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8 2026 주일설교

사순절 세번째 주일

오늘의 예배

Today’s Worship

시편 95편

95:1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같이 주님께 기쁨의 노래를 불러 드리자. 소리 높여 우리 구원의 반석이신 주님을 찬양하자. 2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분께 나아가자. 그분을 기리는 즐거운 찬송을 부르자. 3 주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4 깊디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디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이다. 5 주께서 바다를 지으셨으니 바다도 주님의 것이요, 마른 땅도 주님이 손수 빚으신 것이다. 6 그러므로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함께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 7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이요 그분께서 돌보시는 양 떼라. 오늘날 너희는 주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 8 ○ “므리바에서 너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맛사에서 너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희는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고 완고한 마음을 품지 말아라. 9 그때에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들을 똑똑히 보고서도, 나를 거듭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다. 10 그러므로 나는 40년 동안이나 그 백성들에게 분노하며 말하기를 ‘저들은 마음이 삐뚤어진 백성이요, 내 길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이로다.’ 하였고, 11 또 나는 화가 나서 맹세하기를 ‘저들은 내가 편히 쉬라고 저들에게 허락한 그 땅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쉬운말 성경)

1 Come, let us sing to the Lord!
    Let us shout joyfully to the Rock of our salvation.
2 Let us come to him with thanksgiving.
    Let us sing psalms of praise to him.
3 For the Lord is a great God,
    a great King above all gods.
4 He holds in his hands the depths of the earth
    and the mightiest mountains.
5 The sea belongs to him, for he made it.
    His hands formed the dry land, too.

6 Come, let us worship and bow down.
    Let us kneel before the Lord our maker,
7     for he is our God.
We are the people he watches over,
    the flock under his care.If only you would listen to his voice today!
8 The Lord says, “Don’t harden your hearts as Israel did at Meribah,
    as they did at Massah in the wilderness.
9 For there your ancestors tested and tried my patience,
    even though they saw everything I did.
10 For forty years I was angry with them, and I said,
‘They are a people whose hearts turn away from me.
    They refuse to do what I tell them.’
11 So in my anger I took an oath:
    ‘They will never enter my place of rest.’”(New Living Translation)

산을 오르는 사람은 정상을 향합니다. 입구에서 첫 발을 내딛을 때와 정상까지 올랐을때의 감격은 전혀 다릅니다. 같은 산이지만 도달해 본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올랐습니다. 믿음의 길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들 이삭과 함께 올라갑니다. 그리고 정상에서 순종의 손을 들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양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성소로 올라가며 시편 95편을 함께 노래했을 것으로 봅니다. 1절에서 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는 마음으로 성소 안으로 올라갑니다. 그 첫단어가 ‘오라’입니다.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같이 주님께 기쁨의 노래를 불러 드리자” 6절도 보시면,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함께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라’는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3절로 5절은 주를 처음 만난 기쁨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3 주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4 깊디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디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이다. 5 주께서 바다를 지으셨으니 바다도 주님의 것이요, 마른 땅도 주님이 손수 빚으신 것이다.’ 넓은 바다도 우리가 딛고 살아가는 땅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빚으셨기에 성도는 믿음으로 하루하루 땅을 밟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작은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합니다. 오늘날 미세한 반도체 칩 하나에 세상 모든 정보가 담기고, 작은 화면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들여다 보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잃어버린 시대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믿음을 통해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됩니다. 그리고 그 동행 안에서 우리를 향해 품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여정입니다.

7절에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라는 선언과 함께 시편의 분위기가 갑자기 전환됩니다. 그리고 8절부터는 광야에서의 사건, 곧 므리바와 맛사에서 조상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했던 일을 상기시켜 줍니다. 므리바(מְרִיבָה)는 ‘다툼’, 맛사(מַסָּה)는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물이 없자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다투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만나를 먹었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앞서 가는 것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출 17:7)를 물었습니다. 므리바와 맛사에서의 사건은 하나님을 불신하며 불평했던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38년을 광야에서 연단받고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약속의 땅을 보지 못했습니다. 시편 95편을 묵상하며 우리가 기억해야 교훈을 나누겠습니다.

첫째, ”오늘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완고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의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할 때 시편 95편을 인용합니다. “7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는다면, 8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시험받던 기간에 반역했던 것처럼,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히3:7-8)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4장에서도 히브리서 기자는 다윗을 통해 ‘오늘의 예배’가 무엇인지 다시금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시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그 말에 순종하고 너희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히 4:7). 우리의 ‘오늘’이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단어 ‘하이욤’은 지금 주의 음성을 듣고 현재를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어제의 말씀으로 오늘을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예배’는 매일 주시는 새로운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매일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십자가에 이끌림으로 우리의 강팍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불평과 불신의 언어가 시작됩니다. 예배는 주의 음성을 ‘오늘’ 듣고, ‘지금’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주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광야 1세대는 하나님을 불신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기억하고 마음을 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완고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자리를 채우십니다. 7절을 보시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이요 그분께서 돌보시는 양 떼라. 오늘날 너희는 주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

둘째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입니다.

‘기르시다’의 히브리어 마르이트(מַרְעִית)를 영어성경은 pasture로 번역했습니다. 풀밭, 목초지입니다. 목초지에서 풀을 먹고 살아가는 양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양식이 되시는 것입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들이 먹을 풀밭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에게 “나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기 위해 왔다”라고 말씀셨습니다. 양은 주의 말씀을 들을때 영혼이 살찌웁니다. 주의 자녀들의 영혼을 살찌우는 것은 세상의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업에 성공한 사람도, 실패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태어난 아이를 안고 헌아예배를 드리는 부부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이들도 주의 말씀을 듣고 영혼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조용히 병이 자라납니다. 반면에 주가 인도하는 양들은 깊은 골짜기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은 하나님의 훈련이었습니다. 광야에 풀이 없으니, 하나님은 매일 아침 어김없이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광야가 없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알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광야의 시간에 있는 이들에게 그 은혜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광야는 어제 저장해 놓은 은혜로 살수 없는 땅입니다. 욕심을 낼때 그 만나에 악취가 나고 벌레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만나로 사는 것이 아닌 오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내 삶의 안정을 위해 살아갑니다. 집을 장만하고, 자녀를 위해 많은 것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선명하던 목자의 음성이, 삶이 안정될수록 왜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것일까요? 하루의 양식이 넉넉해질수록 왜 기도의 절박함은 사라져 가는 것일까요? 아는 것은 많아지고 경험도 깊어지는데 하나님께 무릎 꿇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그러나 양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옛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고, 마음이 굳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현실의 문제를 넘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는 시간이 지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진 사람의 손을 잡아 주고,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함께 걸어 주며, 아직 길을 잡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의 책임입니다.

셋째 문제는 밖에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8-10)

기적을 보았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마음이 굳어진 것은 기적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기적이 아니라 참된 순종입니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 그것이 우리가 지금 드려야 할 ‘오늘의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을 주셨다면 우리에겐 오늘을 살아내야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내려 놓아야 합니까? 기도의 중심에 있었던 나만을 위한 날카로운 검, 겸손한 척 포장된 교만, 손과 발은 움직이지만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린 종교적 형식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왜 예수여야만 했는지,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다시 진지하게 그 음성 앞에 서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예배 드리러 올라가는 공동체에게 굳이 광야의 실패를 상기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배하는 자들도 동일한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기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여전히 완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귀로 듣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거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오늘 너희에게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의 설교 가운데 「거의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이라는 설교문이 있습니다. 웨슬리는 Almost Christian을 겉으로는 신앙의 모든 모양을 갖추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중심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배하고 기도하지만, 그 은혜가 삶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려드려야 할 예배는 내 삶의 ‘거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거의 다 온 것 같지만, 거의 다 드리는 것 같지만, 거의 다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 같지만 내 전부를 드리지 못하는 그 자리에서 오늘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어제의 양식으로 살 수 없었고, 오늘 주시는 믿음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려는 유혹 앞에 서 있었습니다. 끝까지 구하십시오, 찾으십시오, 두드리십시오.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입니다.

배척받고 조롱받으신 예수께서 그 길을 먼저 걸으셨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드럽게 마음을 열고, 그 길 위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나의 몸은 주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점점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씀보다,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말에 더 끌립니다.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보다 내 상처를 공감해 주는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 편리한 도구가 많아질수록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헌신은 점점 가벼워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13 도리어 여러분은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매일의 그날그날 동안에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마음이 완고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히3:13)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고 얻게 되는 그 어떤 것도 구원을 보증해 주지 않습니다. 신실한 성도는 서로가 깨워주고 복음이 치료제가 될수 있도록 서로를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부부도 서로의 정서적 외로움만을 채워주는 관계라면 세상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부부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도록 서로를 깨우고 ‘오늘의 복음’으로 서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이 시간 지금 이곳은 거룩한 공간입니다. 시편 기자가 전하는 ‘주의 음성을 들으라’는 권면 앞에 더 진지하게 마음에 새기며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닫혀있던 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종의 자리가 어디인지,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나 홀로 씨름하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던 것이 무엇입니까?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가 함께 올라가며 주 앞에 엎드렸습니다. 엎드려 고개를 숙일때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요, 주님께서 우리를 풀밭이 되시고 풍성한 목초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라’로 시작된 시편 95편은 ‘들어가지 못하리라’로 끝이 납니다. 광야 세대에게 닫혔던 그 문이 우리에게는 ‘오늘’로 열려 있습니다. 그 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열어 주셨습니다. 깊고 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고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바다를 지으신 분, 마른 땅을 손수 빚으신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의 풀밭이 되시고 풍성한 목초가 되어 끝까지 돌보아 주십니다.  이 ‘오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3 01 2026 주일설교

사순절 두번째 주일

고개를 들어 바라보라

Look Up and Live

요한복음 3:8-15

3:8 바람은 제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법이오. 당신은 바람소리를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불어온 것인지, 다음에는 그 바람이 어디로 갈 것인지 알 수 없소.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도 이와 같소.” 3:9 니고데모가 다시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3: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오? 3:11 내가 진정으로 당신에게 말하겠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 말하고, 또 우리가 본 것에 대해 증언하오. 하지만 당신들은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소. 3:12 내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말해도 당신들이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면 당신들이 어찌 믿을 수 있겠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외에는 아무도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소. 3:14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높이 쳐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높이 들려져야 하오. 3:15 그것은, 인자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오.(쉬운말 성경)

8 The wind blows wherever it wants. Just as you can hear the wind but can’t tell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is going, so you can’t explain how people are born of the Spirit.” 9 “How are these things possible?” Nicodemus asked. 10 Jesus replied, “You are a respected Jewish teacher, and yet you don’t understand these things? 11 I assure you, we tell you what we know and have seen, and yet you won’t believe our testimony. 12 But if you don’t believe me when I tell you about earthly things, how can you possibly believe if I tell you about heavenly things? 13 No one has ever gone to heaven and returned. But the Son of Man[e] has come down from heaven. 14 And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15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New Living Translation)

지난주 창세기 3장을 통해 뱀에게 유혹당한 아담과 하와를 보았습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그 탐스러운 열매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만은 ‘먹지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이후 단단한 사람도 냉정한 사람도 순하고 착한 사람도 죄의 기원 앞에서 누구도 벗어날 사람이 없기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삶의 중심에 두고 걷자고 권면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는 유대사회에서 유력한 지도자였고, 율법교육도 철저하게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간 것은 그의 영적인 어둠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표적을 보고(3:2)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았기에 그 말씀을 더 알고 싶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찾아 온 밤이 우리의 인생에도 있을 것입니다. 생각했던 답이 흔들리고 낯설게 느껴지는 밤, 하나님의 뜻이 느껴지지 않는 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인생의 밤에 찾아오시며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초대하십니다. 신앙의 연수가 쌓이고 성경적 지식이 쌓일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식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깨어 살아가라는 도전을 주십니다. 내게 익숙한 예배의 자리, 말씀, 기도의 자리가 더 이상 새롭지 않다고 느껴질 때에도 성령의 바람은 멈추지 않습니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독자적으로 붑니다. 스스로 시간을 결정하기 때문에 언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알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이 이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야고보 사도는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라고 표현하고(야 1:18), 바울은 창조하다의 뜻을 담아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단어로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이 무엇일까요?

1.거듭남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 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 “내가 진정으로 당신에게 말하겠소.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 아노덴(ἄνωθεν)이라는 단어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다시’라는 뜻입니다.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율법을 교육받은 니고데모는 구원을 위해 무엇을 쌓아올려야 한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다시”라는 것은 다시는 삶의 중심이 이전처럼 살수 없도록 바뀐것입니다. 아노덴의 두번째 의미는 ‘위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는 말씀처럼 위로 부터 다시 주어지는 영적인 삶을 의미입니다.

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깊은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0.1%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끝까지 스스로 빠져나오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결국 나올 수 없었습니다. 내 삶이 지금 척박하고 절박하든, 평온하고 아무 문제가 없든 성경은 인간이 영적으로 죽어 있어서(엡 2:1),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손을 내밀어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이것이 곧 거듭남입니다.

또 거듭남은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형질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그 순간 아무것도 스스로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심겨졌기에 세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점점 알아가듯이, 거듭난 사람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단 하나,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고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인자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오. 진실로 그렇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소. 그것은,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오.”(요 3:15-16) 예수님을 믿는 누구든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라는 말이 가끔 마음에 걸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더 열심히 하고 노력한 사람이 인정 받고 성과를 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기준으로 신앙의 자리에 서면 불편함이 생길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더 오래 믿었고, 더 많이 헌신했고, 더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그 자리에 서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가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믿음은 내가 쌓아 올린 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헌신과 내 공로를 내려놓고 그분을 붙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는 우리의 자격과 공로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은혜를 경험하고 이해하면 대부분의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믿음은 내 공로로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내 삶의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안에 감추어져 있던 나의 의로움과 교만을 내려놓고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삶속에서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연약해지는 그 자리에 십자가를 세워주셨습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 스스로 삶의 문턱을 경험하고 실수를 배우고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 때가 옵니다. 그때 부모는 아이의 부족함을 대신 채워줄 수 없고 문턱을 대신 넘어줄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말없이 안아주고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살아가지만 결국 품에 안고 기도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를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그 자리, 실수하여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더 깊이 만나주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능통한 니고데모에게 그가 알고 있었던 민수기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3:14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높이 쳐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높이 들려져야 하오. 3:15 그것은, 인자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오.”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장대에 매단 것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죽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광야의 뱀에게 물린 것은 심판의 자리 한가운데에 있는 백성들을 위해 구원의 길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릴수만 있다면 예수께서 기꺼이 십자가에 달릴것이니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이뤄 놓으신 방법을 믿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내려놓지 못한 것들을 만납니다. 그 불편한 자리가 우리를 멈추게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을 닮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이 생명의 원리가 계속 작동이 됩니다. 그래서 더 깊이 은혜를 발견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들려지다’ 휩소데나이 (ὑψωθῆναι)는 단순히 위로 올려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 그것이 곧 높임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설교 하시면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조차 이것이 어떤 죽음을 가리키는지 물었을 만큼, 십자가는 이해하기 어려운 자리였습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오? 3:11 내가 진정으로 당신에게 말하겠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 말하고, 또 우리가 본 것에 대해 증언하오. 하지만 당신들은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소. 3:12 내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말해도 당신들이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면 당신들이 어찌 믿을 수 있겠소?

쌓아온 지식으로는 이 일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이 일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영적인 어둠 속에서 어디로 가는지 조차 알지 못하던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기에 십자가의 능력에 이끌림 받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쌓아 올려서 하나님의 뜻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생의 광야 길에서 불평과 낙심의 자리, 스스로 해결할수 없는 자리에 놓일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실패하면 안되고 약해지지 말라고 흔들리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광야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가 버티고 감당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 삶의 민낯을 만나는 자리, 연약함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시작됩니다. 환경 앞에 고개 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분명 로마의 처형 도구였지만 하나님은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오래 믿었는지, 잘 살아 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고개를 들었는지를 보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인자를 믿는 순간, 이미 시작되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일을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바람을 만들지 못하지만 그 바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가장 낮은 자리가 영광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시작된 생명을 품고 걷는 사람들입니다. 고개를 들고 십자가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다시 살아납니다.

0215 2026 주일설교

사순절 첫번째 주일

Standing Before God

창세기 3:1-7

3:1 뱀은 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어떠한 들짐승보다 가장 교활하고 약삭빨랐다. 뱀이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며?” 3:2 여자가 뱀에게 말했다. “아니야,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먹어도 돼. 3:3 하지만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먹으면 안 돼. 하나님께서 그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어. 그랬다가는 죽게 될 거라고 하셨어.” 3:4 뱀이 여자에게 말했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을걸. 3:5 너희가 그걸 먹으면, 그 날로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거야. 그래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거야. 하나님은 그걸 아시고, 너희더러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거야.” 3:6 ○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쳐다보니 정말 먹음직스러웠고, 보기에도 탐스러웠다. 과연 사람을 지혜롭게 해주는 열매처럼 보였다. 여자는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먹고는, 자기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 열매를 먹었다. 3:7 그러자 두 사람 모두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치마처럼 몸에 둘렀다. (쉬운말 성경)

1 The serpent was the shrewdest of all the wild animals the Lord God had made. One day he asked the woman, “Did God really say you must not eat the fruit from any of the trees in the garden?” 2 “Of course we may eat fruit from the trees in the garden,” the woman replied. 3 “It’s only the fruit from the tree in the middle of the garden that we are not allowed to eat. God said, ‘You must not eat it or even touch it; if you do, you will die.’” 4 “You won’t die!” the serpent replied to the woman. 5 “God knows that your eyes will be opened as soon as you eat it, and you will be like God, knowing both good and evil.”6 The woman was convinced. She saw that the tree was beautiful and its fruit looked delicious, and she wanted the wisdom it would give her. So she took some of the fruit and ate it. Then she gave some to her husband, who was with her, and he ate it, too. 7 At that moment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suddenly felt shame at their nakedness. So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to cover themselves.(New Living Translation)

02 15 2026 주일설교

주현 후 마지막 주/ 변화주일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Witnessed with Our Own Eyes

베드로후서 1:16~21

16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지어 낸 근사한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위엄 있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17 장엄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가 그로 인해 무척 기쁘다.”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셨습니다. 18 우리는 그 음성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거룩한 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을 때 들은 그 음성은 분명히 하늘로부터 울려 온 것이었습니다. 19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예언자들이 전한 말씀을 보다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 말씀을 가까이 하고 따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그들이 전해 준 말씀은 어두움을 환히 밝혀 주는 빛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빛은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동이 트고, 아침 샛별이 환히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줄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분명히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떠한 예언의 말씀도 예언자가 마음대로 해석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며, 21사람의 뜻대로 말하고 싶은 것을 적어 놓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 놓았습니다. (쉬운성경)

16 For we were not making up clever stories when we told you about the powerful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We saw his majestic splendor with our own eyes 17 when he received honor and glory from God the Father. The voice from the majestic glory of God said to him, “This is my dearly loved Son, who brings me great joy.”[f] 18 We ourselves heard that voice from heaven when we were with him on the holy mountain. 19 Because of that experience, we have even greater confidence in the message proclaimed by the prophets. You must pay close attention to what they wrote, for their words are like a lamp shining in a dark place—until the Day dawns, and Christ the Morning Star shines[g] in your hearts. 20 Above all, you must realize that no prophecy in Scripture ever came from the prophet’s own understanding,[h] 21 or from human initiative. No, those prophets were moved by the Holy Spirit, and they spoke from God.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날은 정보가 넘쳐나지만 오히려 혼란스럽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정보는 많아졌는데 진실을 찾는 것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내가 선호하는 영상들을 보여주고 내가 걸어온 길. 내 의견과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만 머물게 합니다. 더 많이 알고 볼수록 불안해 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의 확신이 더 크신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고 시야를 좁아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쓰던 그 때에도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흔들었고 성도들의 마음에는 깊은 의심이 들어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목격된 진리라고 선언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목격된 진리입니다. (16-19)

성도들에게 지도는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말씀은 수천년에 걸쳐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나침반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기록자로 사람을 삼으셨지만 인간의 뜻을 배제한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도록 성령을 통해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후서1장 16-21절은 그 말씀의 확실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를 기록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직접 올라갔던 변화산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증언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셨는데, 그곳에서 주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영광스런 예수를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여기 있으니 정말로 좋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초막 세 채를 지어서 하나는 주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마 17:1-4) 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지만 그 얼굴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광채를 보았고 하늘로부터 직접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변화산 이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지만 산에서 내려온 이후에 예수께서 기도하실때 육신이 피곤해서 잠들어 있었고, 대제사장의 뜰에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패속에서도 말씀이 성취된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방향은 분명해졌지만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로 결단할때에도 밤이 새도록 잡은 것이 없었지만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렸을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던 것도 말씀의 경험입니다.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오실때에도 말씀을 믿고 물 위를 걸었지만 바람을 보고 두려워 물속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경험을 토대로 유언처럼 남긴 편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1장 13절 14절을 보시면, ” 1:13 내가 이 육신의 천막에 살고 있는 동안만큼은,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워 늘 새롭게 해주는 것이 나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1:14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보여 주신 대로, 내가 이 육신의 천막을 벗고 세상을 떠나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무엇을 가장 강조하고 싶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희망의 신학’을 전개한 독일의 개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은 말합니다. “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세워진 역사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생생히 회상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활기차게 희망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회상하게 된다. 이 회상과 희망의 현재적인 능력을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라고 부른다.” 과거의 경험이 어떻게 미래의 확신이 될수 있습니까? 교회는 완성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기록된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 위에 다시 일어서는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이 익명의 목격자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며 시작합니다.(눅1:2)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고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 16절로 19절을 보시겠습니다. “16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지어 낸 근사한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위엄 있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17 장엄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가 그로 인해 무척 기쁘다.”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셨습니다. 18 우리는 그 음성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거룩한 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을 때 들은 그 음성은 분명히 하늘로부터 울려 온 것이었습니다. 19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예언자들이 전한 말씀을 보다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 말씀을 가까이 하고 따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그들이 전해 준 말씀은 어두움을 환히 밝혀 주는 빛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빛은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동이 트고, 아침 샛별이 환히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줄 것입니다.” 어둠은 아직 완성되지 않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입니다. 샛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의미합니다. 완성될 마지막 날입니다. 등불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말씀입니다. 즉 성도는 등불을 들고 세상을 밝히며 샛별이 환히 떠오를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의 권위를 믿고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2.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20-21)

성령께서는 말씀을 의지할때 실패속에서도 깨닫게 하십니다. 문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을 알아도 베드로처럼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신뢰한다면 이것은 실패가 아니라 영적 훈련입니다. 은혜는 받는데 용서할 힘은 사라지고 사랑은 배웠는데 사랑할 힘은 없습니다. 부르심의 사명 앞에서 거룩한 부담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섬김의 자리에서 나의 정성과 시간을 내어드리는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롬7:19) 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무너진다고 생각했는데, 십자가로 나아가지 않고 여전히 내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도, 주님을 위해 나의 시간을 내어 드리는 일도 내 힘이 아니라 영적인 공급을 다시 받아야 합니다.

이번주 수요일부터 우리는 사순절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사순절은 세상속에서 살아가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서 주님을 깊이 바라보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의 자리는 단순히 개인의 영성을 위한 기도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다시 붙들어 주는 시간입니다. 더 좋은 사람으로 살기 위한 결단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믿음의 성도가 되는 시간입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에서 우리의 약함을 발견합니다. 그 속에서 실패하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실패와 아픔의 자리도 신앙의 여정의 과정입니다.

각자의 기도의 자리에서 사순절 시기에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변화산에 머물자는 베드로의 제안을 거절하시고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십자가의 길로 가셔야 했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지만 또한 그 길은 부활로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상처와 고통, 비난과 오해를 온 몸으로 견뎌야 했던 자리를 지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셔야 했던 자리였습니다.

사순절 40일간의 시간은 우리가 사랑하고 믿는 예수께서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신 그 길을 동참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깊은 어둠의 시간속에서 우리의 내면 깊이 감춰둔 죄가 드러나고,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재발견하는 시간이 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힘은 언제나 무너지기 쉽고, 누군가 뾰족한 말로 건드리면 터지는 물풍선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경건은 우리의 연약함을 붙들어 줍니다. 경건의 훈련을 통해 나의 죄를 마주하고 연약함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경건은 우리의 마음이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으로 찬양과 감사의 자리에 살게 합니다.  

인생에 간증이 많은 사람을 보면,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손이 인도하심을 깨닫기 때문에 그 사람들 곁에 있으면 함께 있는 사람도 기쁨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땅속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경제적인 불안함이 있습니다. 믿음의 정체성의 혼란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낯선 땅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두려움 속에 있을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이 자리에 보내시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청년의 때에 뜨겁게 하나님을 만나고 공동체 안에서 쌓여가던 신앙이 결혼을 하고 현실과 부딪힙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함께여서 더 단단해질 것 같지만 같이 무너질 때도 많습니다. 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기도할 시간도 봉사할 여력도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직장을 다니며 내가 살아온 삶의 패턴을 내려놓고 경건함을 유지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관계 속에서의 반복되는 상처, 영혼의 갈증이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20 그러므로 분명히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떠한 예언의 말씀도 예언자가 마음대로 해석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며,  “사람의 뜻대로 말하고 싶은 것을 적어 놓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 놓았습니다.”(벧후1:20-21)

우리는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미 주어진 진리는 충분하고 완전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죄책감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다릅니다. 복음은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여 우리를 살리고 회복하게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남겨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완성될 뿐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함께 걸어가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이제 우리가 들고 있던 믿음의 거울의 방향을 나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나를 비추어야 합니다. 사순절의 40일은 완벽한 성도로 살아가자는 권면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십자가를 다시 만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교회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비추며 함께 걸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은 주님을 닮아가는 길입니다. 절대 넘어지지 않는 삶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길입니다. 옆에 앉아있는 지체들, 오랜 세월 함께 걸어준 신앙의 선배들, 우리의 걸음을 함께 따라오는 다음 세대들과 함께 걷게 하십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하나됨을 배우는 시간이 바로 함께 예배하는 자리입니다.

은혜는 우리 안에 어둠이 머물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십자가의 은혜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께서 날이 밝기도 전에 한적한 곳으로 홀로 나아가 기도하신 그 자리, 그 은혜가 지금 우리가 찾아가야 할 자리입니다.  아이를 키우며 진짜 부모의 마음을 알아갈 때 성령이 인내를 가르쳐줍니다. 우울하고 외로워 길을 잃고 헤매일 때 성령이 소망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의 길을 따라갈 때 우리의 어두웠던 밤을 비추는 등불을 만나게 됩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말씀의 등불을 켜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기쁨으로 믿음의 경주를 함께 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02 08 2026 주일설교

주현후 다섯번째 주일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마태복음 5:13~16

5:13 ○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쓸모없이 버려져, 사람들에게 다만 짓밟히게 될 뿐입니다. 5:14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산 위의 마을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마련입니다. 5:15 또 등잔에 불을 밝힌 후 됫박으로 그 등잔을 덮어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방안을 환하게 밝히려면, 등잔을 등잔대 위에 얹어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5:16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빛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환히 비추십시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시오.” (쉬운말 성경)

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what good is salt if it has lost its flavor? Can you make it salty again? It will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foot as worthless. 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like a city on a hilltop that cannot be hidden. 15 No one lights a lamp and then puts it under a basket. Instead, a lamp is placed on a stand, where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16 In the same way, let your good deeds shine out for all to see, so that everyone will praise your heavenly Father. (NLT)

오늘 본문은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잘 알고 많이 들어 왔습니다. 예수님은 ‘소금처럼 살라’는 차원의 말씀이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라고 존재적 선언을 하십니다. 소금은 다이몬드처럼 화려하지 않는 작은 결정체지만 음식에 스며들면서 맛을 내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소금의 짠맛은 변하지 않습니다. 물과 기름이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서로 섞일 수 없듯이, 음식의 부패를 막는 소금은 세상 속에서 변질되지 않는 변함없는 가치를 상징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존재적 선언은 우리의 삶이 빛나거나 눈에 띄지 않아도 때로는 삶에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와도 성도의 거룩함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는 흉내내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맛을 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는 묵직한 책임으로 들려와야 합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것은 근본적인 형태의 달라짐을 의미합니다. 이 정도면 됐지가 아니라 땅의 속한 삶이 아니라 낡은 세계를 깨뜨리고 새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헬라어 μετανοέω (메타노에오)는 ‘다시’를 뜻하는 μετά (메타)와 ‘생각하다’를 뜻하는 νοέω (노에오)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핵심은 마음과 삶을 바꾸는 근본적인 변화에 있습니다.” 매주 드리는 예배는 단지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새롭게 깨닫는 시간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은 산 위에서 하신 설교입니다.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신 이유를 보여줍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라본 대상이 제자들과 군중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 전역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고, 질병과 통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이후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신 것에 매료되어 쫓아왔습니다. 복음 전파의 사역 안에는 영혼구원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아우르는 전인적 사역들임을 볼수 있습니다. 무리들은 제자들과 함께 팔복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를 직접 치유하는 곳은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를 직접 치유하는 곳은 아닙니다. 대신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치유의 정신을 따라, 물질적 어려움으로 치료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선교적 일들을 후원하고, 선교적 소명을 지닌 사람들이 되도록 말씀으로 가르치고 길러내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는 기적을 구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로운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전하시며, 너희가 나를 따른다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다면 하늘의 상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팔복을 선언하신 후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김상철 감독의 잊혀진 가방이란 영화에는 여러 선교사들의 잊혀진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는데, 한 사람씩 조명하는 다큐형식의 영화입니다. 첫번째 인물인 헬렌 로즈비어 선교사는 26세에 의대를 졸업하고 1945년 웩 선교회를 통하여 콩고로 배정되어 갔습니다. 선교활동을 하는 동안 콩고에 내전이 발생했고, 그럼에도 그 땅에 머물러 선교사역을 했는데, 오히려 그 선택은 고통스런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헬렌은 포로로 잡혀간 친구들을 잃었고, 자신 또한 반군들에게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는 깊은 상처를 겪어야 했습니다. 감사할 수 없었던 절망의 순간에 헬렌은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떠나신 것 같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헬렌 난 너를 믿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잃어버린 사명이 다시 회복이 되더랍니다. 죽음의 공포속에서 하나님께서 ‘헬렌 너 내게 감사할수 있겠니?’ 라는 음성이 들려 왔답니다. 헬렌은 석방되어 영국으로 귀국했지만 또 다시 1966년 콩고로 돌아갔고, 이후 콩고 의료선교에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도 영광과 은혜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면 인간은 상처의 틀로 세상과 내 삶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 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매일 말씀과 기도로 점검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회복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마음 안에는 선과 악이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안에 계시기에 내가 주인되려는 삶속에 끊임없는 갈등을 하는 것입니다. 그 충돌 속에서도 자신을 내어드리는 삶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소금처럼 자신을 내어주고 녹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시대 당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방법은 당시 로마황제를 섬기는 힘의 권력이 아니라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생명의 빛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변하지 않는 언약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소금처럼 녹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설교를 산 위에서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음을 전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천국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갈릴리를 두루다니시며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쫓아와 모인 무리들에게 진정한 복에 대해서 가르친 것입니다.

모든 문화와 세상의 모든 가치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과 무리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구원 계획을 드러내시며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구원 계획에 대해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증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먼저 회개한 우리는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둔 세상을 비추기 위해 교회를 세상 한 가운데 세워 주셨습니다. 이 빛은 성도들의 마음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사라질 수 없는 빛입니다. 성령의 탄식은 우리를 애통하게 하시며,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마음을 지니고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하게 합니다. 성도는 매일 기도와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서게 됩니다. 소금은 본질적으로 변할 수 없는 내면의 변화라고 한다면 빛은 좀더 도전적입니다. 빛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산 위의 마을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마을이라는 단어 헬라어 ‘폴리스,πόλις’는 도시를 뜻합니다. 작은 동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속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기존의 문명과 가치를 허물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의 도시를 재건하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의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사명감으로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성벽이 재건되자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도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산 위에 세워진 구별된 도시를 보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속하지 않았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케임브리지 한인교회는 수많은 대학가들이 즐비해 있는 도시 한복판에 세워져 있습니다. 다양한 학문을 배우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오고, 배움을 마친 후에는 자신의 영역에 진출하기 위해서 꿈을 꾸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배움의 과정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도전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 위에 선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진리의 빛으로 살아가기

오늘날 시대정신은 진리의 빛을 철저히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의 힘과 편안함, 경제적 풍요를 최고 가치로 삼고 살아갑니다. 삶의 안정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절대적 진리 조차 상대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말씀의 씨앗을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씨앗은 비록 작지만 그 나라는 자라나서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산 위에 도시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에서 진리를 따르는 힘을 기르고 세상으로 나아가 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문화 속에서, 훼손되는 생명 윤리, 물질만능주의적 경제관, 왜곡된 성윤리와 세속화된 결혼 가치관에 맞서, 우리는 절대적 진리의 기준으로 분별하며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는 삶을 게을리 하면, 우리는 세상에 동화되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셨는데 세상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 주님을 생각하면 일평생 십자가에 붙들려 살게 됩니다. 신자는 어둠에 익숙해 질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땅 가운데 완성 될 그날까지 믿음 위에 굳게 서시길 축복합니다. 약속하신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용기를 지니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비추는 거룩한 삶

세상이 점점 어그러질수록 도덕과 윤리의 기준은 쉽게 무너지고 낮아집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사람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도 우리 안에 죄를 깨닫게 하시고, 양심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며 가르치십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착한 행실을 통해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교회는 윤리, 도덕 자체를 목적 삼지 않습니다. 더 근원적인 것을 말씀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값비싼 윤리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붙들려 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 앞에 비추라’는 구절은 사람을 의식하고 마주보며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보다 더 앞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걷는 것을 의미입니다. 그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바라보며 걷는 그 빛을 바라보게 될 것이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증인들이 앞서서 그 빛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혼란과 분열속에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두신 것은 부패를 막고 생명을 지키는 사명을 안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는다면,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와 기준이라는 틀에 자신의 걸음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동화되어지고, 신앙의 변질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 주님을 바라보며 용기내어 걸어갈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발자국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길을 비추는 빛이며(시편 119:105) 성도는 그 빛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자신을 내려 놓고 주님 앞에 겸손히 순종할 때 드러나게 됩니다(고린도후서 2:15) 어떤 상황속에서도 앞서 가신 주님 따라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