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강림후 제 9주)
하나님 나라
The Kingdom of Heaven
사도행전 19: 8-20
유민용 목사
8 바울은 에베소의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강론하며 호소력 있는 설교를 했다.9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고, 공공연하게 복음의 도를 거역하는 말을 떠들어 댔다. 그래서 바울은 제자들을 데리고 회당을 떠나 두란노 학당으로 갔고, 거기서 날마다 강론하고 가르쳤다.
10 이렇게 두 해를 계속하는 동안, 아시아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과 헬라인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11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을 통해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셨다.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 닿았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그것을 병자들에게 갖다 대기만 해도 그들의 병이 낫고 악한 영들이 떠나갔다.13 그런데 악령을 쫓아낸다면서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유대인 몇 사람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을 향해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고 말하곤 했다.14 유대인 제사장인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고 있었다.15 어느 날, 악령이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도대체 누구냐?”16 그러면서 귀신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와락 덤벼들어 때리는 바람에, 그들은 몸에 상처를 입고 옷을 발가벗긴 채 줄행랑을 쳤다.17 이 소문이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 예수의 이름을 기리며 찬양했다.18 그리고 믿음을 갖게 된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자기들의 악한 행위를 솔직하게 고백했다.19 또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두루마리 책을 모두 가지고 와서,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불살랐다. 그렇게 불사른 책값을 계산해 보니, 5만 드라크마에 달했다.20 이렇게 해서, 주의 말씀이 더욱 힘 있게 점점 널리 퍼져나갔다.(쉬운말 성경)
8 Then Paul went to the synagogue and preached boldly for the next three months, arguing persuasively about the Kingdom of God. 9 But some became stubborn, rejecting his message and publicly speaking against the Way. So Paul left the synagogue and took the believers with him. Then he held daily discussions at the lecture hall of Tyrannus. 10 This went on for the next two years, so that people throughout the province of Asia—both Jews and Greeks—heard the word of the Lord.11 God gave Paul the power to perform unusual miracles. 12 When handkerchiefs or aprons that had merely touched his skin were placed on sick people, they were healed of their diseases, and evil spirits were expelled.13 A group of Jews was traveling from town to town casting out evil spirits. They tried to use the name of the Lord Jesus in their incantation, saying, “I command you in the name of Jesus, whom Paul preaches, to come out!” 14 Seven sons of Sceva, a leading priest, were doing this. 15 But one time when they tried it, the evil spirit replied, “I know Jesus, and I know Paul, but who are you?” 16 Then the man with the evil spirit leaped on them, overpowered them, and attacked them with such violence that they fled from the house, naked and battered.17 The story of what happened spread quickly all through Ephesus, to Jews and Greeks alike. A solemn fear descended on the city, and the name of the Lord Jesus was greatly honored. 18 Many who became believers confessed their sinful practices. 19 A number of them who had been practicing sorcery brought their incantation books and burned them at a public bonfire. The value of the books was several million dollars. 20 So the message about the Lord spread widely and had a powerful effect.(New Living Translation)
오늘날 초대교회의 관심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현존하는 교회의 어머니의 몸과 같은 교회입니다. 예수께 직접 교육을 받었던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던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모든 사람에 열려져 있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세속화에 적절하게 반응하며 변화되다 보니까 교회의 본질적 가치가 흐릿해 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속에 있는 보편적 가치만으로는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매우 쉽고 단순합니다. 예수님 곁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교회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시는 것을 지속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정의합니다. 레슬리는 인도에서 1936년부터 1974년까지 선교사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는 영국출신인데 40년 가까운 사역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영국사회에 복음에 대한 차가운 멸시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하루는 인도에서 온 사람을 전도하려는 그에게 그들의 종교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회심 시키려 하지 말라는 경고성 전화를 받게 됩니다.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에게 이런 전화를 한 사람이 이민자가 아니라 영국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나라였던 영국이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사이에 다윈주의 사회가 되었음을 절감했던 것입니다. 레슬리가 영국 사람들에게 다시 복음을 설명해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만든 책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이라는 책입니다.
세상에 교회가 참 많아졌습니다. 다양한 교회들이 존재합니다. 수많은 종파의 교회들이 있는데 교회가 성장한다고 해서 건강한 교회라고만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N T 라이트는 “교회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리는 ‘사명’으로 부름을 받은 것 때문에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탈기독교 사회에서 교회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델인 교회가 세상에 동화되어 질 때에 그 본질적 가치가 사라지게 됩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에 보냄 받는 사명자들을 훈련시키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심으로 복되게 해 주셨습니다. 유대민족에게만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3차 전도여행 가운데 에베소 지역 유대교 회당에 들어가3개월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강론을 합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교 회당 앞에서 먼저 전도를 했습니다. 동족 유대민족을 향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한평생 유대교인으로 모세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던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써 복음을 전하면서도 유대인들을 향한 고뇌와 탄식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유대교 회당 앞으로 먼저 가서 전도를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번번히 거절 당하고 핍박을 당합니다. 전도여행은 핍박의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사명이 있었습니다. 이 사명은 동족 유대인들의 박해와 고난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더 깊은 위로와 사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고통과 박해가 올때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했던 것이지요. 말씀을 준비 하는데 바울 서신들 가운데 자신을 소개하는 인사말이 더 깊이 다가 왔습니다.
로마서 1:1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고전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고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골로새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딤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었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죄가 들어왔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모든 인간에게 죽음이 들어 온 것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인간의 본질인 영혼은 주와 함께 있게 됩니다. 바울은 고후 5:8절에서 “죽음 후에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을 것이라.”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14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데리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느냐’입니다. 만일 여러분은 살면서 한번도 앞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색을 설명해야 한다면, 어떻게 색의 개념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전도의 옷을 입으시겠습니까? 주어진 상황속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구원은 종착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 이후의 삶은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3개월 동안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는데 매일 말씀을 들으면서도 몇몇 사람은 마음이 완고해서 믿으려 하지 않았고, 복음의 길을 거역하는 말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호소력 있는 설교를 했습니다. 8절을 개역개정으로 보면 “강론하며 권면하되”라고 번역했습니다. ‘권면하되’로 번역된 ‘페이돈: πείθων“은 ‘인내와 수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언제나 인내와 수고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개월을 전하다가 회당을 떠나서 두란노 학당을 세우고 거기서 날마다 강론하고 가르치는데 2년 동안을 계속합니다. 2년 동안 매일 매일 바울의 말씀을 들었던 이들이 변화가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듣고나서 변화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습니다. 시간을 들여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수고와 인내를 매일 지속하다 보면 말씀의 깊이를 더 깊게 깨닫게 됩니다. 새벽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삶의 습관을 바꿔보십시요. 바울에게 ‘하나님 나라’를 2년간 배웠던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아시아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과 헬라인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된 말씀을 배우던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독점하는 나라도 아닙니다.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겨 드릴때 임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거하는 나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의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그들의 질문은 “언제” “어느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너와 나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전도함’에 있어서 내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얽매이던 것으로 부터 자유해지는 경험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지요. 바울은 그가 만난 복음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보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 안에 있던 차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모든 민족이 구원의 대상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고국을 떠나 미국이라는 나라에 정착하기까지 막연한 두려움, 삶의 아픔, 인간적인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으며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아 차리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누군가가 슬퍼한다고 하면 대부분은 깊은 관계를 통해 서로의 삶을 진실하게 나누며 교제했던 사람일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따뜻한 사람들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에 최초로 세워진 성령학교는 예루살렘 지역에 세워진 학교였습니다. 이 성령학교의 교사는 사도들이었고, 예수님은 훈련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모였습니다. (행2:46) 지속적으로 모여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변화를 받은 이들은 자신의 것을 연약한 교우들과 나눴습니다. 그때에 많은 성도들이 새사람이 되었고 믿는 사람들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바쁜 현실속에서도 서로가 시간을 내어 말씀을 지속적으로 나누며 교제 하시기 바랍니다. 서로의 삶을 나누며 교제할 때에 그리스도의 가족이 됩니다. 우리교회 안에는 가족모임, GT모임이 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그룹의 모임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며 분주하다고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직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색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색을 설명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삶을 공유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전달자가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차별하게 되면 복음이 심겨 지는데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한번 초대되어 들어오면 서로의 격려와 위로를 통해서 말씀을 배우고 나누는 것이 즐겁고 또 참여하고 싶어져야 합니다. 서로에 대한 구별의 장벽이 무너지고 주의 사랑이 공동체 안에 점차적으로 스며들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안으로 들어오는 문이 구원의 신비입니다. 거주하도록 부름 받은 방에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 안에는 개인의 신비와 성화적 삶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공기와 빛 그리고 물이 거저 주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그 은혜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2~3세기 박해가 심했던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초대교부의 글 중 하나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초대 기독교인들의 삶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반적인 생활에 있어서 자신들이 사는 곳의 양식을 따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놀랍도록 확연히 구분된 함께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땅에 속하지만,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들, 법을 초월하는 사람들, 가난하지만 부유한 사람들, 죽으면서까지도 복음을 전하고 선교를 했던 사람들이 바로 초대교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독특한 삶의 양식을 보며 붙여준 이름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은 어떤 삶일까요?
11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을 통해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셨다.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 닿았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그것을 병자들에게 갖다 대기만 해도 그들의 병이 낫고 악한 영들이 떠나갔다.
13 그런데 악령을 쫓아낸다면서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유대인 몇 사람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을 향해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고 말하곤 했다. 14 유대인 제사장인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고 있었다. 15 어느 날, 악령이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도대체 누구냐?” 16 그러면서 귀신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와락 덤벼들어 때리는 바람에, 그들은 몸에 상처를 입고 옷을 발가벗긴 채 줄행랑을 쳤다. 17 이 소문이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 예수의 이름을 기리며 찬양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흥미롭기도 하고 신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바울이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바울이 갖고 있던 손수건을 가져다가 사람들에 얹으면 낫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장막을 지으면서 일했던 바울의 앞치마를 가져다가 그 환자에게 덮으면 그 환자가 낫는 일을 소개합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현상과 능력은 믿는 자들에게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표적은 성령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적을 통해서 성경은 주의 말씀이 더욱 힘 있게 점점 널리 퍼져 나갔다고 기록합니다.(20절)
당시는 복음의 확산이 신속하게 요구되는 시대였기에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경의 진실성이 오랜 시간에 걸쳐 입증이 되었습니다. 성경속에서 기적들을 보면 시대마다 긴급하게 필요한 때에 행하셨습니다. 그 분량도 성경 전체로 보면 소수의 분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안에는 인간의 경험과 역사적 결과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신적 기원을 갖고 있기에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영감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과 죄가 많던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놀라운 기적입니다. 당시에 예수를 흉내내고 기적을 사모했던 마술사들은 놀라운 기적들을 보면서 자기 주술에 예수의 이름을 넣게 됩니다. 이런 일을 한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오히려 악령들한테 혼나는 모습이 나옵니다.
당시 에베소 지역은 우상들로 가득했습니다. 달의 여신인 다이아나 신전이 있었고, 우상 장사들과 부적 장사들이 많았습니다. 신전 안에는 수천 명의 여사제들과 청소하는 노예들도 수 천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도 자신들의 우상 중에 하나로 생각했을 것이며 주술적 행위로 그것을 이용하게 됩니다. 지금도 온 세상 여러 나라에는 주술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술행위를 통해서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들로 사람을 유혹하지요. 그런데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주술적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18절로 20절은 주의 말씀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18 그리고 믿음을 갖게 된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자기들의 악한 행위를 솔직하게 고백했다.19 또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두루마리 책을 모두 가지고 와서,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불살랐다. 그렇게 불사른 책값을 계산해 보니, 5만 드라크마에 달했다. 20 이렇게 해서, 주의 말씀이 더욱 힘 있게 점점 널리 퍼져나갔다.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주술사들은 자신들이 마술을 행하던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살랐는데, 그 책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19절). “은”은 그리스의 드라크마 은화를 가리키는데, 당시에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평균 품삯입니다. 즉 “은 오만”은 50,000일(약 150년)의 품삯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당시에 에베소 지역에 마술적인 주문을 기록한 책이 많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엄청난 양의 책을 불사른 것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그들 안에 회개의 결단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악한 일을 버렸으며, 주님의 말씀은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20절) 에베소 지역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매주 예배를 드리러 오는 우리도 매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의 이름은 욕구를 이루기 위한 이름이 아닙니다. 치열한 경쟁의 현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경쟁이 아닌 격려자로 위로하시고 세워 나가십니다. 예수의 이름은 우리가 고상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은 환난이 와도 강하고 담대할수 있는 이름이구요. 자격이 없다고 느낄때에도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너의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내게 부요한 자란다. 너는 나의 존귀한 자녀라고 불러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나라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해치러 가는 다메섹에서 주님은 바울의 이름을 불러주셨고, 예수의 이름이 모든 사람에게 기쁜소식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상투적으로 외우는 것에 익숙해져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 숨길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주의 말씀이 마음 안에 거하면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고 교회와 국가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죄 없이 사신 분이 예수 외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영적 권위이며 축복입니다. 한주를 보내시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불러주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주변에 고통과 눈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함께 하십시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강림후 제 8주)
예수의 세례
The Baptism of Jesus
사도행전 18: 24-28
유민용 목사
24 ○ 그 무렵, ‘아볼로’라는 한 유대인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에베소에 왔다. 그는 학식이 풍부하고, 성경에 두루 능통한 사람이었다. 25 그는 일찍부터 주님의 말씀을 배운 사람으로, 열심히 전도할 뿐만 아니라 예수에 관해서도 정확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26 아볼로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설교를 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27 그런 뒤, 아볼로가 아가야 지방으로 가고 싶어 하자, 신도들은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편지를 써 주어, 아가야 지방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따뜻하게 영접해 주도록 했다. 그리하여 아가야에 도착한 아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뭇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28 그것은, 아볼로가 회중 앞에서 유대인들의 말을 조리 있게 열정적으로 논박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힘 있게 증거했기 때문이다.(쉬운말 성경)
24 Meanwhile, a Jew named Apollos, an eloquent speaker who knew the Scriptures well, had arrived in Ephesus from Alexandria in Egypt. 25 He had been taught the way of the Lord, and he taught others about Jesus with an enthusiastic spirit[h] and with accuracy. However, he knew only about John’s baptism. 26 When Priscilla and Aquila heard him preaching boldly in the synagogue, they took him aside and explained the way of God even more accurately. 27 Apollos had been thinking about going to Achaia, and the brothers and sisters in Ephesus encouraged him to go. They wrote to the believers in Achaia, asking them to welcome him. When he arrived there, he proved to be of great benefit to those who, by God’s grace, had believed. 28 He refuted the Jews with powerful arguments in public debate. Using the Scriptures, he explained to them that Jesus was the Messiah.(New Living Translation)
비혼시대, 혼밥(혼자 밥먹기), 혼여행(혼자 여행하기) 등의 신조어가 오늘날 시대를 말해줍니다. 상대방을 맞추면서 살아가는 것이 불편하니 자신의 삶을 홀로 책임지며 살아가는 싱글라이프에 젊은이들의 공감이 더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부대끼며 그 안에서 서로를 배우고 성숙해 졌다면 오늘날의 시대는 모두가 혼자를 적응하는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동굴 증후군’은 비대면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회적 고립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서 안정감을 느끼다 보니 다시 사람들을 만나려고 할때에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생각들은 세례의 의미도 희석시킵니다. 세례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에 비유할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때 우리는 사랑을 확인하고 약속하고 싶어 합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세례는 회개의 표시이며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습니다. 매년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믿느냐고 문답을 하는 것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의 세례가 무엇인지 자세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에는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있습니다. 19장에서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며 에베소로 갔을때에 그 곳에서 몆 명의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도다” 그러자 바울은 그러면 “너희가 어떤 세례를 받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 선생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가르쳤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들은 바울의 설명을 듣고 즉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안수를 했습니다. 그때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으며, 그들은 방언과 예언을 했습니다. 이후 바울은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강론을 하게 됩니다. 물세례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차원이라면 성령의 세례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복음의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복음의 확신이 들때에 우리는 증거자로 살게 됩니다.
많은 성도들은 성령세례라고 하면, 현상적인 측면을 떠올립니다. 현상적인 것은 성령의 얼굴이지요. 성령충만한 기도를 할때에 방언과 예언 등을 경험합니다. 간절한 믿음으로 기도할때 주의 권능과 힘이 임하게 됩니다. 간절한 믿음이 없이는 이러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마치 풍선 안에 바람을 부는 것처럼 양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을 아시지요? 본질적인 부분이 비본질이 되고 비본질적인 부분이 본질로 둔갑될 때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성령충만을 말할때 흔히 일어나는 오해들입니다.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으면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슬픔이 변하고 기쁨이 충만한 현상이라고 믿습니다. 죄의 모든 유혹으로 부터 완전히 해방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령세례를 받고도 내 뜻대로만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성령의 얼굴은 일그러집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성령의 본질을 깊이 알아가야 하지요. 성령은 사람의 종교적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훈련을 통해서 신앙의 깊은 단계로 들어가 주의 말씀이 전생애를 인도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성령의 본질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여전히 성령님과 비대면으로만 만나고 나눔이 없다면 성령의 충만함에 흠뻑 젖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공동체속에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도록 돕습니다. 이 자리에도 인생의 기로에 선 분들이 계시다면, 성령님의 부드러운 초대에 응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전생애를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18장 24절부터는 3차 전도여행의 시작인데, 누가는 2차와 3차 전도여행 사이에 아볼로라는 사람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볼때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을 하면 어떻습니까? 어떤 인물일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누가는 바울의 2차전도여행을 기록한 후에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아볼로라는 사람은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아볼로의 정보를 줍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어려서 부터 헬레니즘 문화에 익숙한 학문적 도시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또한 학식이 풍부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많이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열심히 전도하고 예수에 대해서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아볼로가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아직은 불완전했다는 사실을 유추해 보게 됩니다.
1세기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의 베드로나 바울과 대등한 위치에 아볼로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아볼로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 영향력이 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교회 안에 세례로 인해서 파가 갈라졌는지, 인물의 영향력에 의해서 나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교회 안에 여러파가 있었습니다. 1세기 초기 기독교를 연구하는 성서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가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바울의 복음적 견해는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교우들에게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했습니다(고전 3:6) 그러나 여전히 나는 바울의 사람이다. 나는 아볼로의 사람이다 하는 사람은 육의 사람이라고 편지합니다.(고전 3:4)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한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몸됨’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당시 학식에 있어서 능통하고 성경을 많이 알았지만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몰랐던 것이지요. 오늘날처럼 인터넷이 없었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점차적으로 전파되기는 했지만 듣지 못한 지역도 있고, 시기적으로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때였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은 예부터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화가 뿌리 깊이 있기 때문에 초기 선교사들은 제사 문화를 우상숭배로 규정했어야 했습니다. 한편에서는 한국의 풍습을 일방적으로 폐지하고 바꾸는 것에 대해서 한국 교인들이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신중론을 제시하기도 했지요. 이처럼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은 모세의 전통을 완전히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고 기록한 것은 예수를 가르치면서도 예수의 부활, 그리고 40일 동안의 현현, 이어서 승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열려져야 합니다.
한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자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대법관이지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예수님께 찾아 온 것을 보면 신경 쓸 일도 있고, 주변에 눈치 볼일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 마음 안에 진리의 대한 갈망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사람들도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만 가지면 큰 폐해를 낳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도 예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선물 받은 책중에 미치 글레이저 (Mitch Glazer)박사가 쓴 ‘이사야 53장 해설서’ 라는 책이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한 랍비가 쓴 책입니다. 1894년 헝가리계 랍비였던 레오폴드 콘(Leopld Cohn 1862-1937)이 미국에 와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게 된 후 유대인들에 대해 목자의 심정을 갖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회를 만들게 됩니다. 이후에 미치 글레이저 박사가 이 선교회를 이어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어머니에게 이사야 53장을 읽어드렸답니다. 유대교인이었던 어머니는 나한테 신약 성경은 읽지 말라고 했는데, 글레이저 박사는 이사야서를 읽어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이사야 53장을 읽어드렸습니다. 어머니는 화를 내며 신약성경을 읽지 말라고 하는데 왜 자꾸 신약성경을 읽느냐고 했답니다. 글레이저 박사는 제가 방금 읽은 것은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것이라고 어머니께 말했다고 합니다.”
이사야 53장은 메시아가 오기 7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인데 여러분은 묵상하게 될때 누가 생각이 나십니까?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1-6)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티오피아 내시가 성경을 읽으며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그가 이사야서 말씀을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묻는 것을 시작으로 성경을 풀어줌으로써 예수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모세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는 사람만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면 내시는 부적합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내시와 같은 자들에게도 닫혀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사람, 모든 나라에게 열려진 것을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의 만남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세례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 시킬 수 없는 연약한 자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매일 매일 예수님 안에서 생겨나는 믿음의 의를 통한 거룩성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모든 일이 잘될꺼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달라지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집니다. 나에게 필요한 말씀의 구절만 적용하며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믿음의 지체들과 분쟁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여러 문제들로 분쟁할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약한 자들과 형제들을 배려하라는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왜냐하면 분쟁은 서로가 높아지려는 마음을 갖고 있을 때 발생합니다. 성육신(Incarnation)의 교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영광을 비우시고 십자가에서 수치와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하향성’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를 포기하고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나를 증명하는 방법을 배워나가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지구상의 수십억명중에 한 사람이 아니라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 여겨 주십니다. 그래서 한번 구원한 존귀한 자녀는 하나님의 손으로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맛을 보면 볼수록 삶속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울시대나 오늘날이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교리는 신론과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핵심인데 우리는 논리적으로 성육신의 교리를 다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조건 믿으라고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수천년 동안 기독교 교리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예수의 길을 따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었다면 이미 기독교 교리는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깨달음으로 믿어진 것입니다. 이것의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임이 확실합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증거자들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성경의 66권을 관통하는 주제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높은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육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낮은 자리를 향해 있나요? 아니면 높은 자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나요? 믿음의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영역일뿐입니다.
아볼로는 이 온전한 복음을 듣고 성령의 감동이 임하니까 자신이 전했던 이들에게 다시 온전한 복음을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로 복음을 전하러 갑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7 그런 뒤, 아볼로가 아가야 지방으로 가고 싶어 하자, 신도들은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편지를 써 주어, 아가야 지방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따뜻하게 영접해 주도록 했다. 그리하여 아가야에 도착한 아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뭇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28 그것은, 아볼로가 회중 앞에서 유대인들의 말을 조리 있게 열정적으로 논박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힘 있게 증거했기 때문이다.
27절에는 그리스도를 만난 성도들의 믿음의 태도가 보여집니다. 예수의 세례를 먼저 받은 평신도 브리스길라 부부는 어떻게 보면 목회자인 아볼로의 증거를 듣자 그의 부족함을 알아차렸지만 핀잔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친절하게 온전한 복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한 아볼로도 그 가르침을 겸손하게 배우며,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는 무능함을 깨닫게 됩니다. 전에는 자신을 증명해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증명해 내기 위해서 아가야 지방으로 갑니다. 기독교 변증은 내 마음을 전하는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입니다. 전에는 가르침을 통해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제는 예수만을 높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는이가 위대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물을 주는 이가 위대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심는 일이 힘드냐, 물을 주는 일이 힘드냐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자기의 주관대로 개인적인 성향대로 누가 위대한가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심는이도 필요하고 물을 주는이도 필요합니다. 수많은 교회의 일꾼들이 그렇게 걸어왔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 했을때 우리의 모든 행위는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내가 가진 것을 기준 삼게 될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소유이든, 지식이든, 믿음 생활에 있어서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우리 안에 교만은 자취를 감추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리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때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의 증인입니다. 심는 일도 물을 주는 일도 즐거운 일입니다. 즐겁게 성실하게 지속하다 보면 아름다운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라가게 하십니다. 삶이 분주하고 마음이 불편하면 심는일도 물을 주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증거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몇년전 제가 살고 있던 도시에 전기와 물이 끊겨서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때가 있었습니다. 자고 있는 두 아이를 안고 16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처음 3층까지는 아빠의 사랑으로 가능했는데 층이 오를수록 땀도 나고 아이들을 깨워서 걸으라고 할까, 쉬다 갈까, 수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따뜻한 팔이 저를 감싸고 곤히 잠든 아이들을 보니 저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작은 아이들의 존재가 감사하고 뭉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이 세상에서 수많은 일을 만나겠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랑하는 자녀들을 안고 묵직한 한발을 떼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먼저 걷고 있는 걸음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힘이 될수만 있다면 더 잘 걸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사랑에 집중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집중하며 16층까지 천천히 찬양을 부르며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냥 올라가도 숨이 차는데 두 아이를 안고 올라가니 점점 속도가 느려졌겠지요. 그러나 내가 안고 있는 두 아이의 무게가 짐이 아니라 사랑임을 느끼며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그런 걸음 아니겠습니다. 무거워도 힘들어도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하나님 안에 머물러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에도, 어느 곳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작은일이든 큰일이든 일상속에서 복음의 확신으로 담대함으로 살아가십시요.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연합하여 선을 이룰수 있는 귀한 과정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의 성숙, 공동체의 성숙, 가정의 성숙의 과정 가운데에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서 그 하나님 나라를 아름답게 살아내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