되어지고, 그 빛은 하나님의 기쁨으로 구체화 됩니다. 다윗이 죄로 인해 무너졌다가 다시 회복될 수 있던 것은 하나님께 나아간 정직한 마음이었습니다.

97:3 불이 주님 앞에서 나와, 사방의 적들을 모두 태워 버리는구나. 97:4 주께서 일으키시는 번개가 번쩍번쩍 온 세상을 두루 비추니, 땅이 보고서 무서워 벌벌 떨고, 97:5 산들이 주님 앞에서, 온 땅을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서, 양초처럼 녹아내리는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는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교만과 욕심과 죄를 녹여 주시는 불을 경험해야 합니다. 단순히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말씀 앞에 엎드릴 때 내 안에 있는 죄성이 녹아지고 내 교만과 욕심이 하나님의 불앞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새롭게 하고 존재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사방의 적들이 태워지고 땅이 벌벌 떨며 산들이 주님 앞에서 양초처럼 녹아 내린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삶에 태워져야 할 것이 무엇이며 내가 올라가려고 하는 인생의 높은 산은 무엇입니까? 좋은 직장, 재물과 안정된 삶, 자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와 경쟁심, 내가 쌓은 지식과 믿음과 경험이 자칫 복음의 능력을 가리우는 인생의 높은 산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인생의 평화를 가로 막고 있는 산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더 잘하고자 했던 나의 열심,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고, 높아지려고 했던 마음이 하나님 보다 더 소중한 우상이 되어가지 않도록 날마다 말씀 앞에서 조금씩 내려 놓아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잃어버린 기쁨과 평안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예배의 삶 가운데에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마음 안에 숨겨진 죄된 본성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말씀 앞에서 수없이 엎드려 주어진 삶을 마주할 때 내 안에 죄로 가려진 것들이 벗겨지고 진짜 ‘나’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세상의 우상들이 하나님 앞에서 녹아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길은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나의 삶을 내어드릴 때 시작됩니다.

97:6 하늘은 주의 의로우심을 선포하고, 온 세상 사람들은 그분의 영광을 우러러 보도다. 97:7 조각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치욕을 당하고, 헛된 우상을 자랑하는 자들은 모두 다 수치를 당하리라. 모든 신들아,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경배하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의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능력도 갖게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갈림길에 서게도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다고 경고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믿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바람처럼 흔들리고 하나님을 끝까지 붙드는 삶을 지켜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이 일로 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출 32:28) 북이스라엘 열지파가 금송아지를 단과 벧엘에 만들고 섬겼을 때에도(왕상 12:25-33) 그 끝은 북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하여 열지파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왕하 17:24) 남유다가 결국 망하게 된 것도 왕국말기의 우상숭배가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도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숨어 있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선택하고 일상의 무뎌짐속에서 마음과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우상에게 내어줍니다. 감춰진 마음의 우상들이 하나님보다 세상과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들고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고 있습니다.

97:10 주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여라. 주께서는 신실한 성도들의 영혼을 지켜 주시고, 모든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신다. 97:11 의로운 자들에게는 빛이 비추일 것이고,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에게 기쁨이 넘쳐나리라. 97:12 너희 의인들아, 주님을 기뻐하여라.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에 감사를 드려라.

하나님의 사랑은 빛과 같아서 마음 안에 어둠을 몰아냅니다.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 안에 악을 더 미워하게 되고,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며 제자들을 직접 찾아가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굳게 잠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는 못 박혔던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도마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도 찾아가셨습니다. 밤새 허탕을 친 날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그의 실패를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베드로를 또 다시 사명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죄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시작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총은 한 사람이 점점 더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도록 해줍니다.

믿음을 붙들고 살아간다고 해도 항상 평화롭고 평안할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사회적 불평등, 차별과 폭력, 경제적 억압으로 고통 받는 이들로 가득합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면, 마치 외딴 섬에 고립된 듯한 마음이 찾아 올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오직 주의 이름만 붙들 때, 진정한 기쁨이 우리 안에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공평과 공의로 새로운 삶을 살수 있도록 고민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 뜻에 동참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붙드는 진짜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 시대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눈물을 닦아주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무릎 꿇은 기도의 자리에서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능력으로 붙들어 주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 위에 인생을 세워갑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숨김없이 드러나는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합니다.

본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의로운 삶을 살라고 촉구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에 붙들릴때 삶의 토대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워지게 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고, 그 빛 속에서 진짜 기쁨이 시작됩니다. 이 기쁨은 정직함으로 악의 유혹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선한 싸움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땅에 몰입하여 뿌리내릴 때 결국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갑니다. 사탄은 하나님으로 채울수 있는 마음을 정욕으로 땅의 것으로 만족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정직함과 신실함으로 삶의 예배를 세워가야 합니다. 마음과 뜻을 다해 예배하며 살아갈 때 진정한 주의 나라가 임하는 기쁨을 허락하십니다. 반복되는 일상을 마주하고, 불안한 미래를 끌어안고 살아가더라도, 말씀 안에서 악을 미워하고 선을 따르며, 겸손히 섬기는 삶으로 나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너무 완벽해지기 위해 애쓰는 인생의 짐을 조금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더 깊어지고 더 가까이 함께 성장해 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한 웨슬리의 언약 기도문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이 기도에는 주님의 뜻대로 우리를 사용하시고, 높이시려거든 높이시고 낮추시려거든 낮추어 달라는 깊은 겸손과 순종의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언약 기도문 John Wesley’s Covenant Prayer

“주님, 저는 더 이상 저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뜻 가운데, 주님 원하시는 곳에 저를 두소서. 수고의 자리에도 두시고, 고난의 자리에도 두소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기도 하시고, 물리치기도 하소서. 높이시려거든 높이시고, 낮추시려거든 낮추소서. 저를 채우기도 하시고, 비우기도 하소서. 주님의 기쁨을 위해 기꺼이 마음 다해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내어놓습니다. 영광스럽고 복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주님은 저의 것이며,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하소서. 제가 이 땅에서 맺은 언약이 하늘에서도 맺어지게 하소서. 아멘.”

요한 웨슬리의 기도문의 고백처럼 주어진 환경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세상이 줄수 없는 진실한 찬양의 기쁨이 넘쳐나야 합니다. 시편 97편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서로가 다른 이해와 믿음의 여정을 넘어서는 평안과 기쁨을 전해줍니다. 때로 인생의 허무함과 두려움에 마음이 흔들릴 때에도, 말씀 안에서 우리 삶을 다스리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들며 오직 한분 하나님만 드러내는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