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0.2023 주일설교

바울의 고별설교 2

Paul’s Last Sermon  2

사도행전 20:24, 32-38

유민용 목사

24 그러나 주 예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일,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 일을 완수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32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온전히 맡깁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신앙을 바로 세워 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 상속받는 유산을 여러분도 차지하게 해줄 것입니다.33 지금까지 나는 다른 사람의 금이나 은이나 의복을 탐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34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나는 나의 두 손으로 열심히 일을 해가면서 생활에 필요한 것들과 동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손수 마련해 왔습니다.35 또한 나는 연약한 자들을 돕는 일에 늘 본보기가 되려고 애써 왔습니다. 할 수 있는 한, 힘껏 일해서 연약한 자들을 도우려고 애썼습니다. 이처럼 내가 본을 보였으니, 여러분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마땅히 연약한 자들을 힘껏 도와야 할 것입니다.”36 말을 마치고서, 바울은 무릎을 꿇고 장로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다.37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작별을 슬퍼하면서, 모두가 크게 소리 내어 울면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38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바울의 말에, 장로들은 몹시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무척 슬퍼하면서 배 타는 곳까지 바울을 전송하였다.(쉬운말 성경)

바울의 고별설교 가운데 내 목숨보다 귀하다고 고백했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이 어떤 것이었을까?라는 생각이 한주 동안 제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많은 설교도 했었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이 죽음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며 담아 내고자 했던 그 깊은 고백을 함께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24절에 보면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완수 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24절)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온전히 맡깁니다.’(32절)  바울 인생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무언가에 이끌려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울에게 ‘은혜와 사랑의 길’은 자신의 생명 보다 더 귀한 어떠한 힘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이 현대교회에는 사라진 것일까요?

32절을 개역개정으로 보면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라고 번역 합니다. 바울은 은혜의 말씀께 부탁을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말씀에 인격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하나님의 인격이 담겨져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묵상할 때에 말씀의 큰 가치를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바르트 (K. Barth : 1886-1968)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 계시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선포된 말씀은 매주일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지는 말씀이고, 기록된 말씀은 우리가 묵상하는 성경을 가르키며, 계시된 말씀은 말씀이 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배에 나와서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는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는 뿌리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젊은 세대는 권위와 전통의 뿌리를 거부합니다. 수세기 동안 내려온 전통을 받아 들이기 보다는 스스로 미래를 선택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한 말씀은 우리에게 참된 교훈이 됩니다.

바울은 말씀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의인화 하듯 문학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이 마음 안에 담겨 질수록 한개인의 인격은 아름답게 빚어지게 됩니다.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이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그 향을 맡게 되듯이. 바울에게는 죽음의 향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가 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 안에 가득 찬 것들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로 가득 찬 바울에게서 흘러 나온 것이 바로 ‘은혜와 사랑의 복음’이었습니다. 우리가 관계에 목말라 하거나 관계를 떠나 홀로 있는 것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진짜 사랑에 대한 목마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것처럼 누군가를 진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인간은 은혜가 없으면 철저하게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경쟁사회속에서 뒤쳐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원래 율법적인 사람이었는데 율법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기를 원하지만 오히려 마음 안에 죄가 가득하다고 곤고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지요. 바울이 말씀 안에서 인격적 관계 안으로 초대되어 보니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가 된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뛰어난 성과를 이루고 높을 성적을 받게 해주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은 속상한 일, 참기 힘든 사람을 만날때에도 그래서 마음이 어렵다가도 주께서 오래 참아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맡길 때에 신앙이 바로 세워 질 것이고,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 상속 받는 유산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세상에서 경험한 것들로 오염되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믿음도 학습된 생각 경험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도덕적 교만에 갇히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된 칸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성경을 묵상해도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의 연약함이 보이지 않으니까 말씀을 알아도 거룩한 종교성만 유지하게 되는 형식만 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하는 이들에게 결국 십자가에서 찌르는 창과 못을 다시 빼서 사랑으로 그 피를 손수 닦아 주시며 자신을 찌르냐고 얼마나 힘들었니? 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심방을 가면 은혜와 사랑으로 정성을 다해 대접해 주시곤 합니다. 이 큰 사랑을 받아도 될까하는 마음이 들지만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하늘가족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말을 건네지 않아도 하늘 가족으로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서로를 이해하는 다른 조건들이 없어도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입술의 말은 한없이 가벼워 지고, 작은 시련과 핍박에도 믿음이 요동치듯 흔들립니다. 마음이 상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가야할 길 조차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자녀를 낳고 실제적으로 키우다 보면 비로소 부모의 은혜를 느끼는 때를 경험합니다. 삶을 통해서 부모의 헌신을 실제로 경험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닮아 갈수록 우리는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겸손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리더십들에게 사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5-31절에서 (1) 자신을 먼저 살피기 전에 양떼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2) 예수의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라고 합니다. (3) 교회 내에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눈물과 겸손으로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세울때에 3년을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이제 자신이 떠난 후에 교회 공동체를 공격하는 자들이 들어 올 텐데, 그들을 흉악한 이리떼에 비유합니다. 이리떼는 흉악하고 잔인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와 대조되는데, 양떼를 늑탈하고 어그러진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리디머 교회를 개척한 팀 켈러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는 남들보다 윤리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사는 이들이 아니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구세주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닫는 이들에게 임한다’라고 했습니다. 1989년 뉴욕의 리디머 교회를 설립한 팀켈러 목사(1950-2023)가 하나님 품으로 가기 전에 몇주 전에 녹화한 영상 메시지를 교회 리더십들에게 공유를 했는데요. 그는 3가지 메세지를 남겼습니다. 첫째는, 사명자는 칼날 위에 서라는 것입니다. 세상속에 참여하되 동화되면 안되고 구별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소비만 하지 말고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뉴욕에 와서 이력서도 넣고, 행복한 교회 경험도 하고 싶고, 좋은 음식점도 가고 싶겠지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일에 시간과 돈과 인생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자신과 교회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이름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림으로 죄의 값을 치른 예수님을 전하며 살라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남긴 세번째 조언은 자신의 이름을 위한 명성과 자격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역의 성공과 명성을 그리스도인들이 정체성으로 삼을 경우에 이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조언했습니다.

교회도 세상과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을 하면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합니다. 세상만큼 성과를 내야하고 세상보다 더 그럴듯 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니까 교회가 세상의 방법으로 사람을 대하고 경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세워가려는 순간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참된 리더들이라면 교회를 세우는데 나의 생각과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한마디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야기 해야 합니다. 자신의 태도에 있어서는 엄격하게 점검하고, 다른 이에게 향하는 마음은 관대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는 전제하에 타자를 바라 보는데 이러한 관점은 은혜의 인격성을 파괴하는 뿌리가 되지요.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본을 보인 것처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연약한 지체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하는 은혜의 말 한마디가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작은 것에서 부터 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 보내는 삶이 복인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주님의 거룩함을 세상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푯대를 향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사명자에게 꺾이지 않는 마음은 예수님의 겸손을 겸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여길때 하나님이 누구인지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을 현실로 받아 들이는 것은 어쩌면 믿음의 경주자가 되어 부상을 당할 위험한 순간에 놓이기도 하고,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남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흔적이 사명자의 영성을 더 깊어지게 합니다.

이제 바울은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예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생이 끝나는 죽음은 언젠가 모든 사람이 홀로 통과해야 할 관문입니다. 죽음과 헤어짐의 두려움이 바울이라고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믿음이 있을까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열심과 어떤 사명을 기억할 수 있을까요?

믿음은 그리스도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을 통과 할 때에는 사랑하는 가족도 대신 할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죄로 인해서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예수님만이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풍랑, 경제적 풍랑, 인생의 문제의 풍랑이 몰려올때에 주님이 함께 계심을 알고, 잠잠히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풍랑은 멈추게 됩니다.

바울은 마지막 설교를 마친 후에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합니다. 이 구절만으로도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다 울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항구에서의 뜨거운 눈물 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울고 에베소 장로들도 울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달려갈 길을 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가 있지요? 그러나 주님이 보이신 길은 좁은 길이고 생명의 길입니다.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함께 기도하는 그 장면이 너무 진하게 그려집니다. 바울은 가야할 길이었기에 함께 했던 장로들을 뒤로하고 밀레도 항구로 갑니다. 다시 오지 못할 그 길이지만  그의 영혼은 성령에 이끌려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의지를 사로잡은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뜨거운 역사는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에게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설교를 마친 후에 모두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의 교회가 사랑으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시며 여러분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복음과 은혜, 사랑과 눈물의 현장을 품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길은 우리가 계속 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항해하며 바라 본 그 바다는 주가 주신 은혜와 사랑의 강물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탄 배는 방향 없이 떠다니는 배가 아니라, 항구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키를 잡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돛에 바람을 불게하여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항해였을 것입니다. 한주도 인생의 바다속에서 주와 동행하시며 승리하는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08.13.2023 주일 설교

(성령강림후 제 11주)

바울의 고별설교 1

Paul’s Last Sermon  1

사도행전 20:17-24

유민용 목사

17 ○ 밀레도에 닿자, 바울은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오도록 전갈을 보냈다. 18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도착하자, 바울이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에 첫발을 들여놓은 그 날부터 오늘까지 여러분과 함께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19 나는 모든 겸손과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겨 일해 왔습니다. 유대인들이 나를 해치려고 음모를 꾸민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20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중 앞에서나 여러분의 가정에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왔습니다.
21 나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모두가 회개하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강조했습니다. 22 이제 나는 거역할 수 없는 성령의 강한 힘에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무슨 험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23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가는 도시마다 투옥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내게 알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4 그러나 주 예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일,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 일을 완수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쉬운말 성경)

유명한 배우 톰 행크스를 아시지요? 지난 5월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에 연설자로 선정되어 왔는데요. 하버드 총장 로렌스 바카우는 톰행크스가 타고난 공감능력과 깊은 이해심을 보여준 인물이기에 선정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연설을 시작하며 자신을 “하버드 졸업생, 교수진 또는 저명한 동문들과 관련이 있기 위해 일한 적도 없고, 수업에 시간을 보낸 적도 없고, 도서관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채로, 나는 그런 일을 한 사람으로 연기하며 잘 살고 있다”고 소개하며 웃음을 자아냅니다. 그는 새로운 사명감으로 사회속에서 새출발하는데 있어서 진실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시대는 진실이 점점 더 위협받고 있고 앞으로 참여하게 될 사회의 전투는 끝이 없는 싸움이라고 강조하며 졸업생들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삶의 모든 날들에 있기를 축복하며 연설을 마쳤습니다.

톰 행크스의 연설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생의 원리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세상이 잃어버린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현대사회는 19세기에 비해 ‘생산성’이 천배 이상 높아졌다고 합니다. 과거와는 달리 개인이 직접 휴대전화로 컨텐츠들을 송출합니다. 개인이 기자(記者)도 되고 사장(社長)이 되기도 합니다. 개인방송으로도 세상과 소통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시대에 ‘앎의 대한 욕구’는 채우기가 매우 쉬워 졌지만 ‘진실한 사람들의 삶’은 갈수록 상실 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성경의 가치를 ‘앎에서 삶으로’, 삶속에서 ‘주의 말씀의 가르침’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믿음 사이에서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지, 어떤 목표를 향해 가야 하는지 바울의 삶에서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사명자에게는 믿음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사명(使命)의 사전적인 의미는 맡겨진 의무입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순종하며 나아가는것이 사명입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언제든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운명을 미리 예측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고 구원을 믿음으로 갈망하며 입술로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 성령을 주시는데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우리안에 성령님을 확신할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용하는데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혼인 잔치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심부름 하는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특별한 일을 보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했을 때에 물이 변해서 포도주로 된 사건을 유일하게 본 사람들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는 한층 더 깊어지는 힘이 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밋밋한 인생이 말씀대로 순종할때 포도주로 변하는 향기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교만은 십자가에 부딪일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산산조각이 납니다. 하나님의 확증된 사랑이 부어질때에 사명자에게는 필요한 것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의 과정을 이뤄갈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왜 힘든 것일까요? 타락한 자유의지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봄이 와야 얼음이 녹게 되듯이 진심으로 믿고 죄를 회개할때 은혜로 구원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 옆에 달린 강도는 십자가에서 그를 믿고 진실로 고백하여 죽음 직전에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롭다는 위장된 주인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아무리 선한행위도 하나님의 거룩함에 비할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인생의 주도권을 맡길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사도행전 20장은 3차 전도여행의 경로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머물 수 없게 되자 2차 전도여행에서 개척한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기로 결정합니다.(1-3절) 누가는 구체적인 도시 이름을 사도행전에서 거론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바울이 그만큼 분주하게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 일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서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웠던 마게도냐의 지역인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의 공동체를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굳게 설수 있도록 권면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누가는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야 이르러”라는 말씀으로 마게도냐에서의 3차 전도 여행의 사역을 짧게 요약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항구 도시인 겐그리아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을 거쳐 안디옥으로 가려던 2차 전도여행과 비슷한 일정을 계획했지만 유대인들이 자객을 보내서 바울을 해하려고 공모하고 있었습니다. 고고학자이며 신학자인 윌리엄 램지(William M. Ramsay :1851-1939)의 주석을 보면, 당시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절기를 맞아 수리아로 가는 배를 많이 이용하게 되었는데 바울이 이 배를 타게 탈 때에 바다에 던져 버리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를 해치려는 음모는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여 다시 육로를 통해 마게도냐 지역으로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수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바울은 드로아에서 7일간의 사역을 마치고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육로를 택하게 됩니다. 디모데와 일행들은 배를 타고 가지만 바울은 홀로 25마일 정도를 걸어서 밀레도에 도착합니다. 바울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까요? (13절) 바울은 이제 3차 전도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밀레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3년 동안 사역했던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오라고 청했고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바울의 설교가 대부분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향한 설교였다면 밀레도에서의 설교는 서로 함께 주의 길을 걷는 사명자들에게 하는 설교입니다.

사명자에게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울의 설교에서 사명자의 간절한 겸손과 눈물의 길을 볼 수 있습니다. (19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바울은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사명자들에게 눈물이 언제 납니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때 눈물이 납니다. 성령께서 울게 하시니 울고, 부족한 죄인을 살려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울지 않습니까? 눈물은 주님과 우리의 마음을 이어줍니다. 사명자는 아픔과 상처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몇주전 예배 마지막 찬양 찬송가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찬양을 부르는데 찬양의 가사에 우리의 삶이 있더라구요. 부르는 내내 눈물이 흘렀습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갑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빈궁한 삶이 부해지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갑니다.  슬픈자를 위로하게 하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는 그 구원의 기쁨이 우리의 삶에 찾아와야 합니다.

바울은 겸손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겸손으로 세워집니다.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보혈만큼 뜨거운 섬김은 없습니다. 사명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함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평생을 쓰임 받았던 테레사 수녀는 자신을 몽당연필이라 여겼습니다. 그녀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아무리 불완전한 도구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하나님은 창조의 손으로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는 닳고 싶지 않아합니다. 섬김에 있어서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많이 쓰인다고 해서 몽당 연필이 색을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진한 색을 내게 됩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만년필이라 해도 사람의 손에 들려지지 않으면 가장 초라한 도구가 되어질 뿐입니다. 때론 약하고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임 받게 되면 그것이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각성마다 그에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3절)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간계로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았습니다. 사명자의 길은 매순간 중단될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성령에 매여 걷도록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의 의지는 성령에 매여 있습니까? 도대체 성령에 매여 가고자 한 바울의 사명감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 온 이유를 잃어버린 양들을 구하기 위해서 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뜻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릴레이 경주는 일정 구간을 나누어 달리는 경기입니다. 먼저 뛴 사람은 배턴을 넘겨주고 같은 마음으로 다음 주자가 달려가는 길을 뜨겁게 응원합니다. 자신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전 주자가 전달하는 배턴을 꼭 받아서 뛰어야 합니다. 혼자 뛸수가 없는 경기이지요. 우리는 모두가 함께 뛰는 러닝 메이트입니다. 이제 가을과 겨울이 오면 여름의 뜨거움도 그 자리를 내어 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입니다. 주님의 사명은 그날에 약속의 소망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고 나니까 눈이 열려집니다. 예수가 오셔서 역사의 중심, 인생의 중심에 있음을 깨닫는 눈이 열려진 것입니다. 구원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꿈이 생긴 것입니다. 세상은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할때에 그 가치가 올라가지만 바울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영광은 순식간에 빛을 잃는 것들이며 그의 표현을 빌리면 배설물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자’로 살던 그가 사명에 눈을 뜬 것입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진 것입니다. 이제 나는 거역할 수 없는 성령의 강한 힘에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거기서 무슨 험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23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가는 도시마다 투옥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내게 알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4 그러나 주 예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일,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 일을 완수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에 초대되는 것 보다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요?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의 계절이 찾아오고, 매일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모든 세대가 그리스도의 꿈을 꾸는 일에 참여하는 일 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주님이 곁에 찾아 오셨음에도 저 멀리에서 지켜 보려고 했던 마음을 내려 놓고 결단합시다. 예수께 받은 사명은 고난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매인 바 되어 보호하시는 은혜에 이끌려 가는 일입니다. 바울이 십자가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 가운데 생명의 빛이 그의 영혼을 강하게 비추고 있었던 것입니다.성령께서는 바울을 성령으로 인쳐 주시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참된 기쁨과 능력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스코틀랜드인으로 1924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중국 선교사로 사역했던 에릭 리델(Eric Liddell 1902-1945)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렸던 사람입니다. 에릭 리델(Eric Liddell)은 많은 영국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1924년 제8회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 종목인 100미터 경기 예선전이 주일로 확정되자 과감히 경기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주일은 주님을 위한 날이라는 확고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의 결정은 달리는 목적이 자신의 우승과 야망이 아닌, 분명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릭의 불참 소식이 영국 전역에 전해지자, 국민들은 그를 두고,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조국의 명예를 버린 자’, ‘광신주의자’라며 일제히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왕세자까지 나서 리델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주님의 법 안에서, 주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습니다. 갖은 비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리델은 기적적으로 400m 경기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됐고, 금메달을 따고 세계신기록을 세웠습니다.

리델은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달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명자는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가상과 현실이 같아 보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참된 사명과 위장된 사명이 모호하고, 참된 겸손과 위장된 겸손도 온전히 구별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홍수가 나서 집에 엄청난 물이들이닥쳤는데 살기 위한 길을 위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늘나라를 경험한 사람은 진실로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모두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즐겁게 노래하고 찬송했습니다. 고난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거운 짐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고난의 길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눈물과 참된 겸손으로 맡겨주신 사명자로 부르실 뿐입니다. 성령은 그 길을 걷는 자를 보호해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생명의 영이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주도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의 생기 가운데 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