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4 2024 주일 설교

(주현 후 제5주)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5

소망 공동체 I

The community of Hope

베드로전서 1:3-9

3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길 없는 그 크신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 소망을 갖게 하심으로써, 4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유업을 물려받게 해주셨습니다. 그 유업은 여러분을 위해 지금 하늘나라에 고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5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나타나도록 준비되어 있는 구원을 여러분들로 하여금 얻게 하시려고, 지금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 그분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고 계십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깐 동안 온갖 시련 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고통을 당할지라도, 진심으로 기뻐하십시오. 7 이런 시련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순결한 것인가를 입증하기 위한 시험에 불과한 것으로, 그런 시련을 통해 여러분의 믿음은 비록 불에 의해 정련되더라도 결국엔 사라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으로 판명되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입니다. 8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도 그분을 사랑하고, 지금 그분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분을 믿으면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9 그것은 진실로 여러분이 믿음의 목표인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쉬운말 성경)

2024년 첫번째 장의 달력을 넘겼습니다. 처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설레임을 주지만 설레는 마음에만 멈추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날의 은혜와 한날의 감격과 한날의 수고도 하나님 안에서 담아 내어 보시고, 현실의 삶에 충실하다 보니 처음의 결심이 흐릿해 졌다면, 시작되는 2월에는 다시 힘을 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일에 마음을 써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다섯번째는 소망 공동체입니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한편을 보았습니다. 1972년 10월 13일 우루과이 비행기 한대가 안데스 산맥에 추락하게 됩니다. 당시 40여명을 태운 비행기는 뒷부분이 잘려 나가고 그 안에 있던 동료 럭비 선수들 가운데 생존한 이들이 생존할 수 없는 설원에서 소망을 지닌 채 버티며 71일만에 구조되는 생존자들의 사투를 다룬 영화입니다.

비행기 사고의 현장에서 생존의 희망을 안고 있던 그들은 세찬 바람과 눈더미 속에서 불안과 공포속에서도 서로가  집으로 돌아갈 희망으로 그동안 좋았던 추억들, 구조되면 먹고 싶은 음식을 동료들과 나누며, 밤을 지새웁니다. 밤이 되면 온몸이 얼어 붙을 정도로 기온이 떨어지니까 비행기 안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며 버텨냅니다.

극한 위기의 상황 속에서 그들은 혼자가 아닌 함께 버텨냈습니다.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구조가 될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구조대를 기다리며 한주가 지날 때 쯤 산사태로 내려오는 눈덩이에 비행기가 매몰이 됩니다. 하루하루 지나 갈수록 식량도 떨어지고, 불안해 하며 생명의 끈을 놓는 동료들도 생겨났습니다. 실종된 지 58일째 생존자 동료들 가운데 한명이 자기가 죽으면 자신을 먹어서라도 꼭 살아남으라고 이야기하며 쪽지 한장을 남기고 눈을 감습니다. 그의 손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는 요한복음 15장13절 말씀의 성경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존자들의 구조 후 인터뷰에서 두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절대 불평,불만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산속에서 만난 신은 원망의 대상이 아닌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서로가 불평과 원망이 아닌 소망을 품은 공동체가 되어 버텨낸 것입니다.

오늘 이 베드로전서 편지의 배경도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하기에는 극심한 고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들은 거처할 곳도 없이 떠돌아 다니던 나그네들이었습니다. 네로황제의 박해로 인해 표현할 수 없는 고난속에서도 베드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 소망을 갖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편지합니다. 어떻게 고난 가운데 찬양을 할 수 있습니까? 산소망을 지닌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8절을 보시겠습니다.

“8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도 그분을 사랑하고, 지금 그분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분을 믿으면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2천년 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도 뵌 적이 없지만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역설적인 기쁨이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은 영혼의 구원을 받았다는 표지입니다.

첫째, 오직 믿음을 통해서 산소망을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셨다.”는 분명한 믿음이 우리 안에 생긴다면 세상에서 겪게 되는 고난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소망을 받게 되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믿기 싫어서가 아니라 이 사실을 인간의 논리와 이해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부활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믿을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순수하고 바른 믿음은 신앙의 위기의식 가운데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이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구주로 믿는 정시(正視: 바른 시선, 바른 시야, 바른 시각), 정좌(正坐: 바른 자세와 바른 태도),정심(正心:바른 마음과 바른 정신)을 지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존재 이유를 찾은 사람은 현재의 삶을 헛되이 버리지 않습니다. 부르신 자리에 대한 거룩한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소망은 믿음으로 일상의 삶에서 겪게 되는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다시 일어서게 할 것이며, 헛된 욕망의 자리에서 돌아서게 할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께서 이루신 영광된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믿음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유업을 물려받게 해주셨습니다. 그 유업은 여러분을 위해 지금 하늘나라에 고이 간직되어 있습니다.(4절)

오늘날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기억할 시간 조차 없이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세속적인 사상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진리를 왜곡하고 어둠을 빛이라 유혹합니다. 삶의 많은 시간을 앞으로 누려야 할 기쁨을 찾기 위해 두리번 거립니다.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 보이지 않고 지금 내가 쌓아야 할 높은 산이 보입니다. 그러니 높은 산을 오르지 못하면 갖지 못할 것 같아서, 이루지 못할것 같아서 불안하고 갈급한 것이지요.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고 더 강한 것에 지배당하면서 믿음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여 점점 믿음의 마음을 상실해갑니다. 그런데 산 소망을 지닌 성도는 삶의 자리에서 세속적인 사람들과 구별이 됩니다. 참된 믿음은 신앙심과 삶에 벌어진 틈을 살아가면서 좁혀 나가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산 소망은 단순히 긍정의 힘만이 아니라 소망의 근거가 되시는 예수께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약속의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산소망은 이미 일어난 성취된 언약을 현재의 믿음으로 붙드는 것입니다.

1:5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나타나도록 준비되어 있는 구원을 여러분들로 하여금 얻게 하시려고, 지금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 그분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고 계십니다.

‘마지막때에’라고 번역된 ‘엔 카이로 에스카도’는 종말을 의미하는 ‘에스카토스: ἔσχατος’와 때를 의미하는 ‘카이로스: Καιρός’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카이로스는 인류 역사의 종말로 흘러가는 수평적(horizontal)시간의 개념이기 보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때,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나타내는 수직적(vertical)시간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만남이며, 욕망을 따라 살아가던 길에서 벗어나 주님을 통한 삶의 변화입니다. 절망적인 시간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기적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이 많아질수록 소망을 향한 믿음은 더욱 더 깊어지게 됩니다.

마가복음 1장14-15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깨닫게 되는 시점이 바로 ‘카이로스 Καιρός: 때’ 입니다. 이 때는 새해 사람들이 결심하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구속의 사건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때’는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현재라는 삶 속에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도로의 표지판은 목적지를 가기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전도서 기자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만나게 되는 관계, 직장, 학교, 문화, 더 많은 영역에서 하나님의 때를 만나야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병들고 쇠약해져 가는 몸이지만 영광의 날에는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모든 흔적은 영광의 흔적이 될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4, 25절에서 ‘그 소망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으니,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리라’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회적인 신분과 업적을 이뤄도 영광의 즐거움을 누리는데, 영원한 소망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누리게 될 그 영광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일시적인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깐 동안 온갖 시련 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고통을 당할지라도, 진심으로 기뻐하십시오. 7 이런 시련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순결한 것인가를 입증하기 위한 시험에 불과한 것으로, 그런 시련을 통해 여러분의 믿음은 비록 불에 의해 정련되더라도 결국엔 사라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으로 판명되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입니다.

찬송가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를 작사한 에드워드 모트는 1797년 런던의 작은 여관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소망 없는 일상에서 삶의 좌절에 빠져 살아가다가 어느날 런던의 한 교회의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1834년 어느 날 에드워드 모트는 자신의 목공소가 있는 바위 위에 앉아서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산성, 나를 구원할 자, 나의 하나님, 내가 의지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라’라는 시편 18편 2절이 떠올라 이 찬송의 후렴을 만들었습니다.‘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단숨에 이 찬송가의 1절을 썼고, 집에 돌아와 4절까지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업가로 살아가다가 자신의 사업과 재산을 정리하고 침례교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며 살았습니다. 에드워드 모트는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발견한 것입니다. 1874년 8월 4일 에드워드 모트는 “내가 이제까지 설교해 온 그 진리대로 살다가 갑니다.”하고 77세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여정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렵고 낙심 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소망을 품고 걸어가는 가슴 벅차고 감사한 자녀됨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이 가사는 영원한 소망을 붙드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셋째, 산 소망으로 사는 것은 생명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도 그분을 사랑하고, 지금 그분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분을 믿으면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생명은 궁극적으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소망을 지닌 채 하루하루 살아가도 우리의 몸은 쇠약해 집니다. 우리 교회 건물의 곳곳의 오래된 흔적들 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오래되서 낡고,부서진 흔적에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몸이 생각이 납니다. 상처받고 찢기신 주님의 몸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 고칠 곳은 여기저기 많아졌지만 그동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주님의 성전이 사용되어 믿음의 많은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건물 뿐이겠습니까? 말씀으로 살아 내기 위해 걸어가는 믿음의 여정,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영적 사춘기를 보내며 마음에 난 상처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는 시간들, 섬김의 흔적들,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믿으면서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흔적들이 성도들에게도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흔적들은 소망을 발견한 이들이 삶속에서 영광스런 몸으로 갈아입는 과정일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약할수록 자신의 몸 가운데 주님의 능력이 더욱 머물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어떤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세월이 흐를수록 섬김의 흔적이 더 많아 지기를 바랍니다. 이제 2월부터는 사순절 40일 전교인 새벽기도회가 시작이 됩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드리다 보면 오늘의 양식에서 나온 본문도 반복되는 말씀들이 많고 새로울 것이 없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새날은 하루도 반복되는 날이 없습니다. 내 영적 성장이 멈추어 있지 않도록 매일을 하나님 앞에 구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이 매일 새로워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이 됩니다. 특별히 고난주간에 드리는 40일 새벽기도회는 수난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과 연합하는 시간입니다. 사순절 전교인 새벽기도회는 그동안 새벽기도회를 경험하지 않던 교우들도 도전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께서 회복시킬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40일 새벽기도회 동안 곳곳의 섬김의 자리를 찾아서 동참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안에서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상속받게 될 유산은 세상의 기업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파괴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유업을 물려받도록 따로 떼어 놓으셨습니다. 2024년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는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지며, 섬김과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고, 소망이 되어 주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믿고 걸어가는 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9 그것은 진실로 여러분이 믿음의 목표인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소망 공동체는 나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아는 믿음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거룩한 메신저들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영적 제사장이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소망 안에서 살아내는 자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완전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위해 삶을 드리는 믿음의 지체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소망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만나고 담아내는 삶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소망의 공동체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믿음의 여정이 함께 모여 이루어 가게 됩니다. 그 귀한 역사에 함께 동참하시는 교우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128 2024 주일 설교

(주현 후 제4주, 당회주일)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4

기쁨 공동체

The Joy community

빌립보서 4:4-9

유민용 목사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한 번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십시오. 주께서 가까이에 계십니다. 6 어떤 일이든,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을 당할지라도, 오직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뢰도록 하십시오.7 그렇게 하면, 모든 인간적인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8 ○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형제들이여, 무엇이든 참된 것과 무엇이든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 옳은 것과 무엇이든 거룩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거기에 무슨 덕이나 칭송이 있든지 모쪼록 그런 것들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살도록 하십시오.9 그리고 여러분은 내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실천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쉬운말 성경)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네번째는 기쁨 공동체입니다. 기쁨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바라는 감정입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기쁘다, 즐겁다’라는 한자가 쾌(快)입니다. 쾌락(快樂) 이라고 하면 기쁠 (쾌), 즐거울 (락)이니 풀어보면 ‘몹시 즐겁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쾌락 하면 기쁨의 근원 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을 받게 되는데  육체적, 감각적인 쾌락만을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쾌(快) 라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 놓은 범위를 벗어나 욕망을 숭배한 결과가 본능적, 감각적, 말초적 쾌 (快) 로 전향이 되어 인간다움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철학자들의 도시 아덴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에 에피쿠로스 학파와 논쟁을 했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주의 철학자들입니다. 서양에서 쾌락주의 학파는 많은 추종자 들을 거느렸을 뿐 아니라 일종의 고통으로 부터 해방하는 사상이기도 했습니다. 쾌유(快癒) 주의자 들에 가깝습니다. 창시자 에피쿠로스(342-270 B.C)는 소아시아 사모스 섬에게 출생했는데 아덴으로 이주하여 시민권을 획득하고, 30대 중반의 나이에 에피쿠로스 아카데미를 세워 30여년간 제자들을 양성하며 그의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쾌(快)라는 것을 행복한 삶을 형성하는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본 것입니다. 에피쿠로스가 전한 쾌락주의는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이루기 위한 고통과 근심을 제거하는 정적인 쾌락(快樂)쪽에 가깝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 선비 문화 속에는 자연의 신비속에서 즐거움을 얻고, 선비들은 그 마음의 양심을 지키며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소박한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풍류 안에 담긴 삶의 가치를 찾은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하며 편지합니다. 항상이라는 말이 앞에 붙어 있는데, 모든 삶의 여정에 담긴 희노애락 속에서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 근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본질은 주님께로 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첫번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의 즐거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즐거움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6편 11절을 보면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깊은 관계속에서 기쁨의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관계가 친밀해지고 충분한 신뢰속에서 있다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고통이 끝나는 곳에서 진정한 기쁨이 시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더라’라고 감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창조의 신비 앞에 서게 될 때에, 피조물 가운데 지문처럼 남겨놓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래전 선물 받은 책 중에 배우 김혜자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에 소개된 글을 잠시 소개합니다. “만일 내가 비라면 물이 없는 곳으로 갈거야. 그곳 사람들에게 ‘내가 곧 갈께’하고 말할거야 그래서 그들이 내미는 그릇들을 물로 가득 채워 줄거야.” 인도 소녀 무시트라가 쓴 글입니다. 지구상의 60억 인구 중에서 12억 인구가 하루 1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들 중 대부분은 가뭄과 전쟁과 빈곤의 희생자들입니다. 또한 1억5천명의 아이들이 거리에서 자고, 먹고, 일하고, 뛰어 다니고 꿈을 꿉니다. 만일 내가 비라면 나도 수미트라와 함께 물이 없는 곳으로 갈 겁니다. 만일 내가 옷이라면 세상의 헐벗은 아이들에게 먼저 갈 겁니다. 만일 내가 음식이라면 모든 배고픈 이들에게 맨 먼저 갈 겁니다. (굶주린 아이들을 위한 모금 연설에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이 무엇인지 찾아내신 분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자랑거리가 쌓이고 명예와 지위가 주는 기쁨을 맛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참된 기쁨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품에 안아 주는 것, 하나님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만나 전인격적인 변화가 내안에서 시작되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내가 옷이라면 세상의 헐벗은 아이들에게 먼저 가고 싶은 것, 내가 음식이라면 배고픈 이들을 찾아가고,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품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의 마음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주안에서 흘러 나오는 것임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바른 생각속에서 기쁨이 솟아남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어 주신 구원의 희망은 깨어진 세상을 향한 한줄기 빛이요, 생명의 물줄기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안에 참 기쁨이 있고, 성령의 열매에 희락이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속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거짓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가 누려야 하는 진짜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기 보다 스스로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빌립보 교회 교우들도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이들로 인해 두려운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빌 1:28) 교회 내부적으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믿음의 여인들이 교회안에서 크게 다투었습니다.(4:2)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교회 안에서 함께 일하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주의 일에 열심을 내어도 다투고 갈등이 생기면 무엇을 해도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때에 주안에서 함께 조화를 이루며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두여인을 향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함께 섬기는 공동체는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누리는 기쁨은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을 때에 비로소 느껴지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자주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을 생각하시고, 홀로 있는 골방에서도 주안에 있는 즐거움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일상의 삶에서 무엇으로 인해 기뻐하며 살고 있는지도 틈틈이 살펴 보아야 될 것입니다.

둘째, 기쁨은 상호 관계속에서 누리게 됩니다.

바울은 5절에서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라고 했습니다. 인류 역사속에서 분열과 전쟁, 배신으로 인한 상처는 대부분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움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인자한 마음과 용서할 준비를 주안에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제시할 수 있는 좋은 삶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천국으로 부터 흘러 나오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이 찢기고 물과 피를 쏟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인식하게 될 때 기쁨이 생겨납니다. 매주일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도 기쁨을 잃어 버린다면 우리는 편협하고 옹졸한 태도로 삶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예배하며 주께서 가까이 계심을 느껴보십시오.

몰트만은 96세에 자신이 남길 마지막 책에서 그동안 자신이 견지해 왔던 성도의 부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꾸고, 죽음속에 있는 부활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묘지석에 사망한 날짜를 쓰지 않기로 합니다. 그가 이러한 결정을 한 이유는 2016년 사망한 아내 엘리자베트 때문이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이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그의 신학적 성찰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감쳐져 있는 미래의 생명을 믿고, 사망의 날짜는 없다. 내게는 부활의 날짜가 있음을 말했습니다. 성도들은 슬픔으로 인생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이 오늘과 내일을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걱정하기 보다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불평하기 보다 주어진 일들에 감사하며, 기쁨의 길, 희망의 길을 지속적으로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많은 우리를 용납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보다 더 크시며, 실패와 배신, 연약함을 덮고도 남음이 있는 크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무한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 안에는 우리의 연약함을 덮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고백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내 기준과 내 편견의 그릇에 담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희망의 신학은 세상속에 있는 기쁨을 담으려고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세상과 연결되어 질 때에 진정한 기쁨이 솟아나게 됩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순간 세상에서 느낄 수 없는 기쁨의 충만함을 얻게 됩니다. 다윗은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헨리나우웬은 춤추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고통을 직시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119편 92절을 보면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고난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고 가지만 그때마다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되면 고난도 이길수 있게 됩니다.

고난 중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인식하시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주님의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고, 아들은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에게 성령께서는 새 힘을 허락하십니다.

셋째, 생각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을 통해 기쁨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현대사회는 여러가지 일들로 인해서 근심과 두려움에 빠지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뉴스를 보면 우울함을 주는 소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부정적인 일들에 노출시켜 버리면 마음이 흐려지고 기쁨을 빼앗겨 버립니다. 현대의학은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하면 뇌와 마음의 건강을 위협한다는 통계를 제시해 줍니다. 몸에 난 상처라면 시간이 흐르면 치유가 되겠지만 생각이나 마음이 병이 나면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반응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린 처방은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거룩한 것, 사랑스러운 것,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 속에 깊이 생각하라고 명령법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덕목들은 우리가 아름다운 삶을 형성시켜 나가는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생각만 하지 말고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실천하라고 명령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묵상이라면 실천하는 것은 삶의 적용입니다.

이것이 뇌에 대한 수많은 연구 결과가 있기 전에 바울이 주는 치료 방법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세운 과정을 보면 2차 전도여행 중에 환상 가운데 마게도냐 한사람이 나타나서 그를 불렀고, 성령의 인도함으로 건너가 처음 세운 교회입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성령님께 인도함 받고 세운 교회이니까 바울이 교회를 세우고 무엇을 전하고 교우들은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한 성경공부를 했을 것입니다. 전도 여행중에 바울은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더 큰 사랑으로 사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잠긴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을 충분히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빌립보서 서두에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빌립보 교우들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데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고 고백합니다.(빌 1:8)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져야 합니다. 심장에서 피를 공급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지녀야 그리스도의 피를 공급받게 되고, 서로가 한 피를 나눈 한 형제,자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쁨의 공동체는 실패를 두려워하기 보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변하여 욕망과 혈기의 피가 그리스도의 피로 순환되어야 합니다. 몸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원활해 지는 것은 성령의 다스림 받는 것입니다.

갈등이 분쟁을 낳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통한 성장을 경험하는 공동체입니다. 마음의 광야에 자리하고 있는 불안, 욕심, 미움, 편협함, 비난, 정죄, 교만의 뿌리를 뽑아내는 일이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단비로 인해 진정한 기쁨이 임해야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 집니다.

누군가가 무디(D.L. Moody, 1837~ 1899)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잘 깨달아 지지 않고 하나님이 의심되면 어떻게 하지요?” 그때 무디는 다음과 같은 적절한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성경책을 놔두고 뛰쳐나가 전도하고 지나가는 손수레라도 밀어주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찾아서 봉사하십시오, 그리고 돌아와서 성경을 읽으면 해석이 잘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배운 대로 실천할 때 성경말씀을 가장 잘 배울 수 있으며,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로 인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일상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 숨이 막힐 듯 힘들었던 지체들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어주고, 혼자라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 기도로 든든히 함께 해주며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기뻐하고 축복해 줄 수 있는 공동체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두 팔이 있는 것은 많이 안아주고 품어 주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케임브리지 한인교회가 두 팔 벌려 품어 안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진정한 기쁨은 세상의 어떤 기쁨으로도 채울 수 없는 기쁨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진정한 기쁨은 우리가 누리고자 했던 목표와 목적을 바꾸어 줍니다. 우리의 기도의 자리를 통하여 섬김과 봉사의 자리를 통하여 항상 기쁘고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는 진정한 기쁨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