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28)
우리는 왜 예수를 믿는가?
Why Do We Believe in Jesus Christ?
요한복음 3:16, 에베소서 2:10
김태환 목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개역성경) For God loved the world so much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요한복음 3:16,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착한 일 을 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미 오래 전부터 선한 일을 계획해 놓 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선하게 되도록 그렇게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에베소서 2:10, 쉬운성경)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에베소서 2:10, New Living Translation)
“왜 크리스천들이 비난을 받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전문가들이 내놓는 중요한 것 두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크리스천들이 사회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마태복음 5:13-14)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크리스천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의 신앙이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고, 교회 밖에서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영어 단어에 무슨 뜻이 있는지 아십니까? 웹스터 영어 사전에 ‘One who professes belief in the teachings of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른 사전들도 약속이나 한듯이 똑 같은 크리스천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김대건(1821-1846)’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탄생(2022)’을 보았습니다. 아주 잘 만든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습니다. 이 영화의 압권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기 전 마지막 남긴 말입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주인을 알지 못하면 보람이 없고, 살아도 쓸 데가 없습니다. 천주께서 곧 나보다 더 착실한 목자를 끊임없이 보내 주실 것이니, 서러워 말고 큰 사랑 을 이루어 한 몸같이 천주를 섬기다가, 영원한 천주 대전에서 만나 길이길이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김대건’은 불과 15살에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현종(顯宗)은 라틴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지리, 측량 등 다방면에 박학했던 그의 재능을 몹시 아까워서 살리고 싶었지만 결국 김대건 신부는 25 세의 나이로 순교 했습니다. 저는 그가 마지막 남긴 말에서 강한 크리스천의 향기가 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이런 감동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그대는 나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과 살아가는 방식과 삶의 목적, 그리고 나의 믿음과 인내와 사랑, 끊임없이 노력하는 나의 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0) 바울의 삶은 분명했습니다. 그가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 그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제자 디모데가 보기에 바울의 삶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 세대에 와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는지, 왜 크리스천들은 세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비난을 받는지, 왜 크리스천들이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욕을 먹고 있는지, 한번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 이유가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잘못되었다면, 그 결과가 나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모든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소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 또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다 보면 병이 낫기도 하고, 어렵던 사업이 잘 되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를 믿는 모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식들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어서 자식들이 잘 되기만 한다면 자기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교회에서 권사직까지 받은 사람이었는데요. 하도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답답해서 그 사람에게 물어봤습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이 “저야 뭐…..” 하면서 말꼬리를 흐리더니 “제 와이프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하고 저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이유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이 질문은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질문(the foundational question)’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을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크리스천들은 철학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하고,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다행히 오늘 본문 말씀에 그 이유와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우리가 ‘영생’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맞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영생’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한자로는 ‘永生’이라고, ‘길 영, 날 생’자를 씁니다.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영생’이라는 말이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삶의 ‘길이’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영생은 곧 한 분이신 참 하나님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 영어 성경에는 좀 더 분명하게 이 말씀의 뜻이 나와 있습니다. “And this is the way to have eternal life-to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the one you sent to earth (이것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즉 오직 참된 하나님이신 당신을 알고, 당신이 세상에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알다’라는 말은 ‘γινώσκω(ginōskō)’라는 그리스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지식’을 뜻하는 ‘γνῶσις(그노시스)’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지각을 이용하여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get a knowledge of perceive, feel). 단순히 ‘know’라는 영어 단어를 가지고는 그 뜻을 완전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영생’을 ‘길이’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인 개념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착한 일을 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미 오래 전부터 선한 일을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선하게 되도록 그렇게 계획해 놓으셨습니다(For we are God’s master- 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 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에베소서 2:10)
성경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저는 이 말씀이 로마서 3:21 말씀과 함께 복음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매스터피스’입니다. ‘매스터피스’는 작가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작곡가 헨델(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의 ‘매스터피스’는 ‘메시아(Messiah)’입니다. 헨델은 이 작품을 쓸 당시 끼니를 잊을 정도로 몰입했다고 합니다. 가끔씩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울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자필 악보에 “그는 멸시를 당하였다(He was despised)”는 부분에는 그의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메시아’ 악보의 맨 끝에는 자필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Soli Deo Gloria)”이라고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작곡가 헨델의 ‘매스터피스’가 ‘메시아’인데, 성경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매스터피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죄가 들어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대로 우리가 살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밀한 교제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창조가 일어납니다.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 속에서 일어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러분의) 옛 모습을 벗어 버리십시오. 옛 사람은 한없는 욕망으로 점점 더 눈이 어두워져 더 악하고 더러운 모습이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모습처럼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십시오.” (에베소서 4:22-24)
누가 저에게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저의 ‘인간성’이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말은 ‘참 사람’, ‘참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거짓말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불의 앞에서 분노할 줄 알고, 눈 앞에 있는 작은 이익을 탐내지 않고,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사람, 이런 사람으로 살기 위해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 수 있고,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생활의 성패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밀한 삶에 달려 있습니다. 그 밖에 다른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날마다 나누는 ‘펠로우십(fellowship)’ 에 모든 힘을 쏟아야 우리의 ‘인간성’이 회복됩니 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각이 어느 새 나의 생각이 되고, 성경이 제시하는 삶의 가치들이 어느 새 나의 가치관이 되어 그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끝으로,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배워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면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폴 워셔(Paul David Washer, 1961- 미국)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여러분의 삶을 비교하지 말고, 자신을 성경과 비교하십시오 (Stop comparing yourself with others who call them-selves Christians. Compare yourself to the Scripture).”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나는 저 사람보다 훨씬 낫다는 우월감 에 빠지게 쉽고, 반대로 열등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마땅히 행동을 해야 할 때에도 “저런 사람도 가만히 있는데, 내가 뭘……” 하면서 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성경과 비교하면, 자신을 반성하게 되고, 때로는 말씀을 통해 격려를 받기도 하고, 용기를 얻게 됩니다.
저는 요즘에 음악을 많이 듣습니다. 전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까 음악을 듣게 됩니다. 클래식도 듣고, 팝송도 듣습니다. 어느 채널에서 1970년 대에 유행했던 사이먼 앤 가펑클이 부른 ‘El Condor Pas(엘 콘도르 파사)’라는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가사가 전과는 다르게 들렸습니다. “나는 달팽이가 되느니 차라리 참새가 되고 싶다. 나는 못이 되느니 차라리 망치가 되고 싶다.” “차라리 참새가 되고 싶다” “차라리 망치가 되고 싶다” 라는 가사가 강력한 메타포(은유)로 제 귀에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느리고, 게으르고, 항상 제 자리를 맴도는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소망하면서 오늘 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성령강림후 제 5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19
예수께서 보이신 하나님 나라
The kingdom of God that Jesus showed
마가복음 4:35~41
유민용 목사
35그 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 36그래서 제자들은 사람들을 남겨 두고, 예수님께서 배에 타고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습니다. 주위에 있던 다른 배들도 따라갔습니다. 37그 때, 매우 강한 바람이 불어 와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왔고, 물이 배 안에 차게 되었습니다. 38예수님은 배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을 깨우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돌아보지 아니하십니까?” 39예수님께서 일어나시더니 바람을 꾸짖고, 호수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조용하여라. 잠잠하여라.” 그러자 바람이 멈추었고, 호수가 잔잔해졌습니다. 40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째서 너희가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41제자들이 매우 두려워하며, “이분이 어떤 분이길래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는 것일까?” 하고 서로에게 물었습니다. (쉬운말 성경)
35 As evening came, Jesus said to his disciples, “Let’s cross to the other side of the lake.” 36 So they took Jesus in the boat and started out, leaving the crowds behind (although other boats followed). 37 But soon a fierce storm came up. High waves were breaking into the boat, and it began to fill with water. 38 Jesus was sleeping at the back of the boat with his head on a cushion. The disciples woke him up, shouting, “Teacher, don’t you care that we’re going to drown?” 39 When Jesus woke up, he rebuked the wind and said to the waves, “Silence! Be still!” Suddenly the wind stopped, and there was a great calm. 40 Then he asked them, “Why are you afraid? Do you still have no faith?” 41 The disciples were absolutely terrified. “Who is this man?” they asked each other. “Even the wind and waves obey him!”(New Living Translation)
1933년도에 발표한 ‘갈릴레아 바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정지용 시인(1902-1950)은 문학사에서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 불리우기도 합니다. ‘갈릴레아 바다’라는 시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민족사의 비운이 녹아져 있습니다. 갈릴레아는 라틴어식 발음이고 갈릴리는 영어식 표기입니다. 그는 식민지로 살아가는 민족적 비애를 갈릴리에 일어난 파도에 비유했습니다. 시의 일부분입니다.
“나의 가슴은 조그만 갈릴레아 바다 / 때 없이 설레는 파도는 미한(아름다운) 풍경을 이룰 수 없도다 / 다만 주를 깨움으로 그들의 신덕은(믿음은) 복되도다 / 돛폭은 다시 펴고 / 키는 방향을 찾았도다 / 오늘도 나의 조그만 갈릴레아에서 주는 짐짓 잠자신 줄을 / 바람과 바다가 잠잠한 후에 나의 탄식은 깨달었도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배에 오른 채 모여든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비유를 가르쳐 주신 후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항해하는 장면입니다. 때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치신 그날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무리를 피해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가는 배를 따라서 다른 배들을 끌고 따라 갑니다. 주님은 말씀을 가르치며 지쳐 있으셨는지 피곤한 몸을 충전하시기 위해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마가는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와 물이 배를 덮치고 배 안으로 물이 들어오게 되는 절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왜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느냐고 원망합니다. 마가는 왜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를 가르치시고 그 날 저녁에 풍랑을 만나서 두려움을 느끼는 제자들의 모습을 기록했을까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한 필요 요소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믿음은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난 배 안에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적당한 풍랑을 만났다면 자신들의 경험으로 배를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풍이 배를 덮치고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순간 비로소 주님을 찾아 갑니다. 믿음은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배웠다고 해서 실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성숙해져 갑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주님과 함께 이뤄가는 전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예기치 않은 일들을 만나서 믿음의 눈을 뜰때 비로소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선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현재 겪고 있는 일들이 인생의 풍랑이라고 느껴진다면 고단해도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인내와 성실함으로 주님의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80세에 민족의 지도자로 세워지기까지 그는 40년이라는 시간을 공주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준비기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후 40년의 광야 생활을 보내는 동안 그는 철저하게 광야 길을 인도해야 할 지도자로 훈련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 인생의 전 과정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실때에 그의 나이는 80세였습니다. 왕자로 살아가다가 광야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기도 하고 나그네와 같은 자신의 삶에 모세의 마음에는 끊임없는 파도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의 첫째 아들 이름이 게르솜인데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며 자신의 무능을 철저하게 절감하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에 찾아 오시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설 때에 그는 이제껏 신던 발의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세상의 신발을 벗는 것은 내가 지금껏 걸어온 삶을 부인하라는 뜻이 아니라 너를 위해 걸어온 이력들을 이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로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순간 잃어 버리고 놓친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보다는 내 생각과 경험을 신뢰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믿음의 전제가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41절을 보면 풍랑으로 인해 두려워 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두려워 합니다. 환경를 바라보는 두려움에서 주님을 향한 경외심이 생겼습니다.
41제자들이 매우 두려워하며, “이분이 어떤 분이길래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는 것일까?” 하고 서로에게 물었습니다.
걸어온 인생의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전환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르심 이후 모세의 40년의 인생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은혜의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고 금송아지를 숭배했을때 모세는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구합니다. 모세의 간청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32장 31, 32절입니다. “31 모세가 주께로 가서 여쭈었다. “주여, 이 백성이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32 하지만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만일 주께서 저들을 용서하실 수 없다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차라리 제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 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인생의 길과 진리가 되셨다는 사실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살아갑니다. 마가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님과 두려워 하는 제자들을 대조하여 기록하며 하나님 나라의 실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고 계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 앞에 서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내려놓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둘째로 믿음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가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는 ‘안식의 여정'(Sabbatical Journeys)의 책에서 서커스 곡예사 친구의 말을 소개합니다. 그네 곡예에서 뛰는 사람과 잡는 사람 사이에는 꼭 지켜야 할 원칙이 있는데 뛰는 사람이 원을 그리며 공중으로 뛰어 오르게 되면, 그 이후부터는 가만히 있으면서 잡는 사람이 자신의 손을 붙잡아 주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뛰는 사람은 절대로 잡는 사람을 붙잡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될 경우에는 곡예를 하다가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기다림은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내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다르고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릅니다. 우리의 기도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나의 계획이 멈춘 듯 느껴지더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가고, 주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며 더딘 시간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37편 7절을 보면 “잠잠히 인내하면서 여호와를 기다리십시오.” 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무려 24년을 기다렸습니다. 모세도 광야의 40년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17세에 하나님의 꿈을 꾸고 13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림으로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를 통해 요셉의 형제들과 민족을 구원하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셨지만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림 끝에 성령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끝까지 기다린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조바심을 내고, 내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도 자신들의 힘으로 안되는 일을 만나게 되니까 주님께 따지듯이 이런 상황에 잠이나 자고 있느냐고 깨웁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돌아보지 아니하십니까?” 그런데 주님은 오히려 믿음 없이 불안과 공포에 떠는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배가 침몰하지 않을거란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하나님 나라의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경험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낼 때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하늘 나라가 되는 은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종말의 날에 몸의 구속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8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신음하고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23 피조물만 아니라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들 자신도 속으로 신음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우리 몸이 구속될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롬 8:22-23)
셋째로 믿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일은 겸손하게 그분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람과 파도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피조물을 통제할 능력을 지니신 분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주와 동일한 능력을 지니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의심하는 마음의 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인간 관계도 서로를 향한 신뢰가 없으면 깊어질 수 없듯이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해서 믿음을 다 이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구원 이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믿음의 과정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의 시련이 올때 마다 성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생활을 하며 겪게 되는 모든 경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과정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도 대부분 시련을 겪으며 믿음을 단련시켜 나갔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험들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강하고 순수한지 알아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순수한 믿음은 금보다도 훨씬 귀합니다. 금은 불에 의해 단련되기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닳아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순수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벧전 1:7)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사랑하는 자녀가 세상 속에서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느껴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다 이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시지만,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실수가 많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면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불안과 염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사라집니다. 우리는 겨자씨만 한 작은 믿음만 있어도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예수님이 타고 계시던 배를 따라오던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주님이 계신 배를 따라가기만 해도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가 무엇인지, 광풍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갈릴리 바다가 잠잠해지는 사건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우리들의 믿음의 여정을 그려 줍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듯 주님은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갈릴리 바다의 풍랑처럼 삶 속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만날 수 있지만 믿음의 성도는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께 인생을 맡겨야 합니다. 풍랑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한 시련이 와도 주님과 함께 하는 성도는 결코 침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전하시며 마가복음 4장 9절과 23절에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너희의 마음의 새겨 들어야 한다’라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들었지만, 제자들을 포함한 많은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깨닫지 못한다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강한 풍랑으로 인해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능력의 원천입니다. 제자들은 비유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경험하게 되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물으십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이기고, 인생의 파도를 잠잠하게 합니다. 인생의 광풍이 우리의 감정을 출렁이게 할 때, 감정의 파도 속에서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세상에 증명하는 믿음의 인생이 되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