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한인교회 창립 46주년 기념예배)
제자도
The Discipleship
마태복음 4:18-20
김태환 목사
18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를 거니시다가 두 형제,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20 그 즉시,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쉬운성경)
18 One day as Jesus was walking along the shore of the Sea of Galilee, he saw two brothers – Simon, also called Peter, and Andrew – throwing a net into the water, for they fished for a living. 19 Jesus called out to them, “Come, follow me, and I will show you how to fish for people!”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46주년을 맞는 주일입니다. 저와 함께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6년이면 청년의 나이를 지나 장년의 나이입니다. 그만큼 우리 교회가 성숙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나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를 우리의 나이에 비교하는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생명을 가지 유기체(有機體, organism)이기 때문에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교회는 과연 나이에 걸맞게 성숙한 교회로 성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 교회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5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은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초를 누군가에게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젖을 먹는 사람은 아직 어린 아기이기 때문에 옳은 말씀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단단한 음식은 어른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훈련을 통해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압니다.” (히브리서 5:12-14)
히브리서는 누가 기록했는지 저자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교와 기독교에 모두 정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큰 구원(the great salvation, 히브리서 2:3)’에 대한 것입니다. 저자는 ‘히브리인들’을 대상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강을 건너온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데서 생긴 말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큰 구원’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사람의 믿음이 성숙한 믿음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기준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진실하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분별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갓난아기’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 설교의 제목은 ‘제자도’입니다. 말그대로 풀이하면 ‘제자의 길’입니다. 제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한국 교회에 한동안 ‘제자 교육’이 유행했었습니다. 제자 교육으로 유명했던 ‘사랑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자 교육을 열심히 받았지만 그 교회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또 시카고에 빌 하이벨스 목사가 시무하는 ‘윌로우 크릭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가 있습니다. 이 교회 역시 제자교육에 열심이었습니다. 해마다 세계 각국에서 이 교회에서 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입니다. 이 교회가 2007년에, 지난 32년 동안 추진했던 목회의 결과를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책 제목이 ‘Reveal’입니다. 그리고, “Where Are You?” 라는 부제를 붙였습니다. “우리 교회의 현주소를 밝힌다” 정도로 번역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10,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3년간 조사했고, 120명을 일대일로 인터뷰를 해서 그 결과를 그 책에 담은 것입니다. 그 책에서 내린 결론은 “우리는 숫자로는 성공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를 만드는 일에는 실패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도 이 결론에 동의했다고 합니다.
‘제자도’에 대한 좋은 책이 있어서 소개 드립니다. 두 권 모두 좀 오래된 책입니다만, 이 책을 능가할만한 책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는,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z, 1934-2021, 아르헨티나)가 쓴 ‘제자입니까(DISCIPLE, 김성웅 역, 1975)?’ 라는 책입니다. 아주 쉽게 쓴 책이어서 금방 읽을 수 있습니다. 내용이 참신합니다. 또 하나는, 데이빗 왓슨(David Watson, 1933-1984, 영국)이 쓴 ‘제자도(DISCIOLESHIP, 문동학 역, 1987)’ 라는 책입니다. 조금 내용이 빡빡하고 전문적이지만, 내용이 좋아 추천할만한 책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목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갓난아기 같은 교회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첫째는, 그 교회가 드리는 기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천편일률적으로 판에 박은 듯한 기도를 하는 교회는 갓난아기 같은 교회이다. 성장하는 교회는 항상 똑 같은 기도를 반복하지 않는다. 둘째로, 그 교회가 분열되어 있는지 일치되어 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바울이 분열되어 있는 교회는 영적으로 갓난아기 같은 교회라고 지적한 대로이다(고린도전서 3:1). 셋째로, 그 교회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갓난아기들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만큼 성숙하지 않다. 갓난아기 같은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도 받으려고만 하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넷째로, 갓난아기 같은 교회에는 늘 일꾼이 부족하다. 당신의 교회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소수의 몇 사람들이 그 일을 해야 할 정도로 일꾼이 부족하지 않은가? 여러분의 교회에 이상과 같은 증상들이 있다면 여러분의 교회는 갓난아기 같은 교회이다.”
저는 창립 46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를 보면서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한 교회가 아니라 미성숙한 교회라면, 그래서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미성숙한 증상들이 보인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반성하고 새롭게 결단해야 합니다. 한번의 설교를 듣고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이 시간에 함께 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면, 사람은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 ‘제자도(disciple-ship)’에 대한 모든 내용들이 들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갈릴리의 ‘가버나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주변에 있는 어촌(漁村)입니다. 어느날, 호숫가를 걸으시던 예수님은 그물을 던지고 있는 두 사람을 보셨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베드로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동생 안드레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를 만들겠다(Follow Me, and I will show you how to fish for people)”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콜링(calling)’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부르심’ 혹은 한자로 ‘소명(召命)’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콜링’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콜링’은 특별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도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절반 정도가 어부들이었고, 세무서 직원이 있었고, ‘열심당(the zealot)’ 당원이 있었습니다. 열심당 사람들은 과격한 애국주의자로 필요하다면 살인도, 방화도도 폭력도 서슴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배반할 유다도 있었습니다. 12명 중에는 정체가 분명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콜링’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도 지금, 여기서 ‘콜링’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콜링’에 응답하느냐, 응답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콜링’에 응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콜링’에 응답했습니다. 성경은 “시몬과 안드레는 그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콜링’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포기와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예수님의 ‘콜링’에 응답하기 위하여 그들의 전 재산인 그물을 버렸습니다. 바울은 ‘콜링’에 응답하기 위해 유대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특권을 버렸습니다(빌립보서 3:7-9).
여러분 중에 누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출석하면 자연히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콜링’에 응답하기 위하여 무엇을 포기했고 무엇을 희생했습니까? 이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구원은 대가 없이 얻을 수 있지만, 제자가 되는 일은 당신의 생명을 요구할 것이다(Salvation is free, but discipleship will cost you your life).” “그리스도가 사람을 부르실 때 그는 와서 죽으라고 명령하신다(When Christ calls a man, he bids him come to die).”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의 말입니다. ‘콜링’을 들은 사람이 죽지 않고서야 어찌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콜링’에 응답하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지 배우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고 가치 있는 삶인지 배우고,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을 배우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서 삽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제자도’는 안정된 삶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훗날 베드로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선을 행하도록 부르셨습니다. 비록 그것이 고난을 의미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본이시니, 여러분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베드로전서 2:21, NLT)
끝으로, ‘콜링’에 응답하는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명(使命)’이라고 합니다.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사명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마가복음 16:15, NIV) 이 말씀에 나오는 ‘into’라는 전치사는 희랍어 원문에 ‘εἰς(eis)’라고 나와 있습니다. ‘εἰς’는 장소나 시간, 목적을 나타내는 전치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세상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매일 만나는 학교 친구나 회사의 동료들 간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고, 그들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강의실이나 연구실에서, 일터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섬기는 삶이 아닙니까? 이것이 세상을 치유하는 제자의 삶이 아닙니까? 다시 본회퍼의 말을 들어볼까요? “제자도가 없는 기독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이다(Christianity without discipleship is always Christianity without Christ).” 오직 ‘제자도’를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성숙한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갓난아기처럼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한 천편일률적인 기도를 하고,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분열하고,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고, 일꾼이 없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앞에서 소개했던 후안 카롤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독자들에게 이런 도전적인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그 교회의 회원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 시대를 책임지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 제목입니다. 특별한 생각 없이 주일 예배에 모였다 흩어지는 교회가 아니라 모일 때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 듣고 용기를 얻고 격려를 받아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여러분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콜링’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콜링’ 앞에서 이 교회의 회원이 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겠다는 결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어야 이 시대를 책임지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세계성만찬 주일, 장학헌금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33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약속
Our Promises We Must Not Forget
고린도 전서 11: 23~29
23 ○ 내가 여러분께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배반을 당하셔서 잡히시던 날 밤에, 주께서는 빵을 손에 드시고, 24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에, 그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여라.” 25 또 식사 후에 포도주 잔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라.” 26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의미를 주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27 ○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은 태도로 주의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그 사람은 주의 몸과 피를 모욕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28 그러므로 주의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29 만일 누군가가 그 빵과 잔이 주의 몸임을 분별하지 못한 채 먹고 마신다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임할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쉬운말 성경)
23 For I pass on to you what I received from the Lord himself. On the night when he was betrayed, the Lord Jesus took some bread 24 and gave thanks to God for it. Then he broke it in pieces and said, “This is my body, which is given for you.[f]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25 In the same way, he took the cup of wine after supper, saying, “This cup is the new covenant between God and his people—an agreement confirmed with my blood.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as often as you drink it.” 26 For every time you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you are announcing the Lord’s death until he comes again. 27 So anyone who eats this bread or drinks this cup of the Lord unworthily is guilty of sinning against[g] the body and blood of the Lord. 28 That is why you should examine yourself before eating the bread and drinking the cup. 29 For if you eat the bread or drink the cup without honoring the body of Christ,[h] you are eating and drinking God’s judgment upon yourself.(New Living Translation)
이 시간 예배 드리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안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세계성만찬 주일입니다. 세계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지역과 신앙 안에서 하나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교회의 네 가지 특징은 하나인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된 교회, 사도적 교회입니다. 이 속성 가운데 “보편적”교회는 모든 민족과 지역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매주 사도신경으로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이 바로 보편적 교회를 의미합니다. 바울의 교회론을 보면 유대 민족주의를 벗어나 이방인들을 향한 환대, 세상을 향해 열려져 있습니다. 그는 유대문화, 헬라 문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고난의 길을 걸었던 사도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이 편지를 통해 성찬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교회가 주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며 하나님의 동등한 백성임을 고백하며 성만찬을 지켜 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통해 주님을 만났고, 그 은혜의 자리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첫째, 성찬의 정신은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세계 최대 갑부였던 록펠러는 55세에 불치병 진단을 받으며 1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고, 그로 인해 인생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최후 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에 들어가던 중, 로비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라는 성경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말씀을 읽는 순간, 그는 마음에 전율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잠시 후 병원 한쪽에서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병원측에서는 병원비가 없어서 입원이 안된다고 했고, 환자의 어머니는 입원시켜 달라고 울며 사정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비서에게 아무도 모르게 지불을 하도록 했습니다. 치료를 받았던 소녀가 회복이 되었고 록펠러는 자신의 자서전에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세상에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록펠러는 나눔의 삶을 작정하고 제단을 세워 미국을 넘어 세계 각 지역에 도서관을 세우고, 구제 사업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는 98세까지 살면서 선한 일에 더욱 힘을 쓰는 삶을 이어갔습니다.”
선한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성도들 안에 거하시며 나누고 베풀 힘을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며 제자들에게 이 떡과 잔을 마실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기억하고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정신은 내것을 나누는 삶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전하고,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세계성만찬 주일을 장학헌금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낯선 미국 땅에서 어려운 상황 속에 공부하는 다음 세대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나눔을 통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되어 줄 수 있고, 포기하려던 학업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장학헌금 주일을 통하여 미국에 와서 학업을 이어가는 세대들이 꿈을 이루는데 귀한 씨앗이 되리라 믿습니다.
초대교회는 매일 함께 공동의 식사를 나누고 그 끝에 성찬을 행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필요한 음식을 각자가 집에서 가져왔습니다. 당연히 가난한 자나 노예의 신분인 성도들은 집에서 음식을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이 가져온 음식을 함께 나누며 서로의 마음과 뜻이 주안에서 서로 통했습니다. 당시 생명을 주는 삶의 이야기가 외부 사람들에게 매우 진지하게 다가왔다고 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의 시선에 그들의 삶의 양식이 너무 차이가 났기에 궁금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교회사 교수인 알렌크라이더(Alan Kreider,1941-2017)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4세기 전까지 설교에 대한 어떠한 글도 쓰지 않고 기도와 성만찬 세례에 대한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4세기 전 남아 있는 설교문이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관해 나누고 성경대로 살지 못한 죄를 고백하며, 내것을 내어주며 서로를 용서하고, 다름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 말씀을 서로가 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둘째 성찬은 세상과 교회를 구별되게 하는 의식입니다.
바울은 성찬의 기원이 그가 만든 것이 아니며, 교회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전하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주께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전한 이유는 당시 고린도 교인들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주의 만찬이 일반 식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행하는 성찬과는 다른 상황이지만,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 가운데 애찬(Love Feast)과 성찬(Eucharist)이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은 함께 모여 애찬을 나누며 성찬을 진행했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다리거나 배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을 먼저 먹어 버렸습니다. 대개 공동 식사에 늦게 참석하는 이들은 노예와 노동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주의 만찬을 하면서도 배고플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성찬의 본질이 그들만의 잔치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성찬의 정신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고 책망합니다. 현대 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유익을 추구하다 보면 갈등과 파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완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지니고 있으며, 이로 인해 때때로 갈등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찬의식은 그러한 갈등을 넘어 세상과 교회의 목적이 다름을 분명히 구별하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식사후에 제자들에게 잔을 드시며 이것을 행하여 마실때마다 자신을 기념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곳을 여행하며 그곳의 기념물을 구입합니다. 특별한 순간과 장소를 기억하게 해주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피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겼고, 이를 기억할때마다 주님과의 관계를 깊어 지게 합니다.
25절입니다. 11:25 또 식사 후에 포도주 잔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라.”
성찬은 새로운 언약입니다. 성찬에 참예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회복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는 약속 안에서 새로운 삶을 부여 받고 가장 친밀한 사이가 됩니다. 약속이 지니고 있는 힘입니다. 그래서 본훼퍼 목사님은 “혼인이 언약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언약이 혼인을 보전하는 것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언약이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새 언약 안에 있을 때, 그 언약은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26절입니다. “26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의미를 주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찬 예식을 주님이 다시 오실때까지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찬은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신앙 여정에서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시선에는 모두가 사랑 받기에 합당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랑은 서로를 더 가까이 연결해 주고, 하나가 되기 위해 실천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떡을 떼고 마시는 것은 말로 만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27 ○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은 태도로 주의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그 사람은 주의 몸과 피를 모욕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28 그러므로 주의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29 만일 누군가가 그 빵과 잔이 주의 몸임을 분별하지 못한 채 먹고 마신다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임할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성찬에 임하기 전에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은 태도로 주의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는 경우, 그 사람은 주의 몸과 피를 모욕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므로, 주의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기 전에 먼저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간 주님과 하나가 되어진 성도들은 성찬을 준비하며 스스로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자기 점검 없이 형식적으로 성찬 예식에 참여하는 것은 심각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결과가 됩니다. 성찬의 떡을 나눌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찬의 잔을 마실 때, 보혈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주님을 더 닮는 것 뿐입니다.
셋째, 성찬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은혜의 통로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특별한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DMZ 민간인 통제구역에 있는 임진강 ‘독개다리’입니다. 이 다리는 한국전쟁때에 파괴되어 현재는 다리 기둥만 남아 있습니다. 전쟁으로 끊겨진 2개의 다리 가운데 한개의 다리는 복구되었고,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 복원된 다리를 통해 유엔군 포로들이 귀환해 왔다고 해서 자유의 다리로 불립니다. 그러나 여전히 전쟁의 흔적으로 파괴된 독개 다리는 70년 세월동안 더 이상 사람도 기차도 달릴수 없는 다리로 남아있습니다. 과거에 이 다리는 서로의 소식을 나누고,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며,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현재 끊겨진 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광지로 여겨지지만, 실상은 건널수 없는 위험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찬을 통해 우리가 주님의 은혜의 통로임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끊어지지 않는 은혜의 통로가 되어 우리에게 깊고 특별한 관계를 맺어 주셨습니다. 이 시간 서로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이임을 다시 깨닫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주님에 의해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주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성찰해 보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사랑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성찬을 마친 후에는 삶의 자리에서 서로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둔 세상을 밝히는 빛입니다. 한주도 성도들의 삶을 통해 주의 은혜가 흘러가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