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13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16주

여전히 두려워 하는 이에게

Still Trembling Before Grace

창세기 50:15-21

15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이렇게 말하였다. “요셉이 아직도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서 우리가 전에 그에게 잘못한 모든 일에 대해 앙갚음을 하면 어쩌나?” 16그리하여 그들은 요셉에게 전갈을 보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7 너희는 요셉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짓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가 형들이 저지른 죄와 잘못을 다 용서해 주기 바란다.” 그러니 이제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시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요셉은 이 말을 전해 듣고 울었다. 18그런 다음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찾아와 그 앞에 몸을 던져 엎드리며 말하였다. “우리는 아우님의 종입니다.” 19그러나 요셉은 이렇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형님들에게 벌을 주겠습니까? 20형님들은 저를 해칠 생각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좋은 일을 이루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이처럼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게 하려고 하신 일입니다. 21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형님들과 아이들을 잘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그는 형들을 안심시키고 다정한 말로 그들을 대하였다. (읽기쉬운성경)

15 But now that their father was dead, Joseph’s brothers became fearful. “Now Joseph will show his anger and pay us back for all the wrong we did to him,” they said.16 So they sent this message to Joseph: “Before your father died, he instructed us17 to say to you: ‘Please forgive your brothers for the great wrong they did to you—for their sin in treating you so cruelly.’ So we, the servants of the God of your father, beg you to forgive our sin.” When Joseph received the message, he broke down and wept.18 Then his brothers came and threw themselves down before Joseph. “Look, we are your slaves!” they said.19 But Joseph replied, “Don’t be afraid of me. Am I God, that I can punish you?20 You intended to harm me, but God intended it all for good. He brought me to this position so I could save the lives of many people.21 No, don’t be afraid. I will continue to take care of you and your children.” So he reassured them by speaking kindly to them. [Ge 50:15-21, NLT]

어릴 적 처음으로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입체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정작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없어 불로장생의 약을 찾아 온 나라를 뒤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영생을 향한 황제의 갈망과 무덤의 한 장면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도 자신의 생명은 스스로 지킬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고 가져도 자기 인생을 뜻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 또다시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을 살려준 요셉의 은혜보다 과거의 죄가 더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책감은 받은 은혜를 의심하게 하며 죄가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합니다. 

첫째, 과거의 죄보다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십시오.

요셉은 열두 아들 가운데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던 아들입니다. 형들은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열일곱 살 요셉이 자신의 꿈 이야기까지 형들에게 전하자, 그 미움은 더 깊어 졌습니다. 결국 형들은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은 이십에 팔아버렸습니다. 요셉은 노예가 되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이 흘러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고, 기근 중에 양식을 구하러 내려온 형들을 다시 만나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끌어안고 울며, 자신이 팔려온 일조차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고백했습니다. 형들이 한 일은 분명 악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넘어 일하시며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이후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온 가족을 애굽으로 불러들입니다. 가족은 다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죽음 이후 형들은 다시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이 자신들의 과거의 죄를 기억하고 앙갚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죄가 우리 안에 남긴 두려움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후에도 다시 불쑥불쑥 우리의 마음에 찾아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온 사람도 하루아침에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위기의 순간에는 과거의 죄를 더 크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붙들어 주던 안전한 울타리가 흔들리는 순간,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두려움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15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이렇게 말하였다. “요셉이 아직도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서 우리가 전에 그에게 잘못한 모든 일에 대해 앙갚음을 하면 어쩌나?” 16그리하여 그들은 요셉에게 전갈을 보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여전히 죄가 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은 요셉의 인생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20 형님들은 저를 해칠 생각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좋은 일을 이루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이처럼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게 하려고 하신 일입니다.

20절 원어를 보면, ‘형님들은 저를 해칠 생각으로’에서 ‘생각으로’와,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좋은 일을 이루시려고’에서 ‘이루시려고’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같은 동사, 같은 어근입니다. ‘하샤브'(חשׁב)는 ‘계획하다, 궁리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해치려 ‘궁리한’ 그 계획과, 하나님이 많은 생명을 살리시려 ‘계획하신’ 그 계획이, 원어에서는 동일한 단어로 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들의 악한 의도를 선한 것으로 바꾸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악은 여전히 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죄라고 부르시면서도 회복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 정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형들의 악한 계획을 넘어 생명을 살리신 하나님이, 인류의 죄를 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생명을 살리십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우리가 그 은혜를 다시 삶으로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그 가슴앓이를 알아갈수록, 우리 안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조금씩 더 깊어져 갑니다.

헨리 나우웬은 『헨리 나우웬의 공동체』에서 용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란 상대를 하나님이 아닌 존재로 그냥 두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사람들에게 매달려, 그들이 줄 수 없는 애정과 사랑을 기대한다. ‘나를 사랑해 달라’ 라고 말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폭력과 요구와 조종을 일삼게 된다. 그래서 서로 용서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삶의 매 순간 용서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답게 생명을 살리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죄 지은 사람이 있거든, 신령함을 지닌 여러분이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바울은 지금의 죄를, 오늘 본문은 지나간 죄를 다룹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은혜라는 이름으로 덮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죄 지은 사람을 정죄하여 밀어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죄는 분명하게 다루되 온유함으로 회복을 돕고, 동시에 나 자신도 살피라고 말씀합니다. 죄를 용서받는 확신으로 평생 정결한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녀 안에서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강력하게 이끄시는 복음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미움이 참 많습니다. 작은 말 한마디가 오해가 되기도 하고, 서로의 실수와 부족함이 관계의 깨어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지만 과거의 죄 안에 가두어서도 안됩니다. 잘못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회복과 화해의 길을 선택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삶으로 나타내는 모습이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정체성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17 너희는 요셉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짓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가 형들이 저지른 죄와 잘못을 다 용서해 주기 바란다.” 그러니 이제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시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요셉은 이 말을 전해 듣고 울었다.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했지만,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유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을 형들이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용서를 구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이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저는 요셉의 눈물을 안타까움의 눈물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자신을 믿지 못하는 형들을 향한 긍휼의 눈물이었을 것이고, 아버지를 잃은 후의 고독한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형들은 이미 용서받았고 이집트에 와서 함께 살아왔는데도, 여전히 과거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전 것들은 지나갔고, 보십시오. 새 것들이 와 있습니다.” (고후 5:16-17)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삶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화해의 사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삶에 고난과 두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께서 선한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상처는 우리를 상황과 사람에게 집중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쉽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품을 만큼 우리의 마음이 넓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에서 먼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을 때, 우리는 과거의 죄가 우리 안에 남긴 두려움에 더 이상 매이지 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상처의 깊이와 삶의 상황에 따라 회복의 과정과 시간이 다를 수 있겠지만 죄와 죽음을 이기신 복음의 능력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밝히며 했던 고백이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형들은 자신들이 요셉에게 악을 행했다고 생각했지만, 요셉은 크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5) 그리고 또 다시 형들이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때의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9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형님들에게 벌을 주겠습니까?” 요셉은 자신이 심판자의 자리에 설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형들에게 다시 한번 말합니다. 2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형님들과 아이들을 잘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준 것은 배신과 시기였지만, 요셉은 형들의 두려움을 안심시키고, 한걸음 더 나아가 형들의 아이들을 보살펴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형들과 함께 살아갈 길을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선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더 큰 품을 가지고 있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사랑과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받았다면, 그 은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조금씩 열매를 맺어 가야 합니다. 여전히 상처가 있고 용서하기 어려운 순간에도, 미움과 갈등에만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내어 드리며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처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관계의 회복도 한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통해 무엇을 이루어 가실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닥친 고난과 두려움이 하나님의 뜻보다 크지 않고, 우리의 아픔과 상처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상황만 바라보며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붙드시고 선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가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개역개정) 심판은 우리의 자리가 아닙니다. 여전히 두려워 하고 있습니까? 과거의 죄와 상처안에 붙들려 있습니까?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을 붙드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현실이 고단하고 마음이 연약할 때에도, 은혜로 생명을 살리고 화해의 길을 걸으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09 06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15주

경계에서 드리는 예배

Worship at the Watchtower

에스겔 33:7~11

7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경계병으로 세웠다. 그러니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그들에게 내가 주는 경고를 전하여라. 8내가 악한 사람들에게, ‘오 악한 자여,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라고 말하면, 너는 그에게 악한 길을 단념하라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악한 자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을 것이나, 나는 그의 피를 네 탓으로 돌릴 것이다. 9그러나 만약 네가 그 악한 사람에게 그의 길에서 돌이키도록 경고했으나, 그가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을 것이며 너는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10사람아, 이스라엘의 집에 말하여라. 그들은 ‘우리의 잘못과 죄악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고, 이것들 때문에 우리가 야위어 가고 있다. 그러하니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라고 말하고 있다. 11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맹세코, 나는 악한 사람이 죽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살기를 바란다. 돌아오너라! 너의 악한 길에서 돌아오너라! 오 이스라엘의 집이여, 왜 네가 죽으려 하느냐?’ (쉬운성경)

[Eze 33:7-11, NLT]

7 “Now, son of man, I am making you a watchman for the people of Israel. Therefore, listen to what I say and warn them for me.
8 If I announce that some wicked people are sure to die and you fail to tell them to change their ways, then they will die in their sins, and I will hold you responsible for their deaths.
9 But if you warn them to repent and they don’t repent, they will die in their sins, but you will have saved yourself.
10 “Son of man, give the people of Israel this message: You are saying, ‘Our sins are heavy upon us; we are wasting away! How can we survive?’
11 As surely as I live, says the Sovereign LORD, I take no pleasure in the death of wicked people. I only want them to turn from their wicked ways so they can live. Turn! Turn from your wickedness, O people of Israel! Why should you die?

새학기가 되면Allston에서는 ‘9월의 크리스마스’ 가 시작됩니다. 거리 곳곳에 쌓인 물건들, 서로 나누고 물려주는 이삿짐들 속에서 그 말의 뜻을 실감하게 됩니다. 새 학기는 늘 분주하고 설레지만, 동시에 낯설고 불안한 걸음들이 찾아오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새로움을 향한 설렘으로, 어떤 이는 낯선 도시로 향하는 불안함으로 이 계절을 맞이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도시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보스턴을 차갑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 말이 나올까요. 이 도시는 실력으로 증명해야만 자리를 내어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그것을 향해 전 세계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런데 모여드는 만큼 그만큼 떠나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도시는 깊이 뿌리내리기보다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는 지점에서 누구나 달라집니다. 실력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품어 주는 사랑 앞에서,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앞에서, 차가워진 우리 신앙생활의 온도가 올라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이 서 있어야 할 자리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경계병으로 세웠다”

GP라는 단어를 들어 보셨습니까? 감시초소라는 뜻의 Guard Post, 그 앞글자를 딴 것입니다. 전방의 각 부대에는 비무장 지대 안에 정해진 초소들이 있습니다. 민간인은 들어갈 수 없는 지대입니다. 그 안에 비밀 초소를 세우고 무장 군인들을 주둔시킵니다. GP 초소의 번호는 국가 기밀이지만, 사단 정보 상황병은 매일, 매 순간의 상황을 벙커에서 실시간으로 보고받고 다시 상위 부대에 보고합니다. 제가 사단 정보병으로 근무할 때 가장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심리전 방송만이 아니었습니다. 남북 경계선에서는 교전 직전의 대치 상황이 수시로 벌어졌습니다. 그 어떤 훈련보다 긴급한 실전의 무게를 지고, 24시간 내내 교대로 최전방 수색병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을 보는 사람이 없으면, 위기는 늘 뒤늦게 발견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족속의 경계병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절망 가운데 있던 백성들은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잘못과 죄악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고, 이것들 때문에 우리가 야위어 가고 있다. 그러하니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맹세코, 나는 악한 사람이 죽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살기를 바란다. 돌아오너라! 너의 악한 길에서 돌아오너라!” 이것이 에스겔이 선 자리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경계병에게 무엇을 듣고 보는 눈이 있어야 하는지, 어떤 용기로 서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의 마음을 품어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경계병에게 필요한 것은 듣는 귀와 보는 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때 보아야 할 것과 전해야 할 것이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 곧 영혼의 상태와 시대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눈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 눈은 오직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삶의 기준 삼을 때 열립니다. 말씀을 알고 있으나 믿지 않고 지키지 않는 것은 초소에서 눈을 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켜야 합니다. 복음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소망이 되신다는 것을 전해야 하고, 거룩하게 살아갈 힘을 주어야 합니다. 이미 믿는 이들에게는 그 은혜를 지켜 정결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자기 죄에 대하여 핑계를 댈 수 없다.” (요 15:22) 지금은 은혜의 시대이지만 핑계될수 없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들었다면 말씀 앞에서 응답해야 합니다. 경계병이 반드시 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우리를 회개하게 하시고 오래 참으며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심판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심판을 보류하시고 오래 참으시지만 마지막 날에는 심판하실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땅의 문제 너머의 참된 회복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유일한 생명의 길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은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경계에 세우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하시기로 약속하신 것을 뒤로 미루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디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멸망치 않고 모두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벧후 3:9) 좋은 의사는 환자가 아파한다고 해서 마음을 위로만 하지 않습니다. 의사의 책임은 몸안에 병을 정확히 찾아내고 그에 맞는 치료를 하는 것, 그것이 환자를 살리는 길입니다. 친절한 것과 무책임한 것은 다릅니다. 병을 발견하고도 말하지 않는 것,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편할까 봐 말하지 않는 것은 친절이 아니라 방치입니다.

C. S. 루이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실제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보다 ‘하늘에 계신 인자한 할아버지’를 원할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무거운 짐은 지고 싶지 않고, 그저 편안하게 받아 주시기만 하는 은혜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잘못된 습관을 끊어내고 버려라. 세상에 취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해라,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라. 이것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둘째, 경계병은 고독한 자리에서도 담대한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8내가 악한 사람들에게, ‘오 악한 자여,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면, 너는 그에게 악한 길을 단념하라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악한 자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을 것이나, 나는 그의 피를 네 탓으로 돌릴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상대주의 시대라고 불립니다. 하나의 진리만을 말할 때 편협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악한 길을 단념하라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이 길로 가면 죽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계병이 진리를 전하다가 자신의 것을 잃을 각오가 없다면, 결국 상황 앞에서 타협하게 됩니다. 경계병이 선 자리는 사람들의 지지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더 의지해야 하는 곳입니다. 삶 속에 겪게 되는 불안과 고통이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가리지 않도록, 세상의 성공과 만족이 우리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지 않도록 영적 온도를 높여야 합니다. 시대는 점점 우리의 영적 온도를 차갑게 합니다. 우리는 영적 온도를 낮추려는 시대의 흐름에 맞서서 믿는 이들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담대함으로 세상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을 붙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요 16:33)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담대함은 세상과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믿음을 매일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담대함은 자칫 위험한 자리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계병의 고독이 넘어갈 수 있는 위험한 지점을 봅니다. 나만 홀로 남았다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처럼 여겨진다면, 고독이 자기의로 넘어가는 믿음의 적신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만이 홀로 남았다고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답하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는데, 그들은 한 번도 바알에게 절한 적이 없고 바알의 우상에게 입을 맞춘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왕상 19:18)  경계병에게 주어진 소명은 경계선에서 고독해도 거룩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자리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그 곁을 지켜 주십니다. 우리 곁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들을 남겨 두시고, 함께 거룩한 경계를 지켜가게 하십니다.

셋째, 경계병은 하나님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은 실패 앞에서 쉽게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대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백성이 돌이켜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도 바로 그것입니다.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라는 백성의 탄식에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맹세코, 나는 악한 사람이 죽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살기를 바란다. 돌아오너라! 너의 악한 길에서 돌아오너라! 오 이스라엘의 집이여, 왜 네가 죽으려 하느냐?’ 메세지 성경으로 보시면, “너희 삶의 방향을 바꾸어라. 악한 길을 떠나 그 반대 길로 가거라!” (메시지성경) 창세기 4장 7절에서 하나님은 예배 드렸던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좋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우리를 삼킬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 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그가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 (겔 33:14-16, 개역개정)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죄를 깨닫고 삶의 방향을 실제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돌이킴의 마음으로 서면 내 환경을 넘어서는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보여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찬양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그들을 보게 하소서/예수님의 손으로 그들을 섬기도록 예수님의 입으로 진리만을 말하도록/예수님의 발로써 땅끝까지 달려가도록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거짓이 되지 않도록,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진실이 되게 하소서. 세상 끝까지 주 전하리란 고백이 거짓이 되지 않도록, 내 눈에 주의 사랑 채우사 변화시켜 주소서

우리의 고백과 삶 사이에도 여전히 경계가 있습니다. 가정 안에도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습니다. 성공과 실력을 요구하는 이 도시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의 길과 죄가 이끄는 죽음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 힘을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 속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빛이고 진리임을 전해야 합니다. 가장 넘기 어려운 경계는 바로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면서도,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나와 다른 사람을 품지 못하는 마음. 내 마음의 경계가 가장 지키기 어렵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 그들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진실이 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도 매일의 삶 앞에 서면 내 마음을 먼저 돌보게 되고 문제 앞에서 흔들리고 다시 일어섬을 반복합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여러분의 자리에도 막막한 순간들이 왜 없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흔들리는 자리에서 주님을 더 가까이 만나게 됩니다.

떨리는 발걸음으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던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시고, 주님은 그를 찾아오셔서 먹이시고 다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달리신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흔들리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경계병의 예배는 완벽함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보다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깨어 있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이 도시를 품고, 우리의 가정을 품고, 여전히 흔들리는 나 자신까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깨어 있으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십시오. 내 안에 세워 놓은 두려움과 편견, 자기중심의 경계를 하나님 앞에서 허물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위해 먼저 십자가에 서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내는 것, 그것이 경계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입니다. 이 예배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와 가정, 공동체와 학교의 현장에 하나님의 온기를 전하는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8 30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14주

탄식의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Turning to God in Lament

예레미야 15:15-21

15 여호와여, 주님은 아십니다. 저를 기억하시고 돌보아 주시며 저를 해치는 사람들에게 벌을 내려주십시오. 저들의 악한 것을 참고 보시는 가운데 제가 멸망하는 일은 없게 해 주십시오. 제가 주님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을 생각해 주십시오. 16 주님의 말씀이 내게 이르렀을 때에 저는 그 말씀을 삼켰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저는 행복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17 저는 웃으며 즐거워하는 무리와 함께 앉은 적이 없습니다. 주님의 손에 이끌려 홀로 앉아 있던 것은 주께서 저를 분노로 가득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18 어찌하여 제 고통이 끝나지 않는 것입니까? 제 상처는 어찌하여 고칠 수 없고, 낫지 않는 것입니까? 주는 제게 물이 넘쳤다가 말랐다가 하는 믿을 수 없는 시내와도 같습니다. 19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마음을 돌이켜 내게 돌아오면 너를 다시 맞아들여 나를 섬기게 하겠다. 너는 헛된 말을 하지 말고 값진 말을 해야 한다. 그러면 나를  대신해서 말하는 나의 입이 될 수 있다. 유다 백성이 네게로 돌아와야지, 네가 변하여 유다 백성처럼 되면 안 된다. 20 내가 너를 이 백성 앞에서 굳건한 성벽처럼 만들 것이니 너는 놋쇠 성벽처럼 굳건할 것이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워도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돕고 구원해 주겠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21 내가 너를 이 악한 백성에게서 구해 내겠다. 이 잔인한 사람들에게서 건져 내겠다.” (쉬운성경)

15 Then I said,

“Lord, you know what’s happening to me.
    Please step in and help me. Punish my persecutors!
Please give me time; don’t let me die young.
    It’s for your sake that I am suffering.
16 When I discovered your words, I devoured them.
    They are my joy and my heart’s delight,
for I bear your name,
    O Lord God of Heaven’s Armies.
17 I never joined the people in their merry feasts.
    I sat alone because your hand was on me.
    I was filled with indignation at their sins.
18 Why then does my suffering continue?
    Why is my wound so incurable?
Your help seems as uncertain as a seasonal brook,
    like a spring that has gone dry.”

19 This is how the Lord responds:

“If you return to me, I will restore you
    so you can continue to serve me.
If you speak good words rather than worthless ones,
    you will be my spokesman.
You must influence them;
    do not let them influence you!
20 They will fight against you like an attacking army,
    but I will make you as secure as a fortified wall of bronze.
They will not conquer you,
    for I am with you to protect and rescue you.
    I, the Lord, have spoken!
21 Yes, I will certainly keep you safe from these wicked men.
    I will rescue you from their cruel hands.”(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사랑한다면 고통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랑은 단순히 편안함, 고통이 없는 친절함이 아닙니다. 내가 경험한 것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생활하며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나의 이해와 경험의 틀 안에 가두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을 만들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편안할 때만이 아니라, 나를 돌이키시고 바로 세우시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즐거워 했지만 이해 받지 못하는 상황과 현실의 고통속에서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탄식의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예레미야의 탄식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해 당신의 사랑이 넘쳤다가 말랐다가 하니 믿을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주는 제게 물이 넘쳤다가 말랐다가 하는 믿을 수 없는 시내와도 같습니다.” 믿음은 내 삶에 물이 넘치는가, 마르는가를 보고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넘칠 때에도 물이 마른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금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전하다가 사람들에게 조롱과 핍박을 받으며 외로움과 낙심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17 저는 웃으며 즐거워하는 무리와 함께 앉은 적이 없습니다. 주님의 손에 이끌려 홀로 앉아 있던 것은 주께서 저를 분노로 가득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조롱과 핍박을 쉽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처음 말씀을 받을 때 예레미야에게 말씀은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명의 자리에서 동족에게 조롱과 핍박을 당했고, 가장 안전해야 할 혈연적 관계의 울타리마저 그에게는 존재가 사라진 듯한 아픔과 공허함을 안겨 주었습니다.

18 어찌하여 제 고통이 끝나지 않는 것입니까? 제 상처는 어찌하여 고칠 수 없고, 낫지 않는 것입니까? 믿음생활에 아무리 기도해도 탄식밖에 나오지 않는 시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이 고통이 끝나지 않습니까”라고 묻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정말 짓누르는 것은 상황 자체가 아닐때가 많습니다. 그 상황 위에 얹혀 있는 내 마음의 짐입니다. 내 믿음이 부족한 것 같고 나만 흔들리는 것 같은 자책과 죄책감에 씨름하고 있습니다. 혹시 시냇가의 물이 마른 것처럼 탄식하고 흔들리는 자리에 계십니까? 그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 가지고 가십시오. 탄식의 기도 속에는 이미 믿음과 흔들림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탄식을 절망의 골짜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옮겨 놓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섞여 있던 원망과 탄식을 걷어 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1.탄식할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예레미야는 탄식의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그런 날이 찾아옵니다. 흔들림조차 버거워서 기도할 힘도 없고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고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혼자 견디고 싶은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의 자리에서도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네가 마음을 돌이켜 내게 돌아오면 너를 다시 맞아들여 나를 섬기게 하겠다. 너는 헛된 말을 하지 말고 값진 말을 해야 한다. 그러면 나를 대신해서 말하는 나의 입이 될 수 있다. 유다 백성이 네게로 돌아와야지, 네가 변하여 유다 백성처럼 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헛된 말을 하지 말고 값진 말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흔들린 마음을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을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돌이킨다는 것은 내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이해되지 않아도 말씀을 신뢰하고, 설명되지 않아도 돌아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황에 대한 완전한 이해나 설명이 아니라, 변함없이 그 자리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어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20 내가 너를 이 백성 앞에서 굳건한 성벽처럼 만들 것이니 너는 놋쇠 성벽처럼 굳건할 것이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워도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돕고 구원해 주겠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21 내가 너를 이 악한 백성에게서 구해 내겠다. 이 잔인한 사람들에게서 건져 내겠다.”  

우리의 계산으로는 사랑이 커지면 기준이 낮아져야 할 것 같지만, 십자가는 그 계산을 무너뜨립니다. 그곳에서 공의는 한 치도 굽지 않고, 그 사랑은 한 방울도 덜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주님의 십자가에 우리의 삶이 닿아야 합니다. 믿음 생활하며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돌아설 때도 있습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돌이키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오해 받을 때도 있고 탄식 앞에 서 있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돌이켜 내게 돌아오라.”

주일학교 아이들은 방금 인사했는데도 또 마주치면 다시 인사합니다. 몇 번 인사했는지 계산하지 않으니 저를 볼 때마다 인사를 합니다. 얼마나 사랑스럽던지요.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저예요. 저 또 왔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도 이런 것 아닐까요? 흔들리고 서운하고 낙심했지만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게 하신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1장에서 처음 부르셨을 때도 동일하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보아라. 오늘 내가 너를 굳건한 요새와 같은 성으로, 쇠기둥으로, 놋성벽으로 만들겠다. 너는 유다의 왕들과 장관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의 백성들과 이 땅에 있는 그 누구와도 맞설 수 있을 것이다.”(1:18) 예레미야의 상황은 달라졌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2.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광야 가운데 있을지라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며 견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비하면 광야의 시간은 잠시입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조차 혼자서는 결코 이겨낼 수 없는 버거운 순간이 있습니다. 아말렉과 싸우던 이스라엘도 모세 혼자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론과 훌이 그의 손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예레미야도 홀로 서 있을 힘이 없을 때 하나님은 놋쇠 성벽처럼 굳건하게 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불안 앞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인도하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 붙들어 주는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서로의 믿음을 세워 주며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는 공동체를 세워 가기를 원하십니다.

달라스의 한 교회를 방문했을 때, 매주 예배와 설교자를 위해 수백 명의 성도들이 함께 중보기도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홀로 탄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놋쇠 성벽처럼 굳건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함께 기도하고, 함께 씨름하며,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 제목을 함께 붙들고 씨름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때, 내 생각으로는 도무지 풀리지 않던 자리에서 하나님이 친히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쳐서 손이 내려가는 삶의 자리에 우리 교회가 서로의 팔을 붙들어 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은혜를 기억하며 믿음이 약한 자나 마음이 굳어진 자 모두의 손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가운데 기도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탄식의 시간이 찾아올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과 말을 다시 돌이키십시오. 세상의 편안함에 안주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서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자리입니다. 고통 앞에서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힘으로 곁에서 함께 기도해줄 수 있는 용기, 탄식 앞에 서 있는 이들의 손을 붙들어 주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놋쇠 성벽처럼 굳건하게 세우시고 그를 돕고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그를 통해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도 받은 사랑에만 머물지 말고 사랑하는 자로, 위로 받기만 하지 말고 위로하는 자로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가정과 일터,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시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낙심하고 탄식하는 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섬기는 것,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믿음의 길입니다.

0823 2026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제 13주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말씀

Raised Again by God’s Word

이사야 51:1-6

1 “의로운 길을 가려는 사람, 나 여호와를 따르려는 사람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떨어져 나온 바위를 파낸 채석장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2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를 바라보아라. 내가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오직 그 사람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복을 베풀어 수많은 자녀를 주었다. 3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한다. 그 폐허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푼다. 그 광야를 에덴 동산처럼 만들고, 그 황무지를 나 여호와의 동산처럼 만든다. 거기에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할 것이며, 감사와 노랫소리가 가득할 것이다. 4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어라. 이스라엘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내게서 가르침이 나오며, 내 정의가 온 백성의 빛이 될 것이다. 5 내가 곧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겠고, 곧 너희를 구원하겠다. 내가 능력으로 모든 민족을 심판하겠다. 섬에 사는 민족들이 다 나를 기다리며, 내 능력으로 그들을 구하기를 바라고 있다. 6 너희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아래로 땅을 둘러보아라. 하늘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이 헌 옷처럼 닳아 없어질 것이며, 거기 사는 사람들은 파리처럼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내 구원은 영원하며, 내 의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쉬운성경)

1 “Listen to me, all who hope for deliverance—
    all who seek the Lord!
Consider the rock from which you were cut,
    the quarry from which you were mined.
Yes, think about Abraham, your ancestor,
    and Sarah, who gave birth to your nation.
Abraham was only one man when I called him.
    But when I blessed him, he became a great nation.”

The Lord will comfort Israel[a] again
    and have pity on her ruins.
Her desert will blossom like Eden,
    her barren wilderness like the garden of the Lord.
Joy and gladness will be found there.
    Songs of thanksgiving will fill the air.

“Listen to me, my people.
    Hear me, Israel,
for my law will be proclaimed,
    and my justice will become a light to the nations.
My mercy and justice are coming soon.
    My salvation is on the way.
    My strong arm will bring justice to the nations.
All distant lands will look to me
    and wait in hope for my powerful arm.
Look up to the skies above,
    and gaze down on the earth below.
For the skies will disappear like smoke,
    and the earth will wear out like a piece of clothing.
The people of the earth will die like flies,
    but my salvation lasts forever.
    My righteous rule will never end!(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지난 몇 주간 하나님 앞에서 씨름했던 야곱과 로뎀나무 아래 주저 앉아 죽기를 간구했던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 자리에 두지 않으시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일으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사야 51장 본문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 예루살렘의 성전은 무너지고, 국가가 망해서 소망을 잃어버린 백성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폐허의 한복판에 선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전한 선지자입니다. 1절 2절을 보시겠습니다.

1 “의로운 길을 가려는 사람, 나 여호와를 따르려는 사람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떨어져 나온 바위를 파낸 채석장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2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를 바라보아라. 내가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오직 그 사람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복을 베풀어 수많은 자녀를 주었다. 본문은 막연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라 폐허의 한복판에 서 있는 백성들에게 오직 한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으로 부터 수많은 믿음의 자녀를 베풀어 준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시작하신 약속, 변하지 않는 언약을 기억하라고 이사야를 통해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상황은 변해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음을 신뢰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메세지는 하나님이 어떻게 시작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입니다.

하나님은 어느날 이방 땅에 살던 아브라함을 찾아가셔서 그를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말씀하셨다. “저 하늘을 쳐다보라. 하늘에 저렇게 총총히 반짝이는 별들을 네가 다 셀 수 있겠느냐? 네 후손이 저 무수한 별들만큼이나 많아질 것이다.”(쉬운 성경, 창 15:5)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었노니” (개역개정, 창 15:18)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다른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었노니’ 라고 이미 주신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나탓티”(נָתַתִּי), “주었다”는 완료형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약속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보이지 않는 땅을 향해 가게 하셨고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약속을 신뢰하며 보여 주실 땅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향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으로 성취됩니다.

다윗도 많은 세월 쫓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의 백성들처럼, 두렵고 불안한 광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자신을 쫓던 원수보다, 자신을 따라오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더 크다는 고백입니다. 다윗은 항상 여호와의 집을 갈망했습니다. 광야에서 쫓기던 시절에도 하나님을 갈망하던 그를 하나님은 왕의 자리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현실보다 언제나 큽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편안하고 안정된 결과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 너머에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고 기도해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보이는 현실보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분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백 년 전, 복음을 들고 조선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 눈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어떠했겠습니까? 소망이 보이지 않는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어둠 가운데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이 땅에 부르셨습니다. 단지 흩어진 나그네로만 두지 않으시고, 가정과 일터와 이웃 가운데 복음을 드러내는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과 일터, 우리의 자녀들 앞에 마주하고 서있는 자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선교지입니다. 다음세대를 세우는 것은 단지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어른들이 예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말씀 앞에 순종하며, 기도로 하나님을 찾고, 삶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우리의 살아내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다음 주에 진행되는 성경학교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의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세대로 세워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시작하셨는지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교회와 가정이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두 번째 메세지는 지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는 말씀입니다.

3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한다. 그 폐허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푼다. 그 광야를 에덴 동산처럼 만들고, 그 황무지를 나 여호와의 동산처럼 만든다. 거기에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할 것이며, 감사와 노랫소리가 가득할 것이다. 4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어라. 이스라엘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내게서 가르침이 나오며, 내 정의가 온 백성의 빛이 될 것이다. 5 내가 곧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겠고, 곧 너희를 구원하겠다. 내가 능력으로 모든 민족을 심판하겠다. 섬에 사는 민족들이 다 나를 기다리며, 내 능력으로 그들을 구하기를 바라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의로움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는 49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온 열방에 이르게 될 것을 선포합니다. 이 약속은 만민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아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증인은 복음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살아내며 하나님의 임재를 영혼 깊이 느끼며 내가 만난 주님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폐허 같고 광야 같은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곳에 함께 계시며 말씀하시니 의로운 길을 가는 너희는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고, 하나님의 동산처럼 만들 것이며, 기쁨과 즐거움, 감사의 노래로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마침내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빛을 영접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고 그를 믿는 자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세우시고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보내셨습니다. 한때 주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정체성은 핍박하는 자에서 복음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미주 대륙에는 약 6억 4천 400만 명이 살아가고, 그 안에 989개의 서로 다른 종족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종족도 있고, 그리스도인이 단 한 명도 없는 종족도 있습니다. (IMB 글로벌 리서치, 2023년 12월 31일 기준) 이것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곳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곳에 세우시고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며 복음의 증인이 되어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6 너희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아래로 땅을 둘러보아라. 하늘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이 헌 옷처럼 닳아 없어질 것이며, 거기 사는 사람들은 파리처럼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내 구원은 영원하며, 내 의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하늘도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도 헌 옷처럼 닳아 없어집니다. 세상의 즐거움도 잠시이고 우리가 애써서 붙들려고 했던 것들도 언젠가는 우리 손에서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구원은 영원하며, 내 의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믿음은 나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도 영원하신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우리는 오늘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까? 가정과 자녀, 건강과 미래, 물질과 신분의 문제 앞에서 우리의 계획이 멈추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린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었지만 그 심판의 자리에서도 자기의 백성을 다시 회복하시며 믿음의 사람들로 빚어 가셨습니다. 성도는 영혼의 깊은 밤을 지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때, 이해되지 않는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자라갑니다. 내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믿고 견고해 보이던 것들이 눈 앞에서 사라질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달라스 도시 선교를 출발하던 날, 저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서로가 하나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팀원들이 공항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탑승구로 향했을 때, 이미 보딩이 끝나 있었습니다. 비행기는 만석이었고, 더는 탈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당황했지만 팀원들은 차분하게 다음 항공편을 확인했고 남은 좌석이 하나뿐이고 다음날 비행기에 좌석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팀원들은 남은 한 좌석을 저에게 양보해 주었습니다. 남겨진 팀원들을 두고 먼저 가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저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보딩이 끝나갈 무렵, 한 명씩 팀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불확실했던 그 시간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우리의 열심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먼저 구하며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습니다. 공항에서 경험한 그 신실하심은, 선교 기간 내내 전도와 예배의 자리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고백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계획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모든 일은 그분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자리에서 우리를 다루시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 돌이킴 조차 자격 없는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그 은혜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가 더 높아지고 커져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내가 안전하다고 여기고 있는 삶의 계획과 성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해진 자리는 어디입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길을 가려는 사람, 나 여호와를 따르려는 사람아, 내 말을 들어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는지 기억하고 그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그 시간, 영혼의 한밤중 같은 자리에서 우리가 신뢰하던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아도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합니다. 이미 시작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십시오. 주저 앉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하며, 그분의 일은 결코 쇠하지 않습니다.

08 16 2026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 설교 50)

산상설교 (12) 견고한 크리스천의 삶

A Solid Christian Life

마태복음 7:24-29

김태환 목사

24 “내 말을 듣고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25 비가 내리고홍수가 나고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쳐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왜냐하면 그 집은 바위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26 내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리고홍수가 나고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쳤을 때그 집은 쉽게 무너졌는데그 무너진 정도가 심하였다.” 28 예수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마치셨습니다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29 그것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권위를 지닌 분처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쉬운성경)

24 “Therefore whoever hears these sayings of Mine, and does them, I will liken him 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on the rock: 25 and the rain descended, the floods came, and the winds blew and beat on that house; and it did not fall, for it was founded on the rock.26 “But everyone who hears these sayings of Mine, and does not do them, will be like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on the sand: 27 and the rain descended, the floods came, and the winds blew and beat on that house; and it fell. And great was its fall.” 28 And so it was, when Jesus had ended these sayings, that the people were astonished at His teaching, 29 for He taught them as one having authority, and not as the scribes.(New King James Version)

여러분, 이 슬라이드를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입니다. 높이 443.2m, 102층 건물입니다. 그런데, 이 건물을 1년 45일만에 완공을 했다고 하는데, 믿어지시나요? 이 건물을 지었을 때는, 미국이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을 겪고 있던 때였습니다. 물가가 치솟고, 실업자가 늘어나고, 사람들이 실의(失意)에 빠져 있을 때, 그 당시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건축해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보여 준 상징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뉴욕을 미국의 3대 도시라고 하지 않습니까?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는 그렇지 않은데, 유독 뉴욕 맨해튼에만 고층 빌딩들이 몰려 있는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그 이유는, 맨해튼은 지표면 가까이 단단한 암석층이 있어서, 고층 건물을 짓는 데 천혜(天惠)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맨해튼의 건물들은 세월이 지나도 기울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도 이렇게 견고하게 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합니까? 어느 것 하나 안정된 것이 없습니다. 건강도, 직장도, 경제적인 문제도,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자녀들의 장래도 확실하게 보장된 것이 없어 늘 불안합니다.

이런 때에,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24절) 예수님의 말씀은 “비록 너희가 흔들리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너희의 인생을 반석 위에 세울 수 있는 길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니고, 많은 돈을 들여야 들어갈 수 있는 길도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그 길이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면 됩니다. 이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쉬운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福音)’이라고, ‘복된 소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코우에이(ἀκούει)’이고, 히브리어로는 ‘쉐마(שמע)’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듣는다’는 말을 ‘hear’ 혹은 ‘listen’이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코우에이’라는 말 속에는 단순히 듣는다는 뜻을 넘어 그 말씀대로 실천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쉐마’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이렇게 되풀이해서 말씀하셨을까요? 그 당시 사람들이,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말씀을 지키지 않는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두 분의 학자가 있습니다. 손봉호 교수님과 이만열 교수님이십니다. 두 분이 모두 89세로 동갑이십니다. 그분들이 우리 곁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이, 그 어느 때보다 귀하게 다가오는 시점입니다. 손봉호 교수님께서 얼마 전 미국 강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현재 한국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는 고작 19%에 불과합니다. 천주교나 불교보다도 눈에 띄게 낮은 수준입니다. 교회가 이토록 신뢰를 잃어버린 가장 큰 원인은 ‘그리스도인들의 언행불일치’ 때문입니다. 말과 삶이 따로 노는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이제 우리의 신앙이 귀로 듣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삶으로 증명되는 진짜 윤리 운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 말씀이,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말씀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많은 교회들이 성경을 배우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배운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비단 오늘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것이 심각한 문제였고, 구약 시대에도 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에스겔 33:31-32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내게 와서, 나의 말을 듣고 있으나, 그들은 들은 것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입으로는 헌신을 표현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부정한 이익들을 탐하고 있다……그들이 나의 말을 들으나, 그것들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에스겔은 유다가 멸망했을 때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입니다. 포로생활 중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다의 멸망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은 데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받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지키지 않는 것이 우리의 고난과 불행과, 심지어 우리 인생의 파멸과도 관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제일 큰 원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역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마태복음 7:21) 예수님은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은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말만 하고 지키지 않는다(마태복음 23:3)”고 비판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은 언행일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미국의 전설적인 부흥사 디엘 무디(D. L. Moody, 1837-1899)는 실천적인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무디는, 성경 지식에 머물지 않고, 그 지식이 실제 삶을 통해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무디는 자기 성경 책에 알파벳 기호를 표시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옆에 ‘T’자와 ‘P’자를 적어 표시해 두었습니다. ‘T’자는 Tried라는 말의 약어인데, “내가 이 말씀을 붙잡고 치열하게 살아 보았다”라는 뜻이고, ‘P’자는 Proved라는 말의 약어인데,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에서 진짜로 증명되었다”라는 고백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번 주에 한 가지 말씀을 정해서 ‘T’자를 쓰고, 응답을 경험하면 그 옆에 ‘P’자를 쓰는 것입니다. 즉시 응답이 없을 수도 있고,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진실하게 살아간다면, 무디에게 응답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응답하실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라는,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가 있습니다.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와 함께 현대 복음주의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로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가 ‘견고한 크리스천(Growing in Christ, 1994)’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한 구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과 삶을 전적으로 오직 그 말씀 위에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외향적이고 활기 넘치는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를 영혼 깊숙이 느끼고, 그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며, 그 말씀이 자신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고, 그 말씀에 따라 날마다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고쳐 나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견고한 크리스천은, 겉모습만 화려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영적인 뿌리를 깊이 내린 사람입니다. 머릿속에 성경 지식만 가득 채우는 율법학자 같은 신앙이 아니라, 내가 배운 성경 말씀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율법학자들에게서 보았던 권위는, 율법의 조항과 전통, 형식적인 규칙을 엄격히 지키도록 강요하는 데서 오는 권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권위는 율법의 문구에 얽매이지 않는 권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위는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데서 오는 ‘언행일치(言行一致)’의 권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권위였습니다. 사람들은 여태껏 이런 권위 있는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놀라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엑세플레-쏜토(ἐξεπλήσσοντο)’라는 말인데요. 영어로 ‘astonished’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단순히 놀라움을 넘어, 믿을 수 없는 일이나 엄청난 충격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랐을 때 쓰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거절할 수 없는 권위있는 말씀으로 들려서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비가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에게도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붑니다. 중요한 것은, 폭풍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세운 집의 기초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폭풍을 만나도 반석 위에 견고하게 세워진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말씀만 공부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작은 것부터 말씀을 실천하는 습관을 만들어 나가십시오. 아리스토텔레스(384-322 B.C.)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행하는 행동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탁월함이란 일회성 행동이 아니라 일종의 습관이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은 탁월함은 앎(knowing)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알면 행동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탁월함은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반복적인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한번의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반복적인 습관이 그 사람의 인격을 형성한다고 본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크리스천의 탁월함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크리스천의 탁월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날씨가 좋고 평안할 때는 내 인생의 기초가 반석인지 모래인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겨울이 오고, 매서운 환난의 폭풍우가 몰아칠 때 비로소 우리가 세운 집의 진짜 기초가 드러납니다. 단순히 말씀을 배우는 지식에 머물지 마십시오. 오늘 당장, 작은 말씀 하나라도 실천하는 ‘거룩한 습관’을 시작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견고한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