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8.2023 주일 설교

사울에게 임한 성령님

Holy Spirit who came to Saul

사도행전 9:8-11,18,  고후 12:9

유민용 목사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행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성 안으로 들어갔다.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지냈다. 10 한편, 다메섹에는 ‘아나니아’ 라는 한 제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주님께서 환상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 그를 부르셨다. “아나니아야!” 그가 대답했다. “예, 주님!” 11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곧은 거리’로 가서 ‘유다’라는 사람의 집을 찾아, 거기서 다소 사람 사울을 만나라. 그는 지금 거기서 기도하고 있다. 18 바로 그 순간,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들이 떨어지더니, 다시 앞을 보게 되었다.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즉시 세례를 받았다.

12:9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게 충분히 은혜를 베풀었다. 왜냐하면 나의 능력은 네가 약한 데서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온전히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 나의 연약함에 대해 크게 기뻐하며 더욱 자랑할 것입니다. (쉬운말 성경)

8 Saul picked himself up off the ground, but when he opened his eyes he was blind. So his companions led him by the hand to Damascus. 9 He remained there blind for three days and did not eat or drink. 10 Now there was a believer in Damascus named Ananias. The Lord spoke to him in a vision, calling, “Ananias!” “Yes, Lord!” he replied. 11 The Lord said, “Go over to Straight Street, to the house of Judas. When you get there, ask for a man from Tarsus named Saul. He is praying to me right now. 18 Instantly something like scales fell from Saul’s eyes, and he regained his sight. Then he got up and was baptized.

2 Corinthians 12:9

9 Each time he said, “My grace is all you need. My power works best in weakness.” So now I am glad to boast about my weaknesses, so that the power of Christ can work through me. (New Living Translation)

성령강림후 세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사울에게 임하신 성령’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 스데반 순교 사건에서 잠시 등장한 사울은 그 이후에도 흩어진 기독교인들을 잡아오기 위해서 열심을 내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다른 지역의 다메섹까지 가기 위한 법적 효력이 있는 공문까지 청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의 거리는 200km이상 떨어진 지역인데도, 바울은 다메섹까지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을 섭니다.

사울이 이렇게까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율법과 전통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여겼으며, 기독교 신앙이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교의 율법에 도전한다고 느껴 강하게 분노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전파하였을때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는 사람들이 경계대상이었고,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을 우려하여 서둘러 가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이 태어난 곳은 길리기아 다소지역입니다. 다소지역은 교통과 상업, 교육이 발달한 도시로 로마 제국 지방 행정수도였습니다. 바울은 태어나면서 부터 로마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행22:39) 그의 아버지는 텐트를 만드는 직업이었으니, 과거에 1세대가 미국에 와서 힘든 일들을 하면서 2세대를 키웠던 것처럼 바울은 다소지역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 부터 유대 히브리 문화와 로마식 헬라 문화인 이중 문화를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는데요. 바울이라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 하나님께 묻다’라는 뜻이며이고,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 으로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9장은 사울의 회심사건과 성령의 통한 신비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신비는 유대교를 뛰어넘어서 기독교 복음이 온 세상을 향해 가게 되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이 추구하던 유대교 신학을 어떻게 내려 놓게 하셨고,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바울의 마음 중심에 어떻게 자리 잡게 하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내가 끝난 자리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만나게 됩니다.
4 사울은 그만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그때 한 음성이 사울에게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5 사울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 안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7 사울과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들에게는 단지 소리만 들렸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행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성 안으로 들어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지냈다.

다메섹에서 주님의 빛을 본 후에 사울은 시력을 잃게 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사울에게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다메섹까지 다른 사람의 손을 의지해서 걸어야만 했습니다. 스스로 걸을 수 조차 없는 지경이 된 것이지요. 평생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 두려움과 불안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을것입니다. 바울은 그 시간 동안에 지난 날들을 회고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듣지 마시고, 바울이 처한 상황속으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느날 시력을 잃었다고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평생토록 시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잠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로마 시민권, 가말리엘의 학식,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는 자부심도 철저하게 낮아졌을 것입니다. 그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인생이 망가진 것입니다. 이 일이 바로 다메섹에서 주님의 빛을 경험한 바울의 상황이었습니다. 주의 빛으로 나아가게 되면 새 힘이 임하고 회복이 되어야 할텐데 바울은 오히려 어떤 것도 할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가 믿었던 모든 기반이 흔들리는 것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 통계를 보니까 ‘실패,  거절, 고독,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기피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공 신화에만 마음을 기웃거리며 동경한다면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하는 것이지요. 복음은 매우 단순합니다.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이 오심으로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이제껏 믿고 의지하던 능력이 나의 능력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늘 희망적인 것들만 찾아오지 않습니다. 때때로 삶의 의욕이 없는 날도 있고, 절망적인 상황속에 놓여질 때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인생길을 걷게 될때도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인생길 위에서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부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는 바울을 위해 이미 다메섹에 제자 아나니아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10 한편, 다메섹에는 ‘아나니아’라는 한 제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주님께서 환상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 그를 부르셨다. “아나니아야!” 그가 대답했다. “예, 주님!” 11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곧은 거리’로 가서 ‘유다’라는 사람의 집을 찾아, 거기서 다소 사람 사울을 만나라. 그는 지금 거기서 기도하고 있다.

며칠전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사울이 유다 사람의 집에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눈이 뜨인 사람과 뜨이지 않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일평생 본인의 눈으로 보는 세계만이 전부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과 기도로 영적인 눈을 뜬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눈을 뜬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면 우리를 통해 세상속에 아나니아가 늘어 날것입니다. 다른 세계를 본 사람들에게는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아나니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이전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려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참된 길을 알려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16 그 사람이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지, 내가 그 사람에게 보여 줄 것이다. 17 “사울 형제여, 당신이 이리로 오는 도중 당신에게 나타나셨던 주 예수께서 당신을 다시 보게 하고 또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 저를 여기 보내셨습니다.” 18 바로 그 순간,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들이 떨어지더니, 다시 앞을 보게 되었다.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즉시 세례를 받았다.

 바울에게 예수가 달리신 십자가는 큰 장애물이었지만 세례를 받고 성령이 충만해 지자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게 되는 고난은 말할수 없는 축복이 됩니다. 내 안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증해 가는 것입니다.

15 그러나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가거라! 그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그들의 왕들에게,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내가 특별히 선택한 그릇이다.

내가 특별히 선택한 그릇이다

주님은 사울을 쓰시기 위해서 다메섹에서 그의 이름을 2번이나 부르셨습니다. 어려서 부터 사울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많이 들고 자랐겠습니까?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부르는 그 이름은 자신의 이름이 불려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이 불려진 것입니다. 사울이 그날 들은 소리는 그 동안 사울이 박해하는 예수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그릇은 인생이라는 나를 위한 욕망을 담는 일에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말씀을 채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지금 기도하는 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사람이고, 믿는 자들을 결박할 권한을 가지고 온 사람이 아니냐는 대답에 재차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을 보면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의 빛을 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말씀을 전하고 고난이 오면 고난을 당하고 핍박이 오면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길을 걷습니다. 이방인들을 위해 교회를 세우며 유대인로 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모함을 당하고 무고한 재판을 받는 시간들을 경험합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행 22:30) 이후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 서게 됩니다.(행 24:23) 세번째 재판은 로마 신임 총독이 된 베스도 앞에서의 재판입니다.(행 25:1-12) 마지막으로 아그립바 왕 앞에 서게 됩니다.(행 26:1-32) 산헤드린 공의회,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삶을 간증하고, 결국 로마를 향하는 배에 죄수의 신분으로 호송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난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예언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바울이 독사에 물려 죽을뻔한 경험도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가 고난을 피해가며 사역을 했다면 과연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말씀이 이뤄졌을까요? 바울이 지낸 감옥에서의 시간들은 돌이켜 보면 바울의 신변을 보호하는 가장 안전한 곳이 되어 주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며 바울의 서신들을 남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영에 이끌린 바울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방인과 임금들을 만나게 됩니다.

영화 The Passion of Christ의 감독이며, 배우인 멜 깁슨은 이 작품에 배우로 출연하지 않지만 딱 한번 영화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등장을 합니다. 얼굴을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을 땅에 눕히고 대못을 손에 들고 못박은 로마 군병의 손이 바로 멜 깁슨의 손이라고 합니다. 그는 그 장면을 통해 자신이 예수를 못박아 죽인 장본인이라는 것을 영화속에 표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영화사에서는 ‘예수의 수난 12시간 이야기’ 만으로 흥행할수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는 성령이 나에게 임하셨고 주님은 나에게 복음 전파의 도구로 이 영화를 만들기를 명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개봉 첫날부터 극장마다 부흥회가 시작되고, 강도와 살인범이 영화를 보고 회개하고 자수했고, 낙심자들이 다시 회개하며, 주께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멜깁슨은 영화 상영을 반대하는 유대 단체들의 거친 질문들 앞에서 “여러분 내가 그분을 죽였습니다. 저의 죄가 그분을 돌아가시게 했고, 저의 죄 때문에 수난을 받으셨다”고 인터뷰 합니다. 예수를 부인하고 나로 살아가는 삶의 죄앞에 놓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로 그 사랑을 확증하신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고난은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사랑의 줄에 매인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나의 약함은 주님의 능력이 되십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성서학자들은 육체의 가시가 간질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육체의 가시가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점이 오히려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해 지는 도구가 됨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힘의 위험성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애 동안에 자신의 힘을 내려놓는 일에 마음을 쏟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힘으로 저항하지 않고 무능한 자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힘으로 보면 예수가 달린 십자가는 실패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위대한 실패’가 되었습니다. 저는 실패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공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과 실패로 복음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복음의 결과일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이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히 11:10-12)

우리가 가지고 있는것중에 영원한것이 있을까요? 물질도 시간도 명예도 기억력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만 영원합니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처럼 우리 삶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세번이나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문제를 없애 주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의사 누가라는 동역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갖추어야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약함을 고백할 때에 담겨집니다. 우리의 약함은 믿음의 양약이 되어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여러분은 언제 더 간절히 기도하십니까? 삶의 고통이 찾아오고 힘들 때 절실하게 기도하게 되지 않습니까? 내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우리는 그 힘을 의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동서남북이 가로막혀 길이 보이지 않고, 벼랑끝에 서게 될 때에 그제서야 하나님을 찾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삶의 가시들이 제거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요.

약함의 자리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오늘도 빚어지고 다듬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삶이라는 대본을 받았습니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선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고 내 삶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우리안에 아픈 가시의 상처도 아물게 됩니다. 내가 먼저 기도의 사람이 되면 됩니다.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게 하는 분이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힘든 광야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때에도 언제나 그러하셨듯 우리의 손 잡아 주시고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인도하심이 망망한 바다의 끝, 외로운 광야의 자리에도 변함없이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11 2023 주일설교

(성령강림절 두번째 주일, 환경선교주일)

스데반 안에 계신 성령

The Holy Spirit in Stephen

사도행전 7:55-60

유민용 목사

55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56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57 그러자 그들은 귀를 막고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며 그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어 58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목격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59 그들이 돌로 칠 때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60 그러고 나서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여,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끝낸 후 그는 잠들었습니다. (우리말 성경)

55 But Stephen, full of the Holy Spirit, gazed steadily into heaven and saw the glory of God, and he saw Jesus standing in 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 56 And he told them, “Look, I see the heavens opened and the Son of Man standing in 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 57 Then they put their hands over their ears and began shouting. They rushed at him 58 and dragged him out of the city and began to stone him. His accusers took off their coats and laid them at the feet of a young man named Saul. 59 As they stoned him, Stephen prayed, “Lord Jesus, receive my spirit.” 60 He fell to his knees, shouting, “Lord, don’t charge them with this sin!” And with that, he died.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성령강림후 두번째 주일이며 환경선교주일입니다. 26주 동안 성령강림절기를 보내게 될텐데, 스톨의 녹색은 믿음의 성장을 표시하는 색깔입니다. 이 스톨을 보실 때 마다 믿음을 성장시키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감싸주심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설교가 담긴 매우 긴 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로 발생한 순교 사건이 소개되지요. 스데반의 순교는 구원사에 있어서 ‘적색순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환경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인한 수많은 북극곰들의 죽음과 발생하는 화재들, 폐수로 인해 죽어가는 바다 물고기, 환경오염으로 인한 수많은 자연재해 등은 ‘녹색순교’가 아닐까요? 우리는 녹색이 은총인 시대를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지으시고 난 뒤에, 사람을 초대해 주셨습니다. 피조세계를 잘 관리하라는 청지기의 사명을 주신 것이지요. 그러니 창조신앙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 창조된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삶의 일터와 땅을 밟고 살아가는 현장에서 성령께서 일하고 계심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터로 나가서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것은 매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적색순교’의 박해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갑니다. 한편으로 보면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탐욕에 물든 마음을 내려 놓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은 매일 순교의 삶을 연습하는 것이지요.

태초에 하나님은 혼돈, 공허, 흑암이 있던 곳에 에덴동산을 창조하셨습니다. 지상의 파라다이스입니다. 에덴을 만드시고 인간을 초대했을때에는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것입니다. 예컨대, 여기 그림 한장이 있습니다. 후안 후아네스(Juan de Juanes, 1510-1579)가 그린 스데반 집사의 그림인데요. 그는 예술가 가문에서 태어났고 16세기 후반에 ‘스페인의 라파엘로’로 불렸을 정도로 유명한 발렌시아 화가로 성장합니다. 500백년 전 그가 그린 스데반 집사의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림 안에는 그의 생각과 시대적 배경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미술에 조회가 깊어 질수록 더 많이 발견될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 창조된 인간 안에는 ‘신적갈망’이 있고 분명히 보여져 있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가는데 있습니다. 창조세계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있음에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로 인해 창조자의 숨결을 모른다고 핑계되고 변명하는 것이지요. 죄로 인해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후, 사람들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바벨탑을 쌓으며 엄청난 발전을 이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왔던 인간 생명의 신비에도 도전합니다. 유전공학의 발달은 마음만 먹으면 복제인간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문제는 문명과 과학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 20, 21절에서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 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지구의 파괴는 하나님을 떠나 인간중심의 발전을 이룬 어두운 그림자라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사람의 신앙 안에는 성령의 일하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Στέφανος)은 ‘면류관’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요. 그의 짧은 삶은 우리가 무엇을 바라 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해 줍니다.

첫째로, 스데반의 삶속에는 성령의 영이 가득했습니다.

55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스데반은 사도행전 6장 5절에 집사로 선택된 일곱 사람들 중의 한명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당시에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헬라파 유대 과부들이 돌봄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은 7명의 집사를 택하기로 결정했고, 그 선택 조건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뽑힌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라고 공회 앞에서 설교를 합니다. 스데반은 성경에 능통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설교에 언급된 인물들을 보면 아브라함으로 부터 이삭, 야곱, 그의 열두 아들들, 모세, 여호수아, 다윗과 솔로몬까지 구속사를 꿰뚫고 열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그렇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는 너희들이 죽였다고 책망합니다. 제 눈에 띄인 것은 스데반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너희가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7:51)

유대인들은 직면하기 싫은 죄가 드러나자 죽일듯이 달려듭니다. 감정의 노예된 것처럼 분노하며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는 맞으면서도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과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요한 복음 1장 14절에 보면 ‘예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언급하는데, 사도행전 6장 8절은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라고 소개합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합니다. (막 15:1) 스데반도 백성, 장로, 서기관에게 잡혔습니다(행 6:12)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예수를 죽일 거짓 증거를 찾았고(마26:59) 스데반이 설교할때에도 그들은 처벌하기 위해 거짓 증인을 세웠습니다.(행 6:13) 성경은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라고 하면서, 스데반 집사의 얼굴도 ‘천사와 같았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도록 기도했고’, 스데반도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의 내용을 보니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 기도는 예수의 마지막 기도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이 일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전적인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은 하루 아침에 형성되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삶을 보면 성령이 충만했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의 삶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성품이 보여진다면 그건 믿음으로 인내한 시간들이 빚어 낸 결과일 것입니다.

둘째로, 스데반은 재창조된 세계를 보았습니다.

56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모든 자녀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 신뢰가 쌓이고 믿음이 형성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말씀 안에서 관계적으로 응답하는 법을 매일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받는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밖의 세계가 두렵다고 해서 뱃속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버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이지 보여 주십니다.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생명이 자라간다면 순종하는 일에 어떻게 머뭇거릴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은 성령의 임재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채워지고, 예수께서 함께 하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내적 친밀감을 통해 ‘재창조된 세계’을 본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신생의 표적들’(The Mark of the New Birth)이란 설교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된 표적이 나타나는데, 첫번째 표적은 그리스도를 확신할 때 부어지는 ‘살아있는 믿음’과 두번째 표적은 ‘산 소망’입니다. 죽은 소망은 모든 악한 말과 나쁜 행실의 근원이며,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산 소망’은 세상에서 막연히 잘 될거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진실하게 살아간다는 ‘양심의 증거’이고, 어떤 상황에도 절망 가운데 보호하시는 소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셋째로, 스데반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58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목격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58절에서 사울이라는 청년이 처음 등장합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청년이었습니다.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많은 이들의 숭고한 피가 새시대의 문을 열기 위한 희생이었듯 ‘적색은총’은 생명의 강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매일의 십자가를 지며 우리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걸어 간다면, 주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스데반의 피값이 바울의 생애에 이어짐을 보게 되는데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빛을 본 후에 바울의 삶의 가치와 방향, 삶의 이유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신생의 표적’입니다. 이후 바울은 스데반과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가서 전도를 하지요. 또한 동족 유대인들 설득하다가 핍박과 박해 속에서 고소를 당하고 결박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바울은 스데반의 일을 기억하지 않았을까요? 행 22:20절을 보면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 바울의 사역을 보면 성령이 충만했던 스데반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스데반에게 바울의 선구자(先驅者)가 되어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던 바울은 그 복음을 경험하고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던 AD 30년경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기독교는 엄청난 박해로 믿는 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할수도 있구나 겁도 났을 것입니다. 죽음이 현실 앞에 다가오니까 결국 마음이 흔들리고 뿔뿔히 흩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흩어진 자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8:4)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의 흩어짐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면은 세계 선교로 퍼져가게 되는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이것의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우리가 사는 3차원의 공간을 X,Y,Z라고 했을때, Z라고 하는 부분이 없으면 우리는 그 사물을 인지할 수가 없습니다. Z라는 높이가 없다는 것은 사물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Z를 성령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아이가 어머니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때때로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도 성령의 힘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 성령은 지금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신앙의 깊은 세계로 초대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계와 멀어지고 계신가요? 아니면 가까이 들어가고 계신가요?

우리는 성령의 일하심을 모두 다 가늠할 수 없습니다. 제한없이 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믿을 뿐입니다. 누가는 스데반이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는 새 하늘 새 땅에서 다시 깨어날 테니까요. 스데반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얼 얻으려고 열심히 달려가십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어두운 세상에 새벽을 깨우며 빛을 밝히는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