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6. 2023 주일설교

(성령강림후 마지막 주일)

위대한 기적

A Great Miracle

사도행전 28:1-10

유민용 목사

1 우리가 무사히 해변에 상륙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곳이 멜리데 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섬사람들은 우리를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고 날이 추웠기 때문에, 그들은 불을 피워 주면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3 바울이 마른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아다가 불 속에 넣었다. 그런데 나뭇가지 속에 있던 독사 한 마리가 뜨거운 불기운에 놀라 튀어나오더니, 바울의 손에 착 달라붙었다. 4 섬사람들은 독사가 달라붙은 것을 보고 서로 수군거렸다. “저 사람은 살인자가 틀림없다. 바다에서는 살아났지만, 정의의 여신이 그 사람을 그대로 살려두지 않는구나.” 5 그러나 바울은 그 뱀을 불 속에 떨어뜨렸고,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6 섬사람들은 바울의 몸이 이내 부어올라 당장 쓰러져 죽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생각을 바꾸어,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다. 7 ○ 해안 가까운 곳에는 그 섬의 추장인 보블리오가 소유하고 있는 농장이 있었다. 그가 우리를 그리로 초대해서, 사흘 동안이나 친절하게 대접해 주었다.
8 그때 마침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고열과 이질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었다. 바울이 가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손을 얹어 낫게 해주었다. 9 이런 일이 생기자, 섬 안에 있는 병자들이 앞다투어 바울을 찾아왔고, 병자들은 모두 고침을 받았다. 10 섬사람들은 우리를 극진히 대접해 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그 섬을 떠날 때는 여행하는 데 필요한 온갖 물건들을 배에 실어 주었다. (쉬운말 성경)

오늘은 성령강림후 마지막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 스물여섯번째 주일이 지나고 나면 교회력으로는 한해가 또 다시 시작됩니다. 12월 첫째 주일이 한해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순환은 매년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고, 사순절 기간에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며, 부활주일을 거쳐 승천하신 주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26주 동안 성령강림절기로 보내게 됩니다. 예수님 생애에 대한 주기는 우리에게 예수의 옷을 입혀 주고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생애 사이클에 삶을 조율해 나갈 때 그리스도와 한몸의 원리로 연합되어지게 됩니다.

지난 주일 바울과 그 일행은 죽음의 유라굴로 강풍을 만나 갈 방향을 잃어 버린채 800km를 표류했습니다. 14일이 지나고 난 후 아침 그들이 타고 있던 배가 한 섬에 상륙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풍랑에 의해서 800km를 표류한 배가 로마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있는 멜리데 섬에 걸렸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멜리데 섬 근처 뻘에 배 앞부분이 걸려서 배가 파손되자 수영할 수 있는 사람들은 먼저 헤엄을 쳐서 육지로 나가고 이후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과 부조물을 의지해 헤엄쳐 지상으로 나왔습니다.

인생이 그렇지요. 풍랑을 만나고 역경속에 놓여 질 때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막연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오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믿음의 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고 부르심을 따라 응답하며 믿음으로 걷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다 한 가운데 항해하는 것 같을 때에도 믿음으로 부르심에 응답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해도 달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살 소망 조차 잃어 버렸던 이들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은 배가 파선 되는 위기속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게 육지에 상륙했으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이끄심을 알게 해 줍니다.

2절을 보면 때마침 비가 오고 날이 추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가 11월이니까 겨울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 낮은 기온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노년의 때가 되어 육체가 쇠약해진 바울을 비롯해 겨울 바다를 헤엄쳐서 상륙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불이었습니다. 누가는 그 섬에 살던 사람들이 불을 피워 주면서 친절하게 대해 주며 맞이해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어찌 보면 276명은 배가 난파되어 구조된 난민들입니다. 14일 동안 먹지 않았으니까 몸은 극도로 쇠약해 져 있었을 것이고, 몸에 비축했던 당분도 바닥이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어진 환경속에서 섬에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 통해서 환대를 받게 하시고 3개월이라는 시간동안 바울에게 쉼을 주십니다.

(1) 환대의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갑자기 몇 백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섬에 상륙했다면 경계하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2023년 세계난민의 날 국제구조위원회에서는 유엔난민기구(UNHCR)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전 세계적으로 난민들이 많아져서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된 이주민이 1억 1천만명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인데요. 아무래도 계속되는 전쟁과 여러가지 전염병으로 인해 세계경제도 불안정하다 보니까 안타깝게도 안전을 찾아 헤매는 난민들이 환영 받지 못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경쟁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현대사회속에서 낯선 이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는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섬사람들이 보여준 모습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게도 인상 깊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구조된 사람들을 환대했던 섬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믿음의 태도는  세상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구원은 자기중심적 죄의 뿌리가 뽑히고 하나님의 사랑에 다시 뿌리 내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내가 원하는 것만 요구하지만 믿음이 성숙해 지면 나만 옳다고 여기는 생각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게 됩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말하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게 할테지만 기적의 시작은 환대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환대하는 사람입니까? 경계하는 사람입니까? 주님은 연약한 우리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시고 두팔로 감싸주심으로 십자가를 참으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후 바울을 통해서 놀라운 기적과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3절을 보면 바울이 주변을 다니며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섬사람들이 피워 놓은 불 속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었습니다. 불에 내려 놓을 때 나뭇가지에 숨어 있던 뱀이 뜨거우니까 튀어 오르며 바울의 손을 문 것입니다. 그 뱀은 분명히 독사였습니다. 섬 사람들은 독사에 물린 바울이 살인죄를 지어 정의의 여신의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죽을 때만 기다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바울에게 아무런 이상도 나타나지 않자 섬사람들은 바울을 신으로 오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제와 다르고 오늘이 다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바라보고 믿고 있는지에 따라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섬에서 독사의 물린 사건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하나님의 사람 바울을 주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 일 후에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섬의 가장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에게 까지 알려지게 됩니다. 보블리오는 친절하게도 사흘씩이나 자신의 집에 유숙할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독사에 물린 사건으로 인해서 섬 전체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에서 뱀은 인간의 원죄를 가져 오게 한 간교한 동물입니다. 죄의 기원도 뱀이 간교함으로 인간을 미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뱀을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뱀은 피조물 가운데 한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영리함을 선물 받은 피조물이었는데 슬기로움에서 간교함으로 변질되어 하나님의 선물을 악용한 것입니다. 멜리데 섬에서 뱀은 오히려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해주는 도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아니하며..”주신 권세를 기억해 보면(막 16:18)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이끌릴 때에 주께서 주신 권세를 성취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선과 악의 양면성이 누구나 존재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할 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권고하셨지요. 뱀처럼 슬기롭게 세상속에 살아가며 비둘기처럼 거룩함을 더하라는 뜻일 겁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의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자 하나님은 불뱀으로 그들을 치셨고, 구리뱀을 만들어 쳐다보는 자들을 낫게 하십니다. 구리뱀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예표하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날 죄악된 세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주의 피로 씻김을 받게 됩니다. 지친 마음을 위로 받게 되고요. 그 사랑은 바닷물과 같아서 평생을 마셔도 마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회복될 때까지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마치 마음의 성전에 새로운 가구가 들어서는 것과 같이 새로운 마음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섬기고 환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도들에게는 ‘독(毒)도 약(藥)이 됩니다. 독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잘 활용하여 약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벌의 침은 독이 있지만 봉독을 소염 진통제로도 사용하고, 그 안에 멜라틴이라는 성분은 혈액순환과 면역기능을 강화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뱀에 있는 독에서 추출한 ‘캡토프릴’도 고혈압 치료제로 사용한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독은 무엇일까요?

토마스 머튼은 ‘현대사회에서 돈은 성령이 교회에서 차지해야 할 역할을 악마적으로 찬탈해 버렸다’라고 했습니다. 돈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협할 수 있는 어두운 면과 좋은 면인 양면성을 다 지녔습니다.

돈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돈의 풍족함은 신앙생활을 잘했다라고 하는 축복의 표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대상은 언제나 가난하고 상처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뜻은 돈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었을 때에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돈의 힘을 거부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 힘은 우리를 사로잡는 영적인 힘이고, 죄의 유혹으로 끌고가는 힘입니다. 인간은 경제적인 사회 구조를 벗어나서 살아 갈수는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출세를 하고 공적인 위치에 있다면 그 이유는 부와 권력까지도 선한 영향력을 위한 일로 사용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바울은 배고픔과 풍족함이라는 모든 환경에서 만족하는 비결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땅에서 재산, 후손을 얻었지만 그는 여전히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이스라엘 자녀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어 들일 때 하루 먹을 분량 이상의 것은 썩게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매일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는 법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물질적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뢰를 배워가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격려 해야 합니다. 성도 간의 교제 안에서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이 하나님의 품을 느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노동을 통해 재정을 채워 가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며 감사를 배우는 것입니다. 매일밤 뒤척이며 잠못 이루던 날들을 보낸 이는 아침에 일어나서 잠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일은 하나님과 깊어지는 시간이 됩니다.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되어 간다면 이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믿음이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3) 기적은 값없이 받은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멜리데 섬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신앙은 미신적이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뱀에 물렸으니 신에게 벌을 받는 자로 여기고 몸이 이내 부어올라 당장 쓰러져 죽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자 생각을 바꾸어,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울을 숭배했다는 언급은 없는 것으로 보아 바울이 신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여겼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소문이 멜리데 섬의 추장이던 보블리오에게 까지 알려졌던 것입니다.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의학적으로 고열과 이질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던 점을 감안해 볼 때에 매우 정확한 진단이었을 것입니다. 의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이 병을 쉽게 치료하지만 당시에는 이질이 걸린 환자로 인해 세균이 전염되어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생명을 잃게 되는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병들어 있는 보블리오 아버지에게 겁 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가갑니다. 고열과 이질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는 것을 알고도 손을 얹고 기도한 것은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병에서 치유된 소식은 온 마을에 삽시간에 퍼졌을 것입니다. 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자신들의 병도 고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로 가는 길에 거쳐가는 작은 섬이었지만 복음이 필요한 그곳에 바울을 보내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병에 대한 이유를 묻지도 않고 기도해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결과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는 문화속에 있습니다. 결과에 따라서 믿음도 평가합니다. 믿음을 설명하려고 하다 보니까 원인을 규명하게 되지요. 그런데 세상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예기치 않은 문제 앞에서 한결같이 질문합니다. 주님,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부족하고 잘못된 일들을 밝히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인해 섬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마음 한켠에는 소외된 마음이 있었을텐데 바울의 치유사역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에게 찾아온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줍니다. 이것이 다시 한해를 살아가기 위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권세입니다.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믿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멜리데 섬에서의 뱀에 물린 사건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말씀해 줍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었던 보볼리오가 멜리데의 섬에 세워진 바울 기념 교회의 최초 감독이 되었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멜리데 섬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예배를 드리던 장소인 지하 묘지 카타콤(Catacomb)’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말타섬에는 90%가 넘는 인구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삶의 위기는 단순히 시련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값없이 받은 그 은혜를 전하는 자의 삶은 나의 만족과 유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척박한 삶의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강절기를 보내게 되는데 성탄의 기쁨을 사모함으로 기다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마쳐졌지만 이제부터는 각자에게 허락하신 거룩한 사명으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실 사도행전 29장을 써 나가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은혜를 만나게 하셨지만 이제 다음의 역사하심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부어지는 기적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기적의 주인공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11. 19. 2023 주일설교

(성령강림후 제 25주, 추수감사 주일)

바울의 감사

Paul’s Thanksgiving

사도행전 27:33-38

올해 5월부터 시작된 사도행전 강해가 다음주일이면 마치게 됩니다. 사도행전 27장의 말씀은 누가가 정밀화를 그리듯 로마로 가는 바울의 항해 여정을 세밀하게 그려 놓았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으로 부터 떠나온 청교도인들이 신대륙에 와서 드린 추수 감사 주일 유래를 생각나게 합니다.  27장 본문의 말씀을 추수감사 주일에 전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항해하는 배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평화롭고 잔잔한 바다를 만나기도 하지만 거대한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항해하시며 어떤 날을 보내고 계시는지요?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바울이 탄 배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타 있었습니다. 여러 죄수들, 바닷길에 대해서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주, 로마 군대 장교인 백부장 율리오와 군인들, 장사하기 위해서 물건을 갖고 탄 상인들입니다. 가이사랴에서 출발한 그들은 그레데섬 미항이라는 작은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바울은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으니 더 이상의 항해를 만류하고 미항에서 겨울을 머물다가 출항하자고 했습니다. 유대력으로 속죄일이 7월 10일이니까 오늘날로 9월 10월경에 해당합니다. 당시 지중해는 9월 중순 이후에 항해하는 것이 위험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항해를 멈춰야 했는데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충고 보다는 바닷길의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주의 의견대로 무리한 출항을 하게 됩니다. 한 죄수의 말보다 선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겠지요. 결국 얼마 가지 못해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는 선장의 경험과 지식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조금 더 빨리 가려고 했던 백부장 율리오와 선장과 선주의 교만이 부른 역경인 것입니다. 겨울에 출항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선장과 선주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에 빨리 가고자 하는 조바심이었을까요? 아니면 바울보다 자기들의 지식이 더 풍부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던 교만이었을까요? 결국 수많은 곡물과 276명의 인원을 싣고 출발한 알렉산드리아호는 풍랑 앞에서 표류하게 됩니다. 방향을 잃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앞둔 제 눈에 들어 온 말씀은 35절입니다. 바울이 빵을 들어 사람들 앞에서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떡을 떼어 먹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이 감사기도를 드린 시점은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해 14일 동안 대략 800km를 떠밀려 온 때였습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해와 별도 보이지 않은 채, 사나운 폭풍만 거세게 휘몰아 쳤고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니까 살 소망을 잃어 버리고 최후의 순간만을 기다리며 있었습니다.

한번 말씀속으로 들어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디베랴 호수가에서 풍랑을 잔잔케 했던 예수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만 점점 더 깊어 졌습니다. 거센 바람으로 인해 파도가 계속 몰아 칩니다. 어둠은 깊어져 가고 흔들리는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뒹굴며 상인들의 물건은 배 안에서 부서지고 배의 돛은 이미 찢어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성경은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해와 별도 보이지 않은 채, 사나운 폭풍만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보고 완전히 소망을 잃었다.”

온 세상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배와 같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풍랑을 만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멈추지 않는 전쟁의 소식과 재난의 소식들은 희망조차 사라져 광풍을 만난 모습들입니다. 사실 인생의 짐을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진 배 안에서 바울이라고 두렵지가 않았겠습니까? 아마도 자기 앞에서 죽어간 스데반 집사님의 모습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다메섹에서의 주님의 음성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날 밤 바울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서 말씀을 해 주시는데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틀림없이 황제 앞에 서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너와 함께 항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

바울은 사명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그대로 되리라 믿었습니다.(24절) 그 평안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믿음이었습니다.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바라 본 것입니다.

(1) 감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열쇠입니다.

우리는 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 사람입니다. 누가가 바울의 항해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이유는 바울의 회심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는 회심이 끝이 아니라 온전한 제자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변화라는 것은 회심되는 것보다 더 큰 의미의 영역을 담고 있습니다.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회심의 시작이라면 변화의 삶은 지속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인생을 맡기기 시작했다면 세상의 것을 내려 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 뜻과 내 경험을 내려놓는 연습입니다. 불안과 두려움, 세상의 욕심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이제껏 쌓아 올린 경험은 점 하나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만이 아니라 유대인과 헬라인, 애굽인 등 많은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속에서 어떤 사람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그것 자체가 전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유대지역과 사마리아를 넘어서 로마에 까지 이동하고 있지만 바울이 거쳐 갔던 모든 지역에서 동시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의 대표성을 띠는 것이지 하나님이 바울만 통해서 일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거쳐 간 전도여행의 여러 지역에는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동시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적 용어 중에 Glocalization이라는 합성어가 있습니다. 글로벌(Global)+로컬 (Local)를 합쳐서 지역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일하는 선교적 교회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시대는 지역의 한계를 넘어 공존의 시대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한 지역의 예배를 한국과 여러 나라에서 동시적으로 함께 참여하여 은혜를 받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한 사람의 신앙을 넘어 공동체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지상의 교회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어디서 부터 변화를 시켜야 하고, 어떤 방법으로 선교를 해야할까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 되게 하시는 섬김과 사랑으로 일치해 나아갈 때에 교회는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내게 됩니다. 우리는 매년 추수감사주일 헌금의 일부를 지역의 목회자를 돕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가며 걸어가고 있는 귀한 사역이지요.

(2)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감사의 선물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만이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침울하다고 해도 성도는 구원의 소망을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338장을 보면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찬송을 작사한 플라워 아담즈(Flower Adams, 1805-1848)) 는 25세에 연기자로 무대에 설수 없게 되자 연기를 그만두게 되고 어느날 창세기를 읽다가 야곱이 벧엘에 있었던 이야기를 묵상하며 이 찬송의 가사를 작사하게 됩니다. 그 후 이 찬송은 1912년 4월 14일 타이타닉 호가 침몰한 날 주일 저녁에 영국 감리교회 성도였던 바이오리니스트 하틀리(Wallace Hartley, 1878-1912) 악장이 생애 마지막 찬송으로 노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울려 퍼진 이 찬양을 듣고 이어서 8명의 악사들이 함께 참여했고, 잠시 후 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마지막 찬송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깨어진 세상속으로 들어 오셔서 십자가에서 두팔 벌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그 손은 우리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괴롭고 지칠때 주님께서 구원의 손으로 붙들어 주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감사의 삶입니다.

침몰하는 갑판 위에서 마지막 감사의 찬양을 부른 이들의 고백이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인생 항로에 누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장으로 있습니까? 주님의 손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그 손은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가장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한 사람의 삶은 무엇을 믿고 바라보고 살아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매순간 인식되어 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기도가 고백됩니다. 오늘도 이 자리에 주님께서 계심을 믿는다면 예배를 드리는 교우들의 숫자만큼 주님께서 실제적으로 내옆에 계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 물, 빛 조차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온 인생임을 깨닫고 살아갈 때에 조바심을 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소명에 집중하게 됩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안에 의심과 불안,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이 방황하는 이들을 주님은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십자가에서 부둥켜 앉으셨고 하늘로 승천하시며 지금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진정한 감사는 우리의 손끝과 발끝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 계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에 흘러나오는 고백입니다.

개역개정은 바울이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 시작하매 라고(35절) 기록합니다. 쉬운말 성경은 35 이렇게 말하고, 바울은 빵을 들어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 떼어서 먹기 시작했다. 36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용기를 내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3) 감사의 기도는 우리를 회복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죽음의 위협에 처해있으니 바울의 감사기도에 반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공개적으로 고백한 감사의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효과를 거두었을 것입니다. 14일이라는 시간동안 배 안에 일행들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는데 그제서야 다른이들도 안심하며 받아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떼어 먹은 것은 떡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이었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준비하다 보니까 사도 바울이 성만찬을 하듯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사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떼듯이 떡을 떼는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감사의 고백은 예배 드릴때에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행함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구별되었고 윤리적으로 볼때에도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 마음 안에 거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전통이 중요했고 형식이 중요했기에 주님은 그들 곁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형통해 보이나 하나님과 멀어져 있을 수 있고, 유라굴로 인생의 광풍을 만났지만 바울처럼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배는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한일은 배에 남은 식량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무사히 육지에 내리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다면 마지막 비상 식량만큼은 끝까지 배에 남겨 두려 하였을텐데 배안에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비상 식량을 다 바다에 버립니다. 무사히 육지에 내리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두려움과 죽음의 바다에서 견져 주신 주님으로 인해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배에 탔던 276명의 사람들이 머리털 하나 상함이 없었습니다.

백부장은 죄수들과 군사들이 한 사람도 도망가거나 실종되지 않도록 파악한 숫자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시선에서 276명이라는 사람들의 숫자는 한사람의 생명과 그 영혼의 소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지식과 경험은 참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 되지 않을 때 나의 방법을 내려 놓기가 더 쉽지 않지만 내가 열고자 하는 문이 닫힐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문이 열려져 있음을 보게 될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우리를 삶의 모든 영역을 회복하게 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겸손히 느낄수 있게 합니다. 1918년 미국의 미네소타주 보베이라는 작은 탄광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엔스트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백발이 무성하고 몹시 지쳐 보이는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노인은 사진관에 들어와 잠시 쉬면서 차 한잔 얻어 마실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에게 빵과 스프를 주었더니 그 앞에서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진사 엔스트롬씨는 그 모습을 보고 큰 감동과 전율을 느꼈다고 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며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누추하고 연약해보이던 그의 모습이 큰 사람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구나를 느낍니다. 노인의 겉모습은 삶에 지쳐 있고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기도속에서 누구와도 비교할수 없는 마음이 부유한 자임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혹시 우리의 마음에서도 가진자와 갖지 못한자를 나누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진사가 찍은 노인의 사진은 후에 유화로 그려져서 작품이 되었습니다. 바로 ‘감사 기도’ 하는 노인의 ‘은혜(The Grace)’ 입니다. 감사기도 드리는 저 깊은 마음의 사진이 우리의 삶에도 남겨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사의 고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를 담은 감사여야 합니다. 추수감사 주일에 사도 바울의 복음의 전도 여정을 통하여 그가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복음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 항상 함께 했던 감사의 기도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