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현후 다섯번째 주일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마태복음 5:13~16
5:13 ○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쓸모없이 버려져, 사람들에게 다만 짓밟히게 될 뿐입니다. 5:14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산 위의 마을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마련입니다. 5:15 또 등잔에 불을 밝힌 후 됫박으로 그 등잔을 덮어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방안을 환하게 밝히려면, 등잔을 등잔대 위에 얹어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5:16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빛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환히 비추십시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시오.” (쉬운말 성경)
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what good is salt if it has lost its flavor? Can you make it salty again? It will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foot as worthless. 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like a city on a hilltop that cannot be hidden. 15 No one lights a lamp and then puts it under a basket. Instead, a lamp is placed on a stand, where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16 In the same way, let your good deeds shine out for all to see, so that everyone will praise your heavenly Father. (NLT)
오늘 본문은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잘 알고 많이 들어 왔습니다. 예수님은 ‘소금처럼 살라’는 차원의 말씀이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라고 존재적 선언을 하십니다. 소금은 다이몬드처럼 화려하지 않는 작은 결정체지만 음식에 스며들면서 맛을 내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소금의 짠맛은 변하지 않습니다. 물과 기름이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서로 섞일 수 없듯이, 음식의 부패를 막는 소금은 세상 속에서 변질되지 않는 변함없는 가치를 상징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존재적 선언은 우리의 삶이 빛나거나 눈에 띄지 않아도 때로는 삶에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와도 성도의 거룩함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는 흉내내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맛을 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는 묵직한 책임으로 들려와야 합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것은 근본적인 형태의 달라짐을 의미합니다. 이 정도면 됐지가 아니라 땅의 속한 삶이 아니라 낡은 세계를 깨뜨리고 새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헬라어 μετανοέω (메타노에오)는 ‘다시’를 뜻하는 μετά (메타)와 ‘생각하다’를 뜻하는 νοέω (노에오)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핵심은 마음과 삶을 바꾸는 근본적인 변화에 있습니다.” 매주 드리는 예배는 단지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새롭게 깨닫는 시간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은 산 위에서 하신 설교입니다.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신 이유를 보여줍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라본 대상이 제자들과 군중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 전역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고, 질병과 통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이후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신 것에 매료되어 쫓아왔습니다. 복음 전파의 사역 안에는 영혼구원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아우르는 전인적 사역들임을 볼수 있습니다. 무리들은 제자들과 함께 팔복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를 직접 치유하는 곳은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를 직접 치유하는 곳은 아닙니다. 대신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치유의 정신을 따라, 물질적 어려움으로 치료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선교적 일들을 후원하고, 선교적 소명을 지닌 사람들이 되도록 말씀으로 가르치고 길러내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는 기적을 구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로운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전하시며, 너희가 나를 따른다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다면 하늘의 상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팔복을 선언하신 후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김상철 감독의 잊혀진 가방이란 영화에는 여러 선교사들의 잊혀진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는데, 한 사람씩 조명하는 다큐형식의 영화입니다. 첫번째 인물인 헬렌 로즈비어 선교사는 26세에 의대를 졸업하고 1945년 웩 선교회를 통하여 콩고로 배정되어 갔습니다. 선교활동을 하는 동안 콩고에 내전이 발생했고, 그럼에도 그 땅에 머물러 선교사역을 했는데, 오히려 그 선택은 고통스런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헬렌은 포로로 잡혀간 친구들을 잃었고, 자신 또한 반군들에게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는 깊은 상처를 겪어야 했습니다. 감사할 수 없었던 절망의 순간에 헬렌은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떠나신 것 같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헬렌 난 너를 믿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잃어버린 사명이 다시 회복이 되더랍니다. 죽음의 공포속에서 하나님께서 ‘헬렌 너 내게 감사할수 있겠니?’ 라는 음성이 들려 왔답니다. 헬렌은 석방되어 영국으로 귀국했지만 또 다시 1966년 콩고로 돌아갔고, 이후 콩고 의료선교에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도 영광과 은혜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면 인간은 상처의 틀로 세상과 내 삶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 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매일 말씀과 기도로 점검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회복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마음 안에는 선과 악이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안에 계시기에 내가 주인되려는 삶속에 끊임없는 갈등을 하는 것입니다. 그 충돌 속에서도 자신을 내어드리는 삶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소금처럼 자신을 내어주고 녹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시대 당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방법은 당시 로마황제를 섬기는 힘의 권력이 아니라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생명의 빛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변하지 않는 언약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소금처럼 녹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설교를 산 위에서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음을 전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천국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갈릴리를 두루다니시며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쫓아와 모인 무리들에게 진정한 복에 대해서 가르친 것입니다.
모든 문화와 세상의 모든 가치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과 무리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구원 계획을 드러내시며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구원 계획에 대해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증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먼저 회개한 우리는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둔 세상을 비추기 위해 교회를 세상 한 가운데 세워 주셨습니다. 이 빛은 성도들의 마음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사라질 수 없는 빛입니다. 성령의 탄식은 우리를 애통하게 하시며,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마음을 지니고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하게 합니다. 성도는 매일 기도와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서게 됩니다. 소금은 본질적으로 변할 수 없는 내면의 변화라고 한다면 빛은 좀더 도전적입니다. 빛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산 위의 마을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마을이라는 단어 헬라어 ‘폴리스,πόλις’는 도시를 뜻합니다. 작은 동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속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기존의 문명과 가치를 허물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의 도시를 재건하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의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사명감으로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성벽이 재건되자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도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산 위에 세워진 구별된 도시를 보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속하지 않았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케임브리지 한인교회는 수많은 대학가들이 즐비해 있는 도시 한복판에 세워져 있습니다. 다양한 학문을 배우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오고, 배움을 마친 후에는 자신의 영역에 진출하기 위해서 꿈을 꾸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배움의 과정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도전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 위에 선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진리의 빛으로 살아가기
오늘날 시대정신은 진리의 빛을 철저히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의 힘과 편안함, 경제적 풍요를 최고 가치로 삼고 살아갑니다. 삶의 안정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절대적 진리 조차 상대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말씀의 씨앗을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씨앗은 비록 작지만 그 나라는 자라나서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산 위에 도시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에서 진리를 따르는 힘을 기르고 세상으로 나아가 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문화 속에서, 훼손되는 생명 윤리, 물질만능주의적 경제관, 왜곡된 성윤리와 세속화된 결혼 가치관에 맞서, 우리는 절대적 진리의 기준으로 분별하며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는 삶을 게을리 하면, 우리는 세상에 동화되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셨는데 세상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 주님을 생각하면 일평생 십자가에 붙들려 살게 됩니다. 신자는 어둠에 익숙해 질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땅 가운데 완성 될 그날까지 믿음 위에 굳게 서시길 축복합니다. 약속하신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용기를 지니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비추는 거룩한 삶
세상이 점점 어그러질수록 도덕과 윤리의 기준은 쉽게 무너지고 낮아집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사람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도 우리 안에 죄를 깨닫게 하시고, 양심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며 가르치십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착한 행실을 통해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교회는 윤리, 도덕 자체를 목적 삼지 않습니다. 더 근원적인 것을 말씀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값비싼 윤리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붙들려 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 앞에 비추라’는 구절은 사람을 의식하고 마주보며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보다 더 앞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걷는 것을 의미입니다. 그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바라보며 걷는 그 빛을 바라보게 될 것이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증인들이 앞서서 그 빛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혼란과 분열속에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두신 것은 부패를 막고 생명을 지키는 사명을 안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는다면,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와 기준이라는 틀에 자신의 걸음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동화되어지고, 신앙의 변질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 주님을 바라보며 용기내어 걸어갈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발자국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길을 비추는 빛이며(시편 119:105) 성도는 그 빛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자신을 내려 놓고 주님 앞에 겸손히 순종할 때 드러나게 됩니다(고린도후서 2:15) 어떤 상황속에서도 앞서 가신 주님 따라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
예배로 살아가게 하는 힘 (POWER) 시리즈
5주 합당한 예배
Week 5: Reasonable Worship
로마서 12:1-2
12:1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받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영적 예배입니다. 12:2 여러분은 이 세상의 풍조를 더 이상 본받지 말고, 여러분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하고 온전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옳게 분별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쉬운말 성경)
12:1 And so, dear brothers and sisters,[a] I plead with you to give your bodies to God because of all he has done for you. Let them be a living and holy sacrifice—the kind he will find acceptable. This is truly the way to worship him.[b] 12:2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우리는 임직예배를 드립니다. 임직은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의 목적을 다시금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올해 세워진 22명의 신천 집사님들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응답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직분을 받는 것은 기쁘고 감사한 일이지만 동시에 거룩한 부르심이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 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12:1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받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영적 예배입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옛 자아와 본성을 거스르는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나 중심적인 생각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 보다 세상의 문화에 더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게 합니다. 그러나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이전의 나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 내 삶 전체, 즉 몸을 올려드리겠다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육신으로 행하는 모든 선택과 행동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드릴때 제물이 살아 있으면 제물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죽여서 바치는 것이 제물입니다. 그 제물이 죽임을 당하며 태워질 때에 향이 되어 하나님께 올라갔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에 있어서 중요한 재료인 향이 천국의 예배에서는 성도의 기도로 변한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가 보좌 옆 금향로에 담기는 것입니다. 직분을 받고 섬기는 삶은 이제 내 삶이 누군가에게 보여지는가, 보이지 않는가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 올려지는 새로운 삶입니다. 순종하며 살겠다는 결단은 잘못된 마음의 동기를 날마다 점검하고 회개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8 그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아들자,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일제히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렸는데, 그들 모두는 각자 거문고와 향이 가득 담긴 금향로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요한계시록 8: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8: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지난 주일 살펴 본 것처럼, 사도요한이 본 천국의 예배는 24 장로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쓰고 있던 면류관을 모두 벗고 보좌 가까이에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자기 영광과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는 하늘의 예배입니다. 계시록 5장에서도 사도요한은 또 하나의 천국예배를 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던 봉인된 책을 받아 들자, 24 장로들이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그들 모두는 각자 거문고와 향이 가득 담긴 금향로를 들고 있었는데, 이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자기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죽임 당하셨으나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데이비드 브라이머(David Brymer)가 작곡한 ‘주는 존귀하신 분’의 찬양을 보면, 그는 “주는 존귀하신 분, 만물 주께 나와 주께 돌아가니 영광 받으소서 주야로 기도의 향 올라가네 나는 주를 높이라” 고백하며 구약의 제사와 성도들의 삶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마음과 삶이 누구를 향해 있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를 새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깨웁니다. 율법이 죄를 보게 하듯이 주님의 은혜가 이전의 옛 습관과 옛 자아를 마주할 때마다 거룩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것은 회개가 있기 때문이고, 은혜가 우리를 삶의 변화로 인도하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는 비록 작은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응원하시기에 큰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이 잘된다고 해서 내 믿음이 좋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매순간 허락하실 믿음을 구하며, 또한 허락하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바울은 주안에서 형제 된 우리에게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세개의 문장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 선택 받는 형제들인 성도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본질적인 변화를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며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영적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합당한 영적 예배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고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내 삶 전체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예배(Worship)라는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배는 가치(Worth)와 신분을 나타내는 접미어(Ship)가 결합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란, 하나님의 신분과 위엄에 합당한 가치를 올려 드리는 행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를 영적 예배”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가 바로 라트레이안(λατρείαν)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의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섬김, 봉사, 종이 주인을 위해 드리는 헌신적인 섬김을 의미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Servic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영적 예배가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당시 사도들의 복음 전파 사역을 통해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복음 전파 사역 외에 구제와 섬김의 사역을 전담할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 사역에 집중하기 위해서 구제 사역을 전담할 일곱 집사들을 세웠는데, 이것이 집사 직분의 시작입니다. 집사라는 단어 Deacon는 헬라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에서 유래한 말로 “남들을 섬기는 사람”을 뜻합니다. 사도들의 집사 선택 기준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는 섬김의 사역이 단순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이 필요한 사역임을 보여 줍니다.
섬김의 시작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전적 통치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자리에서 섬김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계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더 깊어 질수록 자비를 실행하고 싶은 욕구도 점점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 신앙의 뿌리에는 용서받는 죄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새삶을 부여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섬김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 서지 않는 섬김은 내 열심과 내 만족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직분을 받았지만 삶은 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을 때가 있고, 매주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만 예배의 감격은 사라지고 여전히 마음속 불평이 사라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멈추면 안됩니다. 우리는 예배의 관객이 아니라 삶의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 앞에 반응하고 말씀으로 살아내며 우리 앞에 놓인 하나님의 일들을 기쁨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뿐 아니라 예배 후에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이 작은 교회가 되길 원하며 기도하지만 현실은 더디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바꾸려하기 보다 먼저 기도하는 한 사람으로 말씀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그 삶을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삶 전체로 영광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내 상황과 내 방식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물질의 성공이라면, 섬김의 목적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것이 우리가 한주 동안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속한 일터의 현장에서도 제사장으로 부르심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사랑이 내 안의 사랑 안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집에 앉아 있을 때든지, 길을 갈 때이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부지런히 말씀이 삶이 되도록 가르치고 살아내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책임입니다.
예수께서 먼저 보이신 섬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의 삶의 목적이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며 실수의 가능성을 줄이는 길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하고 온전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옳게 분별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을 때, 우리는 어느새 냉소적으로 변하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내 마음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감당하는 일마저 하나님을 위한 섬김이 아니라 내 의로움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된다면, 공동체 안에서 주시는 참된 유익을 온전히 누리기 어렵습니다. 교회만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목적때문입니다. 이 목적이 흐려질 때, 교회는 힘을 잃습니다. 교회는 주께서 걸어가신 길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섬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됩니다.
우리의 삶은 섬김을 통해 영적 능력과 권세를 갖추는 것입니다.
12:2 여러분은 이 세상의 풍조를 더 이상 본받지 말고, 여러분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하고 온전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옳게 분별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
섬김을 단지 도와주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더 온전하게 섬기기 위해 영적으로 성장하며 준비하고 훈련해야 합니다.산제물이 되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속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심을 증명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옳게 분별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섬김의 마음을 더해 주십니다. 바울은 이것을 믿음의 열매로 보았습니다. 예배의 본질과 정신이 하나님께 엎드리고 순종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분별하라는 권면은 우리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선택속에서도 계속 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이 끝나자 주의 천사들이 와서 예수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시험을 마친 예수를 주의 천사들이 섬긴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현재 세상은 마귀가 공중권세를 잡고 왕노릇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시간 안에서만 활동할 뿐입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완전하신 승리는 성도들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방법과 세상의 힘으로의 승리가 아니라 주를 믿기에 세상의 방법과 무기를 내려놓고 빈손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현실을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삶을 증명해 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높여 주셨듯 주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부르셨습니다. 믿음의 길에서 드린 헌신의 발걸음, 기도의 무릎, 예배의 자리, 사랑의 흔적이 쌓일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내 옆의 지체와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존귀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살아가기 위해서는 믿음의 능력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처음 직분을 받았을 때의 그 떨림과 결단이 세월과 현실속에 묻히고 무뎌지지 않도록 살아있는 예배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결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하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누리고 흘려 보내는 인생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기쁨은 멈추지 않고 흘러갑니다. 그 기쁨을 가진 사람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행복한 간증이 차고 넘치고 지치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의 손길을 내밀어 생명력 있는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오늘 로마서 12장 1-2절의 말씀은 새로운 직분을 받는 이들에게도 이미 직분을 받고 감당해온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허락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붙들어 주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 은혜를 다시 잡고 예배자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나를 위해 아무런 소망도 없는 나를 위해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하시네 이 낮은 날 위해 이제 나는 옛 사람 아니요 사망에서 건지신 주의 자녀이니 그 한없는 주의 사랑 안에 기쁨으로 걸어가겠네 (찬양 사랑한다 말하시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