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 2024 주일설교

(성령강림후 제 23주 예배)

은혜 앞에 서기까지 

Until We Stand Before Grace

김삼수 목사

시편 13:1-6

1O Lord, how long will you forget me? Forever?  How long will you look the other way? 2 How long must I struggle with anguish in my soul,   with sorrow in my heart every day   How long will my enemy have the upper hand? 3 Turn and answer me, O Lord my God!  Restore the sparkle to my eyes, or I will die. 4 Don’t let my enemies gloat, saying, “We have defeated him!” Don’t let them rejoice at my downfall. 5 But I trust in your unfailing love  I will rejoice because you have rescued me. 6 I will sing to the Lord  because he is good to me (New Living Translation) 

역사의 주인은 창조자이십니다. 인생이나 나라를 세우시고 폐하시고 높이시고 낮추시고 부하게 하시고 가난하게 하시고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진행됩니다. 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원칙, 기준이 있습니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 입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에게 목적이 있고 방향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인생이 타락하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구원하심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완전해짐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은 시대마다 동일하였고 이 시대에도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 변방에서 왕을 찾으셨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베들레헴이라는 촌 동네에서 양치는 소년이었습니다. 무명의 소년이었으나 자신의 직업에 충실할 때 하나님은 눈여겨보셨습니다. 오늘 날 성도들이 교회 생활 할 때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감으로 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 증거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을 찾았을 때는 다윗이 유명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골리앗을 죽였을 때나 전쟁에서 이방의 적들, 블레셋, 모압, 암몬에서 승리하고 유명했을 때 왕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실히 양 떼를 지키는 중에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유명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셨으니 자녀처럼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자녀삼아 주신 하나님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것이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꿈을 위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예수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1. 인생의 고통이 반복될 때 창조자의 길에 서야합니다.

  오늘 시편은 개인적인 탄식으로 시작되는 다윗의 시입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쫓기던 삶의 심정을 담은 외침입니다. 자신의 고통이 “어느 때 까지”인지 묻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생의 아픔이 묻어난 시입니다.

  다윗의 네 가지 질문 중 처음이‘나를 잊으셨나이까?’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를 알 때 그의 소리침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시 78:70) 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시대 목동은 최하위 신분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직업이었습니다. 실제로 목동의 증언은 법정에서도 인정되지 않던 때입니다. 공부 할 기회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모았을 때도 다윗은 목동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도 형들에게도 인정되지 못하였습니다.

   시편 42편에 고라 자손의 시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거할 때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모세를 반역하여 땅이 갈라져 죽는 재앙을 당했는데 그 당시 고라 자손이 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다윗 시대에 성가대의 직무를 감당하였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라고 시작 된 시는 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비웃으며 조롱할 때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다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영혼의 상태가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그 때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찬송하게 된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다윗도 고라자손처럼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시 42:9) 하는 것은 인생의 고통의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입니다. 고통가운데 눌리다가 견디다가 부르짖는 비명이고 절규는 기도였습니다.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 신앙의 순도가 나타납니다.

   다윗의 인생의 질문이 ‘주의 얼굴을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더 깊은 고통을 토설하였습니다. 양치는 목동들 중에는 자기의 양을 치는 자와 삯을 받고 양을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에게 자기의 양은 몇 마리일까요? 아버지의 양, 형들의 양, 이웃의 양을 치는 자였을 것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시78:71) 기록함으로 그가 양치는 목동이었을 때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되었음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한 이유도 분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기 때문이라 합니다. ‘마음이 완전하다.’는 뜻의 의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나 골방에서 혼자 있을 때나 같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양이 곰이나 사자, 늑대에게 공격받을 때나 이웃의 양이 공격받을 때나 똑같이 같은 마음으로 양을 지켰습니다. 양을 치는 모습이 성실하였습니다. 맹수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동일하게 지켰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는 일에 진심이었습니다. 이것이 크신 하나님께서 감동하신 자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을 찾으셔서 머리에 기름 부을 때 다윗의 나이가 십대 중반이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꿈이 다윗의 인생 속에 들어갔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꿈은 이 어린 소년을 이스라엘 왕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이 시대에도 다윗 같은 마음을 가진 자를 찾아 하늘의 꿈을 담으시는 분이 창조자이십니다.

2. 창조자를 향한 사랑은 고통을 견디게 합니다.

  다윗의 질문은 자기신세 한탄처럼‘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합니까?’호소합니다. 십대중반에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기는 도망자의 삶을 십년이상 살았습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되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도망자라는 고난과 고통의 긴 시간이었습니다. 라마에서 헤렛 수풀까지, 기브아, 놉, 가드, 아둘람 굴, 모압미스베, 그일라, 십 황무지, 마온 황무지, 엔게디 황무지, 바란광야, 갈멜, 시글락까지의 도망 길에는 사울의 삼천 명의 군대의 추격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쫒길 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의 시간을 견뎌야했습니다. 그 시간은 땅 끝으로 가서 숨어도 사울의 온 군대가 찾아오는 절망적 순간이었습니다. 쫓기는 처참함의 시간들 속에서도 다윗은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부르짖는 다윗은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인생길이 보이지 않음에도 담대하게 ‘나를 봐 달라’는 이 기도는 자신의 뜻대로 사는 자의 기도가 아닙니다. 다윗처럼‘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하나님을 주목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함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또 나의 원수가 이겼다 할까? 더 나아가 자신이 흔들릴 때에 대적들이 기뻐할까?’두렵다 하였습니다. 아둘람 굴로 도망할 때 다윗의 형제들과 친척들이 찾아오고 사울의 압제하에서 고통당하던 자들과 빚진 자들과 불만을 가진 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때는 도망자의 초기였고 엔게디 요새까지 그들을 데리고 도망해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사람의 수는 점점 불어나 육백 명이나 되는 군대가 되었습니다. 가족을 합치면 삼천 명이 넘는 사람을 데리고 다닌 도망자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더 중요한 다윗의 삶을 바라봅니다.

   실제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에도 사울을 해하지 않았습니다. 도망자의 삶을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손이 끝내야하는 전쟁임을 안 지혜자였습니다. 그가 스스로 사울을 죽이는 순간 자신이 사울과 같이 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 속에 고독과 좌절과 안타까움 앞에서 하나님을 찾아 가고 있으니 살려달라는 외침입니다. 자신의 사망으로 원수가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할 수는 없다는 부르짖음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찾아가는 다윗은“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한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신을 만나는 영광은 사랑 안에서 이룹니다. 삼십 세에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눈을 밝혀달라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보여 진 것처럼 마귀와 전쟁 할 줄 아는 이런 믿음의 영광을 성도들이여 만나길 소망합니다. 이 믿음으로 성도들이 이 시대 교회를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하고 악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하는 소명입니다.

3. 은혜 앞에 선 승리자만이 찬양합니다.

   사막의 하루가 매일 똑같을 것 같지만 하루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든지 비가내리면 길이 바뀝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앞서간 양떼 발자국이나 앞서간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걸을 때 그 길은 믿을 수 있는 길이 아니라합니다. 사막을 걷는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하늘의 별자리를 따라 걷는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변함없는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합니다. 성도들의 인생은 광야와 같습니다. 그 길은 매일 다른 길이펼쳐집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12)말씀하며 나는 선한 싸움을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자랑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운 다윗이한편의 시로 그때의 심정을 쏟아놓았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여호와를 찬송할수 있는 이유가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었다 선포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은덕을베푸신’ 하나님 아버지의 끝없는 구원이 은총이었음을 알고 찬송함이 위대하였던다윗입니다. 사울의 군대에 쫓길 때에 다윗의 고백은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57:7)며 하나님을 향하여간절하였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다윗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법 앞에서 겸손할 수 있는 자로훈련받았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원하노라.”(민6:24-26)하신 약속을 따라 산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자신의인생을 통해 이 땅에서 하늘 백성으로 훈련되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때까지’를 부르짖었던 다윗의 인생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길은 불가능을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송축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한 다윗의 멋진 노래처럼 사랑하는 성도들의 인생도 사단을 이기고 승리하여 찬송하는 복된 믿음의 인생이길 축원합니다.

10. 20. 2024 주일설교

(성령강림후 제 22주 예배)

건강한 교회 시리즈 34

영광의 자리를 위한 준비

Preparation for the Place of Glory

마가복음 10:35~45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영광의 자리를 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 앉을 때, 자신들도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이 요청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동일한 기사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께 한 아들은 주님의 오른편에 다른 아들은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마태복음의 기사에서는 진한 모성애로 느껴지겠지만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말씀 하시는 영광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출세 (出世) 하다’를 직역하면 ‘세상에 나온다’라는 뜻입니다. 숨어 살던 사람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유명해 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청탁하던 영광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을 받고, 주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가 마시는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되물으십니다. 이 잔은 주님께서 당하실 고난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수 있는지 되물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이 당할 고난을 언급하며,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넘겨지며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예수를 이방인들에게 넘겨주면 그들은 그를 조롱하고 침을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난 후에 전한 말씀입니다. (33-34)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의 수난을 예언하는 마지막 단락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순례자가 걸어야 할 마지막 발걸음이었지만, 그 길은 단순히 유대인의 결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이해하고 있던 길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는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가르치셨으며, 그 핵심이 바로 거룩성과 섬김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세상에서 출세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요셉의 인생은 하나님의 구원이야기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복 받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겪게 될 것을 알면서도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고, 이방나라로 팔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섬기던 주인의 아내가 유혹을 하자 이를 거절하고, 성결한 삶을 선택했는데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의 인생에서 수많은 고난을 선으로 바꾸시고,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선한 결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거룩한 삶을 선택한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걸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출세란 세상의 기준에 따라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출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로운 삶을 부여 받도록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예상치 못한 고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성실하게 살아가는데 세상의 성공의 기준으로 보면 더딘 것 같고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은 삶이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욥도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대로 모든 문제의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믿음 안에서 다 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길은 세상의 소망이 아닌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알려 주고 싶었던 교훈입니다.

첫째, 지위가 아니라 정체성입니다.

과거에 기독청년들에게 ‘고지론’을 외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세상의 각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 영향력을 발휘하며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취지였습니다. 그 후, 다른 한쪽에서는 ‘미답지론’을 외쳤습니다. 답이 없는 낮은 자리, 세상의 변두리로 가서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지위가 높은 곳을 지향하는 믿음과 낮은 자리로 가라는 믿음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사람들과 어울리며 모든 계층의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하고 화해하는 사역을 실천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정체성은 예수님처럼 밀알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자리에서 나오게 됩니다. 지위가 있는 자리나 낮은 자리나 주어진 환경에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어진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개혁과 변화를 이끌고, 동시에 소외된 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역을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 그들의 어머니는 당시 수도였던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눈에 보이는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하고 왕좌에 앉아 영광을 누리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를 보장받기 위한 요청이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하신 대답은 다윗 성전의 보좌가 아니라 내가 마셔야 할 잔과 세례(38)을 받을 수 있느냐였습니다.

본문에서 표현한 잔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고통에 관한 것입니다. 또한 세례는 슬픔과 관련된 죽음의 이미지입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와 출애굽 당시 애굽 군대가 물에 수장되는 하나님이 죄에 대한 죽음을 상징하는 물의 이미지입니다. 이해가 달랐던 세베대의 아들들은 ‘예, 저희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14:50 참조),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 앞에서 그들은 그 잔을 피했습니다. 이후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성령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경험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부활의 영광으로 드러난 것을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깨달은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순교한 첫 번째 사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행 12: 2) 야고보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유진피터슨 목사님은 한길 가는 순례자라는 책에서 ‘한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순례자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과 그 길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힘이라고 강조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살면서 깊은 기도가 없이는 긴 순종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도마는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해 그 길을 좀 알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가야 할 방향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필요한 것은 그 길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달리는 경주자는 무거운 짐이 되는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순례자인가요? 외국생활에서 잠시 여행을 온 관광객과 현실을 살아내는 이민자들의 삶의 시선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관광객은 잠시 동안의 경험을 통해 그 땅을 바라보고 떠나지만, 이민자는 그 땅에서 살아가며 그곳의 목적과 의미를 깊이 생각합니다. 순례자도 이와 같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잠시 깨닫고 머물다 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살아가는 순례자의 마음을 지니고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똑같이 이 땅을 밟고 있어도 향하는 시선과 마음이 달라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영원한 소망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지나가는 관광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표를 향해 매일의 선택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순례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믿음의 정체성이 분명했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 자기 목자의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상 17:40)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7)고 선언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으로 사명의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둘째,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43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44 , 너희 중에 으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모든 이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주려고 온 것이다.

어떤 자리에 서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실제로 내 손에 든 것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위대함이 권력이나 영광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마음을 철저하게 내려놓고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자선이나 선행을 피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 는 말씀은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마음에서 우러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한 일을 다 보신다고 기록합니다. 잠언 19장 17절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리라” 말씀합니다. 선행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께 빚을 지는 것이기에 반드시 갚아 주신다는 확신을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한 행위를 기억하시고 보상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신뢰 관계 속에서 우리의 선행의 힘은 더욱 더 커질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막 끝나가던 가을이었습니다. 미국의 오리건주 유게네 마을 회관에는 종교 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가 붙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즐겁게 인사를 나누며 영화를 관람합니다. 내용은 한국 전쟁이 낳은 고아들에 관한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가 끝나자 한 농부 부부는 그 아이들을 잊을 수 없었고, 영화를 잊으려 해도 영화가 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부부는 직접 한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와보니까 6.25 전쟁 직후의 한국은 정말 형편없었습니다. 영화에서 보던 대로 전쟁 고아들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 부부는 전쟁 고아 8명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사실이 신문에 나자 여러 단체에서 이들을 돕겠다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 농부 부부는 전쟁 고아들을 돕는 기관을 만들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기관이 홀트 아동 복지재단입니다. 홀트씨는 선한 씨앗을 심은 것 뿐인데, 홀트 아동복지재단이라는 열매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1955년 해리 홀트(Harry Holt, 1905 ~ 1964)와 그의 부인 버다 메리언 홀트(Bertha M. Holt, 1904 ~ 2000)가 전쟁으로 인해 고통속에 있는 한국의 고아 8명을 입양한 것이 홀트아동복지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노부부는 현재 한국에 묻혀 있지만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돕는 이 프로그램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고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지만 이 땅의 영광의 자리를 거부하고 섬기는 자의 본이 되셨습니다. 순례자의 길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영광의 보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영광의 보좌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나라를 세우는 우리에게 영원한 상을 예비해 주십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고 말씀하며, 성도들의 삶에 상급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현실속에서 뜻을 분명히 알 수 없는 모호한 문제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홍해 바다가 앞을 가로 막기도 하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두려움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애굽을 떠난 온 것을 후회하기도 하며, 기본적인 생존권에 대한 위협과 어려움이 있는 광야의 한복판에서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는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한주 동안도 섬김을 통해 우리 모두 영광의 자리를 준비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