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9.2023 주일설교

(부활주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Peace Be With You

요20:19-31

유민용 목사

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같은 날 저녁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잠갔습니다. 그 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자 무척 기뻐했습니다. 21 다시,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24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심> 열두 제자 중에서 디두모라는 별명을 가진 도마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다른 제자들이 있던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내가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분의 못박힌 곳에 찔러 보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26 일 주일 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시 그 집에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도마도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 때도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7 그리고는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에 찔러 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28 도마는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30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있는 곳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습니다. 31 그런데도 이 책에 있는 표적들을 기록한 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쉬운성경)

19 That Sunday evening[b] the disciples were meeting behind locked doors because they were afraid of the Jewish leaders. Suddenly, Jesus was standing there among them! “Peace be with you,” he said. 20 As he spoke, he showed them the wounds in his hands and his side. They were filled with joy when they saw the Lord! 21 Again he said, “Peace be with you. As the Father has sent me, so I am sending you.” 22 Then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the Holy Spirit. 23 If you forgive anyone’s sins, they are forgiven. If you do not forgive them, they are not forgiven.” 24 One of the twelve disciples, Thomas (nicknamed the Twin),[c] was not with the others when Jesus came. 25 They told him, “We have seen the Lord!”But he replied, “I won’t believe it unless I see the nail wounds in his hands, put my fingers into them, and place my hand into the wound in his side.”26 Eight days later the disciples were together again, and this time Thomas was with them. The doors were locked; but suddenly, as before, Jesus was standing among them. “Peace be with you,” he said. 27 Then he said to Thomas, “Put your finger here, and look at my hands. Put your hand into the wound in my side. Don’t be faithless any longer. Believe!”28 “My Lord and my God!” Thomas exclaimed. 29 Then Jesus told him, “You believe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believe without seeing me.” 30 The disciples saw Jesus do many other miraculous signs in addition to the ones recorded in this book. 31 But these are written so that you may continue to believe[d] that Jesus is the Messiah, the Son of God, and that by believing in him you will have life by the power of his name.(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주일입니다.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세계교회는 매년마다 부활주일부터 시작하여 40일을 거꾸로 올라가 재의 수요일부터 고난주간을 보내게 되지요. 고난의 엄숙함과 고통속에서도 “작은 부활절”인 주일은 우리에게 빛을 비춰 주었습니다. 주님은 깊은 어둠속에 있는 이들에게도 빛을 비추고 계시고, 고통속에서 잠 못 이루며 뒤척이는 이들에게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이들에게 ‘평강이 있으라’하시는 주님의 위로가 더 깊게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깊은 상실감에 싸여 있는 제자들도 ‘평강이 있으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각별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반복되는 구절에서 제자들을 향한 주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인생의 애통함과 슬픔을 느껴 본적이 없는 분들은 주님의 위로와 평강의 깊은 의미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바로 ‘평강’입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환란 가운데서도 ‘담대하라 내가 이기었노라.’ 하셨습니다. 평강은 성도들에게 새로운 옷을 입혀 주시는 부활의 확증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장소가 아니라 서로 용납하고 서로의 품을 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부활을 사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 Inside out 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적이 있습니다.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인간 안에 내재된 기쁨과 슬픔, 분노와 냉소 등 여러 마음 속 감정들이 영화 속에 캐릭터로 등장을 합니다. 8년 전 제 손을 잡고 영화를 보던 두 아이가 이제는 제법 성장해 주었는데요. 영화 속 이야기는 상반되는 두 감정이 서로를 배제한 채 삶을 살아 갈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슬픔과 기쁨이 혼재되어 있는 감정속에서 서로를 성숙하게 보듬어 줄 때 인생이 행복해 진다는 내용입니다. 사순절기의 감정은 ‘너무 슬퍼’라고 하는 것이 주된 정서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다 잘될꺼야’라는 소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같은 날 저녁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잠갔습니다. 그 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오늘 본문은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에서 시작이 됩니다. 개역개정으로 보면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토요일이니까 안식 후 첫날 저녁때라는 것은 주일 저녁입니다.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갔는데 동굴로 된 무덤의 출입구를 막아 놓은 돌이 치워 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빈 무덤 앞에서 울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천사들은 왜 우는지 묻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고,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빈무덤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마리아를 예수님이 부르십니다. 직감적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차린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리아가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했지만 제자들은 그녀의 말을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잠그고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의 그 심정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가야 할 길을 잃어 버리고,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내가 의지한 것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도 상실감에 빠지고, 갈 길을 잃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밤은 감정지수가 더 높아지는 시간입니다.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에서 제자들이 얼마나 두려워 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첫째로 교회는 세상속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자 무척 기뻐했습니다. 21 다시,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보내신 이의 뜻을 ‘내가 다 이뤘다’라고 말씀하시고 십자가 위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공생애 가운데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육신의 몸으로는 온 인류의 주가 될 수 없으니 메시아의 사명을 다 이루시고 육신의 장막을 헐고, 영원한 성전이 되어 주셨습니다.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16:7)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서는 성부가 ‘보낸 자’가 되고, 성자가 ‘보냄을 받는 자’입니다. 성자와 제자의 관계에 있어서는 성자가 ‘보낸 자’가 되고 제자들이 ‘아포스톨로스’ (ἀπόστολος) 보냄을 받은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보냄을 받는 자: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라는 단어는 79번이나 나오는데, 교회는 보냄 받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부름 받은 소명에 응답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 오셨고,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신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가 방향을 교회 내부로 정하면 교회 안에서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세상을 향해서 보냄을 받게 될 때에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됩니다. 세상의 방식을 교회 안으로 들여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시대적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론적 성령론의 도식은 이렇습니다. Father —> Son —> Spirit그 순서를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보냈고 아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을 받아 들이고 충만함으로 세상속으로 침투하는 것입니다. 세상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약속된 성령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사도행전 2:32-33절을 보면 “32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문제는 제자들이 지금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임하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닫혀진 문을 뚫고 들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에게 친구가 되기 위해 먼저는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두려움이 아니라 평안을 빌어 주는 공동체가 됩니다. 케임브리지 공동체 안에 평안함이 흘러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첫번째 선교사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부름 받게 된 소명자들은 보냄 받는 사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이 있는 자에게는 사명을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관심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통치가 성령을 통해 실현되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로 교회는 성령의 호흡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두려움에 직면할 수 있고 깊은 고뇌와 절망감에 빠질 수 있지만 너무 오랫동안 그 감정에 갇혀 있지는 마십시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경건한 삶도 필요하지만 두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경건 보다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기이고 호흡이지 않습니까?

주님은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말씀하십니다. ‘숨을 내쉰다’는 표현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생기를 주시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창조의 숨결은 예수님을 통해 죄로부터 온 아담의 형상에서 예수님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세례식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삶의 중심으로, 왕으로 고백하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뱃속에 있던 아이가 세상에 자력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문제는 세상에 나와서 숨을 쉬지 않으면 뱃속 세상과 다르기에 생명이 멈추게 되는 것이지요.

두려움은 염려라는 감정의 뿌리에서 시작되기에 성령은 좋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염려와 불안의 감정에 뿌리를 내리게 되니 두려운 것입니다. 구원과 미래는 성령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계시가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성령 안에서 서로가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을 지어 가기 위해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어집니다.(엡2:22) 호흡이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긴장을 풀고,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깊게 마시고 내뱉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생기가 지속적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인간은 깨진 질그릇과 같아서 물이 쏟아지는 수돗물 아래 그릇을 갖다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충만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첫번째 증거는 주님과의 연합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 열매를 맺게 되지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연합이 중요합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서로 사랑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배를 마치고 한주간 살면서 가지에 핀 꽃들을 볼때마다 ‘서로 사랑하라’는 성령의 증거가 확증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무를 유심히 보니까 큰 나무의 가지들이 약한 가지들을 아래에서 받쳐 줍니다. 먼저 나온 가지가 밑부분에 있게 됩니다. 험한 세월 동안 강한 바람에 꺾여 지지 않고 큰 나무가 된 것도 크고 강한 가지가 받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원리를 통해 열매를 맺고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두번째로 성령받은 증거는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성령의 세례는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서로 용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과 ‘서로 용서하라’라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육체로 부터 썩어지는 욕망을 내려놓고,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좇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 받는 증거입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은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아픔과 약함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를 홀로 버려 두지 않으시려고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가시면서 스치는 봄바람에도 성령님의 기운을 느껴 보십시요.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공간 밖에도 계시고 공간 안에도 계십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성취된 언약안에 있는 성도들과 지금도 함께 계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교회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심> 열두 제자 중에서 디두모라는 별명을 가진 도마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다른 제자들이 있던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내가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분의 못박힌 곳에 찔러 보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못믿겠다”고 말했습니다. 26 일 주일 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시 그 집에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도마도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 때도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7 그리고는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에 찔러 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손으로 만져서 확인하고 믿겠다는 도마에게 주님은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도마의 손을 잡으시며 못 자국 난 부위를 찔러 보라고 하십니다. 초신자들의 경우 믿음을 깊이 생각해 보고 고뇌하는 시간들을 인내하며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자신의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확인시켜 주듯 믿음의 공동체는 믿음이 없는 이들을 정죄하는 장소가 아니라 믿을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실 도마의 주장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누구라도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흔들림 속에서 믿음을 깨닫게 되고 고뇌 가운데 믿음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 1898~ 1986)는 인간의 만남을 3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는 육체와 육체와의 만남입니다. 둘째는 마음과 마음의 만남입니다. 셋째는 영과 영의 만남입니다. 그는 일찌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홀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라며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한번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갑니다. 같이 이야기하며 놀다가 돌아왔는데 특별한 의미가 없는 육체적 만남이었습니다. 이후에 혼자서 선생님의 초대를 받아 갔는데 식사를 하며 선생님은 자기의 과거에 실수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존경하던 선생님께도 인생의 약점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마음의 문이 열리며 자기의 아픔도 이야기 하게 됩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난생 처음 위안을 받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마음과 마음의 만남입니다. 얼마후 그는 대학에서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때 선생님은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날 선생님은 그를 집에 초대해서 식사 후에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합니다. ‘폴 나는 오늘 밤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네’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이미 예수를 믿고 계신 줄로 알았는데요?” 했더니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오늘밤 예수를 내 구주로 영접하려고 하네” 하면서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폴 자네도 나와 함께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겠는가?” 이 물음에 그는 “예”라고 하게 됩니다. 그 밤에 함께 손을 잡고 고백하는데, 그때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면서 예수가 믿어지기 시작하였답니다. 이 만남이 바로 영과 영의 만남이었다고 폴 투르니에는 자신의 고백을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며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고뇌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부족한 이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채워주십시요.

말씀을 유심히 묵상하다 보니까 도마가 예수님을 만나는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40일 동안 새벽기도의 습관이 생겼을 것입니다. 이 습관을 지속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활절기와 성령강림 절기를 지나면 한해를 마치게 됩니다. 그렇게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일은 은혜의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도마의 별명은 디두모입니다. 그 뜻은 ‘이중성’’입니다. 도마의 이런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도마가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순간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습니다.” 도마 안에 고뇌, 의심은 사라지고 믿음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의심과 고뇌 두려움과 절망이 찾아 올때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 계심을 고백하십시요. 이것이 요한 복음의 결론입니다.

30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있는 곳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습니다. 31 그런데도 이 책에 있는 표적들을 기록한 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를 마치면서 부를 파송의 찬송가 4절 가사를 함께 고백하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땅 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04.02.2023 주일설교

(종려주일)

마지막 만찬

The Last Supper

마가복음 14:22-26

유민용 목사

막14:22 <마지막 만찬> 식사를 하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23 또 잔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잔을 주어, 제자들이 마셨습니다.2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쏟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2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실 그 날이 올 때까지는 결코 다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26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송을 부른 뒤, 올리브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22 As they were eating, Jesus took some bread and blessed it. Then he broke it in pieces and gave it to the disciples, saying, “Take it, for this is my body.”23 And he took a cup of wine and gave thanks to God for it. He gave it to them, and they all drank from it. 24 And he said to them, “This is my blood, which confirms the covenant[e] between God and his people. It is poured out as a sacrifice for many. 25 I tell you the truth, I will not drink wine again until the day I drink it new in the Kingdom of God.” 26 Then they sang a hymn and went out to the Mount of Olives.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40일 순례길도 이제 한주 남았습니다. 이제껏 함께 동행해 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리고, 참여하다가 멈추신 분들, 아직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도 고난주간 순례길은 지체들과 함께 동행해 주시길 권면 드립니다. 사랑하는 이의 격려가 평생 마음에 남는 것처럼, 어려울 때의 함께함이 든든함이 되는 것처럼, 우리 지체들에게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이 시간이 서로의 삶에 감사의 기억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대교 절기는 그들의 ‘삶의 일부’였습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해 주신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축제’ 였지요.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며 하나님이 애굽에서 해방시킨 이야기를 나눌 뿐 아니라 ‘이스라엘은 해방 된 민족이다’라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신앙을 격려하는 축제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유월절이 예수님에게 마지막 만찬의 자리인 것을 제자들은 알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매년 치뤄지는 이스라엘의 축제이고, 성대한 절기라고 생각했겠지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죽음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알아 차리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유월절 만찬에 어린양의 고기 없이 떡과 포도주를 먹을때 성만찬의 의미를 말씀해 주셔야 했습니다. 그 다음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주님을 보며, 최후의 만찬에서 보이지 않던 어린양의 실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만찬은 환호성을 부르는 경기장이기 보다 모두가 떠난 뒤에 텅빈 경기장이 주는 고요함이 더 맞으리라 싶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가 자신을 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18절에 보면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꼭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아니었어도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을 텐데   가롯유다는 스스로 뉘우칠 기회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떠난 마음에 선과 악을 구분할 분별력은 사라져 버렸고, 하나님의 계셔야 할 자리에 은30냥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세상이 움직이지만 신앙에 있어서 책임적인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말을 남겨놓은 글을 유언이라고 합니다. 유언은 사람이 죽어야만 말씀이 효력이 있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잘 살아가기 위한 웰빙(wellbeing)의 삶에 주목하지요. 그러나 성도들은 믿음이 성숙해져 가는 성화(聖化, 거룩하여짐)의 삶, 웰에이징(wellaging)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 밤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섬김의 본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후에 식탁의 자리에서 복음이 무엇인지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성찬을 통해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찬은 실제적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22-2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23 또 잔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잔을 주어, 제자들이 마셨습니다. 2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쏟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다락방 식탁에서 하신 말씀을 열거한 이야기들을 제정사(Institutuon narrative)라고 합니다. 성찬(Eucharist)이라는 유카리스트 단어는 ‘감사를 드린다’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는데, 성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고, 역사하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심을 보여주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예수께서는 빵과 잔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감사 기도를 하신 후에 떡을 떼고 잔을 부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 빵과 잔에 담긴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평소에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듯이 주의 만찬에 참여함으로 죄를 용서받고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매일을 살아있는 것도 생명을 주시는 분을 통해 생명을 얻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주님께서 유월절 만찬에서 행해진 이 의식은 그리스도교 예배의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 

설교는 듣는 것이고, 성만찬은 복음을 보여주는 의식입니다. 우리 교회의 상황상 매주 할 수는 없지만 우리교회는 종려주일과 세계성만찬주일날 성만찬을 통해 주님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교우들이 성찬에 초대됨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이지 더 분명하게 경험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번 성찬에 참여 하실때에는 ‘생명을 얻는다’는 말을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실 것임을 보여 주셨고, 이것을 ‘기념하고 기억하라’하셨습니다. ‘살아내라’는 의미입니다. 라틴어로 ‘이테 미사 에스트’(Ite, missa est)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 이제 예배는 끝났으니 세상으로 나가십시요’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양식이 되어 주셨으니 우리도 누군가의 양식 되어 주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Liturgy after liturgy” 즉, “예배 후의  예배”입니다. 주일예배 때 말씀을 듣고 난 뒤에 교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보여지는 예배가 시작됩니다. 진정한 예배는 교회 예배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고 연장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케임브리지 교우들이 매일을 살면서 ‘생명의 예배’가 더 분명하게 느껴지시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성찬에 참여하며 주님과 함께 걷고, 사는 경험을 보다 가깝게 느껴 보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빵, 잔 그리고 포도주의 의미를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이 가지고 있지 않는 다섯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Word, Water, Bread, Cup, Light 말씀, 물, 빵, 잔, 빛>입니다.” 오늘은 다섯가지 중에 빵과 잔 그리고 잔에 담긴 포도주에 대한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도 이것을 가지고 있지만, 거룩한 백성들은 이것이 은혜의 수단으로 현재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매일 성찬을 하지 않더라도 ‘떡과 잔’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장소가 거룩한 장소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지요. 이것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느끼는 감각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우리는 성찬식 가운데 ‘빵’을 먹습니다. 주님께서는 축복하시고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떼어’라는 헬라어는 ‘에클라센’입니다. ‘조각으로 부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요. 이 빵은 채찍질 당하실 때 떨어져 나가는 ‘주님의 몸’을 가르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창에 찔리실 때의 주님의 찢겨진 몸을 가르킵니다. 우리는 빵을 뗄 때에 주님의 찢긴 몸을 생각해야 합니다. 막14:3을 보면 “…주께서 앉아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매우 값진 감송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병을 깨뜨려 주의 머리에 붓더라”(KJV) 옥합을 깨뜨려 그리스도의 발 앞에 부었던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을 신실하다고 칭찬 하셨지요. ‘깨뜨려’로 표현하는 원어의 뜻도 ‘부수다, 산산히 깨뜨리다,’ 등으로 표현됩니다. 완전히 부수는 것입니다. 완전히 깨어져야 향유가 나오고 완전히 깨어져야 회개의 눈물이 쏟아집니다. 여러분과 제가 사랑하는 주님의 몸이 형용할 수 없이 깨어졌을 때 그의 보혈이 쏟아져 온 인류의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순종이 깨어져야 순종이 나오고, 불신이 깨어져야 믿음이 나옵니다. 불평이 깨어져야 감사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교만이 깨어져야 겸손이 나옵니다. 깨어지는 것은 일회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깨어지는 것입니다. 완전히 깨어지는 것은 완전히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다면 부활은 없었습니다.

두번째는 ‘잔’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 하셨습니다. 주님께 ‘잔’은 육체적 고통을 넘어 영혼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어라.”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요. “지금 나는 괴로워 죽을 것 같다. 여기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그리고 더 나아가 땅에 엎드려, 피할 길을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십시오.” 주님의 고통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겟세마네’라는 뜻은 올리브를 눌러 짜서 기름을 짜는 틀인데 ‘겟세마네’의 주님의 기도는 육체적 고통을 이기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 ‘잔’은 육신의 몸으로 달린 십자가 형벌의 고통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잔에 담긴 ‘포도주’입니다.

포도주는 숙성이 되면서 포도의 성분이 변화가 됩니다. 포도 알갱이를 으깨어 짠 포도는 오랜 시간 숙성되어 성분이 변화가 되지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은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고, 이기심이 변해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넘치는 곳에 믿고 뛰어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새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은 생명과 행복이 넘치는 장소입니다. 그곳은 빛과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내려 놓고, 마음에 섞여 있던 죄들을 말끔히 씻겨 버리십시요. 죄가 씻겨 질수록 부활의 생명은 더 선명해 집니다. 예수이 흘린 보혈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도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새하늘과 새땅을 미리 맛보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셋째로, 겨울이 지나고 나면 봄은 옵니다.

2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실 그 날이 올 때까지는 결코 다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26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송을 부른 뒤, 올리브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새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논’는 ‘이전 것 보다 더 나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장차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것 보다 더 좋고 새로운 것입니다. 이 땅에서 경험하는 성찬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혼인 잔치가 베풀어 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성찬은 종말의 축제를 앞당겨 즐기는 종교의식입니다. 종말이 축제인 이유는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서 축제의 잔치를 미리 앞당겨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만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누구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껴질 때에 세리와 죄인들을 식사의 자리에 초대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버거울 때에 하나님의 그 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명자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주님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혀 주시고 지속 할 수 있는 영양분을 공급해 주십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새힘이 필요한 우리에게 주님은 가장 좋은 길로 완전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인생의 추운 겨울 십자가 붙들고 다시 예배하고 믿음으로 나아갈때 인생의 봄날은 옵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며 세상으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로 다시 결단합시다. 성찬의 식탁에 참여하는 교우들에게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가 우리의 무뎌진 믿음 생활을 깨우고 삶의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진실한 마음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한일서4:7~11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는 서로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셨으며, 그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진실한 사랑이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 거룩한 성찬의 자리에 초대되었습니다. 십자가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의 교회에 가득 채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03.26.2023 주일설교

(사순절 메시지 5)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Conquer Evil By Doing Good

로마서 12:16-21

유민용 목사

16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마십시오.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사귀십시오. 스스로 지혜 있는 척하지 마십시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보기에 선한 일을 하십시오.
18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19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수 갚는 것이 나에게 있으니 내가 갚을 것이라.’”
20 여러분은 이렇게 하십시오. “원수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쉬운성경)

16 Live in harmony with each other. Don’t be too proud to enjoy the company of ordinary people. And don’t think you know it all! 17 Never pay back evil with more evil. Do things in such a way that everyone can see you are honorable. 18 Do all that you can to live in peace with everyone. 19 Dear friends, never take revenge. Leave that to the righteous anger of God. For the Scriptures say,“I will take revenge; I will pay them back,” says the Lord. 20 Instead,“If your enemies are hungry, feed them. If they are thirsty, give them something to drink. In doing this, you will heap burning coals of shame on their heads.” 21 Don’t let evil conquer you, but conquer evil by doing good.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새벽기도회에 참여하며 순례길을 걷고 있습니다. 순례길을 걷고 있음을 잊고 계시진 않으시죠?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계속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조각 난 마음, 상처 난 마음에 찾아가셔서, 깨진 마음의 틈으로도 생명의 빛을 비추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에게 ‘마음의 회복’과 “마음의 평안”을 주십니다.

오늘날 세상이 바라보고 싶은 교회의 이미지는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것이지요.영국 런던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리빙스턴을 비롯하여 엘리자베스 여왕, 음악가. 건축가, 시인, 정치가, 귀족 등 영국의 유명 인사들의 무덤이나 비석들이 그 사원 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영국에서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제일 먼저 방문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본래는 그런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자기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들을 확인하고 싶어하지만, 정작 그 예배당이 세워지게 역사하신 하나님께는 무관심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모습이 아닐까요? 로마서를 기록하던 시기에는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의 체계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세기를 거쳐 오면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신학적 체계가 형성 되었습니다. 감리교회는 성서와 이성과 전통과 경험이라는 4가지 표준을 삼고 신앙의 깊은 뿌리를 내렸습니다. 즉 ‘영적인 예배’라는 것은 ‘성서적 예배, 전통적 예배, 경험적 예배, 이성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영적인 예배’ 외에 다른 수식어를 붙이면 아직 낯설어 합니다. 사실 이 표현들은 대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경험’을 통해 회심 체험을 하게 하시고, ‘이성’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게 하시지요. 존 웨슬리는 기독교 관련 책들을 많이 읽었고, 200여권의 ‘고전’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표준이 됨은 더 말할 필요 조차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을 시작하며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롬 12:1) 여기서 영적(靈的)으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켄:λογικην’은 ‘로기코스 :λογικοσ’에서 나온 말로 그 뿌리가 ‘로고스:λογοσ’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reasonable인데, 즉 ‘합리적, 이성적’이란 뜻을 지녔습니다. 영적인 것은 곧 합리적,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성과 이성은 구분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지성이 차고 넘칩니다. 우리는 지성으로 ‘성서적 지식’을 채울 수는 있으나 ‘진리의 경험’까지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영적 경험은 이성적으로 성경을 탐구 하는 이들이 ‘성령을 통해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몸을 값진 제물을 드리는 것에는 ‘삶의 전인격’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의지, 소유와 능력, 감정과 재능까지 모두를 드리는 것입니다. 헬라어 몸을 뜻하는 ‘소마(σώμα)’는 ‘전인격’이라는 뜻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고 봉사하는 일은 삶 전체를 하나님과 연결해서 섬기는 삶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몸 안에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시고(고전6:19)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에(고전6:15) 전 인격적인 몸에 대한 자기 통제가 바로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롬12:1) 약한자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 חֶ֫סֶד 인’ 것이지요. 어떤 점에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은 쉽습니다. 때로는 교회에서 자존심도 살리고 명예심도 얻을 수 있고, 종교적인 위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삶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형식적으로 할 수 있지만 자기의 삶 전체를 드리는 일은 온전히 드려지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기독교 신앙을 철저하게 삶속에서 규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첫째로, 한마음이 되기 위해 스스로 지혜로운 척 하지 않는 것입니다.

16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마십시오.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사귀십시오. 스스로 지혜 있는 척하지 마십시오.

‘지혜’는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며, 악을 미워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고,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마음의 품을 내어주고, 스스로 지혜로운 척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은 스스로 지혜 있는 척 하지 않습니다. ‘Philosophy’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에서 사랑이라는 ‘Phileo’와 지혜라는 ‘Sophia’가 결합하여 구성된 합성어입니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다루는 가장 심도 깊은 학문으로 인식되는 ‘철학’은 본질적으로 ‘지혜를 사랑함으로 비롯된 학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믿는 자들에게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10:21)

‘지혜로운 사람’은 악을 멀리합니다. 인류의 시작을 보면 뱀이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에게 지혜를 약속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면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너가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부터 나온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도시 문명의 개척자가 아닙니까? 인류의 첫번째 영웅이었습니다. 가인으로 부터 도시문화가 세워지고, 인류의 정복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에는 ‘영웅이 아니라 실패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지혜의 열매였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한자라고 고백하는 의인을 통해 세상을 바꿔가십니다. ‘여러분은 영웅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 안에 머무르는 의인이 되기를 갈망하십니까’

우리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척 하면 안됩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서로에게 화를 내게 될 것이고,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요한 1서 3:5) 우리가 바라 보아야 할 길은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쏟으신 십자가의 물과 피입니다. 십자가에서 입증해 주신 사랑의 길 뿐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구원하신 ‘최고의 지혜’입니다.

성경은 뱀이 인간을 타락시켰다고 기록합니다. 요즘 보면 파충류과의 뱀이나 도마뱀을 반려동물처럼 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요. 고대 근동에서 뱀은 신처럼 떠 받드는 우상이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을 보면 뱀의 왕관을 썼지요. 성경에서 뱀은 사단을 상징합니다. 뱀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입니다.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 상태입니다. 머리를 치켜든 뱀이 이집트 왕 파라오의 왕관 정면을 장식하고 있는데, 뱀은 절대 왕권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섬겼던 태양신은 뱀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해 “네 손을 내밀어 뱀의 꼬리를 잡으라”(출4:4)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이 상징하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두려워 했던 모세였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뱀의 꼬리를 잡았더니, 그 뱀은 이집트의 왕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왕권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지팡이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지도력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언약의 지팡이’를 들고 계신가요? 성도들은 평생 ‘누가 왕인지의 싸움’을 하며 살아갑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며 살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에덴동산에도 사단은 들어와 유혹을 했습니다. 사단은 의인 욥도 공격했고 광야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도 시험했습니다. 사단은 믿음의 성도들의 삶에도 유혹 할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싶어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과 악의 선택 앞에서 형제를 미워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부부는 허락하신 배우자 외에 다른 이성들을 볼때에 선악과로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들도 죄가 들어올때마다 선악과를 떠올리며 은혜의 통치를 따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 달라고 말씀하셨지요.(마 6:13) 이것이 악에서 지지 않는 길입니다.

둘째로,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보기에 선한 일을 하십시오.

18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원수 된 이들을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어떠한 공로나 자격이 없음에도 선행적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부당한 일을 저지르고, 비방하고, 악담하고, 괴롭히는 누군가가 있다고 합시다. 격한 악이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반응을 일으키는 자가 바로 악이고, 악의 존재이며, 악한 구조입니다.

이 세상의 구조는 사람들의 일생이 칠흑 같이 어둠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둠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런 절망을 운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빛을 잃어버리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거짓, 돈의 유혹, 쾌락, 비방, 미움 등 수많은 죄의 요소들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악에 마음이 유혹되어 질 때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만일 세상의 방법데로 대응하거나 세상의 모습으로 대응하는 것은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조직적으로 악의 구조를 만들어 희생량을 만들고 악의 뜻을 이루려 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라면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가 생각이 나야 합니다. 누군가를 비방하고 싶을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마음이 불편해 져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은 입을 열어 화를 내지 말고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을 행한 이들이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고, 그에게 해가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믿음의 자녀들도 악인으로 만들려고 호시탐탐 우는 사자처럼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벧전 5:8)  오직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2천년 동안 믿음의 선배들이 기독교 역사 가운데 입증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선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은 악이 더 강해 보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선한 마음을 품고 더불어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평화를 뜻하는 샬롬은 ‘완전하다, 온전하다’라는 뜻을 지닌 ‘실람’이라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실람’이라는 동사의 의미는 “지불하다, 빚을 갚다”는 뜻인데, 성경에서 샬롬의 의미를 보면 평화의 뜻 외에도 ‘구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죄를 짓는 사람은 빚을 지고 있는 상태이니까 평안이 없고, 구원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과 화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에도 화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성도들이 따라야 하는 명령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는 말씀을 믿으며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는 것이 악에 대해서도 가볍게 여기고 그냥 넘겨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악은 우리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고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것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롬 12:19을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악에 대해 심판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악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내가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명령은 “맡기라”입니다.

캐나다의 한 커피숍 Faraday Café는 휴대폰 신호를 차단하고 교란시키기 위해 지어졌으며 무선 “블랙홀”을 의도적으로 생성하려고 시도한 세계 최초의 카페였습니다. 소유자는 엔지니어와 협력하여 상점 주변에 외부 신호를 차단하기 위해 패러데이 케이지로 알려진 것을 만들었습니다. 소유자인 줄리안 토마스(Julien Thomas)는 디지털 기술이 너무 빨리 발전하여 사람들이 사용에 대한 에티켓이나 윤리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실제로 없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토마스는 고객이 지속적인 인터넷 연결 없이도 일상생활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생각마져 너무 빨라졌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로 부터 나쁜 말이 끊어져야하고, 흘러다니는 죄가 끊어져야 합니다. 마치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했던 것처럼 우리의 텅빈 마음안에 들어오는 우울과 불안, 근심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세번째, 하나님은 이해 할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20 여러분은 이렇게 하십시오. “원수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으라 말씀합니다. “원수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는 것”입니다. 즉, ‘숯불을 머리에 쌓는다’ 라는 말은 성도의 친절한 행위가 원수로 하여금 심적 고통을 느끼게 하여 회개케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교만이 있고, 피속에 욕망과 복수심을 향한 끌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복수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네 손에 피를 묻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 뿐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공식들이 있습니다. ‘성공의 법칙’ ‘공부의 비결을 통해 명문대 들어가기’ ‘세상의 모든 공식’ ‘수학자를 알면 공식이 보인다’ 이뿐만이 아니라 요즘에는 음식을 만드는 레시피 공식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지요. 수많은 인생의 비법을 알려주는 공식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만큼 세상이 빠르게 변화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식이 있습니다. 이미 증명된 공식이며, 수천년 동안 변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았던 공식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벌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깊은 웅덩이 속으로 떠밀어 넣으셨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신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공식’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는 문제를 세상의 공식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성령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는데 더 이상 성령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전문성과 방법을 의지할 때에 그 순간 교회의 기능이 끝이 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적어도 세상의 가치와 상식을 뛰어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굴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의 역사를 아십니까? 얼마전 한 교우가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기도제목이 생각나면 함께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1세기 교회로 시간 여행을 해보니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삶에 녹아 든 복음, 일상과 일치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 후에 교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삶의 예배는 시작이 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세상에서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끼십니까? 십자가는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능력이 없습니다. 여러분 주위를 둘러 보세요.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서로의 삶을 나누며 돕고 베푸는 사람들이 케임브리지 교회를 통해서 많이 배출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미련하고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이 찬양의 가사를 함께 읽으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작은 나를 부르신 뜻을 나는 알 수 없지만 오직 감사와 순종으로 주의 길을 가리라

때론 내가 연약해져도 주님 날 도우시니 주의 놀라운 그 계획을 나는 믿으며 살리

날 부르신 뜻 내 생각보다 크고 날 향한 계획 나의 지혜로 측량 못하나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완전한 길로 오늘도 날 이끄심 믿네