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05 2024 주일설교

(부활절 여섯번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12

사랑의 공동체

Community of Love

유민용 목사

요한복음 15:9-12

9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여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그것이 바로 너희가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것과 같다.
11 ○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여,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쉬운말 성경)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1970)은 1901년 어느날 밖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상황을 말한 뒤 이혼하고 싶다고 전하고, 이후 그의 인생에서 평생 네번이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철학자 러셀은 충분한 사유를 통해서 사랑의 본질은 감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느낌이 사라지면 사랑도 떠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러셀의 사랑은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내가 갖고 싶은 것, 우리는 소유하고 싶은 것에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사랑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힘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랑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좋은 감정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게 되면 위선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감정적 사랑의 한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적 사랑과는 다릅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9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여라.

9절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아들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하여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사랑을 깊이 인식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깊이 인식했으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듯이 예수의 계명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진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사랑하사 외아들을 주셨으니’라는 구절속에는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크신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세상 모든 민족이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하고 믿음으로 따르는 것은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는 만큼 행동해 나가면 됩니다. 서로를 따뜻한 시선으로 대해 주고 합리적인 판단과 생각을 넘어서서 말씀을 통해 주어진 생명을 경험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서로를 인정해 주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으로 성취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는 사랑으로 유지됩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표현됩니다(요한 1서 4:7). 이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고 하시는 말씀에 하나님의 변함없는 포용성이 느껴집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게 하는 주님의 고별설교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불러 주시고, 내가 너희를 선택해서 세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구절에서 제자들을 향한 주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13절로 15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내 계명을 너희가 지키면, 너희는 내 친구다. 15 이제부터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주인이 종들에게는 비밀을 털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너희를 ‘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다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오래 사귀어 정을 나누는 사람을  뜻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친구로 부르시는 것은 서로가 깊이 교제하며 마음을 온전히 열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다 드러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정의하는 친구의 개념을 보면

첫째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생명까지 아낌없이 줄수 있는 친구가 한명만 있어도 행복한 사람일텐데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의 친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순종이 사귐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의 계명을 소홀이 여기면 예수의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번째로 친구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권을 얻는 것입니다. 종은 명령을 받는 관계이지만 친구는 비밀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종은 주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시키는 일만 하는 반면에 친구는 주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됩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친구가 되어 한 몸을 이뤄가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 사랑의 절정은 기쁨입니다.

15:11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여,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 1878 ~ 1965)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말의 위기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세가지 인간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것과 그것의 관계를 말합니다. 마치 물건처럼 이용하다가 가치가 없으면 버리는 관계입니다. 일시적이고 기계적인 만남입니다.  둘째는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시간이 흐르면 지쳐 버립니다. 신앙생활도 이러한 방법으로는 지속되지 않게 됩니다. 셋째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인격적 관계인데 주님과의 연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한 1:4)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얻는 기쁨은 무엇을 가졌느냐 안가졌느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속에서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기쁨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샘솟는 것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허전하고 부족해 합니다. 욕망으로 채울수 없는 영혼이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참된 만남속에는 만족함이 있고 기쁨이 생겨납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큰 기쁨을 누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내면에 기쁨이 채워져야 인간 관계에서도 기쁨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 항상 기뻐하라는 구절이 있는데 ‘항상’이란 말은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살면서 기쁘지 않는 상황도 만나게 되기도 하고 기쁨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고난중에도 주를 바라보며 기뻐하고, 슬픔 가운데서도 찬송하며 기뻐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충만함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러나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과 연결된 삶의 목적이 이 기쁨을 가리킵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나를 둘러싼 일들과 환경을 온전히 대할수 있게 됩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co-worker)입니다.

15: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동참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행동으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의 분쟁과 시기는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랑을 말할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분이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이 새 계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확실한 테두리가 있어 보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같은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서로가 함께하는 것이 어려워 집니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일을 계획하며 나아가면 과정속에서 문제는 계속 발생하게 됩니다.

성경은 ‘서로간의 사랑’과 ‘모든이에 대한 사랑’을 둘 다 언급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 여러분 서로 간에 나누는 사랑과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쉬운말 성경)

하나님의 동역자는 그릇을 넓혀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보게 되고, 이웃의 범위가 확대되어 갑니다. 믿음을 통해서 믿음의 일을 하게 되고, 믿음의 눈이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 선생에게 받은 질문 중에 한가지는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두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라는 책에서 ‘한계없이 넘쳐 흐르는 사랑의 삶’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도는 이웃의 개념을 확장해야합니다. 교회 안 뿐만이 아니라 세상과 일터에도 우리의 이웃이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기 원하고 선을 행하려고 애를 쓰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할수만 있으면, ‘여러분의 힘이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17절을 하나님의 동역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6 명심하여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그 이유는, 너희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가 항상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내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다 주실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계명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며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위대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가족만 사랑하여도 충분할 것 같은데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이해 되어지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이해되어지지 않는 한없는 사랑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며 많이 사랑하는 것 처럼 많이 헌신하는것 처럼 보여질뿐 어쩌면 가장 가까운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연약함 안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것이 믿는 성도들의 정체성이 되어야 합니다. 지쳐있을 때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쉬어 버리면 안됩니다. 지쳐있는 몸과 마음일지라도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작은 일도 감당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비판과 정죄의 마음에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났던 제자들은 위험한 순간에서 자신들의 믿음의 상태가 보였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과 동화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이 예수의 공동체입니다. 형제 사랑은 먼저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밑바탕인 동시에 세상을 향해서 믿음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웃이라는 개념의 한계선을 넘어서 주님은 친구가 되어 주시지만, 자신은 항상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끊임없이 경계선들을 뛰어 넘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형제 관계속으로 이끌려 졌고, 끊임없이 새로운 이웃관계들이 형성되었습니다. 한주도 하나님의 동역자들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04. 28 2024 주일설교

(부활절 다섯번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11

새로운 의식

New paradigm

마태복음 9:14-17

유민용 목사

14 하루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우리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금식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15 예수께서 되물으셨다. “결혼식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으면서 어찌 슬퍼할 수 있겠소? 하지만 이제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가 되면 그들도 금식할 것이오. 16 낡은 옷에다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렇게 하면, 새 천조각이 낡은 옷을 당겨서, 그 옷은 더욱 심하게 찢어지게 될 것이오. 17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렇게 하면, 그 낡은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가 쏟아지게 되고, 그 부대도 버리게 되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오. 그래야 둘 다 보존될 수 있소.” (쉬운말 성경)

금식은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신앙훈련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은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참회를 위해 금식을 합니다. 그들에게 금식은 종교적 규례와 전통으로 확고한 신앙의 행위였기에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차례 월요일과 목요일날 금식날로 정해 놓고 지켰습니다. 무슬림들도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을 하시며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 금식의 전통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새롭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육체를 주님 아래 계속 놓기 위해, 그리고 금식이 가져다 주는 주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금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실천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일로 예수께 질문을 합니다.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우리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금식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배경을 보면 마태가 세리들과 죄인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예수님과 식사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마태는 반민족주의자로 동족들에게 경멸과 미움을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마태는 제자 삼아 주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리의 직업을 내려놓고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마태는 잔치를 열어서 동료 세리들과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마태는 동료 세리들에게도 주님을 소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미움과 비난을 받고 살았던 세리 마태가 해결되지 못한 삶의 문제를 이겨 내도록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잔치가 벌어진 마태의 집 밖에서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금식하는 날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9:12-13)

예수께서는 죄많고 실수 많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태는 세리 마태에서 위대한 사도로 인생이 변화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인 세례 요한의 생애를 통해 그들의 신앙 정체성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기득권층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광야에서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 외치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의 외침을 듣고 따랐던 제자들은 당연히 수도원적 삶을 살았겠지요. 게다가 스승인 요한이 ‘나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조차 풀어 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오.’ 라고 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 미묘한 경쟁심리도 있을 것이고, 예수의 제자들이 못마땅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3가지 비유를 통해서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결혼식 신랑의 비유입니다.

9:15 예수께서 되물으셨다. “결혼식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으면서 어찌 슬퍼할 수 있겠소? 하지만 이제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가 되면 그들도 금식할 것이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금식과 결혼식은 그 의미가 대조적입니다.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슬픔의 표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궁극적으로 기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마태의 삶에 찾아오신 주님은 이전의 동족들에게 받던 설움과 상처를 씻겨 주시고 인생의 스승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 하실때 마태의 마음에 예수님과의 실제적 교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배는 이 기쁨을 경험하는 혼인식 잔치와 같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한 이 비유는 금식의 때가 아직 아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금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기쁨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환경에 따라 변하고 금방 사라지는 일시적 기쁨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하늘의 기쁨이요, 영원한 기쁨입니다. 예배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사라지고 종교적 행위와 지식만 앞설 때 예배의 자리에 계시는 주님은 보이지 않을 것이고, 종교적 전통과 규례가 주님 보다 앞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가 되면 그들도 금식할 것이오.

주님은 예수의 제자들이 앞으로 금식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슬픔을 당하게 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주님을 잃고 큰 충격에 빠진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정신없이 도망갔고, 좌절감에 사로 잡혀서 두려워 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죽은 예수만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한 순간 슬픔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디다케 사도집의 교훈을 보면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금식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전통인 월요일과 목요일이 아니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하는 새로운 전통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떠날 것을 말씀하셨던 이 비유의 말씀을 근거로 금식을 시행하게 됩니다. 금식의 동기가 달라진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빗대어 지금은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금식하거나 슬퍼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에 금식하며 애통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비유는 낡은 옷과 새 천 조각의 비유입니다.

16 낡은 옷에다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렇게 하면, 새 천조각이 낡은 옷을 당겨서, 그 옷은 더욱 심하게 찢어지게 될 것이오.

지금이야 옷의 질이 많이 좋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옷이 헤어지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옷감은 베였는데 헤어진 베옷을 새 베옷감으로 꼬매게 되면 헤어진 베옷이 당겨져서 옷이 더 망가졌습니다.

이 비유는 형식적인 금식을 부정하신 것입니다. 형식적인 금식은 헛옷에 새천 조각을 붙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새옷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위선에 대한 경계하실때에도 유대인들의 금식 전통을 완전히 뒤집는 말씀을 하십니다.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이 비유는 기존의 모든 질서와 규범의 토대가 무너짐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단순히 새천 조각을 꼬매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새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성도의 삶은 이전에 입던 옷을 완전히 벗고 새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옷을 꿰매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새옷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난 이들의 삶에는 완전한 변화가 찾아 옵니다.

이어령씨가 쓴 ‘젊음의 탄생’의 책에 보면 젊음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갱이라는 화가가 3가지 질문을 그림을 통해 던졌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그는 서구 문명의 깊은 회의를 느끼고 절망 끝에 삶의 해답을 얻기 위해 남태평양 타히티 섬으로 갑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답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질병과 가난 뿐 낙원은 아무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파리로 돌아오지만 이미 그를 받아 주지를 않습니다. 가족도 그를 외면하고 그의 그림도 팔리지 않습니다. 다시 타히티 섬으로 돌아온 그는 죽음을 결심하고 유서로 남기려고 했던 그림이 바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그림이라고 합니다. 고갱은 삶의 물음표를 그림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했지만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수많은 질문들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불확실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주님은 죽음 권세보다 강한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힘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다면 불확실한 바다라고 해도 믿음으로 뛰어들 때 삶의 물음표가 느낌표가 될 것입니다.

셋째는 낡은 가죽 부대와 새포도주의 비유입니다.

17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렇게 하면, 그 낡은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가 쏟아지게 되고, 그 부대도 버리게 되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오. 그래야 둘 다 보존될 수 있소.

낡은 가죽 부대는 우리의 고정관념입니다. 고정된 관념이 있으면 생각이 유연하지 않고 경직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을 유연하게 해 주시고, 종교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로 부터 받는 사랑의 힘으로 높은 차원의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주님은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새포도주는 발효가 되면서 팽창하게 되는데 이를 낡은 부대에 담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터져 버리게 됩니다. 낡은 사고 방식으로 새로운 일을 행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새 포도주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산 믿음의 성도들은 살아 있기에 세속적 물결에 대항하여 싸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혀 주신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회개하여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생명이 있기에 죄와 대항하는 것입니다.

어느 단체나 리더가 바뀌면 변화를 향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새부대 새 포도주는 일시적인 변화가 아닌 지속적인 변화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며 우리 안에 쌓아 두고 있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예수님을 따라갈 때에 진정한 변화를 만나게 됩니다. 주님을 믿을 때 누구에게나 새로운 시대가 열려집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예수님처럼 생각하는 것이 새로운 의식입니다. 절망적인 사회속에서 그분은 우리의 희망이 되십니다. 슬픔 가운데 주님은 영원한 기쁨이 되어 주십니다.

미국의 조지 바나 연구소에서 “하나님께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고 반드시 대답해 주신다면, 당신은 어떤 질문을 하나님께 하겠습니까?”라는 주제로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 가장 많은 응답자들이 “세상에는 왜 아픔과 고난이 있습니까?” 이 질문을 하나님께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모든 사람들이 겪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무지개를 보려면 먼저 소낙비가 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아름다움이 오기 전에 반드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가 걸으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적당한 무게를 안고 살아갈 때 보다 잘 믿으려 할때, 잘 살아내려 할때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보는 꽃들은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땅에 떨어진 풀씨중에서도 일부만이 살아 남아 싹을 틔운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기 까지의 과정을 알고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추운 겨울을 이겨낸 꽃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할 것입니다. 모든 순간이 열매를 맺기 위한 생명의 과정이 됩니다. 어떤 슬픔도 아픔도 주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인도하심 속에서 누리는 이 기쁨이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는 희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는 율법의 정신을 새롭게 완성하셨고, 옛 시스템을 완전히 폐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비유는 생존 경쟁이 치열한 사회속에서 우리의 생각과 의식에 대해서 새로운 도전을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언제나 믿음을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셨고, 단순히 죄인들과 세리들을 제자로 삼았다기 보다는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이제 슬픔도 기쁨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오랜시간 금식의 전통이 참회가 목적이었다면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기독교가 종교적 의식이라 보일테지만 복음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단순한 종교생활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행위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기에 주님이 원하시는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아볼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성경에 능통한 사람임에도 요한의 세례를 알 따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부활의 도를 가르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따랐습니다. 아볼로는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행 18:24-19:3)

어쩌면 오늘 본문의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는 있지만 여전히 요한에게 배운 가르침만을 이방 세계에까지 전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낡은 옷과 가죽 부대에 머물고 만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12명의 요한의 제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이후 바울에게 예수의 가르침과 안수를 통해서 확실한 믿음과 성령의 확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새 부대에 새포도주를 담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 시대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변화는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질문이 닿아야 합니다. 참된 제자는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고 수용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교제 가운데 그리스도가 동행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