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9 2025 주일설교

(사순절 첫번째 주일)

놀라운 은혜

Amazing Grace

요한복음 5:2-9

유병용 감독

놀라운 은혜를 시작하면서 의문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왜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왜, 영어로 Why라고 하는 단어도 사용하지요. 무슨 까닭으로, 또 어째서 어떤 사실에 대해서 확인을 요구할 때, 왜, Why 그런 말을 씁니다. 이 의미를 표현하면서 주어진 글이 있다면, “인생의 짐”이라고 하는 글입니다. 짐이라고 하는 말은 맡겨진 책임과 의무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자기가 가지고 가야 할 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이라고 하는 글입니다.

“내 등에 내가 가지고 갈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겁니다. 그것은 내 등의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임을 알았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겁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도 알게 되어졌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라고 하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인생에 등의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 열매가 완전히 익지 못한 사람처럼 미숙하게 살고 있었을 겁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 중심이 되어 모든 일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진 귀한 선물임을 알게 됐습니다. 내 인생에 등의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겁니다. 내 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 인생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진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이 글은 자신의 인생에서 져야 되었던 짐에 소중함을 깨닫게 되어진 글입니다. 마치 물살이 거센 냇물을 건널 때면 등에 짐이 있어야만 그 무게 때문에 물살에 사람이 휩쓸려 내려가지 않습니다. 만약에 짐이 없다면 그 사람은 가벼워서 물살에 떠내려 갑니다. 화물차도 언덕을 오를 때면 화물칸에 짐이 잔뜩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바퀴가 헛돌지 않습니다. 그 짐 때문에 그 험난한 고개도 넘을 수가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내 인생의 짐은 그 짐 때문에 바르게 살게 했고, 안일에 빠지지 않게 했고, 불의라고 하는 물결에 휩쓸리지 아니하도록 나를 붙잡아 주었고, 내 인생의 짐은, 내 인생의 수많은 인생의 고개, 고개를 넘을 때마다 헛바퀴 돌지 아니하고,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짐이 되어졌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져야 할 짐은 무거운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준 유익이 되어졌다고 하는 거지요.

오늘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내가 져야 할 짐이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짐도 있고, 직장이라는 짐도 있습니다. 교회의 짐도 있습니다. 내 몸이 아픈 짐도 있습니다. 슬픔의 짐들도 있고, 내가 평생 져야 될 자녀의 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짐은 내가 삶을 살아가게 감당하게 된 짐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 되어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되어진다는 겁니다. 성경에 나온 위대한 사도 바울도 자신에게 짐이 있었습니다. 육체의 질병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을 기도해 주면 병이 났는데, 자기는 자기 자신의 질병에서 세 번씩 기도해도 하나님은 그 질병을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후에 바울이 깨달았습니다.

“이 짐은 오히려 나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란 말을 씁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이르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합니다. 바울도 자신이 져야 되는 몸의 질병이 오히려 자신을 교만하지 않게 한 인생의 짐과 같았는데, 지나고 나니 은혜의 힘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인생의 짐이 있습니다. 짐으로 여기지 마시고 은혜의 힘으로 여기십시오.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도 인생에 큰 짐을 지고 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자비의 집 또는 긍휼의 집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베데스다 연못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여러 개 문이 있습니다. 주로 제사 드리기 위해 양이 들어가는 양의 문 옆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거기는 수많은 병자들이 행각 주변으로 사람이 다 몰려 있습니다. 이유는 천사들이 가끔 연못에 내려와서 물을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그럼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뛰어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려도 낫는다고 하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그 연못 속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연못 주변에, 행각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 4절은 기록하죠.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들이 지금 주변에 몰려온 겁니다. 여기에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38년 동안 환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사람은 이름도, 하던 일도, 병명도 모르지만 스스로 움직이지 못해서 오랫동안 고생하며 지내온 사람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왔습니다. 물이 움직이면 가장 먼저 뛰어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자기는 넣어 줄 사람이 없는 겁니다. 친구도 없습니다, 가족도 없습니다. 어쩌면 있더라도 38년 동안 병자의 삶을 살아서 다 떠났을 겁니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완전한 포기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가련한 인생이지요. 이런 38년 된 병자가 이 연못에 왔지만, 이 사람은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 연못을 떠나기에는 미련이 남아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누워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그 연못에 찾아오신 겁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이 38년 된 병자 앞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병자를 보시고 주님이 묻습니다. “네가 낫고 싶으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5절, 6절에 기록하죠. “거기 38에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내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연못에 찾아온 겁니다. 그 수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38년 된 이 병자에게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신 겁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예수님의 질문에 이 사람이 대답을 합니다. “네, 저도 낫고 싶습니다. 그런데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나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을 수 없다.” 그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5장 7절에 기록하죠.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낫고는 쉽지만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예수님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환자에게 강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냐,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8절에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38년 동안 환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른 말하지 않습니다. “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정말 믿겨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다음 9절을 보면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시간도 오래 되지 않죠. “곧 나아서” 성경의 기록은 굉장히 단어로 짧습니다. 이 사람은 38년 동안 엄청난 인생의 짐을 가져 살아왔습니다. 38년의 고통, 절망, 좌절, 그런데 한마디 “내 자리 들고 걸어가라.” 이 한마디에 38년의 고통이 다 사라졌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저 분의 말대로 해보고 싶은 거예요. 38년 동안 누웠고 여기 와도 누구 하나 연 줄 사람이 절망이지만 지금 내게 말씀하는 이분이 정확히 누군지 모르지만 해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그분 말대로 자리를 들고 일어섰는데 38년의 질병이 떠나간 줄로. 믿습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가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놀라운 은혜는 38년 된 이 사람에게만 나타났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 베데스다 연못가에 수많은 사람, 수많은 병자 있었지만, 유독 이 38년 된 이 병자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었을 거라 하는 겁니다. 이 환자는 어떤 모습이었기에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기적 같은 일을 예수님은 주었을까? 우리는 2025년을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배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기도합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인 사람으로 그치지 마시고, 38년 된 병자에 찾아오셔서 기적을 주신 놀라운 은혜가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이 안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면 38년 병자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는 왜 그 사람에게만 베푸셨습니까? 첫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란 말이 뭐예요? 하던 일을 도중에 자꾸 그만두어 버리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은 포기하는 순간 희망이 사라집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당시 많은 질병들을 소개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3절에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누워서 물에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다 치료 받으려고, 일반 병원에서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이제는 구전으로 내려온 베데스다 연못가에 와서 천사가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가려고 왔습니다. 다양한 환자들이 있었지만, 많은 병자가 있었지만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병명만 썼어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 사람은 병명은 없는데 38년이라는 기록을 씁니다. 얼마나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그 수많은 환자들 가운데 예수님 오셔 가지고 벌써 그 사람 모습만 딱 봐도, 아,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래됐다는 걸 주님이 벌써 알아볼 정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5장 5절에 기록하죠. “거기 38해 된 병자가 있더라.”고 말합니다.

6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누운 곳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벌써 예수님 첫눈에도 이 사람은 너무너무 병이 오래됐다는 사실을, 38년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잠깐 눈으로 보아도 38년 동안 질병을 앓아왔다는 얘기는 당시 의학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뭔들 안 해봤겠어요. 결국 이 사람은 죽음이란 단어가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절망이란 단어가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포기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도 이 38년 된 병자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넣어 줄 사람도 없지만 여기까지 온 거예요.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베데스다 연못까지 온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너무너무 질병으로 38년 된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이 사람 속에 포기하지 않는 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람의 마음을 체크한 겁니다. “네 병이 너무 오래된 건 내가 안다. 그러나 마음속에 아직도 내가 낫고 싶으냐?, 내 마음속에 아직도 희망 있느냐?, 내가 지금 포기하지 않고 있느냐?”, 왜 이 사람이 현실을 보면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왜, 누구 하나 자기를 도와서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시고 뭐라 말합니까? 네가 희망을 가지고 있느냐?, 네가 포기하지 않고 있느냐?, 네가 낫고 싶으냐?. 요한복음 5장 6절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 벌써 오래된 줄 알았어요. 그런데도 말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때 환자의 대답은 포기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네, 주님, 정말 낫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38년 된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온 이 사람에게 가족도 친구도 다 떠났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5장 7절은 기록하죠,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포기된 대답이 아니에요. 그 마음속에 지금도 낫고 싶은 희망을 말하고 있어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마음 깊은 곳에 희망으로 대답하는 그 사람의 대답을 주님은 보셨단 사실입니다. 여러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붙잡아 줍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한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바디메오라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입니다. 앞을 못 봅니다. 스스로 노동을 할 수 없어요. 이 사람이 결국 생존을 위해서 선택한 거 뭐냐, 구걸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앉아 가지고 나를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앞은 보이지 않지만 시각 장애인이 발전되게 청각이 발달돼서 지나가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서, 이 사람은 특별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 귀에 사람들이 많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습니다. “왜 우리 마을에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올까? 왜 그럴까?” 그런데 움직이는 소리가 점점 자기 앞으로 다가옵니다. 어느 순간에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자기 앞에 왔는데, 보니까 예수님이 자기 앞을 지나고 있는 거예요. 이때 당시 정통 유대인들은 구약의 메시아, 그리스도, 구원자를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이 메시아, 구원자라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바디메오는 자기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7절에, “나사렛 예수시라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당신이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심을 믿습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꾸짖습니다. “조용히 좀 해라, 네가 이 구걸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느냐?”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이 꾸짖었습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8절에 이어서 기록하지요.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꾸짖지만 더 큰 소리로, 더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는 말은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분명한 확신이 가지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이 바디메오에게 다가왔습니다. “네가 나를 불렀느냐?” “예“ ”왜 불렀느냐?” “주님, 저는 보시다시피 시각 장애인입니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당신이 말씀만 하시면 나는 눈이 떠질 줄로 믿습니다.”

이 사건이 2025년 전입니다. 현대 의학이 발달된 지금도 시각 장애, 이 선천적 시각 장애, 눈이 떠진다, 불가능합니다. 2천 년 전에 이 사람은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께서 말합니다. “네 입술로 고백한 대로 되리라.”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52절에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바로 그 시간이 사람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일생 동안 어둠을 가지고 살았어요. 포기할 수밖에 없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진 이 사람에게 주님은 기적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2025년을 살아가는 여러분, 우리 모두 다 인생의 짐이 있습니다. 그 짐이 힘들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그 짐을 힘이 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람은 너무 힘들다 보면, 짐이 무겁다 보면 자꾸 내려놓고 싶잖아요. 끝까지 붙드십시오.

2) 열정이 있었다.

두 번째는 열정이 있음을 봅니다. 이 38년 된 병자, 포기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있는 열정을 봅니다.

사람이 그 속에 희망 있으면 그 사람은 열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합니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그래서 요한복음 5장 8절에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베데스다 연못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아니하고 마지막까지 희망을 붙들던 자에게 말합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주님의 기적은 열정을 가진 이 사람에게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는 누가 도와주어야만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은 “네가 스스로 일어나라.”라는 겁니다.

예수님 말이 이해가 안 돼요. “어떻게 내가 일어나요?” 그런데 그 속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희망을 가지고 열정 있는 자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아멘, 그래서 9절에 “곧 그 사람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38년 된 병자가 깨끗하게 고쳐진 사건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떤 논리력으로 분석도 하지 않았습니다. 계산하지도 않았습니다.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나를 향하여서 말씀하는 이분이 보통 분이 아니구나, 열정을 품고 그분의 말에 일어나 봤어요. 놀랍게도 38년의 질병이 떠나가고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 기적을 보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9절은 말합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오늘도 하나님은 열정을 가진 자와 일하실 줄 믿습니다.

열정은 “어떤 일에 대해서 열렬한 애정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한결같은 마음을 갖는 거를 열정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어요. 그 사람들은 전해 듣고 왔습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한번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가 들어가면서 낫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 온 사람들, 어떤 사람이에요? 포기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음 기회에 들어가면 되겠지,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냥 남들 따라서 따라온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주님은 그런 자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그의 눈빛 속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속에 열정 있는 자, 주님은 기적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2025년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의 기도를 드립니다. 왜 기도를 드려도, 왜 예배를 드려도 변화가 없을까요?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기록된 성경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려도 그 말씀을 들을 때 역사가 나타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희망을 품고 열정을 가진 자입니다.  열정을 가진 자는 말씀을 붙들 수가 있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해가 안 돼요. 계산상으로 안 맞아요. 그래도 할 수 있었던 게 뭐예요?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계산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머리로 되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의 역사, 다른 거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기대하십시오. 이 사람은 38년 동안 뭘 안 해봤겠어요?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해 봤을 거예요. 그런데 내게 주신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열정이 있고 나니까, 포기하지 않고 나니까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거예요. 하나님의 방법은요, 사람의 계산을 뛰어넘습니다. 사람의 방법을 뛰어넘습니다. 여러분이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38년의 질병이 바로 그때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2025년 하나님의 방법을 기대해 봅시다. 포기하지 마세요. 누구나. 인생의 짐은 다 갖고 있어요.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함께하는 열정을 품으십시오. 놀라운 기적은 여러분에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글은 바다에서 풍랑이 와 가지고 표류하는 배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작은 어선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 풍랑에 휩쓸리다가 겨우 풍랑이 멈춰지지만, 엔진도 다 고장나고, 나침판도 다 고장나고, 통신 시설도 다 고장나고, 이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표류할 수밖에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식량도 다 떨어졌어요. 배고픔도 왔어요. 더 중요한 건 배고픔보다 더 무서운 게 타는 목마름이 있어요. 그래서 너무 목마르니까 바닷물을 떠 가지고 마셔 보지만, 혓바닥은 갈라지면 더 탑니다. 이들은 배고픔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게 목마름이었어요. “내게 물을 주세요. 물을 주세요. 물 마시고 싶다. 물 마시고 싶다.” 그러나 물은 없습니다. 그 망망대해 뜨거운 해는 내려칩니다. 혀가 갈라집니다. 모두가 목말라 물을 마시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배 한 척이 오는 겁니다. 사람들이 소리칩니다. 혀가 갈라지면서, “물 좀 주세요. 물 좀 주세요.” 목마름으로 물을 달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물동이를 아래로 내리세요.” 그러는 거예요. 물을 달라고 하는데 저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물동이를 아래로 내리라”는 거에요. 이해가 안 돼요. 양쪽에서 말합니다. “물 주세요.”, “물동이를 아래로 내리세요.” 어느덧 이 배가 표류되고 바다를 벗어나서 강까지 온 겁니다. 이제 물 바가지만 내리면 물을 마실 수 있어요. 그들은 그걸 모르고 “참, 목마르다. 물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도 우리 목마름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우리 곁에 어떻게 계십니까? 은혜의 물을 떠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멀리 있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 생에 수많은 내가 져야 될 짐이 있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열정을 품으십시오. 주님은 “네가 낫고자 싶으냐?” 우리의 믿음을 점검한 다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025년을 살아가시면서 가정의 짐, 자녀들의 짐, 경제적인 짐, 질병의 짐, 짐 없는 사람 없어요. 다 있어요. 그 짐을 무겁다고 하지 마시고 포기하지 않고 가지고 지면서 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함을 믿으시면서 가십시오.

기적은 하나님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생의 목마름, 내가 해결하려 하지 마시고 내게도 찾아오신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수를 마시고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시면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38년의 절망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처럼 2025년 하나님의 방법 앞에 놀라운 기적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의 고백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다시금 주님 붙들고 열정으로 나가겠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도우셔서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03 02 2025 주일설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A Life of Reverence for God

시편 99:1-9

1 주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니, 뭇 나라 백성들이 두려워 벌벌 떠는구나. 주께서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시니, 땅이 흔들거리는구나. 2 시온에 계신 주님은 참으로 위대하시고, 온 나라 백성들 위에 우뚝 드높으시도다. 3 온 나라 백성들아, 크고 두려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진실로 주님은 거룩하시도다4 주님은 강한 분이시요, 공의를 사랑하는 분이시다. 주께서는 공평을 견고히 세우셨고, 정의와 올곧음을 야곱 안에 두셨도다. 5 우리 하나님 주를 높이 기리고, 그분의 발판 앞에 엎드려 경배하여라. 진실로 주님은 거룩하시도다. 6 그분을 섬기는 제사장들 가운데는 모세와 아론이 있었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사무엘이 있었으니, 그들이 우리 주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간구를 들어 주셨도다. 7 주께서는 구름 기둥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은 주께서 이르신 훈계와 명령을 그대로 따랐도다. 8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주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행한 대로 벌을 내리시기도 하셨지만, 결국 주께서는 그들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우리 주 하나님을 드높이 기리고, 그 거룩한 산에서 경배하여라. 진실로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도다. (쉬운말 성경)

1 The Lord is king!
    Let the nations tremble!
He sits on his throne between the cherubim.
    Let the whole earth quake!
2 The Lord sits in majesty in Jerusalem,[a]
    exalted above all the nations.
3 Let them praise your great and awesome name.
    Your name is holy!
4 Mighty King, lover of justice,
    you have established fairness.
You have acted with justice
    and righteousness throughout Israel.[b]
5 Exalt the Lord our God!
    Bow low before his feet, for he is holy!

6 Moses and Aaron were among his priests;
    Samuel also called on his name.
They cried to the Lord for help,
    and he answered them.
7 He spoke to Israel from the pillar of cloud,
    and they followed the laws and decrees he gave them.
8 O Lord our God, you answered them.
    You were a forgiving God to them,
    but you punished them when they went wrong.

9 Exalt the Lord our God,
    and worship at his holy mountain in Jerusalem,
    for the Lord our God is holy!(New Living Translation)

종교개혁자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단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인식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책을 통하여 학습되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연악함을 철저하게 깨닫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 가운데 구원을 향한 갈망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본 시편 3절 5절 9절에서 3번에 걸쳐 ‘진실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카도쉬: קָדוֹשׁ’는 ‘구별되다, 깨끗하게 되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악으로 부터 구별되시고, 깨끗하셔서 우리가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르십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일평생을 살아도 하나님을 완전하게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부를 경험해도 그 거룩함에 압도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면서 입술이 부정하여 내가 하는 말이 다 더럽고 불결하구나, 하나님께 속할 수 없고 스스로 무가치하다는 생각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제는 네 부정함이 씻어졌고, 네 죄가 덮어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후 이사야에게 사명감이 임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옵소서”라고 결단합니다. 이사야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6:5 그때 내가 소리쳤다. “아, 나에게 재앙이 닥쳤구나! 이제 나는 꼼짝없이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이렇게 전능하신 만군의 왕이신 주님을 나의 두 눈으로 직접 뵙다니! 6:6 ○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한 천사가 제단에서 활활 타고 있는 숯불 한 덩이를 부집게로 집어, 그것을 손에 들고 내게로 날아와, 6:7 그 제단의 활활 핀 숯덩이를 내 입술에 갖다 대면서 말하기를 “보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이제는 네 부정함이 씻어졌고, 네 죄가 덮어졌다!” 하였다. 6:8 ○ 바로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누구를 보내야 할까? 누가 우리를 위해 갈 것인가?” 그래서 내가 주께 대답하였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소서!”

인간의 죄된 마음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르기 보다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예수께서는 돈과 하나님 가운데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만큼 돈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만큼 강력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의 죄를 자각하고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때에 우리가 살 길은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거룩이란 매일같이 일정시간에 예배 드리며 기도하는 외적인 행위 차원이 아닙니다. 거룩은 거룩하신 하나님 안에 들어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거룩 안에 명령이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2절로 18절에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몇가지 실천사항을 말씀하시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이 거룩은 하나님이 하시고 있는 것이지만 이 일에 너희도 동참하라는 명령입니다.

“부모를 경외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우상 숭배하지 말라. 회개하는 예배를 드리라. 곡식을 거둘 때에 밭 모퉁이를 다 거두지 말라.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위한 배려입니다. 도둑질과 거짓말을 하지 말고, 서로를 속이지 말아라, 함부로 거짓 맹세하여 너희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라.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 이웃의 피를 흘려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가난한 사람이라고 두둔하거나 권세 있는 자라고 편들지 말고 공정하게 대하라.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러한 사항들이 거룩함에 대한 규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매일 아침과 일상을 보내고 잠자기 전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말씀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과 마음과 행동이  닿는 곳을 보면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임명예배를 드립니다. 집사와 권사로 임명 되는 분들은 개인생활, 사회생활, 교회와 가정에서 모범이 되고 헌신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품는 일은 우리에게 그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 아프고 힘들더라도 사랑해야만 하는 삶을 마주하게 됩니다. 교사들은 매주일 아이들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가르칩니다. 이 수고함을 통해 아이들은 이 시절에 배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예배하는 기쁨을 배워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처럼 시대적 책임을 감당하는 주의 자녀들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사명은 참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사명은 주어진 자리에 머무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어도 맡겨진 임무를 해 나가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편하고 익숙한 것을 더 찾게 되지만 사명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믿음의 길로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며 감당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인본주의적 방식이 강해지는 시대가 되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견고한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다음세대가 하나님 중심으로 견고해 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인도했습니다. 애굽은 세상의 우상이고, 어둠과 죄악 백성을 상징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는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아론은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여 지은 죄를 씻게 하였지요. 사무엘은 이스라엘 350여년간 지속된 영적 암흑기의 시대에 다시금 거룩한 역사를 위한 그 사역을 감당했던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금요예배 결단 찬양으로 불렀던 <주의 인자하신> 이란 찬양의 가사가 계속 마음에 머물러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의 인자하신 그 사랑이 내 생명보다 나으며 위로하시는 주 손길이 내 눈물보다 귀하다. 변함이 없는 주 임재가 내 근심보다 가깝고 주님 흘리신 그 보혈은 내 상처보다 진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삶으로 이어진다면 주의 사랑이 내 생명보다 낫고 주의 흘리신 보혈이 내 상처보다 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나게 되고 우리의 예배를 살아나게 할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니, 뭇 나라 백성들이 두려워 벌벌 떠는구나. 주께서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시니, 땅이 흔들거리는구나”

만일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로 인해 땅이 흔들리게 되는 것을 영적으로 깨닫게 된다면 이는 너무도 두려운 일입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나라 백성들이 두려워 벌벌 떠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지각변동으로 쓰나미 징조만 보여도 사람들은 두려워 합니다. 그런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이든 악인이든 다 두려워 떨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1절과 7절에서 ‘주께서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시니’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이스라엘과 함께 계심을 나타냅니다. ‘주께서는 구름 기둥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라는 표현에서 구름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빠져 나온 직후부터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임재 가운데 영적인 눈이 열린 사건이 소개됩니다.

아람왕이 엘리사를 죽이려고 예루살렘 성을 겹겹히 에워 쌓았을때 엘리사의 종은 새벽에 일어나 성밖을 내다 보다가 너무 놀라서 그 상황을 엘리사에게 보고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두려워 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간구합니다. 그리고 종의 눈이 밝아지자 그는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엘리사의 종은 절망과 두려움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며 우리의 욕망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조율 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생의 주인과 삶의 기준이 바뀌는 것입니다.

3절 5절 9절에서 진실로 주님은 거룩하시도다 후렴구를 통하여 시편의 기자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첫번째 어구에서는 찬양의 대상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크고 두려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손에 의해 지음 받는 피조물이라면 찬양의 대상이 될수 없고, 합당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두번째 어구와 세번째 어구에서는 ‘우리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참 친근감으로 느껴집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은 자신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주를 높이 기리고, 그분의 발판 앞에 엎드려 경배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속에 처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십니다. 상황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맡겨 주신 이웃을 사랑으로 보듬어 그분의 뜻에 따르는 삶에 믿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9절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불에 비유합니다. “참으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다 태워 없애는 불이십니다. 교회의 탄생은 오순절 날이 이르매 하늘로 부터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위에 임했다고 증거합니다. 초대교회의 설립도 불같은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8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주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행한 대로 벌을 내리시기도 하셨지만, 결국 주께서는 그들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AW 토저의 ‘GOD’이라는 책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도덕적 상황을 바꾸기 위해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공의가 아무 보호책이 없는 죄인들에게 떨어질 때 그 공의는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그리고 그분의 모든 속성은 이 선고에 동의한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무한한 고통 중에 돌아가셨을 때 이 크신 하나님도 무한한 고통을 당하셨다.” 이것은 공의와 긍휼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의 거룩 앞에 서면 두려워 떨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능자의 그늘 아래로 들어갈때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있습니다. 시편 99편은 우리가 이제껏 누구를 위하여 살아 왔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 온 삶은 헛된 삶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이 누구를 드러내고 계신가요? 사명자들은 이 땅의 거룩한 그루터기입니다. 사명자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도시에 나무가 베어지고 그 숲이 황량하게 되어도 하나님은 남아 있는 자들을 통하여 새 일을 행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선지자들이 설교했지만 최종적 결과는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나라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인류의 희망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을 이뤄 나가는 거룩한 그루터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 주시고 허락하신 사명에 응답하는 삶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주도 시편 99편을 살아내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며 기쁨을 회복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2. 23. 2025 주일설교

(주현후 제 7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Blessed Are the Humble

시편 37:1-11

1 악을 일삼는 자들이 잘 산다고 불평하지 말고, 나쁜 짓 하는 자들이 잘 된다고 부러워하지 말라. 2 그들은 들풀처럼 속히 시들어 버리겠고, 푸성귀처럼 금방 말라버릴 것이다. 3 주님만을 굳게 믿고 선하게 살아라. 그러면 너희가 심은 대로 거두면서 땅 위에서 형통한 삶을 누릴 것이다. 4 오직 주님만을 기뻐하라. 그러면 주께서 네가 간절히 바라는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5 네 갈 길을 주께 맡기고, 오직 주만 신뢰하여라. 그러면 주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 6 또한 그분께서 네 의로움을 새벽빛처럼 빛나게 해 주시고, 네 정직함을 대낮같이 환히 드러내실 것이다. 7 주 앞에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묵묵히 참고 그분을 기다려라. 악한 자들이 잘 되는 것을 보더라도 조금도 초조해 하지 말고, 악한 계획이 잘 풀려나간다고 전혀 불평하지 말아라. 8 모쪼록 화를 가라앉히고, 분을 속으로 삭여라. 이런 것들은 사람을 악으로 이끌어 갈 뿐이다. 9 결국 악을 행하는 자들은 뿌리째 뽑혀 멸망할 것이지만, 주 안에서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자들은 땅을 유산으로 받을 것이다. 10 진실로 악인의 형통은 잠시뿐이니, 얼마 후에는 네가 그들을 눈 씻고 애써 찾아볼지라도 그들의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될 날이 올 것이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땅 위에서 평안을 누리며 오순도순 잘 살게 될 것이다. (쉬운말 성경)

1 Don’t worry about the wicked
    or envy those who do wrong.
2 For like grass, they soon fade away.
    Like spring flowers, they soon wither.

3 Trust in the Lord and do good.
    Then you will live safely in the land and prosper.
4 Take delight in the Lord,
    and he will give you your heart’s desires.

5 Commit everything you do to the Lord.
    Trust him, and he will help you.
6 He will make your innocence radiate like the dawn,
    and the justice of your cause will shine like the noonday sun.

7 Be still in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wait patiently for him to act.
Don’t worry about evil people who prosper
    or fret about their wicked schemes.

8 Stop being angry!
    Turn from your rage!
Do not lose your temper
    it only leads to harm.
9 For the wicked will be destroyed,
    but those who trust in the Lord will possess the land.

10 Soon the wicked will disappear.
    Though you look for them, they will be gone.
11 The lowly will possess the land
    and will live in peace and prosperity. (New Living Translation)

02 16 2025 주일설교

(주현후 제 6주)

복 있는 사람은

The blessed person

시편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비웃는 거만한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하지 않으며, 2 오직 주의 교훈을 즐거워하면서, 그 교훈을 밤낮으로 읊조리며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3 이런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풍성히 맺고 그 잎사귀가 조금도 시들지 아니하는 것처럼, 하는 모든 일마다 다 형통할 것이다. 4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그렇지 아니하니, 그런 자들은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 때에 견딜 수 없을 것이며, 의로운 사람들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6 진실로 주께서는 의인의 길은 인정하고 지켜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결국 멸망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쉬운말 성경)

이번 주일 성서일과 본문이 시편 1편이었습니다. 본문으로 주일 설교를 준비하는데 신천 장로님들의 장로고시 설교학 시험 역시 같은 본문이었습니다. 한주 동안 같은 말씀을 묵상하면서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더욱 뜻깊고 감사했습니다.

시편 1편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복(אֶשֶׁר)이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은 복(אֶשֶׁר) 있는 사람의 삶의 자세가 부정문으로 시작됩니다. 악한 사람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하나님을 비웃는 거만한 사람들과 함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 길이 결국 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어린 자녀를 키울 때 ‘안돼’라는 말을 참 많이 하게 됩니다. 아이에게는 거절로 느껴지지만, 부모는 아이가 바르게 자라도록 보호하고 인도하려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가르치다 보면 어느새 아이는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스스로 구분하고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먼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복된 길로 가기 위해, 저는 다른 버전의 말씀도 살펴보았습니다. 쉬운성경에서는 “행복한 사람은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께 서지 않으며,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복이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들의 꾀를 따라가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하지 않고”라고 번역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시편의 복은 히브리어 에셰르(אֶשֶׁר)라는 단어인데 ‘곧다, 똑바로 가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복 있는 사람은 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바른 선택을 통해 우리는 큰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복(אֶשֶׁר)의 기준과 세상의 기준이 충돌할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성경은 우리가 주의 교훈을 즐겁게 받으며 밤낮으로 묵상하고 깊이 생각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성은 악한 사람들의 꾀를 따르면서도 성공을 이루면 행복한 인생이라 생각됩니다. 선거철만 되면 상대방을 업신여기고 험담을 해서라도 뜻을 이루려 하고, 이를 승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지 말라, 그 자리에서 떠나 돌아서라”고 교훈합니다.  ‘복’을 의미하는 또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바라크(בָּרַךְ)는 ‘무릎을 꿇다’라는 뜻입니다.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주어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복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복의 두 단어 바라크(בָּרַךְ)와 에셰르(אֶשֶׁר)가 주는 의미를 종합해 보면, 말씀에 순종함으로 바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주변에 복 있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도 복 있는 사람이 되어 그 복을 누군가에게 함께 나누어 주기를 바랍니다.

시편은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동안 노래했는지를 모아 놓은 신앙시입니다. 복 받은 사람들의 이 노래는 몇천년의 시간속에서 드려졌고, 편집과 재편집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시편 150편을 5권로 나누며 완성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시편 1편은 전체 시편을 대표하는 말씀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많은 분들이 시편 1편을 한 번쯤은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익숙한 말씀일수록 내가 잘 알고 있는 길이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한국 속담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씀 앞에서 서는 일은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 그 안에서 참된 즐거움을 발견하게 되고, 그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도 단단해질 것입니다. 말씀 안에 복(אֶשֶׁר)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는 성경을 ‘펼치는’ 시대가 아닌 ‘켜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삶의 방식이 많이 변했습니다. 그런데 접하는 방법이 달라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안에 담긴 복(אֶשֶׁר)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이 매우 편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은 더 어려워 졌습니다.

건강과 행복, 평안한 삶과 물질의 풍요 속에서도 복된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아야 합니다. 현재 내 삶이 부족하고 작다고 느껴질지라도, 여전히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복을 외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복을 단순히 결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저자는 복(אֶשֶׁר)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자, 삶의 태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 오직 주의 교훈을 즐거워하면서, 그 교훈을 밤낮으로 읊조리며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주의 교훈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기보다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밤낮으로 삶에 적용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세상의 가치관과 흐름에 영향을 받기 쉬우므로, 주의 교훈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돌아보게 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의의 길로 인도하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의 삶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있어도, 말씀 앞에 내 삶을 비추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성경 안에 그분의 뜻이 담겨 있기에 우리는 즐거움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그 길을 따라갑니다. 그렇게 걸어가는 길이 곧 복된 삶입니다.

세상의 트랜드, SNS는 우리를 비교하게 하고 다양한 목소리들 듣게 합니다. 여러분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아시지요? 실제로 노이즈 캔슬링의 기능을 광고할때 주변의 소음과 세상의 간섭에서 바로 벗어나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여 내가 듣고자 하는 음악을 더 명확하게 듣게 해주는 기능입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은 세상의 소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히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소리와 비교, 불안과 두려움이 더 작게 느껴지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는 내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때가 많습니다. 말씀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 보다 내 삶의 행복을 추구할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살아가다 보면 내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게 되면서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기는 어렵습니다. 직장과 학교에서의 압박, 그리고 삶에서 느끼는 불안은 원수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지며, 자기 부인을 실천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듭니다. 세상은 개인의 행복이 우선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37-39)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팔복도 이와 연결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 화평케 하는 사람,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마 5:3-10) 말씀의 길을 그대로 걸어가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더해 주십니다.

말씀의 능력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그 뜻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의 교훈은 우리의 삶에서 살과 피가 됩니다. 때때로 말씀이 기쁘게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부담스럽거나 소화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고 소중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수록,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이 기쁘고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때로는 아픔과 슬픔도 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성숙해지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1:3 “이런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로다.”

모든 일에 대한 ‘형통’은 단순한 성공과 실패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은 그분의 뜻 안에서 얻는 영적 열매이고 결실을 의미합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푸른 잎을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1:4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그렇지 아니하니, 그런 자들은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도다.

1:5 그러므로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 때에 견딜 수 없을 것이며, 의로운 사람들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1:6 진실로 주께서는 의인의 길은 인정하고 지켜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결국 멸망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시편 1편은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분명하게 구분하며 결론짓습니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시들지 않으며,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고,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아, 하나님의 심판 때에 견디지 못할 것이고 사막의 떨기 나무 같아서 메마른 황야에 아무런 낙도 없이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이 걷는 길의 끝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 가운데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샘물을 거저 마시는 복을 누리며,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는 길로 인도함 받습니다. 이 길은 좁은 길이지만 복 있는 사람이 반드시 가야 할 길입니다.

폴워셔 목사님의 ‘좁은 문, 좁은 길’에서 참된 신앙은 변화와 결단을 요구한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은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며, 참된 믿음은 반드시 회개를 동반한다고 가르칩니다. “회개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함 가운데 성장하며, 세상의 우상과 헛된 가치관에 물들지 않으려는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과연 나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정한 복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매일 아침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형통한 삶을 누리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지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시편의 시작은 복 있는 사람의 삶에 대한 교훈을 주지만, 마지막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할렐루야로 마무리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복 있는 사람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성도는 이미 죽음을 이기신 주님 안에서 미래의 승리를 보장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길이 좁을 길이라도 이탈하지 않고 가면 됩니다. 능력의 차이에 따라 앞서 가는 사람도 있고 뒤쳐지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좁은 길 위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입니다. 서로가 이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승리의 삶입니다.

요한계시록 21:6-7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다. 내가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생명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할 것이다. 이기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다 상속받게 될 것이며,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된 길, 곧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세상의 길과는 다른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결국 우리를 참된 생명과 기쁨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이 길 끝에 영원한 대로가 펼쳐질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며,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날을 기대합시다. 한주동안 우리의 삶 속에서 이 믿음을 세상에 증거하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0209 2025 주일설교

(주현후 제 5주)

온 마음 다해 믿고 가자!

Let’s trust with all our heart and go!

시편 138:1-8

1 주여,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주를 찬양합니다. 내가 모든 신들 앞에서 주를 찬양합니다. 2 내가 주님의 성전을 향하여 엎드려 경배하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진실로 주께서는 주님의 이름과 말씀을 이 세상의 어떤 것들보다도 더욱 높이셨습니다. 3 내가 부르짖는 날에 주께서는 내게 응답해 주셨고, 내 영혼에 힘껏 힘을 불어넣어 주시어 나를 담대하게 하셨습니다. 4 주여, 온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 모두가 소리 높여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5 진실로 주의 영광은 한없이 크시니, 그들 모두가 힘차게 주의 길을 노래하게 하소서. 6 주께서는 지극히 높은 데 계셔도 이 땅의 낮은 자들 하나하나를 굽어 살피시고, 아주 멀고 먼 데서도 이 땅의 교만한 자들을 한눈에 다 알아보십니다. 7 내가 비록 고난의 한복판에 있을지라도, 주께서는 나를 건져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강한 능력의 손을 뻗치시어 분노하며 날뛰는 내 모든 원수들을 짓누르시고, 주님의 오른손으로 나를 구원해 주십니다. 8 주여, 주께서는 내게 하신 모든 약속들을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니, 진실로 주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부디, 주께서 손수 지으신 이 몸을 저버리지 마소서! (쉬운말 성경)

우리는 지금 교회력으로 주현절기(Epiphany)를 보내고 있습니다. “Epiphany”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것이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갑자기 이해하거나 깨닫는 순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도 이런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혹은 기도하는 중에, 그동안 막연하게 알고 있던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우리의 삶을 비추고 역사하시는 증거입니다.

시편 138편을 통해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했던 믿음의 고백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다윗은 인생의 가장 힘든 순간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의지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했습니다. 다윗의 부르짖음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138:1 주여,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주를 찬양합니다. 내가 모든 신들 앞에서 주를 찬양합니다. 킹제임스 성경과 NIV 성경에서는 이를 ‘전심으로’라고 번역했습니다. “All my heart”라는 표현은 의지를 다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겠다는 믿음의 결단을 담고 있습니다. 유진피터슨 목사님은 메시지 성경에서 ‘내 안에 모든 것이 외칩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다윗의 찬양은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 나오는 간절한 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은 화살과 창이 날아오는 전쟁터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기도 하고, 때로는 목숨을 위협받으며 도망자의 신세로 살아야 했습니다.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 쫓기는 신세가 되기도 했고, 왕의 위치에서 백성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시선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고난일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안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기도의 응답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에 기도의 힘을 불어 넣으시고 그가 이겨낼 용기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다윗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2 내가 주님의 성전을 향하여 엎드려 경배하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한 때는 언제였을까요? 그것은 그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과 목마름을 느꼈을 때였습니다. 그의 죄와 실수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다윗은 영적으로 갈급해졌고, 이 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회개와 간절함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그 회개를 받아주시고, 그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심으로써 다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사람의 생각 안에  두려움과 부정적인 마음이 들어올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길을 잃은 듯한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매일 새로운 빛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며 고통의 순간에서도 우리를 담대하게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말씀 생활과 기도에서 멀어질수록 세상의 방법들이 더 안전하고 쉽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실패와 고난 가운데에서도 마음을 다하고 전심으로 주를 찾을 때 더 깊어집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넘어지는 이유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죄된 본성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죄의 유혹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달려가 그 이름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전념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3 내가 부르짖는 날에 주께서는 내게 응답해 주셨고, 내 영혼에 힘껏 힘을 불어넣어 주시어 나를 담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음은 우리의 내면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뜻을 구하는 간절한 갈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소리까지 다 들으십니다. 이 간절한 부르짖음은 한나의 기도에서도 느낄수 있습니다. 한나는 자녀를 갖지 못한 고통 속에서 깊은 갈망을 담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간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사무엘을 허락하셨습니다.

미국 역사에 신앙의 영향을 미친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당시 유명한 부흥사처럼 우렁찬 음성이나 과장된 제스처 없이 원고를 읽곤 했습니다. 하루 12시간 이상을 성경연구에 보내고, 2시간이 넘는 설교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한 거룩한 삶을 강조했습니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삶으로 체험한 그가 남긴 글입니다.

“…기도하지 않고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수 있겠는가?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삶, 하나님의 일을 위해 봉헌된 삶이 거룩한 삶이다. 하지만 기도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그런 삶을 살수 없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성령과 동행한다고 말할수 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 주장할수 있으랴?…” 지금도 기도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4절에서 다윗의 기도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세상 왕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4 주여, 온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 모두가 소리 높여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다윗의 이 기도의 성취를 우리는 다니엘서에서 볼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이방 나라의 왕도 이것을 깨닫고, 다니엘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을 합니다. 2:47 …“그대가 섬기는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신이요, 모든 왕들의 주인이로다. 그대가 이처럼 비밀스러운 일을 다 드러낼 수 있었으니, 과연 그대의 하나님은 모든 비밀스러운 일들을 능히 드러내시는 분이시로다.”

다니엘은 노년의 때에도 기도의 습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총리로서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고, 다리오 왕이 그의 탁월함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를 질투한 다른 고관들이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왕에게 30일 동안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게 만듭니다. 이 명령에 따르기 위해서는 다니엘은 기도의 방에 들어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루 세 번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었지만, 이 사건을 통해 다리오 왕은 하나님을 고백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26 이제 나 다리오가 그대들에게 조서를 내려 명하노라. 내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은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분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마땅하나니, 진실로 그분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는 분으로서, 그분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요, 그분의 권세는 대대로 무궁할 것이기 때문이도다” (단 6:25-26)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니엘의 기도의 습관이 세상의 왕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고 나면 원로 장로님에게 찾아오는 주일학교 아이들이 있습니다. 장로님이 매주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주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서 따뜻한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큰 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장로님의 작은 사랑이 아이들에게 전해졌고, 이제는 아이들이 친구들을 초대하여 함께 장로님을 찾아갑니다. 할아버지 장로님을 ‘삼촌’이라 부르며 따뜻한 교제를 나누는 모습이 참 흐뭇합니다. 처음에는 한두 명이었지만, 점점 늘어나 이제는 2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흘러가며 감사가 확장되는 모습입니다. 감사와 사랑은 우리의 마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흘러가며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5 진실로 주의 영광은 한없이 크시니, 그들 모두가 힘차게 주의 길을 노래하게 하소서. 6 주께서는 지극히 높은 데 계셔도 이 땅의 낮은 자들 하나하나를 굽어 살피시고, 아주 멀고 먼 데서도 이 땅의 교만한 자들을 한눈에 다 알아보십니다. 7 내가 비록 고난의 한복판에 있을지라도, 주께서는 나를 건져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강한 능력의 손을 뻗치시어 분노하며 날뛰는 내 모든 원수들을 짓누르시고, 주님의 오른손으로 나를 구원해 주십니다. 8 주여, 주께서는 내게 하신 모든 약속들을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니, 진실로 주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부디, 주께서 손수 지으신 이 몸을 저버리지 마소서!

‘모두가 힘차게 주의 길을 노래하게 하소서’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분의 영광과 위대함을 인식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고, 모든 입술이 주님을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이새의 막내 아들이었던 다윗을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은, 길을 잃고 방황하던 우리도 자녀 삼아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고난의 한복판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때와 방식이 아닐지라도,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시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그의 뜻 가운데서 건지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고난의 의미를 로마서 5:3-4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우리의 성품을 단련시켜 주며, 그러한 성품은 마침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며, 그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해도 하나님의 손길은 희망의 꽃을 피우시고 우리의 삶속에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신앙 생활을 한다면 우리의 힘과 생각을 의지하게 되고 연약함에 쓰러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찬송가를 부를 때 성도들의 눈물을 보게 됩니다.  아픔의 순간과 어려움의 과정을 지나는 성도들의 눈물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회복을 경험하는 모습이라 여겨집니다. 학업의 현장에서 끊임없는 도전과 고민속에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학업의 현장에서도 함께하시며,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고단함과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있는 일터의 현장에서도 단순히 생계를 위한 일의 연속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의 현장이라고 여기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터에서 찬양과 기도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가정은 서로의 가장 솔직한 모습을 대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가정은 단순한 관계를 넘어, 하나님을 만나는 치열한 폭풍 속에서 함께 헤쳐 나가는 믿음의 중심이자, 함께 신앙을 훈련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서로 믿음으로 고백하며 자녀들을 말씀으로 축복해 준다면 우리의 가정 안에 있는 고통과 아픔조차도,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소망을 경험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몸된 교회는 주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함께 기도하며 서로 돕고 섬기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신 시대적 사명을 기억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다윗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힘들어 하는 지체들이 옆에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낮은 자리에서 부터 드러나며 그곳에서 회복이 시작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