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9. 2024 주일설교

(성탄 후 제 1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43

순종의 여정, 하나님의 뜻을 따라

“Journey of Obedience, Following God’s Will”

누가복음 2:41-52

41 ○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예수의 부모는 관례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43 명절이 끝나고, 예수의 부모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어린 예수는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 예수의 부모는 그것도 모른 채 길을 계속 갔다. 44 그들은 예수가 일행 중에 끼여 있으려니 생각하고는, 하룻길을 갔다. 그러다가 문득 예수가 생각나서, 친척들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찾기 시작했다. 45 그러나 아무 데서도 예수를 찾지 못하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46 사흘 후에야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예수를 발견했다. 때에 예수는 선생들 사이에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있었고,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런데 예수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슬기와 지혜에 크게 경탄했다. 48 예수의 부모 역시 그 일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했다. “얘야, 왜 이렇게 우리 속을 태우느냐? 나와 네 아버지는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 49 그러자 예수가 대답하였다. “왜 그렇게 저를 찾으셨나요? 제가 당연히 제 아버지의 집에 있으리라는 것을 왜 모르셨죠?” 50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신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다. 51 소년 예수는 부모를 따라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순종하며 지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소중히 담아 두었다. 52 예수는 날로 키와 지혜가 자라났고,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더욱 사랑을 받았다. (쉬운말 성경)

41 Every year Jesus’ parents went to Jerusalem for the Passover festival. 42 When Jesus was twelve years old, they attended the festival as usual. 43 After the celebration was over, they started home to Nazareth, but Jesus stayed behind in Jerusalem. His parents didn’t miss him at first, 44 because they assumed he was among the other travelers. But when he didn’t show up that evening, they started looking for him among their relatives and friends. 45 When they couldn’t find him, they went back to Jerusalem to search for him there. 46 Three days later they finally discovered him in the Temple, sitting among the religious teachers, listening to them and asking questions. 47 All who heard him were amazed at his understanding and his answers. 48 His parents didn’t know what to think. “Son,” his mother said to him, “why have you done this to us? Your father and I have been frantic, searching for you everywhere.” 49 “But why did you need to search?” he asked. “Didn’t you know that I must be in my Father’s house?”[d] 50 But they didn’t understand what he meant. 51 Then he returned to Nazareth with them and was obedient to them. And his mother stored all these things in her heart. 52 Jesus grew in wisdom and in stature and in favor with God and all the people.(New Living Translation)

한해의 마지막 주일예배입니다. 올 한해도 하나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분주한 세상에서 때때로 그 은혜를 잊고 살때도 있었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새 마음으로 한해를 잘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의 소년시절 에피소드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12살 때 성전에서 학자들과 대화하시는 이야기입니다. 41절과 42절 보시겠습니다. 41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예수의 부모는 관례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누가는 사복음서 중에 유일하게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성장 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모가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이와 같은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매년마다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예수께서 열두살 되던 해에 일어난 특별한 이야기는 일상적인 순례의 여정 속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자란 나사렛 동네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대략 146km 정도 됩니다. 이 정도의 거리는 케임브리지에서 로드 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 (Providence, Rhode Island)나 뉴햄프셔주 맨체스터 (Manchester, New Hampshire)정도가 됩니다. 교통편이 편리하지 않던 시대에 꽤 긴 거리였습니다. 유대사회에서는 13세가 되면, 책임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의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이 시기가 되면 소년은 회당의 회원이 될 수 있던 것이지요. 탈무드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 소년들은 13세가 되기 1, 2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 미리 올라가 율법의 아들이 되기 위한 행동을 배웠다고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가 성전에 올라간 것은 이러한 교육을 미리 준비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절기를 마친 후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떠났습니다. 많은 순례자들과 함께 걷다 보니 하룻길쯤 가서 예수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당연히 예수가 자신들을 따라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 생활에는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우리는 쉽게 예수님의 마음을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친척들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자, 그들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갑니다. 만약 주님의 마음을 잃었다면, 우리는 다시 주님이 계신 그곳으로 돌아가 회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사렛으로 가는 길에는 여리고 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도중 강도들에게 한 사람이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약 27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하룻길”이라는 표현은 하루 정도의 거리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나 그 근처까지 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여리고 길은 좁고 험하며 외딴 곳이 많아 밤에는 강도나 도적들이 활동하기 적합한 곳이었으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돌아가는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를 샅샅이 찾아 보았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기록을 좀 더 살펴보면, 사흘이 지난 후에야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소년 예수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 그들의 가르침을 듣고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마리아와 요셉은 안도감을 느꼈겠지만,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답답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48절을 보시겠습니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했다. ‘얘야, 왜 이렇게 우리 속을 태우느냐? 나와 네 아버지는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던지는 질문과 답변에 놀라며 그의 지혜와 슬기에 크게 경탄했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장 과정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균형을 이루며 자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 점차 드러나는 과정 속에서, 지혜와 슬기가 나타났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성장 과정 속에서 예루살렘의 율법 선생들과 서기관들은 예수 위에 하나님의 지혜와 슬기가 있음을 분명히 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이야기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도전을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소년 예수가 메시야로서의 신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훈련을 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일상 속에서 주어진 사명을 지속적으로 인지하며 성장했을 것입니다. 열두살부터는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오가며 절기를 지켰고,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경건한 삶을 실천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통해, 그가 앞으로 펼칠 사역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워스(Stanley Hauerwas, 1940-현재)가 쓴 ‘한나의 아이’는 한 사람의 진솔한 회고록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경 쓰는 것은 인간으로서 하워스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겪게 되는 어려움 가운데 그리스도인 하워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어려움 가운데 기도 생활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믿음이 자신의 삶의 방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었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회고록은 나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준 친구들의 이야기이자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본질은 세상 속에서 성도가 외적인 ‘다름’을 강조하기보다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성숙한 삶을 살아가고, 그 삶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서로가 옳다고 외치는 세상 속에서 경건한 삶을 통해 평화에 이르는 길이 참 멀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스탠리 하워스(Stanley Hauerwas, 1940-현재)의 고백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나아가 하나님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지니셨다는 것입니다. 이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삶 속에서 더욱 깊은 도전이 됩니다.

51절을 보면, 소년 예수는 부모를 따라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순종하며 지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가 부모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일상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하지만 당시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예수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질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12년 전 천사가 전해 준 기쁨의 소식만큼은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받았던 기쁨의 소식을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31-35에서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1:31 너는 이제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인데,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1:32 그는 위대한 분이 될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잇게 하실 것이다. 1:33 그는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그의 나라 역시 영원무궁토록 이어질 것이다.”….1:35 천사가 대답했다. “성령께서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권능이 너를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누가복음 1:31-33,35)

예수가 성전에서 지혜를 드러내고, 구원의 길을 준비하는 모습을 통해 마리아는 구속의 신비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천사의 말씀을 마음에 더 깊이 새겼을 것이고 마음의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본문 51절에도 보면, 소년 예수의 어머니가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마음 속에 소중히 담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국 US 산타크루즈 연구팀이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은 그룹과 사진을 찍지 않고 눈으로만 본 그룹을 두고 몇주뒤 본 풍경을 묘사하게 했는데, 사진을 찍지 않은 그룹이 훨씬 더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합니다. 우리 뇌는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 보다는 자신을 위해 기억할때 기억을 더 잘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건은 단순히 외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삶의 양식입니다. 만약 매일 매일 인생을 변화시킬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그 일상의 신비를 거룩하게 여길 때, 경건의 능력을 더욱 깊이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탠리 하워스(Stanley Hauerwas, 1940-현재)는 인생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는 표현을 합니다. 인생을 ‘여러 시작과 하나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충실히 사는 법을 배우며, 그를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도 소년 시절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30년 동안 성급하지 않게 사명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람은 일생동안 여러가지 도전을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여정 중에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우리를 준비시키고 빚어가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49절입니다.  그러자 예수가 대답하였다. “왜 그렇게 저를 찾으셨나요? 제가 당연히 제 아버지의 집에 있으리라는 것을 왜 모르셨죠?” 한글성경에서 집으로 번역한 ‘토이스’는 헬라어 관사인데, 여격 복수로서 ‘것들’ 로 번역이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번역하면 ‘내 아버지의 것들에’ 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킹제임스 성경은 I must be about my Father’s business로 번역했고, 한글 성경을 비롯해서 다른 버전의 영어 성경은 ‘내 아버지의 집’(in my Father’s house)로 번역했습니다. 종합해 보면, 내 아버지의 일에 순종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일을 이뤄할 장소가 나사렛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뜻일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는 예수께서 앞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뤄가야 할 구원의 일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의 부모는 예수가 자신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50절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신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다.” 예수께서 성취해야 하는 사명은 마리아에게는 고통을 겪는 일이 될 것이고, 예수가 이루게 될 뜻은 배로 낳은 아이를 향한 인간의 감정을 끊어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마리아에게 어려운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는 길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맡겨진 일을 순종하며 감당하는 가운데, 결국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여정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그 출생을 축하받고 기쁨을 나누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을 마칠 때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태어난 날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을 기억하고, 고인이 되면 태어난 날이 아니라 마지막 날을 더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단순히 태어난 날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며 살아낸 삶의 끝자락에서 그 의미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순종이 바로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의 마음은 아버지께서 거하실 성전이 됩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예배하는 삶은 주 안에서 거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육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많고, 감정이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해야 하며, 이는 인간의 욕구를 거스르는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흔적에 사로 잡히지 않고, 순종의 여정에서 주님의 마음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은 세상에서 누리는 가장 큰 은총입니다. 생전에 그 복을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52절입니다. 예수는 날로 키와 지혜가 자라났고,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더욱 사랑을 받았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상황에서도, 믿음의 성도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함께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도리와 사람에 대한 도리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배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경험하고, 이웃 사랑과 도덕적 책임을 자각하며 성도의 삶이 깊어지게 됩니다. 이 둘 모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소년 예수는 그렇게 순종의 삶을 연습하며 공적 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는 날로 키와 지혜가 자라났고,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더욱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탄생 이전에 마리아의 용기 있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의 탄생을 위해 기꺼이 믿음으로 순종했고, 성육신 하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선물처럼 임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선물인 아기 예수는 마리아에게는 유대 관습에서 오는 차별과 멸시를 감당해야 하는 용기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 두려움을 덮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할 인생에도 저마다 각자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갈등을 마주할 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훈련과 기도의 자리에 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알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의 주인이 주 되심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믿음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기쁨을 경험하게 되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영혼의 기쁨을 누리게 될것입니다. 우리의 교회, 가정, 일터, 학업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순종하는 삶은 개인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갈등 속에서 순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우리의 능력 밖의 일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한해도 잘 살아 내셨습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사랑하는 교우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믿음의 성도들로 성장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2. 22. 2024 주일설교

(성탄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42

어둠을 밝히는 빛

The Light that Shines in the Darkness

이사야 9:2-7

9:2 그리하여 절망과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위로 그 영광의 빛이 비쳤도다.
9:3 “주님, 진실로 주님께서는 이 나라를 번성하게 하셨고, 이 백성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농부들이 추수할 때 기뻐하듯이, 군인들이 전쟁에서 이긴 후 전리품들을 나누어가질 때 즐거워하듯이, 지금 이 백성이 주님 앞에서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9:4 옛적 기드온 때에 주님께서 미디안 군대를 여지없이 쳐부수신 것처럼, 이제 또다시 주님께서 이 백성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멍에를 부숴 버리시고, 이 백성의 등짝을 후려치던 압제자의 채찍과 몽둥이를 부러뜨리셨기 때문입니다.
9:5 이 땅을 쿵쿵 짓밟았던 침략자들의 군화와 이 땅 백성들을 마구 죽였던 그들의 피 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 모조리 불살라졌기 때문입니다.”
9:6 ○ 보라,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하여 태어났도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한 아들을 주셨도다. 그 아기가 장차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우리를 다스리실 것이니, 그분의 이름은 ‘기묘하신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 그리고 ‘평화의 왕’으로 불릴 것이다.
9:7 그분께서 다스리실 때, 그분의 왕권은 날로 더욱 더 커지고, 그분의 나라는 언제까지나 평화로울 것이다. 그분께서는 자기 조상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분의 나라를 견고하게 세우실 것이다. 정녕 전능하신 만군의 주님께서 열심을 내셔서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쉬운말 성경)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시는  26세의 요제프 모르(Joseph Mohr)라는 오스트리아의 사제가 1816년,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에서 쓴 시입니다. 당시 교회 오르간이 고장 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마음속에 떠오른 멜로디를 바탕으로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성탄절에 부르는 평화롭고 따뜻한 찬양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이 찬양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의 이프르 지역에서 평화의 메세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전쟁과 참호전의 일상에 병사들은 자연스레 지쳐갔고, 어느덧 1914년의 크리스마스가 찾아왔습니다. 참호에서 대치 중이던 영국군과 독일군 병사들은 어둠속에 묻혀 있던 각자의 참호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는데, 상대방 참호에서도 캐럴이 들려오자 누군가가 참호 위에 촛불과 전등으로 장식된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들을 올려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양측의 수많은 병사들이 너도나도 참호 위로 올라왔고, 서로 포옹하고 담소를 나누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교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양측 참호 사이 버려져 있던 양군 시신들을 수습했고, 뒤이어 축구장을 급조해서 팀을 나눠 축구까지 했습니다. 밤이 되자 이들은 같이 캐럴을 부르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도한 다음, 다시 각자의 참호로 돌아갔습니다. 이 기적을 이끌었던 노래가 바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라고 합니다.

찬양이 전해주는 힘은 이렇듯 음악이라는 경계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메세지가 됩니다. 두려움과 혼돈의 시간속에서 성탄의 기적은 서로의 마음에 평화와 어두운 곳을 밝히 비추는 사랑의 힘을 전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어둔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며 기쁨의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한밤중에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과 일치할 때 기쁨으로 노래하지만, 그 뜻이 어긋날 때에는 실망하게 되고, 하나님을 내 뜻과 내 믿음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많은 예술 작품들이 고통의 밤을 지나며 후대에 걸쳐 위대한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울증에 시달리던 반 고흐의 작품들,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창조된 베토벤의 명곡들은 모두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 예술의 승화입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4악장은 ‘환희의 송가’로 불리며, 듣는 사람들에게 글자 그대로 환희와 감동을 줍니다. 그 가사 중 일부는 성탄의 기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백만인이여, 엎드려 빌겠는가? 세계여, 창조주가 느껴지는가? 별이 빛나는 하늘 저편에서 아버지를 찾으라! 별의 저편에 주님께서 반드시 계실 것이다. 환희여, 아름다운 하나님의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빛이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리라!”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현시대가 아닌 후대에 더 드러나게 되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당시에도 마리아와 요셉은 호적 등록을 위해 베들레헴에 도착했으나, 출산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빈방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그 밤은 어둠에 묻힌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오심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절망과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위로 그 영광의 빛이 비쳤도다. 농부들이 추수할 때 기뻐하듯이,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누듯이, 백성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이 예언은 구원의 빛이 백성들에게 비춰질 날이 올 것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6절은 더욱 자세히 말합니다. “보라,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하여 태어났도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한 아들을 주셨도다.” 여러분, 여기서 ‘태어난 아기’와 ‘우리를 위해 주어진 한 아들’이라는 두 표현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루터는 1531년 12월 24일, 종교개혁의 중심지인 비텐베르크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라는 제목으로 설교합니다. 한날 2번의 걸친 설교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우리를 위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한 아이의 탄생이 단지 역사적인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태어났다는 확신을 갖고 루터는 설교를 전했습니다. 그의 설교문을 보면 “이 아기는 내게 주어진 10굴덴 금화처럼,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며, 이 아기가 바로 우리의 구세주임을 확신하는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당시 10굴덴는 독일에서 사용되던 금화로, 그만큼 확고하고 깊은 믿음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16세기 초 독일에서 노동자는 대개 한 달에 1에서 3 굴덴 정도를 벌었으므로, 10 굴덴은 한 사람의 수개월 또는 1년 치 급여에 해당할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그림을 한번 보시지요. 하지만 주님은 밭에 감추인 보화의 수준이 아니라 그 보화를 온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 태어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이들에게는 특별한 은혜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이사야는 이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며 그에게 4가지 이름을 부여합니다.

그 아기가 장차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우리를 다스리실 것이니, 그분의 이름은 ‘기묘하신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 그리고 ‘평화의 왕’으로 불릴 것이다.

‘기묘하신 모사(Wonderful Counselor)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시는 신성의 표현입니다. 예수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주어진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삶의 순간에도 우리의 상담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가 확신한다고 여겼던 것들이 흔들릴 때에도 신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절실히 느낄수록, 주님은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평안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기는 본래 연약한 존재로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데,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라는 칭호는 한 아기로 오신 것과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탄의 신비 가운데 참사람이자 참하나님이신 그분의 완전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친밀함과 훈계가 우리를 성숙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직접 찾아 오신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어둠 속에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며 빛을 창조하셨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측할 수 없고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이 사실은 성탄에 담긴 가장 분명한 은혜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심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셨고, 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어깨 위에 세상의 죄와 고통을 모두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어깨 위에 놓인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음을 치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은 모두가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분의 의의 옷에 비하면, 세상의 모든 화려한 것들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결국 빛을 잃고, 잠시의 치장에 불과합니다.

기드온이 살던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두운 암흑기였고, 고통과 고난이 가득한 시기였습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미디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미디안 군대에 비하면, 전쟁을 위해 선발된 300명의 이스라엘 군사들은 지극히 초라한 숫자였습니다. 13만 5천명의 미디안 군대를 상대하려면 한 명의 군사라도 더 있어야 할 텐데, 하나님은 불필요한 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오직 믿음으로 남은 300명만을 선발하셨습니다. 이 숫자는 세상의 방법과 승리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숫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자만이 남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순종의 길을 걸어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수록 우리는 주님을 더욱 필요로 하게 됩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질수록 우리의 단단한 마음도 부드럽게 변화됩니다. 인생이 평생을 짊어지는 고통과 수고라면, 주 안에서 우리는 그 짐을 내려놓고 주님의 마음을 깨달을 때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며,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요구하고 판단하기보다는 내어주고 용납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참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회복의 과정입니다.

오늘 성탄예배를 맞이하여, 5명의 아기들이 유아세례를 받게 됩니다. 유아세례는 부모와 교회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이 아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할 것을 결단하며 책임을 지겠다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를 위한 준비를 하듯, 세례를 통해 이 아이가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로 자라도록 인도할 것을 다짐하게됩니다. 부모는 태어난 아이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아이의 상태를 살피고, 아이와 마주하는 순간 순간을 소중히 다루며 사랑을 전합니다. 아이가 아플 때에는 내 살이 아픈 듯 느끼고, 아이가 성장하여 마주할 세상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부모들을 신뢰하기 때문에 아이를 맡기신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 주신 선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불려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빛을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그 빛을 비추는 책임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성탄절은 단지 우리만의 기쁨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해져야 할 기쁜 소식이자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고, 그 빛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 비추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어둠에 묻힌 밤에 있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십시요. 평화를 애쓰는 그곳에서 성탄의 주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12. 15. 2024 주일설교

(대림절 셋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41

분주한 세상 속에서 찾는 기쁨과 너그러움

Finding Joy and Consideration in a Busy World

빌립보서 4:4~9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한번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십시오. 주께서 가까이에 계십니다. 6 어떤 일이든,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을 당할지라도, 오직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뢰도록 하십시오. 7 그렇게 하면, 모든 인간적인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8 ○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형제들이여, 무엇이든 참된 것과 무엇이든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 옳은 것과 무엇이든 거룩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거기에 무슨 덕이나 칭송이 있든지 모쪼록 그런 것들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살도록 하십시오. 9 그리고 여러분은 내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실천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쉬운말 성경)

대림절 세 번째 촛불이 켜졌습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계속되기를 기도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잘 알면서도, 때때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상처로 인해 잠 못 자며 뒤척이기도 하고,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기쁨이 사라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내면 깊은 곳을 밝혀 주시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지난주 Emmanuel Gospel Center에서 열린 목회 연구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인 2세 사역자가 북미 신앙 공동체를 연구하고 신앙 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내용들을 의미있게 나누었습니다.  이민교회 안에서 1세대와 2세대가 동일한 말씀을 들음에도, 문화적 차이로 인해 동일한 단어 조차 서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예를 들어, ‘commitment’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한인 2세대는 개인의 의지적인 결정과 헌신, 자기결정을 중시하는 차원에서 이해하는 반면, 1세대 들은 ‘commitment’가 공동체를 위한 희생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여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에 대한 이러한 이해 차이로 인해 공동체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였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서로 다른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열려진 복음, 즉 보편적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통해 구별됨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너그러움을 보이면서도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기독교적 삶의 방식에 대한 새로운 가치 기준을 제시하며, 더 넓은 차원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했습니다.

첫째,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는 무엇일까요?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한번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십시오. 주께서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문화를 연결하는 시대적 과제에 직면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고 참여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급변하는 경제, 사회, 문화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세기를 살아 내시고 현재 100세를 넘기신 김형석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쓰신 ‘교회 밖 하나님 나라’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책의 일부입니다.

“1962년 봄학기에 하버드 대학에 가서 한 학기 동안 공부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 라인홀드 니버가 와 있었습니다. 그분의 강의를 들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선조나 선배들 덕분에 세계 최고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는데, 그것을 다 우리 것이라 여기고 우리끼리만 행복하고 즐겁게 누린다면 미국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선조들이 물려 준 부를 못살고 힘없는 나라들에 나눠 주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에 보내고 아시아에도 보내 그 나라들이 잘 살게 되면 미국은 더 잘살게 되어 있습니다. 나눠주지 않고 움켜 쥐려고 하면 위험합니다.”

62년 전 라인홀드 니버는 하버드 강의에서 부유함을 독점하려는 위험성과 나눔의 가치를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깊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현재 미국과 한국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과 너그러움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리처드 니버는 기독교 윤리학자로 신앙 공동체가 주변 환경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탐구하면서, 그리스도와 문화의 유형을 구분하는 작업을 통해 후대에 탁월한 고전을 남겼습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 너그러움은 너무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참된 기쁨이 있어야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너그러운 태도가 흘러 나오게 됩니다. 너그러운 태도는 억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심을 인식하고 있을 때 비롯되는 행동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안에서의 기쁨과 너그러움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우리의 마음을 걱정거리에 두다 보면, 마음 안에 더 큰 염려를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께서 가까이 계심을 인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실의 어려운 문제 앞에서 주님의 기쁨을 잃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신앙 생활이 세상이 만들어낸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들에 영향을 받아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일이든 걱정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걱정과 근심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기도와 감사로 하나님께 구하면, 모든 인간적인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1611-1691)가 쓴 편지 형식의 글입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 그 당시 16세기 프랑스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국가는 엄청나게 불안했습니다. 원래 이름은 니콜라 에르망(Nicholas Herman)인데, 그가 어느날 수도원에서 평수사로 생활하며 ‘로렌스 형제’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에서 주방 일과 신발 수선을 하던 그는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경건한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수도원에서 주방일은 가장 힘든 곳이었는데 그로 인해서 수도원 주방이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하기 어렵다는 편견이 깨졌습니다. 그는 부엌일이 아무리 바쁘고 어려워도, 하던 일을 혼자 하게 될때에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름도 없이 평범한 일상에서 실천한 하나님의 임재 연습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뛰어난 글솜씨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실천했던 그의 연습들이 독자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도시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당시 모든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두려워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마틴로이드 존스의 영적침체의 책에 실린 구세군 교회의 대장으로 섬겼던 존 조지 카펜터(John George Carpenter)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과 아내가 그토록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던 딸, 동양의 선교사로 청춘을 바친 사랑하는 딸을 어떻게 잃었는지 기록했습니다.

“어느 날 딸이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부부는 당연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기도하면서도 ‘주님이 원하시면 이 아이를 고치실 수 있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적극적으로 고쳐달라고 하지 못하고 원하시면 고치실 수 있습니다’ 라고만 했습니다. 그 이상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부는 6주동안 기도했고 어여쁜 딸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딸이 죽던 날 아침 존 카펜터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정말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안하네. 아내는 자신도 그렇다고 하면서 이건 분명히 하나님의 평강이예요.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평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어버린 슬픔속에서 느껴지는 평강은 어떤 것일까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 평강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평강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이해를 넘어서 도저히 이성적으로 납득할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이 이 부부의 마음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기독교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세상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8 ○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형제들이여, 무엇이든 참된 것과 무엇이든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 옳은 것과 무엇이든 거룩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거기에 무슨 덕이나 칭송이 있든지 모쪼록 그런 것들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살도록 하십시오.

9 그리고 여러분은 내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실천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 헬라 문화에서 중요시되었던 덕목들을 생각하면서 배우고 듣고 본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거룩한 것, 사랑스러운 것과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거기에 무슨 덕이나 칭송이 있든지 모쪼록 그런 것들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영적인 가치만을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에서도 칭송받는 가치를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우선시 하면서도  세상속에서 덕을 쌓는 삶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에게도 칭찬 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사람들로 부터 칭송을 받을 만한 가치를 염두 해 둔 표현입니다.

이러한 덕목들을 삶에 녹여내는 것은 세상 문화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과 삶의 간격을 줄여가는 과정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실천이 아니라 평생 추구해야 할 거룩함입니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 보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더 귀하게 여기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만족을 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상황속에서 만족을 누리며 자족하는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있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전서 9:22-23)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책임은 문화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들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수용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여전히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십니다. 희망이 위태로워지는 사회 속에서, 교회는 등불을 밝혀 하나님의 빛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세상의 소망이 영원하지 않음을 깨닫는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 사명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일생을 바쳐 훈련해야 할 일입니다. 두려움과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 날 자신에게 없는 평안과 기쁨을 가득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주의 깊게 보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챤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과 너그러움을 실천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한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의 삶에 하나님의 평강이 풍성히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축원합니다.

12. 08. 2024 주일설교

(대림절 둘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40

동역의 기쁨, 사랑의 힘

Joy of Partnership, Power of Love

빌 1:3-11

3 ○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4 또 여러분 모두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항상 큰 기쁨으로 간구합니다. 5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듣던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분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의 좋은 동반자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6 여러분 가운데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7 내가 여러분 모두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은, 내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여러분을 품고 있기에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내가 갇혀 있을 때나, 복음을 변호하고 증언할 때나, 여러분은 나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8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얼마나 여러분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지는, 하나님께서 내 증인이십니다. 9 지금 내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모든 지식과 깊은 통찰력 속에서 더욱더 풍성해져서, 10 여러분 모두가 무엇이 최선의 것인지를 스스로 잘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한 점 흠 없이 순결하게 지냄으로써, 11 여러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각양 의의 열매로 가득 채워져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쉬운말 성경)

3 Every time I think of you, I give thanks to my God. 4 Whenever I pray, I make my requests for all of you with joy, 5 for you have been my partners in spreading the Good News about Christ from the time you first heard it until now. 6 And I am certain that God, who began the good work within you, will continue his work until it is finally finished on the day when Christ Jesus returns. 7 So it is right that I should feel as I do about all of you, for you have a special place in my heart. You share with me the special favor of God, both in my imprisonment and in defending and confirming the truth of the Good News. 8 God knows how much I love you and long for you with the tender compassion of Christ Jesus. 9 I pray that your love will overflow more and more, and that you will keep on growing in knowledge and understanding. 10 For I want you to understand what really matters, so that you may live pure and blameless lives until the day of Christ’s return. 11 May you always be filled with the fruit of your salvation—the righteous character produced in your life by Jesus Christ[b]—for this will bring much glory and praise to God.(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대림절 둘째주일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 마음 가운데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어릴 적, 거실에 걸려 있던 액자 속 말씀을 종종 읽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빌립보서의 구절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 그중에서도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는 문구가 제 마음 깊이 와닿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가족과 형제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기쁨과 감사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함께 지내며 울고 웃고, 때로는 부족한 모습도 공유하며 사랑을 나누었던 소중한 관계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우들은 서로가 참 특별한 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아시아를 떠나 유럽에 세운 최초의 교회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골로새 교회를 세우때에도 사랑이 담긴 물질을 후원하며 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심지어 로마  감옥에 있을 때에는 후원금을 전달하기 위해 에바브로디도를 로마 감옥까지 파송하는 헌신을 보였습니다. 이런 교우들을 향해서 바울은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편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첫째, 동역의 기쁨입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에 빌립보 교우들은 동역자(同役者, fellow worker) ‘였습니다. 동역자의 뜻은 기독교 선교의 일을 함께 수행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동역(同役)을 잘하려면, 서로가 연대하며 하나님의 일을 함께 수행한다는 인식을 해야 합니다. 동역자는 우월하거나 열등한 관계가 아니라, 모두가 종과 같은 위치에서 교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종의 형체를 입고 자신을 낮추심으로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누군가의 곁에 있을 때 성령께서 그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환상 중에 한 사람이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행 16:9). 이에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게 되었습니다. 선교 여행 중 바울은 안식일마다 유대교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거나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지역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처를 찾아 강가로 나갔고, 그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님은 주의 일에 꼭 필요한 동역자를 만나게 하셔서 그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루디아는 옷감 장수로, 오늘날로 보면 성공한 사업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두아디라는 옷감 기술로 이미 유명한 지역이었기에, 루디아가 빌립보에 온 이유는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함이었다고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또한 그녀는 이미 유대교 회당에서 유대교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루디아가 바울의 설교를 듣는데 성령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이후 그녀의 온 가족은 함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고, 루디아의 집에서 드린 예배는 빌립보 교회의 시작이자 동역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초대 교회의 모범인 환대를 즉시 실천하며, 말씀을 전하는 자들과 자신을 물질을 나누는 데 민첩하게 움직였습니다. 그 결과, 유럽에서의 복음 사역이 점차 확장되어 가는 데 있어 루디아는 바울의 든든한 동역자로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감옥에서 쓴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1장부터 4장까지 곳곳에 바울의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을 떠올리며 편지를 쓸 때마다 마음에 기쁨이 넘쳤던 것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면서도,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 목적이 분명한데서 얻게 된 기쁨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는 마음을 온전히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간절히 그리웠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빌립보 교우들은 바울에게 그런 위로와 사랑을 전해주는 소중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주님께서 바울을 자신의 동역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한때 기독교를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를 죽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바울을 찾아 가셔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았을까요? “사울아,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 이제는 내 눈물과 피를 너가 알아 주어야 하지 않겠니?” 그의 이름을 부르신 하나님은 창세로부터 이방인을 향한 선교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바울을 초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대는 지금도 여전히 주어지고 있으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유산을 상속받을 자들임을 성경이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복 받을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34 그리고 나는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아,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해 둔 나라에 들어가라. 35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 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36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와 주었다.37 그러면,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의로운 자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신 것을 보고 음식을 드렸으며, 주님이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저희가 언제 주님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주님을 도와 드렸으며, 주님이 헐벗으신 것을 보고 주님께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또 저희가 언제 주님이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주님을 찾아 뵈었습니까?40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

주님은 자신과 고난 받는 형제들을 동일시하며, 주의 제자들을 환대하는 자는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책망하시며 핍박 받는 자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주 안에서 사랑을 경험한 일이 있다면, 곧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도왔다면, 그 섬김은 우리가 주님께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빌립보 교우들은 바울이 고난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며 주님을 발견했을 것이고, 바울 역시 고난 가운데 신앙을 지키는 빌립보 성도들을 보며 주님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 열렸기에 주 안에서의 진정한 동역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둘째, 사랑의 힘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은 우리의 삶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성경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쫒는다고 말씀합니다. 온전한 사랑은 우리가 느끼게 되는 두려움을 평안한 마음으로 바꾸는 힘입니다.  

1:8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얼마나 여러분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지는, 하나님께서 내 증인이십니다.” 1:9 “지금 내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모든 지식과 깊은 통찰력 속에서 더욱더 풍성해져서

사랑은 깊은 통찰력을 가질 때 더욱더 풍성해집니다. 사람의 행동 속에 숨겨진 진심을 헤아리고 분별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음은 더 깊고 넓어질 것입니다. 8절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빌립보 교회를 사랑한 바울의 시선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교회와 지체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일터와 학업의 현장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바울의 이 사랑은 아픔과 고난을 나누며 그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7에서 기록된 사랑의 특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변함없이 항상 믿어 주며, 언제 어디서나 소망을 품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감정적 사랑과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게 되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 사랑이 더욱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 통찰력은 단지 학문적 깊이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나의 심장이 주님의 심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통찰력은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잘 분별할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하기 시작할때에 사랑이 깊어집니다. 반면에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오히려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을 더욱 더 풍성하게 하라는 바울의 말씀은 대부분의 문제들이 사랑의 부족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바울의 복음은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차원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인 사랑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율법적 신앙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복음의 본질로 삼지 않았습니다.

AW 토저 목사님의 ‘GOD’이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고 금하는 종교라고 믿는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스펄전을 찾아와 ‘나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담배도 피우지 않습니다. 욕을 하지도 않습니다. 극장에 가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가 나는 형제님이 무엇가를 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금지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가치를 행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는 삶을 요구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지식으로 아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에서 더욱 그 사랑을 친밀하게 경험하고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사랑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 받았으며, 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도록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전에는 ‘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을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사도행전 11장에 나옵니다. 거기서 바나바는 사울을 만나, 그를 데리고 함께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내내 그곳 안디옥 교회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곳 안디옥에서, 사람들은 처음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11:26) 1년 동안 교회에 머물며 사람들을 가르친 바나바는 어떻게 설명되고 있습니까?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고, 또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으므로 많은 이들이 바나바를 통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바나바는 새신자들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격려했으며, 거기에 멈추지 않고 믿음 안에 더 굳게 서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는 또한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데, 성령의 열매 가운데 ‘친절’이 더 눈에 띄게 들어왔습니다. 성령의 열매로 주시는 친절함은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바나바는 친절함으로 사람들을 세워주고 믿음으로 기다려 주며 그들과 함께 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안디옥에 있던 사람들은 처음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인’ 이라 불렀습니다. 

가슴으로 듣는 하나님의 음성, 심장이 뛴다“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정수영 심장 전문의입니다. 그는 세계 누가선교회와 코스타, 미국 자마 등에서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분으로, 저는 코스타에서 그분을 처음 만나 그의 책을 받았습니다. 그의 고백의 글 가운데 보면,

“병원에서 의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직장 동료들을 섬기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 참아야 하고, 어디까지 양보해야 하는지 헷갈릴 때, 직장 내에서만큼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일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한 번은 함께 일하는 4명의 외과 조수 중 유일하게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성격이 좋지 않아서 간호사나 직원들로부터 불평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당직을 서던 그가 자신에게 와서 친절하게 대하려고 애썼는데도 오히려 자신 때문에 힘들었다고 따지며, 지난 일을 하나 하나 들춰내며 조목조목 따졌다고 합니다. 급기야 ‘나는 네게 월급을 주는 사람이고, 내가 원하면 너를 여기서 쫓아낼 수 있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그렇게 말해도 주님의 제자일 수 있겠느냐?’는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불과 몇 초 사이에 내뱉은 한 마디의 대가를 치르는데,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다시 얻기까지 걸린 시간이었습니다.”

직장과 일터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친절을 실천할 때에 우리의 힘으로 안되는 도전에 직면할 때가 많을 겁니다. 관계속에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마음의 불편함이 생기면 제자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수영이라는 그리스도인은 그가 일하는 현장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끊임없이 그를 제자의 삶으로 인도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행동을 결정짓는 기준이 되었고, 상대방이 친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지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사명감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사랑의 수고를 다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함께 일하는 사람이 비로소 그를 ‘그리스도인’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는데 걸린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한 점 흠 없이 순결하게 지냄으로써, 여러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각양 의의 열매로 가득 채워져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제 우리는 한해의 끝에 다다랐습니다. 지난 시간에 마음이 머물지 않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에게 맡겨 주신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인도하시고, 그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순결하게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