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절 첫번째 주일
Standing Before God
창세기 3:1-7
3:1 뱀은 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어떠한 들짐승보다 가장 교활하고 약삭빨랐다. 뱀이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며?” 3:2 여자가 뱀에게 말했다. “아니야,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먹어도 돼. 3:3 하지만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먹으면 안 돼. 하나님께서 그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어. 그랬다가는 죽게 될 거라고 하셨어.” 3:4 뱀이 여자에게 말했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을걸. 3:5 너희가 그걸 먹으면, 그 날로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거야. 그래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거야. 하나님은 그걸 아시고, 너희더러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거야.” 3:6 ○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쳐다보니 정말 먹음직스러웠고, 보기에도 탐스러웠다. 과연 사람을 지혜롭게 해주는 열매처럼 보였다. 여자는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먹고는, 자기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 열매를 먹었다. 3:7 그러자 두 사람 모두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치마처럼 몸에 둘렀다. (쉬운말 성경)
1 The serpent was the shrewdest of all the wild animals the Lord God had made. One day he asked the woman, “Did God really say you must not eat the fruit from any of the trees in the garden?” 2 “Of course we may eat fruit from the trees in the garden,” the woman replied. 3 “It’s only the fruit from the tree in the middle of the garden that we are not allowed to eat. God said, ‘You must not eat it or even touch it; if you do, you will die.’” 4 “You won’t die!” the serpent replied to the woman. 5 “God knows that your eyes will be opened as soon as you eat it, and you will be like God, knowing both good and evil.”6 The woman was convinced. She saw that the tree was beautiful and its fruit looked delicious, and she wanted the wisdom it would give her. So she took some of the fruit and ate it. Then she gave some to her husband, who was with her, and he ate it, too. 7 At that moment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suddenly felt shame at their nakedness. So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to cover themselves.(New Living Translation)
몇 해 전, 선배 목사님께서 쓰신 사순절 묵상집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책 첫 페이지에 잠언 6장 4절의 말씀을 써 주셨는데,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네 눈꺼풀로 졸지 않게 하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며 본문을 묵상하는데 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잠들어서는 안 될 순간에 졸고 있는 지금의 시대를 보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때보다 하나님 없이 생각하고 결정하며 내가 보고 듣는 것이 기준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아갑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도록 하나님 없이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몸이 조금만 피곤해도, 마음에 근심이 쌓여도 예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어려운 시간 앞에 서면 그 고통이 오히려 우리를 깨워 기도의 자리로 이끌어 줍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을 묵상하는 이 절기에, 우리를 거룩한 자녀로 불러 주신 은혜가 가슴 깊이 묵직하게 울립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 더 많이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Abraham Maslow 1908~1970)는 인간이 지닌 욕구를 피라미드로 설명했습니다. 생존과 안전, 인정을 넘어 자아실현의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 이것이 인간이 지닌 본능적인 열망입니다. 5단계로 분류한 피라미드로 되어 있는 꼭지점 끝이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원한 것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이 뜨였을 때 무엇을 보게 되었습니까?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벌거벗음과 수치의 자리였습니다.
1. 인간은 스스로 눈을 뜨려 했지만 그것은 영광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 앞에 서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뱀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며?”라고 물었습니다. 관계를 흔들고 의심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희가 그걸 먹으면, 그 날로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거야. 그래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거야. 하나님은 그걸 아시고, 너희더러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거야.” 죄는 이렇듯 거짓으로 진실을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 없이 판단하고 결정하게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각자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의 온갖 열매를 마음껏 누리라는 풍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넘치는 은혜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게 됩니다.
다윗은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고 기록합니다. 죄는 우리를 파멸시킴에도 때로는 매우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시고 비전을 주셨는데, 왕의 자리에서 자신의 권력을 의지하는 순간, 보아서는 안 될 것이 아름답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죄는 의로운 것처럼, 열심인 것처럼, 옳은것 처럼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없는 열심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리에 서게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게 했습니다. 죄는 더 큰 죄를 부르고 주변 사람들까지 쓰러트립니다. 그로부터1년이 지나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심히 많고, 한 가난한 자에게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었는데, 부자가 손님을 대접하면서 자기 양은 아끼고 가난한 자의 어린 양을 빼앗아 잡았습니다.”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를 듣고 분노했습니다. “그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다윗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순간 다윗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삶을 보고 들을 때는 잘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정확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나의 모습과 실제 나의 삶의 모습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에게 있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두려울지도 모릅니다. 다윗도 그랬을것입니다. 말씀이 임할때 자신의 실체를 분명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2. 말씀이 우리의 눈을 열게 합니다.
은혜에 붙들리는 것은 내가 높은 곳을 올라가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자리로 찾아 오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은 자신들의 몸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 잎을 엮어 치마처럼 몸에 둘렀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살아냄의 자리에서 항상 실패하는것 같은 날이 늘어갑니다. 열심을 다하는데 내가 맞다고 여겨지지 않으면 그 열심도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나의 실수와 실패는 보이고 싶지 않아 무화과 잎으로 가리려 합니다.
바로 이 자리입니다. 모두가 올라가려 할 때 하나님은 내려오셨고 숨고 싶고 가리고 싶었던 그 자리로 찾아오셨습니다. 스스로 올라가서 성취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를 만나주시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십자가 앞으로 나오는 것은 가리워졌던 나의 죄를 안고 나아오는 자리입니다. 다 해결하고 서는 자리가 아니라 부족한 모습 그대로 서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모든 것이 풍족하게 있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둘째 아들은 종의 자격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에게는 여전히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불쌍한 마음이 들어 얼른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그 삶을 친히 도우십니다. 그런데 믿음과 삶의 자리는 다릅니다. 우리를 어렵게 하던 문제가 하루 아침에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시선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은 세상속에서 끊어야 할 것들을 끊고 선과 악을 분별하는 눈을 열어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악과가 보장해 준다고 믿었던 육신의 욕구, 보는 것의 욕구, 세상 자랑의 욕구를 말씀으로 충족시켜 줍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19:7 ○ 주의 법은 완전하여 사람의 영혼을 생생하게 되살려 주고,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사람을 깨우쳐 지혜롭게 하도다. 19:8 주의 가르침은 정직하여서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안겨주고, 주의 계명은 순수하여서 사람의 눈을 밝게 하도다.
말씀은 우리를 다시 보게 합니다. 새롭게 합니다. 깨어나게 하고 회복하게 합니다.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은 고통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선물받은 책속에 쓰여진 말씀은 제 마음에서 그냥 지나쳐 갔지만 본문 말씀을 묵상하며 그 구절이 다시 기억난 것은 말씀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제가 서있는 자리에서의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문득 말씀의 한구절과 익숙하게 들었던 찬송가를 통해서 눈물 흐르는 시간을 만난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은 특별한 그날의 시간이 아니라 살아온 삶의 무게가 말씀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눈을 열게 해주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같은 현실에서 서로 다른곳을 바라봅니다. “
흑인 인권 운동의 역사에서 말콤 엑스와 마틴루터킹은 억압과 차별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방법을 선택합니다. 말콤 엑스는 구조적인 억압을 증오하며 억압한 자들을 보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억압하는 사람들 안에서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 위에서 사랑으로 정체성을 외쳤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고통을 겪었지만 전혀 다른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은 말콤 엑스를 틀렸다고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고통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은 고통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정죄가 아니라 긍휼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복음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삶에서 매번 같은 자리에서 쓰러지는 나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 없고 감격스럽지 않은 익숙한 신앙 생활의 자리에, 외로움 속에서 씨름하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그 은혜의 자리에서 나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았던 것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애쓰고 더 많이 보고 더 판단하고 더 지키려고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살아가면서 그 사실을 잊어버릴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서면 비로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내 옆의 지체들이 보입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왔고 여전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우리가 함께 바라보는 십자가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단단한 사람도, 무뚝뚝한 사람도, 논리적인 사람도, 냉정한 사람도, 순하고 착한 사람도 죄 아래에서 무너지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왜 그랬는지 물으신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었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평안으로 이끄시고 자녀됨의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앞에 서서 스스로 분별할 수 있다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을 삶의 가장 높은 가치로 둘 때 비로소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사순절은 하나님 앞에 조용히 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현 후 마지막 주/ 변화주일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Witnessed with Our Own Eyes
베드로후서 1:16~21
16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지어 낸 근사한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위엄 있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17 장엄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가 그로 인해 무척 기쁘다.”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셨습니다. 18 우리는 그 음성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거룩한 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을 때 들은 그 음성은 분명히 하늘로부터 울려 온 것이었습니다. 19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예언자들이 전한 말씀을 보다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 말씀을 가까이 하고 따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그들이 전해 준 말씀은 어두움을 환히 밝혀 주는 빛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빛은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동이 트고, 아침 샛별이 환히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줄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분명히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떠한 예언의 말씀도 예언자가 마음대로 해석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며, 21사람의 뜻대로 말하고 싶은 것을 적어 놓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 놓았습니다. (쉬운성경)
16 For we were not making up clever stories when we told you about the powerful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We saw his majestic splendor with our own eyes 17 when he received honor and glory from God the Father. The voice from the majestic glory of God said to him, “This is my dearly loved Son, who brings me great joy.”[f] 18 We ourselves heard that voice from heaven when we were with him on the holy mountain. 19 Because of that experience, we have even greater confidence in the message proclaimed by the prophets. You must pay close attention to what they wrote, for their words are like a lamp shining in a dark place—until the Day dawns, and Christ the Morning Star shines[g] in your hearts. 20 Above all, you must realize that no prophecy in Scripture ever came from the prophet’s own understanding,[h] 21 or from human initiative. No, those prophets were moved by the Holy Spirit, and they spoke from God.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날은 정보가 넘쳐나지만 오히려 혼란스럽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정보는 많아졌는데 진실을 찾는 것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내가 선호하는 영상들을 보여주고 내가 걸어온 길. 내 의견과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만 머물게 합니다. 더 많이 알고 볼수록 불안해 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의 확신이 더 크신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고 시야를 좁아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쓰던 그 때에도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흔들었고 성도들의 마음에는 깊은 의심이 들어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목격된 진리라고 선언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목격된 진리입니다. (16-19절)
성도들에게 지도는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말씀은 수천년에 걸쳐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나침반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기록자로 사람을 삼으셨지만 인간의 뜻을 배제한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도록 성령을 통해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후서1장 16-21절은 그 말씀의 확실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를 기록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직접 올라갔던 변화산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증언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셨는데, 그곳에서 주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영광스런 예수를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여기 있으니 정말로 좋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초막 세 채를 지어서 하나는 주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마 17:1-4) 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지만 그 얼굴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광채를 보았고 하늘로부터 직접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변화산 이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지만 산에서 내려온 이후에 예수께서 기도하실때 육신이 피곤해서 잠들어 있었고, 대제사장의 뜰에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패속에서도 말씀이 성취된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방향은 분명해졌지만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로 결단할때에도 밤이 새도록 잡은 것이 없었지만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렸을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던 것도 말씀의 경험입니다.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오실때에도 말씀을 믿고 물 위를 걸었지만 바람을 보고 두려워 물속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경험을 토대로 유언처럼 남긴 편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1장 13절 14절을 보시면, ” 1:13 내가 이 육신의 천막에 살고 있는 동안만큼은,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워 늘 새롭게 해주는 것이 나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1:14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보여 주신 대로, 내가 이 육신의 천막을 벗고 세상을 떠나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무엇을 가장 강조하고 싶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희망의 신학’을 전개한 독일의 개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은 말합니다. “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세워진 역사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생생히 회상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활기차게 희망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회상하게 된다. 이 회상과 희망의 현재적인 능력을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라고 부른다.” 과거의 경험이 어떻게 미래의 확신이 될수 있습니까? 교회는 완성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기록된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 위에 다시 일어서는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이 익명의 목격자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며 시작합니다.(눅1:2)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고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 16절로 19절을 보시겠습니다. “16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지어 낸 근사한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위엄 있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17 장엄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가 그로 인해 무척 기쁘다.”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셨습니다. 18 우리는 그 음성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거룩한 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을 때 들은 그 음성은 분명히 하늘로부터 울려 온 것이었습니다. 19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예언자들이 전한 말씀을 보다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 말씀을 가까이 하고 따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그들이 전해 준 말씀은 어두움을 환히 밝혀 주는 빛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빛은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동이 트고, 아침 샛별이 환히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줄 것입니다.” 어둠은 아직 완성되지 않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입니다. 샛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의미합니다. 완성될 마지막 날입니다. 등불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말씀입니다. 즉 성도는 등불을 들고 세상을 밝히며 샛별이 환히 떠오를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의 권위를 믿고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2.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20-21절)
성령께서는 말씀을 의지할때 실패속에서도 깨닫게 하십니다. 문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을 알아도 베드로처럼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신뢰한다면 이것은 실패가 아니라 영적 훈련입니다. 은혜는 받는데 용서할 힘은 사라지고 사랑은 배웠는데 사랑할 힘은 없습니다. 부르심의 사명 앞에서 거룩한 부담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섬김의 자리에서 나의 정성과 시간을 내어드리는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롬7:19) 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무너진다고 생각했는데, 십자가로 나아가지 않고 여전히 내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도, 주님을 위해 나의 시간을 내어 드리는 일도 내 힘이 아니라 영적인 공급을 다시 받아야 합니다.
이번주 수요일부터 우리는 사순절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사순절은 세상속에서 살아가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서 주님을 깊이 바라보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의 자리는 단순히 개인의 영성을 위한 기도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다시 붙들어 주는 시간입니다. 더 좋은 사람으로 살기 위한 결단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믿음의 성도가 되는 시간입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에서 우리의 약함을 발견합니다. 그 속에서 실패하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실패와 아픔의 자리도 신앙의 여정의 과정입니다.
각자의 기도의 자리에서 사순절 시기에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변화산에 머물자는 베드로의 제안을 거절하시고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십자가의 길로 가셔야 했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지만 또한 그 길은 부활로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상처와 고통, 비난과 오해를 온 몸으로 견뎌야 했던 자리를 지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셔야 했던 자리였습니다.
사순절 40일간의 시간은 우리가 사랑하고 믿는 예수께서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신 그 길을 동참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깊은 어둠의 시간속에서 우리의 내면 깊이 감춰둔 죄가 드러나고,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재발견하는 시간이 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힘은 언제나 무너지기 쉽고, 누군가 뾰족한 말로 건드리면 터지는 물풍선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경건은 우리의 연약함을 붙들어 줍니다. 경건의 훈련을 통해 나의 죄를 마주하고 연약함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경건은 우리의 마음이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으로 찬양과 감사의 자리에 살게 합니다.
인생에 간증이 많은 사람을 보면,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손이 인도하심을 깨닫기 때문에 그 사람들 곁에 있으면 함께 있는 사람도 기쁨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땅속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경제적인 불안함이 있습니다. 믿음의 정체성의 혼란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낯선 땅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두려움 속에 있을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이 자리에 보내시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청년의 때에 뜨겁게 하나님을 만나고 공동체 안에서 쌓여가던 신앙이 결혼을 하고 현실과 부딪힙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함께여서 더 단단해질 것 같지만 같이 무너질 때도 많습니다. 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기도할 시간도 봉사할 여력도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직장을 다니며 내가 살아온 삶의 패턴을 내려놓고 경건함을 유지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관계 속에서의 반복되는 상처, 영혼의 갈증이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20 그러므로 분명히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떠한 예언의 말씀도 예언자가 마음대로 해석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며, “사람의 뜻대로 말하고 싶은 것을 적어 놓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 놓았습니다.”(벧후1:20-21)
우리는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미 주어진 진리는 충분하고 완전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죄책감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다릅니다. 복음은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여 우리를 살리고 회복하게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남겨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완성될 뿐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함께 걸어가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이제 우리가 들고 있던 믿음의 거울의 방향을 나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나를 비추어야 합니다. 사순절의 40일은 완벽한 성도로 살아가자는 권면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십자가를 다시 만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교회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비추며 함께 걸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은 주님을 닮아가는 길입니다. 절대 넘어지지 않는 삶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길입니다. 옆에 앉아있는 지체들, 오랜 세월 함께 걸어준 신앙의 선배들, 우리의 걸음을 함께 따라오는 다음 세대들과 함께 걷게 하십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하나됨을 배우는 시간이 바로 함께 예배하는 자리입니다.
은혜는 우리 안에 어둠이 머물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십자가의 은혜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께서 날이 밝기도 전에 한적한 곳으로 홀로 나아가 기도하신 그 자리, 그 은혜가 지금 우리가 찾아가야 할 자리입니다. 아이를 키우며 진짜 부모의 마음을 알아갈 때 성령이 인내를 가르쳐줍니다. 우울하고 외로워 길을 잃고 헤매일 때 성령이 소망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의 길을 따라갈 때 우리의 어두웠던 밤을 비추는 등불을 만나게 됩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말씀의 등불을 켜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기쁨으로 믿음의 경주를 함께 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