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2 2025 주일설교

(케임브리지한인교회 창립 47주년 기념예배)

우리의 영광의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Christ, Our Hope of Glory
골로새서 1:24-29

김태환 목사


24 나는 여러분을 위해 받는 고난을 기뻐합니다.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겪으셔야 할 고난의 남은 부분을 내가 겪을 수 있으니, 그것을 기쁨으로 견뎌 냅니다. 25 나는 특별한 사명을 받고 여러분을 돕기 위해 보내진 교회의 일꾼입니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숨김없이 여러분 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26 이 말씀은 이 세상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숨겨져 왔던 비밀이었는데,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27 모든 사람을 위한 풍성하고도 영광스러운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만민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이 진리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며,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영광스러운 소망이 되십니다. 28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어느 누구에게나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힘껏 사람들을 가르치고 바 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기 원하기 때 문입니다. 29 이 일을 위해 힘쓰고 애쓰며, 내 안에서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힘차게 나 아갑니다. (쉬운성경)


24 I am glad when I suffer for you in my body, for I am participating in the sufferings of Christ that continue for his body, the church. 25 God has given me the responsibility of serving his church by proclaiming his entire message to you. 26 This message was kept secret for centuries and generations past, but now it has been revealed to God’s people. 27 For God wanted them to know that the riches and glory of Christ are for you Gentiles, too. And this is the secret: Christ lives in you. This gives you assurance of sharing his glory. 28 So we tell others about Christ, warning everyone and teaching eve- ryone with all the wisdom God has given us. We want to present them to God, perfect1 in their relationship to Christ. / 1Or mature 29 That’s why I work and struggle so hard, depending on Christ’s mighty power that works within me.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47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오늘 예배는 평소와 달리 우리 교회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갖게 하는 예배입니다. 불행하게도 지금은 교회의 영향력이 급 격하게 감소하고 있는 때입니다. 유럽과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교회의 영향력 이 쇠퇴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포스트 지(紙)에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9가지 이유’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이유들을 보면 이렇습니다. (1) 교회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2) 교회가 반지성적(anti- intellectual)이다. (3) 교회 안에 사랑이 없다. (4) 무조건적인 경건의 삶을 요구한다. (5) 맹목 적인 봉사와 헌신을 요구한다. (6) 교회 외에도 다른 옵션들이 많이 있다. (7) 교회가 복음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는다. (8) 교회가 더 이상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9) 진부하고 무식한 (unenlightened) 목사의 설교/교인들의 삶과 연관성(relevance)이 부족한 설교를 한다.

물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이유가 모두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겸손하게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공신력 있는 여론조사와 통계로 유명한 Pew Research Center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현재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종교가 없는 사람들 의 수가 증가하고 있고, 기독교를 탈퇴하는 현상(disaffiliation)이 지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2024년 한국 리서치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국에서도 종교가 없다고 답한 사람들이 51% 로,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2024년 9월에 ‘한국 개신교 교세 현 황 및 감소 원인 분석’이라는 AI의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한국 개신교 교회의 교인 비율 이 계속 감소 추세에 있고, 특히 젊은 세대들의 감소 현상이 두드러진다고 합니다. 2001년 부터 2023년까지 개신교 교인의 비율이 20.6%에서 16.3%로 감소했고, 2050년에는 11.9% 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 교회는 창립 47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입니 다. 교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입니다. ‘세상에서(ek-) 불러냄(kaléō) 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특별한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 되신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선교활동을 하던 때는 대략 서기46-57년 경입니다. 이 때 복음을 위협하던 세력 중 하나가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영과 지식을 최고의 덕목(德 目)으로 삼는 그리스 철학사상입니다. ‘영지주의’의 핵심은 모든 현상과 사물을 이원론적(二 元論的)으로 구분해서 영은 선하고 물질(육체)은 악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동시에 영지주의 는 최고의 지식은 비밀(mystery)에 감춰져 있어 소수의 ‘완전한 사람들(Gnostics)’에게만 공 개되기 때문에 결국 구원은 이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합니다.

바울은 영지주의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영지주의에 대한 주의를 환 기시킵니다. 바울은 영지주의를 ‘헛된 속임수’ ‘초등학문’, ‘헛된 말(골로새서 2:8)’, ‘거짓된 지 식(디모데전서 6:20)’이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이 영지주의를 배격한 이유는 그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 구원은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 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은퇴하고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다 보니 음악을 많이 듣습니다. 장르를 정해 놓고 듣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듣게 됩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S. Bach, 1685–1750)의 칸타타 BWV 147 ‘With Heart, Mouth, Action, And Life (마음과 입과 행위 와 삶)’의 마지막 합창 부분에 ‘예수, 인간의 갈망의 기쁨(Jesu, Joy of Man’s Desiring)’이라 는 유명한 곡이 나옵니다. 바흐가 300년 전에 작곡한 이 곡은, 저에게는 우리 시대에 주는 메시지처럼 들렸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갈망(渴望)하는 이유는 거기에서 기쁨을 얻기 위해 서입니다. 하지만, 모든 갈망의 끝에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갈망의 끝이 허무하게 끝 나기도 하고, 절망적으로 끝나기도 하고, 방황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바흐는 인간의 갈망 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기쁨이 예수라고 했습니다. 바흐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해서 궁극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지금은 가치의 다양성이 인정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 매우 혼란스러운 때입니다. 2,000년 전의 크리스천들도 그랬습니다. 아직 교회가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영지주의’라는 사상이 교회로 밀려들 어왔습니다. 당시에 ‘영지주의’는 사회의 엘리트들이 따르는 세련된 철학 사상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그 시대의 대세(大勢)였습니다. 골로새 교회 교인들은 영지주 의자들의 주장과 복음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런 때에 바울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은밀 한 지식의 비밀과 지혜는 이미 여러분이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 모두 들어 있습니 다(27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숨겨 있습니다(골로새서 2:3).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희망은 “앞으로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 라 ‘영광의 희망(27절, the hope of glory, ἐλπὶς τῆς δόξης)’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영광 을 의미하는 독사(δόξα)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들어갈 영광 스러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영광으로 들어 갈 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수도 있고, 실패를 맛볼 수도 있고,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영광의 희망 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시시 와이넌스(CeCe Winans)가 부른 노래 “Come Jesus Come”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납니다.

“가끔 나는 무릎 꿇고 기도해요. 오소서 예수님, 오늘이 그날이 되게 해 주세요. 가끔은 무 너질 것만 같아요. 하지만 나는 붙잡고 있어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Sometimes I feel like I’m gonna break. But I’m holding on To a hope that won’t fade)” 가사가 아주 감동적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도 이 희망에 대하여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 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희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4) 바울은 이 희망을 ‘하나님의 영광의 희망’이라 고(로마서 5:2)했습니다. 이 희망은 하나님의 영광이 보증된(guaranteed) 희망입니다. 우리 에게 이 희망이 있기 때문에 환난을 당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더 견고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지금 당하고 있는 환난을 더 나은 삶을 창조할 기회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약속된 희망을 가지고 어떻게 세 상을 살아가는지, 사람들에게 말(설교)하고(proclaiming), 주의를 주고(admonishing), 가르치 고(teaching), 보여주고(presenting), 사람들과 함께 그것을 나누는 것(sharing)을 말합니다 (28절).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 신실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 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 2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 해 받는 고난을 기뻐합니다.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겪으셔야 할 고난의 남 은 부분을 내가 겪을 수 있으니, 그것을 기쁨으로 견뎌 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옵니다. “I am glad when I suffer for you in my body, for I am partici- pating in the sufferings of Christ that continue for his body, the church.” 이 말씀은 예수 그 리스도의 고난은 오늘날에도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고난을 함께 나눌 때,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 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교회의 정체성은 큰 교회 건물이나 그 교회에 모이는 많은 교인들, 그리 고 많은 교회 예산에 있지 않습니다. 2020년 1월 20일에 선언했던 팬데믹은 교회에게 많은 과제를 안겨주었습니다. 팬데믹은 교회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시도를 중단하고 겸손하 게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였습니다. 교회는 팬데믹을 겪으면서 정체성을 새롭게 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런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 지 못하고 오히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 독일)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희망의 신학 (1964)’,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 등의 책들을 저술했습니다. 저는 이 책들을 읽으면서 신학교와 대학원 시절을 보냈습니다. 몰트만은 2,000년에 쓴 ‘신학의 체험’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신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돌보는 사람은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 스도는 그들이 받는 고난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몰트만은 교회는 고난 받는 공 동체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고난 받는 사람들 과 함께 하고, 그들을 돕고,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교회가 오늘날처럼 섬김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던 적이 과거에 없었던 것 같 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섬김과 봉사의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 프로 그램을 운영하는지, 왜 그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에 대한 설명 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同參)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 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 1910-1997)는 오스만 제국의 코소보(현, 북마케도니아)에서 출 생했습니다. 1929년에 소속 수도회의 결정에 따라 인도로 건너가 콜카타(옛 이름 캘커타)의 빈민가를 둘러본 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라”는 소명(召命)을 받습니다. 그 리고, 거기서 그녀는 죽을 때까지 무려 68년 동안 빈자와 약자들의 어머니로 살았습니다. 인종과 국경을 넘어서, 그것도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섬기며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삶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 람들에게 많은 영감(靈感)을 줍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테레사 수녀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섬김의 삶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외로운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 대화의 상대가 되 어 주고,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친구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는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로마서 12:15). 그리고, 주변에서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다가가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로 마서 12:16). 그리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람들을 사랑과 용서와 온유함으로 대하 는 것입니다(에베소서 4:32).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이런 섬김의 삶이 곧 그리 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4절). 섬김의 삶을 크고 대단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상의 생활 속에서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케임브리지한인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들이 케임브리지한인교회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 케임브리지한인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정체성(identity)이 결 정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 를 통해 새롭게 창조되는 교회, 그리고, 주변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교회, 환 난과 고난을 오히려 성장의 기회로 삼아 더욱 단단해지는 교회, 그리고 세상으로 들어가서 각자의 위치에서 조용히 섬김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그 질문에 답해 야 합니다.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우리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10. 05 2025 주일설교

(세계 성만찬, 장학헌금 주일)

내 작은 믿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Offering My Little Faith to God

 누가복음 17:5~10

17:5 ○ 사도들이 주께 말했다. “주님, 저희의 믿음을 키워 주소서.” 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저 바다에 심겨져라!’ 하고 명령해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7 ○ “너희 중에 누군가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돌보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일하다가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이리 와서, 식탁에 앉아 밥부터 먹어라.’ 하고 챙겨 줄 사람이 어디 있느냐? 8 오히려 너희는 그 종에게 주인의 식사를 먼저 준비하게 하고, 또 주인에게 시중들게 한 다음, 그러고 나서 ‘너도 먹고 마셔라.’ 하고 허락하지 않겠느냐? 9 그리고 또 종이 고분고분 주인의 말을 잘 듣는다고 해서, 주인은 특별히 그 종에게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10 이와 마찬가지다. 너희도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다 따른 다음에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희는 다만 보잘것없는 종일 따름입니다. 그저 종의 마땅한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쉬운말 성경)

5 The apostles said to the Lord, “Show us how to increase our faith.”6 The Lord answered, “If you had faith even as small as a mustard seed, you could say to this mulberry tree, ‘May you be uprooted and be planted in the sea,’ and it would obey you!7 “When a servant comes in from plowing or taking care of sheep, does his master say, ‘Come in and eat with me’? 8 No, he says, ‘Prepare my meal, put on your apron, and serve me while I eat. Then you can eat later.’ 9 And does the master thank the servant for doing what he was told to do? Of course not. 10 In the same way, when you obey me you should say, ‘We are unworthy servants who have simply done our duty.’”(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세계 성만찬 주일입니다. 이 성찬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을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작고 연약하지만 성찬의 믿음을 통해서 서로의 삶의 고단함을 위로해 주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길 소망합니다.

믿음의 시작

성경에는 예수께서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을 언급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재물로 인하여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이여!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조차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 주시거늘 하물며 여러분들이야 오죽 잘 돌보아 주시지 않겠습니까?”(마6:30) 말씀하시며 믿음을 작게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로마의 백부장이 자신의 집에 하인이 중풍병으로 몹시 괴로워 하는 상황에서, “주님,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 칭찬하셨습니다. 자신의 자녀나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종은 가치가 없던 존재로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의 생명을 하나의 인격체로 소중하게 여긴 백부장의 믿음을 크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또 가나안 이방 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 들려 괴로워하는 상황에서 예수께 나아와 간구하며,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겸손한 고백을 드렸을때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여인이지만 주를 향한 간절한 갈망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보실때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의 믿음을 키워 주소서” 라는 요청으로 시작됩니다. 이 요청의 앞서서 1절로 4절에 보면, 예수님은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죄에 대해 경고하시며, “삼가 너희 자신을 조심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7:1–3) 이어서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짓거든 책망하고,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반복해서 죄를 짓고 또 회개하면, 그때마다 용서하라고 명하십니다 (눅 17:4)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7’ 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였습니다. 그렇다면 회개하고 돌아오는 형제를 제한 없이 용서하라는 권면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요구사항을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더 큰 믿음을 달라고 간구한 것은 하루동안 내게 일곱 번 죄를 짓고 회개하는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고백입니다. 제한없이 용서할 믿음이 없으니 더 큰 믿음을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큰 믿음을 달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의 양을 늘려주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도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저 바다에 심겨져라!’ 하고 명령해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뽕나무는 뿌리를 깊고 넓게 내려서 폭풍 속에서도 견고하게 버티는 나무였지만 예수님은 그만큼 어려운 일도,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도 가능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을까요? 큰 믿음을 달라는 우리의 기도가 과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간구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믿음을 달라는 간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가리우는 명분이나 내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은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의 기도 속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갈망보다, 여전히 내 뜻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간절히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믿음의 성장

믿음은 우리가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에도 수용하는 힘입니다. 염려와 근심되는 상황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빚으시기 위함을 믿고, 상황과 환경에 흔들리는 감정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 받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연약함과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뽑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 한알의 믿음 안에 담긴 본질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죄를 씻겨 주신 주의 이름을 의지할때 마음과 영혼이 살아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영혼이 호흡하고,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존 낙스는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 없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 라는 확신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또한 “기도하지 않는 기독교인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성화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한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는 크고 작은 문제가 있습니다. 일터에서의 스트레스와 피곤함이 다툼이 될 때도 있고, 아이를 양육하며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믿음의 시험과 마음의 유혹은 우리의 일상을 전쟁터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일상의 자리에서도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께 붙들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회복과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은 아주 작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자라나면 큰 나무가 되듯이, 믿음이 작아 보여도 삶으로 연결되어 질때에 하나님 뜻이 드러나게 됩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방향과 그 삶을 살아내는데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가 밭에 잘 심겨지려면 좋은 땅이 필요합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말씀 앞에서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내 고집과 자아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질 때 믿음의 생명이 자라납니다.   

한 사례를 생각해 봅니다.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부주를 이끌던 링컨 대통령은 매일 2~3시간씩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남부군 로버트 리 장군도 매일 눈물로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참모가 링컨에게 말했습니다. “각하, 하나님도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두분 모두 이렇게 기도하시니,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들어주셔야 합니까?” 그러자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링컨이 기도했던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지 돌아보았던 것입니다. 링컨은 현재의 상황은 어렵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맡겨진 일을 감당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연약함속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갈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왜 믿음이 필요한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곤 합니다. 매순간 인간의 본성의 한계를 깨닫고  일상의 작은 일 속에서도 믿음을 시험하는 순간들을 마주합니다. 한참을 애써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 앞에서 실망하고 분노가 일어나고, 오해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상처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감정으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겨자씨 만한 믿음 붙들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지를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살아 있어서 어려운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할 것이고 그분을 닮아가게 할 것입니다.

믿음의 완성

예수님은 제자로서 갖춰야 할 겸손의 덕목을 가르치기 위해 종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7-9절은 예수님 당시에 시대적 문화속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었습니다. ‘종이 밭을 갈고 양을 돌보았다고 해서 주인이 종을 식탁에 앉아서 챙겨주지 않는다. 그 종이 일하다가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이리 와서, 식탁에 앉아 밥부터 먹어라.’ 하고 챙겨 줄 사람이 어디 있느냐? 8 오히려 너희는 그 종에게 주인의 식사를 먼저 준비하게 하고, 또 주인에게 시중들게 한 다음, 그러고 나서 ‘너도 먹고 마셔라.’ 하고 허락하지 않겠느냐? 9 그리고 주인은 종에게 식사를 준비하게 할 것이다. 명한 대로 했다고 주인이 종에게 감사하지 않고,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종은 ‘저희는 다만 보잘것없는 종일 따름입니다. 그저 종의 마땅한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나의 자랑을 위해 일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더라도 나의 일이라 여기며 생색을 내고, 보상을 바란다면 믿음의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 교훈은 앞서 주어진 “형제를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며 서로가 겪었을 삶의 어려움을 위로할 줄 아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서로 서로가 감사와 존중을 나누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완성은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아니어도 이루어 질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거룩한 책임감을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하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겸손히 섬기게 됩니다. 제자의 삶의 목적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맡겨 주신 일을 책임 있게 감당하며 그 속에서 감사와 기쁨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평생동안 우리의 믿음의 방향을 점검하고 내 믿음을 시험하는 순간들을 이겨내고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 안에는 우리만 아는 연약한 본성과 욕심이 있습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삶을 살아낼 실력이 없습니다. 그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이겨 내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받는 자녀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책임감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사랑을 누려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일하고 있음을 잊지 않고, 언제나 겸손히 주를 섬기는 삶에 있습니다. 내 컨디션과 내 선택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 만족만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그 삶이 행복할까요? 잠시는 편하고 행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청지기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무게가 더해 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우리에게 거룩한 부담감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맡겨진 일을 겸손하게 순종할 때, 우리는 그 일을 지속해 나갈 기쁨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무언가 대단하고 준비된 큰 믿음을 기대하지만 반복되는 쓰러짐과 실망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께 붙들리며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인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다듬어 가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믿음은 함께 하는 자리에서 성장하고 깊어집니다. 혼자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함께 가야 합니다. 본회퍼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서로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는형제라는 말씀속에 계신 그리스도보다 약합니다. 이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귐을 갖는 목적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은 서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로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는 이상이 아니라, 거룩한 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본회퍼-성도의 공동 생활)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속한 형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회복될 때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세상은 혼란스럽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잃어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채워지면 우리의 인생은 더이상 허전하거나 결핍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의 자리 앞에 서게 됩니다. 성찬은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며 삶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은혜의 자리입니다. 감사와 새 언약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을 가지고 성찬에 참여 하시기 바랍니다.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자들을 주께서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굳은 마음을 녹이고 상한 마음을 싸매시며 우리를 다시 세워주십니다. 하나님은 큰 믿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믿음을 찾으십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09 28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16주)

하나님의 시선으로

Through God’s Eyes

누가복음 16:19~31

16:19 ○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소. 그 부자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잔치를 벌이며 사치스러운 나날을 보냈소. 20 그런데 그 부잣집의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고 하는 병든 거지가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21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나마 허기를 채우려고 애쓰고 있었소. 그러나 개들만이 와서, 나사로의 헌데를 핥고 갈 뿐이었소. 22 때가 되어 거지가 죽자, 천사들은 그를 아브라함 품으로 데리고 갔소. 그 부자도 역시 죽어서 땅에 묻혔소. 23 그 부자는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아득히 먼 곳에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었소. 24 그래서 그 부자가 크게 소리쳤소. ‘아브라함 조상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이리로 보내어, 그 손가락에 물을 찍어 제 혀라도 살짝 적시게 해 주십시오. 타오르는 불덩이 속에서 너무나 괴롭습니다.’ 25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했소. ‘안 된다, 생각해 보아라. 너는 살아 있을 때 온갖 좋은 것들을 다 가져 보았으나,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지금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있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26 더구나 우리와 너 사이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그리로 건너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거기서 이리로 건너오고 싶어도 오지 못한다.’ 27 그러자 그 부자가 애원했소. ‘아브라함 조상님이여, 그러면 제발 부탁합니다. 나사로를 제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큼은 이곳으로 와서 나처럼 고통 받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29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했소. ‘그들에게는 지금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언제든지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30 그 부자가 대답했소.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이여,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죽은 사람을 그들에게로 보낸다면,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서 회개할 것입니다.’ 31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설령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그들에게 돌아간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을 것이다.’하였소.” (쉬운말 성경)

19 Jesus said, “There was a certain rich man who was splendidly clothed in purple and fine linen and who lived each day in luxury. 20 At his gate lay a poor man named Lazarus who was covered with sores. 21 As Lazarus lay there longing for scraps from the rich man’s table, the dogs would come and lick his open sores.22 “Finally, the poor man died and was carried by the angels to sit beside Abraham at the heavenly banquet.[e]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23 and he went to the place of the dead.[f] There, in torment, he saw Abraham in the far distance with Lazarus at his side.24 “The rich man shouted, ‘Father Abraham, have some pity! Send Lazarus over here to dip the tip of his finger in water and cool my tongue. I am in anguish in these flames.’25 “But Abraham said to him, ‘Son, remember that during your lifetime you had everything you wanted, and Lazarus had nothing. So now he is here being comforted, and you are in anguish. 26 And besides, there is a great chasm separating us. No one can cross over to you from here, and no one can cross over to us from there.’27 “Then the rich man said, ‘Please, Father Abraham, at least send him to my father’s home. 28 For I have five brothers, and I want him to warn them so they don’t end up in this place of torment.’29 “But Abraham said, ‘Moses and the prophets have warned them. Your brothers can read what they wrote.’30 “The rich man replied, ‘No, Father Abraham! But if someone is sent to them from the dead, then they will repent of their sins and turn to God.’31 “But Abraham said, ‘If they won’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they won’t be persuaded even if someone rises from the dead.’”(New Living Translation)

지난주 설교에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올바른 재물관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인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는 재물을 그릇되게 사용한 부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유속의 이 부자는 재물을 우상으로 삼고 살다가 심판을 받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은혜 안에서 발견하는 믿음의 삶

이 비유에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인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참 대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비유속에 한 부자는 화려한 옷을 입고 늘 잔치를 벌리며 사치스러운 날들을 보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관은 잔치를 열어 즐겁게 사는 것이었다. 하나님없는 세속적 즐거움과 사교적 향락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 집 대문 앞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살아가던 병든 거지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겨우 허기를 달랬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를 도와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매일 잔치를 벌이는 부자인 집으로 가면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겠다 싶어서 불편한 몸으로 대문에 누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유 가운데 부자가 왜 음부에 떨어질 정도로 불의 했는지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일 잔치를 열다 보면 그 쾌락도 만족감이 점점 줄어 들긴 했을 것입니다. 그는 매일 잔치를 열며 자신의 행복과 삶에 몰두하느라 집 앞에 죽어가는 나사로를 보지 못했고 내가 지닌 돈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착각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이 비유 속에서 참 흥미로운 점은 비유 속 인물들은 보통 “선한 사마리아인”, “아버지의 집을 떠난 둘째 아들”, “불의한 재판관” 등으로만 지칭되는데 이 비유에서는 거지의 이름이 특별하게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히브리어 ‘엘르아자르’에서 온 이름으로 “하나님이 돕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름을 통해 볼 때, 나사로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고 의지하며 살아가던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잃어버린 한 사람이도 더 찾기 위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주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길은 찾는 이들이 적지만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는 자리입니다. 나사로는 비록 이 땅에서 삶이 힘들고 가난했지만 자신의 환경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갈망합니다. 어떤 이들은 개인의 행복과 세속적 자유를 우선시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단순히 자유를 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매일의 선택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사는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돈이나 개인의 만족은 구원의 문을 여는 조건이 될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보고 기대하는 천국은 어떤 나라인가요? 성경은 ‘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추구하십시오. 이것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히 12:14) 말씀합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믿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좁은 곳에서도 평안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은 눈물과 땀에 젖은 우리의 삶과 고달픈 수고속에서도 주를 믿는 모든 자들을 기억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거룩하심 안에서 우리는 상처와 고통에서 치유를 받고, 나만의 행복과 자기 중심적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시편118편 5절을 보시겠습니다. 118:5 ○ 내가 고통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이끌어 내시어 넓은 곳에 세워 주셨도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걷는 좁은 길은 생명의 면류관을 향한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하시며, 부활의 믿음 지니고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새롭게 하는 참된 희망이며, 우리를 생명과 승리로 이끄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삶

두 사람은 돌이킬수 없는 운명으로 인생이 역전되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두 사람 모두 죽었는데,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고통스러운 지옥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대한 구덩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있어서 물 한모금도 얻어 마실 수 없었습니다. 부자는 타오르는 불덩이 속에서 너무나 괴롭고 갈증이 나서 고통 속에서 물 한 모금이라도 허락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 때 나온 아브라함의 대답은 ‘안 된다, 생각해 보아라. 너는 살아 있을 때 온갖 좋은 것들을 다 가져 보았으나,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지금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있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 대답은 부자가 단순히 재산을 가졌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속에서 풍요로움을 누렸음에도 고통받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즉 자기 만족에만 머물렀던 것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을 의미합니다. 부자가 애원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섯 형제들이 있는데, 자신처럼 극한 고통을 경험하지 않도록 나사로를 제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오늘날 시대는 돈 때문에 울고 갈등하며 가까웠던 가족도 돈과 싸우며 남이 됩니다. 돈으로 사람을 속이고, 수많은 죄가 자라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음부에서 간청하는 부자의 애원은 세상 누구보다 간절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도 지금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고 언제든지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으니. 만일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설령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그들에게 돌아간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매순간 삶속에서 물질이 주인되는지 아닌지 구분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이들을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속에서 바쁜 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주변에 절박한 마음으로 있는 연약한 이웃에게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인색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절박한 삶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며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길에서 우리의 삶은 새로워집니다.

아브람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부여 받고 약속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사울도 큰자에서 이방인들의 복음 선교사로 작은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사도로 복음 증거자의 자세로 살았습니다. 주님은 “내가 한 일을 너희도 하고 더 큰 일들을 하리라”(요 14:12) 고 하셨는데 우리는 우리를 위해 고통의 풀무풀 속에 뛰어 드신 주님의 사랑을 알면서도 여전히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여전히 과거의 나의 상처에 묶여 나의 상황과 나의 약함만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물질로 인한 결핍이나 혹은 풍요로 인한 교만함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회복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를 믿고 의지하는 삶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때 그의 곁에 있던 강도를 향해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께서 오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 땅을 바라보는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내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주어진 삶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분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가난한 마음으로 주를 의지하는 이들을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한 사람이라도 더 찾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하늘의 뜻을 들려주시지만, 우리의 생각이 땅의 것에만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과의 소통은 막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하나님의 관점이 열리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비록 기도 가운데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아 여전히 어려움의 길을 걷는 것 처럼 보여도, 주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깨닫게 되면 우리는 의의 길로 인도함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에서 말씀하신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은 단순히 물질적 가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아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이고 내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겸손한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현실의 부족함에만 매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 속 작은 감사들을 통해 미래를 바꿔나가길 원하십니다. 인생의 버거운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그분께서 이루실 삶의 변화를 기대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가 변화된 삶을 살게 합니다.

지금은 별세하셨지만, 2007년 7월 24일 당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도쿄 프린스파크 호텔에서 세례를 받을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시대적 지성인으로 불리며 신념 있는 무신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태까지 생명, 지성 다 내 것인 줄 알았다. 숨 쉬는 것, 말하는 것이 다 기프트다. 위대한 재산을 내가 받은 것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것에 대한 질문에는 “부모님을 만난 것처럼 엉엉 울 것 같다. ‘그 동안 얼마나 고생 많으셨어요. 우리 때문에 얼마나 속썩으셨어요…’ 이렇게 호소하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탕자처럼 가슴을 아프게 해 드렸는데, 저를 받아주신 주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나. 이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고백은 우리의 마음에도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많은 것들이 그저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라 생각하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혹여 내 마음이 나만을 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나의 고백이 입술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신 은혜를 당연하게 누리며 살아가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경제적 압박과 삶의 불안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답답하고 힘이 들어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고민합니다. 예배 안에서도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삶의 장애물이 너무 많습니다. 마음이 막혀 사방을 둘러보아도 한숨이 나오는 그런 날들이 우리 인생에는 너무 쉽게 자주 찾아옵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향해 살아가면 하나님의 뜻과 이웃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인생의 문제가 버겁고 어려워도 예배의 자리에서 나의 삶의 시선을 주님께 돌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시선에 머무는 삶, 내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고자 엎드리는 삶에서 영원한 길을 만나게 됩니다. 내 마음이 주님께 머문다면 그 인생이 바로 천국이 되고, 그 마음의 모든 선택이 주님께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09. 21.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15주)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What Will You Give to God?

누가복음 16:1~13

16: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 집 청지기가 정직하지 못하여,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2 주인이 그 청지기를 불러 말했다. ‘자네에 대해 나쁜 소문이 들리던데, 그게 어찌 된 일인가? 빠른 시일 내에 장부를 정리해서 내게 넘겨주게. 더 이상 자네에게는 일을 맡길 수가 없네.’ 3 그 청지기는 혼자 중얼거렸다. ‘주인이 날 쫓아내려 하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 아닌가. 4 옳지,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내가 여기서 떠나더라도, 나를 돌보아 줄 친구들을 만들어 놓아야겠다!’ 5 그래서 그 청지기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들였다. 그가 첫 번째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을 졌소?’ 6 그 사람이 ‘올리브기름 백 말입니다.’ 하고 말하자, 청지기가 말했다. ‘자, 당신이 도장 찍은 빚 문서가 여기 있으니, 쉰 말을 빌렸다고 고쳐 쓰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청지기가 다음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을 졌소?’ 그 사람이 ‘밀 백 섬입니다.’ 하고 말하자, 청지기가 말했다. ‘자, 여기 당신의 빚 문서가 있으니, 가져다가 여든 섬이라고 고쳐 쓰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청지기가 이처럼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나중을 대비하여 영리하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 식으로 거래를 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리하게 군다. 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다 없어지게 될 때, 그 친구들로 하여금 너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들이게 하라. 10 지극히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역시 성실하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일에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큰일에도 역시 정직하지 못하다. 11 너희가 세상 재물을 다루는 데에도 성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에게 하늘의 참된 재물을 믿고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재산을 다루는 데에도 신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 몫을 떼어 주겠느냐? 13 어느 누구도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한편을 미워하면 다른 편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한편을 존중하면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 (쉬운말 성경)

1 Jesus told this story to his disciples: “There was a certain rich man who had a manager handling his affairs. One day a report came that the manager was wasting his employer’s money. 2 So the employer called him in and said, ‘What’s this I hear about you? Get your report in order, because you are going to be fired.’ 3 “The manager thought to himself, ‘Now what? My boss has fired me. I don’t have the strength to dig ditches, and I’m too proud to beg. 4 Ah, I know how to ensure that I’ll have plenty of friends who will give me a home when I am fired.’ 5 “So he invited each person who owed money to his employer to come and discuss the situation. He asked the first one, ‘How much do you owe him?’ 6 The man replied, ‘I owe him 800 gallons of olive oil.’ So the manager told him, ‘Take the bill and quickly change it to 400 gallons.’ 7 “‘And how much do you owe my employer?’ he asked the next man. ‘I owe him 1,000 bushels of wheat,’ was the reply. ‘Here,’ the manager said, ‘take the bill and change it to 800 bushels.’ 8 “The rich man had to admire the dishonest rascal for being so shrewd. And it is true that the children of this world are more shrewd in dealing with the world around them than are the children of the light. 9 Here’s the lesson: Use your worldly resources to benefit others and make friends. Then, when your possessions are gone, they will welcome you to an eternal home. 10 “If you are faithful in little things, you will be faithful in large ones. But if you are dishonest in little things, you won’t be honest with greater responsibilities. 11 And if you are untrustworthy about worldly wealth, who will trust you with the true riches of heaven? 12 And if you are not faithful with other people’s things, why should you be trusted with things of your own? 13 “No one can serve two masters. For you will hate one and love the other; you will be devoted to one and despise the other. You cannot serve God and be enslaved to money.”(New Living Translation)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 가운데 ‘달리는 기부천사’로 불리는 가수 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 815광복절을 기념해 독립 유공자 후손들을 돕기 위해 81.5km 마라톤(‘815런’)을 완주하는 모습이 방송에 소개되었습니다. 81.5km를 완주하기 위해서 그는 8시간 동안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이 거리는 단순한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아픈 아이들, 희귀병 환자와 가족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 운동가들과 후손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최선을 다해 감사의 편지를 전하는 마음으로 달린 길이었습니다.

본 적 없는 사람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내 삶의 최선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얼마나 훈련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삶의 고단함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위한 삶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사의 편지가 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은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신 대목을 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옳지 않은 일을 했음에도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비유속에 한 부자는 청지기가 자신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해고 하기로 결정합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는 것을 알고 쉽게 돈을 벌 일들을 찾아 고민합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 아닌가. 그는 자신이 쫓겨 나더라도 자신을 돌보아 줄 친구들을 만들어 놓아야겠다 결심하고 머리를 써서 한명씩 불러 들입니다. 이후 그는 올리브 기름 백 말을 빚진 사람에게는 오십 말로, 밀 백 섬을 빚진 사람에게는 여든 섬으로 빚을 줄여 주었습니다. 불의한 일로 빚은 진 사람들에게 엄청난 선심을 쓴 것입니다. 참으로 불의한 일입니다. 성경은 불의를 반드시 심판하시고 죄에는 마땅한 결과가 따른다고 말씀합니다(롬 6:23).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불의한 청지기의 행위를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초점은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 이땅에서 제자들이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재물관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도 일시적 재물로 친구를 삼으려고 지혜를 발휘하는데, 영원한 집을 향해 가는 제자인 너희도 정신을 차려 돈을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하시는 이 비유를 듣던 바리새인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청지기라는 헬라어 ‘οἰκονόμος’는 ‘집의 관리인, 일을 맡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청지기에게 필요한 자세는 신실함입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선한 일을 하면서 그것이 연극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입니다. 멋진 연극에 사람들의 눈을 속일지 몰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박수는 우리의 마음을 향합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나 자신을 위한 기대가 아니라 주인을 향한 마음이 커져야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맡겨진 것을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청지기의 길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오늘 본문으로 한 존 웨슬리의 설교 “돈의 사용(The Use of Money)을 다시 한번 읽었습니다. 웨슬리는 재물이 고귀한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며, 기독교 가치로만 사용한다면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생명과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몸과 마음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돈을 벌라. 무엇보다 이웃의 건강을 해치며 돈을 버는 악한 직업을 갖는 것을 두려워 하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낭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돈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만한 거룩한 제물이 되도록 살아가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서 돈이 가진 양면성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신 이유는 그가 옳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행위는 멀리하되,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맡겨진 재물을 지혜롭게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매순간 낭비하는 삶이 아니라 어떻게 잘 흘려 보낼지, 의미있게 쓸지를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를 준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땅에 쌓아 두는 돈과 하늘에 쌓아 두는 돈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6:19 “여러분은 땅 위에 재물을 쌓아 두지 마십시오. 이 땅에서는 좀이 먹어 없어지거나, 도둑을 맞기 쉽습니다. 6:20 그러므로 여러분의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십시오. 거기에서는 좀이 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는 일이 없고, 도둑이 훔쳐갈 염려도 전혀 없습니다. 6:21 여러분의 재물이 있는 그곳에 여러분의 마음도 역시 있습니다.”

성경은 돈을 바르게 잘 사용하는 삶이 종말을 준비하는 삶임을 가르칩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16: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다 없어지게 될 때, 그 친구들로 하여금 너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들이게 하라. 즉 세상 재물은 결국 없어지게 되지만 그 재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면 영원한 집에서 우리를 맞이할 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 재물이 없어지게 될 때를 말씀합니다. 종말론적으로 보면 돈은 우리의 손에서 언젠가 떠나갈 때가 옵니다. 주님 앞에서 결산할 때입니다. 세상 재물은 이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만 사용할수 있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의한 청지기도 자신을 위해 돈을 사용해서 친구를 사귀는데, 제자인 너희도 영원한 집을 위해 세상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돈은 내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이 돈은 인간의 탐욕과 욕망만을 채우는 도구가 될 때 독이 될수 있습니다. 돈이 인간의 타락한 마음과 힘으로 잘못 사용되면 우리의 삶은 물론 영혼까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 상대적 박탈감과 끝없는 비교속에서 불안을 느낍니다. 이런 우리의 삶에서 세상의 재물이 아닌 믿음의 삶을 지켜 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폴 트립의 “돈과 영성”에서는 돈과 세상의 유혹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주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길을 잃고 방황할 것이다.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망각하는 순간이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내가 영광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길 때가 것이다. 우리는 사지 않아도 되고 만족도 느낄 없는 물건에 돈을 것이다. 돈을 허비하고는 돈이 없다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혼자 잘해 보라고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은혜는 다시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고, 죄를 일깨울 것이다. 은혜의 주님은 거룩한 사랑의 팔로 우리를 다시 안아 주실 것이다. 은혜는 우리가 훗날 감사하고 만족하는 사람이 것이라고 약속한다. 은혜의 힘으로 우리는 날마다 그런 사람으로 변해 간다.”《폴 트립돈과 영성》

주님은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가난한 자들과 그리스도인에게 구제하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세상의 재물을 남을 돕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나눔은 소비 사회속에서 돈으로 인한 유혹을 막아주는 믿음생활의 ‘둑’이 됩니다. 상대적 빈곤감과 결핍은 지금의 삶을 부족하다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돈과 세상 가치를 따라가면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붙들고 살아갈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남의 것을 잠시 맡아줄 때 결핍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돌려 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내 삶과 물질과 시간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릴 때 삶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부족함 속에서 발견하는 하나님 나라

본문 속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며 불의했지만, 최소한 자신의 앞날을 위해 지혜롭게 행동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부름 받은 제자된 우리는, 영원한 집을 바라보며 더 지혜롭게 재물을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의한 청지기가 일시적인 친구를 얻기 위해 돈을 썼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영혼들을 위해 맡겨진 것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로 우리를 채우시고 주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신실한 제자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불의한 일들이 가득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붙들고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영광과 존귀를 비우시고 우리를 위해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배우지 못했던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 삼으셨고, 세리나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실패하고 지쳐 있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 가셔서 모든 민족의 모든 사람에게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마음을 유혹하는 어둔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돈의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내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잠시 맡겨주신 것으로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님을 깨달으면 고난과 어려움속에서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주인으로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택할 때 책임 있는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몸은 하나님 가까이에 있으니 너무나 좋습니다.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견고한 도피처로 삼았으니, 이 몸은 주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널리널리 전파하렵니다.” 시73:28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생을 주관하시다가 드러낸 나라가 주님이 걸아가신 길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삶의 문제, 세상의 가치, 부족함을 내려놓고 시편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나의 견고한 도피처로 삼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전의 방식대로 내 것을 다 챙기며 하나님 나라를 준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널리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삶의 전부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임을 깨닫고, 한 주간도 믿음 지니고 넉넉히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09 14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14주)

주님이 찾으신 그 한사람

The One Whom the Lord Seeks

누가복음 15:1~10

15: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2 그런 광경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 교사들이 수군거리며 투덜댔다.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여, 그들과 어울려 함께 음식을 먹는다.” 3 ○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4 “당신들 가운데 누군가가 양 일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그대로 들에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서지 않겠소? 5 그래서 양을 찾으면, 그는 크게 기뻐하며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6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할 것이오. ‘우리 다 함께 기뻐하자. 잃어버린 내 양을 내가 도로 찾았다.’ 7 내가 진정으로 당신들에게 말하겠소. 이와 같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명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욱 기뻐한다오.” 8 ○ “또 어떤 여자가 은화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하겠소? 등불을 켜 들고, 온 집안을 쓸며, 부지런히 돈을 찾지 않겠소? 9 그러다가 돈을 찾으면, 그 여자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놓고 함께 기쁨을 나눌 것이오. 10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크게 기뻐한다오.” (쉬운말 성경)

1 Tax collectors and other notorious sinners often came to listen to Jesus teach. 2 This made the Pharisees and teachers of religious law complain that he was associating with such sinful people—even eating with them! 3 So Jesus told them this story: 4 “If a man has a hundred sheep and one of them gets lost, what will he do? Won’t he leave the ninety-nine others in the wilderness and go to search for the one that is lost until he finds it? 5 And when he has found it, he will joyfully carry it home on his shoulders. 6 When he arrives, he will call together his friends and neighbors, saying, ‘Rejoice with me because I have found my lost sheep.’ 7 In the same way, there is more joy in heaven over one lost sinner who repents and returns to God than over ninety-nine others who are righteous and haven’t strayed away! 8 “Or suppose a woman has ten silver coins[a] and loses one. Won’t she light a lamp and sweep the entire house and search carefully until she finds it? 9 And when she finds it, she will call in her friends and neighbors and say, ‘Rejoice with me because I have found my lost coin.’ 10 In the same way, there is joy in the presence of God’s angels when even one sinner repents.”(New Living Translation)

세상을 바꾸는 시간, ‘세바시’라는 강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2011년에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15분 동안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는 콘텐츠입니다. 어느 방송에서 세바시 PD가 이 프로그램을 만든 이유를 소개했는데, 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장(場)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이 프로그램이 만들어졌습니다.

성경 안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잃은 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보여 주시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잃었던 양을 찾아 주님의 품으로 데려오는 이야기는 사람을 살리는 깊은 기쁨을 보여 줍니다. 마치 소방관들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사람을 구할 때 느끼는 기쁨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어떤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을 살리는 기쁨입니다.  잃은 양 한마리를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해 쓴 복음서입니다. 누가는 12명의 제자중의 한 사람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니었지만 자신이 만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붓을 들었습니다. 누가복음 외에도 교회가 세워지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퍼져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책이 시작되는 누가복음 1장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하고 차례대로 기록한 여러 사람들이 많음을 언급하며 자신도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정확히 전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고 기록의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잃은 양을 끝까찾으신주님의 사랑

김형석 교수님은 ‘교회밖 하나님 나라’에서 신앙의 본질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목사나 신학자라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기적 같은 체험을 많이 했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만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은총의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만 그분을 만난 사람은 모든 게 문제가 안 됩니다. 《김형석-교회 밖 하나님 나라》

누가복음 15장은 잃은 양, 잃은 은화, 잃은 아들의 세 가지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서로 연결된 하나의 비유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한 영혼을 찾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양한 상황을 통해 보여 주는 연속된 이야기입니다.

잃은 것을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삶이 완전히 회복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삶의 모든 문제를 덮고, 하루하루의 순간들을 감사와 기쁨으로 채워 줍니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난 그 기쁨과 감격을 기억하시나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고 초라하고 보잘것 없던 내 삶이 자녀됨으로 완전히 새로워지는 그 순간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배제되고 소외된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회개하고 돌아올 때, 우리도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인해 탄생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성도들의 삶은 당시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습니다. 이 성령의 감동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마음이 잊혀지면, 교회는 형식과 전통만 남고 율법주의로 변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최종 목적지는 교회의 부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삶을 구현하고 실천하도록 도우시고 이끄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본문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 광야로 나서는 목자와 잃은 은화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부지런히 살피는 여인의 간절함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힘들고 지치면 포기하려 하지만, 목자는 끝까지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기쁨의 잔치를 엽니다.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의 천사들이 크게 기뻐합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열방을 향해 가라』에서 “교회는 선교가 아니라 예배를 위해 존재한다. 선교가 없는 곳에 예배가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선교는 단순히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예배가 없는 곳, 하나님의 마음과 기쁨을 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하는 예배가 선교입니다. 예수의 생명은 죽었던 우리의 마음을 살려 냅니다. 십자가의 흔적이 우리의 삶에 남겨질때 우리의 몸에도 생명의 흔적이 남는 것입니다. 고난과 연약함 속에 주님의 생명이 드러나고, 그 은혜가 흩어져 있던 우리의 마음을 모으고, 날마다 새롭게 회복시키십니다.

주위에 소망을 잃어 버리고,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전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선교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주님의 생명을 회복하는 예배의 현장으로 나아가고 육신의 삶에 매여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적 삶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율법과 규율로 사람들을 나누었고,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인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를 이탈한 어린양이 우리의 시선에는 작은 존재일지는 몰라도 하나님께는 반드시 찾아야 할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은화 한 개 역시 전체와 같은 가치로, 잃어버렸을 때 그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개의 은화는 보통 한 세트로 결혼할때 남자가 자신의 아내에게 주는 사랑의 증표였을거란 해석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버지에게 둘째 아들은 귀하고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마음은 끊어질 수 없고 계산할 수 없는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본문에서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 드는 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비방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행위를 지키며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던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부정하다고 여겨진 자들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판단과 경계안에 갇히지 않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 앞에서 우리의 한계를 느끼고 상처 받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만 사랑하다가 포기하기도 하고 힘든 현실속에서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세리와 죄인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쉽게 닫아 버리기도 합니다. 불의한 저들과 우리의 삶이 다르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에는 언제나 내가 가장 불의한 죄인일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 자신부터 하나님과 더 친밀하게 연결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타인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열심과 내 경험만으로 살아가면 결국 실패와 상처 앞에서 원망과 불만이 쌓이고 영적으로 텅빈 삶에 갇히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과 세상의 길이라는 경계에 서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듯 살아갑니다. 순수한 열정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사람을 놓치기도 하고 소망을 잃어버린 자리에 서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잃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믿고 따를 때 죽었던 우리의 믿음이 살아납니다. 마음이 외롭고 고독할때, 잃어버린 양을 끝까지 찾아가신 주님의 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이 끝까지 찾으시는 잃어버린 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이유입니다.

7절 말씀을 통해 양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명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욱 기뻐한다오.” 이 비유의 배경에는 바리새인들의 수군거림이 있었습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란 의미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곧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는 완전한 의인이라고 여겼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내 안에 가려져 있던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돌아온 아들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새옷을 입혀주며 잔치를 차려주신 아버지의 마음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향해 수군거리며 투덜대던 바리새인들과 달랐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이었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집에 사는 우리는 주님의 마음이 부어질때 한 영혼을 귀히 여기며, 그들의 곁에서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사람입니다.

‘찾다’라는 의미를 지닌 제테오(ζητέω) 는 ‘발견할 때까지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여인이 잃어버린 은화 하나를 찾기 위해 쉬지 않고 집을 쓸고 부지런히 찾았듯 주님은 길을 잃은 한 영혼을 끝까지 찾으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믿음생활과 내면의 상처로 인해 닫힌 마음, 사라진 마음의 평안 이것들이 우리가 되찾아야 할 잃어버린 은화입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은 진리의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생명을 다해 찾는 사람들, 기도하는 삶을 우선시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쉬지 않고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고니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전제가 주 안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기뻐하라’는 헬라어 ”카이로(χαίρω)는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때 얻는 기쁨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아프고 비극적인 일들이 가득합니다. 총성없는 전쟁터가 되어가는 세상은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의 자리가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둡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을 끝까지 찾으십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내신 주님은 기쁨과 감격에 겨워 그 양을 목에 업고 돌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에게도 그 마음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잃어버린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서 있다면 우리를 끝까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기쁨은 우리의 의지를 넘어 주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에는 아픔과 고통이 가득하지만 우리 모두를 끝까지 찾고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앞에 설 때,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길 잃은 양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지닌 성도이며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이 기쁨이 우리 안에만 머물지 않도록 주님의 마음으로 그 기쁨을 넉넉히 흘려 보내며 살아야 합니다. 아프고 고단했던 시간, 상처로 힘겨웠던 순간들 조차도 하나님 안에서는 주님의 기쁨이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태주 시인의 너무 늦게 라는 시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신이 주신 첫날처럼 맞이하고 하루하루 이 세상 마지막 날처럼 살다 가리라 만나는 사람마다 오직 한 사람으로 대하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으로 맞이하리라 하나란 숫자가 세상에서 얼마나 크고 무거운 것인가를 나는 너무 늦게 알아갑니다.” 주님이 끝까지 찾으시는 한 영혼,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할 때, 우리 마음에 잃어버렸던 기쁨이 회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