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27. 2025 주일설교

(부활절 제2주)

주께서는 언제나 내 가까이 오른편에 계시니

The Lord is Always at My Right Hand

시편 16: 8–11

8 내가 항상 주님을 내 앞에 모셔 두고, 주께서는 언제나 내 가까이 오른편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9 그러므로 나의 마음은 한없이 기쁘고 즐거우며, 나의 육체도 소망 가운데서 안전하게 살아갑니다. 10 정녕 주께서는 이 몸을 보호하시어 무덤에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고, 또한 주의 거룩한 자를 무덤에서 썩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11 주께서 내게 참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실 것이니, 주 앞에서 나의 기쁨이 항상 흘러넘칠 것이요, 주 옆에서 나의 즐거움이 영원히 충만할 것입니다. (쉬운말 성경)

8 I know the Lord is always with me. I will not be shaken, for he is right beside me.

9 No wonder my heart is glad, and I rejoice. My body rests in safety.
10 For you will not leave my soul among the dead or allow your holy one to rot in the grave.
11 You will show me the way of life, granting me the joy of your presence and the pleasures of living with you forever. (New Living Translation)

부활절을 지나 꽃이 피어나는 봄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교회 화단 앞에도 튤립과 수선화가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길에서 다시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하나님의 섭리와 생명의 힘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함께 묵상할 말씀은 시편 16편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지은 메시야의 예언시로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인용했던 말씀입니다.

10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0 정녕 주께서는 이 몸을 보호하시어 무덤에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고, 또한 주의 거룩한 자를 무덤에서 썩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며 다윗이 먼 미래를 내다보며 한 말씀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증언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가 그 일의 증인이라고 설교합니다. 사도행전 2장 31절, 32절입니다. 2:31 그래서 다윗은 장차 올 일을 미리 내다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분은 무덤 속에 버려지지 않을 것이며, 그분의 몸 또한 썩지 않을 것이다. 32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증인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시편 2편과 본 시편의 구절을 인용하며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우리 조상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셨다고 설교합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로 35절입니다. 13:33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들의 후손인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시편 제2편에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13:34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지 않게 하신 이 사실은, 성경에 ‘내가 다윗에게 약속한 거룩하고도 확실한 복을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13:35 또 다른 시편에도 기록되기를 ‘주님께서는 주님의 거룩하신 분을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다.’ 하였습니다. 시편의 예언과 사도들의 증언은 우리에게도 부활의 주님을 확신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살아가지만 부활의 믿음은 죽음보다 강한 생명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이 믿음을 증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의 인생에는 위기와 위험의 순간들이 참 많았고,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죽음의 그림자를 피해 광야에서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항상’이라는 단어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며 그가 내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편16:8) 다윗은 삶과 죽음의 외나무 다리 위를 걸으면서도 하나님을 굳게 신뢰했을때 하나님은 더욱 더 그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항상’ 그리고 ‘언제나’라는 표현 안에 다윗의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양을 돌보던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신다는 보호의 의미를 삶을 통해 배웠을 것입니다.

‘주께서는 언제나 내 가까이 오른편에 계시니’ 라는 구절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사랑하는 딸의 손을 붙잡고 결혼식장에서 함께 걷는 친정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딸의 손을 사위의 손에 넘겨주는 것은 앞으로 딸을 든든히 지켜주고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또한 험한 세상 마지막까지 보호해 주고 싶은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는 옆이 아니라 뒤에서 든든히 지켜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며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오른편은 하나님의 힘과 보호, 구원과 축복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자로 서 계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주님의 절규는 승리의 선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손을 놓치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 주님의 손쳤을 때에도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강한 손으로 우리를 변함없이 붙잡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새사람으로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이 사랑의 즐거움이 아니고서는 바울과 베드로의 생애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사단이 왕 노릇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항상 위기 가운데 살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즐거움입니다. 성도는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 믿음의 길 위에서 즐거움의 대상이 바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이전에 우리가 살았던 옛삶의 마침을 의미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새사람된 성도는 주님이 여전히 함께 계신다는 참된 믿음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마 10:16) 말씀을 하실때 제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양과 이리의 싸움은 당연히 이리의 승리일 겁니다. 양은 이리보다 느리고, 겁도 많고 약합니다. 양의 입장에서는 위태롭고, 불안하고,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 세상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연단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여 온전한 즐거움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안고 살아가면서 ‘나는 언제 믿음을 불들게 되는가’ 라는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끊임없는 스트레스와 문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마주하는 불확실한 삶은 우리의 삶을 흔들고 우리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기쁨은 우리에게 불안이 아닌 소망을 전해줍니다. 때때로 우리는 현실 속에서 주님께서 멀리 계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전의 습관과 삶의 패턴,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참된 믿음으로 이끄시는 연단의 여정 속에서 예수님은 한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한알의 씨앗이 죽어져야 이를 통해서 뿌리 깊은 곳에서 부터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의 길을 주신 것입니다. 죄의 지배아래 살던 우리를 건져내시고 존귀한 자녀로 삼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속에서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신앙의 여정은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깨달아 가는 과정이며, 세상 속에 감춰진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하나씩 삶속에서 풀어내며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속에서 믿음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척박한 땅에서도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려, 우리가 평생 붙잡고 가야 할 생명의 말씀을 찾아냅니다.

2025년 2월 5일 한 프로그램에 출연한 황가람이라는 가수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음악을 하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고, 돈을 아끼기 위해 노숙자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꿈을 찾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던 그의 인생에는 드라마틱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돈을 아끼기 위해 건물 옥상에서 자기도 하고, 라디에이터가 켜져 있는 화장실에서 자기도 했답니다. 쓰레기를 모아 생활하고 노숙생활을 하면서 몸무게는 40kg까지 빠지고, 이러다가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온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벌레 같았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무명의 삶을 벗어나 빛나는 별이 되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벽에 부딪히고, 현실의 어둠을 만나기도 하고, 절망 가운데 있기도 합니다. 스스로 빛이 날거라 기대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빛날수 없었던 존재입니다. 그의 오랜 무명생활은 “나는 반딧불” 이라는 노래를 통해 알려졌고 그의 고통과 눈물의 시간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황가람이 부른 “나는 반딧불” 이라는 노래 가사를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

우리 인생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새 생명을 허락하신 그분 안에서 빛의 자녀인 것을 깨닫는 성도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성공과 실패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믿음의 길을 걷는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주의 자녀들은 빛처럼 세상을 밝히고, 소망의 빛을 품고 살아가는 빛나는 존재입니다. 주님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새하늘과 새땅의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 시민의 명예를 지켜 나가야 합니다.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책임은 믿음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앞서 걸어가신 주님을 따라가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에서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마주하기도 하고, 죄된 본성을 거슬러야 하며, 계획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무너지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말씀을 붙들고 나갈 힘이 부족하다 여겨질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더욱 견고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본 시편은 메시아의 예언시로 우리로 하여금 부활과 영생의 소망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11 주께서 내게 참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실 것이니, 주 앞에서 나의 기쁨이 항상 흘러넘칠 것이요, 주 옆에서 나의 즐거움이 영원히 충만할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을 3가지로 표현합니다. 참된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시는 분, 나의 기쁨을 흘러 넘치게 해 주시는 분, 나의 즐거움을 영원히 충만하게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그 주님이 저와 여러분 마음 안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언제나 저 멀리에 있기에 현실은 여전히 흔들림 속에 있습니다. 막막할 때도 있고 잘 해내고 있지 못하는것 같은 마음에 하루에도 몇번씩 자책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주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불안속에 머물러 있는것이 아니라 새 삶을 살아갈 믿음의 용기와 인내의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불안에 흔들리고 상처에 무너지더라도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기쁨은 세상에서 말하는 화려한 성공이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활은 우리의 삶의 위기를 변화시키는 능력이며, 비록 그 안에서 느린 걸음일지라도, 분명한 믿음의 발자국이 남겨질 것입니다. 옛것을 잃고, 놓아버린 자리에서, 현실의 유혹 속에서도 우리가 진짜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붙들고 살아 가는가?” 삶에서 진지하게 반복되는 이 질문 앞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분은 오직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 답이 명확하지 않으니 우리가 씨름하고 반복적으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헨리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 ~ 1996)의 ‘주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 라는 책에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께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을까요? 감히 제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 죄 때문에 다 내어 주셨습니다. 거기에 합당한 반응을 찾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주님의 거룩한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노라면 저는 겸손히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수난과 죽음을 통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셨고 주님의 십자가는 소망의 새 징표로 이 세상에 우뚝 섰습니다. 오 주님 십자가 아래 살면서 십자가의 소망을 끊임없이 전파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믿음의 여정에 분명한 소망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들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분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영원에 이르도록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들리고 주저 앉게 될 때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믿음의 여정은 단순히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위로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이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 생활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천국의 기쁨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구체적인 실천의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깊이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주님은 우리 모두의 속도에 맞춰가며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해 가십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에게 보여주신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완고했던 뜻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풀어가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아픔과 죄의 모습 안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죄로부터 돌아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압박과 미래를 향한 불안함은 우리를 낙심하게 하지만 부활의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작고 낮은 자리 그리고 여전히 상처 난 자리, 반복적으로 씨름하는 자리에서 믿음의 훈련과 순종을 통하여 부활의 능력이 생명의 길이 되는 부르심의 현장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깊은 영적 기쁨과 부활의 소망은 우리의 삶에서 생명의 능력이 되어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죽은 것 처럼 보였던 꽃이 다시 피어나듯 무감각 했던 우리의 삶과 마음에 참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주 앞의 기쁨과 주의 오른편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며 진정한 생명의 기쁨을 찾아가시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4 20 2025 주일설교

 (부활절 설교/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 설교36)

내가 세상을 이겼다!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1-33

김태환 목사

31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제 너희가 믿느냐? 32 그러나 잘 들어라. 너희가 뿔뿔이 흩어질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이미 그 때가 되었다. 너희는 저마다 자기 집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버려 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33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쉬운성경)

31 Jesus asked, “Do you finally believe? 32 But the time is coming—indeed it’s here now—when you will be scattered, each one going his own way, leaving me alone. Yet I am not alone because the Father is with me. 33 I have told you all this so that you may have peace in me. 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New Living Translation)

웨슬리는 1791년 8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임종 전에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이작 와츠 (Isaac Watts, 1674-1748, 영국)의 찬송가 ‘숨쉬는 동안 나는 창조주를 찬양하리라 (I’ll Praise My Maker While I’ve Breath)’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임종을 지켜보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오늘 요한복음 16장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나게 되겠지만 그 때도 나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엄청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어떻게 나를 지켜줄 수 있는지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신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시편 46편 말씀을 한번 보세요. 이 시편은 ‘고라의 자손 (the descendants of Korah)’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므로, 그 성(城)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그 성을 도우실 것입니다 (God dwells in that city; it cannot be destroyed. From the very break of day, God will protect it., NLT).” (5절) 이 말씀에서 ‘성’은 문자 그대로 ‘castle’ 혹은 ‘city’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시며, 이 세상을 그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우리의 산성 (fortress)이신 전능하신 ‘엘 샤다이 (El Shaddai)’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온 종일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나요?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고린도후서 4:17). 이 말씀에서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이란 말과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이란 말을 대조해서 읽어 보세요. 우리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당장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많이 있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된다는 것이 우리가 가진 희망이고, 우리가 가진 믿음입니다 (로마서 8:28).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믿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믿었던 사람들(히브리서 11:27)’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로마서 8:24).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1).

그러면, 예수님이 이기신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그리스어 원문에 ‘코스모스 (κόσμος)’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 속에 다양한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간단하게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영적인 실체 (實體)’를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 ‘마귀’, ‘바알세불’이란 말을 사용하셨고, ‘이 세상의 통치자 (the ruler of this world)’라는 말도 사용하셨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인 힘을 가진 존재를 말합니다. 바울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the commander of the powers in the unseen world, NLT, 에베소서 2:2)’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마음을 붙어 넣습니다. 이밖에 ‘이 세상의 신’, ‘속이는 영’, ‘빛의 천사 (고린도후서 11:14)’라는 말도 사용했습니다.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은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의로운 하나님의 일꾼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사탄은 제자 베드로의 마음에 들어와 마치 예수님을 위하는 것처럼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 일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8:32-33). 사탄은 제자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일을 했습니다(요한복음 13:26-28). 이처럼 사탄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짓게 만들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영적인 죽음 (spiritual death)’이라고 합니다.

죄를 히브리어로 ‘하타트(חַטָּאת)’라고 하고, 그리스어로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라고 합니다. 모두 ‘과녁에서 빗나가다 (missing the mark)’라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떠난 자기 시대 백성들을 향해서 “우리는 다 (목자를 떠난)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All we like sheep have gone astray. We have turned, every one, to his own way., NKJV, 이사야 53:6, 베드로전서 2:25)”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길을 잃은(astray)’, ‘돌아서다(turn)’, ‘제 자신의 길로(to his own way)’라는 말들은 모두 ‘과녁에서 빗나간’ 죄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들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보면 인생의 목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셨습니까? 어느 책을 읽다가 본 것입니다만,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 미국)가 이런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목적과 방향이 없다면 노력과 용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Efforts and courage are not enough without purpose and direction).” 무조건 열심히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하면서 스스로 위로하고 만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또,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으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목적이 올바로 설정되지 않으면 그것 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은 삶의 목적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삶의 목적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유용하고, 고결하며, 동정심을 가지며, 잘 삶으로 말미암아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The pur­pose of life is not to be happy. It is to be useful, honorable, and compassionate, making a difference by living well).” 삶의 목적이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은 삶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참된 삶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고귀한 희생과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산 사람들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한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서른 세 살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1)”라고 기록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을 때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학생이고, 언제까지 청년으로 내 젊음이 계속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 시라도 빨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What on earth am I here for)?” 이 질문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가 잘못된 과녁을 설정하고 우리의 시간과 젊음의 화살을 낭비하도록 우리를 유혹해서 죄의 길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죄에 대하여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6:23에 있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쉬운 말씀 같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wages’는 보통 우리가 ‘임금’, ‘급료(給料)’, ‘대가(代價)’, 혹은 순수한 우리 말로 ‘삯’이라고 해석하잖아요? 하지만, “죄의 삯은 죽음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그 뜻이 금방 들어오지 않지만 ‘wages’라는 말을 ‘대가’로 번역하면 뜻이 금방 들어옵니다. 이 경우 ‘대가’라는 말에 ‘결과(結果)’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혹은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사탄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우리를 위협하는 어떤 것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고난도, 그 어떤 환난도, 죄의 권세도, 죽음도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담대하여라!”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살아계신 주 (Because He Lives)’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게이더 부부 (William J. & Gloria Gaither)가 가사를 쓰고 작곡을 했습니다. 이 찬양의 후렴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orrow (주께서 살아 계시니 내일을 마주할 수 있네). Because He lives, All fear is gone (주께서 살아 계시니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네). Because I know He holds the future (주께서 나의 미래를 주관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And life is worth the living just because He lives (내 삶은 살 가치가 있네. 주께서 살아 계신다는 이유만으로). 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그리고, 성경적인 가사입니까?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두려움 없이 내일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 때문에 삶에 의미가 생기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생기고, 삶의 의미와 목적과 이유가 생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당시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우리는 모두 이 일의 증인들입니다.’…..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여 오히려 기뻐하면서 공의회를 나왔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 뜰에서,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며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내용을 쉬지 않고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5:29-30, 32, 5:41-42).” 이들이 ‘예수님 때문에’ 불안한 내일을 마주할 수 있었고, ‘예수님 때문에’ 고난도 달게 받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살아야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톰 라이트 (N.T. Wright)라는 영국의 성서 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완성하는 사건입니다…..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로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부활절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드러났으며, 이제 당신도 그 나라에 속할 수 있도록 초대받았다는 것입니다 (The resurrection completes the inauguration of God’s kingdom…. It is the decisive event demonstrating that God’s kingdom really has been launched on earth as it is in heaven. The message of Easter is that God’s new world has been unveiled in Jesus Christ and that you’re now invited to belong to it).” —Surprised by Hope: Rethinking Heaven, the Resurrection, and the Mission of the Church (N.T. Wright, 2008)

톰 라이트는 사탄이 패배하고 무력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가 엄청나게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프로젝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9-13)”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대로, 이제 완성을 향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이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초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가 이렇게 확장되었습니다.

이 말씀에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습니까?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학교에서나 우리가 주어진 일에 소명의식을 가지고 충실하게 살고, 진리와 거짓이 싸울 때 망설이지 않고 진리 편에 서고, 정의와 불의가 싸울 때는 주저하지 않고 정의 편에 섭니다. 그리고,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어둠이 있는 곳에는 빛을 밝힙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완성하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초대받은 우리는 나만 위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공동체를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를 구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04 13 2025 주일설교

(종려주일)

머릿돌이 되었도다

The Cornerstone

시편 118:1~2, 19~29

1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분은 선하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도다. 2 이스라엘 백성들아, “주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시다.” 하고 외쳐라… …19 그러므로 나를 위해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다오. 내가 그 문으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드리리라. 20 이 문은 주님의 문이니, 의인들이 다 그리로 들어가리라. 21 주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내게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셨으니, 내가 소리 높여 주님께 감사드리리라. 22 집 짓는 건축자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도다. 23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일이니, 우리가 보기에 참으로 놀랍기만 하여라. 24 이 날은 주께서 구별하여 정하신 날이니, 이 날에 우리가 다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25 주여, 간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주여, 간구하오니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소서. 26 ○ 복 되도다, 주의 이름으로 나오는 자들이여! 주의 성전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27 주님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손과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축제의 행렬을 벌여, 다 함께 제단의 뿔로 나아가자! 28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리렵니다. 진실로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을 높이 기리렵니다. 29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분은 선하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도다. (쉬운말 성경)

1 Give thanks to the Lord, for he is good!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

2 Let all Israel repeat: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

19 Open for me the gates where the righteous enter,
    and I will go in and thank the Lord.
20 These gates lead to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the godly enter there.
21 I thank you for answering my prayer
    and giving me victory!

22 The stone that the builders rejected
    has now become the cornerstone.
23 This is the Lord’s doing,
    and it is wonderful to see.
24 This is the day the Lord has made.
    We will rejoice and be glad in it.
25 Please, Lord, please save us.
    Please, Lord, please give us success.
26 Bless the on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We bless you from the house of the Lord.
27 The Lord is God, shining upon us.
    Take the sacrifice and bind it with cords on the altar.
28 You are my God, and I will praise you!
    You are my God, and I will exalt you!

29 Give thanks to the Lord, for he is good!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New Living Translation)

본 시편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참 좋아했던 말씀입니다. 루터는 시편 118편을 가장 사랑하는 시편이라고 설교에 자주 인용하곤 했습니다. 특히나 ‘건축자들이 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에서 힘과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가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총(Sola Gratia)을 선택했을때 그의 인생은 로마 교황청에 의해 버림 받는 돌이 되었습니다.  1521년 4월 18일 보름스(Worms) 의회 앞에서 카톨릭의 문밖으로 나가야 하는 결정을 받아 들여야 했습니다.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루터는 자신의 생각과 방법이 옳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렸습니다. 그가 지은 찬송시를 듣고 있으면, 승리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 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갈보리산 언덕 위,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돌은 결국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심없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옳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때때로 보잘 것 없이 느껴질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찾아와 주셔서 우리의 삶을 세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1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분은 선하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도다. 2 이스라엘 백성들아, “주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시다.” 하고 외쳐라…19 그러므로 나를 위해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다오. 내가 그 문으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드리리라. 20 이 문은 주님의 문이니, 의인들이 다 그리로 들어가리라.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오르며 할렐시편를 불렀습니다. 이 할렐 시편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내용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시편 118편은 제 1할렐 시편(시편 113~118편)의 마지막 노래입니다. 시인은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달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가 감사를 노래합니다. 시인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의인들이 다 그리로 들어가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 시편 안에는 그리스도가 겪으신 고난과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 하셨습니다(요 10:9) 종려주일 왕의 입성이 곧 ‘생명의 문’을 여는 것이었지만 갈보리는 십자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1장에서 자신을 가르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시편 118편을 인용하십니다. 21:42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지 못하였소? ‘집 짓는 이가 버린 돌이 이제는 모퉁이를 받치는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이루신 이 일, 우리 눈에 너무나 놀라워라.’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뜻은 부활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교회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며 예수의 말씀 위에 삶을 세워갑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예수께서 계심을 믿을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초대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면,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 밀려온 박해로 인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던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유다와 사마리아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흩어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버려진 것 같은 상황에 떠 밀린 인생속에서도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의해 버림받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모세는 히브리 동족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 사람을 죽인 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로 사람들에게 심한 조롱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예레미야를 붙드셨고, 그의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고난 속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은 놀라운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삶의 어떤 순간에는 버려진 돌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바울도 예수를 믿은 이후, 유대인들에게는 배신자로, 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설고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고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다양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이해와 판단을 내려놓게 하심으로 그 공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인생의 닫혀진 문, 절망의 문, 관계의 깨어짐의 문 앞에 서게 되지만 그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성도가 겪게 되는 외적인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을 경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바울의 사역의 핵심에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인생의 고난은 성도다움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아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갈때입니다. 그는 익숙한 어머니의 품을 떠나서 불안과 두려움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벧엘에서 잠을 자는데 하늘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봅니다. 창세기 28장입니다.

“28:13 주께서 그 사닥다리 위에 서서,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너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28:14 네 후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져, 동서남북 어디로든 네 후손이 퍼져나갈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28:15 나는 늘 너와 함께할 것이다. 네가 어디를 가든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 전에는 내가 절대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익숙한 삶을 떠나 고독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 처절한 고독이 없었다면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의 대한 경험입니다. 잠을 깬 야곱은 열린문을 경험하고 두려워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기뻐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그것은 자기세계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경의로움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28:16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 말했다. “주께서 바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몰랐구나.”

28:17 야곱은 두려워하며 말했다. “이곳은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바로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 아닌가? 이곳이 바로 하늘로 가는 문이로구나!”

오늘 우리는 성찬식을 갖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은, 평범한 일상이 주 안에서 거룩해졌음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감사를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참여하여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번 성찬을 통해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는 예수를 기억했습니다. 우리도 이 시간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성찬에 임하시길 바랍니다. 성찬은 부활의 소망이 우리 안에서 살아나도록 돕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매일 마주하는 뉴스만 보아도, 세상은 성과중심의 구조 속에서 사람을 상품화하며, 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되면 버려져야 할 존재로 여깁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날에 많은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이 그것도 며칠후에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합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정치적 구원자로서 강력하게 나타나기를 원했지만, 주님은 침묵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세상의 능력과 권세를 발휘하는 구원자로 기대했으나, 예수께서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의 뜻에 따라 죽음을 선택하셨고, 그 길은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삶이 힘들어질수록, 세상은 쉽게 관계를 끊어내고, 안전이 보장된 길만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믿음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절대 쉬운 길이 아니지만 외롭고 고단한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십자가 부활의 생명을 발견하게 하실것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성도의 삶을 붙들어 주는 힘이 됩니다. 믿음과 현실 사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 하나님의 신비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 이 문을 통과한 성도는 자기 욕망을 따르던 삶에서 거룩한 성전을 지어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종려주일은 슬픔을 안고 나아가는 기쁨입니다. 존재가 흔들리는 불안 속에서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23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일이니, 우리가 보기에 참으로 놀랍기만 하여라. 23절은 예수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시작하신 것은 사람에 의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24 이 날은 주께서 구별하여 정하신 날이니, 이 날에 우리가 다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25 주여, 간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주여, 간구하오니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소서.

26 복 되도다, 주의 이름으로 나오는 자들이여! 주의 성전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27 주님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손과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축제의 행렬을 벌여, 다 함께 제단의 뿔로 나아가자!

28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리렵니다. 진실로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을 높이 기리렵니다.

29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분은 선하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도다.

마음이 무거운 소식들이 참 많습니다. 끊임없는 사건과 사고의 소식과 분쟁과 갈등의 이야기들, 거기에 인생의 짐까지 더해져 마음이 멈춘듯 어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꿔 주시고, 온갖 죄와 사망을 사랑으로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의 날 예배를 통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확신하며 믿음의 흔들림과 내적 갈등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문으로 들어가,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이 예배의 자리가 하늘로 열린 문을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다시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빛을 완전히 잃어 버리는 고난 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삶의 목적도 의미도 잃어버린채 살 소망 조차 없는 것 같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어둠을 뚫고 빛으로 오신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제 믿는이들이 바라보는 인생의 문제는 돌파 할수 없는 벽이 아니라 새로운 문을 여시는 은혜가 될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희망을 잃지 않고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마태복음 7:7)고 약속하셨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문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지만 그 외침은 어느새 분노와 의심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십자가 죽음의 자리로 향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자리도 기대와 실망, 사랑과 미움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나의 삶의 십자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 아픔과 고난의 시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소망이 되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에는 더 큰 기쁨과 소망이 넘치시면 좋겠습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간구하실때, 주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은혜의 문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그 문은 이미 열려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하는 성찬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더 깊이 그 은혜를 느끼며 성찬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한주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느껴 보시고, 말씀을 따라 가는 삶에 축복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04 06 2025 주일설교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마음속 깊이 간직하렵니다

I Have Hidden Your Word in My Heart

시편 119:9-16

9 ○ 청년이 어떻게 해야 일생 동안 깨끗하고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 오직 그 길뿐입니다. 10 내가 온 마음 다 바쳐 주님을 찾겠사오니, 주님의 계명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나를 붙들어 주소서. 11 내가 주님께 죄를 짓지 않으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속 깊이 간직하렵니다. 12 찬양을 받으실 주님, 주의 법도를 내게 가르쳐 주소서. 13 주께서 친히 입으로 말씀해 주신 그 모든 법도를 내가 입술로 크게 소리 내어 낭독하렵니다. 14 참으로 주님의 교훈을 배우고 따르는 이 기쁨은 큰 재물을 얻는 기쁨보다 더욱 큽니다. 15 내가 주님의 가르침을 묵상하고, 주님의 법도를 깊이 살펴보렵니다. 16 오직 주님의 율례를 나의 기쁨으로 삼고, 언제든지 주님의 말씀을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쉬운말 성경)

9 How can a young person stay pure?
    By obeying your word.
10 I have tried hard to find you—
    don’t let me wander from your commands.
11 I have hidden your word in my heart,
    that I might not sin against you.
12 I praise you, O Lord;
    teach me your decrees.
13 I have recited aloud
    all the regulations you have given us.
14 I have rejoiced in your laws
    as much as in riches.
15 I will study your commandments
    and reflect on your ways.
16 I will delight in your decrees
    and not forget your word.(New Living Translation)

하나님 말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말씀이 우리 삶에 힘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필요합니다. 만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주어졌는데 그 말씀을 따라가게 되면 원수는 말씀에 의해서 친구가 됩니다. 실례로 손양원 목사님께서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이를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아서 예수를 믿게 한 것은 그분이 말씀을 따를때 임했던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아집과 인간의 본성으로 가득한 현실속에서 말씀에 기록된 사랑과 용서는 말씀을 실천하는 이들을 통하여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청년이 어떻게 일생동안 깨끗하고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합니다. 질문하고 청중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것은 지혜문학의 전형적인 기법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 오직 그 길뿐이라고 대답합니다.(9절) 어떻게 하면 일생동안 말씀을 지키며 깨끗하고 온전한 삶을 살수 있을까요? 이 기도를 하는 시인은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힌 자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이 밑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따라가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지 않다면, 아무리 좋은 말씀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말씀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통해 지금은 희미하게 하나님을 보지만 그때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고전 13:12)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라면, 말씀 앞에서는 우리의 연약함도 강팍함도 훤히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이들이 입을 옷은 온유함과 겸손함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께서 보여 주신 삶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3:15 오직 여러분의 마음속 깊은 곳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모시고, 또 여러분이 품고 있는 영생의 소망에 대하여 그 근거를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 어디서든지 답변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되, 3:16 온유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십시오. 또 언제나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만일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해 준 마지막 편지라면, 아버지의 말씀은 그 아들에게 삶의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둘째 아들은 세상의 방법을 택하고 아버지를 떠나게 됩니다. 그는 스스로 아버지의 살아계심을 부정하고 유산을 미리 요구하며, 아버지가 죽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던 아들은 돼지가 먹는 열매조차 먹고 싶었으나, 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황속에 이르러 다시 아버지의 존재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때 아버지의 반응은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으로 아들을 끌어 안아 주셨습니다. 완전하지 않고 자격없는 부족한 우리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겠다고 고백하며 살아갈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길이 됩니다.

시인을 보시기 바랍니다. 삶의 방향을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내가 온 마음 다 바쳐 주님을 찾겠사오니, 주님의 계명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나를 붙들어 주소서.(10절)라고 고백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둘째 아들의 뉘우침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졌고, 일꾼으로라도 좋으니 아버지 품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돌아옵니다. 세상에 많은 갈래의 길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이들에게는 이처럼 우리의 옛모습이 힘을 잃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됩니다.

본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절입니다. 히브리어 22개의 알파벳에 따라 배열된 22연의 시입니다. 본 시편을 각 연마다 알파벳 순으로 규칙적으로 짜놓은 것은 히브리 사람들이 이 시를 쉽게 외우고 노래하도록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릴적 부터 자녀들이 밀씀을 암송하도록 훈련을 시킵니다.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크게 낭독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 자녀들에게 말씀을 삶의 중심에 두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글을 몰라도 암송한 말씀은 성장하면서 자녀의 삶에 있어서 큰 깨달음을 줄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 책을 먹으라’는 그의 책에서 강아지가 뼈다귀를 물고 음미하며 씹는 것처럼 말씀의 유익함과 즐거움으로 읽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말씀의 뿌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11 내가 주님께 죄를 짓지 않으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속 깊이 간직하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에서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왕의 명령과 이방 문화의 요구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기로 정했습니다. 이 결단은 왕의 명령에 불복하는 위험성과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거부하며,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바벨론 왕 앞에서 그들의 탁월함을 드러내셨습니다.

바울도 로마감옥에 2차로 투옥되어 순교할 것을 예감했습니다. 그는 제자 디모데에 편지를 쓰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고난의 시기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믿음 안에서 굳게 서서 사역을 해나가야 된다고 편지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1절과 16절,17절입니다. “1 디모데여, 그대는 이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말세에 고난의 시기가 올 것입니다…..16 성경의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으로,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치고, 책망을 통해 잘못을 바로잡게 하고, 또 의로써 훈련시키기에 아주 유익한 책입니다. 17 그리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온전히 준비시켜 줍니다.”

바울은 말세의 시기에 넘쳐나는 세상의 풍조들을 열거하고 난 후에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풍조와 가치관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고난임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럴때 일수록 말씀을 굳게 믿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신앙생활은 세상의 기준과 내 삶의 편안함을 넘어서 우릴 위해서 죽으신 주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면 우리의 삶이 구별되어 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자리잡을 때 자연스럽게 세상의 가치관이 분별되어 집니다.

2024년 빛과 소금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보고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청년입니다. 지금처럼 모바일을 이용한 인터넷은 상상도 못하던 느린 랜선의 초기 인터넷 시대였는데, 숙소 예약 하나 없이 배낭 하나 달랑 들고 런던 히스로 공항으로 입국하여 숙소도 찾지 않고 처음 방문한 곳은 바로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내셔널 갤러리’였습니다. 의대 공부로 바쁜 시간에도 틈나는 대로 미술사에 대한 뼈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답니다. 그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베데스다 연못’ 그림을 보며 요한복음 5장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이후 대학병원 교수로 재직하며 QT 중에 같은 본문을 묵상하며 주님께 이러한 환자를 보내주신다면 주의 뜻으로 알고 깊이 섬기게 해 달라고 기도했답니다. 놀랍게도 그날 한 38세 남성이 근긴장이상증으로 진료실을 찾았고, 마침 요청하지도 않은 보툴리늄톡신 주사가 제약회사로부터 기부되었답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시술했고, 일주일 후 환자의 손이 기적처럼 펴졌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진료에 직접 개입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자신이 바로 혈기 마른 병자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주님의 손이 마치 자신에게 다시 내미시는 듯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 5:8)라는 말씀 한구절의 깨달음은 그를 다시 일어나 걸으라고, 네 걸음이 네 능력이 아닌 내가 준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시는 듯했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주의 교훈과 율례를 따르는 것이 큰 기쁨이라고 고백합니다. 큰 재물을 얻는 기쁨보다 더 크다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으로 살던 바울에게 율법 자체는 지켜야 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지키면서 기쁨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새로운 삶에 눈을 뜨고 난 뒤에 그의 순종과 겸손은 기쁨으로 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기쁨으로 내어 주는 삶에 자신을 헌신합니다. 그가 고난을 자기 죽음의 기회로 삼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섬김의 길로 걸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마시는 순간 그 잔은 지나가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는 자기 십자가는 우리의 짐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멍에를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될수록 주님이 함께계심을 더 깊이 깨닫고 부활의 기쁨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시인의 고백을 보시기 바랍니다. 14 참으로 주님의 교훈을 배우고 따르는 이 기쁨은 큰 재물을 얻는 기쁨보다 더욱 큽니다. 15 내가 주님의 가르침을 묵상하고, 주님의 법도를 깊이 살펴보렵니다. 16 오직 주님의 율례를 나의 기쁨으로 삼고, 언제든지 주님의 말씀을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안하고 평탄한 길을 원합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하기 보다는 익숙한 길을 걷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새롭게 걷는 길 낯선 길을 걸을 때 만나는 인생의 일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도록 붙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도전하며 꿈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삶은 때때로 외롭고 고된 시간이겠지만 그때마다 시인처럼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말씀 안에서 답을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어렵고 힘들때, 불안하고 두려울때 말씀을 붙드는 은혜를 깊이 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순종할때에 말씀의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교훈을 전하기 위해 구조적으로 정교하게 지어졌지만, 마지막 절은 열린 결말로 끝이 납니다. “내가 길 잃은 양처럼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사오니, 주께서 오셔서 주의 종을 찾아 주소서. 나는 주님의 계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시 119:176)

시편의 기자처럼 우리도 때때로 길 잃어버린 양처럼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친히 찾아 오시는 분이십니다. ‘주의 종을 찾아 주소서’라고 고백할때에 책망하시기 보다 우리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인생에서 마음이 닫혀 있고 차가운 바람이 불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흔드는 말에 집중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말씀의 힘이 느껴지지 않고 무겁고 낯선 시간이 그저 버겁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삶의 기쁨도 느껴지지 않고 불평의 언어들이 삶에 채워지는 그런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바로 말씀을 품고 기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내 삶의 가장 연약한 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붙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성도들의 인생 길을 열어 가십니다. 길 잃은 양과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갈 때,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며, 그분의 뜻을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갈 2:20) 하나님 안에서 새생명을 부여받고 말씀을 따라갈때에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사순절 기간동안 오늘의 양식의 말씀 구절을 필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암송하다 보면, 말씀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고 어느날 내게 다가온 말씀 한 구절이 믿음의 여정에서의 방향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깨닫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 매 순간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셨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한주 동안도 주님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하나님 말씀에 붙들려 보시고 하나님 말씀을 마음 깊이 담아 보시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의 언어가 되고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 되어 말씀을 삶속에서 지키고 살아 간다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변화 될 것입니다.

03. 30. 2025 주일설교

(사순절 네번째 주일)

죄 사함의 복

Blessing of Forgiveness

시편 32:1-11

32:1 복되도다! 지은 죄를 용서받고, 그 죄가 덮어진 사람들이여. 2 복되도다! 마음에 거짓됨이 없어, 주께서 그 죄를 묻지 않는 사람들이여. 3 내가 입을 다문 채 지은 죄를 주께 다 토하지 않았을 때는, 내 마음이 온종일 괴로워 뼈 마디마디가 녹아내렸습니다. 4 그때에는 주께서 밤낮으로 이 몸을 무겁게 짓누르시니, 여름 뙤약볕에 물이 말라 버리듯 내 기력이 모조리 빠져 나갔습니다. (셀라) 5 마침내 이 몸은 ‘내 허물을 주께 다 고백하리라.’ 마음먹고, 내 죄를 감추지 않고 낱낱이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주께서는 내가 저지른 모든 허물과 잘못을 기꺼이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셀라) 6 ○ 그러므로 주를 믿는 경건한 자들이여,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주께 간절히 기도하여라. 고난이 홍수처럼 밀어닥칠지라도, 그들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7 주는 나의 피난처, 모든 재난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분! 그러므로 내가 소리 높여 주의 구원을 노래하리라. (셀라) 8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내가 몸소 너희에게 가르쳐 주리라. 너희에게서 나의 두 눈을 항상 떼지 않고, 너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리라 9 그러니 너희는 재갈이나 굴레를 씌워야만 붙잡아둘 수 있는 분별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말아라.” 하셨도다. 10 진실로 악인들에게는 괴로운 일이 많겠지만, 주를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는 주의 한결같은 사랑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11 올바르게 살아가는 너희 의로운 자들아,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음을 올곧게 먹은 너희 정직한 자들아, 다 함께 기쁨으로 크게 소리를 질러라. (쉬운말 성경)

1 Oh, what joy for those
    whose disobedience is forgiven,
    whose sin is put out of sight!
2 Yes, what joy for those
    whose record the Lord has cleared of guilt,[b]
    whose lives are lived in complete honesty!
3 When I refused to confess my sin,
    my body wasted away,
    and I groaned all day long.
4 Day and night your hand of discipline was heavy on me.
    My strength evaporated like water in the summer heat. Interlude

5 Finally, I confessed all my sins to you
    and stopped trying to hide my guilt.
I said to myself, “I will confess my rebellion to the Lord.”
    And you forgave me! All my guilt is gone. Interlude

6 Therefore, let all the godly pray to you while there is still time,
    that they may not drown in the floodwaters of judgment.
7 For you are my hiding place;
    you protect me from trouble.
    You surround me with songs of victory. Interlude

8 The Lord says, “I will guide you along the best pathway for your life.
    I will advise you and watch over you.
9 Do not be like a senseless horse or mule
    that needs a bit and bridle to keep it under control.”

10 Many sorrows come to the wicked,
    but unfailing love surrounds those who trust the Lord.
11 So rejoice in the Lord and be glad, all you who obey him!
    Shout for joy, all you whose hearts are pure!(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흔히 ‘복’ 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결과적인 복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런데 재물을 많이 가졌어도, 원하는 것을 다 이뤘다고 해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죄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늘 성경은 다른 관점의 복을 제시합니다. 죄 사함의 복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32편은 “복되도다!”라는 선언과 그 복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성경은 본래 인간의 상태를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체질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한구절씩만 살펴보면, 시편 51편 5절입니다. “51:5 진실로 이 몸은 죄 가운데서 태어났고,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갈 때, 안개가 덮혀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것만 같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들어오면 막연했던 삶의 길 위에서도 인도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다시 시작할 새힘을 주십니다. 죄를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죄는 우리를 깊은 어둠의 웅덩이에 빠뜨려 고통과 절망 속에서 희망 없이 머물게 만듭니다. 양 손과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그 짐을 내려 놓았을때의 가벼움과 홀가분함은 이루 말할수 없을 것입니다. 죄 사함의 복은 이처럼 죄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회복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내려놓지 못했던 인생의 짐과 무게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평안과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더 이상 우리를 불안과 어둠 속에 갇히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양심 안에 죄에 대해 민감성을 지니게 됩니다. 죄의 뿌리가 끊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막혀있던 죄와 사망에서 풀려나 예수 안에서 기쁨과 평안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주 안에서 내 것을 내어주기 위해 다시 태어났습니다. 구원의 복은 자기중심적 삶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견디고 참는 삶입니다. 우리가 성도답게 살면 됩니다. 그렇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려 두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약의 제사를 통해 이 죄사함의 복을 가르쳐 주셨고,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배우며 살아갑니다. 고난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마음을 평생을 통해 이해하며 살아갑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날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분명히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시편 32편은 참회시입니다. 성서학자들은 다윗이 밧세바 간음 사건 이후 참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숨겼을때의 고백입니다. 죄로 인해서 나의 마음이 온종일 괴롭고, 뼈 마디마디가 녹아 내렸습니다. 죄가 밤낮으로 이 몸을 무겁게 짖눌러서, 마치 여름 뙤약볕에 물이 말라 버리듯 기력이 모조리 빠지는 것처럼 힘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죄는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바울도 자신 안에 이 죄성을 자각하고 로마서 7장에서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라고 탄식합니다. 뿌리 깊은 인간의 죄성을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8장에서는 전혀 다른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바울이 깨닫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죄와 사망의 힘으로 부터 벗어나게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절망감 속에 죽어가는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때 부터 ‘내가 너를 위해 일하고 있다. 너는 내 아들이란다. 넘어져도 괜찮으니 다시 회복하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며 일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는 400년을 기다리며 일하셨고, 수천년에 걸쳐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자기백성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복은 우리가 한 만큼 받는 복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여 승자가 되면 박수를 받고 상을 받는 세상의 기준에서의 복이 아닙니다.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하며 이 은혜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함께 아파하며 내것을 나눠 주는 것이 복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으로 모두가 복 있는 사람임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로 받아주셨기 때문에 신앙의 세계는 예수 안에서 누군가 죽어져야 지체들이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성도는 이 일을 위하여 죽기까지 헌신하도록 부름받는 사람들입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 ~ 1737)는 현악기를 제조하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제작한 악기들은 엄청난 가격에 팔렸습니다. 2006년 영국에서는 바이올린이 대략 43억원에 낙찰되었고, 2011년에는 바이올린이 대략 190억원에 낙찰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가 만든 현악기들은 긴 세월이 흘러도 아름다운 소리를 냈기 때문입니다. 소리의 비결은 장인의 인내와 탁월한 솜씨이며, 그가 사용했던 악기의 재료입니다. 혹독한 겨울 바람을 견뎌낸 나무의 재료가 악기의 품질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된 겁니다. 성도의 삶에서 만나는 모든 고난과 인생의 무거운 십자가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날때에 아름다운 찬양이 될것입니다.

2절은 죄사함을 받는 자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거짓됨이 없어, 주께서 그 죄를 묻지 않는 사람들이 복되도다” 암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누워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렵지 않습니까? 치료받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누워야 합니다. 두렵더라도 치료받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서 의사의 손길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환자가 자신의 옷을 그대로 입고 수술을 받겠다고 고집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 사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죄를 숨김없이 고백하는 자가 누리는 복이 있습니다. 6 ○ 그러므로 주를 믿는 경건한 자들이여,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주께 간절히 기도하여라. 고난이 홍수처럼 밀어닥칠지라도, 그들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는 모든 상황이 주를 만날 기회가 됩니다. 마음이 답답할때, 고난이 홍수처럼 밀어닥칠때, 하나님은 믿는자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주어진 상황을 통과하여 주님께서 이루신 부활의 승리로 인도해 주십니다. 홍수가 나면 모든 것을 휩쓸고 갑니다. 노아의 홍수를 떠올려 보세요. 하나님은 죄로 인한 결과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방주를 만들고 피할 길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방주를 짓는 노아를 조롱했습니다. 비가 온다고? 홍수가 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의 길을 걷는 노아는 비난을 사랑으로 견디며 방주를 지었습니다. 말씀을 믿고 배를 짓는 동안 사람들의 조롱을 인내로 이겨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지속적으로 실천 할때 노아에게 사람의 소리들이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을 이기신 사랑입니다. 이 구원의 복이 다윗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이 피난처가 되시고(7절),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목자가 되어 주심을 고백합니다.(8절)

7 주는 나의 피난처, 모든 재난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분! 그러므로 내가 소리 높여 주의 구원을 노래하리라. (셀라) 8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내가 몸소 너희에게 가르쳐 주리라. 너희에게서 나의 두 눈을 항상 떼지 않고, 너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리라.

9 그러니 너희는 재갈이나 굴레를 씌워야만 붙잡아둘 수 있는 분별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말아라.” 하셨도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살아갈 자유가 있습니다. 재갈이나 굴레를 씌워야만 길들여지는 말이나 노새가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다양한 방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환경에 놓여져 있기에 성령의 감동으로 양심의 가책을 주시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때 깨닫게도 하십니다. 완고한 마음을 가진 자는 결국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해서도 돌이키게 하시지만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평안과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잘한 것, 자랑할 만한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함과 연약함 속에서도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10 진실로 악인들에게는 괴로운 일이 많겠지만, 주를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는 주의 한결같은 사랑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다윗의 참회시는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11 올바르게 살아가는 너희 의로운 자들아,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음을 올곧게 먹은 너희 정직한 자들아, 다 함께 기쁨으로 크게 소리를 질러라. 죄 사함의 은혜는 슬픔으로 그치지 않고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의 충신의 아내를 범하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해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한 그는 결코 완벽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언급합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다. 그는 분명 내 뜻을 다 이룰 것이다.’(행 13:22)

죄사함의 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들이 지닌 소중한 특권입니다. 다윗의 참회의 간증이 우리의 노래가 되고, 주를 믿는 모든 성도의 노래가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죄를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처럼 하나님께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예배를 마치고 성전을 떠나기 전 내안에 숨겨진 죄와 마음을 짓누르는 삶의 짐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고백해 보시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 가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87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찬송시는 19세기 아일랜드 출신의 조셉 스크라이븐(Joseph Scriven 1819~1886)에 의해 작사되었습니다. 젊어서 두번이나 사랑했던 약혼자를 잃고 평생을 혼자 살며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애쓰며 쓴 시라는 유래도 있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중병에 걸린 후 낙심했던 스크라이븐이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작사한 것으로 보는 유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삶속에서 경험된 신앙의 고백이요. 주님께 드리는 찬송시입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하나님은 죄사함의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특별한 상황에서는 특별한 사람으로 준비시켜 가실 것이고,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는 위로와 소망이 되어 새로운 삶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한주도 일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며 기쁨을 나누시고 사랑을 실천해 보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