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24. 2024 주일설교

(종려 주일)

십자가와 동행하는 사람들

마지막 만찬의 은혜

Grace of the Last Supper

누가복음 22:14-20

유민용 목사

14 ○ 시간이 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1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참으로 간절히 원했다. 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 하나님 나라에서가 아니면, 앞으로 다시는 내가 유월절 음식을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17 그리고 예수께서는 잔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자, 이 잔을 받아, 너희가 서로 나누어 마셔라. 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이제 나는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19 예수께서 또 빵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다. 이것을 먹어, 나를 기념하여라.” 20 유월절 식사가 끝나자, 예수께서 또 잔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쉬운말 성경)

14 When the time came, Jesus and the apostles sat down together at the table.[a] 15 Jesus said, “I have been very eager to eat this Passover meal with you before my suffering begins. 16 For I tell you now that I won’t eat this meal again until its meaning is fulfilled in the Kingdom of God.”17 Then he took a cup of wine and gave thanks to God for it. Then he said, “Take this and share it among yourselves. 18 For I will not drink wine again until the Kingdom of God has come.” 19 He took some bread and gave thanks to God for it. Then he broke it in pieces and gave it to the disciples, saying, “This is my body, which is given for you.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20 After supper he took another cup of wine and said, “This cup is the new covenant between God and his people—an agreement confirmed with my blood, which is poured out as a sacrifice for you(New Living Translation)

올해는 사순절 절기가 조금 빨리 찾아왔습니다. 부활절이 해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이 해마다 다른 이유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해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春分, vernal equinox)이후의 주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1697년 동안 지키는 모든 교회들의 약속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매년 부활절을 기준으로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거슬러 올라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로 부터 사순절기를 보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셨는데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하여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이제 월요일 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은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의 사랑을 기억하는 시간으로 보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마치시고 유월절 절기가 가까이 오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월절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모인 예루살렘인데, 예수님에게 그해의 유월절은 달랐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의 살해 음모를 꾸미고, 가롯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고 처형할 빌미를 제공하기로 제안하고, 대제사장과 군관들은 그 대가로 돈을 주기로 약속합니다. 그해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축제일로 보내던 때에 체포 당하신 후 재판 받으십니다. 예수께서는 수요일을 침묵의 날, 기도의 날로 보내시고 목요일 밤부터 십자가 고난을 시작으로 십자가에 달리사 금요일 오후 3시쯤 운명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것 같은 마음을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정말 짧은 시간 동안에 이 일들이 모두 일어 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날은 유월절 대표적 음식인 어린양을 포도주와 떡으로 대체하셨습니다. 주님은 고난 당하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원하셨고,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의 자리였습니다. 포도주를 마시며 감사 기도를 드리셨고 많은 사람을 위해 내가 흘리는 보혈이니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성도들에게 주시는 성찬의 의미를 말씀하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에게도 마지막 식사의 시간은 찾아옵니다.

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 하나님 나라에서가 아니면, 앞으로 다시는 내가 유월절 음식을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17 그리고 예수께서는 잔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자, 이 잔을 받아, 너희가 서로 나누어 마셔라. 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이제 나는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경험한 만큼만 위로 할 수 있고 사랑 할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소중한 사람과의 마지막 식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언젠가는 떠나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도 마지막에는 나의 것이 아님을 내려 놓아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내가 그토록 부딪히며 완고했던 자아와 생각도 끝까지 가지고 갈수 없습니다. 전도서의 기자가 헛되고 헛되다 하시는 말씀은 삶의 허무주의가 아니라 더 소중함으로 살아내라,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죽음을 성찰하며 현재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삶이 소중하고 삶을 긍정의 마음으로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 가운데서도 다시 일어나, 기쁜소식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감사할 일보다 걱정거리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오늘날 미디어에서는 성공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성공에 대한 압박을 받아 왔기 때문에 잘 되는 일에 대한 감사는 자연스럽지만 삶의 진정한 목적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주변에는 말 못할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간증은 성공 스토리가 아닌 하나님과 살아 낸 이야기가 고백 되어져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지금의 삶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의 상처가 변하여 감사가 되도록 해 주십니다. 십자가는 끊임없이 찾아 오는 인생의 쓴잔에도 주님이 함께 계시니, 주님의 자녀는 주님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약속을 믿는 이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주시고, 생명의 참된 의미를 통해서 감사의 마음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리나 미디어로 인해 주님의 성찬의 참 의미를 듣지 못하며 살아가지만  성찬식은 고요하게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새언약이 되신 주님은 인생의 참 소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시대의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연합이 이루어짐으로 은혜의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찬은 우리의 불완전한 삶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우고, 삶의 현장에서는 주님의 능력을 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의 능력을 입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실수가 많던 사람들이었지만,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주님께서 새언약이 되심을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찬은 우리가 듣는 설교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며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은 실제로 내 삶의 아픔, 고통과 두려움, 염려와 걱정을 그리스도께 맡기며 감사의 언어로 몸과 마음을 빚어내는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의 마음 안에 주님께서 거하시며 격려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성찬은 삶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연결고리가 되어 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성품과 마음이 변화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의 삶이 산산히 부서졌을때에도 진정한 감사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장에 무뎌진 믿음을 다시 깨우시는 것이 감사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은혜를 가득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찬은 주안에서 하나임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수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그 믿음의 씨앗을 마음 안에 심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죄된 욕망으로 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일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하는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미움과 시기를 끊어내고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가라고 그리스도의 참 사랑으로 매일 부어주십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회심은 관계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종들과 주인들이 함께 떡을 떼었고, 변화된 종과 주인은 서로에게 주의 교훈을 가르치고 교육을 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을 이뤘습니다. 신분의 차이가 뚜렸하던 시대임에도 종과 주인이 서로에게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서로가 한몸처럼 베풀고 나누며 그리스도인들은 실제적 믿음을 누림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함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고백하게 하시고,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성찬식을 준비할때마다 성찬 위원들은 성만찬을 준비하는 일주일의 말씀을 가지고 한주를 기도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월요일의 말씀은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또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모두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안에 있소, 살아 계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또 내가 아버지로 인해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인해 살것이오라는 말씀 구절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성찬을 통해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와 깊은 연합이 되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성찬을 준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깊이 경험하고, 우리의 영혼이 주님으로 인하여 살아있게 됨을 느낄 때 우리가 나누게 되는 성찬은 예수님의 생명이 됩니다. 우리 안에 그 생명이 나눠지게 될때에 서로의 관계가 깊어지고, 우리의 영혼이 그분으로 인하여 서로에게 속하여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2천년 전에 주인과 노예 사이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여기라고 했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믿게 되는 일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안식과 평강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관계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성찬은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진 우리의 발걸음을 돌려 하나님께 향하도록 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와 너를 연결하는 사랑이며, 삶에 대한 긍정의 마음을 지니게 해줍니다.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관계를 새롭게 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주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이제 우리가 나누며 살아야 할 구체적인 음식은 무엇입니까?

19 예수께서 또 빵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다. 이것을 먹어, 나를 기념하여라. 20 유월절 식사가 끝나자, 예수께서 또 잔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유월절 식사에서는 전통적으로 몇번에 걸쳐 잔을 들게 됩니다. 첫번째 잔을 들고 기도한 후에는 쓴나물, 누룩없는 빵 외에 붉은색 쨈이 주어집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한 노동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잔을 들고는 시편의 찬양시를 불렀습니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축복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어떠한 이론을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실제적으로 나눠야 할 음식이 되셨습니다. 예수는 성찬을 통하여 새로운 언약의 중요한 예식이 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집트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음이 모든 가정의 큰아들을 삼키려 했지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더니 하나님은 죽음으로 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맏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유월절의 유래입니다. 그 어린양의 피가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마지막 때까지 우리를 죽음으로 부터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께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예수를 팔고, 배신할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다 알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마가복음 14장 8,9절입니다.

“8 그러므로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한 것이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어준 것이오. 9 내가 분명히 당신들에게 말하겠소. 온 세상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행한 이 갸륵한 일도 함께 전해져서, 사람들이 그녀를 길이 기억하게 될 것이오.

이 여인의 행위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었고,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던 주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예수의 기적과 이적을 따랐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때 모두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 여인의 순종은 성경에 기록되어 남겨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녀의 삶을 복되게 해 주시고 성경에 기록해서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함께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했던 이 여인의 반응이 우리의 삶속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세상속에 있으나 하나님의 차별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맡겨 주신 삶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이뤄 나가야 합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만 급급한 삶이 아니라 매일의 삶속에서 더 깊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경험되도록 살아갑시다.

이제 많은 사람을 모으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한사람 한사람을 찾아 가라고 말씀 하십니다. 한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그들과 동행하며 끝까지 찾아 가신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붙들어 주셨고, 자신이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그날 밤에도 사랑하는 제자들을 보게 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나의 삶을 온전히 내어드릴 수가 없는데 마음을 깨트린 옥합을 어떻게 드릴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옥합을 깨트리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린 한 여인은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었고 비방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으로 엎드리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여인의 순종을 성경 말씀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1963년에는 미국인의 65퍼센트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절대적 진실로 믿는다고 대답했다. 15년후인 1978년에는 그 수가 38퍼센트로 줄어들었다. 1992 1월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32퍼센트로 다시 줄었다. (PRRC Emerging Trends) 영국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비율은 1981년의 26퍼센트에서 현재(1992) 31퍼센트로 감소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1981년의 52퍼센트에서 48퍼센트로 감소했다. (International Christian Digest)’

30년 전의 이 통계가 지금은 어떠한 결과로 남아 있을까요? 이제 우리의 교회와 믿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개인의 믿음을 회복하여 복음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쩌면 믿고 있으면서도 갈급하고 곤고한 이유가 내가 가진 옥합을 깨트릴 자신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 능력의 절정은 남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십자가에 있으며, 이제 우리의 삶의 실제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사랑을 배워가는 예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참된 희망을 찾는 이들에게 풍성한 교제를 소개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03.17 2024 주일설교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십자가와 동행하는 사람들

잃어버린 두 아들을 위한 잔치

The celebration of the 2 lost sons coming home

누가복음 15:24-32

유민용 목사

24 자, 보아라. 죽었던 내 아들이 이렇게 다시 살아왔다. 내가 아들을 잃었는데, 이제는 다시 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큰 잔치를 벌였소. 25 ○ 한편, 그때 밭에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큰아들은,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 자기 집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소. 26 그는 종 하나를 불러, 자기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소. 27 종이 대답하기를 ‘동생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르신께서 동생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시고자,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였소. 28 그 말을 듣고,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소.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지만, 29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투덜거렸소. ‘아버지,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뼈 빠지게 일했고, 아버지의 말씀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지금까지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저를 위해 염소 새끼 한 마리조차 잡은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이게 뭡니까? 창녀들에게 아버지의 돈을 다 써 버린 아들이 왔다고, 그를 위해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벌이시다니요!’ 31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말하기를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네 것이 아니더냐? 32 그러나 생각해 보아라.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그러니, 내가 잔치를 벌여 즐기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하였소.” (쉬운말 성경)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의 아침이 더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특별 새벽기도를 결심하고 지키는 분들은 이쯤되시면 생체 리듬이 바뀌었을 겁니다. 이제 열흘 정도 남았는데 피곤하고 힘들어도 주의 생명이 마음 깊은 곳에서 부터 솟아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집으로 다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자유를 갈망한 아들이고, 다른 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얻기 위해서 아버지 곁에 머물러 있던 아들입니다. 자녀를 키우다보면 아이마다 성향이 다르고 기질이 다름을 느낍니다. 이 두 아들의 선택은 우리의 삶과도 닮아 있을것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본문에도 방황했던 아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고 끝까지 기다리던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십가가의 정신 가운데 한가지는 포용성입니다. 포용과 환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가치입니다. 포용의 마음을 잃어 버린 공동체는 내 기준만을 높이기 때문에 파벌이 형성되고, 환대를 잃어버린 공동체는 새로운 이들을 환영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생깁니다. 이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큰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아담의 죄로 인해 사랑과 협력 보다는 분열과 배척을 반복해 왔습니다. 편견과 분열은 성경 안의 가정에서도 발견됩니다. 가인과 아벨,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그 밖에도 요셉의 형제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불완전함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구속적 섭리로 믿음의 가정을 이끌어 가십니다.

누가복음  15:1, 2절에 따르면 예수께서 두 아들을 잃어 버린 비유를 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세리와 죄인들이고, 다른 부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오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비유속에서 우리는 죄와 대속, 희망에 대해서 볼수 있습니다.

첫째, 둘째 아들은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아버지를 떠납니다.

12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소. ‘아버지, 제 몫의 유산을 미리 나누어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소. 13 얼마 후, 작은아들은 자기 몫을 다 챙겨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소.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 남겨질 유산을 미리 분배해 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합니다. 아버지의 굴레를 떠나 자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로 부터 멀리 떠나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인생에 도전도 하고, 꿈도 펼치고 싶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의 이 행동이 아주 잘못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멋진 꿈을 꾸며 인생을 멋지게 개척해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이해와 달리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기에 당시에 이런 요구는 아버지가 원로들에게 데려가 아들을 돌에 맞아 죽게 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아버지는 당시 시대적 문화를 넘어서 자유를 열망하는 아들의 요구를 순순히 허락합니다.

유대사회 풍습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장자에게는 재산의 3/2, 둘째에게는 아버지 유산의 1/3가 할당이 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1/3 유산에 해당하는 꽤 많은 돈을 들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끝없는 자유를 향해 떠난 이 아들은 그 땅에서 오래 가지 않아 술과 여자로 재산을 다 탕진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기로 선택하면 하나님의 주권의 바다를 벗어나 물밖에서 살고 싶은 죄된 욕망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영역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로 인해 타락으로 가게 됨을 보게 됩니다. 죄가 하나님으로 부터 벗어 나려는 힘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삶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했을 때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고, 그는 돼지 농장에서 돼지 먹이로 허기를 채우면서 지내야 했습니다.

13절로 1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3 얼마 후, 작은아들은 자기 몫을 다 챙겨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소. 거기서 그는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 많은 돈을 다 허비해 버렸소.14 돈은 이미 다 떨어진 데다, 그 나라 전역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 그는 끼니조차 제대로 이을 길이 없게 되었소.15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그 나라 사람의 어떤 집에 더부살이로 들어가 돼지를 치게 되었소.16 그는 너무나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라도 실컷 먹고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넉넉히 주는 사람이 없었소.

당시 유대 사회에서 돼지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자유를 희망했지만 유대인들이 혐호하고 부정한 짐승이라 여기던 돼지를 치며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얼마다 그 삶이 절박했을까요?  돼지가 먹는 열매로라도 배고픔을 없애 보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뜻대로 안 됐습니다. 이 아들은 어느 날 아버지가 계신 자기 집을 생각했겠지요.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품꾼들은 지금의 자기 신세 보다 나을 텐데, 아버지에게 품꾼의 하나로 걷어 달라고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서 잘못을 빌고 앞으로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한명으로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요.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매일 매일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날도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둘째 아들임을 직감합니다. 아버지는 동네 어귀에 들어서기도 전에 아들을 향해 뛰어 나오십니다. 유대사회의 체면 문화도 아버지에게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오직 죽었다가 살아 돌아오는 아들만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을 끌어 안아 목을 껴안도 입을 맞추십니다. 하인들에게는 잔치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줍니다. 일꾼이 아니라 다시 아들의 신분을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이 아들은 크게 혼나더라도 일꾼으로라도 아버지 곁에서 섬기려고 했는데,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내 뜻대로 살고 싶은 자유,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고 싶은 자유,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며 마음안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될때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어느날 존 웨슬리에게 찾아온 한 사람이 불신을 품고서 묻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설교를 하며 어디로 인도하시는 겁니까? 웨슬리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닮아가고 만물을 사랑하며 자신의 삶에 자족할 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깨닫게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값없는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못해도 있는 그대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영혼의 굶주림 가운데 있을때에 배불리 먹여 주셨고, 자유를 향해 질주하며 공허함과 허무함에 갇힌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가장 기뻤던 날 아버지 집에 머물던 큰 아들의 실체가 드러 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쌓이고 쌓였던 분노가 동생이 돌아온 시점에 드러났습니다. 평소에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아 보였는데 가장 기뻐해야 할 순간에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합니다.

24 자, 보아라. 죽었던 내 아들이 이렇게 다시 살아왔다. 내가 아들을 잃었는데, 이제는 다시 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큰 잔치를 벌였소. 25 ○ 한편, 그때 밭에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큰아들은,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 자기 집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소. 26 그는 종 하나를 불러, 자기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소. 27 종이 대답하기를 ‘동생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르신께서 동생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시고자,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였소. 28 그 말을 듣고,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소.

둘째, 큰 아들의 관심은 아버지가 지닌 재산일 뿐입니다.

형은 동생이 돌아온 것이 왜 불편한 것일까요? 아버지가 둘째를 받아들이는 것이 왜 분노할 일이었을까요? 아버지가 동생을 다시 아들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제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자신의 것이었는데 또 다시 1/3재산을 나눠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 내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인생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 자신이 받게 될 이익을 기대했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달랐지만 목적은 동일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뜻에 반항하고 자유를 갈망했던 것이고, 큰 아들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께 순종한 한 것입니다. 결국 두 아들 모두 아버지로 부터 벗어나려고 한 것이지요.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큰아들에게도 아버지 보다 재산이 먼저 였습니다. 이 아버지는 큰 아들도 동일하게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네 것이 아니더냐? 아버지는 너도 이 잔치에 참여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1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말하기를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네 것이 아니더냐?

하나님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얻을때 우리는 아버지가 베푼 잔치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율법을 통한 구원과 믿음으로 인한 구원의 차이로 분열과 대립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그리스도교를 떠나야 했습니다. 둘째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큰아들은 이미 믿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예수의 비유에서 나오는 큰아들은 형식주의적 종교를 지적하며,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있으나 실제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의심을 버리고 아버지의 잔치로 들어오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는 착하게 살라, 성실하게 살라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착하게 살고 죄를 이기려고 해도 더 많은 죄의 물결이 마음에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좋은 열매는 뿌리 깊은 좋은 나무으로 부터 맺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변화시켜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9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투덜거렸소. ‘아버지,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뼈 빠지게 일했고, 아버지의 말씀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지금까지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저를 위해 염소 새끼 한 마리조차 잡은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이게 뭡니까? 창녀들에게 아버지의 돈을 다 써 버린 아들이 왔다고, 그를 위해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벌이시다니요!’

또 다른 아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셋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소. 그것은,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온전한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통과하시며 죄와 어둠속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해 주시기에 우리는 넘어지고도 일어날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의 잔은 고통의 잔이고 쓴잔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여정 가운데 우리의 고통의 잔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받아드리기 힘든 그 잔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아버지를 신뢰했기에 그 잔을 받아들일수 있었습니다. 내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할수 없을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할수 있는 근거는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존 스캇펙 박사는 평화만들기라는 책에서 진정한 공동체에 이르고 싶다면 잘난 제안들이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봐야겠다는 욕구를 먼저 버리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욕구, 돈에 대한 집착, 신에 대한 분노 등 이러한 것들은 평화의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평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에 고통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분쟁의 시대에 진정한 공동체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예수는 우리의 고통도 축제의 일부분을 만드시며 이끄십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예수가 초대한 잔치에 들어온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닮아갈 것인가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예수님과 함께 써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의 지친 호흡에도 계시고, 어두운 세상속에서 홀로 있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회개란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삶의 방향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는 삶의 방식입니다. 만일 우리가 더 이상 주안에서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탕자처럼 돌고 돌아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젖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믿음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배하고 있지만 삶의 영역에서는 내가 주인되어 살아가는 삶이 익숙하고 말씀을 읽지만 그안에 깊은 은혜는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찾지만 구원의 길에서는 여전히 방향을 잃은 자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둘째 아들에게만 베풀어 준 잔치가 아니라 누구든지 오라고 베푸시는 잔치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해주셨습니다. 원망이 찾아 오는 순간마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첫째 아들의 모습도 있고 둘째 아들의 모습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가 어린 아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장성한 분량으로 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청중일 뿐이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큰아들이나 작은아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가야 합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맞이했습니다. 마음의 방향이 달라져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아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걸음과 방향이 되어 주시는 주님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걷습니다. 한번도 변한적 없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귀한 은혜 누리시고 사순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기억하며 묵상하는 한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