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14. 2024 주일 설교

(성령강림후 제 8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1

고독한 믿음, 빛나는 은혜

Lonely Faith, Shining Grace

마가복음 6:14~29

14 ○ 예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분봉왕 헤롯도 그 소문을 들었다. 어떤 이들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나서 돌아온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다녔고, 15 또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은 예언자 엘리야다.” 라고 말하였고, 또 더러는 “그 사람은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다.” 라고 말하였다. 16 이 같은 소문을 들은 헤롯은 “그 사람은 내가 목을 벤 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임에 틀림없다.” 라고 말하였다. 17 ○ 일전에 헤롯은 세례 요한을 붙잡아 오게 한 뒤,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그것은, 헤롯이 자기 동생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자기 아내로 삼자, 18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그 일은 잘못된 일이오!” 하면서 입바른 말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19 그래서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20 그것은, 헤롯이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 그를 두려워하여 은근히 보호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롯은 자기에 대한 세례 요한의 비난이 몹시 괴로웠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의 충고를 달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21 그러던 중,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헤롯이 자기 생일을 맞아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 지역의 유지들을 모두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나와서 춤을 추어 헤롯과 손님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러자 헤롯이 그 소녀에게 말하기를,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무엇이든 말해 보아라. 23 나라의 절반이라도 원한다면, 내가 떼어 주겠다.”라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24 그 소녀는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라고 시켰다. 25 소녀는 급히 왕에게로 돌아와, 어머니가 시킨 대로 요청하였다. “지금 즉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제게 주세요.” 26 그 말을 듣고, 왕은 마음이 심히 괴로웠다. 하지만 많은 손님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한 약속인지라, 소녀의 요청을 안 들어줄 수도 없었다. 27 결국 헤롯은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경비병이 감옥에 가서 세례 요한을 죽인 후, 28 그의 목을 쟁반에 담아서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갖다 주었다. 29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스승의 시체를 거두어다 장례를 치렀다. (쉬운말 성경)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순교 기사입니다. 마가는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소개되는  플래쉬백(Flash back)기법을 사용하여 세례 요한의 순교 사건을 소개합니다. 플래쉬백(Flash back)기법은 17절에서 시작됩니다. ‘일전에’ 라고 하면서 마가는 세례 요한의 순교 사건의 전말을 전해줍니다. 등장인물을 보면, 숭고한 희생자 세례요한, 세속적 권력의 대표자 헤롯, 권력의 희생자 헤롯의 동생 빌립,  악독한 헤롯의 불륜녀 헤로디아,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헤로디아의 딸이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에서 등장하는 헤롯왕은 우리가 잘 아는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헤롯대왕은 예수가 탄생 시기에 새로운 왕의 탄생을 막고자 2세 이하의 유아학살 명령의 내렸던 포악한 왕입니다.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B.C. 4년부터 A.D.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으로 통치했습니다. 마가복음 6장의 전체 문맥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분봉왕 헤롯도 그 소문을 들었다.”라고 시작합니다. 예수의 사역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알려졌을 텐데 그 소문을 듣고 헤롯은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의 영이 예수께 들어가서 다시 살아 났을거라 여기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가 한 독백을 보면 “내가 목을 벤 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중얼거리며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도 양심을 파고드는 진리의 앞에서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플래쉬 기법을 사용하여 당시 헤롯왕가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2가지 사건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세상 권력의 핵심인 왕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륜사건이고, 두번째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로운 사람에 대한 살해사건입니다.

마가가 소개하는 헤롯가문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헤롯왕이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습니다. 1세기 유대 역사학자이며 로마 시민이었던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 안티파스는 로마를 방문하는 도중 동생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사랑에 빠졌고, 동생과 이혼시키고 아내로 맞이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로 인해 세례요한은 헤롯의 재혼을 두고 “그 일은 잘못된 일이오!” 하면서 입바른 말로 충고했습니다. 헤롯왕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인 요한의 말을 두려워 하고, 내적으로 괴로워 했지만 그를 옥에 가뒀습니다. 그런데 헤롯왕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가 요한에게 앙심을 품었습니다. 그런던 중에 좋은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을 맞아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 지역의 유지들을 모두 초청하여 큰 잔치를 열게 되는데 헤로디아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춤을 선 보이게 됩니다. 그 자리에 공주가 친히 들어와 춤을 추는 일은 특이한 일로서, 헤롯을 유혹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당시 헤롯 왕은 헤로디아의 딸의 유혹에 빠져 자신의 생일 잔치를 즐겁해 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원한다면, 내가 떼어 주겠다.”라고 잔치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약속을 합니다.

그러자 헤로디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딸에게 요한의 목을 베어 가져 달라고 시킵니다. 딸은 어머니의 요청을 그대로 전하게 됩니다. 이 일로 헤롯왕은 근심과 후회가 되나 앉아 있던 자들 앞에서 왕의 말의 책임과 무게가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경비병을 시켜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했습니다. 우리는 헤롯 왕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1세기나 지금이나 세상은 혼탁합니다.

1세기 헤롯 왕궁에서의 불륜 사건과 딸을 이용해 왕을 유혹한 사건을 보면 당시 왕실의 타락상을 보여줍니다. 또한 세례요한의 살해 사건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가 얼마나 추락했는지도 알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진리를 말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는 상황적 윤리나 가치 기준으로 인해 기독교의 진리는 희망사항 정도로만 여겨집니다. 성경의 진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내면의 신앙적 갈등으로 기독교적 진리가 충돌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적 진리를 전하는 일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성적으로는 얼마나 타락된 세상을 살아갑니까? 헤로디아의 딸은 소녀티를 벗은 결혼 적령기에 이른 처녀를 가르키는 ‘코라시온’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헤롯왕은 헤로디아 외에도 그의 딸까지 아내로 삼으려 했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성적으로 타락한 왕이었음을 유대 역사의 기록들이 전하고 있습니다.

헤로디아가 앙심을 품고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사건은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사람이 앙심을 품으면 그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혈기와 욕심, 교만의 죄가 상황만 만나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다스림 받지 않고 앙심을 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죄에 이끌려 가게 됩니다. 헤롯왕의 내적갈등은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안에서 겪게 되는 갈등처럼 보여집니다. 왕의 자리에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의식하는 헤롯은 연약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보여주는 메타포적 인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께 기억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기억해 주신다면 고독하게 믿음의 길을 정진하며 갈 용기가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얻게 되는 고통을 견뎌낼 믿음이 있으신가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마태복음 12장 47절에서 5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7 어떤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하려고 밖에 와 계십니다.” 하고 전하자, 48 예수께서 물으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요?”49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보시오,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내 어머니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지키는 자가 내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고독한 믿음의 길을 걷더라도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혼탁한 세상속에서 성도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믿음의 눈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없이 구조적 변화만 추구한다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은 계속되는 과제만 만들어 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는 성찰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의 빛을 바라보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스스로 질문하시며 존재를 변화를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요한은 세상의 권력자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세상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고,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라고 추종할때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자신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자 그는 스스로 사라졌습니다. 그는 목베임을 당하며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예수의 길을 예비한 그의 외침은 살아 있었습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순교의 피로 인해 확장이 됩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적지 않는 충격을 받고 슬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쳤던 말은 그가 순교 한 후에 요한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마음에 더 묵직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요한은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졌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많은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조선땅에서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1840~1866)를 소개합니다. 그는 27살 마지막 생명의 불꽃이 꺼지는 순간까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칼을 높이 쳐든 조선의 관군에게 성경을 전하며 생애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는 토마스가 타고 온 배였습니다. 1866년 8월 20일 토마스가 탄 배는 대동강 하류에 도착합니다. 당시 조선은 철저한 쇄국정책 아래 경계가 심했고, 경계를 서던 병사들은 지휘아래 사격을 가했습니다. 불에 타는 배에서 어떤 사람은 불에 타죽고, 겨우 헤엄쳐 나온 사람들은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불을 피해가면서 배에 있던 성경을 계속 던지며 한권의 성경을 품에 품은채 강 언덕 위로 끌어 올려져 병사의 칼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품에서 성경을 꺼내어 자기를 치려는 병사에게 주면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병사가 주춤하는 사이에 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기도를 올렸고, 마침내 그 병사의 칼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토마스를 죽인 병사는 성경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때에 그는 두손을 마주 잡고 무슨 말을 한 후 이 책을 가지고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죽이기는 하였느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 왔노라…”

이 글을 읽는데 제 눈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영국의 웨일즈의 어느 시골에서 태어난 한 사람의 마음에 복음을 향한 씨가 심겨졌고, 그 복음의 씨는 그를 죽인 조선의 한 관군의 마음에 떨어진 것입니다. 당시 제너럴 셔먼호에서 던진 책을 습득한 사람 중에 11세 최치량이라는 소년은 불온한 책을 불태우라는 포고령에 성경을 없애 버렸고, 당시 박영식이라는 사람은 남들이 버리는 성경을 모아다가 자기 집벽에 도배지로 사용합니다. 훗날 최치량이라는 사람이 그 집을 사서 여관으로 경영했는데 벽에 바른 성경을 보고 한국 개신교 교단의 최초의 목사가 나오게 됩니다. 최치량도 나중에 전도를 받아 평양 대부흥 운동의 시작이 된 장대현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 마음에 흐르는 것입니다. 그 피의 의미가 깊어져야만 우리 안에 있는 혈기를 참아 낼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선지자로 하나님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한 세례 요한의 순교의 무게감이 느껴지시나요?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아도 세계 곳곳에는 지금도 세상에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선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멈춘 것 같아도 그때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멈추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 시간에도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해줍니다.

셋째로, 고독의 자리는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6:29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스승의 시체를 거두어다 장례를 치렀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장례식에는 말할수 없는 고독감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인생에 고독감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 고독의 자리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없는 내 모습으로 서는 것입니다. 고독의 자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평안으로 자유함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니까 예수를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혼자 산으로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자리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마태는 예수께서 세례요한의 순교사건을 기록하고 죽음의 소식을 들으신 예수께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요한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도의 반응임을 알수 있습니다. 주님도 고독의 자리로 가셔서 요한을 기억하셨던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0절로 13절입니다. “10 결국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목이 잘렸고, 11 그의 머리는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건네졌다. 그러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갖다 주었다. 12 이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한 뒤에, 예수께 가서 그 일을 알렸다. 13  그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 배를 타고 혼자 외딴 곳으로 물러나 계셨다.” (마 14:10-13)

사명자는 반드시 용기를 지니고 고독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평생 살아가면서 이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습니다. 맡겨진 책임을 완수하는 과정이 버거울 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내 삶이 한없이 초라한 것 같을때, 예수께서  깨어진 세상에 오셔서 빛나는 은혜로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덮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연약할때에, 죄인되었을때에,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지 않았을때에도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함, 썩지 않을 소망을 세상에 드러내게 됩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무대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사명자로 살아간다는 것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집나간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고독의 자리에 있을때 아버지는 아들을 잊지 않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 왔을때, 아버지는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다가 내가 얻었다고 즐거워 하셨습니다. 이땅에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두가 함께 하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의 빛나는 은혜가 이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소망입니다.

0707 2024 주일설교

(성령강림후 제 7주)

믿음없는 세상속에서의 사명

The Mission in a World Without Faith

마가복음 6:1~13

유민용 목사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다. 2 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 그곳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는 크게 놀라워했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것들을 배웠을까? 도대체 저런 지혜를 어떻게 얻었기에, 놀라운 기적까지도 일으키는가? 3 저 사람은 한낱 목수가 아니던가? 또한 마리아의 아들이고,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여기서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꺼려하고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서나 존경받는 예언자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배척당하는 법입니다.” 5 고향 사람들이 배척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몇몇 병자들만 손을 얹어 고쳐 주셨을 뿐, 다른 기적들을 행하실 수 없었다. 6 예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셨다. 그 후, 예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다. 7 ○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8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여행길에서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지고 다니지 말고, 전대에 돈도 넣어가지 말라. 9 신발은 신되, 여벌의 옷도 챙겨가지 말라. 10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한 집에서 계속 머물러 있어라. 11 어느 곳이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 말을 듣지 않거든, 그들에 대한 경고의 표시로 신발의 먼지를 탈탈 털고 그곳을 떠나라.” 12 이에 제자들은 곳곳으로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전도했다. 13 또 제자들은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주어 낫게 해주었다. (쉬운말 성경)

1 Jesus left that part of the country and returned with his disciples to Nazareth, his hometown. 2 The next Sabbath he began teaching in the synagogue, and many who heard him were amazed. They asked, “Where did he get all this wisdom and the power to perform such miracles?” 3 Then they scoffed, “He’s just a carpenter, the son of Mary[a] and the brother of James, Joseph,[b] Judas, and Simon. And his sisters live right here among us.” They were deeply offended and refused to believe in him. 4 Then Jesus told them, “A prophet is honored everywhere except in his own hometown and among his relatives and his own family.” 5 And because of their unbelief, he couldn’t do any miracles among them except to place his hands on a few sick people and heal them. 6 And he was amazed at their unbelief. Then Jesus went from village to village, teaching the people. 7 And he called his twelve disciples together and began sending them out two by two, giving them authority to cast out evil[c] spirits. 8 He told them to take nothing for their journey except a walking stick—no food, no traveler’s bag, no money.[d] 9 He allowed them to wear sandals but not to take a change of clothes. 10 “Wherever you go,” he said, “stay in the same house until you leave town. 11 But if any place refuses to welcome you or listen to you, shake its dust from your feet as you leave to show that you have abandoned those people to their fate.” 12 So the disciples went out, telling everyone they met to repent of their sins and turn to God. 13 And they cast out many demons and healed many sick people, anointing them with olive oil.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요  ‘고향의 봄’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이원수 시인(1912-1981)이 작사했습니다. 그래서 가사 안에는 조국의 독립을 그리워하는 독립운동가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노래는 외국에서 살고 있는 이민자들에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낯선땅에서 주변인으로 살면서 고향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남모르는 설움과 외로움을 견뎌내며 현실의 무게가 짓누를때에 때를 따라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믿음이 더 깊어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땅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예수께서 어린시절 부모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던 곳이고, 유년 시기에는 친구들과 함께 뛰어 놀던 추억의 장소이며,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기까지 말씀을 배우며 성장하셨던 익숙한 동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함께 찾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꺼리고 복음을 배척하며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나라를 잃은 민족의 처절함과 고향을 잃어버린 예수님의 마음이 오버랩됩니다. 고향에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전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 앞에서 면목없이 그 권위가 철저하게 무시 당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를 열린 마음으로 경험하라

3절입니다. 3 저 사람은 한낱 목수가 아니던가? 또한 마리아의 아들이고,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여기서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꺼려하고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저 사람은 본래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동생들인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도 우리가 다 알고 있다.” 13:55

하나님 나라의 힘은 복음이 상업주의화 되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뚤어진 세상 속에서 복음이 증거되면 배척 당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의 가르침, 지혜, 기적까지 보고 들은 사람들이 그들 안에 선입견으로 인해 예수의 가르침을 꺼렸습니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3장 55절은 ‘저 사람은 본래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오늘 본문에서는 ‘저 사람은 한낱 목수가 아니던가?’ 라고 언급합니다. 두 구절의 말씀들을 비추어 보면 예수님은 목수 아들로 태어나서 목수의 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 안에 예수를 목수의 아들로만 여겼던 선입견이 있었고,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누군가의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은 그 아버지가 죽은 경우라고 해도 상대를 모욕하는 경우가 아니고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고향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꺼린 것은 목수에 불과한 예수 너가 우리에게 보인 지혜와 권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나사렛 사람들은 선입견을 지닌채 혈연관계속에서 예수의 존재를 파악하려고만 했습니다.

만일 우리도 선입견을 갖고 말씀을 들을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제한됩니다. 예수님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배척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저 사람을 다 알고 있다라고 선입견을 갖고 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다 알 수도 없고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심리학에서 조해리의 창(Johari’s window) 이론이 있습니다. 조해리의 창 이론은 조셉 러프트(Joseph Luft)와 해리 잉햄(Harry Ingham)이라는 두 심리학자가 1955년에 발표한 논문을 토대로 개발한 이론인대요. 조해리(Johari)는 두 사람 이름을 합성해서 만든 용어입니다. 간단히 소개하면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우리 안에 4가지 마음의 창입니다.  첫째는 자신도 알고 타인도 아는 ‘열린 창’, 둘째는 자신은 알지만 타인은 모르는 ‘숨겨진 창’, 세번째 창은 나는 모르지만 타인은 아는 ‘보이지 않는 창’, 마지막으로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미지의 창’ 입니다. 사람은 내가 보지 못하는 영역을 타인을 통해 보게 되기도 하고,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 있습니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판단하며 알았다고 생각하는 창은 그저 작은 영역일뿐입니다.

인간은 평생 내가 누군인지를 깨달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발견한 사람은 하나님과도 친밀한 교제를 하게 됩니다. 믿음생활에서 불신이 높아질수록 숨겨진 창이 더 넓어질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고 깊어질수록 말씀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열어가는 열린 창이 넓어질 것입니다. 어쩌면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고 외면 당하는 일입니다. 볼수 없는 부분을 전하며 이해시키려고 하다 보면 영적인 공격은 언제든 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느끼는 장소였습니다. 에덴은 모든 인간의 고향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슬픔과 아픔도, 시기와 미움, 분열과 전쟁, 판단도 정죄함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에덴의 평화로운 삶이 깨져 버렸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이후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에덴에 인간의 웃음소리는 끊어졌고, 인간이 떠난 자리에는 공허와 혼돈만 가득하고 하나님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죄로 인한 불신은 고향땅을 찾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선입견이 하나님 나라를 제한한다면 우리는 겸손하게 그분의 다스림과 통치를 구해야 합니다. 에덴을 떠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이상적인 에덴을 만들려고 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수고와 슬픔,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바른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확신과 자기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설 때에 더해지게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없습니다. 선입견이 없는 열린 마음으로 세상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셨을까요?

7 ○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시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신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회는 오늘날처럼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귀신 들림의 현상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학적 치료를 행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의사들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환자를 의술로 치료하기보다는 영적인 충고자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모든 질병이 악한 영에 의해 생긴다는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육체적인 병을 의학적으로 분리해서 치료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영혼이 피폐해져 가는 이들은 마음에 더 큰 불안과 근심에 억눌렸을 것이고 사회적 고립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신 것은 이들의 영혼과 육체를 회복시키고 사회적으로 경계선 밖으로 밀려난 이들을 포용하고 돌보며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사랑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당시에 예수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마술을 사용해 귀신을 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었고, 자신을 우상화하려는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주어 낫게 해줍니다. 당시 기름은 상처를 치유하는 치료제였습니다. 현대인들은 관계에 지치고, 노동의 피로로 인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져 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사라지고 공황장애를 호소하는 이들이 많아집니다.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어버리는 아이들, 거짓된 자아로 인해 불신을 조장하는 사람들, 믿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마음을 다치고 서로가 믿는 하나님이 다른것만 같은 마음조차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구원은 영혼의 치유만이 아니라 마음 안에 상처의 가시를 뽑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권세로 집착과 억압으로 부터 풀려진 사람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고, 타인을 혐오하지도 않습니다. 용서받은 믿음은 우리를 열린 사고로 인도해 줍니다. 참된 삶은 수평의 세계에서 홀로 행복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수직적 세계관을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하나님 나라를 현실에 뿌리 내려,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게 하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한 집에서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당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필요를 아시고 미리 준비해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지혜로 모든 상황속에서 최상의 것을 응답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결핍된 시대를 살아갑니다.  복음전도도 세속적인 것을 전하게 되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집니다. 전도는 예수를 팔아서 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시대속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받은 복을 나눠주고 흘려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은 많은 것을 소유한 삶이 아니라, 귀한 것을 나누고 베푸는 삶입니다.

상품화된 복음은 우리를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복음이 상품화 되는 시대에, 복음을 듣는 이들이 성도들에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더 깊이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그들의 집에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한 집에서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 주님의 권면은 단순히 장소적 의미만이 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에 참여하라는 뜻입니다.

수시로 변화되고 개인주의화되는 현대사회에서 오래 머무르는 것은 필수적인 영성입니다. 이 시대에 주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영성이 필요합니다. 오래 머무르는 영성은 단기적인 성과를 추구하기 보다 하나님의 시간 안에 거하며 머무르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 빨리 좋은 성과를 내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일하기보다 효율을 높이고 보여지는 결과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교회일을 할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시간안에 머물러 겸손하고 성실하게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있도록 선택하셨다는 믿음으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어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본문의 10절 말씀에서 한 집에서 계속 머무르라는 것은 복음 안에 있는 관계성을 실천하라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영향력은 오랜 시간 함께 머물며 서로의 관계가 깊어질 때 형성됩니다.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어떠한 일을 무리하게 해 나가다 보면 그 일들이 그르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건 방향이고 관계입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를 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필요한 사역과 복음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신앙 공동체는 함께 모여 예배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더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으로 서로가 연결되어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할때에 더욱 견고해 집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것 처럼 믿음 생활은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우리의 믿음을 진단하고 점검하여 우리의 영적 건강을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배 시간이나 기도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를 높이는 삶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속에서 사명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구원은 편협한 사고를 버리고, 내 믿음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시는 전인격적인 삶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과 육를 지닌 존재로 창조 하셨기에 우리가 편안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만큼 죄의 유혹도 부지런히 따라오게 됩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부르신 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삶의 모든 행실에 거룩한 사람들이 되십시오(벧전1:15)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위기와 도전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까지 믿음의 여정을 지속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