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0. 2023 주일설교

(대림절 두번째 주일)

기다림 시리즈 2

이제 만나러 갑니다 : 수가성의 여인

On the way to meet you : Village of Sychar Woman

요한복음 4:6-14

유민용 목사

6 이 동네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고, 예수께서는 여행길에 피곤하셨으므로, 그 우물가에 앉아 쉬고 계셨다. 때는 낮 12시 무렵이었다. 7 ○ 그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오자,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을 거셨다. “나에게 물을 좀 주겠소?” 8 (당시 제자들은 모두 음식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으므로,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께 대답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저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 예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셨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사를 알고, 또 당신에게 물을 청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당신이 그에게 생수를 청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가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오.”11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두레박도 없는데다, 이 우물은 굉장히 깊지 않습니까? 어디서 생수를 길어다 주신다는 말입니까?12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은 물론이고, 그의 자녀들과 가축들이 즐겨 마시던 물입니다. 이 우물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당신이 더 위대한 분이란 말입니까?” 1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곧 다시 목마를 것이오. 14 하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나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참 샘물이 될 것이오.” (쉬운말 성경)

대림절기 기다림의 두번째 여인은 라합에 이어 수가성의 한 여인입니다. 성경에는 이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녀가 왜 자신의 마을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긷지 않고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여인은 불행한 과거를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섯명의 남편과 헤어지고 여섯번째 남편과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물 한모금 달라는 요청에도 까칠하고 야박한 대화속에서 다른 사람을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아픔과 상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들로부터 받은 공허함과 인간적인 배신감이었을까요? 지역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였을까요? 이 여인은 인생을 살면서 벼랑 끝에 서는 기분을 수차례나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태양이 뜨겁게 내려째는 낮 12시 무렵에 물을 길러 온 것 아니겠습니까. 이 우물가 여인의 이야기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설교나 찬양으로도 한번쯤 다 들어 본 것입니다.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참 샘물을 마실 때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대림절기를 보내며 예수님과 이 여인의 대화속에 담겨진 은혜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갈증이 없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어느 깊은 경지의 단계에 올라 무소유로 삶고 살고 계신가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소유의 목마름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구를 내려놓기 보다 지나친 욕망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창조적 인간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는 비워 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채우는 삶입니다. 거룩한 갈증과 거룩한 목마름으로 세상의 욕망을 대체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4장의 말씀은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연속선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일곱가지 표적 및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계시에 대한 보도입니다. 2장에서는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기적이 나옵니다. 3장에서는 지체 높고 존경받는 대법관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서 질문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태앙이 내려 쬐는 한낮에 천대받고 부도덕한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해 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먼저 우물가에 계셨습니다. 이후에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뜨러 옵니다. 예수께서는 우물가에서 이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예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며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셨구나. 주님이 먼저 이곳에 계셨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구원의 신비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한 인생 시간표를 만들어 놓으시고, 나를 향한 인생의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영적인 눈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 매일 살아가는 것이 영성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보자이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1) 예수께서는 목마름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과 유대지역을 왕래 할 때에 가장 빠른 경로인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멀리 우회하였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말도 섞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에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으로 혈통적으로 혼합되어 부정한 민족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금기를 깨시며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단지 빨리 가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기록한 ‘예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말씀안에는 유대인들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마름의 자리는 우리와 같이 피곤함을 느끼는 완전한 사람의 몸을 지닌 자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적인 연약함을 경험하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4:6 이 동네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고, 예수께서는 여행길에 피곤하셨으므로, 그 우물가에 앉아 쉬고 계셨다. 때는 낮 12시 무렵이었다.

여러분은 목마름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십니까? 추운날 따뜻한 차 한잔이 얼었던 몸을 녹여주듯 , 지쳐 있던 마음에 진정한 사랑의 지체들의 위로가 마음이 힘이 되는 것처럼 믿음은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고 예수께서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을 함께 해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모든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의 목마름과 갈증, 아픔과 고뇌를 친히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의 자리, 두려움의 자리, 낙심의 자리에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이 경험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날이 갈수록 건조해질 것입니다. 마음이 메말라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은 다른 행성이나 우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더 알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마음에 찾아오시는 주님에 대한 감각은 모조리 잃어 버리고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은 더 편리하고 물질적인 대상은 열렬히 추구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는 의심도 많고 냉소적입니다. 작은 소자를 보면서 주님이 보여지고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볼 때에 우리와 함께 울기도 하시고 웃기도 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여 지기를 소망합니다.

7 ○ 그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오자,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을 거셨다. “나에게 물을 좀 주겠소?

‘나에게 물을 좀 주겠소?’라는 요청에 ‘내가 목이 마르다’라고 하신 십자가의 장면이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사이에서 목이 마르다고 외쳤습니다.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실 사이의 간격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애타는 목마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피를 힘입어 나아갈수 있게 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갈망하고 있으신지요? 대림절기에 주님의 탄생을 기억하고 주의 다시 오심을 깨어 기다리고 계시는지요?

(2) 경계를 너머 만나는 것은 서로 하나가 되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나는 곳’입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면서 하늘문이 열리고 친히 내려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는 곳입니다. 유대인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이른 대낮에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요청할 때에 이 여인은 마음을 닫은 채  묻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저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까칠한 반응이지요. 이에 예수님은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사를 알고, 또 당신에게 물을 청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당신이 그에게 생수를 청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가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오.” 대답합니다. 이 여인은 다시 퉁명스럽게 되묻습니다.

“당신에게는 두레박도 없는데다, 이 우물은 굉장히 깊지 않습니까? 어디서 생수를 길어다 주신다는 말입니까?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은 물론이고, 그의 자녀들과 가축들이 즐겨 마시던 물입니다. 이 우물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당신이 더 위대한 분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은,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나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참 샘물이 될 것이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자 여인은 정색을 하고 “선생님, 그 물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러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후에 예수님은 뜬금없이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당황했는지 아니면 마음이 불편했는지 나에게는 남편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시치미를 땐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17절 18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소. 남편이 없다고 말한 당신의 말이 옳소.
당신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그 남자도 사실은 당신 남편이 아니오. 그러니 방금 당신이 한 말이 맞소.” 우물가의 여인은 눈이 열려지고 예수가 메시아임을 비로소 보게 됩니다.

20절에 보면 예수님과의 대화 끝에 여인은 예배하고 싶은 열망에 질문을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느껴질 때 우리 마음에서 끓어 올라오는 마음은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람은 경험하는 만큼 알게 됩니다. 배고픈 경험이 없는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사람들의 마음을 어찌 알겠으며, 타는 목마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물의 소중함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환대는 배고픈 자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삶은 상품이 아닙니다. 다 쓰고 나서 일의 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지는 소모품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친 주님은 거룩한 삶의 변화의 자리까지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과거에 비해 바쁘게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여인의 다섯 남편처럼 사회적인 업적과 취미생활 등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마음은 더 공허해져만 갑니다. 소비주의문화는 예배까지도 행위로만 여기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행위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기다리십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수고해서 길러내는 물이 아니라 실제적 삶으로 먼저 찾아 오신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우리의 노력과 공로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 샘물은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씻겨 주시고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힘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은 종교일 뿐입니다. 그 길은 수고와 고통 뿐입니다. 열매가 열리는 것 같아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은혜로 구원을 유지시켜 줍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 세상을 보면 많은 아이들이 헤롯 왕의 손에 아무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헤롯왕은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느끼고 베들레헴 인근에서 태어난 두살 아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이고 명령했습니다. 그의 권력욕과 거친 성격으로 인해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죽어가는 갓난 아이의 부모였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예수가 성장해서 자신이 태어날 때에 일어난 이 비극적인 일들을 알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 느꼈을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가 공생애 기간 동안 슬퍼하고 탄식하는 이들을 찾아가는 원동력이 되었겠지요. 우리가 잘 알듯 세상은  불의와 폭력에 의해 언제나 선한 사람들이 희생량이 되는 일들을 적잖게 보게 됩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말로 할 수 없는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시고 온전하십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절망의 파도 근심의 파도 두려움의 파도가 몰려 올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진행 과정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세상의 시스템에 의해서 무고한 희생량이 되었습니다. 깨어진 세상속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점점 차가워져 가고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심을 받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도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홀로 고립된 채 내몰리는 연약한 이들에게 찾아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의 삶을 추적해 보면 삶의 면면에 따뜻함이 묻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상처는 우리의 상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인생의 상처와 멸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리였고, 남편과의 헤어짐 이후 새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고 지속하면서도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 가는 여인의 삶은 우리 모두의 갈증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메시아로 만난 여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증언합니다. 그분을 만나 보라고 전도를 합니다.

대림절기의 기다림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관계에서 있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품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 기도의 자리가 더 깊어질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과 선행은 주님을 더 깊이 알게 하기 위한 자극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홀로 고립된 채 물을 길러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늘 가족이 되어 함께 동행하니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깊은 만남은 숨기고 가리던 것이 드러나는 자리이고 마음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주님과 더 깊이 사귀십시요. 그리고 우리를 만나러 이미 와 계시는 주님과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메말라 무뎌져 있던 나의 마음과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복음이 전해지면 희미하게 느껴졌던 삶의 방향이 선명해짐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덮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에 물질이  있으면 그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결과와 성과만을 위한 길을 걷게 되면 그 안에 무수히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주님이 계시다면 우리가 만나는 일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대림절의 기다림 속에서 삶을 화해하게 하는 평화의 주님을 따라가기를 소망합니다.

12.03. 2023 주일설교

(대림절 첫번째 주일)

기다림 시리즈 1

구원의 약속을 기다린 여인: 라합

The woman who was promised salvation: Rahab

여호수아 2:8-21

유민용 목사

8 ○ 정탐꾼들이 잠들기 전, 라합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그들에게 말했다. 9 “나는 주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두려움에 짓눌려 있습니다. 10 우리는 당신들에 대해서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주께서 어떻게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셨는지, 또 당신들이 요단 강 동쪽의 두 아모리 족속의 왕들을 어떻게 파멸시켰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11 그런 말을 들을 때에 우리의 심장은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정신이 나갈 지경입니다. 당신들의 주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2 ○ 그러므로 부탁합니다. 내가 이렇게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이제 당신들도 우리 집안에 은혜를 베풀어주겠다는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해 주십시오. 13 나의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식구들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죽지 않도록, 우리 생명을 구해주십시오.” 14 정탐꾼들이 그 여인에게 다짐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당신의 생명을 지켜 드리겠소. 당신이 우리가 한 일에 대해 입을 다물어 준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 우리는 당신에게 성심껏 우리의 성의를 표할 것이오.” 15 ○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있는 집이어서, 그녀는 창문 밖으로 밧줄을 늘어뜨려 그들을 아래로 내려가게 해주었다. 16 여인은 그들에게 말했다. “추적자들에게 발각당하지 않도록 산으로 올라가십시오. 사흘 동안 거기에 꼼짝 말고 숨어 있다가, 추적자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에 당신들의 갈 길을 가도록 하십시오.” 17 정탐꾼들이 여인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한 맹세는 꼭 지키도록 하겠소. 18 우리가 이 땅으로 들어올 때에, 당신이 우리를 탈출시켜 준 창문에 진홍색 밧줄을 매어 두시오.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과 온 가족과 친척을 모두 당신의 집에 모여 있게 하시오. 19 누구든지 당신의 집 밖으로 나가서 변이라도 당하면, 그건 그 사람의 책임이지 우리의 책임이 아니오. 그러나 당신과 함께 집 안에 있는 사람이 혹시 변을 당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소. 20 하지만 당신이 우리에 대해서 발설한다면, 지금 우리와 맺은 맹세는 아무런 효력이 없게 된다는 걸 명심하시오.” 21 그러자 라합은 그들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하고, 그들을 보냈다. 그들이 간 뒤에, 라합은 진홍색 밧줄을 창문에 매달았다. (쉬운말 성경)

대림절의 영성은 기다림입니다. 대림절기를 통해 성도들은 곁에 계신 주님을 더 깊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 마음을 닮기 원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한 자리에 주님의 마음으로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저의 스톨의 색깔도 보라색으로 바뀌었습니다. 보라색은 정결한 마음과 새마음을 상징합니다. 이제 대림절 소망의 촛불이 켜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하신 이 촛불은 하나님 나라의 첫번째 빛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구원의 약속을 기다린 한 여인이 나오는데 이방인 출신이었으며 기생의 신분임에도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라합이라는 여인이 어떻게 기생이 되었는지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른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관, 구조적인 차별과 편견, 출신에 따른 경계선입니다. 이 경계선 사이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간극, 신앙의 보수와 진보, 정치적으로는 좌파나 우파의 성향으로 나눠집니다. 성향이 다를 수 있지만 극단적으로 치우칠수록 그 경계선에 위에 선 사람들의 삶은 참 고달픕니다. 경계선에 위에서 균형을 잡고 걷는 길은 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중심부에서 밀려나 경계선 위에 있던 이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소외되고 헐벗은 이들을 품어 주셨고, 다름의 차이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방인들을 용납해 주셨습니다. 이 신비의 은총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주님의 ‘오심과 다시 오심 사이’에서 어려운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너무 쉽게 잊어 버리지만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본향집을 찾아가는 길과 방향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대림절기는 서로 어울려 사는 의미를 전혀 다르게 보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는데 새롭게 눈을 뜬 사람들은 한 형제 자매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본문은 라합의 집을 소개하는데 ‘그녀의 집은 성벽 위에 있었다’라고 기록합니다.(15절) 당시 요새였던 여리고 성은 아래 쪽에 돌로 된 기초 성벽을 가지고 있었고, 거대한 토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습니다. 이 벽의 높이가 4-5미터의 높이였습니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기초 성벽 안쪽으로는 내벽이 있는데 외벽에 비해서 14미터나 높았습니다. 여리고 성은 당시에 이중 벽으로 되어 있던 요새인 것이지요. 라합의 집은 도성 안에 있던 것도 아니고 도성 밖도 아닌 이중벽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라합은 경계선에서 거주하며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아마도 성안의 여인들은 창녀로 살아가는 라합을 조롱하기도 하고 멸시하기도 했을 겁니다. 라합은 남자들의 멸시와 인격적 무시를 당하는 삶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스라엘 군대가 요단강 동편에서 아모리 왕들을 격파했다는 소문이 이미 가나안에 까지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여리고 성안에 사람들은 바짝 긴장하고 낯선 사람들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두려움에 짓눌려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에 대해서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주께서 어떻게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셨는지, 또 당신들이 요단 강 동쪽의 두 아모리 족속의 왕들을 어떻게 파멸시켰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에 우리의 심장은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정신이 나갈 지경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곧 가나안으로 진격할 것이란 사실이 명백했기에 여리고 성을 비롯하여 가나안 일대의 성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경계령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여리고 왕은 성안의 공격을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기생의 집에 유숙했던 것입니다. 대략 3500백년전이니까 당시 술집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장소였을 것이고, 술을 마시며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정보를 얻는 장소이기도 했겠지요. 여리고 성을 살피러 온 정탐꾼은 성 안의 백성들에게 정보도 얻어야 했고, 군사적으로는 자신들의 몸을 숨기기에 적절한 곳을 찾아 라합의 집에 유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읍안에 수상한 사람들에 대한 보고가 여리고 왕에게 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그 사실을 2장 2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리고 왕에게 이런 보고가 들어왔다. 몇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늘 밤 이 땅을 정탐하려고 왔습니다.”

성경속으로 들어가 보면 당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여리고 왕은 라합의 집으로 군사들을 보냈고 이제 정탐꾼은 들통나면 죽게 될 것입니다.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라합이라는 여인이 2명의 정탐꾼들을 발견되지 않도록 지붕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여리고 군사들이 도착하자 그들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경로를 알지 못하나 예상되는 방향으로 급히 따라가면 잡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건 보고였습니다.

라합이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살려준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라합은 오고 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들었습니다. “당신들의 주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구원을 향한 기다림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호수아가 보낸 2명의 정탐꾼이 라합의 집에 유숙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을 보게 됩니다. 복음은 어떤 경로를 통해 듣든지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의 생명을 살리는 복된 소식입니다. 라합의 사건은 열린 마음을 지닌 이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그녀는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한 여인이 됩니다.

(1) 하나님의 구원은 기다리는 자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구원은 비천함과 풍요함에 있지 않습니다. 라합이 비록 술을 팔고 자신의 몸을 파는 비천한 인생이었지만 구원을 기다린 여인에게 하나님은 정탐꾼들을 보내셨습니다. 성경은 그의 행동을 믿음으로 인정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에 라합과 그녀의 가족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복음의 수용은 이처럼 뜻밖의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멸시와 소외를 당하고 죄인이라 취급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복음이 수용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영적교만은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지만 믿음의 겸손함은 영적인 흐름을 타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됩니다. 구원역사 뒤에는 인간의 선행과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매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지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고, 성도는 믿음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기 38년 전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발길을 되돌렸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보낸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불신앙적인 보고로 인해서 20세 이상의 성인이 모두 광야생활을 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파견되었던 정탐꾼들의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보고가 계기가 되었습니다.(민 13) 그러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음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제적 경험으로 체득했습니다. 이제는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파견하는 위치에서 2명만 보냈다는 것은 군사적 전략도 있지만 구원이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공간의 영역에 있어서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나라와 나라를 넘고, 일터와 가정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거에는 교회의 장소도 제한적이었지만 이제는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으면 지리적 공간을 넘어 교회의 모임을 할 수 있습니다. 긴밀하게 연결만 되어 있으면 경계선을 넘어서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중요한 마음은 기다림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은 우리의 모든 공간을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2) 하나님을 아는 믿음은 들음에서 났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는 것이고, 전인격적인 삶을 통한 믿음의 응답입니다. 라합은 소문만 듣고도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10절을 보면 ‘우리는 당신들에 대해서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정탐꾼이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라합을 설득한 것이 아니라 라합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들의 입으로 들었을 때에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지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 6:3) 매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듣기 위함입니다. 설교를 듣는 이유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깊어지기 위함입니다. 설교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일상에서 잊지 말라고 지속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더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았고,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두려운 마음이 변하여 경외심이 된 것입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마음이 약해지기도 하고 완악해지기도 합니다. 여리고 성의 사람들처럼 두려움에 짓눌리고 불안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가운데 자신의 신세만 한탄하며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믿음이 부쩍 자라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더 실제적으로 더 확실하게 경험하게 될 겁니다. 신앙은 저절로 깊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영적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대한 인간의 인식과 이해는 모든 지식을 동원한다고 해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라합이 낯선 이스라엘 정탐꾼을 환대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신앙고백이었습니다.

(3) 기다림은 약속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약속은 ‘묶을 약, 묶을 속’으로 이뤄진 단어입니다. 마음을 굳게 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약속의 말씀이지요. 구약은 오실 주님에 대한 약속이고, 신약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약속들로 가득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약속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라합은 정탐꾼에게 나와 내 부모 형제를 죽음에서 건지겠다는 구원의 증표를 요구합니다.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구원의 증표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으로 들어올 때에, 당신이 우리를 탈출 시켜 준 창문에 진홍색 밧줄을 매어 두시오.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과 온 가족과 친척을 모두 당신의 집에 모여 있게 하시오. 누구든지 당신의 집 밖으로 나가서 변이라도 당하면, 그건 그 사람의 책임이지 우리의 책임이 아니오. 그러나 당신과 함께 집 안에 있는 사람이 혹시 변을 당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소…그러자 라합은 그들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하고, 그들을 보냈다. 그들이 간 뒤에, 라합은 진홍색 밧줄을 창문에 매달았다”

진홍색 밧줄은 라합과 정탐꾼이 맺는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약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에 임하게 됩니다. 언약적 삶은 인생의 소유가 누구인지를 매일 확인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시며 ‘새언약’을 말씀하셨습니다. 새 언약은 지친 이들의 품이 되어 주시고, 상처받은 이들을 감싸 주십니다. 진홍색 밧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상징입니다. 이 언약은 생명이 걸린 중대한 일이기에 거룩한 성도는 반복적으로 새언약을 확인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세상속에서 씨름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내게로 와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배우라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언약백성은 마음의 자리에 누군가 앉을 수 있는 여유를 지니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번주 새벽예배 오늘의 양식에 실린 예화입니다. “아홉 살 난 댄 길은 가장 친한 친구 아치와 함께 같은 반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갔습니다. 그러나 생일을 맞은 친구의 어머니는 아치를 보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의자가 모자라”라고 하며 안 된다고 했습니다. 댄은 같이 온 흑인 친구 아치를 앉히고 자기는 바닥에 앉겠다고 했지만 그 어머니는 계속 거절했습니다. 낙심한 댄은 둘이 가져온 선물을 친구 어머니에게 주고 아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댄의 가슴에는 친구가 문전박대 당한 것이 아픈 상처로 남았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선생님이 된 댄은 그의 교실에 늘 빈 의자 하나를 둡니다. 학생들이 이유를 물으면, “교실에 언제나 누구든 와서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잊지 않고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어릴적 자신의 친구가 문전박대를 당한 모습을 보고 아픈 상처를 받은 댄은 성인이 되어 선생님이 되었을 때 교실에 누구든지 앉을 수 있는 빈 의자를 두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빈 의자를 남겨 놓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주님의 계실 자리가 있어야 하고, 서로가 함께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고백과 실천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 자라가라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보혈이며, 죄가 없으신 분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언약의 피입니다. (마26:28)

교회 같은 가정, 가정 같은 교회는 가정과 교회의 문패에 그리스도가 흘리신 언약의 붉은 줄이 달려 있는지 확인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이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사명자의 자리를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고 인내하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약 5:11)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 하셨습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은 막연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대적 영적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에 여러분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고전1:8) 대림절기를 시작하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에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수 있도록 기다리며 기도하는 소망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