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2.2023 주일설교

사순절 메시지 3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Is The Lord Among Us or Not?”

출애굽기 17:1-7

유민용목사

1 <바위에서 솟는 물> 이스라엘 모든 무리가 신 광야를 떠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그들은 르비딤에 진을 쳤지만, 거기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2 그들은 모세에게 대들며 “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왜 나에게 대드시오? 왜 여호와를 시험하시오?” 3 하지만 백성들은 목이 몹시 말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왔소?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과 우리의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데려왔소?”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들은 당장이라도 나를 돌로 때릴 듯이 보입니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나아가거라.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몇 사람 데리고 가거라. 그리고 나일 강을 칠 때에 썼던 지팡이도 가지고 가거라. 6 내가 시내 산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설 것이다. 지팡이로 그 바위를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백성이 먹을 수 있는 물이 나올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7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 하고 여호와를 시험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맛사 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다투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 라고도 불렀습니다.(쉬운성경)

1At the Lord’s command, the whole community of Israel left the wilderness of Sin and moved from place to place. Eventually they camped at Rephidim, but there was no water there for the people to drink. 2 So once more the people complained against Moses. “Give us water to drink!” they demanded.

“Quiet!” Moses replied. “Why are you complaining against me? And why are you testing the Lord?”3 But tormented by thirst, they continued to argue with Moses. “Why did you bring us out of Egypt? Are you trying to kill us, our children, and our livestock with thirst?”4 Then Moses cried out to the Lord, “What should I do with these people? They are ready to stone me!”5 The Lord said to Moses, “Walk out in front of the people. Take your staff, the one you used when you struck the water of the Nile, and call some of the elders of Israel to join you. 6 I will stand before you on the rock at Mount Sinai. Strike the rock, and water will come gushing out. Then the people will be able to drink.” So Moses struck the rock as he was told, and water gushed out as the elders looked on. 7 Moses named the place Massah (which means “test”) and Meribah (which means “arguing”) because the people of Israel argued with Moses and tested the Lord by saying, “Is the Lord here with us or not?”(New Living Translation)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고요의 바다’라는 8부작 드라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2075년을 배경으로 한 SF 웹 드라마인데요. 물이 고갈된 지구를 떠나 달에 버려진 연구기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환경오염이 심각해지면서 물은 급속도로 소모되고, 지구의 물은 바닥나기 시작합니다. 과학자들은 달에 있는 월수(月水)에 적응된 인간을 만들기 위해 비윤리적인 실험을 자행하게 되지요. 달의 기지 발해에서 무수히 많은 인간을 죽이며, 실험을 하다가 달의 기지가 폐쇄되고, 정예대원들이 달의 기지에 들어가 숨겨진 비밀들을 펼쳐내는 내용입니다.

미래학자들은 팬데믹을 통해서 인류의 변화를  5년 이상 앞당겼다고 합니다.  인류의 변화가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요? 과거의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 간다면 우리가 불평하는 요소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욕망과 문명의 이기(利器)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으로 인해 환경이 갈수록 파괴 되어집니다. 인간의 욕망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폭력문화에 쉽게 넘어가지요. 이러한 사회 구조속에서 경제논리로 생명의 문화를 파괴해 버리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의 원리를 역행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속에도 수천년전 애굽의 제국문화의 요소들은 많이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힘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권력을 함부로 대하는 제국 문화속에서 피라미드의 가장 아랫부분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땅에 대한 꿈을 갖게 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대안으로 가장 약소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 무엇인지 우리에게도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의 긴 역사속에서 출애굽한 백성들은 40년의 광야 시간을 통해 신앙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애굽의 고센 땅을 벗어나서 더 좋은 삶이 펼쳐진다면 좋았을텐데 광야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광야는 하루 하루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살 수 밖에 없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왜 광야의 장소로 인도하셨을까요? 마실 물이 없는 곳인 르비딤으로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는 상황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시간을 지나며 백성들은 긴 시간으로 인해 광야길에서 죽기 않고 살기만 해도 만족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광야에서 있었던 한 사건인데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하시고 광야길을 떠돌아 다니게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도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서 광야의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은 목마름을 느끼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상실과 두려움, 좌절감과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본향땅을 향한 광야의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우리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 이후의 삶을 가르쳐 주는 시간입니다. 광야의 길은 우리들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제국의 지배아래 종의 습관에 익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인생의 참주인을 통해 철저한 다루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은혜의 바람을 통해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 양식들을 얻었고, 인도하심을 가운데 보호하심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으로 부터 보호하셨고, 홍해를 건너면서는 온 백성들이 세례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겠다는 결단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은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과 정신을 알게 하셨고, 성막의 제사제도는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광야 길 곳곳에서 펼쳐지는 일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주시는 귀한 메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마실 물이 없는 곳에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1 <바위에서 솟는 물> 이스라엘 모든 무리가 신 광야를 떠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그들은 르비딤에 진을 쳤지만, 거기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림을 지나 르비딤이라는 오아시스를 찾아 도착하게 됩니다. 사실 르비딤 지역은 남부 험한 산악지대이며, 시내 광야는 지형이 높아서 이스라엘 대민족이 행군을 하기에는 어려움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림을 보시면 엘림에서 마라까지가 230km인데 시내산이 있는 르비딤까지의 행로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군대에서 행군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그때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군대에서 무거운 군장을 매고 40킬로미터를 행군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행군하며 마셨던 수통의 물맛과 당시 주머니 속에 챙겨서 한입씩 깨물며 먹던 초콜릿바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오랜 시간을 행군해서 왔는데, 물이 없는 지역을 만나게 되니까 서로 다투며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는 목마름을 느꼈을 것입니다. 기대했던 것이 철저히 무너졌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맛사’ 하나님을 시험하다  ‘므리바‘  백성들이 ’ ‘다투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3천 3백년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하게 된 상황들을 전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단지 험난하고 어려운 길을 행군해서 왔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그곳에 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문제를 만나게 되면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두려움과 불안함이 엄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르비딤 지역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불평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사람들의 불평은 첫단계로 무의식적 무능력(Unconscious Incompetence) 상태에서 불평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전혀 의식 할 수 없는 무지한 상태에서의 불평을 의미하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불평의 조절 능력이 없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도 모르게 불안이 엄습하고, 불평 할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을 날마다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폴 트립의 ‘목회, 위험한 소명’이라는 책에는 “오랫동안 성경을 대하다 보면 광대한 지혜가 깃들어 있는 위대한 구원 이야기에 더 이상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오랫동안 속죄를 설명하다 보면 십자가 밑에 서있어도 기쁨도 없고, 눈물도 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 제자훈련을 시키다 보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이 더 이상 놀랍지 않게 된다. 오랫동안 성경의 신학을 배우다 보면 그 목적이 개인의 거룩함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너무 규칙적이고 일상적인 일이 되다 보니 더 이상 마음에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우리는 익숙함의 한계를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익숙함의 자리를 뛰어 넘어서 기도하게 될 때에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존한계의 3.3.3 법칙이 있습니다. 공기 없이는 3분, 물이 없이는 3일, 식량이 없이는 3주가 건강한 인간이 느끼게 되는 생존한계라는 것입니다. 물론 더 길게 버틸 수 있는 경우들도 있지만 보통의 경우를 생존한계로 정한 것입니다. 영혼에도 골든타임이 있습니다. 삶에 어려움을 찾아오게 될 때에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해지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인간은 자신이 따르던 세상의 우상들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생명을 두고 하는 기도에는 다른 어떤 것들이 개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가 막힌 고통의 세월 40년을 돌아도 우린 여전히 광야에 있을 수 있습니다. 끝없이 일어나는 불평과 원망으로 광야의 자리를 맴돌게 될 수도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문화속에서 익숙했던 종의 습관을 완전히 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옛사람의 기질을 거부하고 철저한 신뢰와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거룩한 갈망이 임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는 장소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광야 인생길에 성경이 주는 답은 십자가이지요. 이해 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 믿음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문제들, 명확히 알 수 없는 고통의 문제의 답은 그리스도가 달린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외치시며 죽으신 십자가에서 세상의 행복과 가치는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선물인 은혜와 사랑이라는 통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행복을 말하지만 교회는 은혜를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끊임없이 이기적인 욕망에 속절없이 이끌리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은택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곳곳에서는 자신의 왕관을 외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세상속에서 하나님을 증명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불평 안에 우리가 원하는 욕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인간의 욕구가 찢어지는 순간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황제가 공포한 것이 아니고, 언덕에서 죄가 없으신 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가 소리치며 죽었던 그 자리에서 선포된 것입니다. 죄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며 누구도 설수 없는 곳에 서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어진 모든 상황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함을 믿을지 아니면 불평하며 원망할지 그 사이에서 믿음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백성들은 바위로 부터 물을 공급 받았습니다.

”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들은 당장이라도 나를 돌로 때릴 듯이 보입니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나아가거라.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몇 사람 데리고 가거라. 그리고 나일 강을 칠 때에 썼던 지팡이도 가지고 가거라. 6 내가 시내 산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설 것이다. 지팡이로 그 바위를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백성이 먹을 수 있는 물이 나올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바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분이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댄동산 같고 끊어지지 않는 샘 같을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모두가 같은 영적 음식을 먹으며 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 마셨는데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느니라” (고전 10:3,4)

분열과 논쟁에 가득한 고린도 교회가 따라야 할 모범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 시절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하셨던 광야의 교회는 세상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384장은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주님은 우리 앞에서 물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 삶이 고달프십니까? 인생에 목이 마르십니까? 가만히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그 샘물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한 샘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의심의 순간에도 기도합니다. 백성들은 불평을 하지만 모세는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습니다. 교회의 리더들은 불평하는 백성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평의 상황을 이길 수 있는 일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광야가 펼쳐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이 광야였습니다. 40년이라는 시간동안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향해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터져 나오는 물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석을 친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고난 받으신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의  죄의 무게 보다 더 크신 사랑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우는 꽃은 없습니다. 세상속에서 우리 영혼도 계속 흔들릴 겁니다. 그러나 이 흔들림 속에서도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지요. 일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커져 갈수록 신앙의 힘에 사로잡히는 시간은 늘어날 것입니다.

셋째로, 표적은 본향 집을 향한 이정표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며 당신이 메시아라면 표적 보이기를 요청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마 16:4)입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요나가 큰고기 뱃속에서 밤낮 삼일동안 지낸 사건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기대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삼일 동안 지낸 것은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이외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어떤 표적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보이지 않는 광야길에서 힘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을때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심을 바라 보십시요. 이것이 구원 이후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숙제입니다. 기억하십시요. 바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구원 이후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부활은 세상 사람들에 경험되지 않는 생명의 사건입니다. 구원 이후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 사랑안에 거하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시간을 늘려가야 합니다.

7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 하고 여호와를 시험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다투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 라고도 불렀습니다.

생명의 통치를 우리의 수준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마실 물이 없는 곳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인생의 기초가 되시는 그리스도 반석 위에 삶을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성도들의 삶에 보여 주시는 표적은 우리의 종착지를 향한 이정표일 뿐입니다. 때때로 인생에 표적이 없어도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속에서 ‘복’이 아니라 ‘성장하고 성숙’ 되어지는 과정을 인도하시고 동행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져 주셨고, ‘하늘 소망’을 바라보는 간절한 기도의 손을 붙들고 계십니다.

무너져 있던 자리에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의 능력이 믿어질 때에 나 지금은 땅을 벗삼아 살아 갈지라도 주님 계신 하늘의 소망 품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말씀으로 사역하게 하시는 은혜의 자리 뒤에는 말씀으로 살아 내기 위하여 애쓰며 살아온 흔적이 남아있고 그 걸음들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케임브리지 성도 여러분

햇빛처럼 따뜻하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순절 우리의 삶의 시간에 가득 채워 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배를 붙들기 위하여 그 간절함으로 나의 나 됨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 오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3.05.2023 주일설교

사순절 메시지 2

예수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평안

Peace with God in Jesus Christ

로마서 5:1-8

유민용 목사

1 <의롭다 함을 얻은 결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또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3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4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5 이 소망은 절대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시의 적절할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7 의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간혹 선한 사람을 위해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쉬운성경)

1Therefore, since we have been made right in God’s sight by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because of what Jesus Christ our Lord has done for us. 2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and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3 We can rejoice, too, when we run into problems and trials, for we know that they help us develop endurance. 4 And endurance develops strength of character, and character strengthens our confident hope of salvation. 5 And this hope will not lead to disappointment. For we know how dearly God loves us, because he has given us the Holy Spirit to fill our hearts with his love.6 When we were utterly helpless, Christ came at just the right time and died for us sinners. 7 Now, most people would not be willing to die for an upright person, though someone might perhaps be willing to die for a person who is especially good. 8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New Living Translation)

사순절 두번째 주일입니다. 지난주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에 대해서 나눴고 오늘의 주제는 ‘평안’입니다. 스톨의 색깔의 의미도 알려드리기로 했지요. 보라색은 강림절과 사순절에 사용하게 되는데, 사순절기의 보라색은 참회를 상징합니다. ‘편안함’과 ‘평안함’는 그 뜻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평안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줄수 없는 평안을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주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예수님 외에 두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한 여자는 예수를 수태한 유대인 여인이고, 한 남자는 예수를 죽인 로마 관원입니다. 예수가 육신의 몸을 입기 위해서 소녀 마리아는 하나님과 평화를 이뤄야 했습니다. 자신의 ‘편안함’을 버리는 것이었죠. 처녀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하는 일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신명기 법에 의하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반면에 로마 관원이던 빌립보는 자신의 위치와 상황속에서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스스로의 양심을 저버렸습니다. 사도신경은 “…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고 분명히 적시하여, 마리아의 순종과 빌라도의 허물을 오는 세대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그 자리에서 자신과 예수의 십자가와는 무관하다면서 물로 손을 씻었다고 기록합니다.(마 27:24) 그러나 사도신경은 지상에서 예수님의 생명의 시작을 마리아의 믿음으로 알리고 있으며, 예수께 십자가 사형 선고를 내린 사람으로 빌라도를 2천년에 걸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황금기를 이르던 시대에 한 사건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이 십자가 처형은 당시 로마의 평화와는 다른 것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정치, 경제, 군사적 안정을 목표로 다른 나라들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약소 민족들 입장에서는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한 예가 70년경에 디도 장군에 의해서 유대 예루살렘성이 함락되고 도시 전체가 초토화 된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평화는 지배 문화가 정당화 되도록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힘과 권력으로 만든 평화이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죽이려는 십자가에 달리시며 평안을 주셨습니다. 주가 주시는 평안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주신 ‘평안함’입니다. 로마의 평화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손해 보고 자아를 죽이며, 소란스런 세상에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는데 주일학교 때에 부르던 노래 가사가 생각이 났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 뿐 그 지겨움 끝없네. 그러나 주 여기 계시듯 우리가 아들 믿을 때에 그의 영으로 하나돼’ 2022년 2월 24일 시작 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해가 지나도록 팬대믹 보다 더 끔직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세상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평화를 원하지만 세상에 그 ‘평안’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수고와 노동, 질병과 저주, 아픔과 고통은 아담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인해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로 5:21)

당시 로마에 있던 교회들에게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죄의 결과’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풍성한 은혜’를 대조 시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서 6장 7장으로 가면 죄는 사람들을 종으로 만드는 아주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왕과 같이 세상을 장악한 세력입니다. 즉 모든 인간이 죄의 종노릇하는 것이지요.

죄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안 짓고’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 안에  ‘본래부터 죄’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침몰하는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살기 원해도 그 배는 결국 침몰하게 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몰하는 배에서 절망 속에 있는 당신을 살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진리가 기독교의 출발입니다. 즉 성도의 삶은 구원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더 이상 악한 권세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롬 5:18)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물의 희생제사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흠이 없는 제물을 죽여 죄를 동물의 피에 전가해서 하나님께 ‘화목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삶속에서 부지중에 지은 죄를 위해서는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이 제사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하지 말하야 할 것을 한 경우, 고의적으로든, 무지로 지은 죄든 그 죄를 제물에 전가해서 1년에 한번 속죄일에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이웃끼리 다투거나 범하는 모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속건제물을 드리며 사함을 얻어야 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매일 서서 섬기며 희생제물을 드렸지만, 그 제사만으로는 결코 모든 죄를 없앨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영원하고 큰 대제사장인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단번의,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셔서, 이후로는 자신의 원수들이 자신의 발등상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히 10:11-13)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가 ‘얻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현실속에서 평화를 누리기 보다는 좌절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조차 느끼지 못하고 ‘편안한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거부하는 세상의 힘은 우리를 유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의 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5:1 <의롭다 함을 얻은 결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또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가 벌이던 전쟁이 그치고 ‘고요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항하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함으로 잠잠해 지는 것’이지요.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저항하던 우리의 혈과 육은 완전히 패했으며, 마음속 깊은 곳에 끓고 있는 용암과도 같은 혈기, 욕심으로 물든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잔잔해 지는 것입니다.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갈 때는 모든 것이 문제로 보였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는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던 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니까 그것까지도 주의 십자가를 깊이 알게 되는 길이 될 뿐입니다. 십가가에 달린 주님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사랑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사순절기는 우리가 주님의 품을 떠나지 않도록 머무르는 훈련의 시간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애써 동참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복음 안에 머무르며 주가 주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라는 것이지요.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월요일 교우들의 참여로 새벽기도 줌이 100명이 넘었다는 것을 새벽 예배를 드리고 나서야 사람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사용하는 줌 어카운트가 제한 인원이 100명으로 되어 있어서, 지난 월요일 새벽기도회에  100번째 이후로 들어 온 분들은 새벽예배에 접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들어 오지 못한 교우가 하나님을 만날 절호의 기회였다고 생각해 보게 되니까 책임에 대한 무거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그릇을 넓히라고 하셨습니다. 너의 그릇에 영혼들을 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순전한 그룻으로 영혼들을 담아내라’ 하시는 마음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사순절 절기 동안 줌플랜을 바꿨습니다. 이번에 잠시 바꾼 플랜은 500명 제한입니다. 금요 예배를 드리고 차 운행을 하는데 한 청년이 새벽기도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함께하니까 너무 든든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하는데, 제 마음도 뜨거워 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뒷모습으로도 힘을 얻고 위로를 얻는 지체들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순절 영적 순례길에 더 많은 교우들이 동행하며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순례길을 걷다 보면 우리의 믿음도 조금씩 성장해 갑니다. 성장통과 함께 키가 자라는 아이들처럼 매일 십자가를 붙들며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영적근육이 길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매일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화를 믿음으로 누리는 것이지요.

째로 의의 열매는 연단된 인품과 소망을 낳습니다.

3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4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환란을 당해도 즐거워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할까? 환란을 어떻게 자랑할 수 있지? 십자가가 어떻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의 능력은 알지만 십자가가 내 삶에 오는 것을 피합니다. 버티고 머무르다가 십작가가 정작 삶에 해로운 것이라 느껴지면 떠나갑니다.

그런나 우리는 환란을 즐거워하고 자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고난과 절망, 생존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는 생각을 멈추게 되고, 스스로 슬기롭다는 죄의 본성,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에 저항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눈물을 보게 되며, ‘하나님께 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순종을 통해 영원한 승리를 얻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며 눈물로 세상과 사람들을 끌어 안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세력이 예수의 발 아래에 짓 밟혀서 굴복되게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환란이 인내를 낳고, 그 인내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인품과 하늘의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베토벤은 최소한 하나의 곡을 만들기 위해 열두번 이상을 다시 썼다고 합니다. 천지 창조를 만든 하이든은 끊임없이 기도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작곡을 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걸작 최후의 만찬을 8년동안 무려 2천번이나 스케치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즐겨 먹는 꿀 한 숟가락은 꿀벌이 4천 2백번이나 꽃을 왕복하며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어사전을 집필한 웹스터는 36년 동안 밤낮으로 일하여 사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모든 나라의 국가대표 선수들은 고된 훈련을 즐거워 합니다. 고된 훈련이 자랑이 되는 것은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고된 훈련을 하지 않고 영광를 얻게 되는 선수들은 없습니다. 인내를 통해서 얻게 되는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영광이라는 단어는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 영광을 조금 흉내 낼 뿐이지요. 세상의 영광은 하늘의 영광을 조금 맛보는 것 일뿐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고통은 따라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은 기쁨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확신과 불신의 자리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희망의 끈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란이 없다하지 않으시고 환란을 당하더라고 소망을 붙들면 기대를 져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을까요? 모든 것들이 풀처럼 지나가지요. 그러나 환란 중에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내게 필요한 시간이라고 기뻐하게 되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심을 받아 들이며 믿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의의 열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5 이 소망은 절대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조셉 조렌티니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 그는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도어맨으로 53년 동안 근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53년 동안 3일만 결근했다고 합니다. 글로 보는데도 성실함과 꾸준함이 얼마나 힘든일인지 느껴집니다. 그가 78세로 은퇴를 하게 되자 기자들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런 단순한 일을 어떻게 53년 동안이나 계속할 수 있었습니까?” 하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요. 호텔 도어맨은 날마다 새 사람을 만나는데, 이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손님을 맞이할 때 예수님을 맞이하 듯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예수님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이 호텔 현관은 53년 동안 제게는 천국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십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합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찬송가 304장에 보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두루마리에 먹으로 해서 글을 썼잖아요. 넓은 하늘이 화선지이고, 깊은 바다가 전부 먹물이라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 문장을 몇 번이나 쓸 수 있을까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만큼 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부터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하셨다는 증거가 2천년 전 예수가 지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 것입니다.(6절)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에는 제한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는 가장 소중한 자녀들을 내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가장 소중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8절) 사순절기는 그 사랑을 채워가는 시간입니다.

우리 곁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보시고, 만나는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발견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우리 손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그 사랑의 능력을 흉내 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말씀이 실제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담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모인 자리에서 먼저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삶이 되도록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에도 ‘나의 열심인지 하나님의 열심’인지 분별하십시오. 비판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사랑은 눈을 뜨게 합니다. 

어느날 저녁에 교회에 기도하러 왔는데, 그날따라 성가대의 한자리 한자리부터 오케스트라를 지나 회중석 2층까지 손을 대고 기도했습니다. 의자는 빈자리였지만 체온이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다함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깊고 뜨겁게 전해 질 수 있도록 함께 지어져 가는 믿음의 여정을 걷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말로만 전하는 신앙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우리의 교회와 지체를 마음 다해 사랑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